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한복음 1:1-5)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인간이 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이 창조한 인간들은 그를 알지 못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메시아의 오심을 세상에 준비시키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또한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 그 분의 오심이 예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배척하였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였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들과 행하신 일들은 그 분의 정체성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요한은 예수님을 완전한 인간이며 완전한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은 완전한 감각을 가진 인간이 되셨으며,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서 사셨음에도 불구하고 만물의 창조자이시고, 주관자이시며 영원한 삶의 원천이신 영원하신 하나님이셨다.
대강절이 시작되었다. 대강절(Advent)은 ‘옴’, ‘도착’을 의미하는 라틴어 ‘adventus'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 전의 4주간을 대강절로 지키며 주님의 첫 번째 탄생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고 기대하는 신앙을 가다듬는다.
사도 요한의 기록과 같이 예수님은 어두운 세상을 비추기 위한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분 안에 있는 생명을 누리게 되고, 더 이상 어두움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비추는 밝은 빛 가운데서 살게 된다. 대강절을 맞아 거리마다 화려한 성탄장식이 아름다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으로 즐거워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각자의 영혼을 밝혀주시고, 생명의 빛을 발할 수 있게 해주신 은혜로 인하여 기뻐해야 하겠다.
12월 2일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 (요한복음 1:6-18)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매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 요한이 ...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새로운 인간
12제자 중의 한 사람이며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의 증인인 요한은 모든 믿는 이들을 대상으로 복음서를 기록하였다. 요한은 예수님의 생애를 일대기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주제별로 기록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이 새로운 탄생은 우리를 내면으로부터 변화되게 하여서 우리의 생각이나 주장, 소망, 동기 등을 새롭게 만든다. 자연적인 출생이 우리에게 육신의 생명을 주고, 한 가족의 구성원이 되게 하듯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새로운 출생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생명을 얻게 하며, 하나님 나라의 한 구성원이 되는 선물을 얻게 한다.
우리를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 인간들 속에서 사셨던 예수님은 첫째, 인생들의 완전한 교사이셨다. 예수님의 생애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과 그에 따라 우리들이 생각해야만 하는 것들을 깨닫게 된다. 둘째, 확실한 본보기가 되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직접 보여주시며, 그것을 위해 필요한 힘을 공급해주신다. 셋째, 완전한 희생이 되셨다. 예수님은 인간들의 모든 죄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기 위해 세상에 오셨고, 그의 죽음을 통하여 죄는 반드시 갚아져야 하는 하나님의 원칙이 채워지게 되었다.
육신의 생명을 입고 태어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영적 생명을 가진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어 새롭게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새 출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다.
12월 3일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1 (누가복음 1:5-19)
5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7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8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 새 9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고 10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11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가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15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16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 18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19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시는 하나님
성전에서 일하는 유대의 제사장들은 매일 아침 한 명의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 향단에 분향을 했는데, 누가 그 날 성소에 들어갈지는 제비를 뽑아 정하였다.
사가랴가 제비를 뽑은 날, 향단에 분향하며 기도하는 동안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아들을 주실 것을, 그리고 백성들을 위해서는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는 메시아가 오시기를 기도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두 가지 기도를 한꺼번에 들어주셨다. 사가야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나이가 많아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상태였으나 주의 사자가 나타나 사가랴에게 아들이 태어날 것을 말해주었고, 그 아들이 태어나 행할 일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머지않아 사가랴는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며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중요한 일을 행할 아들을 갖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인류를 구원하려는 계획을 세우시고, 그 계획을 세상에 알릴 한 아기를 먼저 태어나게 하셨다. 그 아기가 바로 사가랴 부부에게 태어나 장차 요단 강에서 세례를 베풀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외칠 선지자 세례 요한인 것이다. 하나님은 사가랴 부부의 간절한 기도에 이중적으로 응답하셨다. 아기를 주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오시는 메시야의 길을 준비할 중요한 역할도 맡겨주신 것이다.
인간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인간의 생각이나 한계를 뛰어넘으며, 우리의 기도를 그 분의 방식으로, 그 분의 때에 들어주신다.
12월 4일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2 (누가복음 1:21-25)
21 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가 성전 안에서 지체함을 이상히 여기더라 22 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하니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하는 대로 있더니 23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24 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이르되 25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신뢰
사가랴가 성소에서 분향하는 동안 백성들은 밖에서 기다리며, 사가랴가 분향을 끝내고 나와서 민수기에 기록된 대로 축복기도를 해줄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6: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그런데 기다리던 백성들 앞에 나타난 사가랴는 말을 하지 못했고, 사람들은 사가랴가 성소에서 환상을 본 것으로 생각하였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신실한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녀가 없음으로 인한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육신의 부활을 믿지 않았고, 부활의 의미를 그들의 자녀들을 통해 이어지는 삶에 대한 소망에 국한시키고 있었다. 자녀들은 또한 부모의 노후를 봉양하는 경제적 보장이었으며, 가족의 사회적 지위를 높여주는 역할을 하였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겨졌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오랫동안 기다렸음에도 자녀가 없었고, 이제 그들의 삶에서 무언가 변화를 기대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아졌으므로 스스로 비천하고 희망이 없다고 느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고무시키고,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실 (당시의 사고방식으로는 그들의 부끄러움을 씻어주실) 가장 합당한 때를 기다리셨고, 그 때가 되자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우리가 어떤 위기에 처해있다면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자. 자식을 얻지 못했음에도 일평생 하나님을 신뢰한 사가랴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은 위기 가운데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녀들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시며, 그 분의 영광과 평안으로 채워주실 것이다.
12월 5일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누가복음 1:26-33)
26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28 그에게 들어가 그에게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30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하나님의 선택
요셉과 마리아의 고향인 나사렛은 유대사회의 중심이며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나사렛은 중요한 무역로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종종 이교도 상인들이나 로마의 군인들이 찾아오곤 하였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셨지만 나사렛에서 성장하셨다.
엘리사벳이 임신한지 6개월이 지났을 때에 천사 가브리엘이 요셉의 약혼녀 마리아를 찾아왔다. ‘주의 길을 예비할 세례 요한’의 탄생 예고에 이어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를 ‘은혜를 받은 자’라고 칭하며,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 아들을 낳을 것임을 알려주었다.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 할 것을 지시하였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천사가 그 이름의 뜻을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자’라고 알려주었다.
마리아는 어렸고, 가난했고, 여인이었다. 그 당시 사람들의 판단기준으로 볼 때 하나님으로부터 중요한 사명을 받아 감당할 만한 아무런 특별한 점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마리아를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순종의 길을 따르도록 하셨다. 마리아가 택함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에 지혜와 재능, 또는 경험이나 학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부족한 점이 많아 하나님의 사역에 부름 받지 못한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외머를 보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선택기준은 우리의 외적인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하는가에 있다. 하나님의 선택기준을 우리가 제한하지 말자. 하나님을 신뢰하는 한 하나님은 우리를 필요로 하시고 선택하여 사용하신다.
12월 6일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누가복음 1:34-38)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37 대저 하나님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자발적 순종
예수님은 아담의 후손으로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인간들과는 달리 죄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셨다. 아담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으나 예수님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인생들의 죄를 대신 갚아주심으로써 우리를 공의의 하나님이 받아주실 수 있는 상태로 변화시키셨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아기를 낳을 것이라고 알려주었을 때 마리아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놀라며 의아해하였다. 천사는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임하여 아들을 낳게 될 것임을 말하였다. 예수님이 동정녀를 통하여 태어나시는 것은 창세기 3:5의 ‘여자의 후손’과 이사야서 7:14의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라는 예언의 말씀을 이루는 것이다.
마리아가 결혼하기 전 잉태하고 출산한다면 약혼자 요셉이 파혼을 요구할 수 있고, 부끄러운 딸이라고 여겨져 부모로부터 쫓겨나 매우 빈곤하게 살게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마리아는 모든 위험과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말씀하신 대로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응답함으로써 하나님의 섭리에 즉각 순종하는 믿음을 보여주었다. 마리아는 자신이 당하게 될 곤경은 생각하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하나님의 일을 할 것을 요청하셨고, 그 요청에 기꺼이 순종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어떤 일을 행하도록 요청할 때 그로 인해 어떠한 결과가 생길지 계산해보고, 확실히 인식할 때까지 기다리는 잘못을 범하지 말자. 우리도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고 즉각 응답하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다.
12월 7일
엘리사벳을 방문한 마리아 (누가복음 1:39-45)
39 이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41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42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43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하나님의 무한하심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을 전해들은 마리아는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갔다. 성령께서는 엘리사벳에게 마리아가 임신한 아기가 메시아이심을 분명히 알게 하셨다. 그래서 마리아가 그녀를 방문했을 때 “내 주의 모친”이라고 반기며 ‘여자 중의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라고 하며 반길 수 있었다. 엘리사벳의 이러한 축복의 인사는 마리아의 믿음을 더욱 강하게 해주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처녀로써 홀로 임신한 것을 불가능한 일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혜로운 이 여인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굳건히 했고, 마리아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고 복을 받은 것을 기뻐하였다.
천사의 말을 듣고 즉각 순종한 마리아와 달리 사가랴는 아들을 갖게 되리라는 천사의 말을 들었을 때 그것을 의심하였다. 인간적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의심은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불가능이란 없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이미 나이 많아 아기를 가질 수 없는 형편이었으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기를 선물로 주셨고,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케 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행하시고자 하는 일들을 우리는 얼마나 쉽게 의심하고 잘못 이해하는지! 실제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보다는 자신의 이해와 경험을 의지하는 잘못을 범하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들의 시야에 의해 제한되지 않으며 우리의 인간적인 한계성에 의해 지배받지 않는다.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하자!
12월 8일
마리아의 찬양 (누가복음 1:46-55)
46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49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
마리아의 송가인 이 찬송시는 라틴어 원본의 각 문장의 첫 글자들을 따서 ‘Magnifikat’라고도 불리어지며, 성가대 찬양의 주제로 자주 사용되어 왔다. 선지자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그랬던 것처럼 마리아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이루어가고자 하시는 것에 대해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행하시는 일을 찬양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마리아의 찬가는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신에게 임한 복에 대한 감사,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은혜, 권세 있는 자와 비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공평하신 심판,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이 성취됨을 찬양한다.
마리아가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하리라’ 말했을 때 그녀가 스스로 자신을 높이며 자부심을 가진 것은 결코 아니다. 마리아는 보잘 것 없는 자신을 택하여 이 세상에 메시아를 태어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귀한지 깨달았고, 그것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였다. 이 은혜는 참으로 귀하고 복된 것이었지만 귀한 만큼 고통과 희생이 따르는 것이었다. 만일 마리아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일어날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였다면 하나님의 선물도 받을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나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어주셨는지 헤아려보자. 하나님이 주신 것을 과소평가하거나 무시하지는 않았는지, 순종이 따르는 하나님의 선물(과제)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거절한 적은 없는지 돌아보자.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분께 영광을 돌리자!
12월 9일
세례 요한의 탄생 (누가복음 1:57-66)
57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58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59 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60 그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61 그들이 이르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62 그의 아버지께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물으니 63 그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기더라 64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65 그 근처에 사는 이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66 듣는 이가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하나님의 가족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한 집안의 혈통이나 이름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사가랴의 아들이 그들의 전통에 따라 당연히 친족 중의 한 사람의 이름으로 불릴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천사가 일러준 대로 아기의 이름을 요한으로 정하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천사가 전해준 말을 믿지 못하여 아기가 출생할 때까지 벙어리로 지내야했던 사가랴가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요한으로 지을 것을 서판에 쓰자 그의 혀가 풀리며 닫혔던 말문이 열려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요한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는 뜻인데, 요한의 탄생이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기 위한 것임을 의미하는 이름을 주신 것이다.
유대 가정에 한 아기가 태어나면 중요한 예식인 할례식을 행한다. 하나님은 할례를 명하셨는데, 이것을 통해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삶이 시작된다. 할례예식은 그 아기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즐거워하며 친족들이 함께 모이는 잔치였다.
우리는 육신의 가정에서 태어나 육신의 가족의 구성원이 되었다.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믿고 받아들임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한 구성원이 되어 하나님 안에서의 가족을 이루게 되었다.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가족에 속하게 된 것을 기뻐하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의식과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다.
12월 10일
사가랴의 찬가 (누가복음 1:67-80)
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68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70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71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72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73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 76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80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나의 찬양
요한이 출생한 후 사가랴는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사가랴의 찬가’(Benedictus)라고 불리는 이 찬송은 네 소절로 되어 있는데, 백성을 죄에서 구속하실 구원자를 보내주심에 대한 감사(68-71절), 구원의 약속을 찬양(72-75절),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의 사명(76-77절), 메시야의 구원을 찬양(78-79절)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죄를 정복할 평화의 구세주가 아닌 로마의 강력한 지배로부터 군사적으로 해방시켜 줄 메l시야가 오시기를 기대하였다.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은 아기로 태어나 삶을 시작하는 연약한 인생들을 통하여 일하시기로 결정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한 아기로 이 세상에 보내셔서 사가랴의 찬송과 같이 ‘돋는 해가 위로부터 임하여 어둠과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으로 인도’하도록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신실한 사람들을 통하여 일하신다. 혹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느낄지도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많은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과 순종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며, 하나님이 그 분의 일을 행하실 수 있도록 기꺼이 자신을 낮추며 순종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사용하신다.
가브리엘 천사가 전해준 소식을 듣고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며 찬양한 마리아와 사가랴처럼 우리도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뻐하며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리자. 이 세상에 메시아를 보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우리의 찬양을 어떻게 고백해야 할지 묵상해보자.
12월 11일
세상을 비추는 참 빛 (요한복음 1:6-14)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진정한 회개
독일 경건주의를 태동시킨 요한 아른트(1555-1621) 목사님은 그의 설교 ‘어둠’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육신을 위해서는 많이 염려하고, 죽지 않을 영혼에 대해서는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 바로 큰 어둠이요 무지한 일’이라고 지적하면서 ‘영원한 삶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라.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그분이 인내로 기다리신다.’고 하였다.
16세기 아른트 목사님이 활동하던 시기나 지금이나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 여전히 이러한 ‘큰 어둠’ 가운데 살고 있는 이들이 많이 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영혼 안에 있는 큰 어둠을 비추는 참 빛으로 오셨다.
어둠 가운데 있을 때는 사물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영혼이 어두울 때는 죄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혼을 완전히 밝히시면 그 속에 있던 온갖 더러운 것들이 낱낱이 드러나므로 그 빛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죄와 허물, 죄성을 애통해하며 회개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회개는 외적인 죄를 끊는 것만이 아니라 내적인 중심을 변화시키고 거룩하고 경건한 삶으로 그 방향을 돌릴 때 일어난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회개를 통해 새 생명을 얻게 하시고자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다. 우리의 영혼을 활짝 열고 참 빛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자. 그리하여 구석구석 묵은 먼지처럼 쌓여 있는 모든 죄를 다 털어내고 인내로 기다리시는 하나님 은혜 가운데 새롭게 한해를 맞이할 준비를 하자.
12월 12일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태복음 1:18-25)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임마누엘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마리아가 임신한 것을 알게 된 요셉은 조용히 마리아와 헤어지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마리아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성령으로 잉태한 것임을 알려주었다.
예수님은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한 인간이셨지만, 하나님의 아들로서 한 점의 인간적인 죄도 없이 태어나신 완전한 인간이시며 하나님이시다.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하시기 위해 스스로 인간 실존의 유한성을 취하셨다. 하나님과 본질 상 하나이신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모든 인생들을 위해 사실 수 있었고, 죽으실 수 있었다.
천사는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할 것을 지시하였다. 사가랴에게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요한으로 하라고 지시한 것처럼 마리아가 낳을 아기의 이름도 미리 알려줌으로써 태어날 아기가 누구인지,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려주려는 것이다. 아기 예수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목적은 바로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인간들, 그 분의 모든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직접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들과 함께 계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한 인간으로 사셨기 때문에 우리의 경험과 곤경들을 온전히 이해하신다. 그 분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상황을 직접 경험하셨고, 우리들을 도울 능력, 우리들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실 수 있는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임마누엘!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12월 13일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이사야 11:1-5)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4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하실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이가봇에서 임마누엘로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가나안 이방문화와 혼합되어 신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매우 혼돈하고 부패하였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이 어린 나이에 성전에서 일하고 있을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생활을 이끌어가고 있었던 엘리제사장은 영적으로 어두웠을 뿐 아니라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였고 모든 악행을 일삼았다.
결국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과 엘리제사장 가정에 임하여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며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었고, 그 소식을 들은 엘리제사장, 출산하던 며느리가 죽는 불행이 한꺼번에 닥쳤다. 며느리가 죽어가면서 출산한 아기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뜻이다.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해 예언하면서 메시야가 오셔서 이룰 평화의 나라에 대해 노래한다. 그 날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자연의 질서가 회복되고, 공의와 정직이 판단의 기준이 되고,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지며,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을 알려준다.
비록 하나님의 백성이 불순종하고 타락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지만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은 다시금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이 땅에 하나님 신앙을 회복시키시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은혜로 채워주신다. 이가봇의 세상을 임마누엘의 세상으로 변화시켜주시기 위해 아기 예수를 이 땅에 보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자!
12월 14일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 (이사야 55:6-11)
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10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특별한 만남
신앙은 하나님을 찾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이사야는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 나아오려는 사람은 ‘만날 기회를 타서’(시32:6), 만날 만한 때에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을 찾아서 만남으로 신앙을 시작한 사람은 하나님을 불러야 한다.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한 말씀에서 ‘부르다’는 단어는 어떤 응답을 얻기 위해 강력한 욕구를 가지고 간절히 부른다는 뜻이다. 특히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경우에 사용된 이 단어는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거듭 태어남이 없이는 새사람이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거듭 태어나는 것은 무엇으로 말미암는 것인가? 거듭 태어나기 위한 수단은 만남이다. 성경은 만남을 통해 거듭 태어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세상에서 수많은 만남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경솔하고 무의미한 만남이 있는가 하면 사려 깊은 따뜻한 만남이 있다. 모든 만남이 다 유익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를 만나는가이다. 누구를 만나는가에 따라 거듭 태어남의 모습과 형편이 달라진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을 만나주시는 것, 이것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만남이다. 신비한 만남의 결과로 우리는 거듭난 새 생명을 얻는다.
12월 15일
인생의 때 (전도서 3:1-11)
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 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때를 깨닫는 신앙
때로 원형의 시계와 반복적으로 회전하는 시계바늘을 보면서 우리의 시간 또한 시계처럼 끊임없이 회전, 또는 반복되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시간은 물과 같이 계속 흘러가고 있고, 이것을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고 표현하였다.
올해도 우리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신의 과제를 이행하며 바쁘게 살아왔다. 한 해를 마무리해 가면서 우리의 모든 노력과 수고가 어떤 결실을 맺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누군가는 지난 한해의 삶이 만족스러울 수도 있고, 후회와 안타까움으로 되돌아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제 2주 후면 새로운 달력을 걸게 된다. 새로운 달력을 걸었다고 갑자기 우리의 삶이 새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반복되는 시간에 생기를 불어넣고, 죽은 시간을 부활시키며, 시간을 새롭게 하는 창조적 손길이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손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그분이 자신의 삶 안으로 들어와 ‘새로운 시간’을 살게 하는 경험, 그 경험으로 인해 삶이 놀라운 생동력을 가지고 변화되는 것을 체험하는 은혜를 누린다.
우리는 지금 어느 때를 살고 있는가? 바로 이 세상에 구세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는 때이다. 우리 안에 찾아오셔서 우리의 연약함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주시고,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고자 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지난 한 해를 결산하고, 그분과 함께 새롭게 한 해를 시작하기 위해 구세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할 때이다.
12월 16일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8:14-17)
14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15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손을 잡고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는 자신이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던 체험담을 전한다. 수술 후 마취가 깨기 시작하자 극심한 통증이 밀려와 간호사에게 다시 마취주사를 놓아달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나 의사는 마취주사 놓는 것을 허락지 않았는데 그때 한 간호사가 침대 곁에 앉아 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엔도 슈사쿠는 ‘그러자 참으로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그 지독하던 아픔이 조금씩 가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오랫동안 질병에 시달리고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아 슬픔과 고통, 소외감 속에 있던 이들의 손을 잡아 주었던 한 위대한 치유자의 손길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의 손도 타인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며 어느 정도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을진대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의 능력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예수님이 손을 대자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이 떠나갔고, 한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자 그의 나병이 깨끗해졌다. 죽은 소녀의 손을 잡으시니 그 소녀가 살아 일어났고, 예수님이 손을 댄 사람들마다 그들의 병이 나았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손, 사망을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손, 실의와 좌절을 희망과 용기로 바꿔주시는 손, 주님의 손을 잡자. 예수님의 손을 잡으면 마음까지 따뜻한 주님의 사랑이 전해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손은 우리의 연약함을 치유해주신다. 이 세상에 구세주로 오시는 예수님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 나의 사랑과 위로와 치유를 필요로 하는 이들의 손을 잡아 주자.
12월 17일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3:1-7)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의 언어
우리는 매일 많은 사람을 만나며 많은 말을 하면서 살아간다. 언어는 종종 속마음과 다른 엉뚱한 방향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말하는 순간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상대방에게 전달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된다.
한 해를 지내며 우리의 언어생활은 어떠했는지 돌아보자.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기에 급급하여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놓치지는 않았는지, 하나님의 은혜를 자연스럽게 흘려 내보내는 자녀다운 것이었는지 아니면 세상일들을 말하기에 바빴는지, 자신과 타인을 포용하는 긍정적인 언어였는지 아니면 비난에 더 많이 사용된 언어였는지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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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내가 내 모든 재산을 나누어주고 (어떤 귀한 목적을 위하여)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내게 사랑(곧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나아가 믿음과 소망, 사랑은 항상 있어야 하는데 그 중에 제일인 것은 사랑이라고 강조한다.
어떠한 미사여구를 써서 말한다 해도 그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담겨 있지 않으면 그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서툴지라도 그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담겨 있으면 그것은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고 영혼을 소생시킨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이 절기에 우리의 언어가 사랑으로 가득 차서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언어로, 상처받은 이의 마음을 치유하는 언어로,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격려하는 언어로,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언어로 말해지기를 소망하자.
12월 18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마태복음 6:24-32)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소유와 삶
저명한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 (To have or to be?)라는 저서에서 인간의 행복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무언가를 자신의 것으로 소유함으로써 행복한가, 아니면 그것이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가를 생각해보게 한다.
행복한 사람과 행복하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기는 참 어렵다. 겉으로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뜻밖에 전혀 행복하지 않을 수 있고, 행복한 삶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사람이 오히려 불행을 느끼지 않고 살아가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는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소유(가진 것 혹은 성취한 것)로 사람을 판단하게 하고, 소유가 행복의 척도인 것처럼 생각하여 소유에 집착하게 만든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며,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경고하신다. 나아가 몸을 위하여 무엇을 먹고 마실지, 무엇을 입을지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하늘 아버지께서 인생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때를 따라 필요를 공급해주시기 때문이다.
올 한해를 지내며 혹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존재의 중요성보다 세상적 소유에 더 큰 가치를 두고 그것을 얻음으로 행복해지려고 애쓰지 않았는지 되돌아보자.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영적인 부요함을 누리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영적 존재로서의 삶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았는지 점검해보자.
12월 19일
우리의 모든 것을 살피시는 하나님 (시편 139:1-10)
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코람데오 Coram Deo (in the presence of God)
요즈음엔 어디를 가나 CCTV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 사람들이 집밖에서 하는 어지간한 행동은 다 녹화된다. 미국의 대형슈퍼마켓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천정 구석에 설치한 감시카메라를 ‘하늘의 눈 eye of the sky’으로 부른다고 한다. 어떤 사고의 원인을 규명하거나 범죄자를 찾아내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만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의 행동이 녹화된다는 사실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을뿐더러 행동거지를 조심하게 만든다.
다윗은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눈은 우리의 삶을, 우리의 행동 뿐 아니라 마음과 생각까지도 지켜보고 계시며, 하나님의 눈에서 한순간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윗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때로 우리는 우리의 눈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눈도 우리를 보지 못하시는 것처럼 착각한다. CCTV 카메라는 사람의 행동만 녹화하지만 하나님의 눈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행동뿐 아니라 마음까지도 보고 계신다.
올 한해를 살아오면서 우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안타까운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를 바라보신 하나님의 눈을 잊고 지내지는 않았는지 돌이켜보자. 새해에는 마음과 행실을 더욱 경건하고 거룩하게 다듬어 우리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사랑스러운 자녀로 살아가자.
12월 20일
우리 마음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 (로마서 5:3-10)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10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조건 없는 사랑
한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를 무척 사랑하는 한 소년이 있었고, 나무는 소년으로 인해 매우 행복했다. 그러나 소년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무는 혼자 있을 때가 많아졌다. 어느 날 소년이 찾아와 돈이 필요하다고 말하자 나무는 자신의 열매를 모두 내어주었다. 얼마 후 다시 찾아온 소년은 집을 지어야겠다고 말했고, 나무는 자신의 가지를 모두 내어주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소년은 멀리 가고 싶다면서 배가 필요하다고 말하였다. 나무는 자기의 줄기를 베어 배를 만들라고 말하였다. 소년은 그 배를 타고 멀리 떠났고, 나무는 이제 그루터기만 남았다. 먼 후일 노인이 된 소년이 다시 나무 곁으로 돌아왔다. 나무는 노인이 된 소년에게 말하였다. ‘이제 내가 너에게 더 줄 것이 없어. 하지만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서 푹 쉬도록 해.’
쉘 실버스타인이 쓴 소설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소설 속의 소년의 모습은 끊임없이 받기만 하는 인간의 모습인데 반해 열매부터 시작하여 밑동만 남을 때까지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준 나무는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우리가 연약할 때에나 원수 될 때에나, 죄인될 때에나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전한다. 올 한해도 아무런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조건 없는 사랑으로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소년처럼 당연한 듯이 무작정 받기만 한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보며 이제라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자.
12월 21일
요시야 왕의 개혁 (열왕기하 23:21-27)
21 왕이 뭇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22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여러 왕의 시대에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23 요시야 왕 열여덟째 해에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24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점쟁이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거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25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말씀으로 삶을 새롭게 하자
‘여호와께서 도와주심’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요시야 왕은 기원전 7세기 경 남유다왕국을 다스렸다. 그가 왕이 된 지 18년이 되던 해 성전을 수리하던 중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는데, 요시야는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을 읽으면서 이제까지 이스라엘이 저지른 죄가 무엇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성전에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기록한 책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채 오랜 세월을 지냈다는 사실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어둡고 부패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말씀을 읽은 요시야 왕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참회하였으며, 하나님을 향한 믿음 없이 살아온 이스라엘, 우상숭배로 더러워진 이스라엘을 말씀을 통해 새롭게 하고자 했다. 온 백성이 예루살렘에 모여 함께 유월절을 지키며 이 백성을 애굽의 고난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철저한 개혁을 단행하였다. 요시야는 마음을 다해 모세의 모든 율법을 지키고자 하였고,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을 정도로 말씀으로 나라를 새롭게 하고자 힘썼다.
올 한해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는지,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는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움직이고 나아가게 하는 힘의 근원이 되었는지 생각해보자. 만일 그 옛날 요시아 왕 시대의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방치해두었었다면 이제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삶을 개혁하고 변화시켜나가기 위한 각오를 새롭게 해야겠다.
12월 22일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마태복음 21:18-22)
18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0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나의 삶은 열매를 맺고 있는가?
중세의 수도사 아벨라르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당대의 위대한 신학자였던 안셀무스를 혹평하는 부분이 있다. 그는 안셀무스가 소문과는 달리 별 볼일 없는 것을 비판하며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가 말하는 나무는 잎이 무성하여 멀리서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사뭇 당당하게 보이나 가까이 다가가서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은 이 나무에 열매가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게 된다네 ... 기름진 벌에 우뚝 솟은 떡갈나무처럼 큰 이름의 그늘에 열매가 없네.’
성전을 향하여 가던 예수님이 시장하여 길에 있는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따서 드시고자 하였으나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에는 정작 열매가 없었다. 예수님은 나무를 향하여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고 무화과나무가 곧 말라버렸다. 놀란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기도할 때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산이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비유를 사용하시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의심하지 않으면 응답받지 못할 일이 없음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올 한해 우리는 각자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무엇인가 많은 일을 하며 열심히 살아왔다. 그러나 많이 수고한 것 같고, 그럴 듯하게 보이는 잎사귀도 많은 것 같은데 정작 결실할 열매가 없다면 과연 그 많은 일들을 믿음으로 기도하며 행하였는지 돌아보아야 하겠다. 만일 열매가 없다면 아직도 내가 강하여 하나님의 강함을 외면하고 약한 자로 살지 않았는지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보자.
12월 23일
그리스도의 향기 (고린도후서 2:12-17)
12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13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 우리는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17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향기 나는 삶
때로 우리는 자신에게서 나는 냄새를 감추기 위해, 혹은 더 좋은 냄새가 나게 하기 위해 향수를 사용한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향수는 잠시 동안 목적을 이루어줄 수 있으나 곧 사라져버리는 시한부적인 냄새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게 하신다고 말하며, 성도들을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표현한다. 바울의 이러한 표현은 구약시대에 성전에서 날마다 향을 피워 하나님께 향기를 올려드렸던 것과 인간의 죄를 대신 갚기 위해 짐승을 속죄제물로 태워서 그 냄새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던 것을 기억하게 한다.
우리를 위해 직접 속죄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의 내면에서부터 그리스도의 향기가 퍼져 나오게 하신다. 이것은 잠시 뿌리는 향수와 달리 지속적으로 퍼져 나와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지며, 이 향기를 맡은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된다.
올 한해를 지내면서 각자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어떤 냄새를 내며 살았는지 생각해보자. 나에게서 나는 냄새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향기여서 그것을 맡은 사람을 생명길로 인도하였는지, 아니면 교만과 욕심, 갈등으로 인한 썩은 냄새를 풍기며, 그 냄새를 감추기 위해 향수를 뿌리며 살았는지 돌아보자. 살아있는 꽃이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듯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있는 생명은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향기를 퍼뜨린다.
12월 24일
예수께서 베들레헴에 태어나시다 (누가복음 2:1-7)
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에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첫아들을 낳아 강보에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하나님의 계획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로마 제국의 전역에 걸쳐 호적 조사를 명령했는데, 이는 로마의 속국에 대해 세금을 원활히 거둬들이고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한 조치였다. 당시 호적은 모두 자신의 출생지에서 해야 했으므로 나사렛에 살고 있던 요셉과 마리아도 호적을 하러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가야했다.
출산이 임박한 마리아는 요셉과 함께 고향인 베들레헴에 도착했으나 머무를 곳이 없었다. 숙소를 구하지 못해 결국 더럽고 초라한 마구간에 들어가 그곳에서 아기 예수를 낳았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명령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태어나야 할 완벽한 하나님의 시간에, 완벽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역사의 모든 측면을 다스리고 계신다. 황제의 명령에 의해 예수님은 선지자가 그의 탄생에 대해 예언한 바로 그 도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되었다. 또한 구약성경에는 메시야가 다윗의 계보에서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는데,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가 된 요셉과 마리아는 모두 다윗의 자손이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 모든 자신의 계획을 이루셨다.
이 세상에 오시는 가장 위대한 분이 초라한 마구간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태어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겸손의 왕으로 오신 메시야를 극적인 모습으로 나타내준다. 마구간에서 태어난 이 작고 무기력한 아기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었다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 승천하시고 왕 중의 왕으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분이시다.
12월 25일
하나님께 영광 사람들 중에 평화 (누가복음 2:8-14)
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위대한 소식
목자들이 밤에 들판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고 있을 때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가 그들을 찾아왔다. 그리고 ‘너희에게 모든 백성들이 크게 기뻐할 좋은 소식을 알린다. 오늘 밤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그분이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라고 말하였다. 그때에 갑자기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천사들과 함께 ‘가장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이 얼마나 놀라운 탄생 통보인가! 목자들은 아기가 태어난 곳, 베들레헴으로 가서 말구유에 누워있는 아기에게 경배하고 아기의 부모에게 천사들이 말해준 위대한 소식을 전하였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다섯 편의 노래 중 네 번째인 ‘천사들의 찬송’은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이 하나님과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결과를 노래한다. 즉, 예수님으로 인해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된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땅에서는 구원받은 인생들이 하나님과 화목하여 세상이 줄 수 없는 진정한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을 노래한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그분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모든 겸손한 사람들의 영혼 속에 거하신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자신의 구원자로 믿고 받아들일 수 있고, 예수님은 모든 이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신다. 이러한 주님을 나는 매일 기도 속에서, 말씀 속에서 만나며 즐거워하고 있는가? 나는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기쁨으로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 분을 진정 알고 있는가?
12월 26일
아기 예수를 방문한 목자들 (누가복음 2: 15-20)
15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6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18 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을 놀랍게 여기되 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20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목자들과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와 탄생은 인간의 논리나 이성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초자연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셔서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이 이 사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우셨다. 천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영적인 존재로 하나님 곁에서 그의 사역을 보좌하도록 만들어졌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세상에 드러내시기 위해 계속 일하시면서 우리가 당연하게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이 일에 관해 나타내 보이지 않으셨다. 당시 성전에서 일하던 제사장들이나 율법학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에 대해 알려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들판에서 양을 치는 몇몇 목동들에게 예수의 탄생소식이 전해졌음을 누가는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접한 목동들 중에는 속죄 제물로 드려지는 양을 성전으로 끌고 간 적도 있었을 것이다. 들판에서 양을 치며 그 중에서 속죄 제물로 드려질 흠 없는 어린 양을 구별하여 돌보던 목동들, 그들은 온 세상의 죄를 대속하여 주실 하나님의 어린양을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자리에 초대받았다.
우리의 죄를 대신 갚기 위해 어린 양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시고, 우리에게 영원히 존재하는 새로운 생명을 주셨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 세상의 인생들과 함께 하시며 구세주를 찾도록 모든 이들을 초대하신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그 길로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부르심에 귀 기울이고 마음을 열어보라!
12월 27일
시므온의 송가 (누가복음 2:25-35)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34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믿는 모든 사람들
마리아와 요셉은 아기가 난 지 8일 만인 할례식 날 천사가 일러 준 대로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다. 모세의 법대로 아기에게 정결 의식을 행하는 날이 되자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율법에 “첫아들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주께 드리라”고 기록된 대로 아기를 주님께 드리는 예식을 행하기 위해서였다.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를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성전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서 시므온이라고 하는 노인을 만나 아기의 장래를 예언한 말을 들었다. 시므온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28절-35절은 시므온의 송가, Nunc Dimittis(하나님이 이제 보내셨다라는 뜻)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이 구절의 라틴어 번역에서 각 문장의 첫 알파벳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시므온은 혼란한 시대 속에서 의롭고 경건한 생활을 하면서 메시야를 기다린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에서 배척을 받게 될 것이고, 어떤 이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넘어지고, 다른 이들은 세움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제 시므온은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야를 보았기 때문에 편히 잠들 수 있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통한 축복이 예언되어 있는 구약의 말씀들을 매우 신뢰하였다. 이사야는 메시아가 유대인 뿐 아니라 온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했으나 (사49: 6) 유대인들은 이 부분에는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오직 자기들만을 구원하러 오셨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가는 복음서를 기록하며 예수님께서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주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했다.
12월 28일
아기 예수를 찾아온 동방박사들 (마태복음 2:1-8)
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5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7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동방에서 온 박사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오실 메시야가 자신들을 로마제국의 탄압으로부터 구해 줄 정치적 해방자일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동방박사들에게 메시아 탄생소식을 들은 헤롯 왕은 탄생한 메시아가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지 못하게 하려고 베들레헴 지경에서 태어난 모든 어린 남자아기를 죽이라는 잔인한 명령을 내렸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이들이 정확히 어디서 왔는지, 어느 나라 사람이었는지도 알 수 없다. 전승에 의하면 그들은 매우 박식했고, 고대 바벨론 지역의 인근에 위치한 파르티아 사람(고대 이란지방에 살았던 유목민)이라고도 하며,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인의 후손들이라고도 한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이 점성술사들이 각각 다른 나라에서 왔고, 그러므로 온 세계를 대표하여 예수님께 무릎을 꿇어 경배하였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조차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그 당시에 이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것을 인정하고 찾아가 경배하였다.
동방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아기를 보기 위해 수천 킬로미터의 먼 길을 여행하였다. 마침내 아기 예수 보았을 때 그들은 기쁨으로 경배를 드리고 귀한 선물을 드렸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들과 얼마나 다르게 반응하고 있는가. 세상은 헤롯 왕처럼 메시야를 배척하지만 우리는 구세주로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 메시아를 전심으로 찾아가자. 그분을 만나 메시아를 만난 기쁨으로 경배하고, 동방에서 온 박사들처럼 우리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을 그분께 기꺼이 드리자!
12월 29일
동방박사들의 선물 (마태복음 2:9-12)
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10 그들이 별을 보고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12 그들이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진실한 경배
동방박사들을 인도한 별을 따라가 아기 예수를 만나게 되었을 때 그들은 ‘큰 기쁨으로 매우 기뻐하였다’. 인류를 구원하실 그리스도를 찾게 된 것에 대한 감격스러운 기쁨이었다. 이러한 기쁨은 오늘날 세상에서 방황하다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모든 이들이 누리는 기쁨이기도 하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께 가장 먼저 나아와 경배 드린 이방인들이었다. 이들은 자기보다 높은 사람이나 왕께 경배할 때 예물을 드리는 고대 풍습에 따라 장차 왕이 되실 분에게 귀중한 세 가지 선물을 드렸다. 이 선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그 분이 장차 이루게 될 사역을 상징한다. 황금은 매우 귀하고 불변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나타낸다. 유향은 향기로운 향품으로 그 당시 신들에게 바쳐지는 것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몰약은 의약품으로, 혹은 방부제로 시신을 처리할 때 사용되었고, 예수님의 수난과 대속의 죽음을 의미한다. 동방박사들은 이러한 의미를 가진 선물들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경배하였다.
이들은 예수님께 경배한 후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다른 길로 고국으로 돌아갔다. 모든 일을 세심하게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예수님을 만난 자의 삶의 길은 이전과는 달라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완전하시고, 정의로우시며 전능하신 우주의 창조주 하나님께 우리도 진실한 경배를 드리자. 하나님은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것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12월 30일
애굽으로 피신한 예수님 가족 (마태복음 2:13-23)
13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 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 19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20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 22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23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 돌아간 후 헤롯 왕은 자신의 왕좌를 지키기 위해 베들레헴과 그 인근 지역의 모든 어린 아기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하지만 ‘왕으로 나신’ 아기 예수를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은 요셉에게 사자를 보내어 애굽으로 피신할 것을 지시하였다.
요셉은 하나님으로부터 두 번의 계시를 받았다. 첫 번째는 마리아가 잉태한 아기가 메시아가 되리라는 것을 밝혀 주었다. 두 번째 계시는 아기의 삶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요셉으로 하여금 명확하게 알게 하였다. 비록 요셉은 예수님의 육신적 부친은 아니었지만 예수님의 안전과 성장을 책임져야 할 법적 의무를 가진 부친이었다. 요셉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마음이 열려 있었고, 하나님을 신뢰하였으므로 즉시 순종하여 아기와 아내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하였다.
애굽에서의 이들의 생활은 결코 순탄치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때로 희생을 지불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자 할 때 충분한 준비기간과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할 때 그로 인해 안락한 삶을 보장받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들도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믿는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기 위해 우리의 마음이 요셉과 같이 하나님을 향하여 열려있는지 점검해보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을 때 기꺼이 그것을 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자신의 믿음을 살펴보자.
12월 31일
예수님의 어린 시절 (누가복음 2:40-52)
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41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43 그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 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 듣는 자가 다 그의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48 그의 부모가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어린 예수의 자의식
율법에 의하면 유대 남자들은 매년 세 번씩 절기(유월절, 오순절, 초막절)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야 했다. 마리아와 요셉도 어린 예수를 데리고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중 어린 예수를 잃어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예수님의 부모는 아들을 잃어버린 지 사흘이 되던 날 예루살렘 성전에서 선생들과 토론하고 있는 아들을 발견하였다.
예수님은 어린 시절부터 이미 메시야로서의 자신의 신분을 자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예수님의 부모가 예수를 찾으러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왔을 때 선생들과 토론하는 모습에서 나타난다. 예수님의 지혜는 당대의 뛰어난 학자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뛰어났는데, 이것은 인간의 선천적인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신적인 능력이다. 둘째, 어머니 마리아가 왜 부모를 따라 오지 않고 찾도록 만들었느냐고 책망할 때에 자신이 ‘아버지의 집’ 즉 성전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예수님의 대답에서도 나타난다.
예수님은 메시야로서의 자의식이 있었을 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육체적, 지적, 도덕적, 영적으로 조화를 이루며 온전한 인격으로 성장하셨다. 그 모습을 누가는 ‘지혜와 키가 자라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살아가는 우리도 신앙적으로 주님 앞에서 믿음의 도리를 다할 뿐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인간의 도리를 바르게 감당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사랑스러운’ 존재, 신뢰할만한 책임적 존재로 살아갈 것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오늘 새롭게 결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