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인간이 되신 하나님 1 (요한복음1:1-5)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창조의 회복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세베대의 아들이며 야고보의 형제이다. 그는 요한복음과 요한 1,2,3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고, 그의 형제 야고보는 12제자 중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다. 요한은 복음서의 기록 목적을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고 밝히고 있다.
마태나 누가는 예수님의 계보를 기록하였으나 요한은 육신의 계보를 언급하지 않고 곧 바로 창조사역을 언급함으로써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하시고 동등하신 분이심을 알리고자 하였다. 창세기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선포로 시작하는 것처럼 요한복음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선포로 시작함으로써 예수님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시며 하나님과 함께 천지를 창조한 분이심을 알려준다.
참 빛 되신 예수님이 어두움 가운데 있는 이 세상에 오셨으나 정작 예수님이 창조한 인간들은 그 분이 누구이신지 알아보지 못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도록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 메시아의 오심이 예언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배척하였다.
태초에 하나님은 흙으로 인간을 만드시고 하나님의 영, 생기를 불어넣음으로써 생명이 있는 사람이 되게 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타락한 육신적 인생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영적 생명을 소생시키는 창조의 회복을 이루고자 직접 육신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요한이 창세기 1장을 연상시키는 문장으로 복음서를 시작한 것은 창조와 창조의 회복을 대비시키면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리고자 하는 의도였다.
5월 2일
인간이 되신 하나님 2 (요한복음 1:6-14)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새로운 인생
태초에 말씀으로 존재하신 예수님께서 인생들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 새로운 인생으로 거듭나게 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죄로 어두운 세상을 비추기 위해 오신 이 빛을 증언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고 믿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이었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된다.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새로운 탄생은 우리를 내면으로부터 변화되게 하여서 우리의 생각이나 주장, 소망, 동기 등을 새롭게 만든다. 자연적인 출생은 우리에게 육신의 생명을 주고, 가족 내에서의 한 구성원이 되게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새로운 탄생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 생명을 얻게 하고,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의 한 구성원이 되게 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게 한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세상을 보는 눈이 아닌 영적인 눈으로 우리 안에 함께 계시는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데 바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주님의 충만한데서 우리도 은혜와 진리를 풍성하게 받는 복을 누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도 요한이 우리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복음의 핵심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새 생명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어두움 가운데 있던 과거의 모습에서 변화되어 새로운 인생이 되었다. 오늘 하루도 새로운 인생으로 살게 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은혜 안에서, 참 빛이신 주님의 빛을 받아서 생명력 있는 삶을 살아가자.
5월 3일
세례 요한의 증언 (요한복음 1:19-28)
19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 대 21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24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라 25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28 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
세례 요한의 임무
오랫동안 메시아가 오실 것을 소망하며 기다리고 있던 유대인들은 요한이 나타나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외치자 혹시나 그가 기다리던 메시아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금 선지자를 보내주셨는가 의문을 가졌다. 예루살렘에서 존경받는 지도자였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세례 요한을 찾아와 ‘네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도 아니고 선지자 엘리야도 아니고 단지 주님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이며, 주님의 종이 되어 신발의 끈을 풀어주기에도 부족한 사람이라고 대답하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누가복음 7:26에서 세례 요한을 ‘선지자보다 나은 자니라’고 높여주셨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1)고 외치며 주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이 자신을 주님의 종이 되기에도 부족하다고 고백하는데, 하물며 우리가 주님의 일을 행할 때 모든 자존심과 자만심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지 않겠는가!
요한은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당시 에세네파 사람들(강경한 유대교 공동체의 한 분파)은 정결하게 할 목적으로 세례를 행했는데, 보통은 이방인들이 유대교인이 되고자 할 때에만 시행하였다. 바리새인이 요한에게 무슨 권한으로 세례를 주냐고 물은 것은 곧 하나님께 선택받은 유대인들을 마치 이방인처럼 다루어 세례를 주는 권한을 누가 주었느냐고 따지는 것이었다. 요한은 자신은 단지 죄를 회개하는 상징으로써 물로 세례를 주지만, 진정으로 죄를 사하여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뿐이신데, 그 분이 이미 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계신다고 증언하였다.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그 분의 길을 예비하다가 순교하였다. 초대 교회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증언하다가 순교하였다. 오늘 우리는 주님을 증거하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하여 나의 삶의 자리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자.
5월 4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요한복음 1:29-33)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32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나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하는가?
요한이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깨끗하게 씻음을 받아 가까이 온 천국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나아가 요한은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를 세상에 드러내어 확인시켜주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하늘로부터 예수님께 임했고,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심을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표시가 되었다. 물세례는 자신의 죄성에 대한 깨달음과 회개를 통해 죄로부터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할 것을 결단하는 것이고, 성령세례는 죄인인 인간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거듭나는 중생을 경험하게 한다.
성전에서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어린 양을 희생 제물로 드렸다.(출29:38-42) 이사야는 하나님의 종, 메시야가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다고 예언하였다.(사53:7) 구약의 제사에서는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어린 양의 생명이 희생되어야만 했는데, 하나님은 이제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실 것을 결심하시고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같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심으로써 우리의 죄의 값을 지불해주신 것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하게 증언한다. 우리도 오늘 하루의 삶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갚아주셔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음을 고백하고, 예수님의 은혜로 얻은 새 생명을 누리며 전하며 살아가기를 소망하자.
5월 5일
예수님을 따른 첫 번째 제자들 (요한복음 1:35-42)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예수님의 이름들
세레 요한이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언하자 이 말을 들은 요한의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랐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첫 번째 제자가 되었는데 한 명은 안드레,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아마도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 오는 이들을 보시고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셨다. 무엇을 구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은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무엇을 바라고 기대하고 요구하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디 계시는지 물었고, 예수님은 와서 보라고 대답하셨다. 함께 예수님이 거처하시는 곳에 가서 그 날 예수님과 함께 거하며 그분이 누구신지 알게 된 두 사람은 예수님을 랍비라고 호칭하던 것에서 변화하여 메시야라고 부르게 되었고, 다른 이들에게 메시야를 만났다고 증언하였다.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 등 여러 이름으로 호칭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을 점점 더 알아갈수록 얼마나 귀하신 분인가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지 불과 얼마 되지 않아 메시야라고 고백했던 제자들은 3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예수님과 그분의 사역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믿음은 입술을 통해서 쉽게 고백될 수 있으나 주님께 대한 깊은 신뢰와 존경, 사랑은 우리가 믿음으로 살 때에 비로소 성장할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와서 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로 가는 것이 믿음의 출발이다. 내 자리를 고집하고 예수님을 내가 있는 자리로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것, 내 자리에서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믿음의 출발이다. 하나님의 어린 양, 메시야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기 위해 우리의 발걸음을 그분께로 향하자.
5월 6일
가나의 혼례 (요한복음 2:1-11)
1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이적을 행하시는 목적
예수님이 행하신 거의 모든 이적은 – 눈 먼 자가 다시 보게 되고, 중풍병자가 걷게 되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등 – 퇴락한 창조의 회복이며 하나님의 능력의 실증이었다. 이적을 행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자연을 초월하는 자신의 힘을 드러내 보였고, 그가 자신의 사역 – 다른 이들을 돕고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시며 사람들과 개별적인 관계를 이루어가는 – 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지 알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며 첫 번째 행하신 이적이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게 하신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켜 맛을 내게 하고, 결혼 잔치를 계속 이어갈 수 있게 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죄 가운데 있는 인생들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것임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지자 마리아는 자기 아들 예수가 이 어려움이 해결될 수 있도록 도와서 어떻게든 포도주를 구할 수 있기를 바랐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대답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예수님께서 무엇을 할지 몰랐지만 그가 분명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인들에게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든지 순종하라고 일러두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자신의 상황이 낙심되는 것일지라도 예수님께서 가장 좋은 길로 행하실 것이라는 신뢰를 잃지 말아야 한다. 마리아와 하인들은 어떤 일을 행하시는 주님의 방법에 순종하였다. 우리의 문제를 주님께 가져가면 그분이 그 문제들을 어떻게 처리하실지 알게 될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실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님을 신뢰하고 순종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최선의 결과를 허락하신다.
5월 7일
예수께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시다 (요한복음 2:13-22)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예배의 본질
모든 유대인 남자들에게는 해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월절 예식에 참석해야 하는 종교적 의무가 있었다. 유월절 기간 동안 성전 주변은 각처에서 몰려온 수많은 방문객들로 붐볐다. 종교지도자들은 ‘유대인의 뜰’이라 불리는 곳에 상인들이 장사판을 차릴 수 있도록 허용해줌으로써 성전 주변의 혼잡을 가중시켰다. 장사판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찾는 방문객들의 예배의 편의를 돕고, 성전 수리를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방편으로 시작되었지만 점차 ‘유대인의 뜰’은 상인들로 가득 차 순례자들이 예배드릴 곳을 찾기 어려워지고,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게 되었다. 예배를 위해 원근 각처에서 온 방문객들을 이기적으로 이용한 상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분노하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스룹바벨이 BC 500년경에 지은 것인데 헤롯왕이 BC20년경부터 좀 더 크고 멋있게 만들고자 46년 동안이나 개축하는 중이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장엄한 건축물을 무너뜨릴 수 있으며, 또한 3일 만에 다시 세울 수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 매우 흥분하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돌로 만들어진 이 성전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성전되신 예수님의 육신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고, 예수님이 성전보다 크고 위대하신 분이심을 인식하지 못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후에야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한 것인지 깨달았다.
우리도 때로 예배의 주체이시고 예배를 온전히 받으셔야 할 분이 주님이시라는 본질을 잊고 화려한 교회 건물, 계속 이어지는 행사, 교회 프로그램 등 부차적인 것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지나 않은지, 그래서 주님께서 분노하시게 행동하고 있지 않은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예배를 살펴보아야 하겠다.
5월 8일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 온 니고데모1 (요한복음 3:1-8)
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한 밤중의 만남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고 산헤드린이라 불리는 공의회의 의원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종종 그들의 위선에 대해 비판하였던 종교지도자 그룹이었다.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강한 분노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예수님이 그들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그들의 주장(견해)을 문제 삼았기 때문이었다.
명망 있는 지도자였던 니고데모는 다른 바리새인들과 달리 예수님께는 다른 이에게 없는 무엇인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그것을 알고자 하여 예수님을 찾아왔다. 다른 사람들의 평판에 대해 스스로 확인해보고자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방문을 다른 바리새인들이 알게 되면 문제가 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여 비난을 피하고자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갔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칭하였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분이심을 시인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구원의 진리에 관해 가르쳐주셨다. 율법을 지키는 것을 신앙생활의 최우선으로 삼으며 선한 행실을 강조하고 가르쳐 온 니고데모는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나 놀랍고, 이해할 수 없어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진정 메시아이심을 확신하게 된 니고데모는 그 후 예수님을 방어하기 위한 발언을 용기있게 할 수 있었다.(요7:50-51) 니고데모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스스로 직접 경험해야 한다. 이것은 다른 이들이 나를 위해 대신 해줄 수 없다. 예수님이 진실로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스스로 경험하고 믿게 되면 우리도 그분을 위해 일하고, 그분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된다.
5월 9일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 온 니고데모 2 (요한복음 3:9-17)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6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복음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지나던 중 길이 험하고 힘이 들자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며 심하게 불평하였다. 하나님은 원망하며 불평하는 그들을 징계하기 위하여 불뱀을 보내셨고, 불뱀에 물려 많은 사람이 죽게 되었다.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놋으로 불뱀의 모양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놓고 그것을 쳐다보면 나을 것이라고 살 길을 알려주셨다. (민21:4-9)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을 가지고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면 불뱀에 물렸을지라도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다. 죽느냐 사느냐 기로에 선 이들에게는 너무나 간단한 방법이었다.
요한복음 3장16절에는 복음의 전체 내용이 압축되어 있다. 당신이 만일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자기희생을 기꺼이 감수할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시기에 자신이 지불할 수 있는 최대의 가치인 그의 아들의 생명을 지불하는 희생을 감수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지불하심으로서 우리의 죄를 대신 갚아주셨고, 값을 치루고 사신 새 생명을 우리에게 제공하셨다.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죄로 인해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기 위한 희생이었다. 누구든지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새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을 영원히 누리게 된다는 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다.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게 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장대에 매달은 놋뱀을 바라보기만 하면 죽지 않고 살아난 것처럼 죄로 인해 죽게 된 인생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영혼이 살아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의 하나님이 인생들을 위하여 열어놓으신, 하나님은 최고의 희생을 치루셨지만 우리 인간들은 너무나 쉽게 단번에 얻을 수 있는 구원의 길이다.
5월 10일
예수님을 증거하는 세례 요한 (요한복음 3:22-30)
22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에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26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자신을 누구냐고 묻는 이들에게 요1:23에서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소개한 세례 요한은 자신의 직무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요한의 사역의 목적은 예수님을 알리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음을 알리고, 그 분이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실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몰려와 회개하며 세례를 받던 많은 이들이 예수님께로 몰려갈 때 요한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분명히 알았다. 한 인간으로서의 요한은 잠시 허탈한 마음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분 앞에, 그 분의 길을 준비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사람이며, 이 사실을 그의 제자들이 증언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요한은 예수님을 신부를 취하는 신랑이라고 했고, 자신은 신랑으로 인해 기뻐하는 자라고 하였다. 요한이 예수님은 점점 번영해야 하고 자신은 점점 쇠퇴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보기 드문 겸손이다.
때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보다 자신의 사역의 성공을 더 마음에 두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다. 다른 이들이 영광을 받게 되면 그들을 부러워하게 되거나, 그들과 같은 재능이나 지위를 갖고 싶은 욕망이 생길 때가 있다. 어떠한 경우라도 하나님 나라보다 자신의 성취에 더 마음을 두지 않도록 주의하자. 우리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그 분의 사역을 이 땅에서 끝까지 이루어 가는 것임을 잊지 말자.
5월 11일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 1 (요한복음 4:5-15)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시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의도적인 만남
예수님은 유다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기 위해 사마리아를 통과하셨다. 당시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겨 우회하여 지나가던 사마리아 지역을 일부러 통과하시며 그곳에서 부끄러운 과거를 가진 한 여인을 만나주셨다.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간 사이에 잠시 우물곁에 앉아 쉬고 있던 예수님은 낮 시간에 물을 길러 온 한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며 대화를 시작하셨다. 뜨거운 한 낮에 물을 길러 나온 여인은 동네에 사는 다른 여인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사람이 없는 한낮에 물을 길러 왔다. 예수님은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자각하게 할 뿐 아니라 마셔도 다시 목마른 세상이 주는 물과 달리 영적 기갈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시는 생수의 공급자이신 주님을 알게 하셨다.
사마리아 땅 수가 성 우물곁에서 주님을 만난 여인은 앞 장의 니고데모와 대조된다. 니고데모는 정통 바리새인으로 산헤드린 공회원이었고, 주위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으나 이 여인은 비천하기 짝이 없는 사마리아 여인으로 남몰래 물을 길으러 다녀야 할 정도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던 여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엄청난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두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동일하게 구원의 진리를 알려주셨다.
예수님은 오늘도 구원의 진리를 알려주시고자 사람들을 만나주신다. 단지 이제는 물 길러 온 여인과 같이 육신적으로 만나주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 갈급함을 해소하고자 갈망하는 이들을 주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만나주신다. 오늘 우리도 우리의 영적 갈급함을 채워주시는 살아 있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성경을 손에 들자.
5월 12일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 2 (요한복음 4:19-26)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예수님과 대화하던 여인은 남편을 다섯 명이나 두었던 외적인 모습과는 다르게 예배를 올바르게 드리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었다. 당시 유대인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서로 분쟁하고 배척하였다. 이들은 예배의 장소가 중요한 본질이라고 믿었다. 예수님을 선지자로 생각한 이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이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를 예수님께 질문하였다. 예수님은 예배를 드리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즉 성령의 도우심으로 진리이신 예수님 안에서 예배드려야 하며, 이러한 예배자를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을 여인에게 알려주셨다.
예배는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예배의 본질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예배는 만남의 예배이다. 그러므로 모세에게 성막을 지을 것을 지시하실 때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출 25:22)라고 말씀하시며 예배를 통해 우리를 만나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만남이 없는 형식적인 예배는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예배, 성전 마당만 밟고 가는 헛된 예배가 된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진리이신 예수님 안에서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룰 수 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혹시라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외형적인 것이 아닌지 생각해보자. 영이신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는지,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진정 어떤 분이신지,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기억하며 예배드리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우리의 예배를 점검하여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자.
5월 13일
영적인 수확에 대해 말씀하시는 예수님 (요한복음 4:27-38)
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32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35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38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영적 자양분
제자들이 마을에 들어가 예수님과 함께 먹을 음식을 사가지고 와서 보니 예수님은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고 계셨다. 당시 유대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무시하여 유대인 남자는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는 물론 가까이 하지도 않는 것이 전통이었다.
제자들이 사온 음식을 예수님께 드리며 드시라고 하였으나 예수님은 자신에게는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을 보내신 이, 곧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주님의 양식, 영적 자양분이었다. 음식이 몸을 건강하게 하듯이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것이 영을 건강하게 하는 자양분이 됨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시고자 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신앙의 추수는 오늘 우리의 가장 소중하고 가장 긴급한 양식이 되어야 하겠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고 가꾸고,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수고의 시간들이 있다. 수고의 시간도 성도의 사명이고 영혼의 추수도 성도의 사명이다.
의도적으로 사마리아에 들러 한 여인에게 구원의 진리를 알려주시고, 그 영혼을 구원해주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는 육신의 양식과 함께 먹어야 할 영혼의 양식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즉 전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임을 분명하게 가르쳐주셨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받는 것에서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무엇인가 행할 때 우리의 영적 자양분을 공급받게 된다. 그러므로 아직 때가 아니라고 미루지 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혼의 추수에 참여하여 영적 자양분을 공급받고 추수의 기쁨을 누리자.
5월 14일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증언하다 (요한복음 4:28-30,39-42)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 39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변화된 한 사람
진정한 예배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으로부터 예배드리는 곳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듣고 한걸음 더 나아가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을 표현하였다.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여인이 기다리는 메시야이심을 알려주셨다.
삶에 지치고 영적으로 갈급하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되고 새 생명을 얻는 은혜를 입었다. 너무 감격한 나머지 물 길러 왔던 자신의 목적도 잊어버린 채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들어가 자신이 겪은 일을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던 여자의 말, 자신들이 무시하고 멸시하던 여인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과 마주치기를 꺼려 피해 다니던 그녀가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감격과 기쁨, 놀라움을 전하자 동네 사람들도 와서 보라(4:29)는 그녀의 말에 이끌려 예수님께로 나아왔다. 예수님께서 그 마을에 이틀을 머무시며 말씀을 전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졌고, 동네 사람들은 이제 그 여인의 전한 말 때문이 아니라 직접 듣고 보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고 고백하였다.
예수님을 만난 한 여인으로 말미암아 그 동네의 수많은 사람들이 변화되었다. 부정하다고 무시당하며 고립되어 있던 사마리아를 찾아오신 예수님의 은혜를 통하여, 주님을 만남으로 변화된 한 여인을 통하여 사마리아 땅에 복음이 전해졌다. 바로 이 여인처럼 변화된 한 사람이 중요하다. 나 한 사람의 변화를 통하여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고, 거듭남의 은혜가 퍼져나가기를 소망하자.
5월 15일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신 예수님 (요한복음 4:46-54)
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49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3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왕의 신하의 믿음
요한복음 1장에서 태초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신 성자 예수님이 죄로 어두워진 세상을 비추고 구원하는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심을 알려준 후 2장에서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이적을 베풀어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나타내셨고, 성전을 깨끗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전의 참된 의미를 깨우쳐주셨다. 3장에서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거듭나야 함을 말씀하시고 4장에서는 사마리아에서 만난 한 여인에게 진정한 예배에 대하여 가르쳐주셨다.
오늘의 말씀에 등장하는 신하는 헤롯 왕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왔을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는 예수님을 능가하는 세상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찾아가 아들을 고쳐달라고 간청하였다. 이 신하는 예수님이 아들을 낫게 해주실 수 있다고 믿었고, ‘가라 아들이 살아 있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집으로 돌아감으로써 그의 믿음을 나타내 보였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믿는다고 말하는 것과 동일하게 행동해야 한다. 왕의 신하의 믿음이 어떻게 자라갔는지에 한번 주의를 기울여보라. 그는 먼저 예수님께 자기의 아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할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보지 못했으나 아들이 살았다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 믿음에 따라 행동하였다. 예수님의 이적을 경험한 그와 그의 모든 가족은 예수님을 온전히 믿게 되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우리가 그것을 사용할 때 믿음이 성장한다.
오늘 우리도 믿음의 성장을 위해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을 제대로 사용하며 살아가자.
5월 16일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1 (요한복음 5:1-9)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
이 일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것 중 예수님께서 세 번째 행하신 이적이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일어난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이적은 구원이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말씀에 순종함으로 말미암는 것을 알려준다.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신 일은 구원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짐을, 믿고 의심하지 않을 때 이루어짐을 보여준다. 38년 병자를 고쳐주신 세 번째 이적은 구원이 은혜로 말미암음을 보여준다.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예루살렘 양문 곁 베데스다 못 가에 많은 병자들이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곳에서 38년이나 병을 앓고 있던 한 사람을 주목하시고 그 병자에게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고 정확하게 물으셨다. 병든 채로 38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낫고자 하는 의지도 상실한 그에게 그의 문제는 삶의 방식이 되어 버렸다. 그 곳에는 많은 병자들이 있었고, 그가 결코 다른 병자들보다 더 혜택을 받을만하지 않았으나 예수님은 그를 주목하시고 고쳐주셨다. 예수님의 은혜가 그에게 임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함으로 이루어지는 즉각적인 은혜, 이것이 바로 구원의 상징이다.
우리의 내면은 어떠한지 살펴보자. 내면의 쓴 뿌리를 제거하지 못하고 체념하며 적응한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가 스스로 열등감 속에 갇혀 있을지라도, 오랜 내적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을지라도, 은혜 받을만한 사람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깊은 곤경을 만나주신다. 그러므로 어떤 큰 문제나 위기가 있을 때에라도 낙심하지 말고 우리를 만나주시고 은혜로 구원해주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자. 그분이 우리의 필요에 응답하시고 고쳐주신다.
5월 17일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2 (요한복음 5:9-15)
9 ... 이 날은 안식일이니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12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치신 이는 예수라 하니라
은혜의 집 베데스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양문 곁 베데스다 못 가에서 38년이나 중풍병으로 인해 곤고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한 병자를 말씀으로 고쳐주셨다. 병 고침을 받은 것 자체도 놀라운 기적이었으나 예수님은 이제 그에게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주님의 은혜, 능력을 체험한 사람으로서 구원받은 건강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육신의 질병을 고쳐주시는 것은 영혼의 구원을 받도록 이끌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육신의 치유는 영혼의 치유를 위한 수단이자 방법이었다.
베데스다는 은혜의 집, 긍휼의 집이라는 뜻이다. 양문은 성전에서 희생제사의 제물로 드려질 양을 데리고 들어가는 문이었다.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 제물, 곧 어린 양이 되셔서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그 희생의 은혜로 인해 인생들을 구원해주실 것을 정확히 묘사해주는 사건이었다.
베데스다 못 가에 있는 병자들의 모습은 오늘날 영적인 죄인들의 모습과 흡사하다.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 은혜가 임하는 곳에 있기만 하면 나음을 받을 수 있는데, 그 자리에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우리도 이러한 처지에 있었는데,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영적으로 치유된 건강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이 땅에서의 실제의 삶에서는 아직도 영적으로, 육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모습이 있다. 주님의 도우시는 은혜로, 성령님께서 우리를 깨우쳐주시고, 이끌어주셔서 연약한 모습들, 온전치 못한 점들이 고쳐지고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간구하고 소망하자.
5월 18일
아들의 권한 (요한복음 5:24-29)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영원한 삶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은 유대인의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규정을 어겼을 뿐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표현하심으로써 유대인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드셨다.
유대인들의 분노 앞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자신의 말을 듣고 믿는 자는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될 것을 말씀해주셨다.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의 몸으로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인생들에게 영원한 생명, 영적인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자신의 원래적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세상에서 육신적으로만 살다가 죽음을 맞고, 심판의 자리에 서게 될 인생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알게 하시고, 죄를 용서받고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셨다. 우리를 살리려 오신 예수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 대신 죽어주심으로써 예수님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때는 바로 지금이다. 모든 인생들 앞에는 죽음의 길과 삶의 길이 있는데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생명을 자신 속에 받아들이는 사람은 두 갈래 길 중 생명의 길을 가게 되며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살게 된다. 우리는 이미 생명의 길을 선택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오늘 하루도 예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이 땅에서 미리 하늘나라의 영원한 삶을 누리며 살아가자.
5월 19일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떡 (요한복음 6:22-29)
22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서 있던 무리가 배 한 척 외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23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께서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곳에 가까이 왔더라) 24 무리가 거기서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치신 자니라 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하나님의 일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며 말씀을 듣고 배우던 수많은 무리를 한 어린 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이시는 이적을 베푸셨다. 이적을 통하여 배불리 먹은 무리는 예수님이 배불리 먹게 하신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단순히 육신의 양식을 공급해주시는 예수님을 다시 찾았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적인 갈급함을 채우기 보다는 육신적이고 일시적인 이익 때문에, 이기적인 목적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나무라시면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드려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예수님의 답변은 매우 간결하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행하는 어떤 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를 온전히 믿는 데에서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우리의 생명이 양식이 되시기 위해 오셨다. 육신의 양식은 먹어도 다시 배고프지만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을 배부르게 하시고 부요케 하신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고 받아들이고, 그로 인해 생명의 부요함을 얻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다. 그러므로 지극히 유한하고 미약한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행하고자 하는 교만함과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 하나님이 보내신 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는 하나님의 일을 하자!
5월 20일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떡 2 (요한복음 6:30-40)
30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쫒지 아니하리라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영적인 배고픔
육신의 배고픔은 음식을 먹으면 해소되고 육신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게 되듯이, 영적인 배고픔은 예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통해 해소되고 영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왜 자신을 떡으로 표현하셨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근거이다. 육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양식을 먹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 예수님을 우리의 삶 가운데로 초청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무리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시자 이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을 믿을 수 있도록 어떤 표적을 보이겠느냐고 질문하였다. 모세가 광야에서 기도하여 그들의 조상들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만나를 먹었던 것을 상기하며 예수님도 그들의 육신적인 필요를 채워 줄 어떤 이적을 베풀어줄 수 있는지 질문한 것이다.
광야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와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삶을 이어가게 하신 하나님은 이제 영혼의 만나로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우리의 영혼의 필요를 채워주시며 영적인 배고픔을 해소시켜주신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떡을 받아먹기 위해 주님께로 나아가자.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믿음으로 우리의 영혼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은혜를 누리자. 오늘도 생명의 떡, 생명의 양식인 주님의 말씀을 먹고, 묵상하여 삶에 필요한 힘과 지혜를 공급받음으로써 또 하루의 부요한 삶을 살아가자.
5월 21일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떡 3 (요한복음 6:47-58)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52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마시는 이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성령으로 우리 안에 사시는 예수님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 있는 떡,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임을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예수님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이 보여주실 이적을 기대하였는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가장 큰 이적임을 깨닫지 못했다. 예수님은 계속 영의 일을 말씀하셨고, 사람들은 계속 육신의 일을 말하며 육신의 생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판단하였다.
어떻게 예수님은 자기의 몸을 먹을 양식으로 주실 수 있을까? 어떻게 예수님의 피를 참된 음료라고 하며 마시게 할 수 있을까? 예수님의 살과 피에 대한 말씀은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의 율법에 비추어볼 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혐오스럽고 충격적인 것이었다. 이후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살과 피의 상징을 성찬식에 대한 설명에 사용하였다. (고전11:23-26) 생명의 떡을 먹는다는 의미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 안으로 받아들여서 그 분과 연결(연합)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연결될 때 우리는 그의 죽음과 부활을 믿게 되고, 성령의 능력을 신뢰하며 주님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게 된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몸을 위해 음식을 먹고 마실 때 우리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님을 생각하자. 예수님의 말씀을 먹음으로, 예수님의 영을 우리 안에 받아들임으로 영혼의 생명도 살 수 있게 하자. 우리가 진정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었다면 그분은 자신의 거룩한 영, 곧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사신다.
5월 22일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요한복음 6:66-71)
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니이다 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예수님의 질문
이 세상에서의 것을 기대하여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에게 예수님께서 영적인 일을 말씀하시자 많은 이들이 그 곁을 떠났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떠나간 무리들과 같은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제자들이 예수님께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기대하는 것을 얻지 못해 떠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닌지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하시는 질문이다. ‘너희는 내게 무엇을 원하고 바라는가? 무엇 때문에 내게 예배하는가?’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예수님으로부터 무엇을 얻기를 원하는지 물으신다면, 그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주님을 떠나겠냐고 물으신다면 우리는 뭐라고 대답할 것인지 생각해보자.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차린 베드로는 놀라운 신앙 고백으로 주님의 마음에 흡족한 대답을 했다.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주님께 있으므로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고백하였다. 예수님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주님만이 영생의 말씀을 가지고 계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받기를 원했던 것은 생명의 떡과 생명의 물로 비유하신 영생의 말씀이었고, 그 말씀은 곧 예수님 자신이셨다.
예수님은 모든 인생들에게 가장 귀한 것을 주고자 하신다. 육신을 위해 물과 양식이 가장 중요하듯이 영혼을 위해 가장 중요한 생명의 떡, 생명의 물을 우리에게 주고자 하신다. 베드로와 같이 영생의 말씀이 주님께 있으므로 주님과 함께 하겠다고 고백하며, 오늘도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으로 인해 풍성한 은혜와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자.
5월 23일
생수의 강 (요한복음 7:37-44)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아니하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40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41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41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42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43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44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와서 마시라
본문에 나오는 명절 끝날은 유대인의 절기 중 하나인 초막절기의 마지막 날을 말한다. 초막절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시 광야에서 초막에 거주하던 것을 기념하여 지키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다.(레23:43) 정착생활을 하게 되면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감격이 식어지기 쉬우므로 해마다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게 하는 절기라고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은 초막절기를 지킬 때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길어와 성전 제단의 서편에 붓는 예식을 거행했는데 이와 같은 전통을 비유하여 예수님은 자신이 영원한 생수의 근원이심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알려주시기 위해 생수라는 표현을 사용하신다. 생수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 세상에 임할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생수와 성령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말씀하셨다. 몸 속 깊은 곳에서 성령이 강과 같이 흘러나오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인생의 모든 갈증이 해결되고 성령 충만함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만족함을 누리는 상태는 생각 만해도 우리를 부요하게 한다. 사마리아 수가 성 우물가에서 삶에 지치고 영적으로 메말라있던 한 여인을 만나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물을 주신다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이 세상에서의 삶은 우리를 목마르게 하고 지치게 한다. 그러나 주님은 지치고 피곤한 우리에게 평안과 안식, 영생을 주시기 위해 주님이 공급해주시는 생수를 마시라고 부르신다. 그 부르심을 듣고 응답하여 주님께로 나아가 생수를 마시자!
5월 24일
용서받은 한 여인 (요한복음 8:1-11)
1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니라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와서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라고 물었다. 이들의 질문에는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을 찾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대답하심으로써 묻는 이들의 의도를 피하셨을 뿐 아니라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로 하여금 순간적으로 각자 자신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며 생각하게 만드셨다.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죄가 없다고 떳떳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누구 한사람 죄를 범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지 못하고 하나씩 하나씩 성전에서 나갔고, 그곳에는 여인과 예수님만 남게 되었다. 예수님은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종종 타인의 잘못을 따지며 판단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마7:3-4)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어리석음, 교만함을 깨우쳐주신다. 우리는 때로 자신의 큰 잘못은 덮어두고자 하고, 보지 않으려고 하면서 남의 죄는 들추어내고 비판하는데 이로 인해 사람과의 관계에 갈등과 불화가 생긴다. 예수님은 타인을 사랑으로 대하고 긍휼의 마음을 가질 것을 가르쳐주시며, 죄인을 용서하시고, 죄에서 벗어나 빛 가운데에서 살게 하신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정죄하지 않고 용서해주시는데 하물며 우리가 서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5월 25일
세상의 빛 생명의 빛 (요한복음 8:12-16)
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13 바리새인들이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 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15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변화
요한복음에는 빛이라는 단어가 신구약성경을 통틀어 가장 많이 나온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인해 죄로 인해 어둠 가운데 있던 세상에 참 빛이 비취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강조하며 빛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 참 빛이 세상에 비췸으로 인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음을 알려준다.
2장의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것은 죄 가운데 있는 인생들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것임을 상징한다.
3장에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 성령으로 거듭나야 함을 가르치시며 육신적 삶의 영적 삶으로의 변화를 말씀하셨고,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적 예배에 대해 가르치심으로써 장소와 형식에 매여 있는 형식적 예배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로의 변화를 알려주셨다.
5장에서 베데스다 못 가의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으로써 질병으로부터 고침 받고 건강한 삶을 살게 되는 변화. 죄에서 자유롭게 되는 변화를 알려주시고,
6장에서 오천 명을 먹이시면서 자신이 생명의 떡이 되심을 알려 주시며, 육신의 떡으로 배부름을 얻는 것에서 생명의 떡으로 배부르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되는 변화와 함께 비록 적은 것이지만 예수님께 드렸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는 변화를 보여주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어떠한 모습으로 변화되었는지 자신을 돌아보자. 과연 우리의 육신적 생각, 삶의 태도들이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 우선으로 바뀌었는지 혹은 바뀌어가고 있는지, 아니면 적어도 바뀌어 가기를 소망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내면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변화시키는 역동적 힘을 발휘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다시 점검해보아야 할 것이다.
5월 26일
맹인을 고쳐주신 예수님 1 (요한복음 9:1-7)
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를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
길을 가다가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보신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서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다. 그 사람은 실로암 못에 가서 씻고 밝은 눈이 되어 돌아왔다.
길에서 맹인을 본 제자들은 유대인의 사고방식에 근거하여 이 사람이나 혹은 그 부모에게 무슨 죄가 있어서 날 때부터 눈이 안보인 것이라 생각하여 예수님께 질문하였으나 예수님은 그 들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답변하셨다. 맹인이나 그 부모는 왜 이 사람이 눈이 안 보이는 상태로 태어났는지 한탄하고 원망한 때가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인생을 불행한 가운데 살았으나 마침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우리도 때로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행한 일, 어려운 일을 겪을 때가 있을 수 있다. 이런 때에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 무엇을 이루려고 하시는지 그 뜻을 알도록 잠잠히 기도하며 기다려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방식으로 일하신다. 눈을 뜨게 된 맹인은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빛을 보게 되었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드러내는 일에 사용되었다. 흑암 가운데 있던 맹인에게 은혜의 빛이 비추인 것처럼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빛이 밤과 같은 이 세상을 비추는 세상의 빛이 되셨다.
우리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기 전에는 모두 영적으로 맹인이었다. 이제는 영의 눈이 떠졌으니 육신의 눈으로 세상 일만 보고 살 것이 아니라 영의 눈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며 오늘 하루를 살아가자.
5월 27일
맹인을 고쳐주신 예수님 2 (요한복음 9:8-14)
8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10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11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12 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13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14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찾아오시는 주님
날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아 구걸하며 살아가던 맹인은 예수님이 침을 진흙에 섞어 눈에 바른 것을 실로암 못에 가서 씻은 후 눈이 떠져 볼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함으로써 그는 치유의 이적을 체험하였고 맹인으로 구걸하며 살던 불행한 인생에서 새로운 삶으로 변화되었다.
맹인이었던 이 사람은 눈이 밝아져 세상을 보게 되었을 뿐 아니라 자신을 고쳐주신 분이 누구이신지 점차 알아가게 되었다. 예수님께 대한 그의 고백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주목해보며 우리는 예수님께 대해 어떻게 고백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사람들이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고 묻자 예수라 하는 그 사람(9:11)이 고쳐주었다고 말한다. 바리새인들 사이에 서로 논쟁이 일어났을 때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고 하느냐’하고 묻자 선지자라고 대답하였다(9:17). 두 번째 다시 불러 물었을 때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다면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일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대답하며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9:33)이라고 표현하였다. 그가 다시 예수님을 만났을 때 ‘네가 인자를 믿느냐’는 물음에 ‘주여 내가 믿나이다’하며 주님으로 고백하였다.
예수님은 구원받아야할 사람, 죄인들을 먼저 찾아오셔서 그를 자극시키신다. 믿음으로 응답하느냐 거절하느냐는 그 사람의 결단이다. 믿음으로 응답하는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치료해주시고, 그 치료가 다른 사람의 주목을 받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변화된 사람은 변화된 모습을 통해 다른 이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치유가, 그 변화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5월 28일
맹인을 고쳐주신 예수님 3 (요한복음 9:35-41)
35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38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우리도 맹인인가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메마르고 보잘 것 없는 나무 한 그루
“주님, 여기 메마르고 보잘 것 없는 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부디 오셔서 이 나무가 열매 맺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리하시면 저는 즐거이 고백할 것입니다. 당신으로부터 나의 모든 열매가 나왔노라고. 주님, 저는 본성적으로 시들고 메마른 가지입니다. 저에게 오셔서 생기를 주시어 아론의 지팡이처럼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울 수 있게 하소서. 그리하여 사람들이 은혜로운 기적을 보고 오직 당신만을 찬양하게 하소서.” (스펄전목사님의 기도)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자의 눈을 뜨게 해주신 일은 죄인으로 태어나 죄와 사망의 어두움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인생들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적인 눈을 뜨게 해주신 것을 상징한다. 예수님의 먼저 찾아오시는 선행적 은혜,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내어주신 은혜가 없었다면 우리는 스펄전목사님의 기도와 같이 메마르고 보잘 것 없는 한 그루의 나무, 본성적으로 시들고 메마른 가지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맹인이 예수님과의 일대일의 만남을 통해 세상을 보게 되었고, 예수님을 구원의 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 나의 주님으로 고백함으로써 영혼이 살아나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울 수 있는 인생으로 변화되었고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되었다.
시들고 메말랐던 우리의 영혼에 생기가 솟아나고 싹이 나고 꽃이 피어 풍성해진 모습을 보고 우리 주변의 많은 영적 맹인들이 그들의 눈을 뜨기를 소망하며 우리에게 다가와 구원의 길을 묻게 하자. 구원의 길을 묻는 그들에게 즐거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알려주자.
5월 29일
양의 우리 (요한복음 10:1-10)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다른 이들과의 대화에서 상대방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을 때 우리는 진심을 전하고자 몇 번이고 강조하며 안타깝게 반복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자신이 누구이신지,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 알려주고자 하는 마음이 너무나 간절하여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힘주어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목축업을 주로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해하기 쉽게 양과 목자의 비유를 통해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설명하셨으나 그들은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듣지 못하였다. 9장에서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을 고쳐주시면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영적 소경으로 비유하셨던 예수님은 그들이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바르게 인도하지 않는 절도나 강도, 삯꾼에 불과하다고 지적하셨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가며 인도한다. 목자가 앞서 가면 양은 그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따라 온다. 어린이들이 즐겨 읽는 동화 중에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가 있다. 이 동화에 나오는 양치기 소년 페터는 알프스 산에서 양을 치며 살아가는데 그는 양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양의 이름을 부르며 돌본다. 양들은 그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라 풀을 뜯어 먹으러 나가기도 하고 저녁에 우리로 돌아오기도 한다.
우리의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며 인도하실 때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알아 듣고 그 뒤를 따라가야 한다. 양들이 목자를 따라가며 꼴을 얻듯이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생명의 양식을 먹음으로써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하게 얻어야 하겠다.
5월 30일
선한 목자 (요한복음 10:11-18)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누가 선한 목자인가?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이제 자신을 단순히 목자가 아니라 ‘선한 목자’라고 하셨다. 선한 목자는 자신이 위험한 처지에 놓여도 결코 양들을 버리지 않고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도 버린다고 하심으로써 모든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목숨을 내어주실 것을 미리 알려주셨다. 구약시대에는 양이 목자를 위해 죽었다. 신약시대에는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양을 위해서 친히 죽으셨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자신이 돌보는 양들을 아신다. 우리의 모든 처지와 형편을 아시며, 우리 내면의 깊은 생각까지도 알고 계신다. 목자가 각각 양들의 이름을 부르며 위험한 길, 위험한 짐승들, 먹으면 안 되는 독초 등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그 말씀을 듣고 믿고 따르는 이들을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게 하신다.
우리는 때로 우리의 지식과 경험이, 우리가 가진 물질이, 세상에서 획득한 우리의 지위가, 주변의 유력한 사람들이 우리를 이끌어주는 목자인 것으로 착각한다. 이러한 것들은 이 세상의 삶에서 종종 목자의 역할을 할 수도 있겠으나 우리를 영원한 삶으로 이끌어주지 못할뿐더러 우리의 영혼을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지 못한다. 선한 목자가 되셔서 자신의 목숨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
5월 31일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마리아 (요한복음 12:1-8)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진정한 경배
유월절 엿새 전 베다니에서 예수님을 위해 잔치가 열렸다. 마리아는 귀한 향유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발을 닦아드렸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은 향유는 노동자의 1년 치 품삯에 상당하는 가치를 가진 것이었다. 마리아의 행동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일을 경시하거나 예수님을 위해 지나친 방식으로 돈을 사용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유일하고 특별한 사건, 곧 인류의 죄를 대신 갚아주기 위해 죽으실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는 것임을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
마리아는 주님께 대한 사랑이 너무 커서 그 사랑을 어떻게든 표현해야만 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자신의 머리털로 향유를 부은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린 그녀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상상해보자. 예수님은 그녀의 헌신적 경배를 칭찬하시며,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그녀가 행한 일도 말하여 기억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막14:9). 그녀는 단지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행했으나 그것이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무언가를 행할 때 때로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있어 아주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다.
마리아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귀중한 것을 주님께 드림으로써 진정한 경배를 드렸다. 우리가 그 당시 주님과 함께 있었다면 우리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지금 우리에게 주님을 위해 우리에게 소중한 어떤 것이라도 드릴 수 있는 헌신의 믿음이 있는지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