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다 1 (요한복음 11:1-10)
1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더라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8 제자들이 말히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하나님의 시간 계획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7가지 기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이 마지막으로 소개되고 있다. 예수님은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의 가족을 무척 사랑하셔서 종종 그곳을 방문하셨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께 나사로의 병든 것을 알렸을 때 나사로의 질병으로 인한 누이들의 고통을 너무나 잘 아셨을 것임에도 불구에도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으시고 지체하셨다. 예수님이 지체하신 것은 특별한 의도가 있으셨다. 만일 예수님이 병든 나사로의 마지막 시간에 함께 계셨다면 그가 죽기 전에 치료해주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기다리는 동안 나사로는 죽었고,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죽음을 정복하는 주님의 권능을 나타내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었다.
하나님의 시간계획, 특히 예수님께서 위급한 상황에서 지체하신 것은 마치 주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완전한 계획과 의도를 따라 우리의 모든 요구를 채워주신다. 이것을 깨달은 사도 바울은 빌4:19에서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선언한다.
한 그리스도인이 마주치는 문제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하나님은 모든 부정적인 상황에서 선한 것을 이끌어내실 수 있기 때문이다(롬8:28). 그러므로 우리는 때로 기도에 즉각적인 응답이 오지 않더라도, 상황이 더 심각하게 변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내하게 하신 후 하나님의 계획과 때를 따라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6월 2일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다 2 (요한복음 11:17-27)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는 나사로가 죽은 지 이미 나흘이나 지났다. 너무 늦게 오신 예수님을 원망이라도 하듯이 마르다는 예수님이 그곳에 계셨더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동안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고 이적을 행하신 예수님을 보아왔던 두 자매는 예수님이 오시면 반드시 오라비를 고쳐주실 수 있으리라 믿고 간절한 마음으로 안타깝게 예수님을 기다렸을 것이다.
마르다는 나사로가 이미 죽었지만 지금이라도 예수님께서 무언가 해주시기를, 그리고 무언가 해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마르다는 놀라운 부활신앙을 고백한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아는 믿음은 가지고 있었으나 죽음까지도 다스리시고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예수님의 하나님과의 동등한 권능은 아직 알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시려고 이미 계획하고 계셨다. 그러나 육체적으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에 앞서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포하시며 그 사실을 믿는 이들이 얻게 될 영원한 생명과 이 세상에서도 누리며 살아갈 영적 생명에 대해 미리 말씀하심으로써 마르다의 믿음을 더욱 강화시키셨다.
오라비의 죽음의 고통 앞에 선 마르다의 신앙은 이제 부활을 아는 것에서 부활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성장하였다. 마르다와 같이 우리의 믿음도 아는 것에서 믿는 것으로 변화하여 온전해지기를 소망하자.
6월 3일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다 3 (요한복음 11:38-44)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나에게 일어난 기적
오라비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소망의 말씀을 주셨다. 마르다는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옮겨놓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 냄새가 난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대답을 하였다. 그녀의 시선은 아직 예수님께 고정되지 않고 현실에 고정되어 있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명령하시자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살아 무덤에서 나왔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단지 그를 사랑하시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곳에 모인 무리들에게 예수님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것을 보여주심으로써 하나님과 예수님이 기도 안에서 하나가 되심을 보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하려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 보이시기 위한 것이고, 나아가 부활 신앙을 갖게 하려는 것이었다.
나사로는 살아났으나 언젠가 다시 죽었다. 그의 살아남은 다시 죽음을 맞이하는 제한적인 부활이었다. 장차 있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예시하는 이 사건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일시적인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임을 시사해준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서는 이런 기적은 다시 볼 수 없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족이 베로 묵인 것 같이 죄와 죽음에 둘러싸여 있던 우리 영혼이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살아난 것이 오늘날 우리가 체험하는 기적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눈을 들어 우리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일상에서 반복되는 죄와 악함과 부패를 씻어주시고 고쳐주시는 주님의 말씀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킴으로 오늘도 우리에게 일어나는 기적을 체험하자!
6월 4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요한복음 12:20-25)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그들이 갈릴리 벳세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예수님의 영광 우리의 영광
명절에 예루살렘을 찾아온 헬라인 몇 명이 예수님을 뵙고자 청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고자 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셨다(23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광은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하는데, 십자가의 죽음은 당시 가장 수치스럽고 가장 큰 형벌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영광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고, 그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이제 그 결정적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아셨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 한 알의 밀이 되어 죽을 것이며, 그로 인해 많은 이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므로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도 이와 같이 자신을 희생해서 많은 열매를 거두어야할 것을 가르쳐주셨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자, 곧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사람은 오히려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을 얻게 됨을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헬라인들의 잘못된 의도에 응답하셨다.
성도로서의 우리의 영광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과 계획을 이루어 가시기 위해 사람을 사용하신다. 우리가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하나님의 뜻을 펼쳐가는 도구로 쓰임 받게 된다면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영광이 될 것이다.
6월 5일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요한복음 12:26-30)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27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29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천둥이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섬김에 따르는 복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구원을 이루고자 하시는 예수님도 이 땅에서 육신의 몸으로 사셨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하는 일이 너무나 고통스러우셨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라고 고백하는 예수님은 감당해야 할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분명히 밝히며, 사명에 순종함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셨다.
예수님을 뵙고자 했던 헬라인들은 예수님을 섬기는 제자가 되고자 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고 교훈하신다.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 예수님이 계신 곳에 있는 사람,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을 행하는 사람, 예수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그 마음이 있는 사람, 예수님이 바라보는 곳을 함께 바라보는 사람, 그 사람이 진정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예수님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귀히 여겨주시는 것이 예수님을 섬기며 따라가는 제자가 받는 복이다. 이 땅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기에는 희생과 헌신이 따른다. 우리는 때로 이러한 희생과 헌신이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이에 비교할 수 없는 상급을 하나님께서 주신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귀하게 여김을 받아도 기쁜 일인데 하나님으로부터 귀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가장 큰 은혜 중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섬기는 제자의 길을 주님과 함께 감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 귀히 여겨주시는 은혜를 받아 누리자.
6월 6일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 1 (요한복음 13:1-10)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9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예수님이 보여주신 본
예수님은 자신의 마지막 사명을 이루시고 이 세상을 떠나야 할 때가 다가옴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도 그들이 앞으로 감당해야할 일들, 일어날 일들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함께 모여 식사를 하던 자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심을 통해 세상에 홀로 남게 될 제자들을 교훈하셨다.
유대인들은 더운 지방에 사는 까닭에 샌들같이 생긴 신발을 신고 다녔다. 외출 후나 식사 전에 발을 씻는 것이 관습이었는데 당시 발을 씻겨 주는 것은 종들이 하던 일이었다. 예수님께서 종과 같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심으로써 겸손의 본을 보여주셨고, 제자들도 서로 섬기는 겸손한 삶을 살라고 하셨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마음에 더러운 죄가 있는 사람은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가질 수 없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심으로 인해 우리는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 가운데 친밀한 교제를 누리게 된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들이 임명 받을 때 온 몸을 씻었다. 하나님은 또한 물 대야를 준비하도록 명령하셔서 제사장들이 매일 손발을 씻는데 사용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깨끗하게 씻어 주셨고, 매일 말씀의 물로 그의 교회, 성도들을 깨끗케 하신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말씀을 읽음으로써 그의 발을 깨끗이 씻고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함을 주님은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6월 7일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 2 (요한복음 13:12-20)
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18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19 지금부터 이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위선과 교만을 제거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서로 섬기며 봉사할 것을 가르치려는 목적만은 아니었다.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승천 후 예수님의 사역을 이 땅 위에서 계속하게 하려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다. 이 목적을 이루고자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신을 보내신 것 같이 자신도 제자들을 보내심을 말씀하셨다.
가룟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다락방 식사자리에 있었다. 그는 위선적으로 행동하며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제자들은 그의 의도를 눈치 채지 못했다. 예수님은 제자들 중 한 명이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을 공개적으로 말씀하시며 이미 마음속으로 주님을 배반한 유다에 대해 경고하셨다. 다른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 눈치 채지 못했지만 유다는 예수님이 자기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유다로 하여금 회개하고 사단에게 지배당한 마음을 돌이킬 기회를 주셨지만 주님이 떡 한 조각을 적셔 그에게 주었을 때 그는 회개와 배신의 갈림길에서 사단에게 굴복하였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팔려는 자가 누구인지 말해달라고 채근하며 예수님께 은근히 자신을 내보였고, 자신은 예수님을 따라 가며 목숨까지 버릴 수 있다고 말했으나 그것은 잘못된 자기 확신, 교만이었던 것이 곧 드러났다.
예수님께서는 13장에서 일련의 말씀들을 통해 우리에게 위선과 교만을 경고하신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때로 잘못을 저지른다. 잘못한 양심을 주님께서 자극하시고 깨우쳐주실 때 회개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우리의 신앙적 위선과 교만을 회개하며 오늘도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하겠다.
6월 8일
새 계명 (요한복음 13:31-35)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36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37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
베드로는 예수님께 자신이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장담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가 위기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이날 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고 베드로에게도 경고하셨다.
예수님이 받으실 영광은 십자가였다. 인류 구원을 위해 곧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실 예수님은 그것이 자신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지만 하나님께나 자신에게나 모두 영광이 됨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이 곧 영광임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십자가 죽음을 앞둔 예수님은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 나아가 우리 모두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유언과 같은 말씀을 주셨다. 사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레위기19:18에 이미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새 계명을 주신다고 하시며 구약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단지 말이나 감정으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시며 사랑하셨다. 인간인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과연 어떻게 본받고 실천할 수 있을까? 우리의 생명을 내어주지는 못할지라도 우리의 시간, 재물, 능력을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위해 주저함 없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사용한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사랑을 베풀기는 참으로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러한 사랑을 실천할 때 이것을 보는 이들은 우리가 행하는 사랑이 진정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임을 느끼게 되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을 인정할 것이다.
6월 9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한복음 14:1-9)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유일한 길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 뒤에 남겨질 제자들이 현실적 상황들로 인해 근심하다가 믿음이 약해질 것을 염려하셨다. 그러므로 세상을 바라보며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믿음 위에 굳건히 서 있을 것을 명령하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시고, 거처를 예비하시면 다시 오셔서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가시겠다고 하신다. 어디론가 갈 곳이 있다는 사실은 사람의 마음을 안심시키고 평안하게 만든다. 그 곳이 육신의 집이라도 그러한데 하물며 우리가 이 땅에서의 삶을 끝내고 갈 곳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그러나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거처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하는 그곳을 경험적으로 알지 못하므로 도마처럼 의심한다.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예비해주시는, 장차 우리가 갈 곳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곳이다. 길이 되신 예수님만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진리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약속의 실제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오직 진리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생명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신적 생명을 우리 모두에게 영생으로 연결시키셔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열어놓으신 유일한 길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는 오늘도 이 땅에서 장차 가게 될 하늘나라를 기대하며, 이미 하늘나라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다.
6월 10일
보혜사 성령 1 (요한복음 14:14-21)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미래를 아시는 하나님
곧 제자들을 떠나게 되실 예수님은 그러나 제자들을 세상에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 자신은 비록 제자들을 떠나 하나님 나라로 가실 것이나 삼위 일체 중 또 다른 하나님이신 성령을 제자들에게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성령을 보혜사로 표현한 것은 성도들 곁에서 모든 것을 살펴보시며 마땅히 행해야할 일, 말해야 할 것들을 가르쳐주시고 도와주시는 위로자, 대언자, 상담자로서의 성령의 사역을 염두에 둔 것이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 안에,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현재이고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살아가도록 도우시며,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 땅 위에 세우도록 도우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가시는 것이 뒤에 남겨지는 제자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도리어 성령이 임하시는 큰 축복이 되는 이 약속은 제자들에 대한 무한한 위로의 말씀이다.
때로 사람들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기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미래를 알지 못하게 하셨다.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하나님만이 아시지만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알아야만 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말씀해주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규범에 따라 산다면 그분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일에 있어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와 함께 하시며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님으로 인해 오늘도 우리는 담대하게 하루를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6월 11일
보혜사 성령 2 (요한복음 14:25-31)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29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30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갈 것과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이 감당해야 할 일들을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불안해하며 근심하였다. 두려워하고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누리게 될 평안을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이 말씀은 당시 제자들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큰 위로와 힘이 된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내면에는 죄와 불안, 불확실성, 의심 등 많은 다른 부정적인 힘들이 서로 갈등하며 다투고 있다. 하나님의 평안은 우리의 내면에 들어와 이러한 적대적인 힘들을 통제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갈등과 다툼으로 지치고 힘들어하는 인생들을 위로해 준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고, 세상이 주는 방법으로 주시는 것도 아니며, 세상이 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평안이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일시적이고 얄팍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은 영혼 깊은 곳에서 항상 만족을 주며, 우리들이 주님과 동행하는 한 우리 안에 영원히 머무른다.
보혜사 성령께서 자신의 사역을 통해 우리의 삶 가운데 이루시는 최종결과는 우리 안에 상주하는 깊은 평안이다. 이 깊은 평안을 소유하면 우리는 세상에서 겪는 어떠한 힘든 일들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으며 요동치 않는 믿음의 자세를 견지할 수 있게 된다. 만일 자신의 삶이 메마르고 스트레스로 가득 차 있다고 느껴진다면 주님께서 약속하신 주님의 평안을 구하자.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주님의 평안을 얻게 하시고, 메마르고 곤고한 영혼에 주님의 평안을 가득 채워주실 것이다.
6월 12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1 (요한복음 15:1-8)
1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열매
포도나무는 열매를 많이 맺는 식물이다. 포도나무 한 그루에 많은 가지가 붙어 있어 가지마다 많은 포도송이가 맺힌다. 구약성경에서 포도나무는 하나님이 땅을 다스리셔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풍성한 수확을 얻게 하는 것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와 포도원 농부이신 하나님의 비유를 통해서 포도원 농부이신 하나님이 포도나무 가지를 잘 관리하여 가지들로 하여금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심을 알려주고자 하신다.
포도나무 가지는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다. 열매를 많이 맺는 가지는 그리스도와의 생명력 있는 살아있는 관계를 통하여 많은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들을 뜻한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 같이 우리도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맺는 열매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영혼을 구원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요한복음 15장에서는 기도의 응답, 기쁨, 사랑 등이 열매로 언급된다.
사람들은 올바른 것을 행하며 선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한다. 예수님은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함께 자라갈 수 있듯이 사람들이 예수님과 밀접한 관계 안에 있어야만 진실하고 선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는가? 진실하고 올바른 삶, 선한 결과를 풍성하게 얻는 삶, 자신과 주변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 원한다면 우리 자신이 예수님과의 친밀하고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는지 확인해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이 가지인 우리의 영혼 속으로 흘러들어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가지가 나무에 제대로 붙어있는지 확인해보아야 한다.
6월 13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2 (요한복음 15:9-16)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친구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비유하신 말씀이 7가지로 기록되어 있다.
생명의 떡 (6:5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세상의 빛 (8:12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양의 문 (10:7 나는 양의 문이라 ...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선한 목자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
부활과 생명(11: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길, 진리, 생명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포도나무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등이다.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예수님과 성도들의 연합 관계를 설명한 예수님은 이제 성도들 상호간의 마땅한 관계와 책임에 대하여 가르쳐주신다. 성도간의 관계는 바로 예수님의 새 계명,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사랑의 관계이다. 나아가 서로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들이 누리게 될 복도 말씀하셨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어 하나님의 신령한 비밀을 깨달을 수 있는 복을 주신다. 예수님의 친구가 될 자격이 전혀 없는 우리를 자신의 친구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오늘도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자.
6월 14일
성령의 일 (요한복음 15:26-16:4)
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16: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2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3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4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
성령을 보내시는 주님의 사랑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제자들과 함께 하는 마지막 순간에 하신 말씀을 되새겨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먼저 주님은 제자들에게 박해가 따를 것을 예고하셨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어디로, 언제, 왜 가시는지를 설명하시면서, 제자들을 홀로 버려두지 않고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임박한 십자가 고난과 죽음에도 불구하고 뒤에 남겨질 제자들을 걱정하는 예수님은 제자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돌봄이 끊임없이 계속될 것을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드러내셨다.
자신이 떠나간 후에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주실 성령을 보혜사와 진리의 영으로 표현하셨는데, 위로자로도 표현되는 보혜사 성령은 세상에서 박해를 받게 될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고 강하게 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낸다. 진리의 원천으로서의 성령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조명하셔서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모든 것을 기억하고 깨닫게 하신다. 보혜사 성령은 교회와 성도로 하여금 성령이 머무는 집이 되게 하고, 진리의 영으로써 세상 가운데서 예수님에 관해 증거하며, 예수님을 증거하는 제자들을 도우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신다.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이 홀로 있는 것 같은 외로움과 고난 가운데 있다고 생각될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으로 함께 하셔서 위로하시고 진리를 가르쳐주시며 우리를 도와주신다.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면 우리는 어떠한 처지와 형편 가운데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6월 15일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요한복음 15:7-11)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응답받는 기도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특별히 기도에 대해 여러 차례 강조하셨다. 우리 모두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는 어떻게 기도해야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영적으로 성숙해져 시험을 이기고, 모든 역경과 위험의 현실 속에서도 신앙과 삶을 유지해갈 수 있는 자신감과 평안함, 때때로 만나는 엄청난 실망과 손실 가운데에서도 만족할 수 있는 영혼의 안식, 그리고 끊임없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신앙은 어디서 나올 수 있을까? 바로 기도 생활에서 비롯된다. 기도는 흔히 말하듯 우리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영혼의 호흡이고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의 도구이다. 우리가 마지막 심판 때에 영광 가운데 계시는 그리스도 앞에 설 때 우리의 지상에서의 삶을 회고한다면 그 삶의 가장 부끄러운 모습은 기도하지 않고 살았던 모습일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셨다. 원하는 대로 구해서 이루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있다. 바로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러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를 할 수 있게 되며, 기도의 응답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 기도의 응답은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의 열매가 되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면 그 기도는 무엇을 위한 기도였는지, 나아가 내가 지금 예수님 안에 있는지,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한다.
6월 16일
성령이 하시는 일 (요한복음 16:7-16)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애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5 무릇 내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길 안내자
예수님이 세상에 오지 않으셨다면 복음은 없었을 것이다. 그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죄는 깨끗하게 씻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죽음을 이기지 못했다면 부활도 없었을 것이다.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성령이 오시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에는 단지 한 곳에만 계실 수 있었다. 예수님이 본래 있었던 자리, 곧 하나님께로 귀환한 것은 이제 그가 성령을 통하여 온 세상에 동시적으로 존재하실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 홀로 있지 않다는 것을 알기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보혜사 성령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불신앙이 죄인 것을 깨닫게 하여 믿음의 길로 들어서게 한다. 의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성령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인간들이 자신의 의로 예수님을 죽게 한 것을 심판하며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여 아버지께로 가심으로 완전한 의를 이루신 것을 깨닫게 한다. 성령은 세상이 예수님을 심판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한 것을 책망하며,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써 세상 권세를 가진 사단을 심판하신 것을 깨닫게 한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우리들에게 알려주시고자 하는 복음이다.
성령은 우리에게 방향감각을 제공하며 가야할 길을 알게 하는 안내자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과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신뢰할 수 있는 확실한 지도를 주셨다. 안내자이신 성령과 예수님이 주신 지도, 이 두 가지는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가야할 올바른 길을 인식시켜준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무엇을 따라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지 생각해보자.
6월 17일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요한복음 16:23-28)
23 그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25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26 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28 내가 아버지께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
요한복음 14장-16장에서 예수님은 기도에 대해 일곱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16:23 그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16:24 너희가 지금까지는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16:26-27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는 말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위의 말씀에 공통된 점은 ‘내 이름으로’, ‘구하라 그러면 주시리라’ 혹은 ‘받으리라’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만이, 그 이름 안에 있는 능력을 믿는 사람만이 그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고, 약속하신 기도의 응답을 체험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의 목적과 욕망이 성령에 의해 정제되어서 자신의 뜻과 그리스도의 뜻이 조화를 이루는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성 어거스틴은 이러한 상태에 이르고자 "오, 주여! 당신의 뜻을 마치 나의 뜻인 것 같이 행하게 허락하옵소서. 그리하면 당신께서 나의 뜻을 마치 당신의 뜻인 양 행하실 것입니다" 라고 기도하였다.
6월 18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 (요한복음 16:25-33)
25 이것을 너희에게 비유로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는 말이 아니니 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28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30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기는 자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나와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이제 다시 원래 계시던 곳, 하나님께로 가셔야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미를 이제야 겨우 깨달아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믿음은 성령이 오셔서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실 때 갖게 될 강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첫 단계에 불과하였다.
제자들의 믿음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다가올 위기의 때에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 곁을 떠나고 예수님을 홀로 남겨둘 것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환난 가운데 처하게 될 제자들을 위로하며 힘을 얻게 하시는 말씀을 주셨다.
세상은 믿는 이들을 대적하고 방해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우리가 세상에서 많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제자들이 슬픔에 울고 있을 때 세상은 기뻐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후 그분을 다시 보게 되었을 때 기뻐하였고 세상은 두려워하였다. 세상과 믿는 이들 사이의 극단적인 대조이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심으로써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용기를 주신다.
제자들이 다 떠나가고 홀로 남겨질 때에도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갈 때 담대할 수 있는 이유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시면서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에 의지하여 우리는 비록 세상에서 때로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담대하게 세상을 이기는 자로 살아갈 수 있다.
6월 19일
자신을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 (요한복음 17:1-5)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4 아버지께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영생의 근원
요한복음 13장31절부터 16장까지의 예수님의 고별설교가 끝나고 17장부터는 예수님의 중보기도가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의 중보기도는 먼저 주님 자신을 위한 기도에서 시작하여 제자들과 모든 믿는 자들에게까지 그 대상이 확대되고 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심으로써 일시적으로 포기했던 창세 이전의 영광을 십자가의 사역을 다 이루심으로 다시 받기를 기도하셨다. 그리고 자신이 다시 누리게 될 영광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바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이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목적을 성취함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자신도 하나님과 함께 영화롭게 되시기를 기도하셨다.
영생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시작하면서 받게 되는 선물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으로 말미암은 영생을 가질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게 되고, 하나님과 내적인 신뢰를 이룸으로써 육신의 삶 가운데서도 실재하는 영생을 소유하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나아가 영생은 우리로 하여금 영생을 소유한 다른 이들과 친밀한 내적관계를 맺게 해준다. 예수님은 영생의 근원이시다. 영생의 근원되시는 예수님을 알고 믿음으로써 하나님과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내적인 친밀한 관계를 이루는 복을 누리며 살아가자.
6월 20일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 (요한복음 17:6-12)
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7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9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다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2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세상에서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앞두고 먼저 자신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신 예수님은 이어서 자신의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이들인데 이들은 이제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되었고 주님의 말씀을 믿게 되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떠난 후에 이 세상에 남아 여전히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할 제자들을 걱정하시는 마음이 가득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을 때에 세상을 피하거나 사단에게 지지 않도록 믿음을 굳게 해주실 것과 믿음이 보존되게 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제자들 또한 진리와 사랑 안에서 연합되게 해주실 것을 기도하셨고, 제자들을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의 진리로 거룩하게 해주실 것을 기도하셨다(17-19절).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들처럼 우리도 여전히 이 세상에서 살고 있다. ‘세상’은 사단이 기뻐하는 권력, 물질적인 부, 자아실현 등의 가치체계를 제시하며 믿는 이들을 무기력하게 하고 넘어뜨리려 한다. 과거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을 위해서 뿐 아니라 현재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사단이 제시하는 세상의 가치체계를 대적하여 살아야하는 우리를 위해서도 예수님은 동일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고 계신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을 이기고, 복음의 진리와 사랑으로 서로 연합하며,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며 살아가도록 예수님은 기도해주신다. 예수님의 기도가 오늘도 우리에게 세상에서 살아갈 힘을 공급해준다.
6월 21일
부활 후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 (요한복음 20:19-23)
19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대리자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해 들었으나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의심하며 믿지 못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까지도 닫고 두려움 가운데 있는 제자들을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며 손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여주시자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을 확인하고 기뻐하였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한 번 평강이 있기를 말씀하시고 그들을 세상에 보내시며 자신의 사역을 이어가는 사명을 주셨다. 그리고 그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숨을 내쉬는 행동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의 실체를 제자들로 하여금 느낄 수 있게 하셨고, 예수님은 이제 원래 계시던 곳으로 가실 것이므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며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이 함께 계시겠음을 알려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대리자로 살아가라고 명령하신다. 예수님의 대리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며 도와주신다. 그러므로 구원사역의 대행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의 죄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하여줄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은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두려움을 준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신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것 자체가 우리의 평안이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영,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혼의 평안을 누리며 예수님의 대리자의 사명을 잘 감당하자!
6월 22일
바울의 감사와 간구 (골로새서 1:1-8)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7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8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
골로새교회
골로새서는 사도 바울이 1차로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골로새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내기 위해 기록한 것으로 추정한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때 에베소를 방문했던 에바브라가 복음을 접하고 기독교로 개종, 고향으로 돌아가 골로새교회를 세웠다.
골로새는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동서 문물의 교류장소가 되었고, 교역량이 많아 상인들과 여행객들이 출입이 빈번하였다.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각종 이단사상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이곳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이 주변지역에 확산되는 장점도 있었다.
골로새서는 에베소서와 함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에베소서와 쌍둥이 서신이라고 불려진다. 에베소서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강조하고 있다면 골로새서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고 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과 성도 상호간에 대한 사랑, 영생에 대한 소망을 통해 신앙생활의 진보를 이루며 결실을 맺고 있다는 소식을 바울에게 전하였고, 바울은 이로 인해 자신이 세우지도, 가보지도 않았던 골로새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다.
우리도 교회공동체와 또한 교회인 우리 개개인의 믿음이 성장하고, 성도 간에 서로 사랑하며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소망을 굳게 붙잡아 풍성한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소망하자!
6월 23일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 (골로새서 1:1-2)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자신을 긍정하라
골로새교회가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 전해들은 바울은 당시 골로새교회를 괴롭히던 혼란을 극복하도록 돕기 위하여 골로새서를 기록하면서 자신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편지를 쓸 때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아무 소망 없이 재판을 기다리는 죄수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택하고 임명하신 그리스도의 사도로 확신하였다. 이런 믿음의 확신은 바울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고백으로 나타날 뿐 아니라, 골로새교회 교인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한 형제들’이라고 부르게 하였다. 이러한 호칭은 잠시 이단사상에 물들어 넘어지고 낙심해있던 골로새 교인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으며,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되돌아보게 하였다.
나아가 바울은 이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축복하였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값없이 주시는 사랑이다. 평강은 함께 묶는 것, 즉 부서지거나 쪼개진 것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사랑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얻었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다시 결합되는 평안을 얻었다.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고 세상의 공격에 넘어질지라도 자신을 비하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하며 다시 일어서자.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신을 긍정하고 격려하며, 은혜와 평강 가운데 살아가자.
6월 24일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골로새서 1:9-10)
9 이로써 우리가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10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삶의 방식에 대한 책임
이단사상의 침범으로 인해 믿음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골로새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권면은 이제 그들의 삶의 방식에 관한 간구로 이어지고 있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고 하시고’라는 표현에서 ‘합당하게’라는 헬라어는 ‘다른 물건과 같은 무게가 나가는’이라는 뜻이다. 당시 헬라어를 쓰는 이들에게 이 단어는 저울을 연상시켰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위해 하신 일이 저울 한쪽에, 저울의 다른 한쪽에는 그리스도인들의 행위가 올려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의 행위가 저울 한쪽에 올려있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균형을 이루게 하는 것이 주께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임을 생각하게 한다.
물론 우리는 결코 저울의 균형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저울의 이미지는 적당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우리의 사랑보다 훨씬 무게가 나간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부단히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애쓰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한다.
바울이 간구하는 바와 같이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씨를 심고 뿌리내려 자라게 해야 한다. 뿌리와 열매는 분리할 수 없다. 주님은 우리에게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교훈하셨다. 자신의 신앙에 진보가 없고, 거두어들일 열매가 없다고 느껴지면, 세상의 유혹과 시험에 자주 넘어진다면 자신의 삶의 방식이 어떠한지 살펴보아야 한다.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자신의 삶이 붙어있는지 확인해보아야 한다.
6월 25일
그의 영광의 힘 (골로새서 1:11-12)
11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소유하자
그리스도인이 열매 맺으며 살 수 있는 능력은 포도나무이신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설명한 바울은 하나님께서 골로새교인들을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간구하였다.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된다는 것은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는 뜻인데,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의 힘으로부터 주어진다. 우리는 결코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도, 용서할 수도, 다른 사람을 돌볼 수도 없다. 이런 일들은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소유할 때 가능해진다.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자기의존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견딤과 오래 참음과 기쁨을 누림이다. 견딤은 참을성 내지는 버팀인데 신앙적인 표현으로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역경 가운데서도 견뎌내는 것이다. 오래 참음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사용되는데, 성령께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오래 참으며 신실하게 이루어갈 능력을 주신다. 기쁨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에게서 외적으로 드러나는 표현인데, 하나님께 사랑받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이 우리의 마음에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준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 되었다. 유한하고 부족한 자신을 보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견디고, 오래 참으며,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자.
6월 26일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골로새서 1:18-20)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십자가의 능력
바울은 골로새교인들이 십자가의 능력을 알고 체험하기를 바랐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었다.
하나님은 모든 충만으로 예수님 안에 거하게 하셨는데, ‘충만’은 어떤 것을 가득 채운 그 무엇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모든 총체적인 본성과 속성, 능력과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채우신 것이다. 하나님의 충만을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신 하나님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십자가에 달려서 인간의 죄를 대신 갚게 하심으로 죄로 얼룩진 불의한 세상을 의로우신 하나님 자신과 화목하게 하셨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곧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과 동일하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가슴 속에서 먼저 시작된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셨다. 화목하게 한다는 헬라어 단어는 ‘뒤로’와 ‘화해시키다’의 합성어이다. 현재의 상태에서 창조시의 완전한 조화와 본래적인 사랑으로 되돌려 놓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였던 창조의 상태로 회복되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을 기뻐하시고, 우리 안에 ‘거하기를’ 기뻐하신다. 일시적인 거함이 아니라 계속해서 우리 안에 함께 있기를 원하신다. 전능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주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여서 우리 안에서 함께 사시는 것이 바로 십자가로 인해 우리가 얻게 된 능력이다.
6월 27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골로새서 1:24-29)
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여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그리스도로 덧입은 사람
주님, 내 정신이 여기 있습니다. 내 속에서 당신의 생각을 하시옵소서. 나의 지혜, 나의 지식, 나의 깨달음이 되시옵소서.
주님, 여기 나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당신께서는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염려하지 말라 하셨고, 대신 내가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려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로 필요한 말이라면 침묵으로든지 아니면 말로든지 말하게 하옵소서. 당신처럼 시기적절하고 부드럽게 말할 수 있게 하옵소서.
이제 주님, 여기 나의 몸이 있습니다. 내 얼굴에서, 나의 분위기에서,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들을 안아줄 때 당신의 창조적인 사랑이 나를 통해 흘러 나가게 하옵소서.
그리고 주님, 아무리 비천하고 힘들지라도 당신의 내주하시는 현존으로써 무엇인가를 내가 해야 한다면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내 의지를 통제하옵소서.
주님, 이제 저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당신의 명백한 도구가 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내 생애 동안 내 안에 계시는 영광의 소망, 주님 당신의 현존 속에서 살고자 합니다.
저의 전 존재가 당신을 닮아가기 위해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고백하게 하옵소서.
6월 28일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골로새서 2:6-9)
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그들의 구원을 확신하고, 더 나아가 신앙의 성장을 열망하기를 바라며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권면을 하였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라는 강한 이미지를 사용하여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생들의 삶에 가장 중요하고 완벽한 원천이다. 믿음의 뿌리를 그리스도라는 부요하고 풍성한 토양에 깊이 내리면 내릴수록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더욱 강해질 것임을 바울은 알고 있었다. 두 번째, 세움을 입으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삶과 기독교적 경험이라는 건물의 기초라고 하며, 골로새교인들의 삶이 그리스도를 기초로 하여 그 위에 든든히 세워지기를 원하였다. 그리고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권면한다.
뿌리를 박고, 세움을 입고, 굳게 서는 것은 원어에 수동태로 되어 있는데,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가능한 수동적인 일임을 의미한다. 마지막 동사 ‘넘치게 하라’는 능동태로 표현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의 생활로 응답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능동적으로 해야 할 일임을 알려준다.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삶의 뿌리를 내리고, 그 위에 세워지고 굳게 서서 자라가는 모든 과정이 곧 그리스도와의 교제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되신다. 예수님과 교제함으로써 우리는 모든 것을 소유한 자가 되지만, 그분이 없이는 우리가 세상에서 모든 것을 소유했다고 해도 그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6월 29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골로새서 3:1-4)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위의 것을 찾는 삶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사람은 생각해야 할 것이 있고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인간은 자기가 속해 있는 것의 가치를 상고하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 따라서 위에 속한 자는 위의 것을 생각하고 위의 것을 추구하며, 땅에 속한 자는 땅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완전한 하늘나라에 가기까지는 땅의 것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은 땅의 것을 목적으로 삼지 말라는 것이지 땅의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금욕주의적인 생활을 하라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지상에서의 삶에 대한 책임감과 의무감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위의 것들을 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쉽지 않은 과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마음과 정신은 세속적인 것들에 열중한다.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소망, 새로운 목적,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세속적인 것에 집중하는 옛 사람의 본성을 이겨내며, 이 땅에서의 삶을 위의 것을 찾는 삶으로 변화시켜가야 하겠다.
6월 30일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골로새서 3:12-15)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
우리가 삶의 방식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시간을 사용하고, 자신의 인격이나 개성을 표현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을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중요시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님과 같은 삶의 방식을 갖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사셨던 것처럼 산다는 뜻인 동시에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현재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이끄시는 방식대로 산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이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사람이 된 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값없이 받은 은혜의 선물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옷에 은유하여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는 사도 바울은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 입고’ 사랑의 띠로 온전하게 매라고 말씀한다.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용서, 사랑은 바로 예수님의 성품이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실 때 우리의 삶의 방식을 통하여 드러나게 해주시는 성품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입었다. 서로가 서로를 하나님이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녀로 인식하여 서로의 허물을 용서하고, 나와 다름을 다투지 않고 용납하며, 서로 사랑하면서 평화를 이루어가는 삶의 방식,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내주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며, 예수님을 닮고 따르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