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 (마가복음 1:1-11)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피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7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0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구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는 BC415년 느헤미야서의 기록으로 끝나고 약 400년이 지난 후 세례 요한이 등장함으로 신약 시대가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임무를 맡기셨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먼저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야 할 것을 전하면서 자신은 백성들에게 물로 회개의 세례를 베풀지만 자신의 뒤에 오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시라고 소개하였다.
연극이나 오페라를 보러 가면 작품이 시작되기 전까지 무대에 막이 내려져 있다. 무대 앞에서 보면 아무 일도 없이 시작을 기다리는 것 같지만 보이지 않는 무대 뒤에서는 연극을 위한 준비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랜 세월 외적으로 침묵하신 하나님은 이 기간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한 준비를 하고 계셨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이루어가게 하셨다.
예수님은 '준비된 세상'에 오셨다. 모세는 40년간의 사역을 위해 80년 동안 준비되었다. 예수님은 3년간의 이 세상에서의 사역을 위해 30년 동안 준비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 위해 4천 년 이상의 시간을 투자하셨다. 하나님의 시간 개념은 인간의 시간 개념과는 다르다. 한정된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렇게 긴 역사의 시간만큼 준비하는데 사용할 수는 물론 없지만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사용하신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시고자 준비시키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시고자 준비시키실 때 하나님의 손길을, 하나님의 이끌어 가심을 민감하게 포착하고 즉각 응답하자.
3월 2일
제자들을 부르심 (마가복음 1:16-22)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21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진정한 제자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아 생활하던 어부들에게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1장에 보면 “곧”이라는 단어가 7번 (18, 20, 21, 28, 30, 42, 43절) 이나 나온다. 마가는 복음서를 매우 간결한 문체로 기록하면서 곧, 즉시라는 단어들을 사용하여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어부들은 자신들의 생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앞날이 어떻게 전개될지, 또한 사람을 낚는 어부가 과연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하였으나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 순종하여 생업의 도구인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바로 응답하여 주님을 따른 이 어부들이 처음부터 큰 믿음을 소유한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의 부르심과 복음을 이해하기 까지는 시간이 걸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예수님을 따랐다. 제자들처럼 우리도 때로 의심하기도 하고 난관에 부딪쳐 쓰러지기도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된다. 의심과 실패, 좌절과 회복의 과정을 거치며 예수님의 다듬어 가시는 손길에 의해 우리의 믿음은 점차 성숙해지고 온전해진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제자의 길로 부르신다.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은 순종으로 드러난다. 순종이 제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재산인 배와 그물을 버리게 하였던 것처럼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진정한 제자라면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말로만 하는 신앙고백이 아니라 순종하는 행동이어야 한다. 또한 주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것은 단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이웃을 지향하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우리를 부르신 분이 원하시는 진정한 제자의 삶의 모습이다.
3월 3일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마가복음 2:1-12)
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네 친구들의 믿음과 행함
가버나움에 중풍병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던 한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예수님이 그 동네에 오셔서 한 집에서 말씀을 전하고 계신 것을 알게 된 그의 친구들은 예수님께 가면 중풍병을 앓는 친구가 고침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병든 친구를 침상에 누인 채 예수님 계신 곳을 찾아갔다. 그곳에는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 도저히 집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다급해진 친구들은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뜯어내고 지붕 밑으로 환자를 달아 내렸다. (팔레스타인의 전통적 가옥은 벽을 돌로 짓고 지붕은 나무들을 평평하게 가로 세로로 얽어 놓고 진흙을 바르고 짚이나 풀을 역어서 그 위에 덮었으므로 비교적 쉽게 뜯어낼 수 있었다.)
그 장면을 상상해보라.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말씀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지붕이 뜯어지고 먼지와 흙덩어리가 떨어지는 가운데 침상에 누운 한 남자가 침상 채로 매달려 내려오는 장면을!
예수님께서는 친구들의 믿음을 특별하게 생각하셨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친구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 친구들로 하여금 행동하게 만들었고, 이들의 믿음의 행동에 예수님은 응답하셨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주실 때 먼저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육신의 질병보다 먼저 해결되어야 할 것이 인간의 죄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모든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께 가는 길이 많은 사람들로 가로막혀 있을 때 포기하고 돌아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중픙병 친구는 평생을 질병의 고통 가운데 살았을 것이며 영혼의 구원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친구들이 포기하지 않고 장애를 극복하고 협동하여 주님 앞에 나아갔기 때문에 병 고침의 은혜와 함께 영혼의 구원도 받게 되었다. 오늘 내 주변에 육신의 문제, 영적인 갈급함으로 나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는 없는지 살펴보자. 그들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구원의 주님 앞으로 데리고 나아가자!
3월 4일
금식논쟁 (마가복음 2:18-22)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부드러운 마음
예수님 당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죄를 슬퍼하는 표시로, 그리고 메시아가 오실 것을 준비하는 표시로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였다.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 왜 금식하지 않느냐고 질문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이미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계셨기 때문에 금식할 필요가 없었다. 질문하던 이들은 예수님이 구세주, 메시아이신 것을 알아보지 못했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습관적으로 금식하며 신앙적 의무를 행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에서는 포도주를 염소가죽으로 만든 부대에 넣어두었다. 새로 만든 포도주는 발효될 때 부풀기 때문에 부풀어 오르는 압력에 자루가 찢어지지 않도록 부드러운 새 부대에 넣어야 했다. 바리새인들의 마음은 마치 낡은 부대처럼 굳고 완고해져서 자신들의 전통이나 규율을 지키도록 가르치지 않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우리의 신앙이 때로 바리새인 같지는 않은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함께 하는 기쁨과 은혜를 누리지 못한 채 형식적인 믿음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의 마음이 딱딱해져서 주님이 인도하시는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변화되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낡고 완고하고 딱딱해진 마음을 버리고 부드러운 새 마음을 가지자. 신랑 되신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신부의 기쁨을 누리며 즐거워하자.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 새로운 영적 차원의 인생을 살게 된 주님의 신부들이다. 옛 것은 지나가고 새롭게 된 사람들이다.
3월 5일
예수님과 사탄 (마가복음 3:20-30)
20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21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23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25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26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 27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29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30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용서받지 못하는 죄
예수님께서 온갖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귀신을 쫓아내는 등 세상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한 능력으로 일하시자 어떤 이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예수님의 일가친척들은 미쳤다고 말하는가 하면 서기관들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게 사로잡힌 결과라고 매도하였다. 성령의 능력에 의한 이적을 사탄의 힘을 이용한 사술이라고 비난하는 서기관들에게 예수님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절대 용서받지 못한다고 엄하게 경고하셨다. 예수님은 인간을 유혹하고 죄에 빠뜨리는 사탄 마귀를 멸하러 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 예수님이 마귀의 힘으로 일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예수님을 가장 모욕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일가친척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하고 단지 자신들의 가족의 일원으로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행동을 불신하고 오해했듯이 인간의 제한된 이성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믿음을 저해하는 큰 요인이 된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 즉 예수님을 모독하는 죄가 물론 다른 죄보다 더 심각해서 용서받지 못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사람은 마음이 너무 완고하게 굳어져서 성령께서 경고하시며 영혼을 자극하시는 것을 무시하고 용서를 구하지 않기 때문에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놓치게 되어 결국 용서받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대해서는 닫혀있고 세상에 대해서만 열려있다면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느낄 수 없어 결국 세상의 풍조대로, 육신의 소욕대로 살게 된다.
오늘 하루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나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온전히 맡겨드리고 그분의 뜻대로 살자. 세상의 풍조와 육신의 소욕대로 살면 반드시 성령을 거스를 수밖에 없으며 결국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게 된다.
3월 6일
예수님의 가족 (마가복음 3:31-35)
31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2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진정한 가족
예수님의 가족들은 아직도 예수님의 사역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계실 때 어머니와 동생들은 말씀을 듣는 자리에 함께 있지 않고 밖에 있었고, 오히려 자신들의 용무를 위해 예수님을 밖으로 불러내고자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신을 둘러싸고 앉아 말씀을 듣는 이들을 향해 그들이 자신의 가족, 곧 어머니요 형제자매라고 하시며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주님의 가족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는 육신의 어머니와 형제자매들도 중요했으나 영적 가족관계는 육신의 가족, 친척들과 오랫동안 쌓아온 관계보다 궁극적으로 더 중요함을 알려주심으로써 장차 주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훈을 주신다.
육신의 출생을 통해 한 가족의 구성원이 되듯이 영적 거듭남을 통해 예수님의 가족이 된다. 이 길은 누구에게든지 항상 열려있고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영적으로 예수님과 한 가족이 된 이들은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하고, 안에 있을 뿐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항상 묵상하며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애쓴다. 육신의 가족이 서로 사랑하고 돌보며 필요를 채워주듯 영적 가족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이름으로 서로 사랑하고 돌보고 배려한다.
우리가 늘 만나며 함께 믿음생활을 하는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나의 진정한 가족이라고 생각하면 그들을 대하는 나의 마음과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세상은 점점 더 메마르고 비인간적으로 변하고 있지만 우리들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얻을 수 없는 기쁨과 사랑, 평안이 가득한 영적 가정,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자!
3월 7일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앗 비유 (마가복음 4:2-9)
2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3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나의 마음 밭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시기 위해 비유로 말씀하셨다. 비유를 사용하는 교육방법은 듣는 이들로 하여금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장점이 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나가서 씨를 뿌렸는데 씨가 여러 종류의 땅에 떨어졌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씨 뿌리는 자는 예수님,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의미하고, 네 종류의 땅은 하나님의 말씀에 상이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의미한다. 길가나 돌밭과 같이 딱딱하게 굳어진 마음에는 말씀이 심어질 수 없고 싹이 나기를 기대할 수도 없다. 세상의 염려와 근심의 가시들이 있는 마음에는 말씀이 들어가도 가시에 막혀서 결실하지 못한다.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기는 이중적 태도로 사는 이들의 마음이 이러하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며 실천하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에 뿌려진 씨는 성장하여 많은 결실을 맺게 된다.
한 사람의 인생 여정 속에서도 어떤 상태, 어떤 시기에 있느냐에 따라 말씀이 마음속에 못 들어오기도 하고, 들어와도 뿌리내리지 못한 채 말라버리기도 하며 혹은 많은 결실을 맺기도 한다. 씨를 뿌리는 이는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고 수고하지만 항상 많은 결실을 얻는 것은 아니다. 복음을 전할 때 눈에 보이는 결실을 거둘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므로 결과에 실망하여 씨뿌리기를 중단하지 말 것을 예수님은 또한 가르쳐주신다.
나의 마음 밭은 지금 어떤 상태인가? 거친 돌밭 같지는 않은지, 세상의 일들로 가시덤불이 가득 자라 있지는 않은지, 말씀의 기쁨을 빼앗아가는 무엇인가 내 안에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자. 내 마음 밭을 갈아엎어 씨를 뿌리고, 타인의 마음 밭에도 부지런히 복음의 씨를 뿌려 풍성한 결실을 추수하는 농부가 누리는 그러한 기쁨을 함께 누리자.
3월 8일
자라나는 씨와 겨자씨 비유 (마가복음 4:26-34)
26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그가 밤낮 자고 깨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30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3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32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33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확장하고 성장하는 하나님의 나라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상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자라나는 씨의 비유는 복음이 갖는 역동성에, 그리고 겨자씨 비유는 복음 확장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결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자라나는 씨의 비유는 우리의 영적 성장이 지속적이고 점진적인 과정임을 알려준다. 사람이 씨를 뿌리면 씨가 터져서 싹이 나고 자라서 이삭이 맺히고 충실한 곡식이 되는 과정은 하나님께서 담당하신다. 씨 뿌리는 이가 수고하여도 하나님께서 자연을 적합하게 관리해주시지 않으면 결실하지 못한다. 말씀의 씨앗을 잘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는 인간이 하지만 성령께서 그 말씀이 영혼 속에 뿌리내리고 자라게 하신다. 인간은 인간의 몫을 이행하고 하나님은 하나님 몫을 행하셔서 수확의 때에 거둘 것이 있게 된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수고할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성장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관적인 사역이며, 그 완성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3:6)라고 고백한다.
겨자씨는 아주 작은 것인데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미하게 시작되어도 자라서 놀랍게 풍성해질 것을 말씀하신다. 예수님도 당시 세상 권세자의 눈에는 마치 겨자씨 같이 하찮게 보였을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심으로써 그 생명이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모든 인생들의 영혼 속에서 풍성하게 살아나게 하셨다.
오늘 하루를 지내며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허물 많은 우리를 동역자로 사용해주시고 함께 결실의 기쁨을 누리게 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하나님 나라를 위한 우리의 수고가 때로 미약하게 보일지라도 결과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
3월 9일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4:35-41)
35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람더러 이르시되 잠잠하고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라
갈릴리 호수는 주변의 산들로부터 예측할 수 없는 광풍이 몰아쳐 호수에 높은 파도가 일 때가 있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가던 중 호수에 큰 광풍으로 인해 파도가 일고 물이 배에 가득차자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들은 예수님이 지금까지 행하신 많은 이적을 보았고, 예수님이 배 안에 함께 계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진정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 결과 문제에 부딪혔을 때 예수님의 권능에 의지하고 담대하게 대처하기 보다는 거센 풍랑으로 인해 죽게 될 위기에 처한 것만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자신들의 노련한 경험으로도 거친 풍랑에 대처하지 못하고 결국 고단하여 배에서 주무시고 계시던 예수님을 깨우며, 예수님이 자신들의 곤경을 돌아보지 않으신다고 원망하는 말투로 도움을 요청했다. 바람을 꾸짖으시며 잠잠하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바람이 그치고 잔잔해지자 광풍으로 두려워했던 제자들은 이번에는 광풍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 두려워하며 과연 이런 일을 행하시는 분이 누구신가하며 놀라워했다.
바람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의 능력은 때로 폭풍처럼 다가오는 문제들로 인해 두려워하는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도움을 요청하기만 하면 예수님은 언제든지 우리를 도우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그러므로 어떤 심각한 위기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오늘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로 인해 근심하고 있지는 않은가? 높은 산과 같이 앞을 가로막고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장벽이 있지는 않은가? 언제든지 우리를 도우시고자 준비하고 기다리고 계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그분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3월 10일
고향에서 배척당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6:1-6)
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은 어찌됨이냐 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선입견
예수님은 거라사인 지방에서 귀신 들린 사람과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아이를 살려주신 후 제자들과 함께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으로 가셨다. 나사렛의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권능을 행하시자 그곳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던 마리아의 아들인 예수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지 의아해하였다. 예수님의 어릴 때부터 자라는 모습을 계속 보아왔던 그들에게는 예수님은 단지 그들과 똑같은 한 인간에 불과하였고 자신들보다 나을 게 없었다. 그저 평범한 목수일 뿐인데 사람들이 예수님으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고 그분을 따르는 것을 시기하고 배척하였다. 이러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던 이들에게는 주님의 권위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나사렛에서는 더 이상 이적을 행하실 수 없었고, 그들은 구원받을 기회를 잃어버렸다. 예수님이 베푸신 이적을 본 후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주여 나는 죄인이오니 나를 떠나소서”(눅5:8)라고 고백한 베드로와 대조적인 모습이다.
우리도 교회 안에서나 혹은 밖에서나 종종 선입견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거나 자신의 기준에 의해 판단할 때가 있다. 타인을 대할 때 선입견을 가지고 대하면 그 사람의 참모습을 보기 어렵다. 사람에 대해서 뿐 아니라 하나님께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선입견은 우리의 눈을 가려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우리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 느끼고 인식하고 체험하는 것보다 예수님은 훨씬 크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르게 깨닫지 못해 은혜 받을 기회를 놓쳐버린 것 같은 그런 잘못을 우리는 범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의 영의 눈이 열려 오늘 하루의 생활 가운데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바라볼 수 있기를 소망하자. 오늘 우리의 삶을 인도해주시는 분은 전능하시고 사랑이 가득하신 주님이신 것을 영혼의 눈으로 바라보고 주님이 베풀어 주실 은혜를 사모하며 기대하자.
3월 11일
열두 제자들의 파송 (마가복음 6:7-13)
7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8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9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10 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11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12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13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순종의 결과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열두 명의 제자들은 제자로 선택받을 만한 특별한 능력이나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다. 특별히 더 큰 믿음을 가지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가지고 있던 한 가지 특성은 바로 예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였다.
예수님은 조화와 협력을 통해 보다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제자들을 두 명씩 짝을 지어 보내시며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을 주시고, 지팡이 외에는 돈이나 양식도 가지지 말고 두 벌 옷도 입지 말고 가라고 명하셨다. 팔레스타인 지방은 일교차가 심해 온 몸을 감싸는 겉옷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주님의 일을 행함에 필요한 것은 주님께서 채워주심을 믿고, 가장 최소한의 것만을 가지고, 가장 중요한 믿음을 가지고 나가게 하신 것이다. 주님의 명령을 생각해보면 오늘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을 위해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 뿐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가진 것을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돌아보자.
제자들은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순종하였다. 유대 마을을 다니면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병자를 고치는 등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그대로 행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일들을 통하여 스스로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였다. 순종의 결과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들을 통하여 일하심을 보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그분과 함께 갈 것인지 아니면 뒤에 남아 있을 것이지. 예수님은 비범한 일을 행하시기 위해 평범한, 그러나 순종하는 사람들을 사용하신다. 주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따름으로써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들 중 하나가 되자.
3월 12일
오천 명을 먹이시다 1 (마가복음 6:30-34)
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 도 없음이라 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 새 33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쉼과 회복
제자들이 그들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한적한 곳으로 보내어 휴식을 취하게끔 배려하셨다.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쉼과 회복이 필요하다는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 힘든 일을 한 후 취하는 조용한 휴식은 육체적인 쉼을 갖는 것 뿐 아니라 행한 일에 대한 정리와 평가를 하며,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우는데 필요한 정신력을 회복시켜 준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 출애굽한 이후 광야의 생활을 통해 육신의 쉼을 가지며,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 영적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되고 다듬어져 가는 회복의 시간을 경험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잠시 쉬기 위해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갔으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일행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예수님은 쉼을 방해받았으나 기다리고 있던 군중들을 탓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목자 없는 양같이 불쌍히 여기시며 그들의 곤고함을 채워주셨다.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그들이 알아야만 하는 것들을 가르쳐주셨고, 목자 없는 양이 위험한 길로 가듯이 하나님 없이는 어리석은 길로 갈 수 밖에 없음을 명심하도록 깨우쳐주셨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쉼이 방해받았던 것처럼 때로 우리의 일상의 시간계획을 방해하는 일이나 사람들이 있을 때 그것을 성가시게 느끼는지 아니면 그것도 우리의 삶 가운데 감당해야 할 봉사라고 기꺼이 받아들이는지 생각해보자.
체로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아주 먼 길을 여행할 때에 단숨에 그 길을 다 달려가지 않는다.
가다가 잠시 쉬면서 자신이 달려온 길을 돌아보고, 행여 너무 빨리 달려 자신의 영혼이 미처 따라오지 못한 것은 아닌지 잠시 기다린다고 한다. 인생을 살아갈 때 목표를 향해 부지런히 달려가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잠시 쉬며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앞으로 가야할 길을 점검해보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3월 13일
오천 명을 먹이시다 2 (마가복음 6:35-44)
35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들이요 나도 저물어가니 36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37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39 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40 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41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42 다 배불리 먹고 43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44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
가지고 있는 것을 주라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듣고 배우고 얻기를 사모하여 모인 수많은 무리들에게 천국 복음을 가르치시던 중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모인 무리들은 장시간 말씀을 듣느라 허기가 져서 음식을 먹어야 했으나 모여 있던 곳은 음식을 쉽게 구할 수 없는 빈들이었다. 제자들은 합리적인 방법을 생각해내었다.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뜻밖의 대답을 하셨다. 제자들은 모인 무리들을 먹이기 위해서는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떡을 사야만 할 것이라고 계산했다. 이백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가 받는 임금 8개월 치 정도의 액수였다. 제자들은 그만한 돈도 없었고, 살 곳도 마땅치 않은 곳에서 예수님께서 상황파악을 못하신다고 생각하며 퉁명스럽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가지고 있었던, 한 사람이 먹을 분량 밖에 되지 않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가지고 왔을 때 예수님은 그것을 축복하며 기도하시고 나누어줘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바구니에 차게 남는 이적을 체험케 하셨다. 당시 집 밖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따로 떨어져 식사하고 아이들은 여인들과 식사하는 것이 유대의 풍습이었다. 남자만 오천 명이었으니 모인 이들은 아마도 만 명은 넘었을 것이다.
누군가 가지고 있었던 것,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소용에 비해 턱없이 적은 것이었지만 예수님의 손에서 필요를 충분히 채우고도 남음이 되었다. 때로 우리는 주님께 너무 적은 것 밖에 드릴 수 없다고 느낀다. 그러나 주님께서 사용하시도록 기꺼이 내어드리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재능이든지 시간이든지 혹은 소유이든지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풍성하게 하실 수 있다. 우리의 자산을 주님께 드릴 때 그것은 풍성해진다. 가지고 있는 것을 - 자신을 포함하여 -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도록 드려보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하시는지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3월 14일
수로보니게 여자의 믿음 (마가복음 7:24-30)
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 발 앞에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위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믿음
예수님은 유대 지도자들의 대립에 부딪쳐 잠시 갈릴리 지역에서의 전도를 중단하시고 두로 지방으로 옮겨가셨다. 그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계시고자 했으나 이미 예수님께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있었고, 이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영적인 빛은 어디를 가시든지 드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로 인해 온 몸과 마음이 고통 가운데 있던 한 이방인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와 자신의 딸을 고쳐주시기를 간구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냉정한 말로 이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셨다. 예수님은 유대인을 자녀로, 이방인을 개로 비유하시며 여인의 요청을 거절하셨으나 이 여인은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매달렸다. 자신과 딸을 개에다 비유한 예수님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있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대답한 이 여인은 얼마나 간절하고 지혜로운가! 바리새인들은 형식적인 믿음으로 예수님과 계속 대립함으로써 영적으로 치유 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쳤으나, 여인은 간절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매달림으로써 딸의 육신적 치유와 함께 영적 구원의 은혜를 얻었고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마15:28)고 하시는 예수님의 칭찬을 들었다.
우리의 기도가 즉각적으로 응답되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질 때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겸손함과 간절함으로 은혜를 구한 자세는 바로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의 모습이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훈련하시고자 시험을 주시지만 우리의 처지와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시고 아픔을 치유해주시며 간구에 응답하신다.
오늘도 하루를 지내며 나의 믿음이 형식적이지는 않은지, 기도의 응답이 없다고 쉽게 포기하지는 않는지, 주님 앞에서 언제나 겸손함과 간절함으로 주실 은혜를 기대하고 있는지 돌아보며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하자.
3월 15일
베드로의 고백 (마가복음 8:27-35)
27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 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 죽음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9:1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잃는 것과 얻는 것
베드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이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앞으로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처음으로 말씀하셨고, 베드로는 어떻게 이런 일이 메시야이신 예수님께 일어날 수 있는지 항변하였다. 하나님의 시각이 아닌 자신의 개인적인 시각과 소망, 감정을 가지고 예수님을 세상의 왕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이사야서 53장의 고난 받는 종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세상적인 시각과 사고방식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진정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들은 열심히 세상이 주는 만족과 즐거움을 찾고, 무가치하고 허무하게 끝날 소유와 명성, 권력을 얻고자 영혼을 소홀히 하는 어리석음 가운데 살아간다. 그러한 세상에서 내면으로부터 끊임없이 올라오는 세상적 추구를 절제하고,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고자 하는 이기적인 결정과 노력을 포기하고, 주님께서 인생의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세상에서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잃는 것 같아 보이지만 주님 안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이 풍성한 영적인 생명을 얻게 된다. 자신이 귀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얻고도 영적 생명을 잃어버리면 과연 그 얻은 것이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지금 예수님께서 내게 물으신다면 나는 예수님을 나의 주인, 나의 구세주라고 고백할 수 있는지, 그분이 나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나의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까지도 그분께 드릴 수 있는지 생각하며 오늘도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가자.
3월 16일
변화산 사건 (마가복음 9:2-8)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3 그 옷에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7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8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베드로의 신앙고백 후,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에 대해 말씀하신 후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그들 앞에서 본래적인 신적 형상으로 변화하셨다. 그 때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세 명의 제자들이 보았다. 구약성경에서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는 가장 위대한 선지자의 도래를 예언하였고(신18:15-19) 엘리야는 메시야의 도래를 예언한 (말4:5-6) 선지자들을 대표한다. 예수님이 변형되신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은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야의 도래가 바로 예수님이 오심으로 성취되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 사실을 확증해주듯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중에서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눅9:27) 바로 세 명의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께서 천상의 모습으로 변형되신 것을 함께 경험하였다. 예수님께서 왜 특별히 이 3명을 택해서 자신의 영광과 순결함을 계시해주셨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이들은 다른 제자들에 비해서 좀 더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아가 예수님은 이들이 앞으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받아야 할 고난을 알고 계셨기에 그들이 고난 가운데 천국을 소망하며 견뎌낼 수 있게 하시고자 그들에게 천국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셨을 것이다.
세 명의 제자들은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말했으나 먼저 세상에 내려가 감당해야 할 사명과 고난이 있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할 다양한 사람들을 부르셨고, 우리들을 부르셨다. 우리가 그저 세상의 자리에서 있는 것을 좋아할 것이지, 아니면 언젠가 주님과 함께 그 좋은 곳에 있게 될 것을 소망하며 각자 부르신 자리에서, 그것이 비록 고난의 길일지라도 주신 사명 감당하며 살아갈 것이지 선택해야 한다.
3월 17일
누가 크냐 (마가복음 9:33-37)
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34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36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가장 큰 자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고 하시는 예수님의 질문은 제자들을 당황케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끊임없이 개인적 성공을 추구하면서 누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누가 더 주님께 신뢰를 받아서 높은 자리를 얻을 것인지 서로 다투던 것을 예수님께 들킨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적인 하나님 나라에 대해 눈을 뜨지 못했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스도인으로써 높은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위해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목표와 노력이 자신 만을 위한 이기적인 것이거나, 주님께 대한 순종이나 사역의 내적인 동기가 자신의 세상적인 목표의 성취에 있다면 이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 빠지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우리의 내면을 주의 깊게 살펴서 올바른 동기에 의해 움직이는지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정 높아지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연약한 어린 아이 하나, 선을 베풀어도 아무 대가도 받을 것이 없어 보이는 지극히 작은 사람에게 행한 것이 곧 주님께 행한 것이고,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께 행한 것이라 하시며 섬김의 도를 가르치셨다. 세상 나라에서는 서로 높아지려고 하고, 큰 자가 섬김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연약한 자를 섬기는 자가 가장 큰 자가 된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하루를 살아가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장 미약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사랑으로 섬김으로써 주님이 가르쳐주신 가장 큰 자의 삶을 실천하자.
3월 18일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시다 (마가복음 6:45-47)
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47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혼자의 시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 이상의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배를 타고 먼저 벳세다로 가게 하시고, 모인 무리들을 다 돌려보내신 후 기도의 시간을 갖기 위하여 혼자 산으로 올라가셨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매일의 꽉 찬 사역 중에도 홀로 아버지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을 우선적으로, 지속적으로 하셨음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도의 시간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의 근원이 되며 삶의 과제와 중압감을 이겨내는 힘의 원천이 된다. 일상의 바쁜 가운데 기도하기 위해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기도는 우리와 하나님의 사이를 이어주는 결정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하나님의 일을 행하실 때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셨다. 예수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다”는 겟세마네의 기도를 우리는 기억한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하여 종종 다른 이들로부터 홀로 떨어져있어야 한다. 홀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그 시간 우리는 가장 솔직하게 자신을 볼 수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지 알게 된다. 코람데오의 시간이다. 이를 위해 이른 아침 일어나는 수고를 해야만 할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조용한 시간을 갖는 원칙을 발전시켜 보라.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영적으로 성장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도와줄 것이다.
3월 19일
죄에 대한 경고 (마가복음 9:42-50)
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4 (없음)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6 (없음)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8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9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나의 짠 맛은 충분한가?
우리는 신앙 생활하면서 부지중에 다른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할 수 있다. 무심코 던진 말 한 마디, 사소한 행동이 공동체 안의 형제자매들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고, 믿음이 약한 이들을 넘어지게 하거나 믿음에서 떠나게 만드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가까운 사람, 혹은 가족들에게 가깝다고 부주의하게 말하고 행동하다보면 상처를 주기 쉽다. 예수님은 다른 이들을 시험에 빠지게 하는 것이 큰 잘못임을 심각하게 경고하셨다.
삶에서 죄를 제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손이나 발이나 눈이 죄를 범하면 범죄한 지체를 잘라내는 것이 낫다는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셨다. 사실 범죄는 손이나 눈이 것이 아니라 생각이 한다. 생각이 몸을 지배하여 행동으로 나오므로 생각 속의 죄를 뿌리 뽑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행하지 않기 위해 내면에서 일어나는 죄된 생각을 뿌리치는 것은 마치 손을 잃거나 눈을 잃는 것 같은 고통이 따른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특징을 소금에 비유하셨다. 소금의 기능은 맛을 내는 것과 부패를 방지하는 것으로써 인간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지만 그 맛을 잃어버리면 아무 쓸모가 없어 버릴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에서 소금과 같은 역할, 곧 생명력을 공급할 뿐 아니라 부패를 방지하는 책임을 다할 것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며 서로 자리다툼하고 높아지려고 하던 제자들에게 헛된 것에 대해 논쟁하지 말고 세상에 대한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고 교훈해주셨다.
이 세상에서 나의 삶은 소금으로써 충분히 짠 맛을 내고 있는지, 나는 어떤 맛을 내며 살고 있는지 살펴보자.
3월 20일
야고보와 요한이 구하는 것 (마가복음 10:35-45)
35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9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진정한 리더십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이 이루실 왕국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얻기를 원하였다. 인류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날이 다가오고 있었으나 제자들은 여전히 지상의 왕국을 꿈꾸며 한 사람은 주의 우편에, 한사람은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함을 알지 못했으므로 예수님께서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고 물으실 때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오히려 다른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예수님도 자신의 목숨을 내어줌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 갚아주시는 섬김의 종으로 이 세상에 오셨음을 알려 주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계획, 자신의 임무를 완성하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좌우편에 있었던 이들은 야고보와 요한이 아닌 두 강도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써의 사역을 어떻게 완성하셨는지 십자가를 통해 뒤늦게 깨달은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의 질문에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한 것 같이 복음을 위해 순교함으로써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기를 꿈꾸고 소망한다.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더 높은 목표,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소유를 위해 달려가라고 유혹한다. 그러나 주님은 진정 높은 자리는 섬김의 자리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섬김의 리더십이다. 오늘 하나님 나라에, 그리고 이 세상에 필요한 진정한 리더십은 섬김의 리더십이다. 서로를 위해 섬기고 필요를 보충해줄 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이루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들 가운데 이루어진다.
3월 21일
맹인 거지 바디매오 (마가복음 10:46-52)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가 가까워져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던 중 여리고를 지나게 되었다. 맹인으로 태어나 구걸하며 살아가던 바디매오는 길에 앉았다가 예수시란 말씀을 듣고 즉각 반응하였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치며 주변 사람들의 책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간절하게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시자 겉옷 –그의 가장 중요한 재산이었을 - 을 챙길 여유도 없이 즉각 예수님께 달려간 그는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씀드렸고, 예수님은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응답해주셨다. 바디매오는 육신의 몸으로 세상에 계시는 예수님의 생의 마지막 시간쯤에 예수님을 만나는 은혜를 누렸다. 그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 있던 기회를 믿음으로 붙잡았다. 그 결과 그는 암흑 속에 살고 있던 고통스러운 인생으로부터 벗어나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영혼의 눈도 뜨게 되어 구세주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되는 놀라운 은혜를 얻게 되었다.
우리는 눈을 뜨고 있으나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지 못해 마치 어두움 가운데 있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우리의 영혼이, 우리의 삶이 어두움 속에서 괴로울 때 바디매오와 같이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간절히 외쳐보자. 이 세상을 비추는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간절한 외침에 응답하셔서 영혼의 어두움을 밝혀주시고 세상의 것밖에 보지 못하는 눈을 밝혀주셔서 보아야 할 것을 보게 해주실 것이다.
오늘도 하루를 지내며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주님께 간구하여 우리를 앞서 가시며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되기를, 우리 안에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하자.
3월 22일
성전을 깨끗케 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11:15-18)
15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내 속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예물을 가지고 가야 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은 흠이 없어야 했기 때문에 예물에 흠이 있는지 없는지를 까다롭게 검사했다. 이스라엘 바깥지역에서 절기를 지키려고 예루살렘 성전을 찾는 이들은 먼 여행길에 예물로 드릴 짐승을 흠 없이 가져오기 어려웠으므로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상인들로부터 예물로 드릴 짐승을 사곤 하였다. 이런 이유로 예루살렘에서는 상업이 발달하였는데, 여기에 성전에서 일하는 이들과 상인들의 이권이 개입되면서 부정한 거래가 만연해졌다. 집에서 미리 준비해 가져간 예물은 부적격 판정이 내려지기 일쑤였고, 성전 안에서 검인을 받은 제물들이 비싼 값으로 매매되었다. 성전에 드리는 헌금은 따로 지정된 화폐만 사용할 수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환전상에게 가서 성전에 낼 수 있는 화폐로 바꾸어야만 했고, 환전상들은 환율을 마음대로 조정하며 부당한 이득을 취하였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들이 성전에까지 들어와 이런 장사를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거룩하게 드려야 할 성전 제사가 상업주의로 변질되어 타락한 것을 보시고 예수님이 너무나 화가 나서 장사들을 내쫓고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일이 두 차례나 있었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만민의 기도하는 집’인 우리의 교회가,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예배가 감사와 헌신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그저 형식적으로, 혹은 세상의 풍조에 휩쓸려 세속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시며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의로운 분노를 발하고 계실지 모른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깨우쳐주신다. 성전된 나의 영혼 속에 과연 무엇이 있는가?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는지, 아니면 이기심과 욕심, 위선과 교만으로 인해 그 옛날 장사꾼들로 어지럽던 성전과 같은 모습이지는 않은가 살펴보자. 예수님께 책망 받지 않도록 있어야 할 것을 있게 하고 버려야 할 것을 버려 거룩한 성전의 모습을 회복하자.
3월 23일
말라버린 무화과나무 (마가복음 11:20-25)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응답받는 기도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가시던 중 시장하신 예수님께서 길에 있는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따서 드시고자 하였으나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에는 정작 열매가 없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향하여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고, 이 말씀을 동행하던 제자들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 채 마른 것을 본 베드로가 놀라며 의아해하자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산이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슨 일이든 가능케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은 일부러 이러한 비유를 사용하셨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의심하지 않으면 응답받지 못할 일이 없음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전제로 한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올바른 관계는 이웃과 우리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전제로 한다. 이웃이나 형제자매와의 관계가 잘못되면 기도의 효과가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다른 이들과 불화와 다툼이 있다면 먼저 용서하고, 해결한 뒤 기도해야 하며, 이러할 때 비로소 하나님도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때로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해 낙심하고 실망하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나의 기도가 응답받을 수 있는 기도인지 살펴보자.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한 채,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하지 못한 채 의심하며 흔들리는 기도를 하고 있지는 않은가? 형제자매들과의 불화를 해결하지 못한 채 기도하고 있는가? 내 자신 안에 기도의 응답을 가로막는 원인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고 그것들을 먼저 제거하자.
3월 24일
가장 큰 계명 (마가복음 12:28-34)
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 예수께서 그가 지혜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서기관은 원래 성경을 필사하는 사람이었는데 후에는 성경을 능숙하게 해석하는 선생으로 대접받았다. 바리새인이라고 불리는 율법학자들과 서기관들은 유대인들에게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적극적으로 행해야할 248개의 율법과 하지 말아야할 율법 365개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구분하고자 했으며, 유대인들로 하여금 이 많은 율법들을 다 지키도록 가르쳤다.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많은 율법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여 첫째는 하나님 사랑, 둘째는 이웃 사랑이라고 대답하셨다. (신6:5, 레19:18) 서기관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질문하였으나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대답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참된 의미를 상실하고 형식과 전통에 빠져있던 서기관에게 율법의 본질은 사랑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셨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타인을 대할 때 마치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 같이 마음을 쓰고 돌본다면 우리는 십계명의 정신과 그 외의 다른 구약의 계명들을 이행하는 것이 된다. 예수님은 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일한 선상에서 말씀하셨을까?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창조물인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도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요일4:20)
우리의 생각과 결정, 그리고 행동들이 모두 이 두 가지 계명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도록 하자. 우리의 삶의 어떤 행동방식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최상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오늘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자.
3월 25일
부활논쟁 (마가복음 12:18-27)
18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19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로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0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21 둘째도 ... 22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23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25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26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27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다 하시니라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우리가 언젠가 가게 될 천국은 과연 어떤 곳일까? 이 땅에서 인연을 맺었던 이들을 천국에서 다시 만난다면 어떤 모습으로, 어떤 관계에서 만나게 될까? 우리는 간혹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데 예수님 당시에도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두개인이 이와 비슷한 질문을 예수님께 드렸다.
지금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되지 않지만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결혼한 여인이 남편과 사별하면 남편의 형제와 살면서 가문과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므로 언젠가 천국에 가면 과연 누가 누구와 부부관계로 만나겠냐는 질문은 그럴 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사두개인의 질문은 부부관계에 관한 것이 아니라 부활 자체를 부정하면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고자 하는 질문이었다.
부활 후의 삶이 어떠할지는 우리의 상상력을 훨씬 뛰어 넘는다. 사두개인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우리가 들어갈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은 단순히 지상에서의 삶의 연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새로운 질서로 새롭게 계획해놓으신 곳임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인간의 논리와 지식으로, 육신적 기준으로 부활 후의 삶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는 모든 죽은 자가 산자이다. 믿음의 사람은 부활하여 영생으로, 불신자는 부활하여 영벌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우리는 언젠가 가게 될 천국이 어떠한지를 묻기 보다는 현재의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과 신뢰의 관계에 집중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준비해놓으신 그곳에서 영원히 그분과 함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3월 26일
종말의 때 (마가복음 13:32-37)
32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3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34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35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36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깨어 있으라
기독교 역사 속에서 종종 종말의 때가 언제인지 알고자 하는 시도에서 비롯된 이단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비밀한 계획 가운데 있는 것을 인간의 유한한 지식으로 알아내고자 하여 종말의 때를 예측하며 사람들을 미혹하는 교만과 불신앙의 죄를 범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그날과 그때는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시며 주의하고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날과 그때가 언제인지 알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종과 문지기의 비유를 통해 알려주셨다.
어떤 사람이 타국으로 가면서 그 종들에게 각각 권한을 주어 사무를 보게 하였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였다.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알려주고 떠났더라면 종들은 아마 중간에 게으름을 부리며 잘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알지 못했으므로 종들은 항상 맡겨진 일들을 제대로 이행하고 있어야만 했다.
언젠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만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 그 날이 이르기까지 이 땅에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과제를 잘 감당하는 것 또한 우리 삶의 목적이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씀이라고 하시면서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셨다. 집을 지키는 문지기처럼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고, 자신의 믿음과 교회와 세상을 사단으로부터 지켜야하는 과제를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셨다. 내 영혼이 혹시 하나님께 대하여는 자고 있고, 세상에 대하여는 깨어있는 것이 아닌지 점검해보자. 주님의 명령대로 우리의 영혼이 깨어 있어서 이 땅에서의 삶을 하나님께 충성된 종으로써 살아갈 뿐 아니라, 주님의 재림과 하늘의 영광된 상급, 영원한 삶을 바라볼 수 있어야겠다.
3월 27일
마지막 만찬 (마가복음 14:22-26)
22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라 하시고 23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24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6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니라
성찬예식의 의미
이스라엘이 그 옛날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빠져나온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유월절기가 되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셨다. 유월절에는 원래 어린 양을 잡아 고기를 불에 구워서, 누룩을 넣지 않고 구운 딱딱한 떡과 쓴 나물과 함께 먹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눈 유월절 식사에는 양고기는 없었고 떡과 포도주만 있었다. 예수님께서 이제 곧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양으로, 유월절 어린 양으로 내어주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떡과 잔을 나누실 때, 떡을 자신의 몸이라 하시고, 잔을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언약의 피라고 하시며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심으로 구약에서 예언된 대로 인류의 구원을 이루신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성찬예식을 행하라고 제정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날 교회에서 행하는 성찬예식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것이고, 그 죽음이 무엇을 위한 죽음이었는지 기억하는 것이다. 나아가 성만찬에 참여하는 개개인이 이제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공동체가 한 몸이 되며, 교회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그리스도로 인해 한 형제자매가 되었음을 고백하며 시인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낮추어 이 땅에 육체의 몸으로 오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찬예식 안에 현존하시며 우리와 한 몸을 이루시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새로운 창조를 이루신다. 이 얼마나 신비하고 놀라운 은혜인가! 성찬에 참여하면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주신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 우리도 자신을 다른 이에게 나누어줄 수 있기를 소망하자.
3월 28일
베드로의 부인 (마가복음 14:26-31)
26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니라 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29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1 베드로가 힘 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환난 가운데 증명되는 믿음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릴 것을 알고 계셨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은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고,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는가?
변화산에서 예수님께서 하늘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신 것과,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대화하던 모습을 보았던 제자들은 그러한 놀라운 체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대제사장 앞으로 잡혀갔을 때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하였다.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장담한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여종이 예수와 같은 편이 아니냐고 묻는 말에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마지막에는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주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인간적 용기로 호언장담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을 도와주시기를 주님께 요청했어야 했다. 우리는 이렇게 연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이다. 아무리 큰 은혜를 체험하고 믿음이 깊은 것 같아도 위기상황이 닥치면 우리는 쉽게 믿음에서 흔들리며 의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하나님께 고백하면서 그분의 도우심을 요청해야 하겠다.
만일 내가 베드로와 같은 형편에 처했다면 어떻게 했을까? 만일 지금 주님 때문에 고난 받을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주님을 따르며 주님께 헌신한다고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우리의 헌신의 고백은 고난을 이겨낸 후에야 인정받을 수 있다. 우리의 믿음이 외적인 어려운 상황들 속에서 증명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고 담대한지 생각해보자.
3월 29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1 (마가복음 15:21-32)
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22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 (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23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24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 새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25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26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27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28 (없음) 29 지나가던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30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3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콘트라스트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의 장면에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보게 된다. 무거운 십자가를 강제로 대신 지고 간 구레네 사람 시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 십자가에서 극심한 고통 가운데 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이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밑에서 옷을 나눠가지려고 제비뽑기를 하고 있는 군인들,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동일한 십자가 형벌을 받고 죽어가는 두 명의 강도들, 피 흘리며 고통 가운데 죽어가고 있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하며 욕하는 사람들 ...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후 얼마나 악한 모습으로 타락했는지 이들의 모습 속에서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이런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셔야했다. 하나님의 신성을 조롱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하늘의 것을 보지 못하고 땅의 것만을 보며 살아가는 인생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시기 위해 그들이 멸시하고 조롱하는 저주의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함께 경험하고, 죽음을 목격한 구레네 사람 시몬의 가
정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새 생명을 얻고 복음 전하는 일에 헌신하게 되었다.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는 예수님을 저주하며 죽어갔으나, 다른 한 강도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간청하였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39-43)는 예수님의 응답을 받아 생의 마지막 순간에 새 생명을 얻는 구원의 은혜를 얻었다.
예수님께서 처절한 죽음으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고, 온 인류에게 새 생명 얻는 길을 열어놓으신 극적인 대조가 오늘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깨닫게 해준다.
3월 30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2 (마가복음 15:33-39)
33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5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36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위대한 승리
온 인류를 죄를 대신 갚아주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약 6시간 동안이나 고난을 당하셨다. 그 시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셨고, 마침내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라고 말씀하신 후 죽음을 맞이하셨다.
예수님의 죽음을 전후하여 두 가지 표적이 나타났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맞이하시기 약 3시간 전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성전의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로 나뉘어졌다. 예수님의 죽음을 전 우주가, 전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슬퍼하셨음을 보여주신 것이고,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가로막혀 있던 담이 허물어지고 하나님 앞으로 자유롭게 나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렸음을 의미한다.
십자가형을 집행하던 로마군대의 백부장은 십자가 아래에서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고 고백하였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 달려 죽는 십자가, 흉악한 죄인이 달려 죽는 십자가, 수치와 멸시의 상징이던 십자가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의 상징으로 변화되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인류를 끊임없이 죄의 길로 유혹하고, 죽음으로 몰아가는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고 마침내 승리하셨다. 죽음으로 열어놓은 생명의 문!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생명의 문을 여는 위대한 승리를 십자가 위에서 이루셨다.
자신의 생명을 버리시고 우리의 생명의 길을 열어놓으신 예수님의 승리를 기억하며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나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승리의 길임을 영혼에 깊이 새기는 오늘 성금요일이 되기를 소망하자.
3월 31일
무덤 속에 누이신 예수님 (마가복음 15:42-47)
42 이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44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지가 오래냐 묻고 45 백부장에게 알아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주는지라 46 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47 막달라 마리아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
특별한 것을 만남
무엇이 ‘특별한’ 것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곧 복종을 감내하면서 십자가로 가는 그분의 사랑이다. 그것은 십자가이다. 그리스도인이 갖는 독특한 특징은 바로 이 십자가이다.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세상을 넘어서게 하는 십자가, 그들로 하여금 세상을 이기게 하는 십자가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사랑 안에서 만나게 되는 고난,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존재에 있어서 ’특별한‘ 것이다.
그것은 숨겨진 채로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아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예배 공동체, 보다 나은 의의 공동체는 이 세상의 질서를 벗어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가시적인 공동체이다.
당신이 행하고 있는 특별한 것은 무엇인가? 특별한 것 – 이것은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인데 – 은 제자들이 행하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행해져야 하며 가시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윤리적인 엄격함이나 그리스도인의 생활양식의 차원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진실된 복종에서 행해지는 것이어야 한다. 그 행위가 그 사람을 수난으로 인도함으로써 ‘특별한’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그 행위 자체가 영속적인 고난이며 인내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특별한’ 것은 율법의 완성이며 계명들의 완수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그의 공동체 안에서 ‘특별한’ 것은 사건이 된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의 [제자직의 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