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제 1일
욥의 회개 (욥기 42:1-6)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2 주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재의 수요일 Aschermittwoch
오늘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Aschermittwoch/Ash Wednesday)이다. 사순절 동안
성도는 주님의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 먼저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신앙의 성장을 위해 영적으로 준비한다.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속죄일이라고도 함)에서 시작되어 성금요일에 끝난다.
성서에서 재는 슬픔과 죄에 대한 회개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지금도 재의 수요일에 일부 개신 교회와 가톨릭교회에서는 전년도 종려주일에 사용하였던 종려가지를 태워 만든 숯을 사용해 성도들의 이마에 십자가를 그려 넣으며 회개의 예식을 행한다.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욥1:1)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한 욥이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을 당하자 심한 고통 중에 괴로워하였다. 고난이 시작되었을 때 욥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굳게 지키었으나 고통이 점점 심해지자 하나님을 원망하며 자신의 출생을 저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질문 앞에서 인간의 연약함과 죄성을 깨닫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였다. 아랍어 ‘아바’(회개하다)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이는 욥이라는 이름은 ‘회개하는 자’라는 뜻이다.
우리가 때로 믿음에 굳건히 서있다고 스스로 생각할지라도, 세상 속에서 자신의 지식이나 노력, 성과를 자랑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 그 모든 것은 티끌만도 못하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순절을 시작하며 우리도 욥과 같이 스스로를 거두어들이는 겸손한 자세로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며 하나님께서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간구하자.
사순절 제 2일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더니 (마가복음 1:32-39)
32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34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3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서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사순절을 시작하며
예수님은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치유하랴, 귀신을 내어쫓으랴, 제자들을 가르치랴, 이곳저곳을 다니며 성전에서 설교하시랴 ... 쉴 새 없는 활동으로 가득 찬 일정을 보내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을 기록한 성경 말씀 가운데 ‘아주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일어나서 외딴 곳으로 나가셔서, 거기서 기도하고 계셨다’라는 말씀을 접한다.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사역의 비밀은 그 분이 아침 일찍, 새벽 동이 트기 전, 기도하러 가셨던 저 외딴 곳에 숨겨져 있다. 본질 상 하나님과 한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며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자신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행할 힘과 용기, 겸손함을 충전하셨다.
어딘가 외딴 곳이 없이 분주하게 달려가기만 하는 우리의 삶은 위험에 빠지기 쉽다. 침묵이나 경청함 없이 계속되는 말은 능력을 갖지 못하고 공허해진다. 침묵과 말 사이, 물러남과 참여함 사이, 거리를 유지하는 것과 가까이 다가가는 것 사이, 홀로 있는 것과 공동체 안에 있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밑바탕을 이룬다.
한 해를 시작한 후 우리는 마치 출발점을 출발한 육상선수들처럼 달려왔다. 사순절을 지내면서 빠르게 달리던 길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삶의 중심에서 한발 물러서서 우리의 달려가는 길의 방향과 목적이 바르게 설정되어 있는지 살펴보자.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이른 새벽 외딴 곳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자신이 있는지 점검해보자.
사순절 제 3일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요엘 2:12-17)
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14 주께서 혹시 마음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15 너희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라
사순절의 의미 회복
사순절을 의미하는 독일어 Fasten, Fastenzeit는 금식, 금식기간을 뜻한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신 것, 온 인류의 죄를 대신 갚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을 기억하고 성도들도 금식, 혹은 단식하면서 함께 그 고난에 참여하며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절기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 초기에는 사순절 기간 동안 금식을 매우 강조하였고 이를 엄격하게 시행하였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유럽에서는 사순절 금식절기가 시작되기 전에 실컷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며 즐기는 카니발이 생겨났는데, Carnival이란 단어는 '육식이여 안녕'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순절의 외형적인 준수가 아니라 내면적인 준수이다. 비록 40일 동안 금식을 하지는 않을지라도 이 기간 동안 세상적인 오락을 삼가고, 불우한 처지에 있는 이웃들을 돌아보며,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끊어내고자 애쓰는 시간으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 경건과 절제, 희생과 나눔, 성찰과 회복이 사순절의 진정한 의미이며, 나로부터 시작되는 사순절의 의미 회복은 나 자신 뿐 아니라 우리의 공동체를 변화시킨다.
요엘 선지자는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의 신앙 모습은 어떠한지 돌아보고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사순절을 지내며 진정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를 체험하자!
사순절 제 4일
예수님이 받으신 세 가지 시험 (마태복음 4:1-11)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말씀으로 돌아가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에서 사십 일을 금식하셨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다고 기록된 것을 볼 때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세 가지 차원의 시험을 겪으셨다.
첫 번째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시험이었다. 두 번째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는 정신적이고 명예적인 시험이었다. 세 번째는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는 영적인 시험이었다. 예수님은 모든 차원의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심으로써 이 세상에서 시험을 당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시험을 이길 수 있도록 본을 보여주셨다.
사탄은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것을 방해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고 유혹하며, 하나님의 길을 따르지 않고 각기 자기의 길로 가게 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한다. 예수님이 시험받으실 때에 말씀으로 시험을 이기신 것은 우리도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말씀을 붙들어야 하며,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형질이 강하고 단단하게 변화되어야 함을 가르쳐주신다.
사순절을 지내며 우리 각자는 신앙적으로 더 성숙해지기 위하여 각자 결심하고 목표한 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사탄의 시험으로 흔들릴 때 즉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말씀 안에 깊이 잠김으로써 시험을 이기고 오히려 신앙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은혜를 체험하자!
사순절 제 5일
변형되신 예수님 (마가복음 9:2-8)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3 그 옷에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7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8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예수님을 바라보자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그들 앞에서 본래적인 신적 형상으로 변화하셨고,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모세는 가장 위대한 선지자가 오실 것을 예언하였고(신18:15-19) 엘리야는 장차 메시야가 오실 것을 예언한 모든 선지자들을 대표한다. 예수님이 변형되신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은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야의 도래가 바로 예수님이 오심으로 성취되었음을 알려준다. 이 사실을 확증해주듯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에게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앞으로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의 고난을 마주하게 될 제자들은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봄으로써 이미 부활에 대해 알면서 십자가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사순절을 지내며 금식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고자 애쓰는 우리의 결심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들이 많이 있다. 매일 해야 할 일들이 파도처럼 밀려오는가하면 우리의 관심을 빼앗아갈 만큼 중요하게 생각되는 일들, 육신의 즐거움을 주는 일들이 우리의 우선순위를 바꾸어 놓는다. 이럴 때마다 변화산에서 자신의 본래적 모습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또한 그 영광의 자리를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멸시와 수치 가운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 기꺼이 헌신할 수 있는 것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을 바라보기 때문이며, 하나님 나라에서 참여하게 될 영광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사순절 제 6일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1 (마태복음 5:13-16)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리켜 세상의 소금이라고 부르심으로써 제자들에게 이 땅에서의 사명을 부여하셨다.
소금은 지상에서의 삶에 있어 필수적인 물질이다. 소금은 변하지 않으며, 부패를 방지하고 정화시키는 힘으로 여겨진다. 레위기 2:13에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물에서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고 기록하며 소금을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이라고 표현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너희는 소금이다’라고 선포하셨다. 주님이 제자로 부르신 그 부르심의 힘 속에서 이미 제자들은 소금의 존재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눈에 보이는 상징이었던 소금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감당해야 할 역할로 표현하셨다. 오늘날 소금으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인의 역할은 세상을 내적으로 변화시키며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고 정화시키는 영향력이라 할 수 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가치가 없듯이 그리스도인이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무가치한 그리스도인,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이 되고 말 것이다.
사순절을 지내며 우리 자신의 소금으로써의 정체성을 깊이 생각해보자. 소금의 존재가 귀하듯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하는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귀한 존재들임을 자각하고 이 세상에서 소금과 같이 맛을 내며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노력해야 하겠다.
사순절 제 7일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2 (마태복음 5:13-16)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부름 자체가 제자들을 빛으로 만들었으며, 빛이기 때문에 원하던 원하지 않던 더 이상 숨겨진 채로 있을 수 없게 되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가장 먼저 빛을 창조하셨다. 사도 요한은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라며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참 빛임을 선포하였다.(요1:9) 예수님은 이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제자들, 나아가 우리들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다.
빛은 선함과 순수함, 진실 그리고 거룩함의 상징이다. 어둠 속에서 선과 악은 똑같이 보이나 빛이 비치면 선과 악은 분명하게 구분된다. 소금이 내적인 성품의 변화라고 한다면 빛은 그리스도인들의 선한 행실을 통해 하나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외적인 간증이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사순절을 지내며 우리를 제자로 부르셔서 빛이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마음 깊이 새겨보자.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빛을 받아 생명력 있는 그 빛으로 세상을 밝게 비추는 제자의 삶, 어둠 가운데 있는 이들을 빛으로 인도하는 삶, 빛으로 어두움을 이기는 삶을 살아갈 것을 결단하고, 실천하고자 노력하자.
사순절 제 8일
겟세마네에서의 기도 (누가복음 22:39-46)
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40 그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41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예수님은 늘 하시던 대로 기도하러 감람산에 가셨고, 제자들도 따라 갔다. 십자가를 져야 하는 고통
스러운 과제 앞에서 예수님은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기까지 기도하시며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순종시키셨다. 겟세마네동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함께 기도할 제자가 필요했다.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으나 제자들은 주님의 요청에 함께하지 못했다. 피곤한 육신이 말을 듣지 않았고, 내적인 시험과 무기력함이 그들을 지배하였다.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일어나라 함께 가자’(마26:46)고 말씀하셨다. 사순절에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권고는 분명하다. 일어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가자는 것이다. 제자들은 십자가의 길에서 시험을 당하고 있었다. 주님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 기도함으로써 세상에서 다가오는 시험을 이기라고 하신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순종시키신 주님이 자신의 십자가를 지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과 함께 가야 한다. 함께 가는 길은 그냥 따라나서는 길이 아니다. 함께 가는 길에는 저마다 책임이 따른다. ‘함께 가자’는 말씀에는 또한 공동체의 위로와 용기도 들어있다. 함께 가면 슬픔과 두려움은 가벼워지고 기쁨과 사랑은 배가 된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같이 가자’고...
사순절 제 9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요한복음 12:20-26)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그들이 갈릴리 벳세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열매 맺는 죽음
명절에 예루살렘을 찾아온 헬라인 몇 명이 예수님을 뵙고자 청했다. 그들은 아마도 예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보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 지상에서의 명예와 권위를 얻고자 했던 것 같다.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고자 한다는 것을 전해들은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답을 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광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의미하는데,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영광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게 될 것이며, 이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 때문이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예수님도 한 알의 밀이 되어 죽을 것이며, 그로 인해 많은 이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므로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도 이와 같이 자신을 희생해서 많은 열매를 거두어야할 것을 가르쳐주셨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사람, 곧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됨을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을 만나고자 찾아온 헬라인들의 잘못된 의도에 응답하셨다.
사순절을 지내는 우리에게 주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이론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원하는 우리 모두가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하는 실제적인 말씀이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하며 실천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자.
사순절 제 10일
거룩한 산 제물 (로마서 12:1-3)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영적 예배로 변화되는 삶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자신의 죄를 대신 갚게 하기 위해 흠이 없는 짐승을 잡아서 죽은 예물을 드렸다. 죄 없는 수많은 짐승이 죄 있는 인간을 위해 흘린 피를 이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모든 인간들의 죄의 값을 치러주셨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려야 한다고 권면한다. 우리의 매일의 삶이 거룩하고 정결해져 하나님께 드려지는 영적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를 방해한다. 사도 바울의 시대나 지금이나 이 세상은 불의하고, 부패하고, 이기적이며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이들을 교묘하게 유혹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권면한다.
우리가 사는 세대에서 본받지 말아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사순절을 지내며 이 질문을 각자에게 하며 진지하게 답을 찾아보자.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마음의 무릎을 꿇고 자신의 내면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세상적인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것은 무엇인지 찾아서 내어버리고, 우리들 각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갈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로 변화되어 갈 것이다.
사순절 제 11일
나를 따라 오라 (마가복음 1:16-22)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21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제자직으로의 부르심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아 생활하던 어부들에게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마가복음 1장에는 ‘곧’이라는 단어가 7번이나 나온다. 마가는 복음서를 매우 간결한 문체로 기록하면서 곧, 즉시라는 단어들을 사용하여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어부들은 생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앞날이 어떻게 전개될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으나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하여 생업의 도구인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다. ‘나를 따라 오라’는 부르심에 대한 제자들의 응답은 말로만 하는 신앙고백이 아니라 순종하는 행동으로 나타났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제자직으로 부르신다. 주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것은 자신으로부터 나와 부르신 분의 삶의 목표와 방향을 향해 가는 것이다. 더 이상 자신의 과거의 경험이나 현재의 상황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부르신 분의 미래를 공유하며 나아가는 새로운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표현하였다.
사순절을 지내며 우리를 제자직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곧 순종하여 주님의 제자로서 새로운 존재로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하고, 성령께서 도와주시기를 간구하자.
사순절 제 12일
과부와 불의한 재판장 (누가복음 18:1-8)
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기도를 회복하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한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를 사용하셨다.
한 과부가 몹시 억울한 일을 당해 그 원한을 풀어달라고 자주 재판장을 찾아가 호소하였다. 재판장은 그러나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었고, 오히려 하나님조차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교만하고 무정한 사람이었다. 과부에 대한 동정심도 없었고, 약한 자의 억울함을 풀어주려는 정의감도 없었으나 단지 과부가 계속 자신을 번거롭게 하는 것이 싫어서 그의 원한을 풀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장도 자신이 번거롭게 되는 것이 싫어서 과부의 호소를 들어주는데 하물며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자녀들이 밤낮 부르짖는 것을 들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고 질문하며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믿음으로 기도해야 함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직접 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시고, 습관을 따라 이른 아침 기도하시는 기도의 본을 보여주셨고, 초대 교회 사도들과 성도들도 오로지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고 사도행전은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때로 형식적으로 기도하고, 때로는 간단히 기도하며 ‘이만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위안을 삼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께 전심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 사순절을 지내며 우리의 안일한 기도생활을 회개하고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는 기도를 회복하자!
사순절 제 13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마가복음 2:13-17)
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용서받은 죄인
갈릴리 해변을 지나가다가 어부인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은 그 후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레위는 그 말씀에 즉시 반응하여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 갔다.
레위는 - 아마도 예수님을 만나 그분을 따르게 된 것에 감격하여 - 자신의 집에 예수님을 모시고 제자들, 동료 세리들과 유대인들이 죄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초청하여 함께 식사를 하였다. 당시 세리(세관원)는 유대인들로부터 배척당하는 죄인이었다.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거둬서 점령국인 로마에 바칠 뿐 아니라 많은 부분을 떼어서 자신들이 착복했기 때문이었다. 유대교 지도자인 서기관들이 어떻게 예수님과 제자들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냐고 책망하자 예수님은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한 것이고, 자신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대답하셨다.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고 용기를 준다. 죄인인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직접 이 세상에 오셔서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우리를 불러주시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스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채로 살아갈지라도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용서받은 죄인이다.
사순절을 지내면서 나 같은 죄인까지도 불러서 제자로 삼으시고자 이 땅에 오셔서 고난당하신 주님의 은혜를 묵상하며 은혜에 보답하는 주님의 제자로 살아갈 것을 결단하자.
사순절 제 14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평강의 하나님 (빌립보서 4:6-8)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우리의 생각을 주 예수께 고정시키자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권면한다. 이 말을 쉽게 표현하면 ‘모든 생각을 덕 있는 것과 선한 것들과 옳은 것들에 집중시키고 고정시키라’는 뜻이다. 이것은 인생의 유한한 시간을 세상의 무익한 것들에 낭비하지 않고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바꾸어 가기 위해 오신 예수님께 삶의 무게중심을 두고, 그분을 따라 가는 것이다.
요한복음 14:1-14까지 믿으라는 말과 예수님을 안다는 말이 10회 이상 나온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 분을 제대로 알고 믿기를 원하시는 간절한 소망과 기대를 가지고 계신다. ‘믿으라’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시키고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와 사귐을 통해 친밀한 관계로 나아가라는 뜻이다.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이룬 사람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뢸 수 있게 되며,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고 평안하게 하시는 선순환의 작용이 일어난다.
사순절 세 번째 주간을 지내며 세상을 향한 우리의 초점을 주님께로 돌리자. 우리의 죄를 갚아주시
기 위해 주님이 대신 지신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자. 십자가에서 흘린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자.
사순절 제 15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누가복음 17:5-10)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7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순종과 겸손
누가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수평적 관계인 이웃과의 삶에
서, 그리고 수직적인 관계인 하나님과의 삶에서 가져야 할 덕목과 교훈들을 말씀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교훈들을 실천할 수 있도록 믿음의 분량을 더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큰 능력을 행할 수 있음을 말씀하시며 믿음의 질적인 면을 강조하셨다. 겨자씨는 매우 작지만 그 안에 생명력이 있어서 큰 나무로 성장하듯이 참된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작은 믿음으로도 큰 능력을 행할 수 있음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러한 믿음을 소유하고, 그러나 겸손하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해야 할 것을 종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주인을 충실하게 섬기는 종은 어떠한 보상이나 칭찬을 바라지 않고 자신이 맡은 일을 행한다. 주님의 제자들도 자신의 직분을 충실히 감당한 후 칭찬과 보상을 기대하기 보다는 다만 자신은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충실한 제자에게 요청하시는 것은 순종과 겸손이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빌2:6-8)하심으로 우리에게 섬김과 겸손의 본을 보여주셨다.
사순절을 지내며 하나님과 동등한 분임에도 불구하고 종의 모습으로 인생들을 섬기며 희생하신 주님의 삶, 주님의 헌신적 사랑을 우리도 닮아가기를 기도하며 실천하자.
사순절 제 16일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누가복음 14:7-11)
7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를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8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나님께서 높여주신다
성경을 읽다 보면 반복해서 나오는 주제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는 주제이다. 얻으려고 애쓰는 자는 잃게 하시고 버리는 자에게는 얻게 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원칙은 세속의 원칙을 뛰어넘는다.
예수님이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식사하러 들어가셨다. 식사에 초대된 손님들이 서로 상석에 앉으려고 하는 것을 보시고 비유를 통하여 겸손한 자세에 대해 가르치시며,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과 다르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고 높이고자 하며 섬기는 자리가 아닌 섬김을 받는 자리에 있고자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10:43-44)고 말씀하셨고, 예수님 자신도 섬김을 받기보다 도리어 섬기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스승을 본받고 따르는 사람을 제자라고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배우고, 그분이 행하신 일,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행하는 것이다. 사순절을 지내며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겸손하게 형제자매를 섬기는 삶을 실천해보자.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높여주실 것이다.
사순절 제 17일
깨끗함을 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 (누가복음 17:11-19)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
예수님 당시 나병환자들은 전염될 것을 염려하여 사람들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고, 떨어져 생활해야 했으며 매우 부정한 사람 내지는 죄인으로 인식되었다. 예수님을 만난 나병환자 열 명은 예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멀리 서서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고 외쳤다.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하는 예수님 말씀을 듣고 제사장에게 가던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놀랍게도 가는 도중 병이 나아 몸이 깨끗하게 되었고, 이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돌아가 감사드렸다. 예수님은 자신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하는 이 사람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셨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모두 예수님이 자신들의 병을 고쳐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제사장에게 가던 도중 병이 낫는 은혜를 입었다. 그러나 아홉 명은 병이 나았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지도 않은 채 각기 자기의 길을 갔고,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 만이 예수님께 돌아가 그 은혜에 감사드리며 영혼의 구원까지 받게 되었다.
사순절을 지내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얼마나 감사하며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행여 지나간 삶의 여정에서 감사하지 않고 지나친 것이 없는지 돌아보면서 잊었던 것까지 소급해서 감사드리자. 크고 작은 모든 은혜에 감사하며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하자.
사순절 제 18일
자기의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태복음 6:16-18)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위선적인 신앙인이 되지 말자
금식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죄를 회개하며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어주실 것을 믿는 믿음에서 나오는 신앙적 행위이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월요일과 목요일에 정기적으로 금식하였다. 그러나 이
들은 본래의 의미보다는 자신이 금식하고 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거나 슬픈 표정을 짓곤 하였다. 예수님은 이러한 위선적 행동을 책망하시며, 이들은 금식하는 수고에 대한 상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미 받았다고 말씀하신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행위가 아니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행할 때 하나님께서 갚아주신다는 것이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줄 때에도 예수님은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3-4)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작은 선행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유혹을 받는다.
오늘날 우리는 신앙의 선조들에 비해 너무나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바리새인의 위선적 행동을 책망할 자격도 없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위선적인 신앙인이 되지 않도록, 나아가 잘못된 경건주의에 흐르지 않도록 자신을 살펴야 하겠다. 하나님께 신실하고, 세상 사람들에 대해 진실한 생활태도를 지닐 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세상 사람들을 복음의 빛 가운데로 인도할 수 있다.
사순절 제 19일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믿음 (로마서 10:13-17)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16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의 성장을 원하는가
마틴 루터는 성경을 공부하는 방법을 사과 따는 것에 비유하여 말한 적이 있다. 사과를 딸 때 처음에는 사과나무를 흔들어서 잘 익은 사과들이 떨어지게 한다. 다음엔 큰 가지를 흔들고, 작은 가지들을 하나씩 흔들어 사과가 떨어지게 하고 마지막으로 잎사귀를 살피며 떨어지지 않은 사과를 따낸다. 이런 사과 따기 방법을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성경을 읽으라고 가르친다.
‘나무를 흔드는 것처럼 먼저 전체로서의 성경에 나타난 뜻을 찾으라. 이 때 성경을 읽되 다른 책을 읽는 것처럼 줄줄 읽어 나가면서 떨어지는 열매를 주우라. 그 다음 큰 가지를 흔드는 것처럼 성경 66권을 한 권씩 공부하라. 그리고 나서 작은 가지에 달린 사과를 따듯이 성경을 한 장 한 장 읽어 가면서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보화를 찾고, 잎사귀 하나하나를 걷으면서 사과를 찾듯이 단어 하나하나의 뜻을 음미하고 한 구절 한 구절 읽어 나가면서 하늘의 보화를 따내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며 그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성장하지 않는다. 말씀을 읽고 암송하며 묵상하고 실천하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이’ 삶 속에서 주님의 능력과 은혜를 누리며 살게 된다.
사순절을 지내며 분주한 일과를 잠시 뒤로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 안에서 세상 것과 바꿀 수 없는 보화를 발견하는 은혜, 믿음이 성장하는 은혜를 체험해보자.
사순절 제 20일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열왕기상 17:1-7)
1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2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3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4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5 그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6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냇물을 마셨으나 7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나의 그릿 시냇가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영적 암흑기였던 아합왕 시대에 활약한 선지자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징표로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한 후,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어 있으면서 까마귀가 물어다주는 음식을 먹고 시냇물을 마시며 지냈다.
하나님은 종종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그릿 시냇가에 숨으라고 말씀하실 때 그 음성을 듣고 그릿 시냇가로 가서 기도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다. 세상의 일들이 너무 바빠 홀로 기도할 시간을 갖지 못하고, 세상의 소리가 너무 커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병들어 있는 것이다. 빌 하이벨스목사님은 ‘너무 바빠서 기도합니다’라는 책을 통해 기도 없이 바쁘게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각성시킨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에서 주어지는 많은 일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감당하기 위해서 그릿 시냇가가 있어야 한다. 나무가 깊은 땅속에 오래 묻혀 있는 동안 새까만 석탄으로 변해 열을 내는 연료가 되듯이 우리가 깊은 곳에 숨어 하나님의 음성과 능력을 받아들일 때 영적인 능력을 얻을 수 있다.
사도 요한은 유배지인 밧모섬에서, 사도 바울은 아라비아 광야와 감옥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영적 능력으로 채움 받았고, 존 웨슬리목사님은 매일 아침 4시에 일어나 3시간 씩 기도하며 자신의 그릿 시냇가를 만들었다. 나의 그릿 시냇가는 어디인가?
사순절 제 21일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시편 37:3-11)
3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 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라 5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6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9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10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11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가 받는 복
시편기자는 우리의 길을 여호와께 맡길 때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라고 가르친다. 주님께 우리의 길을 위탁하는 것은 우리의 재능을 완전하게 사용하는 첫 번째 길이다. 우리가 만일 우리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맡긴다면 우리 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생수의 강 같이 흘러 넘치게 될 것이다.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조지 뮐러목사님은 영국 브리스톨에 고아원을 세우고, 1898년 93세의 일기로 소천하기까지 약 15만 명의 고아들을 기도로 양육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심을 보여주었다.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며 고아원 사역을 할 수 있도록 간구하던 중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 81:10)는 말씀에 힘입어 이 일을 시작하였다.
뮐러목사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며 믿음으로 기도하여 일생에 5만 번 이상의 기도
의 응답을 받았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자신을 의뢰하는 자들을 기꺼이, 넉넉히 도우시는 분이심을 고아원 사역을 통해 증거하였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생명줄'을 놓치는 것이라고 하며 고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매일 기도하였다.
우리의 말의 재능이나 지적인 능력, 가진 물질이 타인에 비해 보잘 것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이라도 하나님께 맡기기를 원하실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의 의를 빛 같이, 우리의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며, 자신을 의뢰하는 자가 받는 은혜를 우리를 통해 드러내실 것이다.
사순절 제 22일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오랠 때 (민수기 9:15-22)
15 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이 성막 곧 증거의 성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 위에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이르렀으되 16 항상 그러하여 낮에는 구름이 그것을 덮었고 밤이면 불 모양이 있었는데 17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행진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 18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쳤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들이 진영에 머물렀고 19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오랠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행진하지 아니하였으며 20 혹시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적을 때에도 그들이 다만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영에 머물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으며 ... 22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진영에 머물고 행진하지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행진하였으니
기다리게 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을 갈 때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며 낮이나 밤이나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않으셨다(출13:22).
애굽에서 나온 둘째 해 첫째 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성막을 완성하여 세웠을 때 성막 위에 구름이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였다. 하나님은 광야 길을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동하지 말고, 구름이 떠오를 때에는 이동하라고 명령하셨다.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는 날이 오랠 때 이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신앙의 연단을 받았다. 뜨거운 대낮의 태양열과 저녁의 추위, 광야의 척박함 등 끊임없이 괴롭히는 환경 속에서 언제 떠나야하는지 모른 채 머물러 있는 것은 광야를 이동해 가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지겨운 일이었을 것이다. 날마다 성막을 바라보며 성막 위에 머무른 구름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을 상상해보자. 답답하고 힘들어도 그들은 구름이 움직일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고, 이것을 통해 그들의 순종하는 신앙이 훈련되었다.
다윗은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시40:1)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기다리게 하신다. 견딜 수 없는 힘들고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나 응답이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을 앞서 가지 말자. 우리가 기다리고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완전한 시간에 우리를 진행하게 하실 것이다.
사순절 제 23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로마서 7:19-25)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않는 그것을 행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옛 사람과 새 사람의 갈등
우리는 마땅히 서 있어야 할 곳에 서 있지 못하는 갈등 속에 살고 있다. 되고 싶은 나와 되고 싶지 않은 나 사이의 갈등이 그것이다. 사도 바울은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행한다. 내 속에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 싸우고, 내 속에 있는 죄의 법이 나를 사로잡는다.’라고 고백한다. 서로 다른 자신이 자신 안에서 싸우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하며 애통해 한다.
이것은 비단 사도 바울의 고백일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실존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우리의 갈망이 죄의 길을 따르기 좋아하는 육신의 요구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질 때 우리의 신앙적 자아는 낙심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영적인 존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육신으로 사는 이 세상에서는 죄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간의 연약함과 죄성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과 육신의 죄의 법이 갈등하는 이 경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 계시다는 것이 우리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준다. 나와 나 사이에, 나와 하나님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실존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위하여, 내 편에 서 계신다. 나의 실존의 경계에 나를 위하여 서 계시며 나의 옛 사람과 새 사람이 갈등하며 싸울 때 새 사람이 이기도록 도우신다.
사순절 제 24일
말씀의 능력 (시편 19:7-14)
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10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11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12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3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14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유익
시편 19편은 하나님의 말씀의 유익을 1. 우리의 영혼을 치유하여 건강하게 하며 2. 우리를 지혜롭게 하며 3.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하며 4. 우리의 영혼을 밝게 하여 바르게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세상 사람들은 건강과 지혜, 재능과 즐거움을 구하며, 이것을 얻기 위해 부단히 애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성경말씀 속에서 얻을 수 있다. 나아가 영혼에 내재한 깊은 허물을 깨닫게 하고 그것을 내어버리게 함으로서 영혼을 건강하게 해주며, 세상을 육신의 눈으로만 보지 않고 영의 눈으로 보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깨닫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말씀을 읽는 사람들 속에서 성령이 일하셔서 하늘나라의 지혜와 능력을 채워주고, 하나님의 신비를 가르쳐준다. 사도 요한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책은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저 한 권의 책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가까이 하여 읽고 듣고 지키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복을 받게 한다. 누구든지 말씀이 주는 유익을 체험한 사람은 시편기자처럼 ‘내 입의 모든 말과 생각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것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된다. 말씀을 가까이하여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시려고 예비한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자.
사순절 제 25일
선한 목자 (요한복음 10:10-15)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두 가지 생명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생명이 있다. 육신적인 생명과 영적인 생명이 그것이다. 이 세상의 권세를 잡은 사탄은 도둑과 같이 부단히 영적 생명을 빼앗아 육신적인 생명으로 살게 하고, 멸망의 길로 가게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병약한 생명과 풍성한 활력을 가진 생명의 차이는 쉽게 알 수 있고, 자신의 육신이 건강한지 아닌지도 바로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영적인 생명이 건강한지 아닌지 쉽게 인식하지 못하거나 영적인 건강상태에 대해 무관심한 경우가 있다.
아이가 건강하게 잘 자라면 부모님의 마음이 기쁜 것처럼 우리의 영적 생명이 건강하게 자라가는 것은 하나님께 큰 기쁨이 될 것이다. 우리는 육신의 건강을 위해 매일 먹고 마시며 온갖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만 영적인 건강을 위해서는 그만큼 애쓰고 노력하지 않는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고백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너희는 영적이 아니고 육신적이다. 딱딱한 음식은 소화시키지 못하는 어린 아이처럼 복음의 깊은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책망한다. 바울의 책망이 바로 우리에게 하는 책망인 것을 깨닫고, 매일의 삶 속에서 기도하고 말씀을 가까이하면서 예수님과의 교제를 일과로 삼아보자. 양들의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풍성한 은혜와 생명을 넘치도록 부어주실 것이다. 풍성한 영적 생명을 누릴 때 우리의 육신적 생명도 더욱 건강하고 풍성해진다.
사순절 제 26일
달란트비유 (마태복음 25:14-30)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 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재능과 헌신
어떤 주인이 종들에게 각각의 재능대로 금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기고 타국에 갔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각각 그것을 가지고 장사를 하여 주인에게 받은 것만큼의 이익을 남겼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땅을 파고 그것을 감추어 두었다가 주인이 돌아왔을 때 그것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많이 받았다고 기뻐하기 보다는 받은 만큼 많은 것을 남겨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아마 적게 받은 것을 불평하며 그냥 묻어두었을지도 모른다. 오랜 후에 돌아온 주인은 다섯 달란트 남긴 종이나 두 달란트 남긴 종이나 똑같이 칭찬하였고, 한 달란트를 받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종을 악하고 게으르다고 책망하며 있는 것마저도 빼앗았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각각의 재능에 따라 맡길 만큼의 사명을 주셨다. 언젠가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우리들을 심판하실 때 예수님의 기준은 많이 남기고 적게 남기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 받은 만큼의 역할에 충실했는가가 될 것이다. 우리들에게 주신 재능, 사명이 큰 사람도 있고 적은 사람도 있다. 주어진 것을 최선을 다해 감당할 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칭찬받는 사람,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급이 있는 사람이 된다.
내게 주신 달란트(재능)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내게 주신 그 재능을 통해 내가 어떤 일을 할 것을 원하시는가?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주님께서 내게 주신 달란트, 내게 주신 과제를 소홀히 여기지 말고 잘 감당하여 칭찬받는 자녀가 되자.
사순절 제 27일
포도나무와 가지 (요한복음 15:1-5)
1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리스도인의 열매
세상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인생길에서 무엇인가를 성취하고, 무엇인가를 남기고자 한다. 성취와 소유를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은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인생들이 영적인 생명을 얻고, 그것을 더 풍성히 하기 위해서는 포도나무의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는 것같이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 우리가 머물러 있어야 함을 가르쳐주신다. 예수님의 생명력 있는 말씀이 가지인 우리의 영혼 속으로 흘러들어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포도나무 가지는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다. 열매를 많이 맺는 가지는 그리스도와의 생명력 있는 살아있는 관계를 통하여 많은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들을 뜻한다. 그리스도인이 맺는 열매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이 삶의 여정에서 이루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영혼을 구원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작게는 기도의 응답, 영혼의 평안, 일상에서 누리는 기쁨, 주님의 마음으로 주변에 베푸는 사랑 등일 것이다. 나아가 전 생애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그분의 정신을 실천하며, 그분을 드러내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맺어야 하는 열매이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예배하는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물러 있어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예수님께, 예수님의 말씀에 우리를 묶어 놓자.
사순절 제 28일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 13:3-8,13)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나아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정신적 사랑과 영적 사랑
사도 바울은 ‘내가 내 모든 재산을 나누어주고 (어떤 귀한 목적을 위하여)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내게 사랑(곧 그리스도의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나아가 믿음과 소망, 사랑은 항상 있어야 하는데 그 중에 제일인 것은 사랑이라고 강조한다.
믿음의 사람들은 정신적 사랑과 영적 사랑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정신적 사랑도 매우 귀하고 사람과의 관계 안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엄격히 말하자면 이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일 수 있다. 때로 그 사랑을 통하여 자신이 드러나기를 원하거나 자신에게 어떤 대가가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영적인 사랑은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단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분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나와 다른 사람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서 계시는 영적 사랑은 다른 사람을 나의 사랑으로 규정하거나, 강요하거나, 지배하려는 모든 시도로부터 다른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사랑을 의미한다. 각 사람은 자유인으로서,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받기를 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인간이 되셨고, 자신을 희생하셨고, 그를 위해 죄를 용서해주셨고, 그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음을 기억하자.
불완전하고 허물투성이인 우리를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있는 모습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해주셨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정신적 사랑에 더하여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본받아 영적인 사랑을 실천하자.
사순절 제 38일
고난 받는 종 (이사야 53:1-6)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을 갔거늘 여호와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도다
낮아지신 그리스도
선지자 이사야는 BC 700년 경 고난의 종으로 오실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예언하였다.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타락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형상을 드러내셨다. 영광의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죄와 죽음의 세상 한복판으로 자신을 던진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의 육신적 곤고함을 짊어진 모습으로,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고난과 죽음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가난하게 태어나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며 약자 편에 서는 낮아지신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하나님과 본질상 같은 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모습으로 낮아진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한다. 가장 높은 자리에서 가장 낮은 자리로 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직접 아들의 모습으로, 낮아진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다.
하나님의 형상을 그분의 기적과 능력, 영광에서만 찾는 사람은 이렇게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삶의 자리에 주님이 계시며 그 삶의 무게와 곤고함을 함께 해주시는 것을 기억하자. 임마누엘!
사순절 제 39일
양과 염소의 비유 (마 25:31-46)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 4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니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이웃
오늘 성경본문은 종말 비유의 결론에 해당한다. 양과 염소의 비유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 신실한 그리스도인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구분하여 각각 영생과 영벌에 들어가도록 심판하실 것인지 알려주신다. 누가 하나님 아버지께 복을 받아 창세부터 예비한 나라를 상속받을 것인가? 바로 서로 사랑하며 돌보는 성도들-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도움과 배려를 베푸는-이며 이들이 재림을 가장 잘 준비하는 것이다. 선행을 통해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을 믿음을 지닌 이들에게는 반드시 선한 행실이 뒤따른다.
마지막 심판 때에 예수님께서 자신을 굶주린 사람, 나그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과 동일시한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스도가 오늘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지 알게 된다. 우리들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마치 예수님을 대하는 것처럼 대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라고 소홀히 대하고 무시하는 것은 가난한 형제자매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사랑을 실천하라고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예수님을 거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오늘 나의 생활 가운데 예수님은 어떤 사람의 모습으로 내게 다가오셔서 관심과 사랑을 베풀기를 원하시는지 살펴보자. 나의 눈과 마음이 행여 세상적인 기준으로 형제자매를 판단하고 행동하지는 않는지 주의하자. 나의 행함이 위선자나 불신자들과는 어떻게 다른지 자신을 살펴보자.
사순절 제 40일
마지막 유월절 식사 (마 26:17-30)
17 무교절의 첫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8 이르시되 성 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19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 20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 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21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2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 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말함과 행함의 일치
유월절은 출애굽기 12장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것을 기념하며 지키는 절기이다. 유월절을 지키며 1주일간 유월절 음식과 함께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는 것이 무교절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대문 기둥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자의 죽음을 피했고, 양의 피를 바르지 않았던 애굽의 장자들은 모두 죽었다.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친히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으실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셨다. 그 옛날 애굽에서 잡았던 어린 양의 피는 죽음을 미루는 일시적인 효과를 가져왔으나 예수님의 피는 그분을 믿고 따르는 이들의 삶 속에 영원한 효과, 영생을 보장해주신다.
3년간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그분을 따르던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로 이미 마음에 작정하였으면서도 마음을 감추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았다. 사람들은 유다의 배신에 분노하고 비난한다. 그러나 주님께 헌신을 고백하는 우리들도 그것이 자신의 삶의 방식과 충돌할 때 쉽게 주님을 배신한다.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주님의 사랑을 배신하기도 하고, 불신으로 주님의 진리를 부인할 때도 있다. 때로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부인한다. 가룟 유다의 배신에 분노하는 나는 과연 하나님 앞에서 말함과 행함에 있어 일치하는가?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기 전에 나의 생각과 마음을 변화시켜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써 나의 말함과 행함이 일치하여 주님의 사랑을 부인하지 않고 주님의 은혜를 무가치하게 만들지 않는 삶이 되도록 오늘도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