365일 말씀묵상
1월 1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5)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시작과 끝
Der Tag ist die Grenze unsers Sorgens und Mühens. Er ist lang genug, um Gott zu finden oder zu verlieren, um Glauben zu halten oder in Sünde und Schande zu fallen. Darum schuf Gott Tag und Nacht, damit wir nicht im Grenzenlosen wanderten, sondern am Morgen schon das Ziel des Abends vor uns sähen.
하루는 우리의 근심과 수고의 경계이다. 하루는 하나님을 찾거나 아니면 잃어버리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다. 믿음을 붙들거나 아니면 죄와 수치 속으로 빠지기에 또한 충분히 긴 시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낮과 밤을 만드셔서 우리로 하여금 경계를 잃고 방황하지 않고, 아침에 이미 밤이라는 목적지를 보게끔 하셨다. (디트리히 본회퍼의 매일을 위한 말씀 중 1월 1일자)
디트리히 본회퍼의 글은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로 하여금 미리 한해의 마지막 날을 생각하게 한다. 올 한해 우리 각자가 가지는 소망, 계획 등의 결과를 미리 생각하고 기대하며 첫 날을 시작하도록 마음가짐을 분명하게 해준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히브리서의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조화롭고 질서 있게 창조하셨다. 어두움 가운데서 빛을 창조하시고 낮과 밤, 사시사철을 정하시고 시간의 경계를 구분하셨다. 한 해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시간의 경계를 정해주시고, 다시 또 출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에 감사하며 올 해의 마지막 날을 미리 바라보며 한 해를 살아가자.
1월 2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창세기 1:26-31)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8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 째 날이니라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믿음의 대전제, 고백, 선포의 말씀이고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태에서 빛을 창조하셨다. 신앙적 의미로 혼돈과 어둠은 거듭나지 못한 영혼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무질서하고, 허물과 죄로 인해 죽은 상태에 있는, 영적 생명이 없는 상태에 있는 인생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빛으로 오셨다. 태초에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세상이 복음의 빛으로 충만해지기를 원하시고, 모든 사람이 그 빛을 가지고 누리기를 원하신다. 기독교인이 세상에서 빛이 되어서 혼돈된 곳에 질서와 조화를 이루고 그리스도의 빛을 세상 가운데 비추며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자연만물을 다스리도록 관리자의 역할을 맡겨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올 한 해를 살아갈 때 늘 기쁨과 평안 가운데, 자존감을 가지고 힘 있게 나아가기를 원하지만 때로 자신의 약한 모습, 부족한 점을 보고 실망하며 낙심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임을 기억하자.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 자신의 속성, 자신의 성품을 따라 만들어주신 것을 기억하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아하셨음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존감을 반듯하게 세워가자.
1월 3일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하나님 (창세기 2:1-7)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4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안식일을 구분하신 이유
창세기 1장은 전 우주적 맥락에서 창조사역을 기록한 반면 2장은 특별히 에덴동산과 인간의 창조에 중점을 두고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반복하여 기록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정점이 인간에게 있음을 알려준다.
하나님은 6일 동안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일곱 째 날에 안식하셨다. 모든 창조 사역을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 완성하고 창조의 종결로써 안식을 취하신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실상 휴식이 필요하신 분은 아니다. 그러나 6일 간에 걸친 창조사역과 하루의 안식을 통해 우리들에게 일과 휴식의 리듬을 정해주셨고, 일곱 번째 날을 복되고 거룩한 날로 구분하셔서 하나님 안에서 쉼을 누리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6일간의 창조사역을 마치시고 7일에 안식하신 것 같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도 6일 동안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실하게 일하고, 7일에 안식을 취하는 것이 올바른 삶의 방식이다.
안식일은 단순히 육신이 쉬는 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신 복을 생각하며, 스스로 거룩하게 하는 일에 힘씀으로써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자신과의 관계를 점검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자로서의 삶의 자세를 점검하는 날이다. 하나님께서 이 날을 거룩하게 구분하시고 복 주신 이유는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가다듬는 날이기 때문이다.
1월 4일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창세기 2:8-17)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10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하나님은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만드시고 그곳에 아담과 하와를 살게 하셨다.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셨는데 동산 가운데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 동산에 있는 각종 나무의 열매는 마음대로 먹을 수 있으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흔히 사람들은 하나님이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들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했느냐고 질문한다. 에덴동산에 있던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무엇이었을까?
생명나무는 그 열매를 지속적으로 먹으면 육신의 생명을 강건하게 해주어서 삶을 영존시킬 수 있는 특별한 나무이다. 영적인 의미로는 이것을 먹을 때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징표이다. 또한 생명나무는 이후 타락한 인간의 영적 생명의 회복을 위해 세상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을 제공해주는 것으로, 판단하고 자랑하며 교만하게 하여 영적인 죽음으로 이끌어가는 육신적 세상을 의미한다.
동산에 있었던 두 나무는 하나님이 인간을 스스로 사고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며,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지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셨음을 보여주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하며 살아야 하는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1월 5일
사탄의 유혹 (창세기 3:1-7)
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는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알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불순종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시면서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성숙한 인격으로 발전해가기를 원하셨다.
사탄의 도구가 된 뱀은 교묘하게 하와의 마음을 떠보았다. 하나님이 정말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했느냐고 살짝 바꾸어 묻는 사탄의 질문에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말을 더하였다. 하나님은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하와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고 대답하였다. 하나님은 그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으나 하와는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다고 대답하였다.
하와의 마음 상태를 알아챈 사탄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고 하며 적극적으로 하와를 유혹하였다. 하와가 사단의 유혹에 마음이 끌려 그 나무를 보았을 때 정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하였다. 요일2:15-17의 말씀대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하와의 마음을 지배한 것이다.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생각을 더하여 말씀을 변질시켰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인간의 생각을 첨가하여 변질시킬 때 사단이 개입하여 죄가 들어온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는 육신의 눈이 밝아져 자신들이 벌거벗은 것을 보게 되었으나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영적인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불순종의 결과는 영적 죽음이다.
1월 6일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3:8-13)
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나님의 질문
사탄은 하와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을 일으켰고,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였으며, 거짓말로 속이는 과정으로 인간을 죄의 길로 유혹하였다.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인간은 즉각 내적인 순수함과 영화로움을 상실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하나님과 교제할 마음을 잃게 되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숨었다. 죄의식과 두려움, 수치심은 그들이 이전에 기뻐하였던 하나님과의 교제를 깨뜨렸다.
나무 사이에 숨어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어오셨다. 아담이 어디 있는지 장소를 묻는 것이 아니라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하나님은 비록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 죄를 지었지만 이들이 자신의 현 상태를 깨닫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무 사이에서 하나님 앞으로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담을 부르셨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지 않았을 뿐더러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죄를 더하였다.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하나님께 불순종한 책임을 회피하려고 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하시면 나는 어디에 있다고 대답할 수 있을까? 행여 신앙적으로 옳지 못한 자리에 있다면, 잘못된 생각이나 잘못된 삶의 방식에 매여 있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자리로 나아가자!
1월 7일
가죽옷을 입혀주신 하나님 (창세기 3:20-24)
20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구원
뱀은 하와에게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라고 말하며 죄의 길로 유혹하였고, 하나님과 같아지기를 원하는 교만이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오늘날에도 우리들을 괴롭히고 또 쉽게 넘어뜨리는 유혹은 교만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로 공동체의 관계에 장애가 생겼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다른 피조물 사이에 죄가 개입하여 장애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육신의 눈이 밝아져 자신들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게 되고 수치심을 느껴 나뭇잎으로 몸을 가린 아담과 하와를 위해 짐승을 잡아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혀주셨다. 가죽옷은 죄를 지은 인생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표현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직접 피를 흘리고 구원해주실 것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다. 낙원에서 추방된 것이 영원한 조치는 아니었고, 가죽옷으로 상징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를 예비해주셨다. 이로 인해 인간은 새로운 낙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성경에서 옷은 흔히 구원을 상징한다. 집을 나가 방탕하게 살던 아들이 돌아오자 아버지는 그에게 죄에 찌든 더러운 옷을 벗기고, 깨끗한 옷을 입혀주었다(눅15:22).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이 세상을 살아가라고 말씀하신다.
1월 8일
가인과 아벨 (창세기 4:1-8)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진정한 예배
아담과 하와가 낳은 첫째 아들 가인은 농사를 지었고, 둘째 아들 아벨은 양치는 일을 하였다. 농사를 짓던 가인은 땅의 소산을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고, 양을 키우던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제물삼아 예배를 드렸다.
하나님은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셨고, 아벨의 예배는 받으셨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예배는 받으신 것이 비단 드려진 제물의 차이에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두 사람의 일상의 삶의 태도가 달랐을 것이고 예배를 드리는 자세가 달랐으리라는 것을 ‘아벨과 그의 제물’, ‘가인과 그의 제물’이라는 성경 기록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가인이 하나님께 책망을 들었을 때 그는 자신의 잘못된 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삶의 모
습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예배자로 회복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핑계하며 회개의 기회를 놓친 아담처럼 가인도 회개할 기회를 놓치고 분노로 인해 동생을 살인하는 더 큰 죄를 범했다.
‘받으신다’ 혹은 ‘열납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 원어의 뜻은 ‘응시하다, 주목하다’이다. 하나님께서 가치 있는 것으로 주목해서 보시고 기꺼이 받아들이셨다는 뜻이다. 올 한해 우리가 드리는 예배, 나아가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서 주목하시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주시는 진정한 예배가 되기를 소원하며 살아가자.
1월 9일
가인의 계보 (창세기 4:16-22)
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산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18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19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0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가인의 길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에 지지 말고 죄를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으나 가인은 죄를 다스리지 못했다. 창세기 4장7절에 ‘죄’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나온다.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 활 쏘는 사람이 표적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성경적 개념의 죄는 하나님의 뜻에서 빗나간 인간의 모든 행동이나 마음 상태에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가인은 이후 놋 땅에 거주하며 아들 에녹을 낳았다. ‘놋’은 ‘흩어지는 것’, ‘방랑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가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영적으로 하나님과 멀어져 방랑하였음을 말해준다. 그곳에 성을 쌓고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성이라고 불렀다. 에녹은 ’창시‘라는 뜻으로 이곳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겠다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었지만 불행하게도 이 새로운 출발은 하나님 없는 출발이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가인의 자손들은 매우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야발은 목축기술을 발전시켰고, 유발은 음악을 창시했으며, 두발가인은 금속산업을 처음으로 시작했다. 가인의 가문, 그가 세운 도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가인의 자손들은 문명을 발전시키는 놀라운 성과를 이루었으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타락의 역사를 이어갔다.
현대의 놀라운 문명의 발전도 인간의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만을 이끌어낸다면 본질 상 가인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고도로 발전된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행여 가인의 길을 따라가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점검해보자.
1월 10일
아담의 또 하나의 계보 (창세기 4:25-5:8)
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5:1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6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 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신실한 믿음을 이어가는 가문
창세기 4장 25절부터 5장 마지막까지 또 다른 인류의 족보가 기록되는데, 이 족보는 아담의 신실한 자손들을 기록함으로서 타락과 죄악으로 얼룩진 인간 역사의 진행과정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신실한 믿음의 자손이 보존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담과 하와가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가인의 자손들이 육신을 따라 욕심과 교만, 자랑을 이끌어 내는 세속 문화를 세워가는 동안 셋과 그의 자손들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을 드리며 거룩하고 경건한 삶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갔다. 가인의 자손들은 자신들이 이룩한 문명의 힘을 의지하고 살았으나 셋의 자손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았다.
가인의 자손들의 계보에는 나이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5장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셨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노아에까지 이르는 아담의 세 번째 아들 셋의 자손들이 이 땅에서 몇 살까지 살았는지 알려주고 있다. 악인들의 생애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연수를 계수할 가치가 없으나 신실한 자손들의 삶은 연수를 계수할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오늘 우리는 어떤 가문을 이어가기를 원하는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았던 셋의 자손들처럼 신실한 믿음의 가문을 이어가기를 소원하며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자.
1월 11일
노아의 방주 1 (창세기 6:9-22)
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10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11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14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15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 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19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 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 하였더라
하나님의 기다리심과 노아의 순종
여호와 하나님은 부패한 세상을 새롭게 하실 계획을 세우시고, 노아를 택하셨다. 노아가 그 타락한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것을 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세상을 멸하실 날을 대비하여 배를 만들라고 말씀하시고, 배의 크기와 모양을 상세히 지시하셨다. 알려주신 배의 크기는 길이 171미터, 넓이 28미터, 높이 17미터 가량이었고, 그 구조는 물 위에 안정되게 떠 있게 하는 가장 과학적인 구조라는 것이 1800년대 중반 영국의 조선술을 통해 입증되었다.
노아는 120년 동안 배를 만들었다. 120년의 긴 세월은 노아 가족이 다른 사람이나 기계의 조력 없이 그 큰 배를 만드는데 필요한 시간이었을 수도 있겠으나, 하나님이 죄악을 심판하실 것이니 돌이켜 회개하라고 기회를 주시며 기다리신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노아가 마른 땅 위에서 묵묵히 오랜 세월 그 큰 배를 만드는 모습은 하나님의 계획과 타락한 백성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주는 표징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노아를 비웃고 조롱하였다.
오늘날 흔히 교회를 배에 비유한다. 배는 물 위에 떠 있으나 물과는 분리되어 있다. 배에 물이 들어오면 배는 침몰하고 만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으나 모든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고 세상의 죄악을 막아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배와 같은 교회의 역할, 배를 만드는 노아의 심정과 역할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보자.
1월 12일
노아의 방주 2 (창세기 8:13-9:1)
13 육백일 년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서 물이 걷혔더니 14 둘째 달 스무이렛날에 땅이 말랐더라 15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6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 오고 17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20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9:1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새로운 세상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배를 만든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모든 짐승들이 그 종류대로 암수 둘씩, 혹은 일곱씩 배에 들어간 후 하나님은 직접 배의 문을 닫으셨다. 배의 문이 닫힌 후 7일이 지나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홍수는 40일 간 계속되어 모든 높은 산이 다 잠기고 땅에 있는 숨 쉬는 생명체는 다 죽었다. 대홍수 가운데 구원받아 살아남은 사람들은 결국 노아의 가족 8명뿐이었다.
인류 역사 초기에 대홍수가 있었다는 기록은 성경 뿐 아니라 동서양의 다른 문명의 고대 문서들에
도 기록되어 있어 노아 시대의 대홍수 사건의 역사적 사실성을 의심할 수 없게 만든다.
노아와 그 일행이 배 안에 있었던 기간은 1년 10일이나 된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방주에 들어간 노아는 홍수가 그치고 지면에 물이 걷힌 것을 확인한 이후에도 하나님의 지시가 있기 까지 57일을 더 기다린 후에야 방주에서 나왔다. 이들이 1년 이상 배 안에서만 생활하다가 밖으로 나와 다시 만난 세상은 어떠했을까?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공의의 심판에 전율하며, 자신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여 구원해주신 은혜에 감격하여 제단을 쌓고, 정결한 새를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예배드렸다. 하나님은 그 예배를 기쁘게 받으셨다. 노아의 믿음과 순종을 기쁘게 받으신 것이다.
타락한 옛 세상은 장사되었고, 노아와 그 가족은 새 생명으로 부활하였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새로운 세상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복을 주셨다.
1월 13일
바벨탑 건설 (창세기 11:1-9)
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이 시대의 바벨탑
대홍수를 통하여 인간의 불순종과 타락을 심판하신 하나님은 노아의 세 아들인 셈과 함과 야벳으로 하여금 새로운 세상을 이어가게 하셨다. 사람의 생각하는 것이 어려서부터 악함을 하나님이 아시기에 이제 다시는 인간의 죄로 인해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하시며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다.
타락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를 경험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세로 살아야 마땅했으나 급속도로 번성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면서 다시금 하나님을 대적하였다. 하나님의 힘에 대항할 수 있는 통일된 하나의 세계 왕국을 건설하고자 시날 평지에 거대한 탑을 짓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탑 꼭대기를 1. 하늘에 닿게 하여 2.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3.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려고 하였다. 즉 하나님처럼 되고, 스스로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고, 한 곳에 모여 강력한 하나의 나라를 세우고자 계획하였다. 마침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이들을 온 지면에 흩어놓으셨다.
바벨탑 사건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모든 인간의 노력은 성공할 수 없으며, 불행을 가져올 뿐임을 알려준다. 거대한 문명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그 옛날 조상들이 쌓다가 실패한 바벨탑을 다시 쌓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1월 14일
아브람의 이주 (창세기 12:1-5)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니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 였더라 5 아브람아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너는 복이 될지라
창세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11장까지의 전반부는 창조, 타락, 홍수, 바벨탑 사건의 중요 4개 사건을 다루는 전 인류적인 기록이다. 12-50장까지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에 이르는 4명의 중요 인물을 다루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이루어가는 과정에 이들이 어떻게 쓰임 받았는지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교만해져 바벨탑을 쌓던 세대 속에서도 믿음을 이어가는 의인의 계보인 셈의 가계를 기록하면서, 셈의 가문에서 하나님께서 택하여 그의 기업으로 삼으신 아브라함이 태어난 것을 알려준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와 그 가족들이 살던 갈대아 우르는 어떤 곳이었을까?
우르는 티그리스와 유브라데스 강 사이의 남쪽에 위치한 비옥한 지역인데, 상업, 천문학, 점성술이 발달하였고, 뛰어난 고대문명과 아울러 우상숭배가 성행하였다. 지금의 터키 북부지역이다. 우르는 또한 수메르 제국 전체에 막강한 힘을 행사하던 도시국가였는데 도시 북쪽에 마치 바벨탑을 연상시키는 3층의 거대한 탑 모양으로 지어진 신전이 있었다.
세상적으로 볼 때 아브람이 이런 풍요한 곳에서 황량한 팔레스틴으로 향했던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복을 주시고 창대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면서 오히려 안락하고 부요한 곳을 떠나라고 하셨다. ‘너는 복이 될지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떠난 아브람의 믿음이 진정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1월 15일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창세기 12:5-9)
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예배하는 삶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75세에 고향을 떠나 마침내 가나안 땅 세겜이라는 지역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 땅을 아브람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재차 약속하셨고, 아브람은 약속의 땅까지 무사히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 이후 아브람은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가 장막을 치고 그곳에서도 여호와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가는 곳마다 자신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믿음을 보여주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그들에게 고향과 같았던 번성하고 풍요로운 도시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고자 하였는데 하란에 이르러 거기서 거주하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데라가 죽은 후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역사는 단시일 내에 이루어지는 것도 있고, 시작부터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다. 아브람의 가족은 이미 아버지 데라 때부터 가나안을 향해 이주해가는 중이었다. 데라가 무엇을 생각하고 옮겨갔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의 아들 아브람의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계획을 보여주셨다. 아브람은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그네 인생길을 가면서 가는 곳 마다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예배하는 삶을 살았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1월 16일
아브람에게서 분가한 조카 롯 (창세기 13:5-13)
5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6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7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11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13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잘못된 선택
하나님께서 복 주심으로 인하여 아브람과 롯은 새로 이주한 땅에서 소유가 많아졌다. 그들이 머물고 있는 땅이 그들의 소유에 비해 좁아 아브람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분쟁의 외적인 이유는 부의 증가에 있었으나 내적인 원인은 롯의 불신앙과 세상적인 욕심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카 롯과 평화롭게 지내기 위해 고심한 아브람은 서로 헤어질 것을 제안하고 조카에서 거주할 땅을 먼저 선택하도록 양보하였다. 인간의 도리로 볼 때 롯은 일찍 아버지를 여읜 자신을 아들처럼 돌보아 준 삼촌 아브람에게 거주할 땅을 먼저 선택하도록 양보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마음의 갈등 없이 자신이 거주할 곳으로 요단 지역을 선택하였다. 그곳은 물이 넉넉하여 애굽 땅과 같이 풍요롭게 보였고, 모든 육신적 요구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곳으로 보였다.
롯이 선택해서 옮겨 간 곳은 이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타락과 멸망의 성 소돔이었다. 롯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았더라면 소돔 땅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곳임을 의식했을 것이고, 그곳을 자신의 거처로 삼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롯은 육신의 눈으로 거주할 곳을 택하고, 육신을 따라 행하여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고, 아브람은 영을 따라 행하며 하나님께로 점점 더 가까이 나아갔다. 롯의 잘못된 선택이 우리들에게 분명한 교훈을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때로 롯과 같이 잘못된 선택을 한다.
1월 17일
아브람을 축복한 멜기세덱 왕 (창세기 14:14-20)
14:14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 16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 17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십분의 일
아브람과 조카 롯이 서로 헤어져 각자의 삶의 터전을 잡아가고 있던 중 가나안 지역 남쪽의 나라들과 북쪽의 나라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롯과 그의 식솔들이 모두 사로잡히고 재물도 다 빼앗기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아브람은 자기가 기르던 군대를 동원하여 사로잡힌 조카와 그 식구들을 다 구해내고 빼앗긴 재물도 도로 찾아 왔다.
아브람이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살렘 왕 멜기세덱이 나와 아브람을 맞이하였다. 살렘은 ‘평강’이라는 뜻이며 예루살렘의 옛날 지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의 왕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아브람과 그의 병사들이 기운을 회복할 수 있게 해주었다. 히브리서는 멜기세덱 왕을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라고 기록하고 있다.
멜기세덱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아브람을 축복하자 아브람은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다.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첫 번째 십일조 예물이다. 아브람은 전쟁에서 이긴 것이 단지 조카 롯을 구한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서 아브람의 영향력을 확대해가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임을 깨닫고, 이에 감사하는 믿음의 표현으로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예물을 드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우리의 삶을 세밀하게 계획하고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드리는 것이고,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1월 18일
아브라함의 변론 (창세기 18:22-33)
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23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여 하시나이까 24 그 성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2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27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28 오십 의인 중에 오 명이 부족하다면 그 오 명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온 성읍을 멸하시리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사십오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 32 ...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3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의인을 찾으시는 하나님
아브람이 99세 되던 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찾아오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여종 하갈에게서 아들 이스마엘을 낳은 것을 상기시키며 회개하도록 책망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을 재차 확인해주시면서 언약의 증거로 아브람(‘고귀한 아버지’라는 뜻)의 이름을 아브라함(‘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바꾸어주셨다.
아브라함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이 진행되고 있는 반면 소돔과 고모라에서는 타락과 죄악이 극심해지고 있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음을 알려주시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소돔성에 있을 의인을 악인과 함께 심판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맞는 것인지를 질문하며 끈질기게 용서를 간구하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간구한대로 그곳에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소돔 성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킬 의인 열 명이 없었다. 소돔 성이 멸망한 이유는 그 성에 만연한 죄악 때문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거두시게 할 최소한의 의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은 그 옛날 소돔 성과 같이 불의하고 타락하여서 하나님의 심판 앞에 놓여 있고, 소돔 성에서 의인을 찾으시던 하나님의 눈은 지금 이 시대에서도 의인을 찾고 계신다. 우리 각자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아브라함처럼 기도해야할 뿐 아니라 이 시대를 구할 한 사람의 의인으로 살아야 할 거룩한 책임이 있다.
1월 19일
소돔 성의 멸망 (창세기 19:20-29)
20 보소서 저 성읍은 도망하기에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를 그곳으로 도망하게 하소서 ... 21 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 네가 말하는 그 성읍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22 그리로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을 소알이라 불렀더라 23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 24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25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26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27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서 있던 곳에 이르러 28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지역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 가마의 연기같이 치솟음을 보았더라 29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롯의 아내
하나님이 타락한 소돔 성을 심판하실 때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가족들을 심판의 대상에서 제외시키셨다.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할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빨리 성을 떠나라 하였으나 재물에 욕심이 많았던 롯은 즉시 떠나지 못하고 지체하였다.
천사가 소돔에서 떠나기를 주저하는 롯과 그의 아내,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었고, 그들이 소돔 가까이 있던 소알 성에 다다르자 하늘로부터 유황과 불이 비같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뒤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지 말라는 천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롯의 아내는 소돔에 남겨놓은 세상적인 것들을 연연해하며 뒤를 돌아보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 온 지역을 심판하시는 장면을 목격하였기 때문에 소금기둥이 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이 직접 행하시는 일을 인간으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영역과 사람의 영역을 분명히 구분해놓으신 것이다. 천지만물을 모두 창조하신 후 사람을 만드셨고, 노아의 홍수 때에도 방주 안에 들어간 노아의 가족들은 홍수가 지상의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것을 볼 수 없었다.
롯이 소돔 성의 멸망 중에도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와 심판 가운데서도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우리도 서로를 위해 기도하기를 힘쓰고, 세상에 마음을 두어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롯의 아내와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1월 20일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 하나님 1 (창세기 22:1-8)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 2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주신 곳으로 가더니 4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꼐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아브라함의 순종
아브라함에게 큰 시험이 닥쳤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람(고귀한 아버지)의 이름을 아브라함(열국의 아버지)이라고 바꾸어주시며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리라고 하셨는데 백세에 낳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제물로 드리라고 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 항의할 수밖에 없는 명령이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명령에 아브라함은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그는 말씀하신대로 행하기 위해 지체하지 않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길을 떠났다. 아들을 번제를 드리라고 지시하신 곳은 집에서부터 사흘 길이나 되었다. 사흘 길을 가는 동안 인간 아브라함의 마음은 고통과 갈등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나 그 길에서 돌이키지 않고 나아갔다. 목적지에 다가갔을 때 그는 종들에게 말했다.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나님의 약속이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질지 알 수 없었으나 하나님이 반드시 자신의 약속을 지키실 것을 믿었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삭을 돌려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종들에게 아들과 함께 돌아오리라고 말할 수 있었다.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에게도 때로 이런 시험이 닥친다. 시험이 닥칠 때 하나님께 순종할지 자신의 뜻을 따를지는 우리의 선택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도록 가르치시기 위해 우리가 집착하거나 신뢰하는 것들을 떠나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기를 원하신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세상을 향해 서 있지 말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해 서 있기를 원하신다. 아브라함은 신뢰와 순종을 통해 이 큰 시험을 통과하였다.
1월 21일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 하나님 2 (창세기 22:8-14)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셨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호와 이레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일러주신 곳에 도착하였다. 아들을 결박해서 나무를 쌓아 만든 제단 위에 올려놓을 때까지도 하나님이 일하시는 아무런 징조가 보이지 않았다. 이삭은 이때 이미 20세가량 된 장성한 청년이었다.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려고 하는 상황이 파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살기 위해 아버지에게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따르는 이삭 또한 아버지 못지않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순종을 확인하신 하나님은 극적인 순간에 아브라함을 저지시키셨고, 아브라함은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 숫양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아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숫양을 예비해놓으신 그 땅을 여호와 이레(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라고 이름 지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는데,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지정해주신 땅과 거기에 관련된 약속을 멀리서 볼 뿐만 아니라, 그 약속을 성취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본 믿음이었다. 약속은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나 약속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은 바로 곁에서, 가까이에서 일하고 계심을 보고 느끼는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순종할 수 없는 일에 순종하였다. 즉각적이며 미루지 않고 기꺼이 행하는 순종은 우리들이 신앙생활에서 가져야 할 중요한 자세이다. 그러한 믿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도 매일의 삶 속에서 ‘여호와 이레’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1월 22일
하나님의 맹세 (창세기 22:15-19)
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19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
복음 - 복된 소식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삭은 백세에 얻은 무엇보다 귀한 아들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아들보다 하나님의 명령을 더 중요하게 여겨 그 명령에 순종하는 믿음을 보이자 하나님은 스스로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시며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네 씨’는 단순히 아브라함의 육신적 후손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나아가 아브라함의 계보에서 태어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가 대적 사탄을 이기고 그 성문을 차지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고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아지리라는 하나님의 구원계획, 곧 복음을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셨다.
히브리서는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거류하며…’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그가 이전에 살았던 갈대아 우르나 하란과는 대조적인 척박한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나그네와 같이 살았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선택에 신뢰로 응답하였다. 하나님께 대한 굳건한 신뢰가 있었기에 이 땅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았고, 복음의 소망 가운데 그는 미래 속에서 살았다.
1월 23일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여긴 에서 (창세기 25:27-34)
27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28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29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32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잘못된 거래
이삭과 결혼한 리브가는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을 낳았다. 하나님은 에서와 야곱이 태중에 있을 때부터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고 리브가에게 말씀하셨다. 장자의 권한을 중요시하는 당시 이스라엘의 관습으로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었지만 선택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능력이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알려준다.
쌍둥이 중 첫째는 털이 많아서 에서(털보)라고 이름지었고 후에는 팥죽과 연관되어 에돔(붉다)이라
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둘째는 첫째의 발꿈치를 붙잡고 마치 그를 붙들어 넘어지게 하는 듯이 태어나서 야곱(발꿈치를 잡는 사람, 속이는 자, 빼앗는 자)이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불행하게도 에서는 영적인 인식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분명 그의 부모는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을 가르쳤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귀하게 여기기보다 세상의 것들, 육신적 필요를 채우는 것을 더 중요시하였다. 그 결과 일시적 배고픔을 채워 줄 음식을 위해 장자의 명분을 팔라고 하는 야곱의 제안을 쉽게 받아들였다. 야곱 또한 자신을 실제적인 장자로 삼겠다고 하신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을 친히 이루어주실 것을 확신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꾀로 장자의 권리를 얻고자 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에서와 야곱의 거래는 영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방법과 사람의 방법을 구분하지 못한 잘못된 거래였다. 이로 인해 얼마나 오랜 세월 견디기 힘든 고난이 야곱에게 주어졌는지 기록한 성경말씀은 오늘 날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준다.
1월 24일
리브가의 계략 (창세기 27:1-10)
1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이르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2 이삭이 이르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니 3 그런즉 네 기구 곧 화살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서 먹게 하여 내가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5 이삭이 그의 아들 에서에게 말할 때에 리브가가 들었더니 에서가 사냥하여 오려고 들로 나가매 6 리브가가 그의 아들 야곱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아버지가 네 형 에서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으니 ... 8 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하라 내가 네게 명하는대로 9 염소 떼에 가서 거기서 좋은 염소 새끼 두 마리를 내게로 가져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아버지를 위하여 그가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리니 10 네가 그것을 네 아버지께 가져다 드려서 그가 죽기 전에 네게 축복하기 위하여 잡수시게 하라
영적으로 어두워진 가정
이삭은 쌍둥이 아들 중 형인 에서를 더 좋아하였고, 리브가는 동생인 야곱을 더 좋아하였다. 야곱에게 장자의 복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에서를 편애하던 이삭은 에서를 축복하고자 하였다. 이삭은 육신의 눈이 어두워졌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어두워져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했다. 야곱을 편애하던 리브가 역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상황에서 인간의 계략을 썼고, 평소 장자권의 상속을 사모하던 야곱은 어머니의 계략을 따라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에서를 축복하려던 아버지의 축복을 자신이 받았다.
하나님께서 오래 전 리브가에게 계시해주신 것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성취 과정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했다. 야곱에게 주어질 복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따라 순수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편애와 공모, 속임수 등 인간의 허물이 뒤섞인 상태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방법을 통해 이루어질 때 가장 선한 결과를 낳는다.
노년의 이삭은 믿음이 희미해졌고, 리브가는 위기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의심하고 성급하게 인간의 꾀를 썼다. 에서는 하나님의 복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고, 야곱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아버지와 형을 속였다.
영적으로 어두워진 야곱 가족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시작하였으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 자신의 지혜를 내세우며 하나님보다 앞서 가고 있지 않은지, 자신의 유익을 생각하는 마음이 앞서 영적으로 어두워지지 않았는지 점검해보자.
1월 25일
야곱의 꿈 (창세기 28:10-19)
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게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벧엘 – 하나님의 집
에서의 분노를 피해 외삼촌 집을 찾아 가던 야곱이 밤을 맞아 노숙을 하던 중 꿈을 꾸었다. 사닥다리가 땅에서 하늘에 닿아 있었고, 거기에 천사들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 위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을 야곱에게 해주셨을 뿐 아니라 야곱이 어디로 가든지 지켜주시며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야곱은 잠에서 깬 후 ‘이곳은 하나님의 집이고 하늘의 문’이라고 고백하였다.
야곱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아무런 이유도, 자격도 없었다. 그러나 죄인된 인생들을 먼저 찾아오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앞날을 알지 못한 채 들판에 누워 돌을 베게 삼아 잠을 자고 있는 야곱을 찾아오셔서 축복하셨다. 이 얼마나 놀라운,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인가!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황량한 들판에 외롭게 있다고 생각했었으나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계시고 지켜주시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꿈에 보여주신 사다리는 땅에서 하늘에 이르는 유일한 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자기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도망치고 있던, 하나님이 가까이 계셔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던 야곱은 잃어버린 영혼의 모형이다.
사람이 자기 생애 가운데 ‘벧엘’, 곧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계신다는 경험을 가지게 되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다. 그런 사람은 잠시 주님을 떠나게 될지라도 다시 ‘벧엘로 돌아와’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하며 은혜를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1월 26일
야곱의 귀향길 1 (창세기 32:1-9)
1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2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3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자기보다 앞서 사자들을 보내며 4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 주 에서에게 이같이 말하라 주의 종 야곱이 이같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과 함께 거류하며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사오며 5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알리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라 하였더니 6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러 오더이다 7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8 이르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라고 9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마하나임
아버지와 형을 속인 후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한 야곱은 긴 세월 동안 외삼촌의 집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야곱에게 꿈을 통해 찾아오셔서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고 하며 야곱이 고향을 떠나던 때 벧엘에서 한 하나님과의 약속을 상기시켰다.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전히 야곱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는 형 에서를 만나야했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떠난 귀향길에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났고, 그 땅을 하나님의 군대라는 뜻으로 ‘마하나임’이라고 불렀다. 형을 만나야하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군대를 앞서 보내시며 보호하시는 것을 알게 하신 것이다.
야곱의 귀향은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고, 또 그 길에 하나님의 군대를 앞서 보내주심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인간적인 두려움이 앞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다. 에서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자신의 지혜로 인간적인 방법을 계획하는 야곱의 모습, 이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약속하시고, 지켜주시는 것을 알면서도 현실의 문제 앞에서 근심하며 불안해하고, 세상적인 방법을 찾는 우리의 모습이다.
이제 우리는 좀 더 담대한 믿음으로 살아가자. 하나님의 군대가 우리 앞에서 먼저 가며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함을 믿고, 은혜의 땅 마하나임에서 감사하며 담대하게 살아가자.
1월 27일
야곱의 귀향길 2 (창세기 32:22-28)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 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새 이름
귀향길에 오른 야곱은 형 에서로부터 자신의 안전을 유지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치밀한 계획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두려움을 떨쳐낼 수 없었다. 밤이 되자 야곱은 그의 가족과 소유를 얍복 강 건너로 먼저 들여보내고 자신만 홀로 남았다.
이곳에서 생사를 걸고 처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하는 야곱을 하나님이 만나주셨다. 하나님은 야곱의 자기중심적 사고와 인간의 능력의 근원을 철저하게 무너뜨리셨고, 야곱으로 하여금 더 이상 자기의 생각과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새로운 인격과 성품을 상징하는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다. 그의 원래 이름인 야곱은 ‘속이는 자’, ‘빼앗는 자’, ‘발뒤꿈치를 잡은 자’라는 부정적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새 이름에는 ‘하나님의 방백’,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더 정확히 보자면 ‘하나님과 씨름하는 자’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인간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길 수 없다. 단지 하나님께서 야곱을 인정해주셨음을 확인시키는 차원일 뿐이다.
생명이 위협받는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매달려 씨름하면서 은혜를 간구한 야곱은 하나님으로
부터 복을 받고, 그 인생이 달라지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났다. 과거 죄인이었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의인으로 변화되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람, 그리스도인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다.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러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우리의 아이덴티티를 확고히 하자.
1월 28일
야곱의 귀향길 3 (창세기 35:1-7)
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2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 6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7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벧엘로 올라가자
하나님의 은혜로 에서와 극적인 만남과 화해를 이룬 야곱은 가족들과 함께 세겜 성읍에 정착하여 살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 여인들을 보러 나갔다가 하몰의 아들이자, 그 땅의 추장인 세겜에게 부끄러운 일을 당하였고, 이에 분노한 야곱의 아들들은 계략을 써서 그 성에 사는 모든 남자들을 죽이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고통과 곤경에 빠진 야곱을 하나님이 다시 찾아오셔서 벧엘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야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였고, 오래 전 야곱이 고향집을 떠나 도피할 때 하나님께 한 약속을 상기시키셨다. 에서를 피해 달아나던 야곱은 고향에 무사히 돌아오게 되면 벧엘에 하나님의 전을 짓겠다고 약속하였으나 이를 지키지 않았다.
벧엘로 떠나기 전 야곱은 먼저 가족들과 함께 한 모든 이들이 소유한 이방신상을 제거하게 했고, 둘째, 몸과 마음을 정결케 하며, 셋째, 의복을 바꾸어 입게 하였다. 야곱이 행한 일을 통해 그의 가족과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에서 멀어져 이방문화에 물들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이들은 세겜에서 안정되고 부유하게 살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믿음과 예배를 잃어버렸다.
하나님과 멀어진 삶은 드러나는 모습이 화려하고 성공적으로 보일지라도 영적으로는 메마르고 황폐할 수밖에 없다. 우리도 자신의 영혼을 살펴보며 벧엘로 올라가자.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예배를 회복하는 은혜의 자리 벧엘로 올라가자!
1월 29일
요셉의 고난 (창세기 39:1-6)
1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사니라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4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5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6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
딸 디나 사건으로 인해 세겜을 떠나 벧엘로 간 야곱은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그곳을 엘벧엘(벧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그곳에서 오랜 세월 야곱과 동행했던 어머니 리브가의 유모가 죽었다. 야곱은 벧엘 상수리나무 아래에 유모를 장사하고 얼마나 슬피 울었는지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 즉 통곡의 상수리라고 불렀다.
이후 야곱이 아들 요셉을 편애하면서 가정 안에 또 다른 불행이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편애를 시기한 형제들이 요셉을 미디안 상인에게 팔고, 짐승에 물려 죽었다고 말하며 아버지를 속였다. 어머니처럼 의지하고 사랑하던 유모의 죽음과 아내 라헬의 죽음에 이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게 된 야곱의 슬픔과 고통이 얼마나 크고 괴로웠을지 짐작해 볼 수 있다.
미디안 상인에게 팔려 간 요셉은 애굽의 바로왕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살았다. 아버지의 각별한 사랑 가운데 채색옷을 입고 살다가 노예가 된 요셉, 그리고 그가 짐승에 찢겨 죽은 줄 알고 있는 야곱은 인생의 이러한 쓰라린 고통들이 왜 일어났는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지 못했으나 하나님은 이러한 일들을 통해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가고 계셨다.
비록 노예로 살아가는 괴로운 환경 속에 있었지만 요셉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잃지 않았고,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셔서 그의 범사를 형통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 요셉으로 인하여 이방인 보디발의 집도 복을 받았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우리로 인하여 우리의 주변에까지 하나님의 복이 미치는 것을 요셉의 삶을 통해 알게 된다.
1월 30일
종에서 총리로 (창세기 41:46-52)
46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 47 일곱 해 풍년에 토지 소출이 심히 많은지라 48 요셉이 애굽 땅에 있는 그 칠 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되 각 성읍 주위의 밭의 곡물을 그 성읍 중에 쌓아 두매 49 쌓아 둔 곡식이 바다 모래같이 심히 많아 세기를 그쳤으니 그 수가 한이 없음이었더라 50 흉년이 들기 전에 요셉에게 두 아들이 나되 곧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서 낳은 지라 51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52 차자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요셉의 고백
17세의 어린 나이에 종으로 팔려간 요셉은 13년간의 긴 세월이 지내며 우여곡절을 겪은 후 마침내 삼십 세에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총리의 직분을 맡게 되었다.
13년의 세월 동안 요셉이 하나님의 손에 훈련받았다. 채색옷 대신 종의 옷을 입고 이유를 모르는 고난 가운데 일하며 봉사와 섬김의 훈련을 받았다. 불경건한 애굽의 문화 속에서 수려한 용모 때문에 오는 유혹을 뿌리치는 절제의 훈련을 받았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으나 자신을 변호하지 않고 2년 이상의 감옥생활을 견뎌내는 인내의 훈련도 받았다. 이런 훈련을 통해 신실하고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어진 요셉은 마침내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을 위해 높은 직위에 서게 되었다.
요셉이 총리가 된 후에도 이방종교에 동화되지 않고 여호와 신앙으로 구별된 삶을 살았음을 그의 두 아들의 히브리식 이름과 이름의 뜻을 통해 알 수 있다. 자신의 인생여정을 돌이켜보면서 과거의 모든 고통을 잊게 해주신 하나님의 풍성한 위로에 감사하며 찬양하는 마음으로 두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잊어버림)와 에브라임(창성함)으로 지었다. 두 아들의 이름은 요셉의 간증이며 고백인 것이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외형적 성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난의 긴 시간동안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을 지켰다는 것, 주어진 환경 속에서 성실하게 자신의 직분을 감당했다는 것, 하나님이 주시는 훈련의 시간을 잘 통과하고 마침내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 쓰임 받았다는 사실이 오늘 우리들에게 큰 교훈이 된다.
1월 31일
요셉의 죽음과 유언 (창세기 50:22-26)
22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 23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24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26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그리스도인의 본향
자신이 꾼 두 번의 꿈으로 인해 형제들의 미움을 사게 되어 노예로 팔려가고, 감옥에 갇혔다가 바로의 꿈을 해석함으로 인해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은 자신의 가족과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함으로써 마침내 하나님이 주신 꿈을 이루고 110세의 나이에 하나님 나라로 돌아갔다.
요셉은 임종 시 하나님께서 언젠가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것이니 그때 자신의 유해를 가나안 땅으로 이장시켜줄 것을 믿음으로 부탁하며 유언하였다. 그는 애굽에서 부귀와 권세를 누렸으나 그곳은 자신의 본향이 아님을 알고 있었고, 자신이 있어야할 곳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이 사는 곳, 곧 가나안 땅임을 기억하고 있었다. 요셉의 삶은 애굽으로 상징되는 세속 세상은 우리의 진정한 거처가 되지 못함을 기억시키고 가나안으로 상징되는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것을 소망해야 함을 가르쳐준다.
일생 동안 신앙에 근거한 성실한 자세로 살아감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구원의 사명을 감당한 요셉은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며,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딤후4:7)고 고백하는 바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창세기는 1장 빛과 생명의 탄생에서 시작하여 50장 요셉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하나님은 생명을 창조하셨으나 죄로 얼룩진 이 세상에서의 삶은 죽음으로 끝나고,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그러나 천국의 소망이 있음을 깨우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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