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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림교회
2019년 3월 25일
In 365일 말씀묵상
1월 1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5)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시작과 끝 Der Tag ist die Grenze unsers Sorgens und Mühens. Er ist lang genug, um Gott zu finden oder zu verlieren, um Glauben zu halten oder in Sünde und Schande zu fallen. Darum schuf Gott Tag und Nacht, damit wir nicht im Grenzenlosen wanderten, sondern am Morgen schon das Ziel des Abends vor uns sähen. 하루는 우리의 근심과 수고의 경계이다. 하루는 하나님을 찾거나 아니면 잃어버리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다. 믿음을 붙들거나 아니면 죄와 수치 속으로 빠지기에 또한 충분히 긴 시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낮과 밤을 만드셔서 우리로 하여금 경계를 잃고 방황하지 않고, 아침에 이미 밤이라는 목적지를 보게끔 하셨다. (디트리히 본회퍼의 매일을 위한 말씀 중 1월 1일자) 디트리히 본회퍼의 글은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로 하여금 미리 한해의 마지막 날을 생각하게 한다. 올 한해 우리 각자가 가지는 소망, 계획 등의 결과를 미리 생각하고 기대하며 첫 날을 시작하도록 마음가짐을 분명하게 해준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히브리서의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조화롭고 질서 있게 창조하셨다. 어두움 가운데서 빛을 창조하시고 낮과 밤, 사시사철을 정하시고 시간의 경계를 구분하셨다. 한 해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시간의 경계를 정해주시고, 다시 또 출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에 감사하며 올 해의 마지막 날을 미리 바라보며 한 해를 살아가자. 1월 2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창세기 1:26-31)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8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 째 날이니라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믿음의 대전제, 고백, 선포의 말씀이고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태에서 빛을 창조하셨다. 신앙적 의미로 혼돈과 어둠은 거듭나지 못한 영혼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무질서하고, 허물과 죄로 인해 죽은 상태에 있는, 영적 생명이 없는 상태에 있는 인생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빛으로 오셨다. 태초에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세상이 복음의 빛으로 충만해지기를 원하시고, 모든 사람이 그 빛을 가지고 누리기를 원하신다. 기독교인이 세상에서 빛이 되어서 혼돈된 곳에 질서와 조화를 이루고 그리스도의 빛을 세상 가운데 비추며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자연만물을 다스리도록 관리자의 역할을 맡겨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올 한 해를 살아갈 때 늘 기쁨과 평안 가운데, 자존감을 가지고 힘 있게 나아가기를 원하지만 때로 자신의 약한 모습, 부족한 점을 보고 실망하며 낙심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임을 기억하자.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 자신의 속성, 자신의 성품을 따라 만들어주신 것을 기억하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아하셨음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존감을 반듯하게 세워가자. 1월 3일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하나님 (창세기 2:1-7)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4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안식일을 구분하신 이유 창세기 1장은 전 우주적 맥락에서 창조사역을 기록한 반면 2장은 특별히 에덴동산과 인간의 창조에 중점을 두고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반복하여 기록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정점이 인간에게 있음을 알려준다. 하나님은 6일 동안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일곱 째 날에 안식하셨다. 모든 창조 사역을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 완성하고 창조의 종결로써 안식을 취하신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실상 휴식이 필요하신 분은 아니다. 그러나 6일 간에 걸친 창조사역과 하루의 안식을 통해 우리들에게 일과 휴식의 리듬을 정해주셨고, 일곱 번째 날을 복되고 거룩한 날로 구분하셔서 하나님 안에서 쉼을 누리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6일간의 창조사역을 마치시고 7일에 안식하신 것 같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도 6일 동안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실하게 일하고, 7일에 안식을 취하는 것이 올바른 삶의 방식이다. 안식일은 단순히 육신이 쉬는 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신 복을 생각하며, 스스로 거룩하게 하는 일에 힘씀으로써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자신과의 관계를 점검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자로서의 삶의 자세를 점검하는 날이다. 하나님께서 이 날을 거룩하게 구분하시고 복 주신 이유는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가다듬는 날이기 때문이다. 1월 4일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창세기 2:8-17)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10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하나님은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만드시고 그곳에 아담과 하와를 살게 하셨다.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셨는데 동산 가운데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 동산에 있는 각종 나무의 열매는 마음대로 먹을 수 있으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흔히 사람들은 하나님이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들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했느냐고 질문한다. 에덴동산에 있던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무엇이었을까? 생명나무는 그 열매를 지속적으로 먹으면 육신의 생명을 강건하게 해주어서 삶을 영존시킬 수 있는 특별한 나무이다. 영적인 의미로는 이것을 먹을 때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징표이다. 또한 생명나무는 이후 타락한 인간의 영적 생명의 회복을 위해 세상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을 제공해주는 것으로, 판단하고 자랑하며 교만하게 하여 영적인 죽음으로 이끌어가는 육신적 세상을 의미한다. 동산에 있었던 두 나무는 하나님이 인간을 스스로 사고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며,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지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셨음을 보여주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하며 살아야 하는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1월 5일 사탄의 유혹 (창세기 3:1-7) 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는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알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불순종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시면서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성숙한 인격으로 발전해가기를 원하셨다. 사탄의 도구가 된 뱀은 교묘하게 하와의 마음을 떠보았다. 하나님이 정말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했느냐고 살짝 바꾸어 묻는 사탄의 질문에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말을 더하였다. 하나님은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하와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고 대답하였다. 하나님은 그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으나 하와는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다고 대답하였다. 하와의 마음 상태를 알아챈 사탄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고 하며 적극적으로 하와를 유혹하였다. 하와가 사단의 유혹에 마음이 끌려 그 나무를 보았을 때 정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하였다. 요일2:15-17의 말씀대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하와의 마음을 지배한 것이다.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생각을 더하여 말씀을 변질시켰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인간의 생각을 첨가하여 변질시킬 때 사단이 개입하여 죄가 들어온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는 육신의 눈이 밝아져 자신들이 벌거벗은 것을 보게 되었으나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영적인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불순종의 결과는 영적 죽음이다. 1월 6일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3:8-13) 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나님의 질문 사탄은 하와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을 일으켰고,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였으며, 거짓말로 속이는 과정으로 인간을 죄의 길로 유혹하였다.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인간은 즉각 내적인 순수함과 영화로움을 상실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하나님과 교제할 마음을 잃게 되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숨었다. 죄의식과 두려움, 수치심은 그들이 이전에 기뻐하였던 하나님과의 교제를 깨뜨렸다. 나무 사이에 숨어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어오셨다. 아담이 어디 있는지 장소를 묻는 것이 아니라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하나님은 비록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 죄를 지었지만 이들이 자신의 현 상태를 깨닫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무 사이에서 하나님 앞으로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담을 부르셨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지 않았을 뿐더러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죄를 더하였다.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하나님께 불순종한 책임을 회피하려고 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하시면 나는 어디에 있다고 대답할 수 있을까? 행여 신앙적으로 옳지 못한 자리에 있다면, 잘못된 생각이나 잘못된 삶의 방식에 매여 있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자리로 나아가자! 1월 7일 가죽옷을 입혀주신 하나님 (창세기 3:20-24) 20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구원 뱀은 하와에게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라고 말하며 죄의 길로 유혹하였고, 하나님과 같아지기를 원하는 교만이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오늘날에도 우리들을 괴롭히고 또 쉽게 넘어뜨리는 유혹은 교만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로 공동체의 관계에 장애가 생겼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다른 피조물 사이에 죄가 개입하여 장애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육신의 눈이 밝아져 자신들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게 되고 수치심을 느껴 나뭇잎으로 몸을 가린 아담과 하와를 위해 짐승을 잡아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혀주셨다. 가죽옷은 죄를 지은 인생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표현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직접 피를 흘리고 구원해주실 것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다. 낙원에서 추방된 것이 영원한 조치는 아니었고, 가죽옷으로 상징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를 예비해주셨다. 이로 인해 인간은 새로운 낙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성경에서 옷은 흔히 구원을 상징한다. 집을 나가 방탕하게 살던 아들이 돌아오자 아버지는 그에게 죄에 찌든 더러운 옷을 벗기고, 깨끗한 옷을 입혀주었다(눅15:22).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이 세상을 살아가라고 말씀하신다. 1월 8일 가인과 아벨 (창세기 4:1-8)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진정한 예배 아담과 하와가 낳은 첫째 아들 가인은 농사를 지었고, 둘째 아들 아벨은 양치는 일을 하였다. 농사를 짓던 가인은 땅의 소산을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고, 양을 키우던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제물삼아 예배를 드렸다. 하나님은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셨고, 아벨의 예배는 받으셨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예배는 받으신 것이 비단 드려진 제물의 차이에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두 사람의 일상의 삶의 태도가 달랐을 것이고 예배를 드리는 자세가 달랐으리라는 것을 ‘아벨과 그의 제물’, ‘가인과 그의 제물’이라는 성경 기록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가인이 하나님께 책망을 들었을 때 그는 자신의 잘못된 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삶의 모 습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예배자로 회복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핑계하며 회개의 기회를 놓친 아담처럼 가인도 회개할 기회를 놓치고 분노로 인해 동생을 살인하는 더 큰 죄를 범했다. ‘받으신다’ 혹은 ‘열납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 원어의 뜻은 ‘응시하다, 주목하다’이다. 하나님께서 가치 있는 것으로 주목해서 보시고 기꺼이 받아들이셨다는 뜻이다. 올 한해 우리가 드리는 예배, 나아가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서 주목하시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주시는 진정한 예배가 되기를 소원하며 살아가자. 1월 9일 가인의 계보 (창세기 4:16-22) 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산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18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19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0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가인의 길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에 지지 말고 죄를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으나 가인은 죄를 다스리지 못했다. 창세기 4장7절에 ‘죄’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나온다.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 활 쏘는 사람이 표적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성경적 개념의 죄는 하나님의 뜻에서 빗나간 인간의 모든 행동이나 마음 상태에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가인은 이후 놋 땅에 거주하며 아들 에녹을 낳았다. ‘놋’은 ‘흩어지는 것’, ‘방랑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가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영적으로 하나님과 멀어져 방랑하였음을 말해준다. 그곳에 성을 쌓고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성이라고 불렀다. 에녹은 ’창시‘라는 뜻으로 이곳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겠다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었지만 불행하게도 이 새로운 출발은 하나님 없는 출발이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가인의 자손들은 매우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야발은 목축기술을 발전시켰고, 유발은 음악을 창시했으며, 두발가인은 금속산업을 처음으로 시작했다. 가인의 가문, 그가 세운 도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가인의 자손들은 문명을 발전시키는 놀라운 성과를 이루었으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타락의 역사를 이어갔다. 현대의 놀라운 문명의 발전도 인간의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만을 이끌어낸다면 본질 상 가인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고도로 발전된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행여 가인의 길을 따라가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점검해보자. 1월 10일 아담의 또 하나의 계보 (창세기 4:25-5:8) 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5:1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6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 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신실한 믿음을 이어가는 가문 창세기 4장 25절부터 5장 마지막까지 또 다른 인류의 족보가 기록되는데, 이 족보는 아담의 신실한 자손들을 기록함으로서 타락과 죄악으로 얼룩진 인간 역사의 진행과정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신실한 믿음의 자손이 보존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담과 하와가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가인의 자손들이 육신을 따라 욕심과 교만, 자랑을 이끌어 내는 세속 문화를 세워가는 동안 셋과 그의 자손들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을 드리며 거룩하고 경건한 삶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갔다. 가인의 자손들은 자신들이 이룩한 문명의 힘을 의지하고 살았으나 셋의 자손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았다. 가인의 자손들의 계보에는 나이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5장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셨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노아에까지 이르는 아담의 세 번째 아들 셋의 자손들이 이 땅에서 몇 살까지 살았는지 알려주고 있다. 악인들의 생애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연수를 계수할 가치가 없으나 신실한 자손들의 삶은 연수를 계수할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오늘 우리는 어떤 가문을 이어가기를 원하는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았던 셋의 자손들처럼 신실한 믿음의 가문을 이어가기를 소원하며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자. 1월 11일 노아의 방주 1 (창세기 6:9-22) 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10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11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14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15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 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19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 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 하였더라 하나님의 기다리심과 노아의 순종 여호와 하나님은 부패한 세상을 새롭게 하실 계획을 세우시고, 노아를 택하셨다. 노아가 그 타락한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것을 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세상을 멸하실 날을 대비하여 배를 만들라고 말씀하시고, 배의 크기와 모양을 상세히 지시하셨다. 알려주신 배의 크기는 길이 171미터, 넓이 28미터, 높이 17미터 가량이었고, 그 구조는 물 위에 안정되게 떠 있게 하는 가장 과학적인 구조라는 것이 1800년대 중반 영국의 조선술을 통해 입증되었다. 노아는 120년 동안 배를 만들었다. 120년의 긴 세월은 노아 가족이 다른 사람이나 기계의 조력 없이 그 큰 배를 만드는데 필요한 시간이었을 수도 있겠으나, 하나님이 죄악을 심판하실 것이니 돌이켜 회개하라고 기회를 주시며 기다리신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노아가 마른 땅 위에서 묵묵히 오랜 세월 그 큰 배를 만드는 모습은 하나님의 계획과 타락한 백성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주는 표징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노아를 비웃고 조롱하였다. 오늘날 흔히 교회를 배에 비유한다. 배는 물 위에 떠 있으나 물과는 분리되어 있다. 배에 물이 들어오면 배는 침몰하고 만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으나 모든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고 세상의 죄악을 막아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배와 같은 교회의 역할, 배를 만드는 노아의 심정과 역할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보자. 1월 12일 노아의 방주 2 (창세기 8:13-9:1) 13 육백일 년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서 물이 걷혔더니 14 둘째 달 스무이렛날에 땅이 말랐더라 15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6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 오고 17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20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9:1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새로운 세상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배를 만든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모든 짐승들이 그 종류대로 암수 둘씩, 혹은 일곱씩 배에 들어간 후 하나님은 직접 배의 문을 닫으셨다. 배의 문이 닫힌 후 7일이 지나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홍수는 40일 간 계속되어 모든 높은 산이 다 잠기고 땅에 있는 숨 쉬는 생명체는 다 죽었다. 대홍수 가운데 구원받아 살아남은 사람들은 결국 노아의 가족 8명뿐이었다. 인류 역사 초기에 대홍수가 있었다는 기록은 성경 뿐 아니라 동서양의 다른 문명의 고대 문서들에 도 기록되어 있어 노아 시대의 대홍수 사건의 역사적 사실성을 의심할 수 없게 만든다. 노아와 그 일행이 배 안에 있었던 기간은 1년 10일이나 된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방주에 들어간 노아는 홍수가 그치고 지면에 물이 걷힌 것을 확인한 이후에도 하나님의 지시가 있기 까지 57일을 더 기다린 후에야 방주에서 나왔다. 이들이 1년 이상 배 안에서만 생활하다가 밖으로 나와 다시 만난 세상은 어떠했을까?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공의의 심판에 전율하며, 자신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여 구원해주신 은혜에 감격하여 제단을 쌓고, 정결한 새를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예배드렸다. 하나님은 그 예배를 기쁘게 받으셨다. 노아의 믿음과 순종을 기쁘게 받으신 것이다. 타락한 옛 세상은 장사되었고, 노아와 그 가족은 새 생명으로 부활하였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새로운 세상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복을 주셨다. 1월 13일 바벨탑 건설 (창세기 11:1-9) 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이 시대의 바벨탑 대홍수를 통하여 인간의 불순종과 타락을 심판하신 하나님은 노아의 세 아들인 셈과 함과 야벳으로 하여금 새로운 세상을 이어가게 하셨다. 사람의 생각하는 것이 어려서부터 악함을 하나님이 아시기에 이제 다시는 인간의 죄로 인해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하시며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다. 타락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를 경험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세로 살아야 마땅했으나 급속도로 번성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면서 다시금 하나님을 대적하였다. 하나님의 힘에 대항할 수 있는 통일된 하나의 세계 왕국을 건설하고자 시날 평지에 거대한 탑을 짓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탑 꼭대기를 1. 하늘에 닿게 하여 2.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3.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려고 하였다. 즉 하나님처럼 되고, 스스로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고, 한 곳에 모여 강력한 하나의 나라를 세우고자 계획하였다. 마침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이들을 온 지면에 흩어놓으셨다. 바벨탑 사건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모든 인간의 노력은 성공할 수 없으며, 불행을 가져올 뿐임을 알려준다. 거대한 문명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그 옛날 조상들이 쌓다가 실패한 바벨탑을 다시 쌓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1월 14일 아브람의 이주 (창세기 12:1-5)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니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 였더라 5 아브람아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너는 복이 될지라 창세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11장까지의 전반부는 창조, 타락, 홍수, 바벨탑 사건의 중요 4개 사건을 다루는 전 인류적인 기록이다. 12-50장까지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에 이르는 4명의 중요 인물을 다루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이루어가는 과정에 이들이 어떻게 쓰임 받았는지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교만해져 바벨탑을 쌓던 세대 속에서도 믿음을 이어가는 의인의 계보인 셈의 가계를 기록하면서, 셈의 가문에서 하나님께서 택하여 그의 기업으로 삼으신 아브라함이 태어난 것을 알려준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와 그 가족들이 살던 갈대아 우르는 어떤 곳이었을까? 우르는 티그리스와 유브라데스 강 사이의 남쪽에 위치한 비옥한 지역인데, 상업, 천문학, 점성술이 발달하였고, 뛰어난 고대문명과 아울러 우상숭배가 성행하였다. 지금의 터키 북부지역이다. 우르는 또한 수메르 제국 전체에 막강한 힘을 행사하던 도시국가였는데 도시 북쪽에 마치 바벨탑을 연상시키는 3층의 거대한 탑 모양으로 지어진 신전이 있었다. 세상적으로 볼 때 아브람이 이런 풍요한 곳에서 황량한 팔레스틴으로 향했던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복을 주시고 창대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면서 오히려 안락하고 부요한 곳을 떠나라고 하셨다. ‘너는 복이 될지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떠난 아브람의 믿음이 진정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1월 15일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창세기 12:5-9) 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예배하는 삶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75세에 고향을 떠나 마침내 가나안 땅 세겜이라는 지역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 땅을 아브람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재차 약속하셨고, 아브람은 약속의 땅까지 무사히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 이후 아브람은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가 장막을 치고 그곳에서도 여호와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가는 곳마다 자신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믿음을 보여주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그들에게 고향과 같았던 번성하고 풍요로운 도시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고자 하였는데 하란에 이르러 거기서 거주하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데라가 죽은 후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역사는 단시일 내에 이루어지는 것도 있고, 시작부터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다. 아브람의 가족은 이미 아버지 데라 때부터 가나안을 향해 이주해가는 중이었다. 데라가 무엇을 생각하고 옮겨갔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의 아들 아브람의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계획을 보여주셨다. 아브람은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그네 인생길을 가면서 가는 곳 마다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예배하는 삶을 살았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1월 16일 아브람에게서 분가한 조카 롯 (창세기 13:5-13) 5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6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7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11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13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잘못된 선택 하나님께서 복 주심으로 인하여 아브람과 롯은 새로 이주한 땅에서 소유가 많아졌다. 그들이 머물고 있는 땅이 그들의 소유에 비해 좁아 아브람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분쟁의 외적인 이유는 부의 증가에 있었으나 내적인 원인은 롯의 불신앙과 세상적인 욕심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카 롯과 평화롭게 지내기 위해 고심한 아브람은 서로 헤어질 것을 제안하고 조카에서 거주할 땅을 먼저 선택하도록 양보하였다. 인간의 도리로 볼 때 롯은 일찍 아버지를 여읜 자신을 아들처럼 돌보아 준 삼촌 아브람에게 거주할 땅을 먼저 선택하도록 양보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마음의 갈등 없이 자신이 거주할 곳으로 요단 지역을 선택하였다. 그곳은 물이 넉넉하여 애굽 땅과 같이 풍요롭게 보였고, 모든 육신적 요구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곳으로 보였다. 롯이 선택해서 옮겨 간 곳은 이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타락과 멸망의 성 소돔이었다. 롯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았더라면 소돔 땅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곳임을 의식했을 것이고, 그곳을 자신의 거처로 삼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롯은 육신의 눈으로 거주할 곳을 택하고, 육신을 따라 행하여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고, 아브람은 영을 따라 행하며 하나님께로 점점 더 가까이 나아갔다. 롯의 잘못된 선택이 우리들에게 분명한 교훈을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때로 롯과 같이 잘못된 선택을 한다. 1월 17일 아브람을 축복한 멜기세덱 왕 (창세기 14:14-20) 14:14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 16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 17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십분의 일 아브람과 조카 롯이 서로 헤어져 각자의 삶의 터전을 잡아가고 있던 중 가나안 지역 남쪽의 나라들과 북쪽의 나라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롯과 그의 식솔들이 모두 사로잡히고 재물도 다 빼앗기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아브람은 자기가 기르던 군대를 동원하여 사로잡힌 조카와 그 식구들을 다 구해내고 빼앗긴 재물도 도로 찾아 왔다. 아브람이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살렘 왕 멜기세덱이 나와 아브람을 맞이하였다. 살렘은 ‘평강’이라는 뜻이며 예루살렘의 옛날 지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의 왕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아브람과 그의 병사들이 기운을 회복할 수 있게 해주었다. 히브리서는 멜기세덱 왕을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라고 기록하고 있다. 멜기세덱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아브람을 축복하자 아브람은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다.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첫 번째 십일조 예물이다. 아브람은 전쟁에서 이긴 것이 단지 조카 롯을 구한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서 아브람의 영향력을 확대해가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임을 깨닫고, 이에 감사하는 믿음의 표현으로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예물을 드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우리의 삶을 세밀하게 계획하고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드리는 것이고,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1월 18일 아브라함의 변론 (창세기 18:22-33) 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23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여 하시나이까 24 그 성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2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27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28 오십 의인 중에 오 명이 부족하다면 그 오 명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온 성읍을 멸하시리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사십오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 32 ...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3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의인을 찾으시는 하나님 아브람이 99세 되던 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찾아오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여종 하갈에게서 아들 이스마엘을 낳은 것을 상기시키며 회개하도록 책망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을 재차 확인해주시면서 언약의 증거로 아브람(‘고귀한 아버지’라는 뜻)의 이름을 아브라함(‘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바꾸어주셨다. 아브라함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이 진행되고 있는 반면 소돔과 고모라에서는 타락과 죄악이 극심해지고 있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음을 알려주시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소돔성에 있을 의인을 악인과 함께 심판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맞는 것인지를 질문하며 끈질기게 용서를 간구하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간구한대로 그곳에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소돔 성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킬 의인 열 명이 없었다. 소돔 성이 멸망한 이유는 그 성에 만연한 죄악 때문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거두시게 할 최소한의 의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은 그 옛날 소돔 성과 같이 불의하고 타락하여서 하나님의 심판 앞에 놓여 있고, 소돔 성에서 의인을 찾으시던 하나님의 눈은 지금 이 시대에서도 의인을 찾고 계신다. 우리 각자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아브라함처럼 기도해야할 뿐 아니라 이 시대를 구할 한 사람의 의인으로 살아야 할 거룩한 책임이 있다. 1월 19일 소돔 성의 멸망 (창세기 19:20-29) 20 보소서 저 성읍은 도망하기에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를 그곳으로 도망하게 하소서 ... 21 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 네가 말하는 그 성읍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22 그리로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을 소알이라 불렀더라 23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 24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25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26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27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서 있던 곳에 이르러 28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지역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 가마의 연기같이 치솟음을 보았더라 29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롯의 아내 하나님이 타락한 소돔 성을 심판하실 때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가족들을 심판의 대상에서 제외시키셨다.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할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빨리 성을 떠나라 하였으나 재물에 욕심이 많았던 롯은 즉시 떠나지 못하고 지체하였다. 천사가 소돔에서 떠나기를 주저하는 롯과 그의 아내,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었고, 그들이 소돔 가까이 있던 소알 성에 다다르자 하늘로부터 유황과 불이 비같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뒤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지 말라는 천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롯의 아내는 소돔에 남겨놓은 세상적인 것들을 연연해하며 뒤를 돌아보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 온 지역을 심판하시는 장면을 목격하였기 때문에 소금기둥이 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이 직접 행하시는 일을 인간으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영역과 사람의 영역을 분명히 구분해놓으신 것이다. 천지만물을 모두 창조하신 후 사람을 만드셨고, 노아의 홍수 때에도 방주 안에 들어간 노아의 가족들은 홍수가 지상의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것을 볼 수 없었다. 롯이 소돔 성의 멸망 중에도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와 심판 가운데서도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우리도 서로를 위해 기도하기를 힘쓰고, 세상에 마음을 두어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롯의 아내와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1월 20일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 하나님 1 (창세기 22:1-8)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 2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주신 곳으로 가더니 4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꼐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아브라함의 순종 아브라함에게 큰 시험이 닥쳤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람(고귀한 아버지)의 이름을 아브라함(열국의 아버지)이라고 바꾸어주시며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리라고 하셨는데 백세에 낳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제물로 드리라고 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 항의할 수밖에 없는 명령이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명령에 아브라함은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그는 말씀하신대로 행하기 위해 지체하지 않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길을 떠났다. 아들을 번제를 드리라고 지시하신 곳은 집에서부터 사흘 길이나 되었다. 사흘 길을 가는 동안 인간 아브라함의 마음은 고통과 갈등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나 그 길에서 돌이키지 않고 나아갔다. 목적지에 다가갔을 때 그는 종들에게 말했다.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나님의 약속이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질지 알 수 없었으나 하나님이 반드시 자신의 약속을 지키실 것을 믿었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삭을 돌려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종들에게 아들과 함께 돌아오리라고 말할 수 있었다.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에게도 때로 이런 시험이 닥친다. 시험이 닥칠 때 하나님께 순종할지 자신의 뜻을 따를지는 우리의 선택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도록 가르치시기 위해 우리가 집착하거나 신뢰하는 것들을 떠나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기를 원하신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세상을 향해 서 있지 말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해 서 있기를 원하신다. 아브라함은 신뢰와 순종을 통해 이 큰 시험을 통과하였다. 1월 21일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 하나님 2 (창세기 22:8-14)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셨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호와 이레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일러주신 곳에 도착하였다. 아들을 결박해서 나무를 쌓아 만든 제단 위에 올려놓을 때까지도 하나님이 일하시는 아무런 징조가 보이지 않았다. 이삭은 이때 이미 20세가량 된 장성한 청년이었다.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려고 하는 상황이 파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살기 위해 아버지에게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따르는 이삭 또한 아버지 못지않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순종을 확인하신 하나님은 극적인 순간에 아브라함을 저지시키셨고, 아브라함은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 숫양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아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숫양을 예비해놓으신 그 땅을 여호와 이레(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라고 이름 지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는데,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지정해주신 땅과 거기에 관련된 약속을 멀리서 볼 뿐만 아니라, 그 약속을 성취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본 믿음이었다. 약속은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나 약속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은 바로 곁에서, 가까이에서 일하고 계심을 보고 느끼는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순종할 수 없는 일에 순종하였다. 즉각적이며 미루지 않고 기꺼이 행하는 순종은 우리들이 신앙생활에서 가져야 할 중요한 자세이다. 그러한 믿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도 매일의 삶 속에서 ‘여호와 이레’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1월 22일 하나님의 맹세 (창세기 22:15-19) 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19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 복음 - 복된 소식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삭은 백세에 얻은 무엇보다 귀한 아들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아들보다 하나님의 명령을 더 중요하게 여겨 그 명령에 순종하는 믿음을 보이자 하나님은 스스로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시며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네 씨’는 단순히 아브라함의 육신적 후손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나아가 아브라함의 계보에서 태어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가 대적 사탄을 이기고 그 성문을 차지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고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아지리라는 하나님의 구원계획, 곧 복음을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셨다. 히브리서는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거류하며…’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그가 이전에 살았던 갈대아 우르나 하란과는 대조적인 척박한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나그네와 같이 살았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선택에 신뢰로 응답하였다. 하나님께 대한 굳건한 신뢰가 있었기에 이 땅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았고, 복음의 소망 가운데 그는 미래 속에서 살았다. 1월 23일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여긴 에서 (창세기 25:27-34) 27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28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29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32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잘못된 거래 이삭과 결혼한 리브가는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을 낳았다. 하나님은 에서와 야곱이 태중에 있을 때부터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고 리브가에게 말씀하셨다. 장자의 권한을 중요시하는 당시 이스라엘의 관습으로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었지만 선택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능력이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알려준다. 쌍둥이 중 첫째는 털이 많아서 에서(털보)라고 이름지었고 후에는 팥죽과 연관되어 에돔(붉다)이라 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둘째는 첫째의 발꿈치를 붙잡고 마치 그를 붙들어 넘어지게 하는 듯이 태어나서 야곱(발꿈치를 잡는 사람, 속이는 자, 빼앗는 자)이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불행하게도 에서는 영적인 인식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분명 그의 부모는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을 가르쳤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귀하게 여기기보다 세상의 것들, 육신적 필요를 채우는 것을 더 중요시하였다. 그 결과 일시적 배고픔을 채워 줄 음식을 위해 장자의 명분을 팔라고 하는 야곱의 제안을 쉽게 받아들였다. 야곱 또한 자신을 실제적인 장자로 삼겠다고 하신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을 친히 이루어주실 것을 확신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꾀로 장자의 권리를 얻고자 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에서와 야곱의 거래는 영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방법과 사람의 방법을 구분하지 못한 잘못된 거래였다. 이로 인해 얼마나 오랜 세월 견디기 힘든 고난이 야곱에게 주어졌는지 기록한 성경말씀은 오늘 날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준다. 1월 24일 리브가의 계략 (창세기 27:1-10) 1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이르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2 이삭이 이르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니 3 그런즉 네 기구 곧 화살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서 먹게 하여 내가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5 이삭이 그의 아들 에서에게 말할 때에 리브가가 들었더니 에서가 사냥하여 오려고 들로 나가매 6 리브가가 그의 아들 야곱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아버지가 네 형 에서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으니 ... 8 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하라 내가 네게 명하는대로 9 염소 떼에 가서 거기서 좋은 염소 새끼 두 마리를 내게로 가져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아버지를 위하여 그가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리니 10 네가 그것을 네 아버지께 가져다 드려서 그가 죽기 전에 네게 축복하기 위하여 잡수시게 하라 영적으로 어두워진 가정 이삭은 쌍둥이 아들 중 형인 에서를 더 좋아하였고, 리브가는 동생인 야곱을 더 좋아하였다. 야곱에게 장자의 복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에서를 편애하던 이삭은 에서를 축복하고자 하였다. 이삭은 육신의 눈이 어두워졌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어두워져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했다. 야곱을 편애하던 리브가 역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상황에서 인간의 계략을 썼고, 평소 장자권의 상속을 사모하던 야곱은 어머니의 계략을 따라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에서를 축복하려던 아버지의 축복을 자신이 받았다. 하나님께서 오래 전 리브가에게 계시해주신 것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성취 과정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했다. 야곱에게 주어질 복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따라 순수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편애와 공모, 속임수 등 인간의 허물이 뒤섞인 상태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방법을 통해 이루어질 때 가장 선한 결과를 낳는다. 노년의 이삭은 믿음이 희미해졌고, 리브가는 위기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의심하고 성급하게 인간의 꾀를 썼다. 에서는 하나님의 복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고, 야곱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아버지와 형을 속였다. 영적으로 어두워진 야곱 가족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시작하였으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 자신의 지혜를 내세우며 하나님보다 앞서 가고 있지 않은지, 자신의 유익을 생각하는 마음이 앞서 영적으로 어두워지지 않았는지 점검해보자. 1월 25일 야곱의 꿈 (창세기 28:10-19) 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게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벧엘 – 하나님의 집 에서의 분노를 피해 외삼촌 집을 찾아 가던 야곱이 밤을 맞아 노숙을 하던 중 꿈을 꾸었다. 사닥다리가 땅에서 하늘에 닿아 있었고, 거기에 천사들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 위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을 야곱에게 해주셨을 뿐 아니라 야곱이 어디로 가든지 지켜주시며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야곱은 잠에서 깬 후 ‘이곳은 하나님의 집이고 하늘의 문’이라고 고백하였다. 야곱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아무런 이유도, 자격도 없었다. 그러나 죄인된 인생들을 먼저 찾아오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앞날을 알지 못한 채 들판에 누워 돌을 베게 삼아 잠을 자고 있는 야곱을 찾아오셔서 축복하셨다. 이 얼마나 놀라운,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인가!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황량한 들판에 외롭게 있다고 생각했었으나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계시고 지켜주시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꿈에 보여주신 사다리는 땅에서 하늘에 이르는 유일한 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자기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도망치고 있던, 하나님이 가까이 계셔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던 야곱은 잃어버린 영혼의 모형이다. 사람이 자기 생애 가운데 ‘벧엘’, 곧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계신다는 경험을 가지게 되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다. 그런 사람은 잠시 주님을 떠나게 될지라도 다시 ‘벧엘로 돌아와’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하며 은혜를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1월 26일 야곱의 귀향길 1 (창세기 32:1-9) 1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2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3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자기보다 앞서 사자들을 보내며 4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 주 에서에게 이같이 말하라 주의 종 야곱이 이같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과 함께 거류하며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사오며 5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알리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라 하였더니 6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러 오더이다 7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8 이르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라고 9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마하나임 아버지와 형을 속인 후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한 야곱은 긴 세월 동안 외삼촌의 집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야곱에게 꿈을 통해 찾아오셔서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고 하며 야곱이 고향을 떠나던 때 벧엘에서 한 하나님과의 약속을 상기시켰다.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전히 야곱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는 형 에서를 만나야했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떠난 귀향길에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났고, 그 땅을 하나님의 군대라는 뜻으로 ‘마하나임’이라고 불렀다. 형을 만나야하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군대를 앞서 보내시며 보호하시는 것을 알게 하신 것이다. 야곱의 귀향은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고, 또 그 길에 하나님의 군대를 앞서 보내주심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인간적인 두려움이 앞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다. 에서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자신의 지혜로 인간적인 방법을 계획하는 야곱의 모습, 이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약속하시고, 지켜주시는 것을 알면서도 현실의 문제 앞에서 근심하며 불안해하고, 세상적인 방법을 찾는 우리의 모습이다. 이제 우리는 좀 더 담대한 믿음으로 살아가자. 하나님의 군대가 우리 앞에서 먼저 가며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함을 믿고, 은혜의 땅 마하나임에서 감사하며 담대하게 살아가자. 1월 27일 야곱의 귀향길 2 (창세기 32:22-28)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 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새 이름 귀향길에 오른 야곱은 형 에서로부터 자신의 안전을 유지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치밀한 계획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두려움을 떨쳐낼 수 없었다. 밤이 되자 야곱은 그의 가족과 소유를 얍복 강 건너로 먼저 들여보내고 자신만 홀로 남았다. 이곳에서 생사를 걸고 처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하는 야곱을 하나님이 만나주셨다. 하나님은 야곱의 자기중심적 사고와 인간의 능력의 근원을 철저하게 무너뜨리셨고, 야곱으로 하여금 더 이상 자기의 생각과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새로운 인격과 성품을 상징하는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다. 그의 원래 이름인 야곱은 ‘속이는 자’, ‘빼앗는 자’, ‘발뒤꿈치를 잡은 자’라는 부정적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새 이름에는 ‘하나님의 방백’,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더 정확히 보자면 ‘하나님과 씨름하는 자’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인간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길 수 없다. 단지 하나님께서 야곱을 인정해주셨음을 확인시키는 차원일 뿐이다. 생명이 위협받는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매달려 씨름하면서 은혜를 간구한 야곱은 하나님으로 부터 복을 받고, 그 인생이 달라지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났다. 과거 죄인이었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의인으로 변화되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람, 그리스도인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다.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러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우리의 아이덴티티를 확고히 하자. 1월 28일 야곱의 귀향길 3 (창세기 35:1-7) 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2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 6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7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벧엘로 올라가자 하나님의 은혜로 에서와 극적인 만남과 화해를 이룬 야곱은 가족들과 함께 세겜 성읍에 정착하여 살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 여인들을 보러 나갔다가 하몰의 아들이자, 그 땅의 추장인 세겜에게 부끄러운 일을 당하였고, 이에 분노한 야곱의 아들들은 계략을 써서 그 성에 사는 모든 남자들을 죽이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고통과 곤경에 빠진 야곱을 하나님이 다시 찾아오셔서 벧엘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야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였고, 오래 전 야곱이 고향집을 떠나 도피할 때 하나님께 한 약속을 상기시키셨다. 에서를 피해 달아나던 야곱은 고향에 무사히 돌아오게 되면 벧엘에 하나님의 전을 짓겠다고 약속하였으나 이를 지키지 않았다. 벧엘로 떠나기 전 야곱은 먼저 가족들과 함께 한 모든 이들이 소유한 이방신상을 제거하게 했고, 둘째, 몸과 마음을 정결케 하며, 셋째, 의복을 바꾸어 입게 하였다. 야곱이 행한 일을 통해 그의 가족과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에서 멀어져 이방문화에 물들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이들은 세겜에서 안정되고 부유하게 살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믿음과 예배를 잃어버렸다. 하나님과 멀어진 삶은 드러나는 모습이 화려하고 성공적으로 보일지라도 영적으로는 메마르고 황폐할 수밖에 없다. 우리도 자신의 영혼을 살펴보며 벧엘로 올라가자.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예배를 회복하는 은혜의 자리 벧엘로 올라가자! 1월 29일 요셉의 고난 (창세기 39:1-6) 1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사니라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4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5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6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 딸 디나 사건으로 인해 세겜을 떠나 벧엘로 간 야곱은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그곳을 엘벧엘(벧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그곳에서 오랜 세월 야곱과 동행했던 어머니 리브가의 유모가 죽었다. 야곱은 벧엘 상수리나무 아래에 유모를 장사하고 얼마나 슬피 울었는지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 즉 통곡의 상수리라고 불렀다. 이후 야곱이 아들 요셉을 편애하면서 가정 안에 또 다른 불행이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편애를 시기한 형제들이 요셉을 미디안 상인에게 팔고, 짐승에 물려 죽었다고 말하며 아버지를 속였다. 어머니처럼 의지하고 사랑하던 유모의 죽음과 아내 라헬의 죽음에 이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게 된 야곱의 슬픔과 고통이 얼마나 크고 괴로웠을지 짐작해 볼 수 있다. 미디안 상인에게 팔려 간 요셉은 애굽의 바로왕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살았다. 아버지의 각별한 사랑 가운데 채색옷을 입고 살다가 노예가 된 요셉, 그리고 그가 짐승에 찢겨 죽은 줄 알고 있는 야곱은 인생의 이러한 쓰라린 고통들이 왜 일어났는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지 못했으나 하나님은 이러한 일들을 통해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가고 계셨다. 비록 노예로 살아가는 괴로운 환경 속에 있었지만 요셉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잃지 않았고,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셔서 그의 범사를 형통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 요셉으로 인하여 이방인 보디발의 집도 복을 받았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우리로 인하여 우리의 주변에까지 하나님의 복이 미치는 것을 요셉의 삶을 통해 알게 된다. 1월 30일 종에서 총리로 (창세기 41:46-52) 46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 47 일곱 해 풍년에 토지 소출이 심히 많은지라 48 요셉이 애굽 땅에 있는 그 칠 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되 각 성읍 주위의 밭의 곡물을 그 성읍 중에 쌓아 두매 49 쌓아 둔 곡식이 바다 모래같이 심히 많아 세기를 그쳤으니 그 수가 한이 없음이었더라 50 흉년이 들기 전에 요셉에게 두 아들이 나되 곧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서 낳은 지라 51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52 차자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요셉의 고백 17세의 어린 나이에 종으로 팔려간 요셉은 13년간의 긴 세월이 지내며 우여곡절을 겪은 후 마침내 삼십 세에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총리의 직분을 맡게 되었다. 13년의 세월 동안 요셉이 하나님의 손에 훈련받았다. 채색옷 대신 종의 옷을 입고 이유를 모르는 고난 가운데 일하며 봉사와 섬김의 훈련을 받았다. 불경건한 애굽의 문화 속에서 수려한 용모 때문에 오는 유혹을 뿌리치는 절제의 훈련을 받았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으나 자신을 변호하지 않고 2년 이상의 감옥생활을 견뎌내는 인내의 훈련도 받았다. 이런 훈련을 통해 신실하고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어진 요셉은 마침내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을 위해 높은 직위에 서게 되었다. 요셉이 총리가 된 후에도 이방종교에 동화되지 않고 여호와 신앙으로 구별된 삶을 살았음을 그의 두 아들의 히브리식 이름과 이름의 뜻을 통해 알 수 있다. 자신의 인생여정을 돌이켜보면서 과거의 모든 고통을 잊게 해주신 하나님의 풍성한 위로에 감사하며 찬양하는 마음으로 두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잊어버림)와 에브라임(창성함)으로 지었다. 두 아들의 이름은 요셉의 간증이며 고백인 것이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외형적 성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난의 긴 시간동안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을 지켰다는 것, 주어진 환경 속에서 성실하게 자신의 직분을 감당했다는 것, 하나님이 주시는 훈련의 시간을 잘 통과하고 마침내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 쓰임 받았다는 사실이 오늘 우리들에게 큰 교훈이 된다. 1월 31일 요셉의 죽음과 유언 (창세기 50:22-26) 22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 23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24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26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그리스도인의 본향 자신이 꾼 두 번의 꿈으로 인해 형제들의 미움을 사게 되어 노예로 팔려가고, 감옥에 갇혔다가 바로의 꿈을 해석함으로 인해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은 자신의 가족과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함으로써 마침내 하나님이 주신 꿈을 이루고 110세의 나이에 하나님 나라로 돌아갔다. 요셉은 임종 시 하나님께서 언젠가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것이니 그때 자신의 유해를 가나안 땅으로 이장시켜줄 것을 믿음으로 부탁하며 유언하였다. 그는 애굽에서 부귀와 권세를 누렸으나 그곳은 자신의 본향이 아님을 알고 있었고, 자신이 있어야할 곳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이 사는 곳, 곧 가나안 땅임을 기억하고 있었다. 요셉의 삶은 애굽으로 상징되는 세속 세상은 우리의 진정한 거처가 되지 못함을 기억시키고 가나안으로 상징되는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것을 소망해야 함을 가르쳐준다. 일생 동안 신앙에 근거한 성실한 자세로 살아감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구원의 사명을 감당한 요셉은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며,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딤후4:7)고 고백하는 바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창세기는 1장 빛과 생명의 탄생에서 시작하여 50장 요셉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하나님은 생명을 창조하셨으나 죄로 얼룩진 이 세상에서의 삶은 죽음으로 끝나고,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그러나 천국의 소망이 있음을 깨우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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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림교회
2019년 3월 25일
In 365일 말씀묵상
2월 1일 생육하고 번성하는 이스라엘 백성 (출애굽기 1:1-11) 1 야곱과 함께 각기 자기 가족을 데리고 애굽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2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3 잇사갈과 스불론과 베냐민과 4 단과 납달리와 갓과 아셀이요 5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이 모두 칠십이요 요셉은 애굽에 있었더라 6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의 사람은 다 죽었고 7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9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10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 11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출애굽기를 시작하며 야곱과 그의 직계가족 70명은 기근을 피해 요셉이 총리로 있는 애굽으로 이주하였다. 애굽에서 약 400년의 긴 세월을 지내는 동안 야곱의 가족은 장정만 60만 명이나 되는 큰 민족을 이루게 되었다. 400년간의 애굽 체류기간은 창세기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족장 중심의 구속사가 언약 민족 중심의 구속사로 확대되기 위한 준비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후손을 위한 신앙 간증을 목적으로 기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그 옛날 아브라함 때부터 자신들의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대로 비록 400년의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잊지 않고 자신들을 구원해주셨음을, 그리고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언약을 맺어주셨음을 간증한다. 나아가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언약의 상속자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교훈한다. 출애굽기는 하나님이 인간과 계약을 맺으시고 그것을 지키시는 분이시며, 역사의 주인이시며, 자신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택한 백성들도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한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며 영광받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출애굽기 말씀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해내심과 같이 우리를 택하시고 죄에서 건져내시며, 광야 같은 우리의 인생길에 동행하시면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거룩한 삶을 살도록 훈련시키시고 마침내 영원한 하늘나라에까지 들어가게 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되새겨보자. 2월 2일 모세의 출생과 성장 (출애굽기 2:1-10) 1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어 2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3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가 갈대 사이에 두고 4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5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6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7 그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러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8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9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 10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물에서 건짐을 받은 아기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이루시고 온 인류를 향한 구원계획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야곱의 직계가족을 애굽으로 이주시키셨고, 그곳에서 큰 민 족으로 번성하게 하셨다. 애굽 내에서 이스라엘의 인구가 늘어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바로왕은 이스라엘을 탄압하였고, 탄압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난이 극심해갈 때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이루어갈 한 아기를 태어나게 하셨다. 그 아기가 바로 모세이다. 바로왕은 이스라엘 여인들의 출산을 돕는 산파들에게 남자 아기가 태어나면 죽이라는 끔직한 명령을 내렸으나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왕의 명령을 어기고 아기들을 살려주었다. 모세의 부모 아므람과 요게벳은 태어난 아기를 3개월 동안 몰래 키우다가 더 이상 아기를 숨길 수 없게 되어 아기를 갈대상자에 넣어 나일 강에 띄워 보냈다. 마침 나일 강에 목욕하러 나왔던 바로왕의 딸이 갈대상자 안에 있는 아기를 발견하여 자신의 아기로 키우는 극적인 이야기가 출애굽기 2장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 바로왕은 아기를 죽이라고 명령하고, 그의 딸인 애굽의 공주는 아버지의 명령 때문에 강물에 떠내려가는 아기를 불쌍히 여겨 자기의 아들로 삼고 양육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어떠한 행동으로도 거역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물에서 건짐을 받은 이 아기를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애굽에서, 죄악 세상에서 건져내는 일을 시작하셨다. 2월 3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출애굽기 3:1-5) 1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때에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우리의 삶의 자리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해 물에서 건짐을 받고 애굽 공주의 아들로 성장한 모세는 어느 날 자기 동족들에게 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애굽 사람이 자기 동족 한 명을 때리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그 애굽 사람을 죽이고 모래 속에 파묻었는데 그 일이 바로 왕에게 알려져 미디안 땅으로 도망하는 처지가 되었다. 애굽의 왕자로 살다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 떼를 치는 목동으로 살아가는 모세에게 어느 날 하나님이 찾아오셨다. 40년간의 왕궁에서의 생활, 40년간의 광야에서의 생활을 통해 모세를 훈련시키신 하나님이 이제 모세를 하나님의 종으로 세우시고자 부르셨다.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께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하자 하나님은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명령하셨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 신발 또는 발은 인간 삶의 전체적 영역, 곧 내적 품성과 외적 행동의 총체를 상징했다. 더욱이 먼지가 많은 근동지방에서는 신발이 먼지나 오물로 인해 쉽게 더러워진다. 신을 벗으라는 것은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 자신의 온갖 불의한 행위와 죄로 오염된 성품을 버려야 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거룩한 곳이다. 나아가 무엇이든 하나님과 관계될 때 그것은 거룩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자리에 함께 계실 때 우리가 살아가는 자리는 거룩한 곳이 된다. 모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성으로 더러워진 우리의 자아를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으로 입혀지기를 간구하자. 2월 4일 보고 듣고 알고 내려가서 인도하여 (출애굽기 3:7-12) 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9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인간의 고통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의 고통과 간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삶의 현장 깊숙한 곳까지 관심과 사랑으로 세밀하게 지켜보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겪는 고통을 지켜보아 알고 계셨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으며 이제 직접 이스라엘에게로 내려가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옛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실 것을 모세에게 알려주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 가시는 목적은 분명하다. 첫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시는 것이고, 둘째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 애굽으로 상징되는 세속적이고 불신앙적인 세상에서 이끌어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상징되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살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시고, 우리의 간구를 듣고 계신다. 우리에게 다가 오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의 길을 인도하여 마침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하신다. 이 사실로 인하여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삶이 고단할지라도 위로와 소망을 가지게 된다. 모든 것을 아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임을 깨닫고 매일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로 살아가자. 2월 5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라 1 (출애굽기 12:1-11) 1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2 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3 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어린 양을 취할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4 그 어린 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사람 수를 따라서 하나를 취하면 각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분량에 따라서 너희 어린 양을 계산할 것이며 5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6 이 달 열 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7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8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 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유월절 어린양 애굽의 바로왕은 이스라엘 백성을 내어보내라는 모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완강하게 버티다가 이미 아홉 가지 재앙을 겪었다. 이제 하나님은 애굽에 보내실 마지막 재앙을 앞두고 모세와 아론에게 그들이 해야 할 일을 가르쳐주셨다. 먼저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구원해내시는 이 때를 한 해의 첫 달이 되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400년 간 애굽의 이방문화 가운데서 종으로 살던 이스라엘이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되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다. 그 달 10일에 각 가족의 숫자에 맞게 흠 없고 일 년 된 어린 양이나 염소를 택하여 14일까지 잘 살펴본 후 14일 해가 질 때에 그 짐승을 잡아서 그 피를 집의 출입문 좌우에 바르라고 명령하셨다. 고기는 구워서 가족이 함께 먹되 쓴 나물과 반죽을 발효시키지 않고 구운 딱딱한 빵과 함께 먹되 급히 떠날 채비를 하고 먹으라고 지시하시며 이것을 여호와의 유월절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는 예식을 가르쳐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실 구원에 앞서 그들이 오랜 세월 애굽에서 행하지 못했던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곧 예배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흠이 없는 어린 양을 택했음에도 혹시 발견하지 못한 흠이 있는지 4일 간 더 살펴본 후 잡는 것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이 흠이 없어야 함은 물론이고, 어린 양이 바로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피를 흘려 유월절 어린 양이 되셨다. 2월 6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라 2 (출애굽기 12:11-15) 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12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14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 15 너희는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라 새로운 출발 하나님은 애굽에 내릴 열 번째 재앙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을 지킬 것을 알려주셨다. ‘유월’은 ‘넘어가다’(pass over), 혹은 ‘지나가다’는 뜻으로, 하나님이 보내시는 죽음의 사자가 애굽의 장자들을 죽일 때 어린 양의 피를 문기둥에 바른 집은 죽음의 사자가 그냥 지나감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것을 의미한다.(출 12:11) 하나님의 지시가 떨어지면 곧 바로 애굽을 떠나야하기 때문에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순종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하여 항상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복음의 신을 신으며 성령의 검과 믿음의 방패로 무장하라고 교훈한 것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의 지시대로 유월절을 지키는 것에서 출애굽은 시작되었다. 추측건대 애굽에 있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에 바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시이지만 순종하여 행한 집은 죽음의 사자가 그냥 넘어갔고, 순종하지 않은 집의 장자는 죽음에 넘겨졌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경험은 종에서 자유자로, 죄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된 우리 모두의 경험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자신의 구원을 위한 것임을 믿고 받아들인 우리는 육신의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출애굽과 같은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2월 7일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출애굽기 14:9-14) 9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 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들이 장막 친 데에 미치니라 10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려 여호와께 부르짖고 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 하나님은 애굽을 빠져나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닷가에 장막을 치라고 하시면서, 바로왕이 마음이 완악해져서 이스라엘을 추격할 것이라고 알려주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앞에는 바다, 뒤에는 바로의 군대에 포위당하는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지만 하나님은 이런 위기의 상황을 통하여 애굽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보이시고자 하셨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아래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듣고, 보고,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위기가 눈앞에 다가오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 두려워서 여호와께 부르짖었고, 차라리 애굽 사람을 섬기며 종으로 사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고 하며 모세를 원망하였다. 모세에 대한 이들의 원망은 모세를 통해 그들을 이끌어 내신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죽는 것보다는 애굽의 종으로 사는 것이 더 낫다는 그들의 불신앙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모세는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어다’라고 외쳤다. 어려운 일, 위태한 일을 당할 때 사람들은 그것의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원망부터 하기 쉽다. 자신들을 둘러싸는 곤경에 처하면 두려움에 떨며 하나님을 원망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행동하기 쉽다. 그러나 이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말고 잠잠히 서서 우리를 위하여 직접 싸우시며, 구원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바라보자! 2월 8일 마라의 쓴 물 (출애굽기 15:22-26) 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 새 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광야를 통해 훈련하시는 하나님 홍해를 건너 광야 길을 가는 백성들, 더욱이 가축들까지 이끌고 대이동을 하는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물이었는데 광야에서 필요한 물을 충분히 얻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사흘 길을 걸은 후에야 겨우 물을 발견했으나 그 물이 써서 마실 수 없자 또 다시 불평이 터져 나왔다. 불평하는 백성들 앞에서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함으로서 모든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을 신뢰할 때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하나님은 모세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쓴 물을 단물로 변화시켜주셨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여정은 끊임없는 훈련의 과정이었고, 하나님은 광야를 훈련장으로 사용하셨다. 광야에서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기도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말씀들을 전해주시고, 이들이 불신앙을 깨닫고 순종할 것을 가르치셨다. 하나님은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를 훈련시키신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기도하는 체질로 우리를 변화시키고자 하신다. 모든 변화와 치료의 주체이신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곤고한 형편에 버려두시지 않고 결국에는 쉼을 누릴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하신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여 우리 인생의 쓴물을 단물로 변화시켜주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살아가자. 2월 9일 만나와 메추라기 (출애굽기 16:1-7) 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2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5 여섯 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는 것의 갑절이 되리라 6 모세와 아론이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요 7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이기에 너희가 우리에게 대하여 원망하느냐 하늘양식 광야 길을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물과 일용할 양식이었다. 이들이 신 광야에 이르렀을 때는 애굽에서 나온 지 한 달이나 지나 식량이 다 떨어진 상태였다. 이들은 배고픔으로 인해 비록 종의 신분이었지만 애굽에서 고기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하나님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나았겠다고 불평하였다. 하나님은 이들의 불평을 들으시고 하늘로부터 매일 만나와 메추라기를 양식으로 내려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하루에 필요한 양식을 매일 주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양식을 거둘 때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기억하게 하셨고, 매일의 양식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이 세상에서의 양식, 물질에 대해 욕심을 가지지 말 것을 가르치셨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살았던 것처럼 쉽지 않은 길이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인생길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으로 불러내신 우리의 필요를 하늘양식으로 채워주시는 것을 경험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쌓아가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다듬어져 간다. ‘만나’는 인류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생명의 떡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 중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었기에 살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는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며 그분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아 영적 생명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2월 10일 내 말을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출애굽기 19:1-6) 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을 떠난 지 삼 개월이 되던 날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2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이스라엘이 거기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3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시되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4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하나님의 목적 애굽에서 떠난 지 3개월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광야에 이르러 거기에 장막을 쳤다. 이곳은 광활한 평지였기 때문에 200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막을 치기에 충분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기억하고 지켜야 할 일들을 알려주시기 위해 모세를 시내 산으로 부르셨다. 모세는 일생 동안 총 여덟 번에 걸쳐 시내 산을 오르내리며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달하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새롭게 언약을 맺고자 하시는데, 언약을 맺기에 앞서 자신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내셨는지 상기시키신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잘 지키면 모든 민족 중에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게 하시고,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시며,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시고,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내신 목적이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지금까지 우리의 인생길에 하나님이 어떻게 보호하시며 이끌어주셨는지 상기해보라고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자녀로 삼아 주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제사장과 같은 자녀로 삼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다. 2월 11일 십계명 1 (출애굽기 20:1-10) 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7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일곱 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사랑의 계명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난 지 3개월이 되었을 때 시내 광야에 이르렀다. 하나님은 모세를 시내 산으로 오르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반드시 지켜야 할 열 가지 계명을 알려주셨다. 십계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그 중 첫 번째 네 계명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고, 나머지 여섯 계명은 가족과 이웃에 대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하나님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있게 하지 말고,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며,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지 말고,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셨다. 이것은 백성들을 강제적인 틀에 묶어 놓아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를 통하여 영적, 육적으로 풍요한 삶을 살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속에 물들지 않고 경건한 생활을 하며, 죄로 인해 생길 수밖에 없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불화를 극복하고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도록 정해주신 계명인 것이다. 예수님은 열 가지 계명 중 어느 것이 가장 크냐고 시험하여 묻는 율법학자에게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 이 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대답하셨다.(마22:37-40) 십계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두 가지 가장 큰 계명,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사랑의 법으로 발전, 승화되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는 십계명의 기본 정신은 사랑이다. 오늘도 우리가 이 사랑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하자. 2월 12일 십계명 2 (출애굽기 20:12-17) 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13 살인하지 말라 14 간음하지 말라 15 도둑질하지 말라 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가져야할 신앙적 자세를 네 가지로 규정한 하나님은 다섯 번째 계명으로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땅에서 부모는 자녀에게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며, 하나님의 복을 자녀에게 전달하는 복의 통로가 되다. 부모 공경을 강조하신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면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생명이 길어질 것이라고 복을 약속하셨다. 사도 바울도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십계명을 인용하여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을 교훈하였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과 훈계로 양육하고,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며 권위와 말씀에 순종하는 가정의 질서는 건강하고 안정된 사회의 근간이 되며, 가정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을 배운 자녀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게 된다. 십계명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원하시는 것은 사랑과 순종이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말씀을 통하여 계시해주신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원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육신의 부모를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을 또한 기뻐하신다. 십계명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깊이 새기며 실천하자! 2월 13일 내가 거할 성소를 지으라 (출애굽기 25:1-9)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가 내게 바치는 모든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3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4 청색 자색 실과 가는 베 실과 염소 털과 5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6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료와 분향할 향을 만들 향품과 7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8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9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집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두 가지를 계시하셨다. 하나는 율법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거처를 건축하라는 ‘성막’에 대한 말씀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알려주신 것이고, 성막은 하나님께 드릴 예배를 위한 것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할 때 그것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 그분을 예배하는 일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이끌어내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생활훈련을 시키셨고, 시내산에서 말씀을 주시며 말씀훈련을 시키셨으며, 성막을 지을 것을 지시하시며 예배훈련을 시키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그냥 나오지 않게 하시고 애굽 사람들로부터 은금 패물과 의복, 그 외에 많은 귀한 물품을 취하게 하셨다.(출12:34) 광야에서 성막을 지을 수 있도록 필요한 물품들을 미리 예비해주신 것이다.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거할 성소를 지으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은 이제 우리를 하나님이 거주하실 성전으로 불러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을 기대하신다.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집으로 삼기를 원하신다. ‘너는 내가 거할 집이요, 나의 거룩한 성전이다’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오늘도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자신의 가치를 자각하며 살아가자. 2월 14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출애굽기 25:16-22) 16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지며 17 순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 길이는 두 규빗 반, 너비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18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19 한 그룹은 이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결할지며 20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21 속죄소를 궤 위에 덮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전이 되자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동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운반하기 쉽게 천막과 같은 모양으로 성소를 만들게 하셨고, 성소의 세세한 부분과 그 안에 둘 성물들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자세히 알려주셨다. 성소 안의 가장 거룩한 곳인 지성소에는 속죄소라고 불리는 가장 거룩한 자리를 만들고, 그 아래는 상자모양으로 만들어 상자 안에 하나님이 주실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판을 넣어 보관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거할 성소를 지으라고 하신 목적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한 장소를 거룩하게 구별하셔서 자신의 백성을 만나고자 하셨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기 위해 만날 장소를 만들라고 하시고, 그곳으로 찾아오시겠다고 한 것은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 놀라운 은혜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만나기 위해 부르시고, 우리는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예배로 하나님께 나아간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실 뿐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집, 성전으로 삼으시고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자 하신다. 우리의 인생 속에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여러 가지 조건들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전의 구조를 가진 인생으로 자신의 삶을 경영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은혜를 허락해주셨으므로 자신의 삶을 어떻게 경영해나갈 것인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신앙적 결단에 달려있다. 2월 15일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출애굽기 29:43-46) 43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으로 말미암아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 44 내가 그 회막과 제단을 거룩하게 하며 아론과 그의 아들들도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며 45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46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나아가자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생활하던 40년 동안 매일 성막으로 부르심을 받으며 예배훈련을 받았다. 광야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가장 중심 위치에 성막이 있었고, 그들은 매일 성막을 바라보며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였다. 그들이 이동할 때는 성막의 중심인 언약궤가 제일 먼저 움직이며 그들이 가야할 길을 이끌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성막을 짓게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매일 하나님 앞에 나아가, 즉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나아가 하나님의 영을 공급받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나아가 그들의 광야길, 인생길을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예배는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 최고의 사랑을 드리는 일이다. 자신의 주권을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자신의 삶의 최우선의 목적을 하나님께 드리는 결단이다. 예배는 우리 인생의 광야훈련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매일 성막으로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인격, 하나님의 사상, 하나님의 철학으로 덧입고 나와 그 능력과 그 영광으로 살아가야 한다. 매일의 삶을 하나님의 영을 공급받는 것으로 시작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놀라운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인가? 그러므로 매일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자. 우리의 삶의 중심에 계시고, 우리의 인생길을 이끌어주시는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해 예배의 자리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나아가자! 2월 16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출애굽기 32:30-35) 30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를 위하여 속죄가 될까 하노라 하고 31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3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책에서 그를 지워버리리라 34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35 여호와께서 백성을 치시니 이는 그들이 아론이 만든 바 그 송아지를 만들었음이더라 모세의 중보기도 하나님은 시내산으로 모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열 가지 계명을 두 돌판에 직접 기록하셔서 모세에게 주셨다. 산 아래에 있던 백성들은 모세가 산에 올라간 지 40일이 되도록 내려오지 않자 기다리지 못하고 모세의 형인 아론을 재촉하여 자신들을 인도할 신으로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었다. 모세가 시내산 아래 백성에게 돌아와 그들이 행한 일을 보고 분노하여 아론을 책망하며, 우상을 섬긴 이들을 다 처벌하였다. 모세는 이렇게 쉽게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 금신상을 만들고 그것에 절하며 섬긴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해내고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모세의 중보기도를 받아들이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백성을 인도하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사자를 모세와 백성들 앞에 보내서 그들을 인도해주실 것을 확인시켜 주셨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재하며 기도하는 모세의 모습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갚아주시고 중보기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열심히 일하시는데 우리는 종종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쉽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어리석게 행동한다. 기도의 응답이 더딜 때에, 원하는 일이 쉽게 풀리지 않을 때에 우리는 인내하며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적인 방법을 찾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이러한 우리를 위해 오늘도 하나님의 사자를 우리 앞에 보내주신다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인생길을 완전하게 계획하고 이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자. 2월 17일 성막에 임재한 하나님의 영광 (출애굽기 40:34-38) 34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35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36 구름이 성막 위에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37 구름이 떠오르지 아니할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38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하나님의 구원 경영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고난 가운데 있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모세를 준비하시고 모세를 통하여 이 민족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도록 계획하셨다. 유월절 속죄양을 통해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시고, 애굽을 떠나 긴 신앙여행을 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애굽을 빠져나온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 앞에 세우셨는데, 홍해를 건넘으로 세례를 받게 하려는 의도였다. 바로왕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애굽의 우상숭배문화 중심에서 하나님의 법도 중심으로, 자신의 욕망 중심에서 하나님의 질서 중심으로 삶을 전환하겠다는 결단이 세례이며, 그 일을 반복하여 훈련하는 현장이 광야였다. 하나님은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을 시내 산으로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율법과 성막을 통해 자신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셨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은 애굽의 정신에 익숙해져 있는 이스라엘에게 자신의 깊은 생각과 철학을 가르치셨다. 광야에서 성막을 짓게 하신 하나님은 백성들을 매일 성막으로 초대하여 하나님과 교통하게 하셨다. 우리가 예배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마다 우리의 죄가 씻어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를 원하며, 땅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으로 채우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영과 교통하게 된다. 출애굽기는 하나님의 구원경영을 보여준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화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경영 안에 우리가 있음을 감사하자! 2월 18일 잠언의 목적 (잠언 1:1-6) 1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2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3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직하게 행 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4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5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 6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 지혜로운 인생 잠언의 사전적 의미는 ‘훈계’, 혹은 ‘경계가 되는 짧은 말’로 올바른 삶에 대한 지혜가 담긴 교훈을 말한다. 잠언의 대부분은 솔로몬이 기록하였으므로 히브리어성경과 헬라어성경에서는 ‘솔로몬의 잠언’으로 칭한다. 솔로몬은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갈 것을 권면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한 신앙적 굴곡과 훈련, 경험을 통해 얻은 지혜를 바탕으로 잠언을 기록하였다. 구약성경 중 욥기와 잠언, 전도서는 지혜문학서이다. 이 성경들은 ‘인생은 무엇이며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이 세상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인생의 실존적 물음들에 대해 가장 포괄적이고 직접적인 답을 제시해준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주셨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 매일 매일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경을 깨닫도록 도와주시며, 말씀대로 행할 수 있게 하시며,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대로 우리의 삶이 더욱 온전해지도록 도우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하루를 살아가며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듯이 성경이 알려주는 지혜의 말씀들 앞에서 자신의 삶을 비춰보며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는 진실로 지혜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는가? 지혜로운 삶을 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고 있는가?’ 2월 19일 지혜가 주는 유익 (잠언 2:1-8) 1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2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3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4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5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6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7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8 대저 그는 정의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 지혜를 구하는 하나님의 자녀 잠언기자는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얻기 위해 가져야 할 태도를 가르쳐준다. 받는다, 간직한다, 귀를 기울인다. 마음에 둔다는 등의 여러 표현을 통해 간절한 마음으로 지혜를 구하여야 함을 알려준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7절에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 깊게 귀 기울여야 하고, 말씀을 실생활에 적용하는 법을 배워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기 위해서 깊이 생각하며 묵상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훈련을 통하여 비로소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지혜와 명철을 하나님으로부터 얻게 된다. 우리는 물질적인 것들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부’는 인간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그러나 진정한 부요함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온다는 것을 우리는 때로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재물을 얻으려고 열정을 쏟는 것처럼 하나님을 찾기에 힘쓰기를 바라신다. 마치 은을 구하는 것같이,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같이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기를 바라신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지혜를 힘입어 살아가기를 소망하며, 꾸짖지 않으시고 후히 주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마음을 열어놓자. 2월 20일 하나님의 법과 명령 (잠언 3:1-10) 1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2 그리하면 그것이 네가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3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게 하지 말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4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7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8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 9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10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 성경에는 ‘하라, 하여야한다’라는 말씀 보다는 ‘하지 말라, 하지 말아야한다’는 말씀이 훨씬 더 많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제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나타내는 방법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제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 깊은 곳까지 알고 계시며,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를 나누어 주고자 하신다. 인간이 지혜의 근본이 되시는 하나님과 수직적인 관계를 바르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예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들은 것을 생활 속에서 순종함으로 실천하는 것이 지혜의 출발이며, 말씀대로 행하는 자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게 된다면 훨씬 더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잠언서 기자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얻게 되는 결과를 알려주고 있다. 이 세상에서 장수하며 평강을 누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게 되며, 삶의 길을 지도받게 되고, 몸과 마음의 건강과 함께 물질적인 복도 풍성하게 받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삶의 기준을 어디에 맞추고 살아갈 것인지 생각해보자. 나의 힘과 재능, 나의 지식을 의지하여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법과 명령을 따르는 가운데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을 누리며 살아갈 것인지 결정하자. 2월 21일 게으름에 대한 경계 (잠언 6:6-11) 6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7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8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9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누워 있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10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면 11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자 개미는 지극히 작고 연약하여 힘이 없지만 겨울을 내다보고 미리 양식을 준비하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 벌과 같이 군집생활을 하지만 벌의 무리처럼 계급과 서열로 나누어지지 않고 각기 자신이 맡은 일을 이행한다. 잠언기자는 개미를 예로 들면서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여 미래를 대비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경고하고, 성실하게 부지런히 일함으로써 미래를 준비해야 함을 권면한다. 또한 마지못해 수동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감당해야 함을 개미를 통해 배우라고 한다. 현대인들은 생활 자체가 너무 바빠서 게으를 여가도 없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게으름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자신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정립하지 못하면 삶이 무기력해지고, 나태해진다.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하며 신앙으로 무장하기를 미룬다. 겉으로는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 같으나 실상은 영적 고갈로 인해 메마르고 공허하다. 영적인 게으름에서 벗어나 부지런해져야 할 동기부여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우리를 사랑하는 자녀로 삼아주신 하나님은 우리가 잠에서 깨어 맑은 정신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영적으로 게을러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면 그것은 바로 사탄과 가까워지는 것임을 기억하고 깨어있기를 힘쓰자. 2월 22일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 (잠언 8:22-31) 22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23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24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25 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26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27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28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29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31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헬라어로 시간의 개념은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크로노스’의 시간으로 시간의 연속적인 흐름을 뜻한다. 연대기적인 시간을 말하는 크로노스의 시간은 시계가 똑딱똑딱하는 사이에 흘러가고,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역사가 된다. 또 다른 시간의 의미는 ‘카이로스’이다. 카이로스는 기회, 순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카이로스는 놓치면 다시 붙잡을 수 없는 기회의 시간을 말한다. 이것은 크로노스와 달리 어떤 사건, 기회 혹은 위기로 이해되는 의미의 시간이다. 어떤 의미이든 시간은 참 소중한 것이다. ‘시간은 금이다’라는 격언이 있지만 시간은 물질의 가치로 환산하거나 비교할 수 없다. 시간은 저축할 수 없고, 복구할 수도 없으며,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잠언기자는 말하는 지혜는 근원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일 뿐 아니라 나아가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의 지혜가 이 세상에 오셔서 스스로를 십자가에서 희생시킴으로써 참 생명을 온 인류에게 가져다주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사실로 귀결된다. 우리는 이 세상의 인생길에서 크로노스적 시간을 살아간다. 우리의 크로노스의 시간이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특별한 사건의 시간, 카이로스의 시간이 되도록, 크로노스의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오늘도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자. 2월 23일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 (잠언 10:8-14) 8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계명을 받거니와 입이 미련한 자는 멸망하리라 9 바른 길로 행하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려니와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드러나리라 10 눈짓하는 자는 근심을 끼치고 입이 미련한 자는 멸망하느니라 11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13 명철한 자의 입술에는 지혜가 있어도 지혜 없는 자의 등을 위하여는 채찍이 있느니라 14 지혜로운 자는 지식을 간직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입은 멸망에 가까우니라 행복을 만드는 말의 능력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병원에 ‘신의 손’이라는 별명을 가진 소아신경과 의사 벤 카슨 박사가 있었다. 그는 다른 의사들이 포기한 환자들까지도 수술해서 완치시키는 의술을 가졌고, 1987년에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머리와 몸이 붙은 샴쌍둥이를 분리하는 수술을 성공시켰다. 벤 카슨은 어두운 성장기를 보냈다. 그가 어렸을 때 그를 보고 세계적인 의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빈민가에서 태어났고, 어렸을 때 부모가 이혼하여 편모 슬하에서 자랐고,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으며, 불량한 학교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항상 아들을 격려하고 칭찬하였다. “벤, 너는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 너는 잘될거야.” 어머니의 격려와 용기를 주는 말들은 아들로 하여금 ‘신의 손’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능한 의사가 되게 하는 밑받침이 되었다. 사람의 말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다. 말 속에는 하나님이 주신 권세가 들어 있다. 잠언기자는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나니 곧 그의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잠18:20-21)고 말씀한다. 오늘 하루를 지내며 나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행여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닌지 주의하자. 주님의 사랑이 내 안에 가득하고, 그것이 말로 표현되어 나와서 내 입의 말들이 다른 이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며 행복하게 할 뿐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능력이 되기를 간구하자. 2월 24일 지혜 있는 자의 혀 (잠언 15:1-7) 1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2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 3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4 온순한 혀는 곧 생명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5 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요 경계를 받는 자는 슬기를 얻을 자니라 6 의인의 집에는 많은 보물이 있어도 악인의 소득은 고통이 되느니라 7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지식을 전파하여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정함이 없느니라 입술의 열매 우리는 날마다 많은 사람을 만나서 많은 말을 하며 살아간다. 잠언기자는 입술의 열매에 대하여 두 가지 교훈을 주고 있다. 첫째,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1:20)’는 말씀처럼 분노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분노를 다스리고 사랑과 화해로 문제를 해결해나가기를 원하신다. 둘째, ‘온순한 혀는 곧 생명나무’와 같다는 것이다. 온순한 혀는 ‘부드러운 말’, ‘따뜻한 말’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였고, 영어성경에는 ‘치료를 가져오는(brings healing)’으로 기록되어 있다. 상처받은 마음을 온순한 혀로 어루만져 주고, 치료해주는 입술의 말은 생명을 살리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 링컨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새어머니를 맞았다. 하루는 새어머니가 링컨에게 물었다. “네 이름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같은데 ,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니?” 링컨은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듣긴 했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새어머니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이제 아브라함이 얼마나 귀한 이름인지 알겠니?”라고 말했다. 어머니를 잃은 상처를 안고 살던 링컨은 그 말을 들은 뒤로 마음속에 자부심이 생겼고, 자신의 이름처럼 살겠다고 다짐하여 결국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이 되었다. 새어머니의 온순한 혀가 그의 상처를 치유하고 귀한 열매를 맺게 한 것이었다. 나의 입술은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지,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지, 아니면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면서 오늘 하루도 유순한 대답과 온순한 혀로 아름다운 입술의 열매를 맺고자 힘쓰며 살아가자. 2월 25일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잠언 16:1-5) 1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5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주권 잠언 16장부터 22장까지는 총 375개의 여러 주제들을 담고 있는 짧은 금언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금언들은 의인과 악인의 생활태도를 대칭적으로 비교하고 있어 지혜로운 자들로 하여금 악한 행위를 버리고 의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권면한다. 그중 가장 중요한 주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의뢰하는 것이 믿음의 사람이 가져야할 지혜로운 삶의 자세라는 것이다. 사람이 어떤 일을 계획하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추진해가지만 그러한 계획의 성패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릇되게 행한 일까지도 합리화시키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외적 행동과 일의 결과 뿐 아니라 내면의 동기와 목적, 방법까지도 완벽하게 보고 알고 계시며 정확하게 판단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해야 할 것은 모든 일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맡긴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굴려보낸다’는 의미이고, 라틴어성경에는 ‘보인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마치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자신의 생각을 내보이고 도움을 요청하듯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이다. 잠언기자는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고 말한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우리도 잠언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계획과 행함을 이끌어주셔서 선한 결과를 이룰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하자. 2월 26일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신다 (잠언 17:1-7) 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2 슬기로운 종은 부끄러운 짓을 하는 주인의 아들을 다스리겠고 또 형제들 중에서 유업을 나누어 얻으리라 3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4 악을 행하는 자는 사악한 입술이 하는 말을 잘 듣고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악한 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느니라 5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 6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 7 지나친 말을 하는 것도 미련한 자에게 합당하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거짓말을 하는 것이 존귀한 자에게 합당하겠느냐 화평을 만들어 가는 사람 제2차 세계대전 때 네델란드인 코리 가족은 유태인들을 숨겨주었다가 악명 높은 라벤스부르크 수용소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가족들은 고문을 당하며 죽어갔고, 코리 혼자 살아남았다. 그 후 날마다 독일을 저주하며 살던 그녀에게 주님이 명령하셨다. ‘독일인을 사랑하라. 가서 용서의 복음을 선포하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코리는 어느 날 집회를 마친 후 그녀에게 인사하려고 다가오는 한 사람을 보고 충격에 쓰러질 뻔하였다. 그 남자는 바로 아버지와 언니를 잔인하게 고문하여 죽게 한 수용소 간수였다. 하나님은 코리에게 ‘그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셨고, 코리는 ‘아니요, 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하나님은 다시 ‘나는 너에게 용서할 마음이 있는지 묻는 것이 아니다. 그를 용서하라고 명령하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결국 코리는 그를 포옹하고 속삭였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 실화의 주인공인 코리 덴 붐 여사는 후에 이렇게 고백하였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용서하는 능력과 함께 깊은 평화,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신다. 잠언 말씀은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화평 이 먼저 가정에서 시작됨을 알려준다. 가정의 화평은 세상에서 아름다운 인간관계로 발전한다. 예수님은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라고 말씀하신다. 오늘 하루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화평을 만들어 가는 자‘로 살아가자. 화평하게 하는 자가 진정 하나님의 자녀이고, 가장 지혜롭게 세상을 사는 사람이다. 2월 27일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오랠 때 (민수기 9:15-22) 15 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이 성막 곧 증거의 성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 위에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이르렀으되 16 항상 그러하여 낮에는 구름이 그것을 덮었고 밤이면 불 모양이 있었는데 17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행진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 18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쳤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들이 진영에 머물렀고 19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오랠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행진하지 아니하였으며 20 혹시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적을 때에도 그들이 다만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영에 머물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으며 ... 22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진영에 머물고 행진하지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행진하였으니 기다리게 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을 갈 때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며 낮이나 밤이나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않으셨다(출13:22). 애굽에서 나온 둘째 해 첫째 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성막을 완성하여 세웠을 때 성막 위에 구름이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였다. 하나님은 광야 길을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동하지 말고, 구름이 떠오를 때에는 이동하라고 명령하셨다.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는 날이 오랠 때 이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신앙의 연단을 받았다. 뜨거운 대낮의 태양열과 저녁의 추위, 광야의 척박함 등 끊임없이 괴롭히는 환경 속에서 언제 떠나야하는지 모른 채 머물러 있는 것은 광야를 이동해 가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지겨운 일이었을 것이다. 날마다 성막을 바라보며 성막 위에 머무른 구름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을 상상해보자. 답답하고 힘들어도 그들은 구름이 움직일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고, 이것을 통해 그들의 순종하는 신앙이 훈련되었다. 다윗은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시40:1)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기다리게 하신다. 견딜 수 없는 힘들고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나 응답이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을 앞서 가지 말자. 우리가 기다리고 기다리면 하나님은 계획하신 완전한 시간에 우리를 진행하게 하실 것이다. 2월 28일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시편 37:3-11) 3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 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라 5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6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9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10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11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가 받는 복 시편기자는 우리의 길을 여호와께 맡길 때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라고 가르친다. 주님께 우리의 길을 위탁하는 것은 우리의 재능을 완전하게 사용하는 첫 번째 길이다. 우리가 만일 우리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맡긴다면 우리 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생수의 강 같이 흘러 넘치게 될 것이다.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조지 뮐러목사님은 영국 브리스톨에 고아원을 세우고, 1898년 93세의 일기로 소천하기까지 약 15만 명의 고아들을 기도로 양육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심을 보여주었다.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며 고아원 사역을 할 수 있도록 간구하던 중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 81:10)는 말씀에 힘입어 이 일을 시작하였다. 뮐러목사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며 믿음으로 기도하여 일생에 5만 번 이상의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자신을 의뢰하는 자들을 기꺼이, 넉넉히 도우시는 분이심을 고아원 사역을 통해 증거하였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생명줄'을 놓치는 것이라고 하며 고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매일 기도하였다. 우리의 말의 재능이나 지적인 능력, 가진 물질이 타인에 비해 보잘 것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 나 하나님은 그것이라도 하나님께 맡기기를 원하실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의 의를 빛 같이, 우리의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며, 자신을 의뢰하는 자가 받는 은혜를 우리를 통해 드러내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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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림교회
2019년 3월 25일
In 365일 말씀묵상
3월 1일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 (마가복음 1:1-11)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피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7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0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구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는 BC415년 느헤미야서의 기록으로 끝나고 약 400년이 지난 후 세례 요한이 등장함으로 신약 시대가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임무를 맡기셨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먼저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야 할 것을 전하면서 자신은 백성들에게 물로 회개의 세례를 베풀지만 자신의 뒤에 오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시라고 소개하였다. 연극이나 오페라를 보러 가면 작품이 시작되기 전까지 무대에 막이 내려져 있다. 무대 앞에서 보면 아무 일도 없이 시작을 기다리는 것 같지만 보이지 않는 무대 뒤에서는 연극을 위한 준비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랜 세월 외적으로 침묵하신 하나님은 이 기간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한 준비를 하고 계셨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이루어가게 하셨다. 예수님은 '준비된 세상'에 오셨다. 모세는 40년간의 사역을 위해 80년 동안 준비되었다. 예수님은 3년간의 이 세상에서의 사역을 위해 30년 동안 준비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 위해 4천 년 이상의 시간을 투자하셨다. 하나님의 시간 개념은 인간의 시간 개념과는 다르다. 한정된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렇게 긴 역사의 시간만큼 준비하는데 사용할 수는 물론 없지만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사용하신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시고자 준비시키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시고자 준비시키실 때 하나님의 손길을, 하나님의 이끌어 가심을 민감하게 포착하고 즉각 응답하자. 3월 2일 제자들을 부르심 (마가복음 1:16-22)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21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진정한 제자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아 생활하던 어부들에게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1장에 보면 “곧”이라는 단어가 7번 (18, 20, 21, 28, 30, 42, 43절) 이나 나온다. 마가는 복음서를 매우 간결한 문체로 기록하면서 곧, 즉시라는 단어들을 사용하여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어부들은 자신들의 생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앞날이 어떻게 전개될지, 또한 사람을 낚는 어부가 과연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하였으나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 순종하여 생업의 도구인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바로 응답하여 주님을 따른 이 어부들이 처음부터 큰 믿음을 소유한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의 부르심과 복음을 이해하기 까지는 시간이 걸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예수님을 따랐다. 제자들처럼 우리도 때로 의심하기도 하고 난관에 부딪쳐 쓰러지기도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된다. 의심과 실패, 좌절과 회복의 과정을 거치며 예수님의 다듬어 가시는 손길에 의해 우리의 믿음은 점차 성숙해지고 온전해진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제자의 길로 부르신다.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은 순종으로 드러난다. 순종이 제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재산인 배와 그물을 버리게 하였던 것처럼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진정한 제자라면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말로만 하는 신앙고백이 아니라 순종하는 행동이어야 한다. 또한 주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것은 단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이웃을 지향하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우리를 부르신 분이 원하시는 진정한 제자의 삶의 모습이다. 3월 3일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마가복음 2:1-12) 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네 친구들의 믿음과 행함 가버나움에 중풍병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던 한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예수님이 그 동네에 오셔서 한 집에서 말씀을 전하고 계신 것을 알게 된 그의 친구들은 예수님께 가면 중풍병을 앓는 친구가 고침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병든 친구를 침상에 누인 채 예수님 계신 곳을 찾아갔다. 그곳에는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 도저히 집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다급해진 친구들은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뜯어내고 지붕 밑으로 환자를 달아 내렸다. (팔레스타인의 전통적 가옥은 벽을 돌로 짓고 지붕은 나무들을 평평하게 가로 세로로 얽어 놓고 진흙을 바르고 짚이나 풀을 역어서 그 위에 덮었으므로 비교적 쉽게 뜯어낼 수 있었다.) 그 장면을 상상해보라.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말씀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지붕이 뜯어지고 먼지와 흙덩어리가 떨어지는 가운데 침상에 누운 한 남자가 침상 채로 매달려 내려오는 장면을! 예수님께서는 친구들의 믿음을 특별하게 생각하셨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친구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 친구들로 하여금 행동하게 만들었고, 이들의 믿음의 행동에 예수님은 응답하셨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주실 때 먼저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육신의 질병보다 먼저 해결되어야 할 것이 인간의 죄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모든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께 가는 길이 많은 사람들로 가로막혀 있을 때 포기하고 돌아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중픙병 친구는 평생을 질병의 고통 가운데 살았을 것이며 영혼의 구원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친구들이 포기하지 않고 장애를 극복하고 협동하여 주님 앞에 나아갔기 때문에 병 고침의 은혜와 함께 영혼의 구원도 받게 되었다. 오늘 내 주변에 육신의 문제, 영적인 갈급함으로 나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는 없는지 살펴보자. 그들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구원의 주님 앞으로 데리고 나아가자! 3월 4일 금식논쟁 (마가복음 2:18-22)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부드러운 마음 예수님 당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죄를 슬퍼하는 표시로, 그리고 메시아가 오실 것을 준비하는 표시로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였다.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 왜 금식하지 않느냐고 질문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이미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계셨기 때문에 금식할 필요가 없었다. 질문하던 이들은 예수님이 구세주, 메시아이신 것을 알아보지 못했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습관적으로 금식하며 신앙적 의무를 행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에서는 포도주를 염소가죽으로 만든 부대에 넣어두었다. 새로 만든 포도주는 발효될 때 부풀기 때문에 부풀어 오르는 압력에 자루가 찢어지지 않도록 부드러운 새 부대에 넣어야 했다. 바리새인들의 마음은 마치 낡은 부대처럼 굳고 완고해져서 자신들의 전통이나 규율을 지키도록 가르치지 않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우리의 신앙이 때로 바리새인 같지는 않은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함께 하는 기쁨과 은혜를 누리지 못한 채 형식적인 믿음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의 마음이 딱딱해져서 주님이 인도하시는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변화되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낡고 완고하고 딱딱해진 마음을 버리고 부드러운 새 마음을 가지자. 신랑 되신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신부의 기쁨을 누리며 즐거워하자.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 새로운 영적 차원의 인생을 살게 된 주님의 신부들이다. 옛 것은 지나가고 새롭게 된 사람들이다. 3월 5일 예수님과 사탄 (마가복음 3:20-30) 20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21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23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25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26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 27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29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30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용서받지 못하는 죄 예수님께서 온갖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귀신을 쫓아내는 등 세상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한 능력으로 일하시자 어떤 이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예수님의 일가친척들은 미쳤다고 말하는가 하면 서기관들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게 사로잡힌 결과라고 매도하였다. 성령의 능력에 의한 이적을 사탄의 힘을 이용한 사술이라고 비난하는 서기관들에게 예수님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절대 용서받지 못한다고 엄하게 경고하셨다. 예수님은 인간을 유혹하고 죄에 빠뜨리는 사탄 마귀를 멸하러 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 예수님이 마귀의 힘으로 일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예수님을 가장 모욕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일가친척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하고 단지 자신들의 가족의 일원으로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행동을 불신하고 오해했듯이 인간의 제한된 이성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믿음을 저해하는 큰 요인이 된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 즉 예수님을 모독하는 죄가 물론 다른 죄보다 더 심각해서 용서받지 못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사람은 마음이 너무 완고하게 굳어져서 성령께서 경고하시며 영혼을 자극하시는 것을 무시하고 용서를 구하지 않기 때문에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놓치게 되어 결국 용서받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대해서는 닫혀있고 세상에 대해서만 열려있다면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느낄 수 없어 결국 세상의 풍조대로, 육신의 소욕대로 살게 된다. 오늘 하루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나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온전히 맡겨드리고 그분의 뜻대로 살자. 세상의 풍조와 육신의 소욕대로 살면 반드시 성령을 거스를 수밖에 없으며 결국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게 된다. 3월 6일 예수님의 가족 (마가복음 3:31-35) 31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2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진정한 가족 예수님의 가족들은 아직도 예수님의 사역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계실 때 어머니와 동생들은 말씀을 듣는 자리에 함께 있지 않고 밖에 있었고, 오히려 자신들의 용무를 위해 예수님을 밖으로 불러내고자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신을 둘러싸고 앉아 말씀을 듣는 이들을 향해 그들이 자신의 가족, 곧 어머니요 형제자매라고 하시며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주님의 가족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는 육신의 어머니와 형제자매들도 중요했으나 영적 가족관계는 육신의 가족, 친척들과 오랫동안 쌓아온 관계보다 궁극적으로 더 중요함을 알려주심으로써 장차 주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훈을 주신다. 육신의 출생을 통해 한 가족의 구성원이 되듯이 영적 거듭남을 통해 예수님의 가족이 된다. 이 길은 누구에게든지 항상 열려있고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영적으로 예수님과 한 가족이 된 이들은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하고, 안에 있을 뿐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항상 묵상하며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애쓴다. 육신의 가족이 서로 사랑하고 돌보며 필요를 채워주듯 영적 가족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이름으로 서로 사랑하고 돌보고 배려한다. 우리가 늘 만나며 함께 믿음생활을 하는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나의 진정한 가족이라고 생각하면 그들을 대하는 나의 마음과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세상은 점점 더 메마르고 비인간적으로 변하고 있지만 우리들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얻을 수 없는 기쁨과 사랑, 평안이 가득한 영적 가정,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자! 3월 7일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앗 비유 (마가복음 4:2-9) 2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3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나의 마음 밭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시기 위해 비유로 말씀하셨다. 비유를 사용하는 교육방법은 듣는 이들로 하여금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장점이 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나가서 씨를 뿌렸는데 씨가 여러 종류의 땅에 떨어졌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씨 뿌리는 자는 예수님,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의미하고, 네 종류의 땅은 하나님의 말씀에 상이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의미한다. 길가나 돌밭과 같이 딱딱하게 굳어진 마음에는 말씀이 심어질 수 없고 싹이 나기를 기대할 수도 없다. 세상의 염려와 근심의 가시들이 있는 마음에는 말씀이 들어가도 가시에 막혀서 결실하지 못한다.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기는 이중적 태도로 사는 이들의 마음이 이러하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며 실천하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에 뿌려진 씨는 성장하여 많은 결실을 맺게 된다. 한 사람의 인생 여정 속에서도 어떤 상태, 어떤 시기에 있느냐에 따라 말씀이 마음속에 못 들어오기도 하고, 들어와도 뿌리내리지 못한 채 말라버리기도 하며 혹은 많은 결실을 맺기도 한다. 씨를 뿌리는 이는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고 수고하지만 항상 많은 결실을 얻는 것은 아니다. 복음을 전할 때 눈에 보이는 결실을 거둘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므로 결과에 실망하여 씨뿌리기를 중단하지 말 것을 예수님은 또한 가르쳐주신다. 나의 마음 밭은 지금 어떤 상태인가? 거친 돌밭 같지는 않은지, 세상의 일들로 가시덤불이 가득 자라 있지는 않은지, 말씀의 기쁨을 빼앗아가는 무엇인가 내 안에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자. 내 마음 밭을 갈아엎어 씨를 뿌리고, 타인의 마음 밭에도 부지런히 복음의 씨를 뿌려 풍성한 결실을 추수하는 농부가 누리는 그러한 기쁨을 함께 누리자. 3월 8일 자라나는 씨와 겨자씨 비유 (마가복음 4:26-34) 26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그가 밤낮 자고 깨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30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3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32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33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확장하고 성장하는 하나님의 나라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상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자라나는 씨의 비유는 복음이 갖는 역동성에, 그리고 겨자씨 비유는 복음 확장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결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자라나는 씨의 비유는 우리의 영적 성장이 지속적이고 점진적인 과정임을 알려준다. 사람이 씨를 뿌리면 씨가 터져서 싹이 나고 자라서 이삭이 맺히고 충실한 곡식이 되는 과정은 하나님께서 담당하신다. 씨 뿌리는 이가 수고하여도 하나님께서 자연을 적합하게 관리해주시지 않으면 결실하지 못한다. 말씀의 씨앗을 잘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는 인간이 하지만 성령께서 그 말씀이 영혼 속에 뿌리내리고 자라게 하신다. 인간은 인간의 몫을 이행하고 하나님은 하나님 몫을 행하셔서 수확의 때에 거둘 것이 있게 된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수고할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성장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관적인 사역이며, 그 완성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3:6)라고 고백한다. 겨자씨는 아주 작은 것인데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미하게 시작되어도 자라서 놀랍게 풍성해질 것을 말씀하신다. 예수님도 당시 세상 권세자의 눈에는 마치 겨자씨 같이 하찮게 보였을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심으로써 그 생명이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모든 인생들의 영혼 속에서 풍성하게 살아나게 하셨다. 오늘 하루를 지내며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허물 많은 우리를 동역자로 사용해주시고 함께 결실의 기쁨을 누리게 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하나님 나라를 위한 우리의 수고가 때로 미약하게 보일지라도 결과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 3월 9일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4:35-41) 35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람더러 이르시되 잠잠하고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라 갈릴리 호수는 주변의 산들로부터 예측할 수 없는 광풍이 몰아쳐 호수에 높은 파도가 일 때가 있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가던 중 호수에 큰 광풍으로 인해 파도가 일고 물이 배에 가득차자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들은 예수님이 지금까지 행하신 많은 이적을 보았고, 예수님이 배 안에 함께 계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진정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 결과 문제에 부딪혔을 때 예수님의 권능에 의지하고 담대하게 대처하기 보다는 거센 풍랑으로 인해 죽게 될 위기에 처한 것만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자신들의 노련한 경험으로도 거친 풍랑에 대처하지 못하고 결국 고단하여 배에서 주무시고 계시던 예수님을 깨우며, 예수님이 자신들의 곤경을 돌아보지 않으신다고 원망하는 말투로 도움을 요청했다. 바람을 꾸짖으시며 잠잠하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바람이 그치고 잔잔해지자 광풍으로 두려워했던 제자들은 이번에는 광풍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 두려워하며 과연 이런 일을 행하시는 분이 누구신가하며 놀라워했다. 바람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의 능력은 때로 폭풍처럼 다가오는 문제들로 인해 두려워하는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도움을 요청하기만 하면 예수님은 언제든지 우리를 도우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그러므로 어떤 심각한 위기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오늘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로 인해 근심하고 있지는 않은가? 높은 산과 같이 앞을 가로막고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장벽이 있지는 않은가? 언제든지 우리를 도우시고자 준비하고 기다리고 계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그분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3월 10일 고향에서 배척당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6:1-6) 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은 어찌됨이냐 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선입견 예수님은 거라사인 지방에서 귀신 들린 사람과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아이를 살려주신 후 제자들과 함께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으로 가셨다. 나사렛의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권능을 행하시자 그곳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던 마리아의 아들인 예수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지 의아해하였다. 예수님의 어릴 때부터 자라는 모습을 계속 보아왔던 그들에게는 예수님은 단지 그들과 똑같은 한 인간에 불과하였고 자신들보다 나을 게 없었다. 그저 평범한 목수일 뿐인데 사람들이 예수님으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고 그분을 따르는 것을 시기하고 배척하였다. 이러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던 이들에게는 주님의 권위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나사렛에서는 더 이상 이적을 행하실 수 없었고, 그들은 구원받을 기회를 잃어버렸다. 예수님이 베푸신 이적을 본 후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주여 나는 죄인이오니 나를 떠나소서”(눅5:8)라고 고백한 베드로와 대조적인 모습이다. 우리도 교회 안에서나 혹은 밖에서나 종종 선입견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거나 자신의 기준에 의해 판단할 때가 있다. 타인을 대할 때 선입견을 가지고 대하면 그 사람의 참모습을 보기 어렵다. 사람에 대해서 뿐 아니라 하나님께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선입견은 우리의 눈을 가려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우리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 느끼고 인식하고 체험하는 것보다 예수님은 훨씬 크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르게 깨닫지 못해 은혜 받을 기회를 놓쳐버린 것 같은 그런 잘못을 우리는 범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의 영의 눈이 열려 오늘 하루의 생활 가운데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바라볼 수 있기를 소망하자. 오늘 우리의 삶을 인도해주시는 분은 전능하시고 사랑이 가득하신 주님이신 것을 영혼의 눈으로 바라보고 주님이 베풀어 주실 은혜를 사모하며 기대하자. 3월 11일 열두 제자들의 파송 (마가복음 6:7-13) 7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8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9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10 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11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12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13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순종의 결과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열두 명의 제자들은 제자로 선택받을 만한 특별한 능력이나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다. 특별히 더 큰 믿음을 가지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가지고 있던 한 가지 특성은 바로 예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였다. 예수님은 조화와 협력을 통해 보다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제자들을 두 명씩 짝을 지어 보내시며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을 주시고, 지팡이 외에는 돈이나 양식도 가지지 말고 두 벌 옷도 입지 말고 가라고 명하셨다. 팔레스타인 지방은 일교차가 심해 온 몸을 감싸는 겉옷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주님의 일을 행함에 필요한 것은 주님께서 채워주심을 믿고, 가장 최소한의 것만을 가지고, 가장 중요한 믿음을 가지고 나가게 하신 것이다. 주님의 명령을 생각해보면 오늘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을 위해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 뿐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가진 것을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돌아보자. 제자들은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순종하였다. 유대 마을을 다니면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병자를 고치는 등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그대로 행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일들을 통하여 스스로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였다. 순종의 결과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들을 통하여 일하심을 보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그분과 함께 갈 것인지 아니면 뒤에 남아 있을 것이지. 예수님은 비범한 일을 행하시기 위해 평범한, 그러나 순종하는 사람들을 사용하신다. 주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따름으로써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들 중 하나가 되자. 3월 12일 오천 명을 먹이시다 1 (마가복음 6:30-34) 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 도 없음이라 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 새 33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쉼과 회복 제자들이 그들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한적한 곳으로 보내어 휴식을 취하게끔 배려하셨다.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쉼과 회복이 필요하다는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 힘든 일을 한 후 취하는 조용한 휴식은 육체적인 쉼을 갖는 것 뿐 아니라 행한 일에 대한 정리와 평가를 하며,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우는데 필요한 정신력을 회복시켜 준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 출애굽한 이후 광야의 생활을 통해 육신의 쉼을 가지며,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 영적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되고 다듬어져 가는 회복의 시간을 경험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잠시 쉬기 위해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갔으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일행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예수님은 쉼을 방해받았으나 기다리고 있던 군중들을 탓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목자 없는 양같이 불쌍히 여기시며 그들의 곤고함을 채워주셨다.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그들이 알아야만 하는 것들을 가르쳐주셨고, 목자 없는 양이 위험한 길로 가듯이 하나님 없이는 어리석은 길로 갈 수 밖에 없음을 명심하도록 깨우쳐주셨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쉼이 방해받았던 것처럼 때로 우리의 일상의 시간계획을 방해하는 일이나 사람들이 있을 때 그것을 성가시게 느끼는지 아니면 그것도 우리의 삶 가운데 감당해야 할 봉사라고 기꺼이 받아들이는지 생각해보자. 체로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아주 먼 길을 여행할 때에 단숨에 그 길을 다 달려가지 않는다. 가다가 잠시 쉬면서 자신이 달려온 길을 돌아보고, 행여 너무 빨리 달려 자신의 영혼이 미처 따라오지 못한 것은 아닌지 잠시 기다린다고 한다. 인생을 살아갈 때 목표를 향해 부지런히 달려가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잠시 쉬며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앞으로 가야할 길을 점검해보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3월 13일 오천 명을 먹이시다 2 (마가복음 6:35-44) 35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들이요 나도 저물어가니 36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37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39 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40 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41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42 다 배불리 먹고 43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44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 가지고 있는 것을 주라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듣고 배우고 얻기를 사모하여 모인 수많은 무리들에게 천국 복음을 가르치시던 중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모인 무리들은 장시간 말씀을 듣느라 허기가 져서 음식을 먹어야 했으나 모여 있던 곳은 음식을 쉽게 구할 수 없는 빈들이었다. 제자들은 합리적인 방법을 생각해내었다.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뜻밖의 대답을 하셨다. 제자들은 모인 무리들을 먹이기 위해서는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떡을 사야만 할 것이라고 계산했다. 이백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가 받는 임금 8개월 치 정도의 액수였다. 제자들은 그만한 돈도 없었고, 살 곳도 마땅치 않은 곳에서 예수님께서 상황파악을 못하신다고 생각하며 퉁명스럽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가지고 있었던, 한 사람이 먹을 분량 밖에 되지 않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가지고 왔을 때 예수님은 그것을 축복하며 기도하시고 나누어줘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바구니에 차게 남는 이적을 체험케 하셨다. 당시 집 밖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따로 떨어져 식사하고 아이들은 여인들과 식사하는 것이 유대의 풍습이었다. 남자만 오천 명이었으니 모인 이들은 아마도 만 명은 넘었을 것이다. 누군가 가지고 있었던 것,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소용에 비해 턱없이 적은 것이었지만 예수님의 손에서 필요를 충분히 채우고도 남음이 되었다. 때로 우리는 주님께 너무 적은 것 밖에 드릴 수 없다고 느낀다. 그러나 주님께서 사용하시도록 기꺼이 내어드리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재능이든지 시간이든지 혹은 소유이든지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풍성하게 하실 수 있다. 우리의 자산을 주님께 드릴 때 그것은 풍성해진다. 가지고 있는 것을 - 자신을 포함하여 -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도록 드려보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하시는지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3월 14일 수로보니게 여자의 믿음 (마가복음 7:24-30) 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 발 앞에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위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믿음 예수님은 유대 지도자들의 대립에 부딪쳐 잠시 갈릴리 지역에서의 전도를 중단하시고 두로 지방으로 옮겨가셨다. 그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계시고자 했으나 이미 예수님께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있었고, 이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영적인 빛은 어디를 가시든지 드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로 인해 온 몸과 마음이 고통 가운데 있던 한 이방인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와 자신의 딸을 고쳐주시기를 간구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냉정한 말로 이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셨다. 예수님은 유대인을 자녀로, 이방인을 개로 비유하시며 여인의 요청을 거절하셨으나 이 여인은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매달렸다. 자신과 딸을 개에다 비유한 예수님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있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대답한 이 여인은 얼마나 간절하고 지혜로운가! 바리새인들은 형식적인 믿음으로 예수님과 계속 대립함으로써 영적으로 치유 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쳤으나, 여인은 간절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매달림으로써 딸의 육신적 치유와 함께 영적 구원의 은혜를 얻었고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마15:28)고 하시는 예수님의 칭찬을 들었다. 우리의 기도가 즉각적으로 응답되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질 때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겸손함과 간절함으로 은혜를 구한 자세는 바로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의 모습이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훈련하시고자 시험을 주시지만 우리의 처지와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시고 아픔을 치유해주시며 간구에 응답하신다. 오늘도 하루를 지내며 나의 믿음이 형식적이지는 않은지, 기도의 응답이 없다고 쉽게 포기하지는 않는지, 주님 앞에서 언제나 겸손함과 간절함으로 주실 은혜를 기대하고 있는지 돌아보며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하자. 3월 15일 베드로의 고백 (마가복음 8:27-35) 27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 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 죽음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9:1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잃는 것과 얻는 것 베드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이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앞으로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처음으로 말씀하셨고, 베드로는 어떻게 이런 일이 메시야이신 예수님께 일어날 수 있는지 항변하였다. 하나님의 시각이 아닌 자신의 개인적인 시각과 소망, 감정을 가지고 예수님을 세상의 왕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이사야서 53장의 고난 받는 종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세상적인 시각과 사고방식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진정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들은 열심히 세상이 주는 만족과 즐거움을 찾고, 무가치하고 허무하게 끝날 소유와 명성, 권력을 얻고자 영혼을 소홀히 하는 어리석음 가운데 살아간다. 그러한 세상에서 내면으로부터 끊임없이 올라오는 세상적 추구를 절제하고,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고자 하는 이기적인 결정과 노력을 포기하고, 주님께서 인생의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세상에서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잃는 것 같아 보이지만 주님 안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이 풍성한 영적인 생명을 얻게 된다. 자신이 귀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얻고도 영적 생명을 잃어버리면 과연 그 얻은 것이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지금 예수님께서 내게 물으신다면 나는 예수님을 나의 주인, 나의 구세주라고 고백할 수 있는지, 그분이 나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나의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까지도 그분께 드릴 수 있는지 생각하며 오늘도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가자. 3월 16일 변화산 사건 (마가복음 9:2-8)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3 그 옷에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7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8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베드로의 신앙고백 후,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에 대해 말씀하신 후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그들 앞에서 본래적인 신적 형상으로 변화하셨다. 그 때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세 명의 제자들이 보았다. 구약성경에서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는 가장 위대한 선지자의 도래를 예언하였고(신18:15-19) 엘리야는 메시야의 도래를 예언한 (말4:5-6) 선지자들을 대표한다. 예수님이 변형되신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은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야의 도래가 바로 예수님이 오심으로 성취되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 사실을 확증해주듯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중에서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눅9:27) 바로 세 명의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께서 천상의 모습으로 변형되신 것을 함께 경험하였다. 예수님께서 왜 특별히 이 3명을 택해서 자신의 영광과 순결함을 계시해주셨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이들은 다른 제자들에 비해서 좀 더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아가 예수님은 이들이 앞으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받아야 할 고난을 알고 계셨기에 그들이 고난 가운데 천국을 소망하며 견뎌낼 수 있게 하시고자 그들에게 천국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셨을 것이다. 세 명의 제자들은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말했으나 먼저 세상에 내려가 감당해야 할 사명과 고난이 있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할 다양한 사람들을 부르셨고, 우리들을 부르셨다. 우리가 그저 세상의 자리에서 있는 것을 좋아할 것이지, 아니면 언젠가 주님과 함께 그 좋은 곳에 있게 될 것을 소망하며 각자 부르신 자리에서, 그것이 비록 고난의 길일지라도 주신 사명 감당하며 살아갈 것이지 선택해야 한다. 3월 17일 누가 크냐 (마가복음 9:33-37) 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34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36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가장 큰 자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고 하시는 예수님의 질문은 제자들을 당황케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끊임없이 개인적 성공을 추구하면서 누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누가 더 주님께 신뢰를 받아서 높은 자리를 얻을 것인지 서로 다투던 것을 예수님께 들킨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적인 하나님 나라에 대해 눈을 뜨지 못했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스도인으로써 높은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위해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목표와 노력이 자신 만을 위한 이기적인 것이거나, 주님께 대한 순종이나 사역의 내적인 동기가 자신의 세상적인 목표의 성취에 있다면 이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 빠지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우리의 내면을 주의 깊게 살펴서 올바른 동기에 의해 움직이는지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정 높아지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연약한 어린 아이 하나, 선을 베풀어도 아무 대가도 받을 것이 없어 보이는 지극히 작은 사람에게 행한 것이 곧 주님께 행한 것이고,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께 행한 것이라 하시며 섬김의 도를 가르치셨다. 세상 나라에서는 서로 높아지려고 하고, 큰 자가 섬김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연약한 자를 섬기는 자가 가장 큰 자가 된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하루를 살아가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장 미약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사랑으로 섬김으로써 주님이 가르쳐주신 가장 큰 자의 삶을 실천하자. 3월 18일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시다 (마가복음 6:45-47) 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47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혼자의 시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 이상의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배를 타고 먼저 벳세다로 가게 하시고, 모인 무리들을 다 돌려보내신 후 기도의 시간을 갖기 위하여 혼자 산으로 올라가셨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매일의 꽉 찬 사역 중에도 홀로 아버지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을 우선적으로, 지속적으로 하셨음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도의 시간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의 근원이 되며 삶의 과제와 중압감을 이겨내는 힘의 원천이 된다. 일상의 바쁜 가운데 기도하기 위해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기도는 우리와 하나님의 사이를 이어주는 결정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하나님의 일을 행하실 때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셨다. 예수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다”는 겟세마네의 기도를 우리는 기억한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하여 종종 다른 이들로부터 홀로 떨어져있어야 한다. 홀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그 시간 우리는 가장 솔직하게 자신을 볼 수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지 알게 된다. 코람데오의 시간이다. 이를 위해 이른 아침 일어나는 수고를 해야만 할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조용한 시간을 갖는 원칙을 발전시켜 보라.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영적으로 성장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도와줄 것이다. 3월 19일 죄에 대한 경고 (마가복음 9:42-50) 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4 (없음)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6 (없음)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8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9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나의 짠 맛은 충분한가? 우리는 신앙 생활하면서 부지중에 다른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할 수 있다. 무심코 던진 말 한 마디, 사소한 행동이 공동체 안의 형제자매들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고, 믿음이 약한 이들을 넘어지게 하거나 믿음에서 떠나게 만드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가까운 사람, 혹은 가족들에게 가깝다고 부주의하게 말하고 행동하다보면 상처를 주기 쉽다. 예수님은 다른 이들을 시험에 빠지게 하는 것이 큰 잘못임을 심각하게 경고하셨다. 삶에서 죄를 제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손이나 발이나 눈이 죄를 범하면 범죄한 지체를 잘라내는 것이 낫다는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셨다. 사실 범죄는 손이나 눈이 것이 아니라 생각이 한다. 생각이 몸을 지배하여 행동으로 나오므로 생각 속의 죄를 뿌리 뽑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행하지 않기 위해 내면에서 일어나는 죄된 생각을 뿌리치는 것은 마치 손을 잃거나 눈을 잃는 것 같은 고통이 따른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특징을 소금에 비유하셨다. 소금의 기능은 맛을 내는 것과 부패를 방지하는 것으로써 인간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지만 그 맛을 잃어버리면 아무 쓸모가 없어 버릴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에서 소금과 같은 역할, 곧 생명력을 공급할 뿐 아니라 부패를 방지하는 책임을 다할 것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며 서로 자리다툼하고 높아지려고 하던 제자들에게 헛된 것에 대해 논쟁하지 말고 세상에 대한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고 교훈해주셨다. 이 세상에서 나의 삶은 소금으로써 충분히 짠 맛을 내고 있는지, 나는 어떤 맛을 내며 살고 있는지 살펴보자. 3월 20일 야고보와 요한이 구하는 것 (마가복음 10:35-45) 35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9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진정한 리더십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이 이루실 왕국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얻기를 원하였다. 인류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날이 다가오고 있었으나 제자들은 여전히 지상의 왕국을 꿈꾸며 한 사람은 주의 우편에, 한사람은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함을 알지 못했으므로 예수님께서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고 물으실 때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오히려 다른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예수님도 자신의 목숨을 내어줌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 갚아주시는 섬김의 종으로 이 세상에 오셨음을 알려 주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계획, 자신의 임무를 완성하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좌우편에 있었던 이들은 야고보와 요한이 아닌 두 강도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써의 사역을 어떻게 완성하셨는지 십자가를 통해 뒤늦게 깨달은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의 질문에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한 것 같이 복음을 위해 순교함으로써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기를 꿈꾸고 소망한다.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더 높은 목표,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소유를 위해 달려가라고 유혹한다. 그러나 주님은 진정 높은 자리는 섬김의 자리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섬김의 리더십이다. 오늘 하나님 나라에, 그리고 이 세상에 필요한 진정한 리더십은 섬김의 리더십이다. 서로를 위해 섬기고 필요를 보충해줄 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이루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들 가운데 이루어진다. 3월 21일 맹인 거지 바디매오 (마가복음 10:46-52)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가 가까워져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던 중 여리고를 지나게 되었다. 맹인으로 태어나 구걸하며 살아가던 바디매오는 길에 앉았다가 예수시란 말씀을 듣고 즉각 반응하였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치며 주변 사람들의 책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간절하게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시자 겉옷 –그의 가장 중요한 재산이었을 - 을 챙길 여유도 없이 즉각 예수님께 달려간 그는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씀드렸고, 예수님은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응답해주셨다. 바디매오는 육신의 몸으로 세상에 계시는 예수님의 생의 마지막 시간쯤에 예수님을 만나는 은혜를 누렸다. 그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 있던 기회를 믿음으로 붙잡았다. 그 결과 그는 암흑 속에 살고 있던 고통스러운 인생으로부터 벗어나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영혼의 눈도 뜨게 되어 구세주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되는 놀라운 은혜를 얻게 되었다. 우리는 눈을 뜨고 있으나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지 못해 마치 어두움 가운데 있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우리의 영혼이, 우리의 삶이 어두움 속에서 괴로울 때 바디매오와 같이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간절히 외쳐보자. 이 세상을 비추는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간절한 외침에 응답하셔서 영혼의 어두움을 밝혀주시고 세상의 것밖에 보지 못하는 눈을 밝혀주셔서 보아야 할 것을 보게 해주실 것이다. 오늘도 하루를 지내며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주님께 간구하여 우리를 앞서 가시며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되기를, 우리 안에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하자. 3월 22일 성전을 깨끗케 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11:15-18) 15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내 속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예물을 가지고 가야 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은 흠이 없어야 했기 때문에 예물에 흠이 있는지 없는지를 까다롭게 검사했다. 이스라엘 바깥지역에서 절기를 지키려고 예루살렘 성전을 찾는 이들은 먼 여행길에 예물로 드릴 짐승을 흠 없이 가져오기 어려웠으므로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상인들로부터 예물로 드릴 짐승을 사곤 하였다. 이런 이유로 예루살렘에서는 상업이 발달하였는데, 여기에 성전에서 일하는 이들과 상인들의 이권이 개입되면서 부정한 거래가 만연해졌다. 집에서 미리 준비해 가져간 예물은 부적격 판정이 내려지기 일쑤였고, 성전 안에서 검인을 받은 제물들이 비싼 값으로 매매되었다. 성전에 드리는 헌금은 따로 지정된 화폐만 사용할 수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환전상에게 가서 성전에 낼 수 있는 화폐로 바꾸어야만 했고, 환전상들은 환율을 마음대로 조정하며 부당한 이득을 취하였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들이 성전에까지 들어와 이런 장사를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거룩하게 드려야 할 성전 제사가 상업주의로 변질되어 타락한 것을 보시고 예수님이 너무나 화가 나서 장사들을 내쫓고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일이 두 차례나 있었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만민의 기도하는 집’인 우리의 교회가,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예배가 감사와 헌신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그저 형식적으로, 혹은 세상의 풍조에 휩쓸려 세속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시며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의로운 분노를 발하고 계실지 모른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깨우쳐주신다. 성전된 나의 영혼 속에 과연 무엇이 있는가?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는지, 아니면 이기심과 욕심, 위선과 교만으로 인해 그 옛날 장사꾼들로 어지럽던 성전과 같은 모습이지는 않은가 살펴보자. 예수님께 책망 받지 않도록 있어야 할 것을 있게 하고 버려야 할 것을 버려 거룩한 성전의 모습을 회복하자. 3월 23일 말라버린 무화과나무 (마가복음 11:20-25)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응답받는 기도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가시던 중 시장하신 예수님께서 길에 있는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따서 드시고자 하였으나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에는 정작 열매가 없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향하여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고, 이 말씀을 동행하던 제자들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 채 마른 것을 본 베드로가 놀라며 의아해하자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산이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슨 일이든 가능케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은 일부러 이러한 비유를 사용하셨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의심하지 않으면 응답받지 못할 일이 없음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전제로 한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올바른 관계는 이웃과 우리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전제로 한다. 이웃이나 형제자매와의 관계가 잘못되면 기도의 효과가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다른 이들과 불화와 다툼이 있다면 먼저 용서하고, 해결한 뒤 기도해야 하며, 이러할 때 비로소 하나님도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때로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해 낙심하고 실망하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나의 기도가 응답받을 수 있는 기도인지 살펴보자.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한 채,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하지 못한 채 의심하며 흔들리는 기도를 하고 있지는 않은가? 형제자매들과의 불화를 해결하지 못한 채 기도하고 있는가? 내 자신 안에 기도의 응답을 가로막는 원인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고 그것들을 먼저 제거하자. 3월 24일 가장 큰 계명 (마가복음 12:28-34) 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 예수께서 그가 지혜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서기관은 원래 성경을 필사하는 사람이었는데 후에는 성경을 능숙하게 해석하는 선생으로 대접받았다. 바리새인이라고 불리는 율법학자들과 서기관들은 유대인들에게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적극적으로 행해야할 248개의 율법과 하지 말아야할 율법 365개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구분하고자 했으며, 유대인들로 하여금 이 많은 율법들을 다 지키도록 가르쳤다.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많은 율법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여 첫째는 하나님 사랑, 둘째는 이웃 사랑이라고 대답하셨다. (신6:5, 레19:18) 서기관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질문하였으나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대답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참된 의미를 상실하고 형식과 전통에 빠져있던 서기관에게 율법의 본질은 사랑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셨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타인을 대할 때 마치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 같이 마음을 쓰고 돌본다면 우리는 십계명의 정신과 그 외의 다른 구약의 계명들을 이행하는 것이 된다. 예수님은 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일한 선상에서 말씀하셨을까?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창조물인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도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요일4:20) 우리의 생각과 결정, 그리고 행동들이 모두 이 두 가지 계명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도록 하자. 우리의 삶의 어떤 행동방식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최상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오늘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자. 3월 25일 부활논쟁 (마가복음 12:18-27) 18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19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로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0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21 둘째도 ... 22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23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25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26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27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다 하시니라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우리가 언젠가 가게 될 천국은 과연 어떤 곳일까? 이 땅에서 인연을 맺었던 이들을 천국에서 다시 만난다면 어떤 모습으로, 어떤 관계에서 만나게 될까? 우리는 간혹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데 예수님 당시에도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두개인이 이와 비슷한 질문을 예수님께 드렸다. 지금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되지 않지만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결혼한 여인이 남편과 사별하면 남편의 형제와 살면서 가문과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므로 언젠가 천국에 가면 과연 누가 누구와 부부관계로 만나겠냐는 질문은 그럴 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사두개인의 질문은 부부관계에 관한 것이 아니라 부활 자체를 부정하면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고자 하는 질문이었다. 부활 후의 삶이 어떠할지는 우리의 상상력을 훨씬 뛰어 넘는다. 사두개인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우리가 들어갈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은 단순히 지상에서의 삶의 연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새로운 질서로 새롭게 계획해놓으신 곳임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인간의 논리와 지식으로, 육신적 기준으로 부활 후의 삶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는 모든 죽은 자가 산자이다. 믿음의 사람은 부활하여 영생으로, 불신자는 부활하여 영벌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우리는 언젠가 가게 될 천국이 어떠한지를 묻기 보다는 현재의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과 신뢰의 관계에 집중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준비해놓으신 그곳에서 영원히 그분과 함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3월 26일 종말의 때 (마가복음 13:32-37) 32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3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34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35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36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깨어 있으라 기독교 역사 속에서 종종 종말의 때가 언제인지 알고자 하는 시도에서 비롯된 이단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비밀한 계획 가운데 있는 것을 인간의 유한한 지식으로 알아내고자 하여 종말의 때를 예측하며 사람들을 미혹하는 교만과 불신앙의 죄를 범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그날과 그때는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시며 주의하고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날과 그때가 언제인지 알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종과 문지기의 비유를 통해 알려주셨다. 어떤 사람이 타국으로 가면서 그 종들에게 각각 권한을 주어 사무를 보게 하였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였다.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알려주고 떠났더라면 종들은 아마 중간에 게으름을 부리며 잘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알지 못했으므로 종들은 항상 맡겨진 일들을 제대로 이행하고 있어야만 했다. 언젠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만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 그 날이 이르기까지 이 땅에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과제를 잘 감당하는 것 또한 우리 삶의 목적이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씀이라고 하시면서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셨다. 집을 지키는 문지기처럼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고, 자신의 믿음과 교회와 세상을 사단으로부터 지켜야하는 과제를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셨다. 내 영혼이 혹시 하나님께 대하여는 자고 있고, 세상에 대하여는 깨어있는 것이 아닌지 점검해보자. 주님의 명령대로 우리의 영혼이 깨어 있어서 이 땅에서의 삶을 하나님께 충성된 종으로써 살아갈 뿐 아니라, 주님의 재림과 하늘의 영광된 상급, 영원한 삶을 바라볼 수 있어야겠다. 3월 27일 마지막 만찬 (마가복음 14:22-26) 22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라 하시고 23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24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6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니라 성찬예식의 의미 이스라엘이 그 옛날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빠져나온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유월절기가 되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셨다. 유월절에는 원래 어린 양을 잡아 고기를 불에 구워서, 누룩을 넣지 않고 구운 딱딱한 떡과 쓴 나물과 함께 먹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눈 유월절 식사에는 양고기는 없었고 떡과 포도주만 있었다. 예수님께서 이제 곧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양으로, 유월절 어린 양으로 내어주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떡과 잔을 나누실 때, 떡을 자신의 몸이라 하시고, 잔을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언약의 피라고 하시며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심으로 구약에서 예언된 대로 인류의 구원을 이루신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성찬예식을 행하라고 제정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날 교회에서 행하는 성찬예식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것이고, 그 죽음이 무엇을 위한 죽음이었는지 기억하는 것이다. 나아가 성만찬에 참여하는 개개인이 이제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공동체가 한 몸이 되며, 교회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그리스도로 인해 한 형제자매가 되었음을 고백하며 시인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낮추어 이 땅에 육체의 몸으로 오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찬예식 안에 현존하시며 우리와 한 몸을 이루시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새로운 창조를 이루신다. 이 얼마나 신비하고 놀라운 은혜인가! 성찬에 참여하면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주신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 우리도 자신을 다른 이에게 나누어줄 수 있기를 소망하자. 3월 28일 베드로의 부인 (마가복음 14:26-31) 26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니라 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29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1 베드로가 힘 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환난 가운데 증명되는 믿음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릴 것을 알고 계셨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은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고,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는가? 변화산에서 예수님께서 하늘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신 것과,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대화하던 모습을 보았던 제자들은 그러한 놀라운 체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대제사장 앞으로 잡혀갔을 때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하였다.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장담한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여종이 예수와 같은 편이 아니냐고 묻는 말에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마지막에는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주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인간적 용기로 호언장담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을 도와주시기를 주님께 요청했어야 했다. 우리는 이렇게 연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이다. 아무리 큰 은혜를 체험하고 믿음이 깊은 것 같아도 위기상황이 닥치면 우리는 쉽게 믿음에서 흔들리며 의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하나님께 고백하면서 그분의 도우심을 요청해야 하겠다. 만일 내가 베드로와 같은 형편에 처했다면 어떻게 했을까? 만일 지금 주님 때문에 고난 받을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주님을 따르며 주님께 헌신한다고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우리의 헌신의 고백은 고난을 이겨낸 후에야 인정받을 수 있다. 우리의 믿음이 외적인 어려운 상황들 속에서 증명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고 담대한지 생각해보자. 3월 29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1 (마가복음 15:21-32) 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22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 (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23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24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 새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25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26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27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28 (없음) 29 지나가던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30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3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콘트라스트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의 장면에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보게 된다. 무거운 십자가를 강제로 대신 지고 간 구레네 사람 시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 십자가에서 극심한 고통 가운데 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이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밑에서 옷을 나눠가지려고 제비뽑기를 하고 있는 군인들,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동일한 십자가 형벌을 받고 죽어가는 두 명의 강도들, 피 흘리며 고통 가운데 죽어가고 있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하며 욕하는 사람들 ...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후 얼마나 악한 모습으로 타락했는지 이들의 모습 속에서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이런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셔야했다. 하나님의 신성을 조롱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하늘의 것을 보지 못하고 땅의 것만을 보며 살아가는 인생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시기 위해 그들이 멸시하고 조롱하는 저주의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함께 경험하고, 죽음을 목격한 구레네 사람 시몬의 가 정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새 생명을 얻고 복음 전하는 일에 헌신하게 되었다.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는 예수님을 저주하며 죽어갔으나, 다른 한 강도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간청하였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39-43)는 예수님의 응답을 받아 생의 마지막 순간에 새 생명을 얻는 구원의 은혜를 얻었다. 예수님께서 처절한 죽음으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고, 온 인류에게 새 생명 얻는 길을 열어놓으신 극적인 대조가 오늘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깨닫게 해준다. 3월 30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2 (마가복음 15:33-39) 33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5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36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위대한 승리 온 인류를 죄를 대신 갚아주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약 6시간 동안이나 고난을 당하셨다. 그 시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셨고, 마침내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라고 말씀하신 후 죽음을 맞이하셨다. 예수님의 죽음을 전후하여 두 가지 표적이 나타났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맞이하시기 약 3시간 전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성전의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로 나뉘어졌다. 예수님의 죽음을 전 우주가, 전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슬퍼하셨음을 보여주신 것이고,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가로막혀 있던 담이 허물어지고 하나님 앞으로 자유롭게 나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렸음을 의미한다. 십자가형을 집행하던 로마군대의 백부장은 십자가 아래에서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고 고백하였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 달려 죽는 십자가, 흉악한 죄인이 달려 죽는 십자가, 수치와 멸시의 상징이던 십자가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의 상징으로 변화되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인류를 끊임없이 죄의 길로 유혹하고, 죽음으로 몰아가는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고 마침내 승리하셨다. 죽음으로 열어놓은 생명의 문!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생명의 문을 여는 위대한 승리를 십자가 위에서 이루셨다. 자신의 생명을 버리시고 우리의 생명의 길을 열어놓으신 예수님의 승리를 기억하며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나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승리의 길임을 영혼에 깊이 새기는 오늘 성금요일이 되기를 소망하자. 3월 31일 무덤 속에 누이신 예수님 (마가복음 15:42-47) 42 이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44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지가 오래냐 묻고 45 백부장에게 알아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주는지라 46 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47 막달라 마리아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 특별한 것을 만남 무엇이 ‘특별한’ 것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곧 복종을 감내하면서 십자가로 가는 그분의 사랑이다. 그것은 십자가이다. 그리스도인이 갖는 독특한 특징은 바로 이 십자가이다.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세상을 넘어서게 하는 십자가, 그들로 하여금 세상을 이기게 하는 십자가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사랑 안에서 만나게 되는 고난,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존재에 있어서 ’특별한‘ 것이다. 그것은 숨겨진 채로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아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예배 공동체, 보다 나은 의의 공동체는 이 세상의 질서를 벗어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가시적인 공동체이다. 당신이 행하고 있는 특별한 것은 무엇인가? 특별한 것 – 이것은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인데 – 은 제자들이 행하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행해져야 하며 가시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윤리적인 엄격함이나 그리스도인의 생활양식의 차원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진실된 복종에서 행해지는 것이어야 한다. 그 행위가 그 사람을 수난으로 인도함으로써 ‘특별한’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그 행위 자체가 영속적인 고난이며 인내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특별한’ 것은 율법의 완성이며 계명들의 완수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그의 공동체 안에서 ‘특별한’ 것은 사건이 된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의 [제자직의 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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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림교회
2019년 3월 25일
In 365일 말씀묵상
4월 1일 복 있는 사람 1(시편 1:1-6)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으로 드리는 기도 시편 Psalm은 수금을 치며 부르는 노래라는 뜻의 헬라어 Psalmoi에서 유래하였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시편을 성경 속의 기도서라고 표현하였고, 마틴 루터 역시 주기도문과 시편은 모든 기독교인들의 기도의 본보기라고 하였고, 시편을 성경 전체를 요약한 작은 성경(Summe der Bibel-klein Biblia)이라고 표현하였다. 우리들의 기도는 대부분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 우리들의 위기와 곤고함, 우리들의 소망에 대해서만 맴돌고 있다. 그러나 시편 속에서 우리는 지나간 세대를 살았던 믿음의 사람들의 수많은 경험들과 마주치게 되며, 이러한 간접경험은 인생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야와 기도의 영역을 넓혀준다. 시편을 묵상함으로써 자신의 성공만을 위해 기도하던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이 땅에 실현될 것을 위해 기도하게 될 것이다. 항상 할렐루야 찬양만을 노래하던 사람은 시편 속에서 눌리고 고통당하는 이들의 내면 깊은 곳에서의 외침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자신의 고통과 운명에 대해서만 부르짖던 사람은 시편기도들의 가장 고귀한 모습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며, 그 속에서의 „나“는 이 세상의 중심에 하나님의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임을 볼 것이다. 시편을 묵상함으로써 우리는 다양한 시대와 문화 속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살았던 기도자들의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기도에, 주님의 기도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에 동참하게 된다. 시편을 통하여 올바른 기도를 배우고 드림으로써 복 있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며 함께 시편을 묵상하자. 4월 2일 복 있는 사람 2 (시편 1:1-6)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의 내용과 목적 시편 전체는 크게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시편들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유대인의 토라(모세오경)가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편집했다고 볼 수 있다. 구약학자 게르하르트 폰 라드 (Gerhard von Rad)의 표현과 같이 시편들은 토라(모세오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하심과 행하심에 대한 „이스라엘의 응답“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우리 삶 가운데서 행하시는 일하심에 대한 우리들의 응답으로서의 기도가 드려져야 함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편 1편과 2편은 전체 시편들로 들어가는 이중적 출입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지혜가 함께 하는 삶(1편)과 메시아 대망(2편)은 시편 전체를 묵상하고 기도하는 근본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할렐시편이라고 불리는146편-150편 (이 다섯 편의 시들은 모두 할렐루야로 시작)은 시편기도들의 목적을 말해주고 있는데, 모든 민족들과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확정함으로써 시편 전체는 탄원으로부터 찬양으로의 전환을 이루고 있다. 즉, 시작하는 1,2편은 시편의 주제를 다루고 있고, 마지막 다섯 편은 시편의 목적을 알려준다. 우리들도 시편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동안 하나님의 지혜가 함께 하는 삶을 배우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면서, 우리들의 개인적, 사회적 탄원, 간구가 하나님 찬양으로 변화되는 신앙적 체험을 통하여 진정 복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하자. 4월 3일 복 있는 사람 3 (시편 1:1-6)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하나님이 복 주시는 사람 시편 1편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복 있는 사람의 모습과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하나님께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두 부류 중의 하나로 보일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거룩한 사람(의인)과 그리스도 밖에 있는 거룩하지 못한 사람(죄인)이다. 하나님이 복 주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세상과 분리된 거룩한 삶을 사는 경건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신다. 이것은 세상과 분리되어서 혼자 살아간다는 뜻이 아니라 1)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고 2)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고 3)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을 의미한다. 악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고, 자기들의 생각이나 의지, 욕심 등을 따라 살 때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삶의 태도를 1편 1절에서는 악인의 꾀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삶의 목표로 하지 않고 자신의 영광에 목표를 두는 사람은 곁길로 빠져 악인으로, 죄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복은 „똑바른 길로 나아가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복을 얻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똑바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복임을 의미한다. 그 길은 바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이며, 하나님은 그 길로 행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모든 복을 허락하신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똑바른 길로 나아가고,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을 삶을 살고자 애써야 하겠다. 4월 4일 복 있는 사람 4 (시편 1:1-6)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라 복 있는 사람은 그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져 있으며,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그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사람이다. 시편에서 말하는 복은 세상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복과 다르다. 1,2절은 복 있는 삶의 자세를 알려주고 있고 3절 그 결과로 나타나는 모습을 알려준다.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것 같고, 그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다. 시편 1편 1절은 길에 대하여, 2절은 진리인 여호와의 율법에 대하여, 3절은 풍성하게 하며 열매를 맺게 하는 생명에 대하여 말씀함으로써 완전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비유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시편 1편은 복 있는 개인적인 믿음의 삶에 대하여 알려주고 있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복 받기를 원한다. 새해 첫날 사람들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한다. 우리도 복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악인의 꾀를 따르고 있지는 않은지, 죄인들의 길에 서 있지 않은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 있지는 않은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밤낮으로 묵상하고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한다. 우리의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며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며 그 말씀대로 행하는 삶이 진정 복 있는 삶이다. 4월 5일 여호와의 명령 (시편 2:1-12) 1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2 세상의 관원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대적하며 3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4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5 그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10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여호와께 피하는 사람은 다 복이 있다 시편 2편을 유심히 살펴보면 말하는 이가 여러 명이다. 1-3절은 세상의 소리이다. 그것은 헛된 일을 꾀하게 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한다. 세상은 부단히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교만하게 자기의 길을 가고자 한다. 4-6절은 시편 기자를 통한 아버지의 음성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어리석은 도모를 보고 웃으신다! 하나님은 사람보다 위대하시고, 세상의 왕들의 교만한 공격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5-6절은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신다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7-9절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하는 아들의 음성,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구하면 이방 나라들을 유업으로 주시며 소유를 땅 끝까지 이르게 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10-12절 시편 기자를 통해 전달되는 성령의 음성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고 따르려는 이들에게 세상 지혜를 따르거나 자랑하지 말 것을 호소하며,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께 헌신할 것을 전하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이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의지하며 즐거워하는 이들의 소유를 땅 끝까지 이르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것은 물질적 소유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스르는 세상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스리며 변화시키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이다. 1편은 축복으로 시작되며 2편은 축복으로 끝난다. 여호와께 피하는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4월 6일 저녁 찬송시 (시편 4편) 1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2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셀라) 3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4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 5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6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7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하나님 시편4편은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던 때에 지은 비탄시이다. 동일한 배경 아래 쓴 시편 3편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으로 아침을 맞이하는 다윗의 감격을 노래하는 ‘아침 찬송시’인데 비해, 4편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사람만이 두려운 밤조차도 평안하게 맞이할 수 있음을 노래한 ‘저녁 찬송시’라고 할 수 있다. 후대 사람들이 저녁예배 때 이 시편을 찬송한 것으로 전해진다. 다윗은 과거에 경험한 하나님의 도우심이 현재의 고난도 극복하게 해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다.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대적자들 앞에서도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확신하기 때문에 자신이 누리게 되는 평안과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우리는 때로 이 세상에서 어려운 일들을 만나기도 한다. 억울한 오해나 원치 않는 질병, 갈등과 실패, 경제적인 어려움 등이 우리의 삶을 고통스럽게 할 때에 진정 우리가 믿음의 사람인지 아닌지 드러난다. 이러한 상황에 처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자신을 비하하지 않고, 도리어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이 참된 믿음의 사람이며, 그에게 하나님은 평안을 주시고 안전한 길로 인도하신다.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누리는 기쁨은 세상 사람들이 그들이 가진 풍부한 물질로 인해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다는 다윗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고,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심을 믿고 기쁘게 살아가는 오늘 하루의 삶이 되기를 소망하자! 4월 7일 대자연이 드러내는 창조주 하나님 (시편 8편) 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2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5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9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창조주 하나님께 향한 감사의 찬양 하늘의 달과 별들,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들, 땅의 각종 들짐승과 같은 천지 만물로 우리의 눈을 돌리게 하는 아름다운 시편 8편은 그 내용상 천지창조를 다룬 창세기 1장에 대한 인간의 화답시라고 할 수 있다. 목동생활을 하며 자연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경험한 다윗은 훗날 이 경험을 바탕으로 한편의 서정시를 기록하였을 것이다. 다윗은 창조주 하나님을 자신의 ‘주’로 고백하면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만물 중 특별히 인간을 존귀하게 여기시고 만물에 대한 통치권을 맡겨주신 사실을 감사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시편 8편을 공중예배 시나 특별한 절기 때에, 그리고 초대교회에서는 예수승천기념일에 특별히 낭송하였다. 1절과 마지막 9절에서는 신비한 우주 속에 담겨 있는 주의 영광을 동일한 말로 반복하여 찬양하고 있고, 2-3절은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아름다운 창조솜씨에 대한 찬양으로, 후반부 4-8절은 비천한 인간을 만물 중에서 존귀하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되어있다. 우리의 눈을 잠시 자연으로 돌려보자. 다윗이 고백한 것 같이 아름답고 신비한 자연 만물을 보면서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생각해보자. 그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지으시고, 그 모든 것을 다스리며 누리며 살아가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 찬양을 올려드리자. 4월 8일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시편 15편) 1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2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3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4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5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의 삶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다윗의 시대에는 예배자가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성전에 들어갈 때 자신이 성전에 들어가 예배드릴 자격이 되는지 사제에게 확인을 받아야 했다. 다윗은 시편 15편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자의 외적인 조건보다 그 내면적인 마음가짐과 삶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다. 먼저 1절에서 누가 하나님과 동거하며 교제할 수 있는지를 질문한다. 2-5a절에서는 성전에 들어가 예배드리는 자들의 10가지 자격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5b에서는 그러한 10가지 자격을 갖춘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를 노래하고 있다.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 예배할 자가 누구인가’라는 1절의 질문은 ‘하나님은 과연 어떤 사람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실 것인가?’라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생각해보자.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는 우리의 삶은 어떠한지 되돌아보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실 수 있도록 우리의 평소의 삶의 자세가 다윗이 말한 대로 정직하고, 공의를 실천하며, 진실을 말하며, 남을 허물하지 않고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고 ... 살아가고 있는지 되돌아보자. 만일 우리의 삶이 그렇지 못하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이사야서1:11-12)고 책망하실 것이며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매일의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되도록 시편 15편의 말씀대로 살아가자. 4월 9일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들 (시편 16편) 1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3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4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 5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니다 6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7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9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10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안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죽음도 초월하는 신앙의 소망 시편 16편은 복과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믿고, 부활과 영생을 확신하며 죽음의 위협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다윗의 신앙 고백시이다. 나아가 오고 가는 모든 세대의 인생들의 죄를 대신 갚아주기 위해 하나님께서조차 버림받는 십자가 고통과 공포를 감당하시고, 가장 먼저 부활하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을 예언한 시라고 할 수 있다. 다윗이 이 시를 지을 때 그는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기쁨과 소망을 가지고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다윗의 믿음이 얼마나 확고하고 분명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다윗은 하나님만이 자신의 복의 근원이며 기업이 되심을 노래하며 자신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것을 고백한다. 그는 땅에 있는 성도들이 육신의 죽음 이후 부활하여 영원히 살아갈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존귀한 자들이라고 부르며, 그 사실이 자신의 즐거움이 됨을 고백할 수 있었다. 다윗이 가졌던 부활과 영생에 관한 소망은 그것에 대한 분명한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지지 않았던 시대의 것이기 때문에 희미하고 불완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죽음의 위기 앞에서 담대하게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자신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감당할 수 있었다. 다윗시대보다 훨씬 분명한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가진 오늘날의 우리 성도들은 과연 어떤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 혹여 삶의 여정에서 어려운 일을 만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존귀한 자임을 인식하고 영원한 나라에서 얻을 기쁨을 소망해야 하겠다. 4월 10일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 (시편 19:7-14) 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 롭게 하며 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10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도 더 달도다 11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12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3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14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묵상을 통해 얻게 되는 은혜 시편기자는 여호와의 율법이 완전하여 인간의 전인격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음을 노래한다. 지치고 낙심될 때 말씀을 의지하면 상처가 치유되고, 억울하게 고난을 당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그 말씀을 묵상하면 영혼의 평안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자신의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되기를 원하는 간절함을 표현한다. ‘묵상한다’는 말은 거울로 영상을 되받아서 좀 더 자세히 본다는 뜻으로, 말씀의 거울에 자신을 자세히 비춰본다는 것이다. 즉 묵상하는 삶이란 하루 중 사물과 사람들, 자신과 하나님을 좀 더 자세히 그리고 깊이 바라보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묵상은 곧 하나님과의 내면의 대화, 기도이다.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게 한다. 프랑스 떼제공동체의 창시자인 로제수사는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길잡이별이 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숨은 자력처럼 사람을 끌어준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도하게 하실 때 먼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잡념과 욕망, 분노, 갈등 등을 보게 하신다. 그것을 다 내어버리는 것이 일차적인 묵상기도이다. 다 털어내고 비워진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평화로 채움 받는 것이 묵상기도의 이차적 단계이다, 오늘 우리도 시편기자의 고백과 같이 우리의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 하나님께 드려지기를 바라며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는 하루를 살아가자. 4월 11일 환난 날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시편 20편) 1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2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3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주시기를 원하노라 (셀라) 4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5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6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의 오른 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 7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8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9 여호와여 왕을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한다 시편 20편은 이방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기원하는 시이며, 왕과 그의 군사들이 출정하기에 앞서 성전에서 예배드릴 때 모두 함께 낭송하였기 때문에 출정시라고 불려진다. 나아가 어떤 환난일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반드시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의 노래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 주의 백성들이 악을 정복하고, 영원한 의의 승리를 이루실 메시야의 왕권과 통치를 기원하는 시라고 볼 수 있다. 다윗은 ‘환난 날에’, 즉 인생에 있어서의 어떤 종류의 험악한 고난을 당하게 되는 때에라도 ‘야곱의 하나님’, 곧 연약한 인생들을 잊지 않고 끝까지 돌아보시는 긍휼과 사랑의 하나님을 의지하기만 하면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노래하고 있다. 우리는 종종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로 인해 근심하기도 하고, 곤고한 처지에 놓여 괴로워할 때도 있다. 그러한 때에 시편 20편을 기도로 드려보자. 시편 20편을 나의 기도문으로 바꾸어 하나님께 드려보자. 하나님이 내가 드린 모든 예배를 기억하시고, 나를 도우시고, 나의 소원을 허락하시고, 나의 계획을 이루어주시며, 나의 모든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하고 놀라운 일인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 이와 같이 행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가진 물질과 권력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오직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다. 4월 12일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시편 22편)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나이다 4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5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7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예언 시편 전체는 하나의 흐름을 가지고 구성되어 있는데, 목자의 시라고 불리는 시편 22, 23, 24편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언하는 뚜렷한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 중 22편은 선한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통한 승리를 예언한 시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라고 절규하셨다. 이 말씀과 동일한 절규로 시작되는 22편은 다윗이 기록한 유명한 메시야 예언시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다윗 개인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신앙적 고백이지만, 내적으로는 성령께서 다윗을 감동시키셔서 하나님 자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메시야로 오실 것을 예언하게 하신 것이다. 약 1천 년의 시대적 간격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예수님의 수난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고, 그 예언한 것이 이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대로 이루어짐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심오함과 그 은혜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다윗이 온갖 고통 가운데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였던 것을 보면서 우리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믿음의 자세를 배우게 된다. 또한 하나님께 나아오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으시고 반드시 응답하시고 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뿐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기꺼이 당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마음 깊이 느끼게 된다. 4월 13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23편)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내게 부족함이 없도다 시편 23편은 6절로 된 짦은 글이지만 다윗이 자기의 일생 동안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완벽하고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어 마치 잘 그려진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이 우리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준다. 시편 22편이 선한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과거의 사역을 통해 은혜 베풀어주신 것을 노래하고 있다면 23편에서는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히13:20)의 인생들을 위한 현재적 사역과 능력을 노래하고 있다. 시편 23편의 주제는 ‘내게 부족함이 없다’라는 1절 말씀이다. 부족함이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셔서 쉼을 주시기 때문이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셔서 회복과 의를 이루어주시기 때문이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셔서 보호해주시기 때문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게’하셔서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예비해주시기 때문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 수 있도록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날 때 가야 할 집이 있게 해주셨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심을 온전히 믿을 때 다윗과 같이 나의 목자이신 하나님으로 인해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다. 4월 14일 만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찬양 (시편 24편) 1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2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4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5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6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7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8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오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9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10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유대 전승에 의하면 이 시는 다윗이 법궤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것을 기념하여 지은 찬양시이다. 아마도 이 시편은 합창단과 독창자가 서로 화답하며 불렀던 것 같다. 합창단이 1-2절을 부른 뒤 독창자가 이에 응답하여 3절을 부르고, 또 다른 독창자가 4-5절을 부른다. 합창단이 7절을 부르면, 독창자가 8절의 ‘영광의 왕이 누구냐’ 질문하고 합창단이 ‘강하고 능하신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고 화답한다. 1,2절에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찬양한 후 3,4절에서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냐고 질문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예배할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행실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고,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않으며 거짓 맹세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는 자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고, 거룩한 하나님의 산에 올라가 그 분 앞에 설 수 있음을 알려준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우리의 자세는 과연 어떠한지 이 말씀에 비추어보아야 하겠다. 7-9절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가 이스라엘로 돌아올 때 성소의 문을 활짝 열고 맞아들일 것을 표현하고 있는데, 십자가 수난을 당하신 예수님이 부활 후 영광된 모습으로 하늘 보좌에 오르시는 모습을 예언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시편은 초대 교회 당시 ‘예수승천일’에 많이 낭송되었고 오늘날에도 부활절에 교회에서 낭송하곤 한다. 인생들을 위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높고 광대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며 오 늘 하루도 하나님의 복을 받는 참된 예배자의 자세로 살아가자! 4월 15일 하나님께 드리는 기쁨의 찬양 (시편 33편) 1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2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3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 4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 5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7 그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8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상의 모든 거민들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9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10 여호와께서 나라들의 계획을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하게 하시도다 11 여호와의 계획은 대대에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12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가장 복되고 즐거운 일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시편 33편3절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라는 말씀에 감동을 받아 매주 새로운 찬양곡을 작곡하여 그것을 주일예배에서 성가대로 하여금 부르게 하였다.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백성들이 수금과 비파로, 새 노래로 즐겁게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권면하는 시편 33편은 공중 예배 때 사용한 장엄한 감사 예배시이다. 수금은 오늘날의 기타와 비슷하고, 비파는 하프와 비슷한 악기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견고하게 서게 되었다. 인생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대대에 이를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가장 복되고 즐거운 일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 역사를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자신의 주(Lord)로 모시고 섬기는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자신의 주로 모시고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기업이 되어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하며 찬양할 때 우리를 위해 온 천하 만물을 아름답고 조화롭게 창조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쁨과 감격으로 드리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하겠다. 4월 16일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시편 37편1-11절) 1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라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2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3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 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5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6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9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 11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때로 세상에서 선한 사람들보다 악한 꾀를 쓰는 사람들이 더 잘되는 것 같아 보일 때 우리는 스스로 질문한다. 선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오히려 불이익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만난다면 도대체 정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으며, 공의의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하버드대학의 교수인 마이클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써서 베스트 셀러가 되었으나 정작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은 없고 책 제목과 같이 정의란 무엇인지 계속 질문만 던지고 있다. 다윗이 노년에 쓴 것으로 추측되는 시편 37편은 이러한 우리들의 의문에 대답하는 교훈을 준다. 다윗은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고, 악한 꾀를 써서 잘 사는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을 시기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눈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더딘 것 같아 보이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고 계시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 공의롭게 판단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눈에 모순되게 보이는 현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공의로운 섭리를 믿고 선한 일을 행하기에 힘쓰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의 마땅한 본분이다. 정의로우신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어주시고, 그들의 의를 빛 같이 나타내주신다고 약속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치 여름 햇빛에 말라 시들고 마침내 베임을 당하는 풀과 같이 사라져버릴 악인들 때문에 불평하고 근심하면서 시간과 힘을 낭비하지 말자. 오직 하나님을 기뻐하고, 우리의 모든 계획과 소망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을 믿고 기다리면서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자. 4월 17일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시편 40편 1-8절) 1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2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3 새 노래 곧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4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5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6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7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8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기가 막힐 웅덩이에서 건짐을 받은 자의 새 노래 시편 40편은 6-8절에서 그리스도의 탄생을 내다보고 있기 때문에 ‘성탄의 시’라고도 불려진다. 다윗이 ‘기가 막힐 웅덩이’에 빠져서, 곧 극심한 곤경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기다렸더니 하나님이 들으시고 마침내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다고 고백한다. ‘기가 막힐 웅덩이’를 공동번역 성경에는 죽음의 구렁으로, 새번역 성경에는 멸망의 구덩이로 표현하고 있다. 수렁은 한번 몸이 빠지면 점점 깊이 들어가는 늪지대로써 도저히 살아날 수 없는 위기 상황을 의미한다. 그러나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다’는 다윗의 고백대로 하나님은 그를 안전하고 견고하게 보호해주심으로써 그가 처했던 기가 막힐 웅덩이와 극적으로 대조되는 구원을 이루어주셨다. 1-3절의 말씀은 곤경으로부터 다윗이 구원받은 것을 묘사하고 있으나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부활하실 것에 대한 상징이기도 하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의 구덩이로 내려가셨고, 우리의 죄를 대신 갚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자신의 몸에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으니 그것이 얼마나 깊고 혹독한 구덩이였을지 상상할 수 있다. 혹시 오늘 나에게도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 빠진 것 같은 문제가 있는가? 다윗과 같이 하나님께 간구하자.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셔서 곤경에서 건져주시고, 마침내 그 옛날 다윗에게 행하신 것같이 하나님께 올려드릴 새 노래를 우리의 입에 주셔서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해주실 것이다. 할렐루야! 4월 18일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한 영혼 (시편 42편 1-5절)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3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시편의 편집자는 시편 전체를 모세오경의 구조를 도입하여 5권으로 나누어 정리하였다. 1권은 1-41편까지이며 창세기와 비교하여 창조주와 인간을 주제로 한 시편들로 구성된다. 2권은 42-72편으로 출애굽기와 비교하여 해방과 구속의 주제를 다루었고, 3권은 73편-89편으로 레위기와 비교하여 예배와 성소의 주제를 다루었고, 4권은 90-106편으로 민수기와 비교하여 순례길에 있는 인생을 주제로 하고 있다. 마지막 5권은 107-150편으로 신명기와 비교하여 말씀과 찬양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시편 42편을 고백하는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것이 마치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다고 토로하고 있다. 물이 귀한 중동지방에서 심한 갈증으로 물을 찾아 헤매는 사슴이 물을 찾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듯이 생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은혜가 없다면 우리도 영적으로 죽은 자가 될 수밖에 없음을 생각하게 해준다. 시인은 또한 자신이 처한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면서 스스로에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불안해하느냐’고 질문한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와주심으로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라’고 대답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신의 믿음을 일으켜 세운다. 우리도 심한 갈증으로 목말라 물을 찾는 것과 같이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고 있는지,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분의 은혜를 구하고 있는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자. 4월 19일 우리의 피난처이신 하나님 (시편 46편) 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2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3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 4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는도다 5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6 뭇 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렸더니 그가 소리를 내시매 땅이 녹았도다 7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 10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11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오늘도 여전히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 고라 자손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시편 46편은 열왕기하 19장에 기록된 사건, 즉 히스기야 왕의 통치 시절 앗수르 왕 산헤립의 침략으로 예루살렘이 멸망당할 위기에 놓였을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예루살렘을 구원해주신 사건을 배경으로 기록한 시이다. 시편 46편은 우리가 찬양으로 많이 부르는 친숙한 시이기도 하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여 홍해 앞에 이르렀을 때 뒤에서는 추격해오는 애굽 군사들의 위협과,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는 위급한 상황에서 모세가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14:13-14)’고 말한 것을 생각나게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끊임없는 자연재해와 테러, 전쟁 등으로 우리를 두려움과 불안으로 몰아간다. 그러나 시인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고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다. 사탄의 세력이 아무리 강한 것 같아도 결국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손길 아래에 있고, 하나님은 지상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의 날개 아래 보호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그분의 일하심을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자녀인 우리의 마땅한 본분이다. 하나님이 성 중에 계셔서 성이 흔들리지 아니하듯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가 어떠한 형편에서도 요동하지 않음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오늘도 하루를 살아가자! 4월 20일 새벽을 깨우리로다 (시편 57:1-11) 1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가기까지 피하리이다 ... 7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8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9 주여 내가 만민 중에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10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11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다윗의 믿음 시편 57편은 다윗이 사울 왕의 핍박으로 인해 망명생활을 하면서 쓴 10여 편의 비탄 시 중 하나이다. 사무엘상 22장과 23장에 보면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피해 아둘람 굴이나 엔게디 굴에 피신해 있었는데 이 때를 배경으로 기록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목숨이 위협받는 위태로운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간구하며 자신에게 닥친 재앙이 지나가기까지 하나님의 안전한 보호 안에 머물러있기를 갈망한다. 다윗은 비록 지금은 자신이 쫓겨 다니는 신세이지만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잃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환난으로부터 구해주실 것을 확신하였으므로 도피생활의 곤고함 가운데서도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확정되어 있다고 거듭 고백할 수 있었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다. 다윗의 믿음의 고백을 보면서 우리의 믿음은 얼마나 미약한지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생명의 위협은커녕 일상에서 조금만 어려운 일이 닥쳐도 낙심하고 좌절하며,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난 것을 괴로워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곤 한다. 다윗을 보며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다시 굳게 세우자.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하며 새벽을 깨우는 믿음으로 오늘도 하루의 일상을 살아가자! 4월 21일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 (시편 62:1-7) 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2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3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4 그들이 그를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셀라) 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6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7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요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잠잠히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자 시편 62편은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비탄과 슬픔 가운데 있을 때 기록하였다. 다윗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특별한 복을 받은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일생은 평탄치 못했다. 왕이 되기 전에는 그의 선왕 사울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 왕이 된 후에는 그의 정적들로부터, 심지어 노년에는 자신의 왕위를 노리는 아들 압살롬으로부터 수많은 핍박과 도전을 받는 일생을 살았다. 그러한 일생 가운데 다윗은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라고 고백하며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반석이시고 요새이시며 구원이시라고 노래하였다. 다윗은 환난에 처한 자가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인간적인 방법과 생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석, 구원, 산성,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그분께 소망을 두고 잠잠히 기다릴 때 주어진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다윗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일을 위해 선택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육신의 세상에서는 많은 고난을 겪었듯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도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모든 일이 형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처한 현실이 때로 우리를 격동시킬지라도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는 자세, 이것은 인간의 이성과 능력이 어느 때보다도 높게 평가되며 우상시되는 현대에 우리에게 가장 요구되는 신앙 자세라고 할 수 있다. 4월 22일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 (시편 65:4-9) 4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5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바다에 있는 자가 의지할 주께서 의를 따라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 6 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 7 바다의 설렘과 물결의 흔들림과 만민의 소요까지 진정하시나이다 ... 9 땅을 돌보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을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그들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 다윗이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권능과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적, 물질적 은총에 대해 감사하며 지은 이 시는 이스라엘의 초막절 같은 절기에 낭송되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은총은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으로 나눌 수 있다. 태양과 공기, 물, 사시사철의 변화와 그에 따른 수확 등은 전 인류가 공유하며 누리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이다. 죄를 용서하시고, 기도에 응답하시며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누리며 살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특별은총이다. 다윗은 자신이 누리는 특별한 은혜를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물론 일상생활 전체를 돌아볼 때 알게 모르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크고 풍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깨닫고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쁨으로 찬양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 자신은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를 얼마나 많이 깨닫고 있는가? 만일 그 충분한 이유를 깨닫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우리의 그릇된 신앙 태도 때문일 수 있다. 세상의 것들에 눈과 마음이 가려져있기 때문일 수 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주신다. 은혜를 은혜로 깨닫고 찬양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열려지기를 기도하자. 4월 23일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시편 84:5-12) 5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6 그들이 눈물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주나이다 7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 9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11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12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시편의 편집자는 시편 전체를 모세오경의 구조를 도입하여 5권으로 나누어 정리하였는데, 1권은 1-41편까지이며 창세기와 비교하여 창조주와 인간을 주제로 한 시편들로 구성된다. 2권은 42-72편으로 출애굽기와 비교하여 해방과 구속의 주제를 다루었고, 3권은 73편-89편으로 레위기와 비교하여 예배와 성소의 주제를 다루었고, 4권은 90-106편으로 민수기와 비교하여 순례길에 있는 인생을 주제로 하고 있다. 마지막 5권은 107-150편으로 신명기와 비교하여 말씀과 찬양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3권에 속하는 시편 84편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성전에 들어갈 때에 제사장이 부르던 노래이다. 이것을 기록한 시인은 주의 장막에 있기를 사모하며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낫다고 노래한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하루가 하나님 없이 천 날을 사는 것보다 귀중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성전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다고 고백하는데, 악인의 장막은 아무리 부요하고 안락해 보일지라도 결국은 사라져버리는 헛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삶의 여정에서 우리는 매일 무엇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그 선택의 기준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비록 외형적으로 볼품없이 낮고 초라해 보인다 할지라도 진정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곳,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을 선택하여 정직하게 행함으로써 우리에게 해와 방패가 되시며 은혜와 영광을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 안에서 살아가자. 4월 24일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시편 90:10-17)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13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14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15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16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17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모세의 기도 시편 90편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적 행동으로 인해 출애굽 1세대가 광야에서 진멸되리라는 하나님의 진노의 말씀이 있었을 때(민수기14:11-12) 민족의 지도자로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중보자 역할을 했던 모세가 지은 ‘민족애가’이다. 따라서 이 시는 성경에 수록된 시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모세는 파란만장한 인생 여정을 지나오면서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는 풀과 같이 짧은 시간을 살아가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달았다. 인간이 세상에서 생명을 누리며 오랜 세월을 사는 것 같으나 그 시간은 마치 날아가는 것 같고, 수고와 슬픔이 가득할 뿐임을 회상하며 인간이 진정으로 의지하고 섬겨야할 분은 하나님 한분이심을 교훈한다. 인생은 시작한 날이 있으면 반드시 끝낼 때가 있다. 시간적 유한한 삶을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야할지 깨닫는 지혜가 필요한데 모세는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 유한한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전능자이며 창조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참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얻게 해달라는 간구이다. 우리도 각자 인생의 어느 시점에 서 있는지, 앞으로 나아갈 길이 어디인지 볼 수 있는 지혜를 하나님께 구하자. ‘우리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라는 모세의 간구처럼 하나님이 우리의 수고와 헌신을 견고하게 세워주셔서 복된 인생이 되기를 기도하자. 4월 25일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시편 100:1-5) 1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2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3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4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전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5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감사와 찬양 시편 100편은 성전에서 감사제를 드릴 때 사용된 감사예배시인데 오늘 날에도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예배드릴 때 사용하고 있으며 회중과 성가대가 교창으로 부른다. 이 세상에서 살다 보면 과중한 일로 인한 육체적인 피로, 삶의 목적과 의미 상실, 해결하기 어려운 삶의 문제 등으로 인해 낙심과 절망에 빠질 때가 있다. 혹은 특별한 이유 없이 우울하고 자신 안에 갇혀 답답하고 무기력한 시간을 보낼 때도 있다. 원인이 무엇이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마음 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좋은 해결방법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감사와 찬양이다. 비록 감사와 찬양이 우러나지 않을지라도 잠시 나로부터 빠져나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돌보시 는 자연을 바라보며, 또 지금까지의 자신의 인생길을 돌아보며 감사한 일들을 찾아보자. 점차 감사한 일들이 떠오르며, 그동안 감사하지 못하고 스쳐 지나온 것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감사의 제목들을 주셨고, 앞으로 더욱 많은 감사할 일들을 주실 것이라는 소망이 생기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의 노래가 나오고, 낙심과 절망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생기며, 마음의 평안이 회복될 것이다. 하나님은 감사하며 찬송하는 이들의 영혼 가운데 임하신다. 오늘도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시며 인자와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는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송으로 나아가자! 4월 26일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시편103:1-15) 2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3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4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5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6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 ... 8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 12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15 인생은 그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하나님의 선하심 노년기에 이르러 자신의 지나온 생애를 돌아본 다윗은 자신에게 베푸신 모든 하나님의 은혜를 회상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다윗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하는 많은 시들을 썼고, 이것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도록 촉구하였다. 다윗을 포함한 시편 기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기억하며 찬양하였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이 기억하는 과거의 사건들이 모두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다. 조상들의 패역에 대해 솔직하게 지적하기도 했고, 그들의 패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겠다는 약속을 지킨 사실로 인해 기쁨과 감사를 표현하였다. 시편 103편은 과거의 질병과 압제, 죄악과 반역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놀랍게도 그 모든 부정적인 요소들을 선한 것으로 바꾸어주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알고 계시고 인정하시므로 우리의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베푸신다. 다윗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은 먼지뿐이며 그날이 풀과 같고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이 허무한 것이지만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워주시며, 좋은 것으로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어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해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오늘 하루도 아무런 은혜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은혜 베푸시는 선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자. 4월 27일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시편 139:1-10) 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다윗의 영적 비결 이스라엘 역사상 여호와 하나님은 다윗의 하나님이라고 불리기도 했을 만큼 다윗은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다윗이 하나님과 이렇게 밀접한 관계를 이룰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다윗이 지은 시편들은 그가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삶을 살려고 노력했음을 보여준다. 어디에나 계시며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인간을 지으셨고, 인간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는 삶을 살고자 하였다. 다윗은 또한 하나님이 자신을 귀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죽음의 위기를 모면한 후 ‘여호와께서 ... 나를 기뻐하심으로 구원하셨도다’라고 외치며,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행동과 습관, 행위와 혀의 말, 우리의 마음과 뜻을 다 알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이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게 했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했던 것처럼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피할 자도 숨을 자도 없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진실해야 하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나아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면서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지켜주심을 믿으며 다윗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삶을 살고자 노력하자. 4월 28일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시편 126:1-6) 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2 그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때에 뭇 나라 가운데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3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4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같이 돌려보내소서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큰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1999년 11월 영국 BBC 방송은 여론조사를 통해 ‘지난 1천년 동안의 최고의 탐험가 10명을 선정하였다. 그중에는 어니스트 섀클턴이라는 사람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는 얼핏 보면 실패한 탐험가였다. 그는 1914년 27명의 대원과 함께 세계 최초로 남극대륙을 횡단하기 위해 출발하였으나 목적지를 150Km 앞두고 부빙(물 위에 떠다니는 얼음덩어리)에 갇혀버렸고, 이후 배마저 부서진 상황에서 출항한지 18개월 만에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그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이유는 수많은 죽음의 고비들을 견디어 내며 27명의 대원을 한 명도 잃지 않고 함께 귀환했기 때문이다. 섀클턴은 그때를 회상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얼음산을 넘을 때 일행은 분명 세 명이었는데 난 마치 네 명인 것처럼 느꼈다. 이상하게 생각되어 동료들에게 물어보니 그들도 그랬다는 것이다.’ 섀클턴과 동료들은 위기의 순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분의 일하심을 느꼈던 것이다. 시편 126편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고국으로 귀환하는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그들은 이 일을 예상하거나 기대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심지어 불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고 고백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큰일을 행하셔서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대로 그들을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셨다. 하나님은 오늘 날 우리에게도 큰일을 행하신다. 어떤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을지라도 하나님을 소망하고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에게 반드시 기쁨으로 결실하는 날을 허락하신다. 4월 29일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자 (시편 112:1-6) 1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3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 4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 5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 6 그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억되리로다 삶의 베이스캠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 산 정상 8848m를 처음으로 등반한 사람은 1953년 에드먼드 힐러리 경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 오른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으나 이제는 세계의 많은 산악인들이 에베레스트 산을 등반하고 있다. 이것이 가능해진 이유는 장비나 기술면에서의 발전도 있지만 가장 큰 비밀은 베이스캠프에 있다. 에드먼드 힐러리가 등반할 당시는 해발 고도 3000-3500m에 베이스캠프를 세우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 위치가 훨씬 높아져 5000m 넘는 곳에 베이스캠프를 세운다. 이로 인해 베이스캠프를 출발하여 정상에 도달하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만일 실패하여 재도전을 해야 할 때도 빠른 시간 안에 재정비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이전보다 더 많은 이들이 에베레스트를 등정할 수 있게 되었다.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는 기반을 마련해주는 베이스캠프처럼 가정은 더 넓고 높은 삶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는 곳이다. 우리의 가정이 자리 잡아야할 곳은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계명을 즐거워하는 자에게는 후대에게 복을 내리시며, 부요와 재물로 그 집을 채우시며, 그 의가 영원하여 흑암 중에서도 빛이 일어나리라고 시편 기자는 말한다. 삶의 베이스캠프인 우리의 가정이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 안에 자리 잡게 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우리 가정의 자양분으로 삼아야 하겠다. 더 높은 곳을 향하는 우리의 여정이 가정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4월 30일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시편 150:1-6) 1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2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 3 나팔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4 소고 치고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5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6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 시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들로 가득 차 있다. 특히 시편 146편부터 150편까지의 다섯 편은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나는 ‘할렐루야시편’이고, 마지막 150편은 ‘대할렐루야시편(The Great Hallelujah)'이라고 부른다. 시편 150편은 여섯 절로 이루어진 짧은 시이지만 ‘찬양하라’는 표현이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의 할렐루야를 포함하여 열세 번이나 나온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여 함이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며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찬양은 노래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찬양한다는 말에는 칭찬한다, 그 훌륭함을 드러낸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과 그분의 전지전능하심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150편을 기록한 시편기자는 전심전력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할 것을 표현하기 위해 모든 악기를 동원한다. 나팔과 비파, 수금과 소고, 현악기와 퉁소, 오늘날의 심벌즈와 유사한 제금 등 연주할 수 있는 모든 악기에 더하여 호흡이 있는 모든 자마다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노래한다.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의 자세가 오늘날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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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림교회
2019년 3월 25일
In 365일 말씀묵상
사순절 제 1일 욥의 회개 (욥기 42:1-6)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2 주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재의 수요일 Aschermittwoch 오늘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Aschermittwoch/Ash Wednesday)이다. 사순절 동안 성도는 주님의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 먼저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신앙의 성장을 위해 영적으로 준비한다.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속죄일이라고도 함)에서 시작되어 성금요일에 끝난다. 성서에서 재는 슬픔과 죄에 대한 회개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지금도 재의 수요일에 일부 개신 교회와 가톨릭교회에서는 전년도 종려주일에 사용하였던 종려가지를 태워 만든 숯을 사용해 성도들의 이마에 십자가를 그려 넣으며 회개의 예식을 행한다.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욥1:1)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한 욥이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을 당하자 심한 고통 중에 괴로워하였다. 고난이 시작되었을 때 욥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굳게 지키었으나 고통이 점점 심해지자 하나님을 원망하며 자신의 출생을 저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질문 앞에서 인간의 연약함과 죄성을 깨닫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였다. 아랍어 ‘아바’(회개하다)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이는 욥이라는 이름은 ‘회개하는 자’라는 뜻이다. 우리가 때로 믿음에 굳건히 서있다고 스스로 생각할지라도, 세상 속에서 자신의 지식이나 노력, 성과를 자랑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 그 모든 것은 티끌만도 못하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순절을 시작하며 우리도 욥과 같이 스스로를 거두어들이는 겸손한 자세로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며 하나님께서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간구하자. 사순절 제 2일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더니 (마가복음 1:32-39) 32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34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3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서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사순절을 시작하며 예수님은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치유하랴, 귀신을 내어쫓으랴, 제자들을 가르치랴, 이곳저곳을 다니며 성전에서 설교하시랴 ... 쉴 새 없는 활동으로 가득 찬 일정을 보내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을 기록한 성경 말씀 가운데 ‘아주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일어나서 외딴 곳으로 나가셔서, 거기서 기도하고 계셨다’라는 말씀을 접한다.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사역의 비밀은 그 분이 아침 일찍, 새벽 동이 트기 전, 기도하러 가셨던 저 외딴 곳에 숨겨져 있다. 본질 상 하나님과 한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며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자신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행할 힘과 용기, 겸손함을 충전하셨다. 어딘가 외딴 곳이 없이 분주하게 달려가기만 하는 우리의 삶은 위험에 빠지기 쉽다. 침묵이나 경청함 없이 계속되는 말은 능력을 갖지 못하고 공허해진다. 침묵과 말 사이, 물러남과 참여함 사이, 거리를 유지하는 것과 가까이 다가가는 것 사이, 홀로 있는 것과 공동체 안에 있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밑바탕을 이룬다. 한 해를 시작한 후 우리는 마치 출발점을 출발한 육상선수들처럼 달려왔다. 사순절을 지내면서 빠르게 달리던 길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삶의 중심에서 한발 물러서서 우리의 달려가는 길의 방향과 목적이 바르게 설정되어 있는지 살펴보자.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이른 새벽 외딴 곳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자신이 있는지 점검해보자. 사순절 제 3일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요엘 2:12-17) 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14 주께서 혹시 마음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15 너희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라 사순절의 의미 회복 사순절을 의미하는 독일어 Fasten, Fastenzeit는 금식, 금식기간을 뜻한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신 것, 온 인류의 죄를 대신 갚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을 기억하고 성도들도 금식, 혹은 단식하면서 함께 그 고난에 참여하며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절기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 초기에는 사순절 기간 동안 금식을 매우 강조하였고 이를 엄격하게 시행하였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유럽에서는 사순절 금식절기가 시작되기 전에 실컷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며 즐기는 카니발이 생겨났는데, Carnival이란 단어는 '육식이여 안녕'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순절의 외형적인 준수가 아니라 내면적인 준수이다. 비록 40일 동안 금식을 하지는 않을지라도 이 기간 동안 세상적인 오락을 삼가고, 불우한 처지에 있는 이웃들을 돌아보며,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끊어내고자 애쓰는 시간으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 경건과 절제, 희생과 나눔, 성찰과 회복이 사순절의 진정한 의미이며, 나로부터 시작되는 사순절의 의미 회복은 나 자신 뿐 아니라 우리의 공동체를 변화시킨다. 요엘 선지자는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의 신앙 모습은 어떠한지 돌아보고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사순절을 지내며 진정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를 체험하자! 사순절 제 4일 예수님이 받으신 세 가지 시험 (마태복음 4:1-11)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말씀으로 돌아가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에서 사십 일을 금식하셨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다고 기록된 것을 볼 때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세 가지 차원의 시험을 겪으셨다. 첫 번째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시험이었다. 두 번째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는 정신적이고 명예적인 시험이었다. 세 번째는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는 영적인 시험이었다. 예수님은 모든 차원의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심으로써 이 세상에서 시험을 당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시험을 이길 수 있도록 본을 보여주셨다. 사탄은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것을 방해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고 유혹하며, 하나님의 길을 따르지 않고 각기 자기의 길로 가게 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한다. 예수님이 시험받으실 때에 말씀으로 시험을 이기신 것은 우리도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말씀을 붙들어야 하며,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형질이 강하고 단단하게 변화되어야 함을 가르쳐주신다. 사순절을 지내며 우리 각자는 신앙적으로 더 성숙해지기 위하여 각자 결심하고 목표한 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사탄의 시험으로 흔들릴 때 즉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말씀 안에 깊이 잠김으로써 시험을 이기고 오히려 신앙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은혜를 체험하자! 사순절 제 5일 변형되신 예수님 (마가복음 9:2-8)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3 그 옷에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7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8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예수님을 바라보자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그들 앞에서 본래적인 신적 형상으로 변화하셨고,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모세는 가장 위대한 선지자가 오실 것을 예언하였고(신18:15-19) 엘리야는 장차 메시야가 오실 것을 예언한 모든 선지자들을 대표한다. 예수님이 변형되신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은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야의 도래가 바로 예수님이 오심으로 성취되었음을 알려준다. 이 사실을 확증해주듯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에게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앞으로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의 고난을 마주하게 될 제자들은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봄으로써 이미 부활에 대해 알면서 십자가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사순절을 지내며 금식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고자 애쓰는 우리의 결심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들이 많이 있다. 매일 해야 할 일들이 파도처럼 밀려오는가하면 우리의 관심을 빼앗아갈 만큼 중요하게 생각되는 일들, 육신의 즐거움을 주는 일들이 우리의 우선순위를 바꾸어 놓는다. 이럴 때마다 변화산에서 자신의 본래적 모습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또한 그 영광의 자리를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멸시와 수치 가운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 기꺼이 헌신할 수 있는 것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을 바라보기 때문이며, 하나님 나라에서 참여하게 될 영광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사순절 제 6일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1 (마태복음 5:13-16)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리켜 세상의 소금이라고 부르심으로써 제자들에게 이 땅에서의 사명을 부여하셨다. 소금은 지상에서의 삶에 있어 필수적인 물질이다. 소금은 변하지 않으며, 부패를 방지하고 정화시키는 힘으로 여겨진다. 레위기 2:13에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물에서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고 기록하며 소금을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이라고 표현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너희는 소금이다’라고 선포하셨다. 주님이 제자로 부르신 그 부르심의 힘 속에서 이미 제자들은 소금의 존재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눈에 보이는 상징이었던 소금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감당해야 할 역할로 표현하셨다. 오늘날 소금으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인의 역할은 세상을 내적으로 변화시키며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고 정화시키는 영향력이라 할 수 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가치가 없듯이 그리스도인이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무가치한 그리스도인,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이 되고 말 것이다. 사순절을 지내며 우리 자신의 소금으로써의 정체성을 깊이 생각해보자. 소금의 존재가 귀하듯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하는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귀한 존재들임을 자각하고 이 세상에서 소금과 같이 맛을 내며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노력해야 하겠다. 사순절 제 7일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2 (마태복음 5:13-16)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부름 자체가 제자들을 빛으로 만들었으며, 빛이기 때문에 원하던 원하지 않던 더 이상 숨겨진 채로 있을 수 없게 되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가장 먼저 빛을 창조하셨다. 사도 요한은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라며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참 빛임을 선포하였다.(요1:9) 예수님은 이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제자들, 나아가 우리들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다. 빛은 선함과 순수함, 진실 그리고 거룩함의 상징이다. 어둠 속에서 선과 악은 똑같이 보이나 빛이 비치면 선과 악은 분명하게 구분된다. 소금이 내적인 성품의 변화라고 한다면 빛은 그리스도인들의 선한 행실을 통해 하나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외적인 간증이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사순절을 지내며 우리를 제자로 부르셔서 빛이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마음 깊이 새겨보자.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빛을 받아 생명력 있는 그 빛으로 세상을 밝게 비추는 제자의 삶, 어둠 가운데 있는 이들을 빛으로 인도하는 삶, 빛으로 어두움을 이기는 삶을 살아갈 것을 결단하고, 실천하고자 노력하자. 사순절 제 8일 겟세마네에서의 기도 (누가복음 22:39-46) 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40 그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41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예수님은 늘 하시던 대로 기도하러 감람산에 가셨고, 제자들도 따라 갔다. 십자가를 져야 하는 고통 스러운 과제 앞에서 예수님은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기까지 기도하시며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순종시키셨다. 겟세마네동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함께 기도할 제자가 필요했다.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으나 제자들은 주님의 요청에 함께하지 못했다. 피곤한 육신이 말을 듣지 않았고, 내적인 시험과 무기력함이 그들을 지배하였다.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일어나라 함께 가자’(마26:46)고 말씀하셨다. 사순절에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권고는 분명하다. 일어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가자는 것이다. 제자들은 십자가의 길에서 시험을 당하고 있었다. 주님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 기도함으로써 세상에서 다가오는 시험을 이기라고 하신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순종시키신 주님이 자신의 십자가를 지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과 함께 가야 한다. 함께 가는 길은 그냥 따라나서는 길이 아니다. 함께 가는 길에는 저마다 책임이 따른다. ‘함께 가자’는 말씀에는 또한 공동체의 위로와 용기도 들어있다. 함께 가면 슬픔과 두려움은 가벼워지고 기쁨과 사랑은 배가 된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같이 가자’고... 사순절 제 9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요한복음 12:20-26)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그들이 갈릴리 벳세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열매 맺는 죽음 명절에 예루살렘을 찾아온 헬라인 몇 명이 예수님을 뵙고자 청했다. 그들은 아마도 예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보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 지상에서의 명예와 권위를 얻고자 했던 것 같다.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고자 한다는 것을 전해들은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답을 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광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의미하는데,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영광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게 될 것이며, 이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 때문이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예수님도 한 알의 밀이 되어 죽을 것이며, 그로 인해 많은 이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므로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도 이와 같이 자신을 희생해서 많은 열매를 거두어야할 것을 가르쳐주셨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사람, 곧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됨을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을 만나고자 찾아온 헬라인들의 잘못된 의도에 응답하셨다. 사순절을 지내는 우리에게 주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이론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원하는 우리 모두가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하는 실제적인 말씀이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하며 실천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자. 사순절 제 10일 거룩한 산 제물 (로마서 12:1-3)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영적 예배로 변화되는 삶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자신의 죄를 대신 갚게 하기 위해 흠이 없는 짐승을 잡아서 죽은 예물을 드렸다. 죄 없는 수많은 짐승이 죄 있는 인간을 위해 흘린 피를 이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모든 인간들의 죄의 값을 치러주셨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려야 한다고 권면한다. 우리의 매일의 삶이 거룩하고 정결해져 하나님께 드려지는 영적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를 방해한다. 사도 바울의 시대나 지금이나 이 세상은 불의하고, 부패하고, 이기적이며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이들을 교묘하게 유혹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권면한다. 우리가 사는 세대에서 본받지 말아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사순절을 지내며 이 질문을 각자에게 하며 진지하게 답을 찾아보자.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마음의 무릎을 꿇고 자신의 내면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세상적인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것은 무엇인지 찾아서 내어버리고, 우리들 각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갈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로 변화되어 갈 것이다. 사순절 제 11일 나를 따라 오라 (마가복음 1:16-22)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21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제자직으로의 부르심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아 생활하던 어부들에게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마가복음 1장에는 ‘곧’이라는 단어가 7번이나 나온다. 마가는 복음서를 매우 간결한 문체로 기록하면서 곧, 즉시라는 단어들을 사용하여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어부들은 생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앞날이 어떻게 전개될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으나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하여 생업의 도구인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다. ‘나를 따라 오라’는 부르심에 대한 제자들의 응답은 말로만 하는 신앙고백이 아니라 순종하는 행동으로 나타났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제자직으로 부르신다. 주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것은 자신으로부터 나와 부르신 분의 삶의 목표와 방향을 향해 가는 것이다. 더 이상 자신의 과거의 경험이나 현재의 상황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부르신 분의 미래를 공유하며 나아가는 새로운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표현하였다. 사순절을 지내며 우리를 제자직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곧 순종하여 주님의 제자로서 새로운 존재로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하고, 성령께서 도와주시기를 간구하자. 사순절 제 12일 과부와 불의한 재판장 (누가복음 18:1-8) 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기도를 회복하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한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를 사용하셨다. 한 과부가 몹시 억울한 일을 당해 그 원한을 풀어달라고 자주 재판장을 찾아가 호소하였다. 재판장은 그러나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었고, 오히려 하나님조차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교만하고 무정한 사람이었다. 과부에 대한 동정심도 없었고, 약한 자의 억울함을 풀어주려는 정의감도 없었으나 단지 과부가 계속 자신을 번거롭게 하는 것이 싫어서 그의 원한을 풀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장도 자신이 번거롭게 되는 것이 싫어서 과부의 호소를 들어주는데 하물며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자녀들이 밤낮 부르짖는 것을 들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고 질문하며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믿음으로 기도해야 함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직접 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시고, 습관을 따라 이른 아침 기도하시는 기도의 본을 보여주셨고, 초대 교회 사도들과 성도들도 오로지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고 사도행전은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때로 형식적으로 기도하고, 때로는 간단히 기도하며 ‘이만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위안을 삼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께 전심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 사순절을 지내며 우리의 안일한 기도생활을 회개하고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는 기도를 회복하자! 사순절 제 13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마가복음 2:13-17) 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용서받은 죄인 갈릴리 해변을 지나가다가 어부인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은 그 후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레위는 그 말씀에 즉시 반응하여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 갔다. 레위는 - 아마도 예수님을 만나 그분을 따르게 된 것에 감격하여 - 자신의 집에 예수님을 모시고 제자들, 동료 세리들과 유대인들이 죄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초청하여 함께 식사를 하였다. 당시 세리(세관원)는 유대인들로부터 배척당하는 죄인이었다.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거둬서 점령국인 로마에 바칠 뿐 아니라 많은 부분을 떼어서 자신들이 착복했기 때문이었다. 유대교 지도자인 서기관들이 어떻게 예수님과 제자들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냐고 책망하자 예수님은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한 것이고, 자신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대답하셨다.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고 용기를 준다. 죄인인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직접 이 세상에 오셔서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우리를 불러주시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스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채로 살아갈지라도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용서받은 죄인이다. 사순절을 지내면서 나 같은 죄인까지도 불러서 제자로 삼으시고자 이 땅에 오셔서 고난당하신 주님의 은혜를 묵상하며 은혜에 보답하는 주님의 제자로 살아갈 것을 결단하자. 사순절 제 14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평강의 하나님 (빌립보서 4:6-8)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우리의 생각을 주 예수께 고정시키자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권면한다. 이 말을 쉽게 표현하면 ‘모든 생각을 덕 있는 것과 선한 것들과 옳은 것들에 집중시키고 고정시키라’는 뜻이다. 이것은 인생의 유한한 시간을 세상의 무익한 것들에 낭비하지 않고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바꾸어 가기 위해 오신 예수님께 삶의 무게중심을 두고, 그분을 따라 가는 것이다. 요한복음 14:1-14까지 믿으라는 말과 예수님을 안다는 말이 10회 이상 나온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 분을 제대로 알고 믿기를 원하시는 간절한 소망과 기대를 가지고 계신다. ‘믿으라’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시키고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와 사귐을 통해 친밀한 관계로 나아가라는 뜻이다.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이룬 사람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뢸 수 있게 되며,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고 평안하게 하시는 선순환의 작용이 일어난다. 사순절 세 번째 주간을 지내며 세상을 향한 우리의 초점을 주님께로 돌리자. 우리의 죄를 갚아주시 기 위해 주님이 대신 지신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자. 십자가에서 흘린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자. 사순절 제 15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누가복음 17:5-10)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7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순종과 겸손 누가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수평적 관계인 이웃과의 삶에 서, 그리고 수직적인 관계인 하나님과의 삶에서 가져야 할 덕목과 교훈들을 말씀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교훈들을 실천할 수 있도록 믿음의 분량을 더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큰 능력을 행할 수 있음을 말씀하시며 믿음의 질적인 면을 강조하셨다. 겨자씨는 매우 작지만 그 안에 생명력이 있어서 큰 나무로 성장하듯이 참된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작은 믿음으로도 큰 능력을 행할 수 있음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러한 믿음을 소유하고, 그러나 겸손하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해야 할 것을 종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주인을 충실하게 섬기는 종은 어떠한 보상이나 칭찬을 바라지 않고 자신이 맡은 일을 행한다. 주님의 제자들도 자신의 직분을 충실히 감당한 후 칭찬과 보상을 기대하기 보다는 다만 자신은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충실한 제자에게 요청하시는 것은 순종과 겸손이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빌2:6-8)하심으로 우리에게 섬김과 겸손의 본을 보여주셨다. 사순절을 지내며 하나님과 동등한 분임에도 불구하고 종의 모습으로 인생들을 섬기며 희생하신 주님의 삶, 주님의 헌신적 사랑을 우리도 닮아가기를 기도하며 실천하자. 사순절 제 16일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누가복음 14:7-11) 7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를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8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나님께서 높여주신다 성경을 읽다 보면 반복해서 나오는 주제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는 주제이다. 얻으려고 애쓰는 자는 잃게 하시고 버리는 자에게는 얻게 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원칙은 세속의 원칙을 뛰어넘는다. 예수님이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식사하러 들어가셨다. 식사에 초대된 손님들이 서로 상석에 앉으려고 하는 것을 보시고 비유를 통하여 겸손한 자세에 대해 가르치시며,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과 다르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고 높이고자 하며 섬기는 자리가 아닌 섬김을 받는 자리에 있고자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10:43-44)고 말씀하셨고, 예수님 자신도 섬김을 받기보다 도리어 섬기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스승을 본받고 따르는 사람을 제자라고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배우고, 그분이 행하신 일,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행하는 것이다. 사순절을 지내며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겸손하게 형제자매를 섬기는 삶을 실천해보자.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높여주실 것이다. 사순절 제 17일 깨끗함을 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 (누가복음 17:11-19)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 예수님 당시 나병환자들은 전염될 것을 염려하여 사람들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고, 떨어져 생활해야 했으며 매우 부정한 사람 내지는 죄인으로 인식되었다. 예수님을 만난 나병환자 열 명은 예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멀리 서서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고 외쳤다.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하는 예수님 말씀을 듣고 제사장에게 가던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놀랍게도 가는 도중 병이 나아 몸이 깨끗하게 되었고, 이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돌아가 감사드렸다. 예수님은 자신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하는 이 사람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셨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모두 예수님이 자신들의 병을 고쳐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제사장에게 가던 도중 병이 낫는 은혜를 입었다. 그러나 아홉 명은 병이 나았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지도 않은 채 각기 자기의 길을 갔고,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 만이 예수님께 돌아가 그 은혜에 감사드리며 영혼의 구원까지 받게 되었다. 사순절을 지내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얼마나 감사하며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행여 지나간 삶의 여정에서 감사하지 않고 지나친 것이 없는지 돌아보면서 잊었던 것까지 소급해서 감사드리자. 크고 작은 모든 은혜에 감사하며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하자. 사순절 제 18일 자기의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태복음 6:16-18)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위선적인 신앙인이 되지 말자 금식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죄를 회개하며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어주실 것을 믿는 믿음에서 나오는 신앙적 행위이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월요일과 목요일에 정기적으로 금식하였다. 그러나 이 들은 본래의 의미보다는 자신이 금식하고 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거나 슬픈 표정을 짓곤 하였다. 예수님은 이러한 위선적 행동을 책망하시며, 이들은 금식하는 수고에 대한 상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미 받았다고 말씀하신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행위가 아니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행할 때 하나님께서 갚아주신다는 것이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줄 때에도 예수님은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3-4)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작은 선행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유혹을 받는다. 오늘날 우리는 신앙의 선조들에 비해 너무나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바리새인의 위선적 행동을 책망할 자격도 없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위선적인 신앙인이 되지 않도록, 나아가 잘못된 경건주의에 흐르지 않도록 자신을 살펴야 하겠다. 하나님께 신실하고, 세상 사람들에 대해 진실한 생활태도를 지닐 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세상 사람들을 복음의 빛 가운데로 인도할 수 있다. 사순절 제 19일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믿음 (로마서 10:13-17)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16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의 성장을 원하는가 마틴 루터는 성경을 공부하는 방법을 사과 따는 것에 비유하여 말한 적이 있다. 사과를 딸 때 처음에는 사과나무를 흔들어서 잘 익은 사과들이 떨어지게 한다. 다음엔 큰 가지를 흔들고, 작은 가지들을 하나씩 흔들어 사과가 떨어지게 하고 마지막으로 잎사귀를 살피며 떨어지지 않은 사과를 따낸다. 이런 사과 따기 방법을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성경을 읽으라고 가르친다. ‘나무를 흔드는 것처럼 먼저 전체로서의 성경에 나타난 뜻을 찾으라. 이 때 성경을 읽되 다른 책을 읽는 것처럼 줄줄 읽어 나가면서 떨어지는 열매를 주우라. 그 다음 큰 가지를 흔드는 것처럼 성경 66권을 한 권씩 공부하라. 그리고 나서 작은 가지에 달린 사과를 따듯이 성경을 한 장 한 장 읽어 가면서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보화를 찾고, 잎사귀 하나하나를 걷으면서 사과를 찾듯이 단어 하나하나의 뜻을 음미하고 한 구절 한 구절 읽어 나가면서 하늘의 보화를 따내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며 그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성장하지 않는다. 말씀을 읽고 암송하며 묵상하고 실천하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이’ 삶 속에서 주님의 능력과 은혜를 누리며 살게 된다. 사순절을 지내며 분주한 일과를 잠시 뒤로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 안에서 세상 것과 바꿀 수 없는 보화를 발견하는 은혜, 믿음이 성장하는 은혜를 체험해보자. 사순절 제 20일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열왕기상 17:1-7) 1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2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3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4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5 그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6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냇물을 마셨으나 7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나의 그릿 시냇가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영적 암흑기였던 아합왕 시대에 활약한 선지자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징표로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한 후,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어 있으면서 까마귀가 물어다주는 음식을 먹고 시냇물을 마시며 지냈다. 하나님은 종종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그릿 시냇가에 숨으라고 말씀하실 때 그 음성을 듣고 그릿 시냇가로 가서 기도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다. 세상의 일들이 너무 바빠 홀로 기도할 시간을 갖지 못하고, 세상의 소리가 너무 커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병들어 있는 것이다. 빌 하이벨스목사님은 ‘너무 바빠서 기도합니다’라는 책을 통해 기도 없이 바쁘게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각성시킨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에서 주어지는 많은 일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감당하기 위해서 그릿 시냇가가 있어야 한다. 나무가 깊은 땅속에 오래 묻혀 있는 동안 새까만 석탄으로 변해 열을 내는 연료가 되듯이 우리가 깊은 곳에 숨어 하나님의 음성과 능력을 받아들일 때 영적인 능력을 얻을 수 있다. 사도 요한은 유배지인 밧모섬에서, 사도 바울은 아라비아 광야와 감옥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영적 능력으로 채움 받았고, 존 웨슬리목사님은 매일 아침 4시에 일어나 3시간 씩 기도하며 자신의 그릿 시냇가를 만들었다. 나의 그릿 시냇가는 어디인가? 사순절 제 21일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시편 37:3-11) 3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 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라 5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6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9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10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11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가 받는 복 시편기자는 우리의 길을 여호와께 맡길 때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라고 가르친다. 주님께 우리의 길을 위탁하는 것은 우리의 재능을 완전하게 사용하는 첫 번째 길이다. 우리가 만일 우리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맡긴다면 우리 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생수의 강 같이 흘러 넘치게 될 것이다.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조지 뮐러목사님은 영국 브리스톨에 고아원을 세우고, 1898년 93세의 일기로 소천하기까지 약 15만 명의 고아들을 기도로 양육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심을 보여주었다.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며 고아원 사역을 할 수 있도록 간구하던 중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 81:10)는 말씀에 힘입어 이 일을 시작하였다. 뮐러목사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며 믿음으로 기도하여 일생에 5만 번 이상의 기도 의 응답을 받았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자신을 의뢰하는 자들을 기꺼이, 넉넉히 도우시는 분이심을 고아원 사역을 통해 증거하였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생명줄'을 놓치는 것이라고 하며 고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매일 기도하였다. 우리의 말의 재능이나 지적인 능력, 가진 물질이 타인에 비해 보잘 것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이라도 하나님께 맡기기를 원하실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의 의를 빛 같이, 우리의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며, 자신을 의뢰하는 자가 받는 은혜를 우리를 통해 드러내실 것이다. 사순절 제 22일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오랠 때 (민수기 9:15-22) 15 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이 성막 곧 증거의 성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 위에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이르렀으되 16 항상 그러하여 낮에는 구름이 그것을 덮었고 밤이면 불 모양이 있었는데 17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행진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 18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쳤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들이 진영에 머물렀고 19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오랠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행진하지 아니하였으며 20 혹시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적을 때에도 그들이 다만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영에 머물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으며 ... 22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진영에 머물고 행진하지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행진하였으니 기다리게 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을 갈 때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며 낮이나 밤이나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않으셨다(출13:22). 애굽에서 나온 둘째 해 첫째 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성막을 완성하여 세웠을 때 성막 위에 구름이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였다. 하나님은 광야 길을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동하지 말고, 구름이 떠오를 때에는 이동하라고 명령하셨다.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는 날이 오랠 때 이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신앙의 연단을 받았다. 뜨거운 대낮의 태양열과 저녁의 추위, 광야의 척박함 등 끊임없이 괴롭히는 환경 속에서 언제 떠나야하는지 모른 채 머물러 있는 것은 광야를 이동해 가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지겨운 일이었을 것이다. 날마다 성막을 바라보며 성막 위에 머무른 구름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을 상상해보자. 답답하고 힘들어도 그들은 구름이 움직일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고, 이것을 통해 그들의 순종하는 신앙이 훈련되었다. 다윗은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시40:1)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기다리게 하신다. 견딜 수 없는 힘들고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나 응답이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을 앞서 가지 말자. 우리가 기다리고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완전한 시간에 우리를 진행하게 하실 것이다. 사순절 제 23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로마서 7:19-25)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않는 그것을 행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옛 사람과 새 사람의 갈등 우리는 마땅히 서 있어야 할 곳에 서 있지 못하는 갈등 속에 살고 있다. 되고 싶은 나와 되고 싶지 않은 나 사이의 갈등이 그것이다. 사도 바울은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행한다. 내 속에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 싸우고, 내 속에 있는 죄의 법이 나를 사로잡는다.’라고 고백한다. 서로 다른 자신이 자신 안에서 싸우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하며 애통해 한다. 이것은 비단 사도 바울의 고백일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실존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우리의 갈망이 죄의 길을 따르기 좋아하는 육신의 요구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질 때 우리의 신앙적 자아는 낙심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영적인 존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육신으로 사는 이 세상에서는 죄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간의 연약함과 죄성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과 육신의 죄의 법이 갈등하는 이 경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 계시다는 것이 우리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준다. 나와 나 사이에, 나와 하나님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실존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위하여, 내 편에 서 계신다. 나의 실존의 경계에 나를 위하여 서 계시며 나의 옛 사람과 새 사람이 갈등하며 싸울 때 새 사람이 이기도록 도우신다. 사순절 제 24일 말씀의 능력 (시편 19:7-14) 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10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11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12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3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14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유익 시편 19편은 하나님의 말씀의 유익을 1. 우리의 영혼을 치유하여 건강하게 하며 2. 우리를 지혜롭게 하며 3.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하며 4. 우리의 영혼을 밝게 하여 바르게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세상 사람들은 건강과 지혜, 재능과 즐거움을 구하며, 이것을 얻기 위해 부단히 애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성경말씀 속에서 얻을 수 있다. 나아가 영혼에 내재한 깊은 허물을 깨닫게 하고 그것을 내어버리게 함으로서 영혼을 건강하게 해주며, 세상을 육신의 눈으로만 보지 않고 영의 눈으로 보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깨닫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말씀을 읽는 사람들 속에서 성령이 일하셔서 하늘나라의 지혜와 능력을 채워주고, 하나님의 신비를 가르쳐준다. 사도 요한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책은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저 한 권의 책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가까이 하여 읽고 듣고 지키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복을 받게 한다. 누구든지 말씀이 주는 유익을 체험한 사람은 시편기자처럼 ‘내 입의 모든 말과 생각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것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된다. 말씀을 가까이하여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시려고 예비한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자. 사순절 제 25일 선한 목자 (요한복음 10:10-15)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두 가지 생명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생명이 있다. 육신적인 생명과 영적인 생명이 그것이다. 이 세상의 권세를 잡은 사탄은 도둑과 같이 부단히 영적 생명을 빼앗아 육신적인 생명으로 살게 하고, 멸망의 길로 가게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병약한 생명과 풍성한 활력을 가진 생명의 차이는 쉽게 알 수 있고, 자신의 육신이 건강한지 아닌지도 바로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영적인 생명이 건강한지 아닌지 쉽게 인식하지 못하거나 영적인 건강상태에 대해 무관심한 경우가 있다. 아이가 건강하게 잘 자라면 부모님의 마음이 기쁜 것처럼 우리의 영적 생명이 건강하게 자라가는 것은 하나님께 큰 기쁨이 될 것이다. 우리는 육신의 건강을 위해 매일 먹고 마시며 온갖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만 영적인 건강을 위해서는 그만큼 애쓰고 노력하지 않는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고백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너희는 영적이 아니고 육신적이다. 딱딱한 음식은 소화시키지 못하는 어린 아이처럼 복음의 깊은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책망한다. 바울의 책망이 바로 우리에게 하는 책망인 것을 깨닫고, 매일의 삶 속에서 기도하고 말씀을 가까이하면서 예수님과의 교제를 일과로 삼아보자. 양들의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풍성한 은혜와 생명을 넘치도록 부어주실 것이다. 풍성한 영적 생명을 누릴 때 우리의 육신적 생명도 더욱 건강하고 풍성해진다. 사순절 제 26일 달란트비유 (마태복음 25:14-30)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 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재능과 헌신 어떤 주인이 종들에게 각각의 재능대로 금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기고 타국에 갔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각각 그것을 가지고 장사를 하여 주인에게 받은 것만큼의 이익을 남겼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땅을 파고 그것을 감추어 두었다가 주인이 돌아왔을 때 그것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많이 받았다고 기뻐하기 보다는 받은 만큼 많은 것을 남겨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아마 적게 받은 것을 불평하며 그냥 묻어두었을지도 모른다. 오랜 후에 돌아온 주인은 다섯 달란트 남긴 종이나 두 달란트 남긴 종이나 똑같이 칭찬하였고, 한 달란트를 받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종을 악하고 게으르다고 책망하며 있는 것마저도 빼앗았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각각의 재능에 따라 맡길 만큼의 사명을 주셨다. 언젠가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우리들을 심판하실 때 예수님의 기준은 많이 남기고 적게 남기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 받은 만큼의 역할에 충실했는가가 될 것이다. 우리들에게 주신 재능, 사명이 큰 사람도 있고 적은 사람도 있다. 주어진 것을 최선을 다해 감당할 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칭찬받는 사람,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급이 있는 사람이 된다. 내게 주신 달란트(재능)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내게 주신 그 재능을 통해 내가 어떤 일을 할 것을 원하시는가?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주님께서 내게 주신 달란트, 내게 주신 과제를 소홀히 여기지 말고 잘 감당하여 칭찬받는 자녀가 되자. 사순절 제 27일 포도나무와 가지 (요한복음 15:1-5) 1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리스도인의 열매 세상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인생길에서 무엇인가를 성취하고, 무엇인가를 남기고자 한다. 성취와 소유를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은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인생들이 영적인 생명을 얻고, 그것을 더 풍성히 하기 위해서는 포도나무의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는 것같이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 우리가 머물러 있어야 함을 가르쳐주신다. 예수님의 생명력 있는 말씀이 가지인 우리의 영혼 속으로 흘러들어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포도나무 가지는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다. 열매를 많이 맺는 가지는 그리스도와의 생명력 있는 살아있는 관계를 통하여 많은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들을 뜻한다. 그리스도인이 맺는 열매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이 삶의 여정에서 이루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영혼을 구원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작게는 기도의 응답, 영혼의 평안, 일상에서 누리는 기쁨, 주님의 마음으로 주변에 베푸는 사랑 등일 것이다. 나아가 전 생애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그분의 정신을 실천하며, 그분을 드러내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맺어야 하는 열매이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예배하는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물러 있어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예수님께, 예수님의 말씀에 우리를 묶어 놓자. 사순절 제 28일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 13:3-8,13)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나아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정신적 사랑과 영적 사랑 사도 바울은 ‘내가 내 모든 재산을 나누어주고 (어떤 귀한 목적을 위하여)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내게 사랑(곧 그리스도의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나아가 믿음과 소망, 사랑은 항상 있어야 하는데 그 중에 제일인 것은 사랑이라고 강조한다. 믿음의 사람들은 정신적 사랑과 영적 사랑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정신적 사랑도 매우 귀하고 사람과의 관계 안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엄격히 말하자면 이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일 수 있다. 때로 그 사랑을 통하여 자신이 드러나기를 원하거나 자신에게 어떤 대가가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영적인 사랑은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단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분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나와 다른 사람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서 계시는 영적 사랑은 다른 사람을 나의 사랑으로 규정하거나, 강요하거나, 지배하려는 모든 시도로부터 다른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사랑을 의미한다. 각 사람은 자유인으로서,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받기를 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인간이 되셨고, 자신을 희생하셨고, 그를 위해 죄를 용서해주셨고, 그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음을 기억하자. 불완전하고 허물투성이인 우리를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있는 모습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해주셨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정신적 사랑에 더하여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본받아 영적인 사랑을 실천하자. 사순절 제 38일 고난 받는 종 (이사야 53:1-6)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을 갔거늘 여호와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도다 낮아지신 그리스도 선지자 이사야는 BC 700년 경 고난의 종으로 오실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예언하였다.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타락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형상을 드러내셨다. 영광의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죄와 죽음의 세상 한복판으로 자신을 던진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의 육신적 곤고함을 짊어진 모습으로,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고난과 죽음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가난하게 태어나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며 약자 편에 서는 낮아지신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하나님과 본질상 같은 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모습으로 낮아진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한다. 가장 높은 자리에서 가장 낮은 자리로 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직접 아들의 모습으로, 낮아진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다. 하나님의 형상을 그분의 기적과 능력, 영광에서만 찾는 사람은 이렇게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삶의 자리에 주님이 계시며 그 삶의 무게와 곤고함을 함께 해주시는 것을 기억하자. 임마누엘! 사순절 제 39일 양과 염소의 비유 (마 25:31-46)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 4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니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이웃 오늘 성경본문은 종말 비유의 결론에 해당한다. 양과 염소의 비유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 신실한 그리스도인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구분하여 각각 영생과 영벌에 들어가도록 심판하실 것인지 알려주신다. 누가 하나님 아버지께 복을 받아 창세부터 예비한 나라를 상속받을 것인가? 바로 서로 사랑하며 돌보는 성도들-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도움과 배려를 베푸는-이며 이들이 재림을 가장 잘 준비하는 것이다. 선행을 통해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을 믿음을 지닌 이들에게는 반드시 선한 행실이 뒤따른다. 마지막 심판 때에 예수님께서 자신을 굶주린 사람, 나그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과 동일시한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스도가 오늘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지 알게 된다. 우리들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마치 예수님을 대하는 것처럼 대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라고 소홀히 대하고 무시하는 것은 가난한 형제자매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사랑을 실천하라고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예수님을 거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오늘 나의 생활 가운데 예수님은 어떤 사람의 모습으로 내게 다가오셔서 관심과 사랑을 베풀기를 원하시는지 살펴보자. 나의 눈과 마음이 행여 세상적인 기준으로 형제자매를 판단하고 행동하지는 않는지 주의하자. 나의 행함이 위선자나 불신자들과는 어떻게 다른지 자신을 살펴보자. 사순절 제 40일 마지막 유월절 식사 (마 26:17-30) 17 무교절의 첫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8 이르시되 성 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19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 20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 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21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2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 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말함과 행함의 일치 유월절은 출애굽기 12장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것을 기념하며 지키는 절기이다. 유월절을 지키며 1주일간 유월절 음식과 함께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는 것이 무교절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대문 기둥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자의 죽음을 피했고, 양의 피를 바르지 않았던 애굽의 장자들은 모두 죽었다.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친히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으실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셨다. 그 옛날 애굽에서 잡았던 어린 양의 피는 죽음을 미루는 일시적인 효과를 가져왔으나 예수님의 피는 그분을 믿고 따르는 이들의 삶 속에 영원한 효과, 영생을 보장해주신다. 3년간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그분을 따르던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로 이미 마음에 작정하였으면서도 마음을 감추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았다. 사람들은 유다의 배신에 분노하고 비난한다. 그러나 주님께 헌신을 고백하는 우리들도 그것이 자신의 삶의 방식과 충돌할 때 쉽게 주님을 배신한다.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주님의 사랑을 배신하기도 하고, 불신으로 주님의 진리를 부인할 때도 있다. 때로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부인한다. 가룟 유다의 배신에 분노하는 나는 과연 하나님 앞에서 말함과 행함에 있어 일치하는가?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기 전에 나의 생각과 마음을 변화시켜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써 나의 말함과 행함이 일치하여 주님의 사랑을 부인하지 않고 주님의 은혜를 무가치하게 만들지 않는 삶이 되도록 오늘도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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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림교회
2019년 3월 25일
In 365일 말씀묵상
고난주간 제 1일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마가복음 11:12-14) 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 때가 아님이라 14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예수님의 책망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외치는 무리들의 환호 속에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육체로 이 세상에 계시는 마지막 주간의 활동을 하시며 십자가의 길을 준비하셨다. 다음 날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고 하시며 성전에서 일하는 이들의 부패와 타락, 불의한 이득 취함을 책망하셨다. 많은 일들로 지치고 시장해진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따서 드시기를 원했으나 나무에는 잎사귀만 있고 열매가 없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에게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그 나무에서 열매를 따먹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무화과 열매가 맺힐 때가 아니었으므로 열매가 없는 것은 당연하고, 나무의 잘못이 아니지만 주님이 필요로 하실 때에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성경에서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잎만 무성한 나무처럼 외형상 믿음이 있는 것 같으나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는 믿음 없는 유대인들을 책망하신 것이다. 고난주간을 지내며 성전이 된 우리의 영혼이 깨끗한지, 주님이 필요로 하실 때 주님 손에 들려 사용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열매 맺는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라는 예수님의 책망을 귀 기울여 듣자. 고난주간 제 2일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 (마태복음 26:6-1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8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10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 이 여자가 내 몸에 향우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거룩한 소비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음모를 꾸미고 있는 동안 한 이름 없는 여인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귀한 것,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린 것을 마태는 이어서 기록하고 있다. 죽이려는 음모와 그 죽음을 향유로 미리 경배하는 예언적인 모습이 대조를 이룬다.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은 진정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기에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을 망설임 없이 주님께 드릴 수 있었다.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향유는 매우 값비싼 것으로 어쩌면 이 여인이 가지고 있던 전 재산 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여인은 자신의 말할 수 없는 사랑을 주님께 표현하고자 기꺼이 전 재산을 소비하였다. 주님께 대한 성도의 헌신은 때로 주변의 반대와 조롱에 직면할 수 있다. 예수님께 대한 이 여인의 헌신은 즉각 제자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제자들은 마치 실용주의에 익숙한 우리들처럼 세상적인 계산방법으로 이 여인의 행동을 ‘허비’라고 표현하였다. 죽은 자에게 향유를 붓는 것은 유대의 관습이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 이 여인의 헌신을 통하여 미리 장례를 준비하였고, 이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고귀한 사역인 십자가의 죽음을 미리 준비한 여인이 되었다. 주님을 사랑하는 단 한 가지 이유로 행한 일이 성경에 기록되어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이 기억하고 기념하는 값진 일이 된 것이다. 제자들이 말한 허비가 아니라 주님의 죽으심을 준비하는 거룩한 소비가 되었다. 주님을 사랑하는 나의 마음은 얼마나 크고 간절한지, 나의 구주가 되신 주님을 위해 나는 어떤 거룩한 소비를 할 수 있을지 오늘 하루를 지내는 동안 생각해보자. 고난주간 제 3일 서로 발을 씻어 주라 (요한복음 13:12-17) 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섬김의 본 준비의 날이라고 불리는 고난주간 네 번째 날에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가까워오는 것을 아시고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셨다. 식사를 하시던 중 대야에 물을 가져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제자들도 이와 같이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시며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다. 유대인들은 더운 지방에 사는 까닭에 샌들같이 생긴 신발을 신고 다녔다. 외출에서 돌아온 후나 식사 전에 발을 씻는 것이 관습이었는데 당시 발을 씻겨 주는 것은 종들이 하던 일이었다. 예수님께서 종과 같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겸손의 본을 보여주셨고, 제자들도 서로 섬기는 겸손한 삶을 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은 직분을 임명 받을 때 온 몸을 씻었다. 하나님은 또한 물 대야를 준비하도록 명령하셔서 제사장들이 매일 손발을 씻는데 사용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물로 제자들의 먼지 묻은 발을 씻어주셨을 뿐 아니라 자신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씻어 주셨고, 매일 말씀의 물로 그의 교회, 성도들을 깨끗하게 씻어주신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말씀을 읽음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깨끗이 씻고,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주님이 행하신 일을 본받아 형제자매를 섬기는 삶을 살고자 애써야 하겠다. 고난주간 제 4일 겟세마네의 기도 (마태복음 26:36-46)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어야 하는 절대과제를 앞에 둔 예수님은 세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언덕에 기도하러 가셨다. 이 과제가 예수님께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는지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표현하셨고,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눅22:44)’될 만큼 간절히 기도하셨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모든 죄를 자신의 한 몸에 짊어져야 하는 예수님의 타는 심정에도 불구하고, 또한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겟세마네 언덕에 함께 올라간 3명의 수제자는 주님의 고통을 조금도 나누어지지 못한 채 육신의 연약함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깨어 기도하지 못하고 연약함을 핑계하며 잠들어 있는 우리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3명의 제자들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은 가능하다면 십자가의 고난을 짊어지지 않을 수 있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신다. 나의 기도가 바로 이렇게 변화되기를 소망하자. 나의 뜻이 아니고, 나의 원함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희망을 성취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모든 약속을 성취해가시기를 기도하자. 모든 유익한 것은 대가를 지불한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구원하시고자 가장 귀한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지불하셨다. 정말로 가치 있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값을 치룰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나는 가장 귀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하나님께 대한 헌신으로 어떤 대가를 치룰 준비가 되어 있는가? 고난주간 제 5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마태복음 27:32-44) 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33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라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35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36 거기 앉아 지키더라 37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38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구레네 사람 시몬 이 부분의 성경구절을 읽을 때마다 갖게 되는 의문이 있다. 예수님이 베푸신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수많은 사람들, 눈을 뜨게 된 소경, 귀신들렸다 고침 받은 이들, 죽었다가 살아난 이들, 고침 받은 중풍병자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모두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예수님은 십자가의 형벌을 받을만한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고 외치는 사람은 왜 단 한 사람도 없는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철저히 홀로 남겨져 십자가에서 옷을 다 벗긴 채 육신의 고통과 수치 뿐 아니라 온갖 저주와 모욕과 희롱을 당하고 계셨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이스라엘 밖에 살던 유대인으로 유월절 절기를 지키고자 예루살렘을 찾은 순례객이었다. 예수님이 더 이상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지 못할 상태가 되자 로마병정은 강제로 시몬을 끌어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하였다.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사람!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 털어 예수님을 도운 단 한 명의 사람이 되었다. 시몬이 대신 진 십자가는 수치가 아니라 주님의 고통을 가장 가까이서 체험하고 변화되는 축복이 되었다. 시몬의 행적은 더 이상 성경에 나타나지 않지만 그의 두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사도 바울이 로마서 16:13에서 특별히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고 하며 그의 어머니(시몬의 아내)를 자신의 어머니로 동일시한 것을 통해 이 가정이 이후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며 바울의 사역을 도왔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작은 행함이 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기꺼이 한 일이 아닐지라도 주님을 위해 한 작은 수고가 큰 축복으로 변화된다. 하물며 예수님을 사랑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선한 일을 행한다면 얼마나 큰 축복이 우리에게 임할 것인가! 고난주간 제6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 (마태복음 27:45-54) 45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 제 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우리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낮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온 땅에 어둠이 임했고,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 지진이 일어났으며,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무덤에서 나왔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찢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죄를 대신 갚아주시고,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무덤에서 나온 것처럼 언젠가 주님이 재림하실 때 성도들도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도 미리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오전 9시경 십자가에 달리셔서 오후 3시경 까지 참혹한 고통 가운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셨다. 모든 인생들을 구원하는 고귀한 사명을 이루시기 위해 아버지 하나님에게까지 버림받아야 했던 고통과 자신의 한 몸에 짊어져야 하는 온 인류의 죄의 무게가 예수님으로 하여금 이렇게 절규하게 만들었다. 공의의 하나님은 인류의 죄의 대가를 완전히 지불하기 위하여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실 수밖에 없었고,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하는 고통으로 인해 하나님 자신도 죽음을 경험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아들과 함께 직접 죽으셨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고 은혜인지! 그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도 이제 주님이 못 박히신 그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살자. 그리하여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고 고백하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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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림교회
2019년 3월 25일
In 365일 말씀묵상
부활절주간 제 1일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마태복음 28:1-10) 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달리려고 달음질할새 9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10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부활의 소망 낮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둠으로 덮였던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부활의 아침이 되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던 대로 처절한 죽음의 절망을 뚫고 온 인류를 비추는 새롭고 영원한 빛으로 부활하셨다. 얼마나 놀라운 반전이고 위대한 승리인가! 태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빛이 있으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빛이 있었다. 그 빛이 흑암을 몰아내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어두운 죄의 세력, 사망의 권세를 몰아내고 이 세상에 생명의 빛을 비추는 하나님의 또 하나의 창조사역이 되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신에 향유를 바르고자 이른 새벽 무덤을 찾은 두 여인은 천사로부터 주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부활의 첫 증인이 되는 영광과 함께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만나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주님을 찾고 헌신하는 이들은 지금도 부활의 주님을 가장 가까이서 만나고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리며, 부활의 증인으로 세움 받는 복을 받는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부활하셨기에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우리도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의 무게를 무거워하지 않고, 비록 현실의 삶이 고단할지라도 영혼의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매일 부활의 날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할렐루야! 예수님 부활하셨다!! 부활절주간 제 2일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마가복음 16:14-20) 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부활의 증인 십자가에 달려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를 이루어주신 예수님은 말씀하신 대로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부활의 소식이 너무 놀라워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으신 후 제자들이 앞으로 삶의 현장에서 감당해야 할 일들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게 할 것을 당부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순히 권유나 선택사항이 아니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시는 명령이다. 예수님의 선교명령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선포하고 확장시켜 세상의 모든 이들로 하여금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려는 것이고, 제자들로 하여금 주님의 대행자로써 주님의 일을 계속 이어가게 하시려는 것이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그 후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고 그분의 말씀을 전하다가 순교하는 고난도 기꺼이 감당하였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사랑 안에서 만나게 되는 고난, 그리스도인은 이제 그 고난 안에서 부활과 영생의 보화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보화를 볼 수 있게 되었기에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 나라를 위한 수고와 희생도 기꺼이 감당할 수 있게 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그러므로 이제 우리도 세상에 나아가 담대하게 전하자.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은혜에 대하여,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그리고 지금도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는 주님에 대하여 전하며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자! 부활절주간 제 3일 예수님의 선교명령 (마태복음 28:16-20) 16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가라 그리고 말하라! 부활하신 주님은 열한 제자들을 평소 활동의 주 무대였던 갈릴리에서 만나셨다. 제자들의 삶의 현장에서 그들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들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주님의 모든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게 할 것- 을 당부하셨다. 이것은 단순한 권유가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시는 명령이다. 주님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음을 선포하시면서 선교사명을 감당할 제자들에게도 모든 권세를 주실 것임을 알려주신다. 주님은 선교명령과 더불어 ‘세상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고, 이 약속은 실제로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인해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이 세상에 계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디에서, 어떻게 우리는 이에 대한 느낌을 갖는가? 이 세상의 어디에서, 그리고 나 자신의 삶 어디에서 하나님의 충만함을 느끼는가? 예수님은 그의 말씀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예수님의 말씀과 우리의 교제 속에서 우리는 그분의 가까이 계심을 느낀다. 말씀은 영적 존재들이 서로 접촉할 수 있는 가장 명백하고 분명한 수단이다. 그분의 말씀은 항상 동일하지만, 그럼에도 항상 다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우리의 삶을 충만한 영적 은혜로 이끌어주시고자 ‘기억하라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약속하신다. 우리는 모두가 선교사는 아니다. 그러나 각자 주님의 선교명령을 실천하는데 적용할 수 있는 은사를 받았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자신이 받은 은사를 통해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고자 할 때 우리는 주님께서 약속하신대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며 도우시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우리의 연약함을 탓하지 않으시고 선교의 도구로 쓰시는 은혜를 통해 또한 위로를 얻게 된다. 이제 세상에 나아가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하여,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그리고 지금도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는 주님에 대하여 말하자! 부활절주간 제 4일 세 개의 십자가 (누가복음 34:33-43)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 군인들도 희롱하며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세 가지 십자가 골고다 언덕에 세 개의 십자가가 세워졌다.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 좌우에 두 강도가 달린 십자가가 있었다.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는 예수님을 저주하며 죽어갔으나, 다른 한 강도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간청하였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39-43)는 예수님의 응답을 받아 생의 마지막 순간에 새 생명을 얻는 구원의 은혜를 입었다. 우리에게는 이제 세 가지 십자가가 있다. 첫째, 내 죄를 대신 갚아주기 위해 주님이 지신 십자가이다. 베드로처럼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2:24)라고 고백하는 신앙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 둘째, 나 자신을 못 박은 십자가이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갈2:20)고 고백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용서받고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자신의 옛사람, 육신에 속한 자아, 교만한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결단한다. 셋째, 자신이 지고 가야 할 십자가이다.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4)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믿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주님의 십자가에 함께 못 박지 않은 사람은 삶 가운데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감사함으로 지고 살아갈 수 없다. 자신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주님이 가신 길을 따르는 사람은 부활하신 주님이 계신 영광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된다. 부활절주간 제 5일 주님의 만찬 (마가복음 14:22-26) 22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라 하시고 23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24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6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니라 성찬예식의 의미 이스라엘이 그 옛날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빠져나온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유월절기가 되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셨다. 유월절에는 원래 어린 양을 잡아 고기를 불에 구워서, 누룩을 넣지 않고 구운 딱딱한 떡과 쓴 나물과 함께 먹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눈 유월절 식사에는 양고기는 없었고 떡과 포도주만 있었다. 예수님께서 이제 곧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양으로, 유월절 어린 양으로 내어주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떡과 잔을 나누실 때, 떡을 자신의 몸이라 하시고, 잔을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언약의 피라고 하시며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심으로 구약에서 예언된 대로 인류의 구원을 이루신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성찬예식을 행하라고 제정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날 교회에서 행하는 성찬예식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것이고, 그 죽음이 무엇을 위한 죽음이었는지 기억하는 것이다. 나아가 성만찬에 참여하는 개개인이 이제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공동체가 한 몸이 되며, 교회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그리스도로 인해 한 형제자매가 되었음을 고백하며 시인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낮추어 이 땅에 육체의 몸으로 오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찬예식 안에 현존하시며 우리와 한 몸을 이루시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새로운 창조를 이루신다. 이 얼마나 신비하고 놀라운 은혜인가! 성찬에 참여하면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주신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 우리도 자신을 다른 이에게 나누어줄 수 있기를 소망하자. 부활절기 제 6일 종말의 때 (마가복음 13:32-37) 32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3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34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35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36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깨어 있으라 기독교 역사 속에서 종종 종말의 때가 언제인지 알고자 하는 시도에서 비롯된 이단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비밀한 계획 가운데 있는 것을 인간의 유한한 지식으로 알아내고자 하여 종말의 때를 예측하며 사람들을 미혹하는 교만과 불신앙의 죄를 범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그날과 그때는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시며 주의하고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날과 그때가 언제인지 알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종과 문지기의 비유를 통해 알려주셨다. 어떤 사람이 타국으로 가면서 그 종들에게 각각 권한을 주어 사무를 보게 하였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였다.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알려주고 떠났더라면 종들은 아마 중간에 게으름을 부리며 잘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알지 못했으므로 종들은 항상 맡겨진 일들을 제대로 이행하고 있어야만 했다. 언젠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만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 그 날이 이르기까지 이 땅에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과제를 잘 감당하는 것 또한 우리 삶의 목적이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씀이라고 하시면서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셨다. 집을 지키는 문지기처럼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고, 자신의 믿음과 교회와 세상을 사단으로부터 지켜야하는 과제를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셨다. 내 영혼이 혹시 하나님께 대하여는 자고 있고, 세상에 대하여는 깨어있는 것이 아닌지 점검해보자. 주님의 명령대로 우리의 영혼이 깨어 있어서 이 땅에서의 삶을 하나님께 충성된 종으로써 살아갈 뿐 아니라, 주님의 재림과 하늘의 영광된 상급, 영원한 삶을 바라볼 수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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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림교회
2019년 3월 25일
In 365일 말씀묵상
5월 1일 인간이 되신 하나님 1 (요한복음1:1-5)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창조의 회복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세베대의 아들이며 야고보의 형제이다. 그는 요한복음과 요한 1,2,3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고, 그의 형제 야고보는 12제자 중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다. 요한은 복음서의 기록 목적을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고 밝히고 있다. 마태나 누가는 예수님의 계보를 기록하였으나 요한은 육신의 계보를 언급하지 않고 곧 바로 창조사역을 언급함으로써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하시고 동등하신 분이심을 알리고자 하였다. 창세기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선포로 시작하는 것처럼 요한복음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선포로 시작함으로써 예수님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시며 하나님과 함께 천지를 창조한 분이심을 알려준다. 참 빛 되신 예수님이 어두움 가운데 있는 이 세상에 오셨으나 정작 예수님이 창조한 인간들은 그 분이 누구이신지 알아보지 못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도록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 메시아의 오심이 예언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배척하였다. 태초에 하나님은 흙으로 인간을 만드시고 하나님의 영, 생기를 불어넣음으로써 생명이 있는 사람이 되게 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타락한 육신적 인생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영적 생명을 소생시키는 창조의 회복을 이루고자 직접 육신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요한이 창세기 1장을 연상시키는 문장으로 복음서를 시작한 것은 창조와 창조의 회복을 대비시키면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리고자 하는 의도였다. 5월 2일 인간이 되신 하나님 2 (요한복음 1:6-14)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새로운 인생 태초에 말씀으로 존재하신 예수님께서 인생들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 새로운 인생으로 거듭나게 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죄로 어두운 세상을 비추기 위해 오신 이 빛을 증언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고 믿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이었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된다.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새로운 탄생은 우리를 내면으로부터 변화되게 하여서 우리의 생각이나 주장, 소망, 동기 등을 새롭게 만든다. 자연적인 출생은 우리에게 육신의 생명을 주고, 가족 내에서의 한 구성원이 되게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새로운 탄생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 생명을 얻게 하고,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의 한 구성원이 되게 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게 한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세상을 보는 눈이 아닌 영적인 눈으로 우리 안에 함께 계시는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데 바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주님의 충만한데서 우리도 은혜와 진리를 풍성하게 받는 복을 누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도 요한이 우리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복음의 핵심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새 생명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어두움 가운데 있던 과거의 모습에서 변화되어 새로운 인생이 되었다. 오늘 하루도 새로운 인생으로 살게 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은혜 안에서, 참 빛이신 주님의 빛을 받아서 생명력 있는 삶을 살아가자. 5월 3일 세례 요한의 증언 (요한복음 1:19-28) 19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 대 21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24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라 25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28 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 세례 요한의 임무 오랫동안 메시아가 오실 것을 소망하며 기다리고 있던 유대인들은 요한이 나타나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외치자 혹시나 그가 기다리던 메시아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금 선지자를 보내주셨는가 의문을 가졌다. 예루살렘에서 존경받는 지도자였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세례 요한을 찾아와 ‘네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도 아니고 선지자 엘리야도 아니고 단지 주님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이며, 주님의 종이 되어 신발의 끈을 풀어주기에도 부족한 사람이라고 대답하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누가복음 7:26에서 세례 요한을 ‘선지자보다 나은 자니라’고 높여주셨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1)고 외치며 주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이 자신을 주님의 종이 되기에도 부족하다고 고백하는데, 하물며 우리가 주님의 일을 행할 때 모든 자존심과 자만심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지 않겠는가! 요한은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당시 에세네파 사람들(강경한 유대교 공동체의 한 분파)은 정결하게 할 목적으로 세례를 행했는데, 보통은 이방인들이 유대교인이 되고자 할 때에만 시행하였다. 바리새인이 요한에게 무슨 권한으로 세례를 주냐고 물은 것은 곧 하나님께 선택받은 유대인들을 마치 이방인처럼 다루어 세례를 주는 권한을 누가 주었느냐고 따지는 것이었다. 요한은 자신은 단지 죄를 회개하는 상징으로써 물로 세례를 주지만, 진정으로 죄를 사하여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뿐이신데, 그 분이 이미 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계신다고 증언하였다.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그 분의 길을 예비하다가 순교하였다. 초대 교회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증언하다가 순교하였다. 오늘 우리는 주님을 증거하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하여 나의 삶의 자리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자. 5월 4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요한복음 1:29-33)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32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나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하는가? 요한이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깨끗하게 씻음을 받아 가까이 온 천국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나아가 요한은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를 세상에 드러내어 확인시켜주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하늘로부터 예수님께 임했고,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심을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표시가 되었다. 물세례는 자신의 죄성에 대한 깨달음과 회개를 통해 죄로부터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할 것을 결단하는 것이고, 성령세례는 죄인인 인간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거듭나는 중생을 경험하게 한다. 성전에서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어린 양을 희생 제물로 드렸다.(출29:38-42) 이사야는 하나님의 종, 메시야가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다고 예언하였다.(사53:7) 구약의 제사에서는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어린 양의 생명이 희생되어야만 했는데, 하나님은 이제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실 것을 결심하시고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같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심으로써 우리의 죄의 값을 지불해주신 것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하게 증언한다. 우리도 오늘 하루의 삶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갚아주셔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음을 고백하고, 예수님의 은혜로 얻은 새 생명을 누리며 전하며 살아가기를 소망하자. 5월 5일 예수님을 따른 첫 번째 제자들 (요한복음 1:35-42)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예수님의 이름들 세레 요한이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언하자 이 말을 들은 요한의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랐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첫 번째 제자가 되었는데 한 명은 안드레,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아마도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 오는 이들을 보시고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셨다. 무엇을 구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은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무엇을 바라고 기대하고 요구하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디 계시는지 물었고, 예수님은 와서 보라고 대답하셨다. 함께 예수님이 거처하시는 곳에 가서 그 날 예수님과 함께 거하며 그분이 누구신지 알게 된 두 사람은 예수님을 랍비라고 호칭하던 것에서 변화하여 메시야라고 부르게 되었고, 다른 이들에게 메시야를 만났다고 증언하였다.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 등 여러 이름으로 호칭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을 점점 더 알아갈수록 얼마나 귀하신 분인가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지 불과 얼마 되지 않아 메시야라고 고백했던 제자들은 3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예수님과 그분의 사역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믿음은 입술을 통해서 쉽게 고백될 수 있으나 주님께 대한 깊은 신뢰와 존경, 사랑은 우리가 믿음으로 살 때에 비로소 성장할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와서 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로 가는 것이 믿음의 출발이다. 내 자리를 고집하고 예수님을 내가 있는 자리로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것, 내 자리에서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믿음의 출발이다. 하나님의 어린 양, 메시야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기 위해 우리의 발걸음을 그분께로 향하자. 5월 6일 가나의 혼례 (요한복음 2:1-11) 1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이적을 행하시는 목적 예수님이 행하신 거의 모든 이적은 – 눈 먼 자가 다시 보게 되고, 중풍병자가 걷게 되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등 – 퇴락한 창조의 회복이며 하나님의 능력의 실증이었다. 이적을 행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자연을 초월하는 자신의 힘을 드러내 보였고, 그가 자신의 사역 – 다른 이들을 돕고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시며 사람들과 개별적인 관계를 이루어가는 – 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지 알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며 첫 번째 행하신 이적이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게 하신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켜 맛을 내게 하고, 결혼 잔치를 계속 이어갈 수 있게 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죄 가운데 있는 인생들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것임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지자 마리아는 자기 아들 예수가 이 어려움이 해결될 수 있도록 도와서 어떻게든 포도주를 구할 수 있기를 바랐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대답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예수님께서 무엇을 할지 몰랐지만 그가 분명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인들에게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든지 순종하라고 일러두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자신의 상황이 낙심되는 것일지라도 예수님께서 가장 좋은 길로 행하실 것이라는 신뢰를 잃지 말아야 한다. 마리아와 하인들은 어떤 일을 행하시는 주님의 방법에 순종하였다. 우리의 문제를 주님께 가져가면 그분이 그 문제들을 어떻게 처리하실지 알게 될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실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님을 신뢰하고 순종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최선의 결과를 허락하신다. 5월 7일 예수께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시다 (요한복음 2:13-22)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예배의 본질 모든 유대인 남자들에게는 해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월절 예식에 참석해야 하는 종교적 의무가 있었다. 유월절 기간 동안 성전 주변은 각처에서 몰려온 수많은 방문객들로 붐볐다. 종교지도자들은 ‘유대인의 뜰’이라 불리는 곳에 상인들이 장사판을 차릴 수 있도록 허용해줌으로써 성전 주변의 혼잡을 가중시켰다. 장사판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찾는 방문객들의 예배의 편의를 돕고, 성전 수리를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방편으로 시작되었지만 점차 ‘유대인의 뜰’은 상인들로 가득 차 순례자들이 예배드릴 곳을 찾기 어려워지고,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게 되었다. 예배를 위해 원근 각처에서 온 방문객들을 이기적으로 이용한 상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분노하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스룹바벨이 BC 500년경에 지은 것인데 헤롯왕이 BC20년경부터 좀 더 크고 멋있게 만들고자 46년 동안이나 개축하는 중이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장엄한 건축물을 무너뜨릴 수 있으며, 또한 3일 만에 다시 세울 수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 매우 흥분하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돌로 만들어진 이 성전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성전되신 예수님의 육신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고, 예수님이 성전보다 크고 위대하신 분이심을 인식하지 못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후에야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한 것인지 깨달았다. 우리도 때로 예배의 주체이시고 예배를 온전히 받으셔야 할 분이 주님이시라는 본질을 잊고 화려한 교회 건물, 계속 이어지는 행사, 교회 프로그램 등 부차적인 것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지나 않은지, 그래서 주님께서 분노하시게 행동하고 있지 않은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예배를 살펴보아야 하겠다. 5월 8일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 온 니고데모1 (요한복음 3:1-8) 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한 밤중의 만남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고 산헤드린이라 불리는 공의회의 의원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종종 그들의 위선에 대해 비판하였던 종교지도자 그룹이었다.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강한 분노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예수님이 그들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그들의 주장(견해)을 문제 삼았기 때문이었다. 명망 있는 지도자였던 니고데모는 다른 바리새인들과 달리 예수님께는 다른 이에게 없는 무엇인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그것을 알고자 하여 예수님을 찾아왔다. 다른 사람들의 평판에 대해 스스로 확인해보고자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방문을 다른 바리새인들이 알게 되면 문제가 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여 비난을 피하고자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갔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칭하였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분이심을 시인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구원의 진리에 관해 가르쳐주셨다. 율법을 지키는 것을 신앙생활의 최우선으로 삼으며 선한 행실을 강조하고 가르쳐 온 니고데모는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나 놀랍고, 이해할 수 없어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진정 메시아이심을 확신하게 된 니고데모는 그 후 예수님을 방어하기 위한 발언을 용기있게 할 수 있었다.(요7:50-51) 니고데모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스스로 직접 경험해야 한다. 이것은 다른 이들이 나를 위해 대신 해줄 수 없다. 예수님이 진실로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스스로 경험하고 믿게 되면 우리도 그분을 위해 일하고, 그분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된다. 5월 9일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 온 니고데모 2 (요한복음 3:9-17)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6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복음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지나던 중 길이 험하고 힘이 들자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며 심하게 불평하였다. 하나님은 원망하며 불평하는 그들을 징계하기 위하여 불뱀을 보내셨고, 불뱀에 물려 많은 사람이 죽게 되었다.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놋으로 불뱀의 모양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놓고 그것을 쳐다보면 나을 것이라고 살 길을 알려주셨다. (민21:4-9)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을 가지고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면 불뱀에 물렸을지라도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다. 죽느냐 사느냐 기로에 선 이들에게는 너무나 간단한 방법이었다. 요한복음 3장16절에는 복음의 전체 내용이 압축되어 있다. 당신이 만일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자기희생을 기꺼이 감수할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시기에 자신이 지불할 수 있는 최대의 가치인 그의 아들의 생명을 지불하는 희생을 감수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지불하심으로서 우리의 죄를 대신 갚아주셨고, 값을 치루고 사신 새 생명을 우리에게 제공하셨다.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죄로 인해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기 위한 희생이었다. 누구든지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새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을 영원히 누리게 된다는 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다.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게 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장대에 매달은 놋뱀을 바라보기만 하면 죽지 않고 살아난 것처럼 죄로 인해 죽게 된 인생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영혼이 살아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의 하나님이 인생들을 위하여 열어놓으신, 하나님은 최고의 희생을 치루셨지만 우리 인간들은 너무나 쉽게 단번에 얻을 수 있는 구원의 길이다. 5월 10일 예수님을 증거하는 세례 요한 (요한복음 3:22-30) 22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에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26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자신을 누구냐고 묻는 이들에게 요1:23에서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소개한 세례 요한은 자신의 직무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요한의 사역의 목적은 예수님을 알리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음을 알리고, 그 분이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실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몰려와 회개하며 세례를 받던 많은 이들이 예수님께로 몰려갈 때 요한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분명히 알았다. 한 인간으로서의 요한은 잠시 허탈한 마음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분 앞에, 그 분의 길을 준비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사람이며, 이 사실을 그의 제자들이 증언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요한은 예수님을 신부를 취하는 신랑이라고 했고, 자신은 신랑으로 인해 기뻐하는 자라고 하였다. 요한이 예수님은 점점 번영해야 하고 자신은 점점 쇠퇴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보기 드문 겸손이다. 때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보다 자신의 사역의 성공을 더 마음에 두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다. 다른 이들이 영광을 받게 되면 그들을 부러워하게 되거나, 그들과 같은 재능이나 지위를 갖고 싶은 욕망이 생길 때가 있다. 어떠한 경우라도 하나님 나라보다 자신의 성취에 더 마음을 두지 않도록 주의하자. 우리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그 분의 사역을 이 땅에서 끝까지 이루어 가는 것임을 잊지 말자. 5월 11일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 1 (요한복음 4:5-15)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시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의도적인 만남 예수님은 유다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기 위해 사마리아를 통과하셨다. 당시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겨 우회하여 지나가던 사마리아 지역을 일부러 통과하시며 그곳에서 부끄러운 과거를 가진 한 여인을 만나주셨다.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간 사이에 잠시 우물곁에 앉아 쉬고 있던 예수님은 낮 시간에 물을 길러 온 한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며 대화를 시작하셨다. 뜨거운 한 낮에 물을 길러 나온 여인은 동네에 사는 다른 여인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사람이 없는 한낮에 물을 길러 왔다. 예수님은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자각하게 할 뿐 아니라 마셔도 다시 목마른 세상이 주는 물과 달리 영적 기갈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시는 생수의 공급자이신 주님을 알게 하셨다. 사마리아 땅 수가 성 우물곁에서 주님을 만난 여인은 앞 장의 니고데모와 대조된다. 니고데모는 정통 바리새인으로 산헤드린 공회원이었고, 주위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으나 이 여인은 비천하기 짝이 없는 사마리아 여인으로 남몰래 물을 길으러 다녀야 할 정도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던 여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엄청난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두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동일하게 구원의 진리를 알려주셨다. 예수님은 오늘도 구원의 진리를 알려주시고자 사람들을 만나주신다. 단지 이제는 물 길러 온 여인과 같이 육신적으로 만나주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 갈급함을 해소하고자 갈망하는 이들을 주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만나주신다. 오늘 우리도 우리의 영적 갈급함을 채워주시는 살아 있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성경을 손에 들자. 5월 12일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 2 (요한복음 4:19-26)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예수님과 대화하던 여인은 남편을 다섯 명이나 두었던 외적인 모습과는 다르게 예배를 올바르게 드리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었다. 당시 유대인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서로 분쟁하고 배척하였다. 이들은 예배의 장소가 중요한 본질이라고 믿었다. 예수님을 선지자로 생각한 이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이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를 예수님께 질문하였다. 예수님은 예배를 드리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즉 성령의 도우심으로 진리이신 예수님 안에서 예배드려야 하며, 이러한 예배자를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을 여인에게 알려주셨다. 예배는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예배의 본질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예배는 만남의 예배이다. 그러므로 모세에게 성막을 지을 것을 지시하실 때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출 25:22)라고 말씀하시며 예배를 통해 우리를 만나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만남이 없는 형식적인 예배는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예배, 성전 마당만 밟고 가는 헛된 예배가 된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진리이신 예수님 안에서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룰 수 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혹시라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외형적인 것이 아닌지 생각해보자. 영이신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는지,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진정 어떤 분이신지,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기억하며 예배드리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우리의 예배를 점검하여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자. 5월 13일 영적인 수확에 대해 말씀하시는 예수님 (요한복음 4:27-38) 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32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35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38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영적 자양분 제자들이 마을에 들어가 예수님과 함께 먹을 음식을 사가지고 와서 보니 예수님은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고 계셨다. 당시 유대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무시하여 유대인 남자는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는 물론 가까이 하지도 않는 것이 전통이었다. 제자들이 사온 음식을 예수님께 드리며 드시라고 하였으나 예수님은 자신에게는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을 보내신 이, 곧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주님의 양식, 영적 자양분이었다. 음식이 몸을 건강하게 하듯이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것이 영을 건강하게 하는 자양분이 됨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시고자 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신앙의 추수는 오늘 우리의 가장 소중하고 가장 긴급한 양식이 되어야 하겠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고 가꾸고,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수고의 시간들이 있다. 수고의 시간도 성도의 사명이고 영혼의 추수도 성도의 사명이다. 의도적으로 사마리아에 들러 한 여인에게 구원의 진리를 알려주시고, 그 영혼을 구원해주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는 육신의 양식과 함께 먹어야 할 영혼의 양식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즉 전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임을 분명하게 가르쳐주셨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받는 것에서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무엇인가 행할 때 우리의 영적 자양분을 공급받게 된다. 그러므로 아직 때가 아니라고 미루지 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혼의 추수에 참여하여 영적 자양분을 공급받고 추수의 기쁨을 누리자. 5월 14일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증언하다 (요한복음 4:28-30,39-42)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 39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변화된 한 사람 진정한 예배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으로부터 예배드리는 곳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듣고 한걸음 더 나아가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을 표현하였다.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여인이 기다리는 메시야이심을 알려주셨다. 삶에 지치고 영적으로 갈급하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되고 새 생명을 얻는 은혜를 입었다. 너무 감격한 나머지 물 길러 왔던 자신의 목적도 잊어버린 채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들어가 자신이 겪은 일을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던 여자의 말, 자신들이 무시하고 멸시하던 여인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과 마주치기를 꺼려 피해 다니던 그녀가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감격과 기쁨, 놀라움을 전하자 동네 사람들도 와서 보라(4:29)는 그녀의 말에 이끌려 예수님께로 나아왔다. 예수님께서 그 마을에 이틀을 머무시며 말씀을 전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졌고, 동네 사람들은 이제 그 여인의 전한 말 때문이 아니라 직접 듣고 보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고 고백하였다. 예수님을 만난 한 여인으로 말미암아 그 동네의 수많은 사람들이 변화되었다. 부정하다고 무시당하며 고립되어 있던 사마리아를 찾아오신 예수님의 은혜를 통하여, 주님을 만남으로 변화된 한 여인을 통하여 사마리아 땅에 복음이 전해졌다. 바로 이 여인처럼 변화된 한 사람이 중요하다. 나 한 사람의 변화를 통하여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고, 거듭남의 은혜가 퍼져나가기를 소망하자. 5월 15일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신 예수님 (요한복음 4:46-54) 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49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3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왕의 신하의 믿음 요한복음 1장에서 태초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신 성자 예수님이 죄로 어두워진 세상을 비추고 구원하는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심을 알려준 후 2장에서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이적을 베풀어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나타내셨고, 성전을 깨끗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전의 참된 의미를 깨우쳐주셨다. 3장에서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거듭나야 함을 말씀하시고 4장에서는 사마리아에서 만난 한 여인에게 진정한 예배에 대하여 가르쳐주셨다. 오늘의 말씀에 등장하는 신하는 헤롯 왕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왔을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는 예수님을 능가하는 세상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찾아가 아들을 고쳐달라고 간청하였다. 이 신하는 예수님이 아들을 낫게 해주실 수 있다고 믿었고, ‘가라 아들이 살아 있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집으로 돌아감으로써 그의 믿음을 나타내 보였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믿는다고 말하는 것과 동일하게 행동해야 한다. 왕의 신하의 믿음이 어떻게 자라갔는지에 한번 주의를 기울여보라. 그는 먼저 예수님께 자기의 아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할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보지 못했으나 아들이 살았다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 믿음에 따라 행동하였다. 예수님의 이적을 경험한 그와 그의 모든 가족은 예수님을 온전히 믿게 되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우리가 그것을 사용할 때 믿음이 성장한다. 오늘 우리도 믿음의 성장을 위해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을 제대로 사용하며 살아가자. 5월 16일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1 (요한복음 5:1-9)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 이 일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것 중 예수님께서 세 번째 행하신 이적이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일어난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이적은 구원이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말씀에 순종함으로 말미암는 것을 알려준다.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신 일은 구원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짐을, 믿고 의심하지 않을 때 이루어짐을 보여준다. 38년 병자를 고쳐주신 세 번째 이적은 구원이 은혜로 말미암음을 보여준다.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예루살렘 양문 곁 베데스다 못 가에 많은 병자들이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곳에서 38년이나 병을 앓고 있던 한 사람을 주목하시고 그 병자에게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고 정확하게 물으셨다. 병든 채로 38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낫고자 하는 의지도 상실한 그에게 그의 문제는 삶의 방식이 되어 버렸다. 그 곳에는 많은 병자들이 있었고, 그가 결코 다른 병자들보다 더 혜택을 받을만하지 않았으나 예수님은 그를 주목하시고 고쳐주셨다. 예수님의 은혜가 그에게 임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함으로 이루어지는 즉각적인 은혜, 이것이 바로 구원의 상징이다. 우리의 내면은 어떠한지 살펴보자. 내면의 쓴 뿌리를 제거하지 못하고 체념하며 적응한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가 스스로 열등감 속에 갇혀 있을지라도, 오랜 내적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을지라도, 은혜 받을만한 사람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깊은 곤경을 만나주신다. 그러므로 어떤 큰 문제나 위기가 있을 때에라도 낙심하지 말고 우리를 만나주시고 은혜로 구원해주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자. 그분이 우리의 필요에 응답하시고 고쳐주신다. 5월 17일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2 (요한복음 5:9-15) 9 ... 이 날은 안식일이니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12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치신 이는 예수라 하니라 은혜의 집 베데스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양문 곁 베데스다 못 가에서 38년이나 중풍병으로 인해 곤고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한 병자를 말씀으로 고쳐주셨다. 병 고침을 받은 것 자체도 놀라운 기적이었으나 예수님은 이제 그에게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주님의 은혜, 능력을 체험한 사람으로서 구원받은 건강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육신의 질병을 고쳐주시는 것은 영혼의 구원을 받도록 이끌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육신의 치유는 영혼의 치유를 위한 수단이자 방법이었다. 베데스다는 은혜의 집, 긍휼의 집이라는 뜻이다. 양문은 성전에서 희생제사의 제물로 드려질 양을 데리고 들어가는 문이었다.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 제물, 곧 어린 양이 되셔서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그 희생의 은혜로 인해 인생들을 구원해주실 것을 정확히 묘사해주는 사건이었다. 베데스다 못 가에 있는 병자들의 모습은 오늘날 영적인 죄인들의 모습과 흡사하다.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 은혜가 임하는 곳에 있기만 하면 나음을 받을 수 있는데, 그 자리에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우리도 이러한 처지에 있었는데,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영적으로 치유된 건강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이 땅에서의 실제의 삶에서는 아직도 영적으로, 육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모습이 있다. 주님의 도우시는 은혜로, 성령님께서 우리를 깨우쳐주시고, 이끌어주셔서 연약한 모습들, 온전치 못한 점들이 고쳐지고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간구하고 소망하자. 5월 18일 아들의 권한 (요한복음 5:24-29)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영원한 삶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은 유대인의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규정을 어겼을 뿐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표현하심으로써 유대인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드셨다. 유대인들의 분노 앞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자신의 말을 듣고 믿는 자는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될 것을 말씀해주셨다.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의 몸으로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인생들에게 영원한 생명, 영적인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자신의 원래적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세상에서 육신적으로만 살다가 죽음을 맞고, 심판의 자리에 서게 될 인생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알게 하시고, 죄를 용서받고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셨다. 우리를 살리려 오신 예수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 대신 죽어주심으로써 예수님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때는 바로 지금이다. 모든 인생들 앞에는 죽음의 길과 삶의 길이 있는데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생명을 자신 속에 받아들이는 사람은 두 갈래 길 중 생명의 길을 가게 되며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살게 된다. 우리는 이미 생명의 길을 선택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오늘 하루도 예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이 땅에서 미리 하늘나라의 영원한 삶을 누리며 살아가자. 5월 19일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떡 (요한복음 6:22-29) 22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서 있던 무리가 배 한 척 외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23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께서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곳에 가까이 왔더라) 24 무리가 거기서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치신 자니라 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하나님의 일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며 말씀을 듣고 배우던 수많은 무리를 한 어린 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이시는 이적을 베푸셨다. 이적을 통하여 배불리 먹은 무리는 예수님이 배불리 먹게 하신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단순히 육신의 양식을 공급해주시는 예수님을 다시 찾았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적인 갈급함을 채우기 보다는 육신적이고 일시적인 이익 때문에, 이기적인 목적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나무라시면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드려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예수님의 답변은 매우 간결하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행하는 어떤 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를 온전히 믿는 데에서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우리의 생명이 양식이 되시기 위해 오셨다. 육신의 양식은 먹어도 다시 배고프지만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을 배부르게 하시고 부요케 하신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고 받아들이고, 그로 인해 생명의 부요함을 얻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다. 그러므로 지극히 유한하고 미약한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행하고자 하는 교만함과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 하나님이 보내신 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는 하나님의 일을 하자! 5월 20일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떡 2 (요한복음 6:30-40) 30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쫒지 아니하리라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영적인 배고픔 육신의 배고픔은 음식을 먹으면 해소되고 육신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게 되듯이, 영적인 배고픔은 예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통해 해소되고 영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왜 자신을 떡으로 표현하셨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근거이다. 육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양식을 먹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 예수님을 우리의 삶 가운데로 초청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무리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시자 이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을 믿을 수 있도록 어떤 표적을 보이겠느냐고 질문하였다. 모세가 광야에서 기도하여 그들의 조상들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만나를 먹었던 것을 상기하며 예수님도 그들의 육신적인 필요를 채워 줄 어떤 이적을 베풀어줄 수 있는지 질문한 것이다. 광야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와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삶을 이어가게 하신 하나님은 이제 영혼의 만나로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우리의 영혼의 필요를 채워주시며 영적인 배고픔을 해소시켜주신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떡을 받아먹기 위해 주님께로 나아가자.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믿음으로 우리의 영혼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은혜를 누리자. 오늘도 생명의 떡, 생명의 양식인 주님의 말씀을 먹고, 묵상하여 삶에 필요한 힘과 지혜를 공급받음으로써 또 하루의 부요한 삶을 살아가자. 5월 21일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떡 3 (요한복음 6:47-58)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52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마시는 이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성령으로 우리 안에 사시는 예수님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 있는 떡,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임을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예수님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이 보여주실 이적을 기대하였는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가장 큰 이적임을 깨닫지 못했다. 예수님은 계속 영의 일을 말씀하셨고, 사람들은 계속 육신의 일을 말하며 육신의 생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판단하였다. 어떻게 예수님은 자기의 몸을 먹을 양식으로 주실 수 있을까? 어떻게 예수님의 피를 참된 음료라고 하며 마시게 할 수 있을까? 예수님의 살과 피에 대한 말씀은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의 율법에 비추어볼 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혐오스럽고 충격적인 것이었다. 이후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살과 피의 상징을 성찬식에 대한 설명에 사용하였다. (고전11:23-26) 생명의 떡을 먹는다는 의미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 안으로 받아들여서 그 분과 연결(연합)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연결될 때 우리는 그의 죽음과 부활을 믿게 되고, 성령의 능력을 신뢰하며 주님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게 된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몸을 위해 음식을 먹고 마실 때 우리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님을 생각하자. 예수님의 말씀을 먹음으로, 예수님의 영을 우리 안에 받아들임으로 영혼의 생명도 살 수 있게 하자. 우리가 진정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었다면 그분은 자신의 거룩한 영, 곧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사신다. 5월 22일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요한복음 6:66-71) 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니이다 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예수님의 질문 이 세상에서의 것을 기대하여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에게 예수님께서 영적인 일을 말씀하시자 많은 이들이 그 곁을 떠났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떠나간 무리들과 같은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제자들이 예수님께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기대하는 것을 얻지 못해 떠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닌지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하시는 질문이다. ‘너희는 내게 무엇을 원하고 바라는가? 무엇 때문에 내게 예배하는가?’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예수님으로부터 무엇을 얻기를 원하는지 물으신다면, 그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주님을 떠나겠냐고 물으신다면 우리는 뭐라고 대답할 것인지 생각해보자.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차린 베드로는 놀라운 신앙 고백으로 주님의 마음에 흡족한 대답을 했다.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주님께 있으므로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고백하였다. 예수님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주님만이 영생의 말씀을 가지고 계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받기를 원했던 것은 생명의 떡과 생명의 물로 비유하신 영생의 말씀이었고, 그 말씀은 곧 예수님 자신이셨다. 예수님은 모든 인생들에게 가장 귀한 것을 주고자 하신다. 육신을 위해 물과 양식이 가장 중요하듯이 영혼을 위해 가장 중요한 생명의 떡, 생명의 물을 우리에게 주고자 하신다. 베드로와 같이 영생의 말씀이 주님께 있으므로 주님과 함께 하겠다고 고백하며, 오늘도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으로 인해 풍성한 은혜와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자. 5월 23일 생수의 강 (요한복음 7:37-44)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아니하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40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41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41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42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43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44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와서 마시라 본문에 나오는 명절 끝날은 유대인의 절기 중 하나인 초막절기의 마지막 날을 말한다. 초막절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시 광야에서 초막에 거주하던 것을 기념하여 지키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다.(레23:43) 정착생활을 하게 되면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감격이 식어지기 쉬우므로 해마다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게 하는 절기라고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은 초막절기를 지킬 때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길어와 성전 제단의 서편에 붓는 예식을 거행했는데 이와 같은 전통을 비유하여 예수님은 자신이 영원한 생수의 근원이심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알려주시기 위해 생수라는 표현을 사용하신다. 생수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 세상에 임할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생수와 성령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말씀하셨다. 몸 속 깊은 곳에서 성령이 강과 같이 흘러나오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인생의 모든 갈증이 해결되고 성령 충만함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만족함을 누리는 상태는 생각 만해도 우리를 부요하게 한다. 사마리아 수가 성 우물가에서 삶에 지치고 영적으로 메말라있던 한 여인을 만나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물을 주신다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이 세상에서의 삶은 우리를 목마르게 하고 지치게 한다. 그러나 주님은 지치고 피곤한 우리에게 평안과 안식, 영생을 주시기 위해 주님이 공급해주시는 생수를 마시라고 부르신다. 그 부르심을 듣고 응답하여 주님께로 나아가 생수를 마시자! 5월 24일 용서받은 한 여인 (요한복음 8:1-11) 1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니라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와서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라고 물었다. 이들의 질문에는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을 찾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대답하심으로써 묻는 이들의 의도를 피하셨을 뿐 아니라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로 하여금 순간적으로 각자 자신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며 생각하게 만드셨다.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죄가 없다고 떳떳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누구 한사람 죄를 범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지 못하고 하나씩 하나씩 성전에서 나갔고, 그곳에는 여인과 예수님만 남게 되었다. 예수님은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종종 타인의 잘못을 따지며 판단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마7:3-4)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어리석음, 교만함을 깨우쳐주신다. 우리는 때로 자신의 큰 잘못은 덮어두고자 하고, 보지 않으려고 하면서 남의 죄는 들추어내고 비판하는데 이로 인해 사람과의 관계에 갈등과 불화가 생긴다. 예수님은 타인을 사랑으로 대하고 긍휼의 마음을 가질 것을 가르쳐주시며, 죄인을 용서하시고, 죄에서 벗어나 빛 가운데에서 살게 하신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정죄하지 않고 용서해주시는데 하물며 우리가 서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5월 25일 세상의 빛 생명의 빛 (요한복음 8:12-16) 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13 바리새인들이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 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15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변화 요한복음에는 빛이라는 단어가 신구약성경을 통틀어 가장 많이 나온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인해 죄로 인해 어둠 가운데 있던 세상에 참 빛이 비취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강조하며 빛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 참 빛이 세상에 비췸으로 인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음을 알려준다. 2장의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것은 죄 가운데 있는 인생들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것임을 상징한다. 3장에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 성령으로 거듭나야 함을 가르치시며 육신적 삶의 영적 삶으로의 변화를 말씀하셨고,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적 예배에 대해 가르치심으로써 장소와 형식에 매여 있는 형식적 예배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로의 변화를 알려주셨다. 5장에서 베데스다 못 가의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으로써 질병으로부터 고침 받고 건강한 삶을 살게 되는 변화. 죄에서 자유롭게 되는 변화를 알려주시고, 6장에서 오천 명을 먹이시면서 자신이 생명의 떡이 되심을 알려 주시며, 육신의 떡으로 배부름을 얻는 것에서 생명의 떡으로 배부르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되는 변화와 함께 비록 적은 것이지만 예수님께 드렸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는 변화를 보여주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어떠한 모습으로 변화되었는지 자신을 돌아보자. 과연 우리의 육신적 생각, 삶의 태도들이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 우선으로 바뀌었는지 혹은 바뀌어가고 있는지, 아니면 적어도 바뀌어 가기를 소망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내면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변화시키는 역동적 힘을 발휘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다시 점검해보아야 할 것이다. 5월 26일 맹인을 고쳐주신 예수님 1 (요한복음 9:1-7) 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를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 길을 가다가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보신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서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다. 그 사람은 실로암 못에 가서 씻고 밝은 눈이 되어 돌아왔다. 길에서 맹인을 본 제자들은 유대인의 사고방식에 근거하여 이 사람이나 혹은 그 부모에게 무슨 죄가 있어서 날 때부터 눈이 안보인 것이라 생각하여 예수님께 질문하였으나 예수님은 그 들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답변하셨다. 맹인이나 그 부모는 왜 이 사람이 눈이 안 보이는 상태로 태어났는지 한탄하고 원망한 때가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인생을 불행한 가운데 살았으나 마침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우리도 때로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행한 일, 어려운 일을 겪을 때가 있을 수 있다. 이런 때에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 무엇을 이루려고 하시는지 그 뜻을 알도록 잠잠히 기도하며 기다려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방식으로 일하신다. 눈을 뜨게 된 맹인은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빛을 보게 되었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드러내는 일에 사용되었다. 흑암 가운데 있던 맹인에게 은혜의 빛이 비추인 것처럼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빛이 밤과 같은 이 세상을 비추는 세상의 빛이 되셨다. 우리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기 전에는 모두 영적으로 맹인이었다. 이제는 영의 눈이 떠졌으니 육신의 눈으로 세상 일만 보고 살 것이 아니라 영의 눈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며 오늘 하루를 살아가자. 5월 27일 맹인을 고쳐주신 예수님 2 (요한복음 9:8-14) 8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10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11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12 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13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14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찾아오시는 주님 날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아 구걸하며 살아가던 맹인은 예수님이 침을 진흙에 섞어 눈에 바른 것을 실로암 못에 가서 씻은 후 눈이 떠져 볼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함으로써 그는 치유의 이적을 체험하였고 맹인으로 구걸하며 살던 불행한 인생에서 새로운 삶으로 변화되었다. 맹인이었던 이 사람은 눈이 밝아져 세상을 보게 되었을 뿐 아니라 자신을 고쳐주신 분이 누구이신지 점차 알아가게 되었다. 예수님께 대한 그의 고백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주목해보며 우리는 예수님께 대해 어떻게 고백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사람들이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고 묻자 예수라 하는 그 사람(9:11)이 고쳐주었다고 말한다. 바리새인들 사이에 서로 논쟁이 일어났을 때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고 하느냐’하고 묻자 선지자라고 대답하였다(9:17). 두 번째 다시 불러 물었을 때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다면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일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대답하며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9:33)이라고 표현하였다. 그가 다시 예수님을 만났을 때 ‘네가 인자를 믿느냐’는 물음에 ‘주여 내가 믿나이다’하며 주님으로 고백하였다. 예수님은 구원받아야할 사람, 죄인들을 먼저 찾아오셔서 그를 자극시키신다. 믿음으로 응답하느냐 거절하느냐는 그 사람의 결단이다. 믿음으로 응답하는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치료해주시고, 그 치료가 다른 사람의 주목을 받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변화된 사람은 변화된 모습을 통해 다른 이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치유가, 그 변화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5월 28일 맹인을 고쳐주신 예수님 3 (요한복음 9:35-41) 35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38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우리도 맹인인가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메마르고 보잘 것 없는 나무 한 그루 “주님, 여기 메마르고 보잘 것 없는 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부디 오셔서 이 나무가 열매 맺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리하시면 저는 즐거이 고백할 것입니다. 당신으로부터 나의 모든 열매가 나왔노라고. 주님, 저는 본성적으로 시들고 메마른 가지입니다. 저에게 오셔서 생기를 주시어 아론의 지팡이처럼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울 수 있게 하소서. 그리하여 사람들이 은혜로운 기적을 보고 오직 당신만을 찬양하게 하소서.” (스펄전목사님의 기도)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자의 눈을 뜨게 해주신 일은 죄인으로 태어나 죄와 사망의 어두움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인생들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적인 눈을 뜨게 해주신 것을 상징한다. 예수님의 먼저 찾아오시는 선행적 은혜,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내어주신 은혜가 없었다면 우리는 스펄전목사님의 기도와 같이 메마르고 보잘 것 없는 한 그루의 나무, 본성적으로 시들고 메마른 가지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맹인이 예수님과의 일대일의 만남을 통해 세상을 보게 되었고, 예수님을 구원의 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 나의 주님으로 고백함으로써 영혼이 살아나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울 수 있는 인생으로 변화되었고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되었다. 시들고 메말랐던 우리의 영혼에 생기가 솟아나고 싹이 나고 꽃이 피어 풍성해진 모습을 보고 우리 주변의 많은 영적 맹인들이 그들의 눈을 뜨기를 소망하며 우리에게 다가와 구원의 길을 묻게 하자. 구원의 길을 묻는 그들에게 즐거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알려주자. 5월 29일 양의 우리 (요한복음 10:1-10)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다른 이들과의 대화에서 상대방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을 때 우리는 진심을 전하고자 몇 번이고 강조하며 안타깝게 반복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자신이 누구이신지,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 알려주고자 하는 마음이 너무나 간절하여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힘주어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목축업을 주로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해하기 쉽게 양과 목자의 비유를 통해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설명하셨으나 그들은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듣지 못하였다. 9장에서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을 고쳐주시면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영적 소경으로 비유하셨던 예수님은 그들이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바르게 인도하지 않는 절도나 강도, 삯꾼에 불과하다고 지적하셨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가며 인도한다. 목자가 앞서 가면 양은 그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따라 온다. 어린이들이 즐겨 읽는 동화 중에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가 있다. 이 동화에 나오는 양치기 소년 페터는 알프스 산에서 양을 치며 살아가는데 그는 양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양의 이름을 부르며 돌본다. 양들은 그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라 풀을 뜯어 먹으러 나가기도 하고 저녁에 우리로 돌아오기도 한다. 우리의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며 인도하실 때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알아 듣고 그 뒤를 따라가야 한다. 양들이 목자를 따라가며 꼴을 얻듯이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생명의 양식을 먹음으로써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하게 얻어야 하겠다. 5월 30일 선한 목자 (요한복음 10:11-18)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누가 선한 목자인가?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이제 자신을 단순히 목자가 아니라 ‘선한 목자’라고 하셨다. 선한 목자는 자신이 위험한 처지에 놓여도 결코 양들을 버리지 않고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도 버린다고 하심으로써 모든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목숨을 내어주실 것을 미리 알려주셨다. 구약시대에는 양이 목자를 위해 죽었다. 신약시대에는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양을 위해서 친히 죽으셨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자신이 돌보는 양들을 아신다. 우리의 모든 처지와 형편을 아시며, 우리 내면의 깊은 생각까지도 알고 계신다. 목자가 각각 양들의 이름을 부르며 위험한 길, 위험한 짐승들, 먹으면 안 되는 독초 등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그 말씀을 듣고 믿고 따르는 이들을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게 하신다. 우리는 때로 우리의 지식과 경험이, 우리가 가진 물질이, 세상에서 획득한 우리의 지위가, 주변의 유력한 사람들이 우리를 이끌어주는 목자인 것으로 착각한다. 이러한 것들은 이 세상의 삶에서 종종 목자의 역할을 할 수도 있겠으나 우리를 영원한 삶으로 이끌어주지 못할뿐더러 우리의 영혼을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지 못한다. 선한 목자가 되셔서 자신의 목숨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 5월 31일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마리아 (요한복음 12:1-8)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진정한 경배 유월절 엿새 전 베다니에서 예수님을 위해 잔치가 열렸다. 마리아는 귀한 향유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발을 닦아드렸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은 향유는 노동자의 1년 치 품삯에 상당하는 가치를 가진 것이었다. 마리아의 행동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일을 경시하거나 예수님을 위해 지나친 방식으로 돈을 사용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유일하고 특별한 사건, 곧 인류의 죄를 대신 갚아주기 위해 죽으실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는 것임을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 마리아는 주님께 대한 사랑이 너무 커서 그 사랑을 어떻게든 표현해야만 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자신의 머리털로 향유를 부은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린 그녀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상상해보자. 예수님은 그녀의 헌신적 경배를 칭찬하시며,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그녀가 행한 일도 말하여 기억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막14:9). 그녀는 단지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행했으나 그것이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무언가를 행할 때 때로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있어 아주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다. 마리아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귀중한 것을 주님께 드림으로써 진정한 경배를 드렸다. 우리가 그 당시 주님과 함께 있었다면 우리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지금 우리에게 주님을 위해 우리에게 소중한 어떤 것이라도 드릴 수 있는 헌신의 믿음이 있는지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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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림교회
2019년 3월 25일
In 365일 말씀묵상
6월 1일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다 1 (요한복음 11:1-10) 1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더라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8 제자들이 말히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하나님의 시간 계획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7가지 기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이 마지막으로 소개되고 있다. 예수님은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의 가족을 무척 사랑하셔서 종종 그곳을 방문하셨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께 나사로의 병든 것을 알렸을 때 나사로의 질병으로 인한 누이들의 고통을 너무나 잘 아셨을 것임에도 불구에도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으시고 지체하셨다. 예수님이 지체하신 것은 특별한 의도가 있으셨다. 만일 예수님이 병든 나사로의 마지막 시간에 함께 계셨다면 그가 죽기 전에 치료해주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기다리는 동안 나사로는 죽었고,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죽음을 정복하는 주님의 권능을 나타내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었다. 하나님의 시간계획, 특히 예수님께서 위급한 상황에서 지체하신 것은 마치 주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완전한 계획과 의도를 따라 우리의 모든 요구를 채워주신다. 이것을 깨달은 사도 바울은 빌4:19에서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선언한다. 한 그리스도인이 마주치는 문제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하나님은 모든 부정적인 상황에서 선한 것을 이끌어내실 수 있기 때문이다(롬8:28). 그러므로 우리는 때로 기도에 즉각적인 응답이 오지 않더라도, 상황이 더 심각하게 변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내하게 하신 후 하나님의 계획과 때를 따라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6월 2일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다 2 (요한복음 11:17-27)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는 나사로가 죽은 지 이미 나흘이나 지났다. 너무 늦게 오신 예수님을 원망이라도 하듯이 마르다는 예수님이 그곳에 계셨더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동안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고 이적을 행하신 예수님을 보아왔던 두 자매는 예수님이 오시면 반드시 오라비를 고쳐주실 수 있으리라 믿고 간절한 마음으로 안타깝게 예수님을 기다렸을 것이다. 마르다는 나사로가 이미 죽었지만 지금이라도 예수님께서 무언가 해주시기를, 그리고 무언가 해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마르다는 놀라운 부활신앙을 고백한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아는 믿음은 가지고 있었으나 죽음까지도 다스리시고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예수님의 하나님과의 동등한 권능은 아직 알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시려고 이미 계획하고 계셨다. 그러나 육체적으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에 앞서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포하시며 그 사실을 믿는 이들이 얻게 될 영원한 생명과 이 세상에서도 누리며 살아갈 영적 생명에 대해 미리 말씀하심으로써 마르다의 믿음을 더욱 강화시키셨다. 오라비의 죽음의 고통 앞에 선 마르다의 신앙은 이제 부활을 아는 것에서 부활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성장하였다. 마르다와 같이 우리의 믿음도 아는 것에서 믿는 것으로 변화하여 온전해지기를 소망하자. 6월 3일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다 3 (요한복음 11:38-44)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나에게 일어난 기적 오라비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소망의 말씀을 주셨다. 마르다는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옮겨놓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 냄새가 난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대답을 하였다. 그녀의 시선은 아직 예수님께 고정되지 않고 현실에 고정되어 있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명령하시자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살아 무덤에서 나왔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단지 그를 사랑하시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곳에 모인 무리들에게 예수님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것을 보여주심으로써 하나님과 예수님이 기도 안에서 하나가 되심을 보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하려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 보이시기 위한 것이고, 나아가 부활 신앙을 갖게 하려는 것이었다. 나사로는 살아났으나 언젠가 다시 죽었다. 그의 살아남은 다시 죽음을 맞이하는 제한적인 부활이었다. 장차 있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예시하는 이 사건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일시적인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임을 시사해준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서는 이런 기적은 다시 볼 수 없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족이 베로 묵인 것 같이 죄와 죽음에 둘러싸여 있던 우리 영혼이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살아난 것이 오늘날 우리가 체험하는 기적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눈을 들어 우리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일상에서 반복되는 죄와 악함과 부패를 씻어주시고 고쳐주시는 주님의 말씀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킴으로 오늘도 우리에게 일어나는 기적을 체험하자! 6월 4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요한복음 12:20-25)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그들이 갈릴리 벳세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예수님의 영광 우리의 영광 명절에 예루살렘을 찾아온 헬라인 몇 명이 예수님을 뵙고자 청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고자 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셨다(23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광은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하는데, 십자가의 죽음은 당시 가장 수치스럽고 가장 큰 형벌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영광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고, 그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이제 그 결정적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아셨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 한 알의 밀이 되어 죽을 것이며, 그로 인해 많은 이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므로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도 이와 같이 자신을 희생해서 많은 열매를 거두어야할 것을 가르쳐주셨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자, 곧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사람은 오히려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을 얻게 됨을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헬라인들의 잘못된 의도에 응답하셨다. 성도로서의 우리의 영광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과 계획을 이루어 가시기 위해 사람을 사용하신다. 우리가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하나님의 뜻을 펼쳐가는 도구로 쓰임 받게 된다면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영광이 될 것이다. 6월 5일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요한복음 12:26-30)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27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29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천둥이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섬김에 따르는 복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구원을 이루고자 하시는 예수님도 이 땅에서 육신의 몸으로 사셨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하는 일이 너무나 고통스러우셨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라고 고백하는 예수님은 감당해야 할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분명히 밝히며, 사명에 순종함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셨다. 예수님을 뵙고자 했던 헬라인들은 예수님을 섬기는 제자가 되고자 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고 교훈하신다.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 예수님이 계신 곳에 있는 사람,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을 행하는 사람, 예수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그 마음이 있는 사람, 예수님이 바라보는 곳을 함께 바라보는 사람, 그 사람이 진정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예수님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귀히 여겨주시는 것이 예수님을 섬기며 따라가는 제자가 받는 복이다. 이 땅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기에는 희생과 헌신이 따른다. 우리는 때로 이러한 희생과 헌신이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이에 비교할 수 없는 상급을 하나님께서 주신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귀하게 여김을 받아도 기쁜 일인데 하나님으로부터 귀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가장 큰 은혜 중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섬기는 제자의 길을 주님과 함께 감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 귀히 여겨주시는 은혜를 받아 누리자. 6월 6일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 1 (요한복음 13:1-10)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9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예수님이 보여주신 본 예수님은 자신의 마지막 사명을 이루시고 이 세상을 떠나야 할 때가 다가옴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도 그들이 앞으로 감당해야할 일들, 일어날 일들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함께 모여 식사를 하던 자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심을 통해 세상에 홀로 남게 될 제자들을 교훈하셨다. 유대인들은 더운 지방에 사는 까닭에 샌들같이 생긴 신발을 신고 다녔다. 외출 후나 식사 전에 발을 씻는 것이 관습이었는데 당시 발을 씻겨 주는 것은 종들이 하던 일이었다. 예수님께서 종과 같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심으로써 겸손의 본을 보여주셨고, 제자들도 서로 섬기는 겸손한 삶을 살라고 하셨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마음에 더러운 죄가 있는 사람은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가질 수 없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심으로 인해 우리는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 가운데 친밀한 교제를 누리게 된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들이 임명 받을 때 온 몸을 씻었다. 하나님은 또한 물 대야를 준비하도록 명령하셔서 제사장들이 매일 손발을 씻는데 사용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깨끗하게 씻어 주셨고, 매일 말씀의 물로 그의 교회, 성도들을 깨끗케 하신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말씀을 읽음으로써 그의 발을 깨끗이 씻고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함을 주님은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6월 7일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 2 (요한복음 13:12-20) 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18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19 지금부터 이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위선과 교만을 제거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서로 섬기며 봉사할 것을 가르치려는 목적만은 아니었다.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승천 후 예수님의 사역을 이 땅 위에서 계속하게 하려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다. 이 목적을 이루고자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신을 보내신 것 같이 자신도 제자들을 보내심을 말씀하셨다. 가룟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다락방 식사자리에 있었다. 그는 위선적으로 행동하며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제자들은 그의 의도를 눈치 채지 못했다. 예수님은 제자들 중 한 명이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을 공개적으로 말씀하시며 이미 마음속으로 주님을 배반한 유다에 대해 경고하셨다. 다른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 눈치 채지 못했지만 유다는 예수님이 자기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유다로 하여금 회개하고 사단에게 지배당한 마음을 돌이킬 기회를 주셨지만 주님이 떡 한 조각을 적셔 그에게 주었을 때 그는 회개와 배신의 갈림길에서 사단에게 굴복하였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팔려는 자가 누구인지 말해달라고 채근하며 예수님께 은근히 자신을 내보였고, 자신은 예수님을 따라 가며 목숨까지 버릴 수 있다고 말했으나 그것은 잘못된 자기 확신, 교만이었던 것이 곧 드러났다. 예수님께서는 13장에서 일련의 말씀들을 통해 우리에게 위선과 교만을 경고하신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때로 잘못을 저지른다. 잘못한 양심을 주님께서 자극하시고 깨우쳐주실 때 회개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우리의 신앙적 위선과 교만을 회개하며 오늘도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하겠다. 6월 8일 새 계명 (요한복음 13:31-35)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36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37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 베드로는 예수님께 자신이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장담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가 위기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이날 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고 베드로에게도 경고하셨다. 예수님이 받으실 영광은 십자가였다. 인류 구원을 위해 곧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실 예수님은 그것이 자신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지만 하나님께나 자신에게나 모두 영광이 됨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이 곧 영광임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십자가 죽음을 앞둔 예수님은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 나아가 우리 모두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유언과 같은 말씀을 주셨다. 사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레위기19:18에 이미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새 계명을 주신다고 하시며 구약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단지 말이나 감정으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시며 사랑하셨다. 인간인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과연 어떻게 본받고 실천할 수 있을까? 우리의 생명을 내어주지는 못할지라도 우리의 시간, 재물, 능력을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위해 주저함 없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사용한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사랑을 베풀기는 참으로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러한 사랑을 실천할 때 이것을 보는 이들은 우리가 행하는 사랑이 진정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임을 느끼게 되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을 인정할 것이다. 6월 9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한복음 14:1-9)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유일한 길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 뒤에 남겨질 제자들이 현실적 상황들로 인해 근심하다가 믿음이 약해질 것을 염려하셨다. 그러므로 세상을 바라보며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믿음 위에 굳건히 서 있을 것을 명령하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시고, 거처를 예비하시면 다시 오셔서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가시겠다고 하신다. 어디론가 갈 곳이 있다는 사실은 사람의 마음을 안심시키고 평안하게 만든다. 그 곳이 육신의 집이라도 그러한데 하물며 우리가 이 땅에서의 삶을 끝내고 갈 곳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그러나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거처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하는 그곳을 경험적으로 알지 못하므로 도마처럼 의심한다.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예비해주시는, 장차 우리가 갈 곳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곳이다. 길이 되신 예수님만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진리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약속의 실제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오직 진리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생명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신적 생명을 우리 모두에게 영생으로 연결시키셔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열어놓으신 유일한 길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는 오늘도 이 땅에서 장차 가게 될 하늘나라를 기대하며, 이미 하늘나라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다. 6월 10일 보혜사 성령 1 (요한복음 14:14-21)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미래를 아시는 하나님 곧 제자들을 떠나게 되실 예수님은 그러나 제자들을 세상에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 자신은 비록 제자들을 떠나 하나님 나라로 가실 것이나 삼위 일체 중 또 다른 하나님이신 성령을 제자들에게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성령을 보혜사로 표현한 것은 성도들 곁에서 모든 것을 살펴보시며 마땅히 행해야할 일, 말해야 할 것들을 가르쳐주시고 도와주시는 위로자, 대언자, 상담자로서의 성령의 사역을 염두에 둔 것이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 안에,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현재이고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살아가도록 도우시며,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 땅 위에 세우도록 도우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가시는 것이 뒤에 남겨지는 제자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도리어 성령이 임하시는 큰 축복이 되는 이 약속은 제자들에 대한 무한한 위로의 말씀이다. 때로 사람들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기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미래를 알지 못하게 하셨다.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하나님만이 아시지만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알아야만 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말씀해주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규범에 따라 산다면 그분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일에 있어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와 함께 하시며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님으로 인해 오늘도 우리는 담대하게 하루를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6월 11일 보혜사 성령 2 (요한복음 14:25-31)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