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수아 1:1-6)
1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3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4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5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6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여호수아서의 기록 목적
여호수아서의 대부분은 여호수아 생전에 기록되었으나 세부적인 내용이 첨가되고 최종 완성된 것은 사사시대 초기(BC 1370-1330)이다. 사사시대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완전히 정복하는데 실패한 것은 물론 신앙이 계속 해이해진 결과 사회는 부패하고 이민족의 압박으로 괴로움을 겪으며, 서로 분열하여 하나님의 언약백성,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영광이 실추된 때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아래 최종적으로 완성된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땅을 차지하게 된 것이 그들의 군사력이나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니라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며 그 분의 뜻에 따라 살 것을 권고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여호수아의 시대를 살고 있다. 종살이 하던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소망,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가야 하는 도상에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져야 할 가장 강력한 무기는 거룩함과 순종이다. 개인적인 거룩함과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무장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함과 순종의 무기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흘러가게 할 수 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 하는 과제를 맡게 된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자.
8월 2일
하나님의 명령 (여호수아 1:7-9)
7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죄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9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
여호수아는 모세가 죽은 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물려받았다. 돌아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정복해서 자신들의 삶의 터전으로 삼아야 할 땅이 그의 앞에 놓여있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서있었던 강력한 지도자 모세의 시종으로 40년간 모세를 따르면서 그로부터 배웠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하신 위대한 일들을 전부 목격하였다. 모세가 40년간 애굽의 궁전에서, 40년간 광야에서 훈련을 받았다면 여호수아는 출애굽 후 40년간의 광야생활 동안 모세 밑에서 훈련 받은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고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생활, 교회생활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고 모난 것, 더러운 것, 악한 것을 고치게 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행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 의해 준비된 사람일지라도 눈앞에 놓인 험한 현실을 바라볼 때, 새로운 사명을 감당해야 할 때,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할 때 두려움이 생긴다. 이러한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은 두려움을 없애주시기 위해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것처럼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시며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확인시켜주신다. 우리 앞에 어려운 과제나 감당하기 힘든 문제가 있어 두려움이 생긴다면 강하고 담대하라고 명령하시며 어디를 가든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두려움을 이기고 앞으로 나아가자.
8월 3일
정탐꾼과 기생 라합 (여호수아 2:15-21)
15 라합이 그들을 창문에서 줄로 달아내리니 그의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주하였음이라 16 라합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렵건대 뒤쫓는 사람들이 너희와 마주칠까 하노니 너희는 산으로 가서 거기서 사흘 동안 숨어 있다가 뒤쫓는 자들이 돌아간 후에 너희의 길을 갈지니라 17 그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이 맹세에 대하여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리니 18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손을 대면 그의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 21 라합이 이르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에 매니라
이방 여인 라합의 믿음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나안 땅을 점령해 자신들이 살아갈 땅으로 만들어야하는 지도자로 세움 받았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영적인 전쟁의 의미로 받아들여지는데, 하나님은 우리가 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 영혼들에게 말씀의 능력으로 들어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나가는 영적인 지도자로 일하기를 원하신다.
요단강을 건너기 전 여호수아는 먼저 정탐꾼 2명을 보냈다. 이들은 기생 라합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목숨을 보전하였고, 무사히 정탐을 마치고 돌아올 수 있었다. 생명을 구해 준 보답으로 이들이 여리고성을 공격할 때 라합의 가족이 창문에 붉은 줄을 매달고, 집안에 모여 있으면 살려주기로 약속하였다. 애굽에서 모든 장자들이 죽음을 당할 때 어린 양을 잡아 그 붉은 피를 문에 바른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죽음을 피했던 사건, 나아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기억하게 한다.
이전에 모세가 보냈던 12명의 정탐꾼 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은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사람의 눈으로 판단하다가 실패하여 광야에서 죽었고, 다른 이들을 고통의 길로 이끌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보낸 두 명의 정탐꾼은 같은 가나안땅을 정탐하였으나 그들이 만난 기생 라합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 (2:9)’라는 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방인이었으나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던 라합은 믿음으로 일가친척들을 살렸을 뿐 아니라 다윗의, 조상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8월 4일
요단을 건너는 하나님의 백성 1 (여호수아 3:1-6)
1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건너가기 전에 거기서 유숙하니라 3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4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 5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6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나아가니라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
가나안 정복에 앞서 정탐꾼들의 보고를 받은 여호수아는 백성들과 함께 싯딤을 떠나 약 12km 떨어진 요단강 앞에 이르렀다. 그는 이곳에서 3일을 머무르며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하였다.
어떤 일을 앞두고 묵상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우리는 때로 성급하게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따라 하나님보다 먼저 나섰다가 실패와 좌절을 경험한다. 중요하고 바쁠 때일수록 오히려 기도하며 잠잠히 기다리는 중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자 하는 여호수아의 자세는 우리가 새겨야 할 신앙의 모범이다.
3일을 머무른 후 여호수아는 제사장들로 하여금 언약궤를 메고 맨 앞에서 행진하고 백성들은 이천 규빗 정도 뒤에서 따라가라고 지시하였다. 이천 규빗은 약 900미터이다. 언약궤에는 십계명을 새긴 돌판이 들어 있어 하나님의 말씀,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앞서 가고, 백성들이 따르는 것은 곧 앞장서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와 순종으로 따르는 자세를 의미한다. 여호수아는 언약궤와 백성 사이에 간격을 두어 행진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주권과 영역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백성의 자세를 가르쳐준다.
매일 매일 새로운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도 우리의 새 날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영역을 인정하며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로 나아가야 하겠다.
8월 5일
요단을 건너는 하나님의 백성 2 (여호수아 3:14-17)
14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15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16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17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
순종을 통해 체험하는 기적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려고 하던 때는 밀과 보리를 거두는 시기였다. 한국으로 치면 3,4월에 해당되는데, 이 시기에는 강수량이 가장 많고 헬몬산의 눈이 녹아 내려 때로 강폭이 1km이상으로 불어나며 수심도 3-4m 정도로 깊어진다.
하나님은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에게 요단강에 이르면 강물로 들어가라고 지시하면서,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강 물을 밟고 서면 물이 멈출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앞으로 싸울 족속들을 쫓아내실 것이라는 증거라고 말씀하셨다. 언약궤를 멘 채 빠르게 흘러가는 요단강물에 발을 넣고 나가야 하는 제사장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의지를 죽이고 말씀에 순종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 사해를 향해 흘러가던 물이 끊어졌고, 요단강의 바닥은 말라 굳어졌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이 된 요단강을 건너갔다.
모세가 지팡이를 들었을 때 홍해가 갈라지고 제사장들이 흐르는 요단강에 발을 디뎠을 때 물이 멈추기 시작했던 것은 모세의 지팡이나 제사장의 발에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믿음으로 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믿음을 보시고 은혜를 베푸신 것이었다.
요단강이 마른 땅이 된 것처럼,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마른 땅이 된 요단강을 건너갈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요단강도 우리 자신의 의지를 꺾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건너갈 수 있는 것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 변화시켜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8월 6일
요단 가운데서 가져온 열두 돌 (여호수아 4:4-9)
4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준비한 그 열두 사람을 불러 5 그들에게 이르되 요단 가운데로 들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궤 앞으로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 수대로 각기 돌 한 개씩 가져다가 어깨에 메라 6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물어 이르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7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원히 기념이 되리라 하라 하니라 ... 이스라엘 자손들이 지파의 수를 따라 요단 가운데에서 돌 열둘을 택하여 자기들이 유숙할 곳으로 가져다가 거기에 두었더라 9 여호수아가 또 요단 가운데 곧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돌 열둘을 세웠더니 오늘까지 거기에 있더라
나의 요단 가운데서 가져온 돌
여호수아 3장12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12명을 뽑으라고 말씀하셨고, 백성들이 요단을 건넌 후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뽑으라고 거듭 말씀하셨다. 이들로 하여금 건너왔던 요단에 다시 들어가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서있는 곳에서 한 사람이 돌 하나씩 전부 12개를 들고 나와 그날 밤 그들이 묵을 곳에 두라고 명령하였다.
여호수아도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이 서있는 곳에 돌 12개를 세웠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고 첫 번째 관문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대대로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한 표현이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모든 일을 마치고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건너오기를 마치자 요단 물이 다시 전처럼 흘러 넘쳤다. 백성들은 길갈에 이르러서 진을 치고 요단에서 가져온 돌들에 길갈에 세웠다. 이것은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4장24절의 말씀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요단을 건넌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의 삶 속에도 추억해보면 각자에게 요단 가운데가 있었을 것이다. 불가능과 절망의 자리였지만 하나님의 놀라우신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있었던 곳,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곳, 그곳에서 들고 나온 돌들을 기억하자. 그 기억을 새롭게 함으로 오늘 우리 앞에 놓인 무거운 과제도 능히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이다.
8월 7일
여호와의 군대 대장 (여호수아 5:10-15)
10 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11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을 먹되 그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12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13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14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15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요단강은 이스라엘 백성이 오랜 광야생활을 청산하고 드디어 약속의 땅, 가나안의 경계 안으로 들어가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인도하심에 의해 백성들과 함께 요단강을 건넌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에 가까이 왔을 때,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을 만났다.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말하기를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라고 묻자 여호와의 군대 대장은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고 대답하였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불붙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신 것과 같은 말씀을 여호수아에게도 하셨다.
첫 전투를 벌여야 할 여리고성에 가까이 왔을 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군대 대장을 보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전쟁에서 직접 싸워주실 것임을 보여주심으로서 이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확신시켜 주셨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고 우리를 인도해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 없는 우리는 그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고 때로 겁내고 낙심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곳은 거룩한 땅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자리가 거룩한 땅이고,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그곳은 거룩한 곳이다. 오늘도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현장이 모두 거룩한 땅이 됨을 기억하며 담대한 믿음으로 하루를 살아가자.
8월 8일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이상한 방법 1 (여호수아 6;2-7)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3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4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5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6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가라 하고 7 또 백성에게 이르되 나아가서 그 성을 돌되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갈지니라 한지라
순종하는 자에게
앗시시의 성자 프랜시스(St.Francis of Assisi)에게 어느 날 제자가 되기를 자원하는 두 사람이 찾아왔다. ‘선생님의 제자가 되어 신앙훈련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프랜시스는 ‘저 밭에 나가면 배추가 많이 있는데 그 배추를 가져다가 뿌리를 하늘로 향하게 심으십시오.’라고 지시하였다. 한 사람은 말없이 들로 나간 반면 다른 한 사람은 ‘이 사람이 여기서 오랫동안 수도생활을 하더니 정신이 이상해졌군.’하면서 그냥 가버렸다. 프랜시스가 제자가 되고자 찾아온 이들에게서 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정복을 위한 첫 번째 전쟁을 앞두고 있을 때 여호수아에게 여리고 성벽을 무너뜨릴 방법에 대해 알려주셨다. 언약궤를 중심으로 나팔을 잡은 일곱 제사장들이 서고 그 앞뒤에 무장한 군인들이 대열을 갖추어 6일 동안 매일 한 바퀴씩 성을 돌고 일곱 째 날에는 성을 일곱 바퀴 돌고 큰 함성을 외치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지시에 순종하였고, 하나님은 여리고 성벽을 무너뜨리셨다.
하나님이 전쟁의 승패를 주관하신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은 눈앞에서 직접 체험하였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방법은 인간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방법이었으나 이스라엘 백성이 인간적인 생각과 방법, 힘을 다 내려놓고 전적으로 순종했을 때 여리고 성벽을 무너뜨리시는 하나님의 이적을 체험하였다. 하나님은 오늘도 자신을 비우고 성령으로 채우며,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의 주관자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8월 9일
무너져 내린 여리고 성벽 (여호수아 7:10-20)
10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11 여호와의 궤가 그 성을 한 번 돌게 하고 그들이 진영으로 들어와서 진영에서 자니라 ... 15 일곱째 날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 성을 일곱 번 도니 그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날뿐이었더라 16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17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 이는 우리가 보낸 사자들을 그가 숨겨 주었음이니라 ... 20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나의 여리고 성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따라 엿새 동안 여리고 성을 한 번씩 돌고 일곱 째 날 일찍이 일어나 성을 일곱 바퀴 돌며 나팔을 불고 함성을 지르자 여리고성이 무너져 내렸다.
여리고 성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신 것은 인내였다. 하나님의 일은 인내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성령의 열매에도 인내가 포함되어 있는데, 실제 우리의 삶에서 인내하기란 쉽지 않다. 인내하지 못하고 매사에 성급하게 행하다가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뜻을 놓치고 실패한다.
여리고 성벽은 매일 매일 조금씩 무너져갔던 것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무너질 흔적이 보였던 것도 아니다. 6일 동안, 그리고 마지막 7일에, 마지막 일곱 바퀴 째 성을 도는 이스라엘 백성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들에게 7일은 이상한 방법을 명령하신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고 침묵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내적인 훈련의 시간, 자기 자신과의 싸움의 시간이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우리 앞을 가로막는 수많은 여리고 성이 있다. 그때마다 그것을 무너뜨려 주실 하나님께 먼저 시선을 집중시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인내하며 기다리자. 우리 각자의 여리고성을 통해서 내적 훈련의 시간을 갖게 하시며, 마침내 믿음의 성장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끝까지 믿음으로 순종해서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자.
8월 10일
아이 성에서의 패배 (여호수아 7:1-7)
1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2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쪽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3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하므로 4 백성 중 삼천 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5 ...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된지라 6 여호수아가 옷을 찟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7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불의한 욕심과 방심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에서의 첫 번째 전투에서 하나님의 지시를 온전히 따름으로써 하나님이 이끄시는 승리를 얻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아이 성 전투에서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하였는데, 그 원인은 여리고 성 정복 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아간의 범죄 때문이었다. 아간은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 하나님께 드려진 물건에 욕심이 생겨 불의하게 취하였고, 그 결과 공동체 전체가 아간의 죄책을 함께 나누어져야만 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이 성 전투에서 패배한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여호수아를 비롯한 백성들의 방심과 경솔함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하면서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물었어야 했으나 첫 번째 승리에 도취하여 방심한 나머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과 판단, 방법에 의지하여 성급하게 나아갔다가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다.
불의한 욕심으로 공동체를 위태한 상황으로 몰아넣은 아간의 범죄가 밝혀지고, 그에 대한 처벌로 죄가 해결된 후, 그리고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기도한 후 하나님은 다시금 이들의 전투를 이끌어 승리를 얻게 하셨다.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인간의 생각과 능력에만 의지하여 어떤 일을 행한다면 아무리 선한 목적이라 할지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일에 인간의 불의한 욕심이 개입되면 자신뿐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공동체도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한번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방심하지 말자. 언제나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믿음의 자세를 잃지 말자.
8월 11일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여호수아 8:30-35)
30 그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았으니 31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한 것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제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그 위에 드렸으며 32 여호수아가 거기서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그 돌에 기록하매 33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관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전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령한 대로 함이라 34 그 후에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35 모세가 명령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자들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행하는 거류민들 앞에서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
하나님이 훈련시키시는 과정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은 여리고 성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지혜, 뜻, 방법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는 훈련을 받았다. 그 다음 아이 성을 정복하는 과정을 통하여 탐심으로 인한 불순종의 쓰라린 결과를 체험하였고, 언제나 방심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해야 함을 자각하였다.
여호수아는 에발 산에서 다듬지 않은 새 돌을 쌓아 제단을 만들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정비하였다. 인간의 기교로 다듬고 화려하게 꾸민 이방신상과 구별되는 다듬지 않은 돌 제단은 순수하고 겸손하게 예배드려야 하는 우리의 마음상태를 상징한다.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 자손들이 보는 앞에서 돌에 기록하고, 백성들을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서게 한 후 여호수아가 율법의 모든 말씀,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낭독하였다. 돌에 말씀을 새긴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 넣음으로써 약속의 땅, 그러나 이방민족이 살고 있는 이방문화권으로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며, 어떤 길이 복 받는 길인지 분명히 알게 하였다.
우리도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자신의 지혜를 앞세우지 말고 먼저 하나님 앞에 마음의 무릎을 꿇자. 하나님의 영과 지혜로 채워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루의 삶을 이끌어주실 것을 간구하자.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순종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며 하루를 살아가자.
8월 12일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여호수아 14:6-12)
6 그 때에 ...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 7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8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9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네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10 ... 오늘 내가 팔십 오세로되 11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갈렙의 믿음
갈렙은 45년 전 모세의 지시에 의해 여호수아 및 다른 10명의 정탐꾼들과 함께 가나안을 정탐하였다. 다른 열 명의 정탐꾼은 그들의 눈에 보이는 대로, 세상적인 판단으로 부정적인 보고를 하여 백성들을 낙심케 하였지만 갈렙은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민14:9)고 믿음으로 선포하였고, 모세로부터 그가 밟는 땅이 기업이 되리라는 축복의 약속을 받았다(민13:22).
갈렙은 모세의 계승자인 여호수아에게 모세의 약속을 이행하도록 요청하였다. 땅을 유업으로 받았다는 것은 그 땅을 거저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통해 그 땅을 정복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갈렙은 단순히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거나 45년 전의 자신의 공로를 인정받기 위해 기업을 요청한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갈렙이 요청한 헤브론 산지는 체격이 거대한 아낙자손들이 살고 있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맞서 싸우기를 두려워했던 곳이었다. 갈렙은 아직 정복되지 않은 땅을 한시라도 빨리 정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고자 하는 믿음이 있었기에 8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험한 산지를 자신에게 달라고 요청하며, 그 땅을 정복하기 위해 싸우러 나가고자 하였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다면 감당치 못할 것이 없다는 믿음으로 일생을 살았던 갈렙의 신앙과 용기, 겸손함은 오늘 우리에게도 귀중한 신앙의 모범이 된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8월 13일
여호수아의 고별 설교 (여호수아 23:1-6)
1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들로부터 이스라엘을 쉬게 하신 지 오랜 후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은지라 2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 ...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나이가 많아 늙었도다 3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다 보았거니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이시니라 4 보라 내가 요단에서부터 해 지는 쪽 대해까지의 남아 있는 나라들과 이미 멸한 모든 나라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제비 뽑아 너희의 지파에게 기업이 되게 하였느니라 5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 앞에서 그들을 쫓아내사 너희 목전에서 그들을 떠나게 하시리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 6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자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한 후 많은 세월이 흘렀다. 여호수아는 나이 많아 늙었고, 자신의 임종이 가까웠음을 알고 고별설교를 하기 위해 백성들을 불러 모았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지난날의 모든 일들을 기억할 것과 계속해서 그 하나님을 열심히 섬길 것을 당부하였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직접 싸워주셨다는 사실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주할 땅, 기업을 마련해 주셨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현재 누리는 안식이 그들의 지혜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기억하고 겸손히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인간의 마음은 너무나 얄팍하여 조그마한 성취나 성공에도 그것이 자신의 능력이나 열심, 의로움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교만해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어떤 일을 행할 때 최선을 다해야 함은 물론 일을 성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선한 결과에 대해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지난날을 돌이켜보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 여정에 어떻게 개입하시고 이끌어주셨는지, 어렵고 지칠 때마다 어떻게 일으켜주셨는지 기억해보자. 그리고 지금까지 인도해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오늘도 이 세상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믿음으로 살아가자.
8월 14일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여호수아 24:14-18)
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16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17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올라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과 우리가 지나온 모든 백성들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18 ...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하니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날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지도자들에게 두 번에 걸쳐 간절하고 단호하게 유언과 같은 설교를 하였다.
백성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은혜와 인도하심, 주신 복을 기억하라고 당부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선택하신 것은 우리가 잘해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지금까지 이루어진 모든 일들은 실상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것이다.
지도자들에게는 이스라엘의 과거를 상기시키면서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임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것을 당부하였다.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고 하였는데, 크게 힘쓰라는 것은 ‘착 달라붙어서 단단히 결심하라’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민족의 결단을 촉구하며 ‘나와 내 집은 평생 하나님만 섬길 것인데 너희들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질문하였다. 인간의 마음은 참으로 간사해서 조금만 어려우면 주님을 안타깝게 찾으며 도움을 구하지만, 조금만 편해지면 나태해지고 신앙이 느슨해지는 것을 여호수아는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통해 우리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하신다. 여호수아의 고백과 같이 ‘오직 나와 내 집은 평생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결단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자.
8월 15일
여호수아와 엘르아살의 죽음 (여호수아 24:29-33)
29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30 그들이 그를 그의 기업의 경내 딤낫 세라에 장사하였으니 딤낫 세라는 에브라임의 산지 가아스 산 북쪽이었더라 31 이스라엘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들이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 32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33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도 죽으매 그들이 그를 그의 아들 비느하스가 에브라임에서 받은 산에 장사하였더라
허락하신 새 땅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새 땅 가나안으로 인도한 여호수아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갔다. 여호수아와 함께 민족을 이끌어간 영적 지도자 엘르아살도 육신의 삶을 마치고 에브라임 산지에 장사되었다.
여호수아서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하여 행하신 모든 일들을 아는 자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섬겼다고 기록함으로써 그 이후에는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타락했음을 암시한다. 이스라엘이 다시금 죄 가운데서 타락한 것은 가나안 정착 이후 태어난 후손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여호수아 시대 이후의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듯이 자신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을 확실히 체험하지 못하고 이성적으로만 알거나 믿는 사람의 신앙은 잘못된 길로 가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며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을 깊이 체험할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를 따라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듯이 언젠가 우리들도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친 후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새 땅,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고 마침내 하나님께 돌아간 믿음의 용사 여호수아의 삶의 여정을 기억하며 우리도 이 땅에서 여호수아와 같은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하자.
8월 16일
엘리멜렉 가족의 이주 (룻기 1:1-5)
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아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 쯤에 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나오미의 고난
룻기의 배경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 사울이 왕으로 등장하기 까지 약 350년간의 시기인 사사시대이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사사기 마지막 절의 말씀을 통해 혼란한 시기였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유다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의 가족이 흉년을 피해 모압 땅으로 이주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다’는 이름의 뜻을 가진 유대인 엘리멜렉은 두 아들과 아내를 데리고 모압 땅으로 이주하였다. 원래 베들레헴은 비옥하고 물이 풍성한 옥토였다. 이곳에 흉년이 들 정도이면 당시 흉년이 극심했을 것인데, 이 흉년은 틈만 있으면 하나님을 떠나 범죄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징계이자 경고라고 할 수 있다. 룻기는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그들을 돌이키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를 엘리멜렉 가정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엘리멜렉 가족이 비록 흉년을 피하기 위함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이방 땅 모압으로 이주한 것은 불신앙적인 행동이었다. 나오미는 고향을 떠나 이방 땅에서 과거를 잃은 삶을 살고 있었고,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현재를 잃었으며, 아들 둘이 모두 죽음으로 인해 미래를 잃은 가장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삶에 어려움이 있을 때 믿음으로 극복하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하면 어디에 가든지 참 평안을 누리지 못할 뿐 아니라 더욱 불행한 일을 겪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려운 일을 만날 때 그것을 피할 것이 아니라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매달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은혜를 구해야 하겠다.
8월 17일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룻기 1:15-18)
15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18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믿음의 사람들이 있어야 할 곳
흉년을 피해 이방 땅으로 이주하였다가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잃어버린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했다.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셔서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다르지만 이 장면에서 우리는 야곱이 하나님께 약속했던 대로 벧엘로 가지 않고 숙곳에서 오랜 기간 머무르고 있다가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는 불행한 사건 이후에야 비로소 벧엘로 향했던 것을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곳에 있어야 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해주신 축복의 자리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이키시려고 주시는 신호일 수 있다.
귀향을 결심한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였다.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들의 신에게 돌아가 그 신의 도우심을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그러나 나오미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된 룻은 비록 자신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여인이지만 어머니의 백성이 자기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 되심을 고백하며 나오미를 따르겠다고 간청하였다. 하나님은 이방 땅에서 남편과 아들들을 잃은 나오미에게 그를 극진하게 섬기며 하나님을 섬기는 며느리 룻을 선물로 주셨다. 이방 여인 룻을 선택하셔서 그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하신 하나님은 그의 믿음의 고백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문을 이루어갈 큰 은혜를 더해주시며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이어가셨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우리도 룻과 같이 있어야 할 은혜의 자리에 있는지 자신을 살펴보자.
8월 18일
나오미의 귀향 (룻기 1:19-22)
19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를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냐 하니라 22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불신앙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섭리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첫째 딸은 아들을 낳아 모압이라고 이름하였고, 그의 후손을 가르켜 모압 족속이라고 한다. 이들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박대하고 대적하여 영원히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갈 수 없도록 모세의 율법에 기록되어 있다(신23:3).
베들레헴에서 유력한 집안이었던 유대인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흉년을 피해 이스라엘이 원수처럼 여기는 모압 지방으로 이주했다가 나오미만 살아서 모압 여인을 며느리로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놀라운 화제거리가 되었다. 모압땅으로 나갈 때에 풍족하게 나갔던 나오미가 모든 것을 잃고 빈털터리로 초라하게 돌아온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에는 비교적 양식이 풍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오미는 자신을 ‘기쁨’이라는 뜻의 이름 대신에 ‘괴로움’ 또는 ‘쓴 맛’이라는 뜻의 ‘마라’로 부르라고 하였다.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라’는 나오미의 고백은 욥의 고난을 연상시킨다. 욥이나 나오미는 고난을 통해 자신들의 불신앙을 깨달았고, 고난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며 깊은 신앙으로 성장하였다.
엘리멜렉 가족의 이방 땅으로의 이주, 나오미의 시련과 귀환은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한 가정의 몰락사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볼 때 그곳에는 하나님께 대한 엘리멜렉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징계, 나오미의 회개, 이방 여인 룻의 신앙, 그리고 그 가운데에 흐르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섭리가 있음을 알게 된다.
8월 19일
룻과 보아스의 만남 (룻기 2:10-16)
10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 11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12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13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 14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하므로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15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16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
보아스의 호의
룻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거주하는 복을 누리기 위해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에 왔으나 그곳에서 빈궁한 삶을 견뎌내야만 했다.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이삭줍기와 같은 천한 일도 마다하지 않은 룻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 가운데 엘리멜렉의 친족이었던 보아스의 밭에 이르렀고, 밭을 둘러보기 위해 나온 보아스와 마주치게 되었다.
보아스는 시어머니를 정성껏 봉양하는 룻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그에게 온갖 호의를 베풀었다. 그는 궁핍한 나그네와 같은 과부 룻에게 필요한 것을 풍족하게 공급해줌으로써 율법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였다. 룻은 자신의 처지와 신분에 비해 과도하게 베풀어지는 보아스의 친절과 호의에 놀라며 그것을 겸손하게 감사함으로 받았다. 룻의 겸손한 자세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은 성도들에게 귀한 본이 된다.
룻의 입장에서 볼 때 보아스와의 만남은 우연이었지만 하나님은 룻을 통해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고자 준비하셨다. 이와 같이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우연히 발생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나는 일들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룻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것처럼 크던 작던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해 감당하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 오늘 우리도 주어지는 만남과 일들을 최선을 다해 감당함으로서 우리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는 삶을 살아가자.
8월 20일
룻과 보아스의 만남 2 (룻기 2:17-20)
17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18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어머니에게 드리매 19 시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 룻이 누구에게서 일했는지를 시어머니에게 알게 하여 이르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에 하나이니라 하니라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추수하는 밭에 보리 이삭을 주우러 나간 룻은 나오미의 가까운 친척 보아스의 밭에 가서 땅에 떨어진 이삭을 주웠다. 보아스의 밭에서 보리 이삭을 주웠다는 며느리의 말을 듣고, 또 보아스가 며느리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다는 말을 듣고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시고 계심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에는 가족관계에 특별한 법이 있었다. 한 가문의 대를 이어갈 남자가 없을 때 가장 가까운 친척이 대를 이어줄 책임이 있었다. 빚을 지거나 대대로 내려온 토지를 팔았거나 곤궁에 처했을 때에도 제일 가까운 친척이 대신 갚아주고 해결해주어야 했다. 나오미의 가정에도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친척 남자가 나오미와 결혼하여 엘리멜렉 집안의 대를 이어주어야 했는데 나오미는 이미 나이 많아 결혼을 할 수 없었고, 며느리 룻이 가까운 친척 남자와 결혼하여 낳는 첫 번째 아들을 엘리멜렉 집안의 아들로 삼아야 했다.
보아스는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기생 라합이 살몬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다. 여리고 성이 무너진 후 라합의 가족들은 아마도 이스라엘 마을에 들어와 살았을 것인데 이방인 기생이 낳은 아들인 보아스의 성장과정은 순탄치 못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문의 유력한 사람으로 성공한 보아스는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나오미와 룻에게 겸손한 태도로 은혜를 베풀었다. 보아스의 고결한 성품과 룻의 신실하고 근면한 태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에 충분하였고, 여호와께 복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이러한 성품을 가진 자녀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8월 21일
룻과 보아스의 결혼 (룻기 4:13-22)
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15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16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18 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19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20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룻과 보아스는 마침내 결혼하여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고 다윗의 가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났다.
룻기 저자는 룻기를 끝내며 특별히 베레스로부터 시작하는 계보를 언급하고 있다. 베레스는 유다와 그 며느리 다말의 사이에서 비정상적인 관계로 태어난 아들이었다. 보아스는 이방인 기생여인의 아들이었다. 보아스의 아내가 된 룻은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의 회중에 영원히 참석할 수 없도록 규정된 모압민족 출신이었다. 다말과 라합, 룻의 인간적인 부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오른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이 여인들의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룻기에 나오는 인물들 속에서 각각 중요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선택받은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백성들을 의미하는데 이들은 언젠가 귀향한 나오미처럼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다. 룻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 신앙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구원받은 이방인 성도들을 의미한다. 오르바는 복음을 들었으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될 구원의 기회를 놓치고 자기들의 우상으로 돌아간 아랍민족 내지는 구원받지 못한 모든 이방인들을 대표하고, 보아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마치 한 편의 드라마 같은 룻기는 4장으로 구성된 짧은 성경이지만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계획이 내포되어 있다.
8월 22일
산 소망 (베드로전서 1:3-9)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6 그러므로 이제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우리의 소망
베드로가 이 서신을 기록할 당시는 A.D. 64년 로마에서 시작된 네로의 기독교 박해가 로마제국 전체로 확산되어 갈 상황에 처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도 산발적이고 개인적이긴 하나 상당한 박해를 받고 있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겪고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권면하고자 사도 베드로는 고난 중의 인내를 주제로 서신을 기록하였다. 사복음서의 기록만으로 보면 베드로를 인내의 귀감으로 여기기 쉽지 않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그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하였다.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 나그네와 같이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이 땅에서는 고난을 받을지라도 그들의 구원을 확신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고난 받고 있는 자신의 백성들을 주목하고 계심을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세상에서 고난을 겪는 중에도 인내로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사도 베드로의 가르침과 같이 하늘에 산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차 하늘에서 칭찬과 영광과 존귀와 함께 영원한 기업을 얻을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고난과 시련을 영적 성장의 기회로 삼을 수 있었고, 이 세상에서는 외인처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확실하게 자각할 수 있었다.
우리는 어떤 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만일 우리가 작은 어려움에도 쉽게 낙심하고 넘어진다면 과연 하나님의 자녀로 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지 자신의 영혼을 점검해보자.
8월 23일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베드로전서 1:13-19)
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거룩하고 성결한 나그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에 힘입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의 망령된 행실에서 구원받았으므로 어떠한 형편에서도 다시 과거로 돌아가지 말고 장차 가게 될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로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살아갈 것을 권면한다.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에 우리는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았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인줄 알고 세상적인 것을 위해 살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받은 이후의 삶은 모든 행실에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죄인된 인간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그 행위대로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때로 고난을 당한다. 그러나 고난에 굴복하여 세상과 타협하고 죄악된 엣 생활로 돌아가지 말고,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거룩한 삶으로 천국 소망을 향해 나가는 분명한 푯대를 가진 나그네로 살아야 함을 사도 베드로는 간곡하게 권면한다.
우리는 초대 교회와 같은 박해의 시기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또한 비교적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안전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영적인 긴장감이 느슨해져 있을 수 있다. 사탄은 이런 시대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안일함과 나태함 속에 빠지도록 유혹한다. 사도 베드로의 권면을 따라 마치 출애굽하던 이스라엘백성들이 애굽을 떠나기 위해 옷을 입고 허리를 동이고 비장한 자세를 가졌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8월 24일
보배로운 산 돌 (베드로전서 2:1-5)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버리고 사모하라
갓난아기는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지한다.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라듯이 구원받고 거듭난 그리스도인도 마치 갓난아기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성장하면서 점차 성화되어가는 과정 가운데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사도 베드로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고 성화되기 위해서 ‘버리고’ ‘사모하라’고 명령한다. 옛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성품인 악독, 기만, 외식, 시기,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순전하고 신령한 젖,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라고 명령한다.
사도 베드로는 건물 건축을 비유로 들어 예수님께서 산 돌로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것처럼 개개인의 성도들도 함께 연합하여 신령한 집, 곧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를 이루어갈 것을 권면한다. 예수님은 건축자들이 쓸모없다고 버린 돌처럼 사람들에게서 버림받았으나 온 우주 만물의 건축자이신 하나님에 의해 택하심을 받아 보배로운 산 돌이 되셨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때로 멸시를 당하고 고난을 받을지라도 성화의 과정을 통해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존귀하게 여김을 받게 될 것임을 사도 베드로는 알려주고 있다.
오늘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무엇을 버려야할 것인가, 차마 버리지 못하고 붙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버리고 비워진 자리에 무엇으로 채우기를 사모하는가? 나를 비우고, 비운 나의 속사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 성화된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자.
8월 25일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 (베드로전서 2:9-12)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거류민과 나그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새 생명 얻은 사람을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 긍휼을 얻은 자로 그 신분을 바꾸어주셨다.
사도 베드로는 이와 같이 신분이 바뀐 주의 백성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권면하면서 ‘거류민과 나그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베드로는 믿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은 하늘나라에 시민권을 가진 자들이니 이 땅에서는 나그네와 같이 사는 것임을 서신서에서 여러 번 강조하고 있다.
원어를 직역하면 나그네는 외국 땅에 정착하여 사는 사람을 의미하고, 거류민은 외국 땅에 잠시 거주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하나님에 의해서는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 긍휼을 얻은 자로 신분이 바뀌었지만 이 세상에서는 자신의 나라가 아닌 외국 땅에 잠시 거주하거나, 외국 땅에 정착하여 거주하는 사람의 신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 땅은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의 이중적 모습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는 이방인들의 삶과 달리 육체 가운데 살아가지만 육체를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따라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은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교훈과 일맥상통한다.
8월 26일
선을 위한 고난 (베드로전서 3:8-16)
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12 주의 눈을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13 또 너희가 열심히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가져야 할 삶의 자세
베드로 사도 는 ‘마지막으로’ 말한다는 간절한 표현을 사용하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이 고난 중에 가져야 할 삶의 자세에 대해 권면하고 있다.
첫째, 교회공동체 내적으로는 성도들이 서로 한 마음이 되어 긍휼히 여기며 사랑하라는 것이고, 둘째, 교회공동체 밖에서는 악을 행하며 성도를 괴롭히는 자들을 악한 방법으로 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베드로 사도만의 가르침이 아니고 예수님도 산상수훈을 통해 우리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서로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는 것은 쉽지 않다. 자신에게 악하게 대하고 욕을 하
는 이들을 위해 복을 빌어주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베드로 사도 시대에 성도들이 외부에게 가해지는 핍박과 고난을 받으면서도 핍박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담대하게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핍박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더욱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말씀한다. 핍박이 다가올 때 그것을 담대하게 견뎌냄으로써 오히려 핍박하는 자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로 삼으라고 말씀한다.
우리는 사도 베드로 시대보다 신앙적으로 훨씬 자유롭고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서로를 긍휼히 여기지 못하는가 하면 조금만 고난이 닥쳐도 낙심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한다.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때 초대교회 성도들이 어떤 믿음으로 살았는지 기억하자.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초대교회 성도들 같은 믿음으로 매일의 삶을 살아가자.
8월 27일
선한 양심을 가지라 (베드로전서 3:16-22)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18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22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그리스도인의 선한 행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세상에서 선하게 살아갈 때 믿지 않는 이들은 때로 우리의 선행을 비방하고 조롱하거나 이용한다. 그러나 악은 선을 이기지 못하고, 선행을 비방하고 욕하는 이들은 결국 그로 인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은 대적자들에 의해 십자가에서 육체로는 죽임을 당했으나 죽음을 이기시고 영으로 부활하셔서 모든 믿는 사람들의 구세주가 되셨다.
때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고 죽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의문을 갖는다. 이에 대해 어떤 이들은 베드로전서 3:19절 말씀을 들어 설명한다. 예수님께서 옥에 있는 영들, 즉 노아 시대의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구원으로의 초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역하여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구원을 선포하셨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지옥에 있는 영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거부했던 영들에게까지 예수님이 참 그리스도시오 구주이심을 선포하셨다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노아의 가족이 살던 옛 시대가 그 죄 값으로 물속에서 멸망하고 순종한 노아 가족만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간 것처럼 세례는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더불어 다시 사는 거듭남의 표시이다. 그러나 세례를 받았다고 하여 우리가 완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 안에 있는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 나아가며 하나님과의 교제에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우리는 오늘도 선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선한 행실에 힘쓰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8월 28일
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베드로전서 4:7-11)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려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자세
사도 베드로는 이전까지의 어떤 고난보다도 더 극심한 고난을 받게 될 세상의 종말이 임박하였음을 각성시키기 위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고 말한다. 마지막 때를 대비하기 위해 성도들은 근신하며 기도함으로써 믿음을 새롭게 하되 서로 사랑하며, 허물을 덮어주고, 어려운 형편 가운데도 자원하는 마음으로 서로 나누고 돌보면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직분을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가 되어 감당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 것은 성도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거룩한 삶을 산다는 증거가 되므로 오히려 믿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기뻐할 수 있다. 또한 성도는 비록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가 되었을지라도 여전히 죄성을 소유한 연약한 존재이므로 고난 중에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과 사랑과 봉사로 결속을 굳게 해야 한다.
사도들의 시대나 지금이나 성도들은 임박한 종말을 느끼며 살고 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
도 모르나니 ...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종말의 때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단지 성도들은 종말이 내일로 임박한 것 같은 삶의 자세로 살아야 하며, 내일 당장 주께서 재림하시고 세상의 종말이 올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한다.
사도 베드로의 권면은 비단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고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준비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당연한 의무이다.
8월 29일
주께 맡기라 (베드로전서 5:6-11)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11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겸손과 신뢰
사도 베드로는 서신을 마무리하면서 장로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들의 본이 됨으로서 양무리를 이끌어갈 것을, 그리고 젊은이들은 장로들에게 순종하며 겸손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외부에서 다가오는 박해를 이겨내기 위해서 교회 내적인 화합과 단결이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그 시대나 지금이나 우리가 삶 속에서 실천하기 쉽지 않은 것이 겸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계실 때 친히 겸손의 본을 보여주셨다. 겸손하게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직접 높여주신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권면한다. 하나님께서 돌보아주심을 믿는 사람은 염려를 주께 맡길 수 있다. 맡기라는 말은 한꺼번에 내어던져 버리라는 뜻이다.
우리의 염려는 두려움과 욕심, 자신의 힘으로 살려고 하는 교만함, 즉 하나님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다. 오늘도 대적 마귀는 우리에게 교만한 마음을 불어넣고, 세상 일로 근심하게 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고 유혹한다. 우리의 영혼이 깨어 있어 이러한 유혹을 이기고 오직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고 터를 견고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야 하겠다.
8월 30일
부르심과 택하심 (베드로후서 1:3-11)
3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 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성도가 가져야할 덕목
우리를 자녀로 부르시고 택하여 주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가 받게 되는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다. 이 약속은 하나님의 자녀가 장차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과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을 말한다.
이 약속은 비단 앞으로 언젠가 가게 될 하늘나라에서만 이루어질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우리가 받아 누릴 수 있는 약속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에 함께 참여할 수 있게 하셔서 이 땅에서도 이미 하늘나라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셨다. 사도 베드로는 성도가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에 참예하기 위해서 가져야 할 덕목들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믿음과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와 사랑이다. 인간을 부르시고 택하신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은 자신이 받은 구원을 확실하게 지키기 위해 성도가 가져야할 덕목들을 실천하며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을 하여야 한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얻게 되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모든 것의 출발이기 때문에 사도 베드로는 믿음으로부터 성도가 이루어야 할 성결의 단계를 시작한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해야 함을 가르쳐준다. 믿음에서 시작하여 사랑으로 맺어지는 성도의 덕목은 결국 우리에게 믿음과 사랑이 가장 중요함을 알려준다. 오늘 하루를 지내며 사도 베드로의 권면을 기억하고 생활 속에서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에 굳게 서도록 하자.
8월 31일
하나님의 날 (베드로후서 3:8-13)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새 하늘과 새 땅
초대 교회 당시 많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다. 아마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마24:34) 하신 주의 말씀도 있고, 그들의 세계관에서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지상 명령이 어느 정도 성취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로마제국의 대대적인 박해와 함께 주께서 재림의 징조들 중 하나로 말씀하신 이단의 극성스러운 활동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자꾸 지체되는 것처럼 생각되었고 심지어 그리스도의 재림이 없다는 이단의 주장에 귀가 솔깃하게 되었다.
사도 베드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시간 개념을 초월해계시는 분이시므로 인간의 시간 개념으로 주의 재림이 지체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둘째, 주의 재림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아직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이 다 회개하고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셋째, 주의 재림은 도적같이 임할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재림의 시기가 언제일까 관심을 갖기보다 주의 재림은 반드시 있을 것이므로 주님을 맞이할
신앙자세를 올바로 하는데 더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 주의 재림이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맡겨진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찾아서 잘 감당하며, 또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생활이 때로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주의 재림과 함께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며 살아가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