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제 1일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마가복음 11:12-14)
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 때가 아님이라 14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예수님의 책망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외치는 무리들의 환호 속에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육체로 이 세상에 계시는 마지막 주간의 활동을 하시며 십자가의 길을 준비하셨다.
다음 날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고 하시며 성전에서 일하는 이들의 부패와 타락, 불의한 이득 취함을 책망하셨다.
많은 일들로 지치고 시장해진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따서 드시기를 원했으나 나무에는 잎사귀만 있고 열매가 없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에게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그 나무에서 열매를 따먹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무화과 열매가 맺힐 때가 아니었으므로 열매가 없는 것은 당연하고, 나무의 잘못이 아니지만 주님이 필요로 하실 때에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성경에서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잎만 무성한 나무처럼 외형상 믿음이 있는 것 같으나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는 믿음 없는 유대인들을 책망하신 것이다.
고난주간을 지내며 성전이 된 우리의 영혼이 깨끗한지, 주님이 필요로 하실 때 주님 손에 들려 사용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열매 맺는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라는 예수님의 책망을 귀 기울여 듣자.
고난주간 제 2일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 (마태복음 26:6-1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8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10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 이 여자가 내 몸에 향우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거룩한 소비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음모를 꾸미고 있는 동안 한 이름 없는 여인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귀한 것,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린 것을 마태는 이어서 기록하고 있다. 죽이려는 음모와 그 죽음을 향유로 미리 경배하는 예언적인 모습이 대조를 이룬다.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은 진정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기에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을 망설임 없이 주님께 드릴 수 있었다.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향유는 매우 값비싼 것으로 어쩌면 이 여인이 가지고 있던 전 재산 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여인은 자신의 말할 수 없는 사랑을 주님께 표현하고자 기꺼이 전 재산을 소비하였다.
주님께 대한 성도의 헌신은 때로 주변의 반대와 조롱에 직면할 수 있다. 예수님께 대한 이 여인의 헌신은 즉각 제자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제자들은 마치 실용주의에 익숙한 우리들처럼 세상적인 계산방법으로 이 여인의 행동을 ‘허비’라고 표현하였다.
죽은 자에게 향유를 붓는 것은 유대의 관습이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 이 여인의 헌신을 통하여 미리 장례를 준비하였고, 이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고귀한 사역인 십자가의 죽음을 미리 준비한 여인이 되었다. 주님을 사랑하는 단 한 가지 이유로 행한 일이 성경에 기록되어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이 기억하고 기념하는 값진 일이 된 것이다. 제자들이 말한 허비가 아니라 주님의 죽으심을 준비하는 거룩한 소비가 되었다.
주님을 사랑하는 나의 마음은 얼마나 크고 간절한지, 나의 구주가 되신 주님을 위해 나는 어떤 거룩한 소비를 할 수 있을지 오늘 하루를 지내는 동안 생각해보자.
고난주간 제 3일
서로 발을 씻어 주라 (요한복음 13:12-17)
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섬김의 본
준비의 날이라고 불리는 고난주간 네 번째 날에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가까워오는 것을 아시고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셨다.
식사를 하시던 중 대야에 물을 가져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제자들도 이와 같이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시며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다. 유대인들은 더운 지방에 사는 까닭에 샌들같이 생긴 신발을 신고 다녔다. 외출에서 돌아온 후나 식사 전에 발을 씻는 것이 관습이었는데 당시 발을 씻겨 주는 것은 종들이 하던 일이었다. 예수님께서 종과 같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겸손의 본을 보여주셨고, 제자들도 서로 섬기는 겸손한 삶을 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은 직분을 임명 받을 때 온 몸을 씻었다. 하나님은 또한 물 대야를 준비하도록 명령하셔서 제사장들이 매일 손발을 씻는데 사용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물로 제자들의 먼지 묻은 발을 씻어주셨을 뿐 아니라 자신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씻어 주셨고, 매일 말씀의 물로 그의 교회, 성도들을 깨끗하게 씻어주신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말씀을 읽음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깨끗이 씻고,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주님이 행하신 일을 본받아 형제자매를 섬기는 삶을 살고자 애써야 하겠다.
고난주간 제 4일
겟세마네의 기도 (마태복음 26:36-46)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어야 하는 절대과제를 앞에 둔 예수님은 세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언덕에 기도하러 가셨다. 이 과제가 예수님께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는지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표현하셨고,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눅22:44)’될 만큼 간절히 기도하셨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모든 죄를 자신의 한 몸에 짊어져야 하는 예수님의 타는 심정에도 불구하고, 또한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겟세마네 언덕에 함께 올라간 3명의 수제자는 주님의 고통을 조금도 나누어지지 못한 채 육신의 연약함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깨어 기도하지 못하고 연약함을 핑계하며 잠들어 있는 우리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3명의 제자들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은 가능하다면 십자가의 고난을 짊어지지 않을 수 있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신다. 나의 기도가 바로 이렇게 변화되기를 소망하자. 나의 뜻이 아니고, 나의 원함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희망을 성취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모든 약속을 성취해가시기를 기도하자.
모든 유익한 것은 대가를 지불한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구원하시고자 가장 귀한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지불하셨다. 정말로 가치 있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값을 치룰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나는 가장 귀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하나님께 대한 헌신으로 어떤 대가를 치룰 준비가 되어 있는가?
고난주간 제 5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마태복음 27:32-44)
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33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라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35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36 거기 앉아 지키더라 37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38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구레네 사람 시몬
이 부분의 성경구절을 읽을 때마다 갖게 되는 의문이 있다. 예수님이 베푸신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수많은 사람들, 눈을 뜨게 된 소경, 귀신들렸다 고침 받은 이들, 죽었다가 살아난 이들, 고침 받은 중풍병자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모두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예수님은 십자가의 형벌을 받을만한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고 외치는 사람은 왜 단 한 사람도 없는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철저히 홀로 남겨져 십자가에서 옷을 다 벗긴 채 육신의 고통과 수치 뿐 아니라 온갖 저주와 모욕과 희롱을 당하고 계셨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이스라엘 밖에 살던 유대인으로 유월절 절기를 지키고자 예루살렘을 찾은 순례객이었다. 예수님이 더 이상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지 못할 상태가 되자 로마병정은 강제로 시몬을 끌어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하였다.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사람!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 털어 예수님을 도운 단 한 명의 사람이 되었다. 시몬이 대신 진 십자가는 수치가 아니라 주님의 고통을 가장 가까이서 체험하고 변화되는 축복이 되었다. 시몬의 행적은 더 이상 성경에 나타나지 않지만 그의 두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사도 바울이 로마서 16:13에서 특별히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고 하며 그의 어머니(시몬의 아내)를 자신의 어머니로 동일시한 것을 통해 이 가정이 이후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며 바울의 사역을 도왔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작은 행함이 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기꺼이 한 일이 아닐지라도 주님을 위해 한 작은 수고가 큰 축복으로 변화된다. 하물며 예수님을 사랑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선한 일을 행한다면 얼마나 큰 축복이 우리에게 임할 것인가!
고난주간 제6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 (마태복음 27:45-54)
45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 제 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우리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낮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온 땅에 어둠이 임했고,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 지진이 일어났으며,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무덤에서 나왔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찢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죄를 대신 갚아주시고,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무덤에서 나온 것처럼 언젠가 주님이 재림하실 때 성도들도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도 미리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오전 9시경 십자가에 달리셔서 오후 3시경 까지 참혹한 고통 가운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셨다. 모든 인생들을 구원하는 고귀한 사명을 이루시기 위해 아버지 하나님에게까지 버림받아야 했던 고통과 자신의 한 몸에 짊어져야 하는 온 인류의 죄의 무게가 예수님으로 하여금 이렇게 절규하게 만들었다.
공의의 하나님은 인류의 죄의 대가를 완전히 지불하기 위하여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실 수밖에 없었고,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하는 고통으로 인해 하나님 자신도 죽음을 경험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아들과 함께 직접 죽으셨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고 은혜인지!
그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도 이제 주님이 못 박히신 그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살자. 그리하여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고 고백하며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