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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림교회
2019년 3월 25일
In 365일 말씀묵상
1월 1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5)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시작과 끝 Der Tag ist die Grenze unsers Sorgens und Mühens. Er ist lang genug, um Gott zu finden oder zu verlieren, um Glauben zu halten oder in Sünde und Schande zu fallen. Darum schuf Gott Tag und Nacht, damit wir nicht im Grenzenlosen wanderten, sondern am Morgen schon das Ziel des Abends vor uns sähen. 하루는 우리의 근심과 수고의 경계이다. 하루는 하나님을 찾거나 아니면 잃어버리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다. 믿음을 붙들거나 아니면 죄와 수치 속으로 빠지기에 또한 충분히 긴 시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낮과 밤을 만드셔서 우리로 하여금 경계를 잃고 방황하지 않고, 아침에 이미 밤이라는 목적지를 보게끔 하셨다. (디트리히 본회퍼의 매일을 위한 말씀 중 1월 1일자) 디트리히 본회퍼의 글은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로 하여금 미리 한해의 마지막 날을 생각하게 한다. 올 한해 우리 각자가 가지는 소망, 계획 등의 결과를 미리 생각하고 기대하며 첫 날을 시작하도록 마음가짐을 분명하게 해준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히브리서의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조화롭고 질서 있게 창조하셨다. 어두움 가운데서 빛을 창조하시고 낮과 밤, 사시사철을 정하시고 시간의 경계를 구분하셨다. 한 해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시간의 경계를 정해주시고, 다시 또 출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에 감사하며 올 해의 마지막 날을 미리 바라보며 한 해를 살아가자. 1월 2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창세기 1:26-31)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8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 째 날이니라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믿음의 대전제, 고백, 선포의 말씀이고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태에서 빛을 창조하셨다. 신앙적 의미로 혼돈과 어둠은 거듭나지 못한 영혼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무질서하고, 허물과 죄로 인해 죽은 상태에 있는, 영적 생명이 없는 상태에 있는 인생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빛으로 오셨다. 태초에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세상이 복음의 빛으로 충만해지기를 원하시고, 모든 사람이 그 빛을 가지고 누리기를 원하신다. 기독교인이 세상에서 빛이 되어서 혼돈된 곳에 질서와 조화를 이루고 그리스도의 빛을 세상 가운데 비추며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자연만물을 다스리도록 관리자의 역할을 맡겨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올 한 해를 살아갈 때 늘 기쁨과 평안 가운데, 자존감을 가지고 힘 있게 나아가기를 원하지만 때로 자신의 약한 모습, 부족한 점을 보고 실망하며 낙심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임을 기억하자.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 자신의 속성, 자신의 성품을 따라 만들어주신 것을 기억하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아하셨음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존감을 반듯하게 세워가자. 1월 3일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하나님 (창세기 2:1-7)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4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안식일을 구분하신 이유 창세기 1장은 전 우주적 맥락에서 창조사역을 기록한 반면 2장은 특별히 에덴동산과 인간의 창조에 중점을 두고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반복하여 기록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정점이 인간에게 있음을 알려준다. 하나님은 6일 동안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일곱 째 날에 안식하셨다. 모든 창조 사역을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 완성하고 창조의 종결로써 안식을 취하신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실상 휴식이 필요하신 분은 아니다. 그러나 6일 간에 걸친 창조사역과 하루의 안식을 통해 우리들에게 일과 휴식의 리듬을 정해주셨고, 일곱 번째 날을 복되고 거룩한 날로 구분하셔서 하나님 안에서 쉼을 누리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6일간의 창조사역을 마치시고 7일에 안식하신 것 같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도 6일 동안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실하게 일하고, 7일에 안식을 취하는 것이 올바른 삶의 방식이다. 안식일은 단순히 육신이 쉬는 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신 복을 생각하며, 스스로 거룩하게 하는 일에 힘씀으로써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자신과의 관계를 점검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자로서의 삶의 자세를 점검하는 날이다. 하나님께서 이 날을 거룩하게 구분하시고 복 주신 이유는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가다듬는 날이기 때문이다. 1월 4일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창세기 2:8-17)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10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하나님은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만드시고 그곳에 아담과 하와를 살게 하셨다.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셨는데 동산 가운데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 동산에 있는 각종 나무의 열매는 마음대로 먹을 수 있으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흔히 사람들은 하나님이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들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했느냐고 질문한다. 에덴동산에 있던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무엇이었을까? 생명나무는 그 열매를 지속적으로 먹으면 육신의 생명을 강건하게 해주어서 삶을 영존시킬 수 있는 특별한 나무이다. 영적인 의미로는 이것을 먹을 때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징표이다. 또한 생명나무는 이후 타락한 인간의 영적 생명의 회복을 위해 세상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을 제공해주는 것으로, 판단하고 자랑하며 교만하게 하여 영적인 죽음으로 이끌어가는 육신적 세상을 의미한다. 동산에 있었던 두 나무는 하나님이 인간을 스스로 사고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며,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지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셨음을 보여주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하며 살아야 하는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1월 5일 사탄의 유혹 (창세기 3:1-7) 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는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알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불순종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시면서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성숙한 인격으로 발전해가기를 원하셨다. 사탄의 도구가 된 뱀은 교묘하게 하와의 마음을 떠보았다. 하나님이 정말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했느냐고 살짝 바꾸어 묻는 사탄의 질문에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말을 더하였다. 하나님은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하와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고 대답하였다. 하나님은 그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으나 하와는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다고 대답하였다. 하와의 마음 상태를 알아챈 사탄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고 하며 적극적으로 하와를 유혹하였다. 하와가 사단의 유혹에 마음이 끌려 그 나무를 보았을 때 정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하였다. 요일2:15-17의 말씀대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하와의 마음을 지배한 것이다.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생각을 더하여 말씀을 변질시켰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인간의 생각을 첨가하여 변질시킬 때 사단이 개입하여 죄가 들어온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는 육신의 눈이 밝아져 자신들이 벌거벗은 것을 보게 되었으나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영적인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불순종의 결과는 영적 죽음이다. 1월 6일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3:8-13) 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나님의 질문 사탄은 하와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을 일으켰고,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였으며, 거짓말로 속이는 과정으로 인간을 죄의 길로 유혹하였다.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인간은 즉각 내적인 순수함과 영화로움을 상실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하나님과 교제할 마음을 잃게 되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숨었다. 죄의식과 두려움, 수치심은 그들이 이전에 기뻐하였던 하나님과의 교제를 깨뜨렸다. 나무 사이에 숨어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어오셨다. 아담이 어디 있는지 장소를 묻는 것이 아니라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하나님은 비록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 죄를 지었지만 이들이 자신의 현 상태를 깨닫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무 사이에서 하나님 앞으로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담을 부르셨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지 않았을 뿐더러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죄를 더하였다.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하나님께 불순종한 책임을 회피하려고 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하시면 나는 어디에 있다고 대답할 수 있을까? 행여 신앙적으로 옳지 못한 자리에 있다면, 잘못된 생각이나 잘못된 삶의 방식에 매여 있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자리로 나아가자! 1월 7일 가죽옷을 입혀주신 하나님 (창세기 3:20-24) 20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구원 뱀은 하와에게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라고 말하며 죄의 길로 유혹하였고, 하나님과 같아지기를 원하는 교만이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오늘날에도 우리들을 괴롭히고 또 쉽게 넘어뜨리는 유혹은 교만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로 공동체의 관계에 장애가 생겼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다른 피조물 사이에 죄가 개입하여 장애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육신의 눈이 밝아져 자신들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게 되고 수치심을 느껴 나뭇잎으로 몸을 가린 아담과 하와를 위해 짐승을 잡아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혀주셨다. 가죽옷은 죄를 지은 인생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표현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직접 피를 흘리고 구원해주실 것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다. 낙원에서 추방된 것이 영원한 조치는 아니었고, 가죽옷으로 상징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를 예비해주셨다. 이로 인해 인간은 새로운 낙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성경에서 옷은 흔히 구원을 상징한다. 집을 나가 방탕하게 살던 아들이 돌아오자 아버지는 그에게 죄에 찌든 더러운 옷을 벗기고, 깨끗한 옷을 입혀주었다(눅15:22).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이 세상을 살아가라고 말씀하신다. 1월 8일 가인과 아벨 (창세기 4:1-8)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진정한 예배 아담과 하와가 낳은 첫째 아들 가인은 농사를 지었고, 둘째 아들 아벨은 양치는 일을 하였다. 농사를 짓던 가인은 땅의 소산을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고, 양을 키우던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제물삼아 예배를 드렸다. 하나님은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셨고, 아벨의 예배는 받으셨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예배는 받으신 것이 비단 드려진 제물의 차이에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두 사람의 일상의 삶의 태도가 달랐을 것이고 예배를 드리는 자세가 달랐으리라는 것을 ‘아벨과 그의 제물’, ‘가인과 그의 제물’이라는 성경 기록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가인이 하나님께 책망을 들었을 때 그는 자신의 잘못된 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삶의 모 습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예배자로 회복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핑계하며 회개의 기회를 놓친 아담처럼 가인도 회개할 기회를 놓치고 분노로 인해 동생을 살인하는 더 큰 죄를 범했다. ‘받으신다’ 혹은 ‘열납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 원어의 뜻은 ‘응시하다, 주목하다’이다. 하나님께서 가치 있는 것으로 주목해서 보시고 기꺼이 받아들이셨다는 뜻이다. 올 한해 우리가 드리는 예배, 나아가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서 주목하시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주시는 진정한 예배가 되기를 소원하며 살아가자. 1월 9일 가인의 계보 (창세기 4:16-22) 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산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18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19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0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가인의 길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에 지지 말고 죄를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으나 가인은 죄를 다스리지 못했다. 창세기 4장7절에 ‘죄’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나온다.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 활 쏘는 사람이 표적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성경적 개념의 죄는 하나님의 뜻에서 빗나간 인간의 모든 행동이나 마음 상태에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가인은 이후 놋 땅에 거주하며 아들 에녹을 낳았다. ‘놋’은 ‘흩어지는 것’, ‘방랑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가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영적으로 하나님과 멀어져 방랑하였음을 말해준다. 그곳에 성을 쌓고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성이라고 불렀다. 에녹은 ’창시‘라는 뜻으로 이곳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겠다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었지만 불행하게도 이 새로운 출발은 하나님 없는 출발이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가인의 자손들은 매우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야발은 목축기술을 발전시켰고, 유발은 음악을 창시했으며, 두발가인은 금속산업을 처음으로 시작했다. 가인의 가문, 그가 세운 도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가인의 자손들은 문명을 발전시키는 놀라운 성과를 이루었으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타락의 역사를 이어갔다. 현대의 놀라운 문명의 발전도 인간의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만을 이끌어낸다면 본질 상 가인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고도로 발전된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행여 가인의 길을 따라가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점검해보자. 1월 10일 아담의 또 하나의 계보 (창세기 4:25-5:8) 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5:1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6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 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신실한 믿음을 이어가는 가문 창세기 4장 25절부터 5장 마지막까지 또 다른 인류의 족보가 기록되는데, 이 족보는 아담의 신실한 자손들을 기록함으로서 타락과 죄악으로 얼룩진 인간 역사의 진행과정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신실한 믿음의 자손이 보존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담과 하와가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가인의 자손들이 육신을 따라 욕심과 교만, 자랑을 이끌어 내는 세속 문화를 세워가는 동안 셋과 그의 자손들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을 드리며 거룩하고 경건한 삶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갔다. 가인의 자손들은 자신들이 이룩한 문명의 힘을 의지하고 살았으나 셋의 자손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았다. 가인의 자손들의 계보에는 나이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5장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셨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노아에까지 이르는 아담의 세 번째 아들 셋의 자손들이 이 땅에서 몇 살까지 살았는지 알려주고 있다. 악인들의 생애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연수를 계수할 가치가 없으나 신실한 자손들의 삶은 연수를 계수할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오늘 우리는 어떤 가문을 이어가기를 원하는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았던 셋의 자손들처럼 신실한 믿음의 가문을 이어가기를 소원하며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자. 1월 11일 노아의 방주 1 (창세기 6:9-22) 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10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11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14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15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 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19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 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 하였더라 하나님의 기다리심과 노아의 순종 여호와 하나님은 부패한 세상을 새롭게 하실 계획을 세우시고, 노아를 택하셨다. 노아가 그 타락한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것을 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세상을 멸하실 날을 대비하여 배를 만들라고 말씀하시고, 배의 크기와 모양을 상세히 지시하셨다. 알려주신 배의 크기는 길이 171미터, 넓이 28미터, 높이 17미터 가량이었고, 그 구조는 물 위에 안정되게 떠 있게 하는 가장 과학적인 구조라는 것이 1800년대 중반 영국의 조선술을 통해 입증되었다. 노아는 120년 동안 배를 만들었다. 120년의 긴 세월은 노아 가족이 다른 사람이나 기계의 조력 없이 그 큰 배를 만드는데 필요한 시간이었을 수도 있겠으나, 하나님이 죄악을 심판하실 것이니 돌이켜 회개하라고 기회를 주시며 기다리신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노아가 마른 땅 위에서 묵묵히 오랜 세월 그 큰 배를 만드는 모습은 하나님의 계획과 타락한 백성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주는 표징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노아를 비웃고 조롱하였다. 오늘날 흔히 교회를 배에 비유한다. 배는 물 위에 떠 있으나 물과는 분리되어 있다. 배에 물이 들어오면 배는 침몰하고 만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으나 모든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고 세상의 죄악을 막아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배와 같은 교회의 역할, 배를 만드는 노아의 심정과 역할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보자. 1월 12일 노아의 방주 2 (창세기 8:13-9:1) 13 육백일 년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서 물이 걷혔더니 14 둘째 달 스무이렛날에 땅이 말랐더라 15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6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 오고 17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20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9:1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새로운 세상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배를 만든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모든 짐승들이 그 종류대로 암수 둘씩, 혹은 일곱씩 배에 들어간 후 하나님은 직접 배의 문을 닫으셨다. 배의 문이 닫힌 후 7일이 지나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홍수는 40일 간 계속되어 모든 높은 산이 다 잠기고 땅에 있는 숨 쉬는 생명체는 다 죽었다. 대홍수 가운데 구원받아 살아남은 사람들은 결국 노아의 가족 8명뿐이었다. 인류 역사 초기에 대홍수가 있었다는 기록은 성경 뿐 아니라 동서양의 다른 문명의 고대 문서들에 도 기록되어 있어 노아 시대의 대홍수 사건의 역사적 사실성을 의심할 수 없게 만든다. 노아와 그 일행이 배 안에 있었던 기간은 1년 10일이나 된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방주에 들어간 노아는 홍수가 그치고 지면에 물이 걷힌 것을 확인한 이후에도 하나님의 지시가 있기 까지 57일을 더 기다린 후에야 방주에서 나왔다. 이들이 1년 이상 배 안에서만 생활하다가 밖으로 나와 다시 만난 세상은 어떠했을까?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공의의 심판에 전율하며, 자신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여 구원해주신 은혜에 감격하여 제단을 쌓고, 정결한 새를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예배드렸다. 하나님은 그 예배를 기쁘게 받으셨다. 노아의 믿음과 순종을 기쁘게 받으신 것이다. 타락한 옛 세상은 장사되었고, 노아와 그 가족은 새 생명으로 부활하였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새로운 세상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복을 주셨다. 1월 13일 바벨탑 건설 (창세기 11:1-9) 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이 시대의 바벨탑 대홍수를 통하여 인간의 불순종과 타락을 심판하신 하나님은 노아의 세 아들인 셈과 함과 야벳으로 하여금 새로운 세상을 이어가게 하셨다. 사람의 생각하는 것이 어려서부터 악함을 하나님이 아시기에 이제 다시는 인간의 죄로 인해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하시며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다. 타락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를 경험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세로 살아야 마땅했으나 급속도로 번성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면서 다시금 하나님을 대적하였다. 하나님의 힘에 대항할 수 있는 통일된 하나의 세계 왕국을 건설하고자 시날 평지에 거대한 탑을 짓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탑 꼭대기를 1. 하늘에 닿게 하여 2.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3.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려고 하였다. 즉 하나님처럼 되고, 스스로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고, 한 곳에 모여 강력한 하나의 나라를 세우고자 계획하였다. 마침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이들을 온 지면에 흩어놓으셨다. 바벨탑 사건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모든 인간의 노력은 성공할 수 없으며, 불행을 가져올 뿐임을 알려준다. 거대한 문명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그 옛날 조상들이 쌓다가 실패한 바벨탑을 다시 쌓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1월 14일 아브람의 이주 (창세기 12:1-5)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니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 였더라 5 아브람아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너는 복이 될지라 창세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11장까지의 전반부는 창조, 타락, 홍수, 바벨탑 사건의 중요 4개 사건을 다루는 전 인류적인 기록이다. 12-50장까지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에 이르는 4명의 중요 인물을 다루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이루어가는 과정에 이들이 어떻게 쓰임 받았는지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교만해져 바벨탑을 쌓던 세대 속에서도 믿음을 이어가는 의인의 계보인 셈의 가계를 기록하면서, 셈의 가문에서 하나님께서 택하여 그의 기업으로 삼으신 아브라함이 태어난 것을 알려준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와 그 가족들이 살던 갈대아 우르는 어떤 곳이었을까? 우르는 티그리스와 유브라데스 강 사이의 남쪽에 위치한 비옥한 지역인데, 상업, 천문학, 점성술이 발달하였고, 뛰어난 고대문명과 아울러 우상숭배가 성행하였다. 지금의 터키 북부지역이다. 우르는 또한 수메르 제국 전체에 막강한 힘을 행사하던 도시국가였는데 도시 북쪽에 마치 바벨탑을 연상시키는 3층의 거대한 탑 모양으로 지어진 신전이 있었다. 세상적으로 볼 때 아브람이 이런 풍요한 곳에서 황량한 팔레스틴으로 향했던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복을 주시고 창대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면서 오히려 안락하고 부요한 곳을 떠나라고 하셨다. ‘너는 복이 될지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떠난 아브람의 믿음이 진정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1월 15일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창세기 12:5-9) 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예배하는 삶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75세에 고향을 떠나 마침내 가나안 땅 세겜이라는 지역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 땅을 아브람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재차 약속하셨고, 아브람은 약속의 땅까지 무사히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 이후 아브람은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가 장막을 치고 그곳에서도 여호와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가는 곳마다 자신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믿음을 보여주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그들에게 고향과 같았던 번성하고 풍요로운 도시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고자 하였는데 하란에 이르러 거기서 거주하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데라가 죽은 후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역사는 단시일 내에 이루어지는 것도 있고, 시작부터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다. 아브람의 가족은 이미 아버지 데라 때부터 가나안을 향해 이주해가는 중이었다. 데라가 무엇을 생각하고 옮겨갔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의 아들 아브람의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계획을 보여주셨다. 아브람은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그네 인생길을 가면서 가는 곳 마다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예배하는 삶을 살았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1월 16일 아브람에게서 분가한 조카 롯 (창세기 13:5-13) 5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6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7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11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13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잘못된 선택 하나님께서 복 주심으로 인하여 아브람과 롯은 새로 이주한 땅에서 소유가 많아졌다. 그들이 머물고 있는 땅이 그들의 소유에 비해 좁아 아브람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분쟁의 외적인 이유는 부의 증가에 있었으나 내적인 원인은 롯의 불신앙과 세상적인 욕심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카 롯과 평화롭게 지내기 위해 고심한 아브람은 서로 헤어질 것을 제안하고 조카에서 거주할 땅을 먼저 선택하도록 양보하였다. 인간의 도리로 볼 때 롯은 일찍 아버지를 여읜 자신을 아들처럼 돌보아 준 삼촌 아브람에게 거주할 땅을 먼저 선택하도록 양보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마음의 갈등 없이 자신이 거주할 곳으로 요단 지역을 선택하였다. 그곳은 물이 넉넉하여 애굽 땅과 같이 풍요롭게 보였고, 모든 육신적 요구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곳으로 보였다. 롯이 선택해서 옮겨 간 곳은 이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타락과 멸망의 성 소돔이었다. 롯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았더라면 소돔 땅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곳임을 의식했을 것이고, 그곳을 자신의 거처로 삼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롯은 육신의 눈으로 거주할 곳을 택하고, 육신을 따라 행하여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고, 아브람은 영을 따라 행하며 하나님께로 점점 더 가까이 나아갔다. 롯의 잘못된 선택이 우리들에게 분명한 교훈을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때로 롯과 같이 잘못된 선택을 한다. 1월 17일 아브람을 축복한 멜기세덱 왕 (창세기 14:14-20) 14:14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 16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 17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십분의 일 아브람과 조카 롯이 서로 헤어져 각자의 삶의 터전을 잡아가고 있던 중 가나안 지역 남쪽의 나라들과 북쪽의 나라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롯과 그의 식솔들이 모두 사로잡히고 재물도 다 빼앗기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아브람은 자기가 기르던 군대를 동원하여 사로잡힌 조카와 그 식구들을 다 구해내고 빼앗긴 재물도 도로 찾아 왔다. 아브람이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살렘 왕 멜기세덱이 나와 아브람을 맞이하였다. 살렘은 ‘평강’이라는 뜻이며 예루살렘의 옛날 지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의 왕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아브람과 그의 병사들이 기운을 회복할 수 있게 해주었다. 히브리서는 멜기세덱 왕을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라고 기록하고 있다. 멜기세덱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아브람을 축복하자 아브람은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다.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첫 번째 십일조 예물이다. 아브람은 전쟁에서 이긴 것이 단지 조카 롯을 구한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서 아브람의 영향력을 확대해가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임을 깨닫고, 이에 감사하는 믿음의 표현으로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예물을 드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우리의 삶을 세밀하게 계획하고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드리는 것이고,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1월 18일 아브라함의 변론 (창세기 18:22-33) 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23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여 하시나이까 24 그 성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2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27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28 오십 의인 중에 오 명이 부족하다면 그 오 명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온 성읍을 멸하시리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사십오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 32 ...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3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의인을 찾으시는 하나님 아브람이 99세 되던 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찾아오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여종 하갈에게서 아들 이스마엘을 낳은 것을 상기시키며 회개하도록 책망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을 재차 확인해주시면서 언약의 증거로 아브람(‘고귀한 아버지’라는 뜻)의 이름을 아브라함(‘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바꾸어주셨다. 아브라함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이 진행되고 있는 반면 소돔과 고모라에서는 타락과 죄악이 극심해지고 있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음을 알려주시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소돔성에 있을 의인을 악인과 함께 심판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맞는 것인지를 질문하며 끈질기게 용서를 간구하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간구한대로 그곳에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소돔 성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킬 의인 열 명이 없었다. 소돔 성이 멸망한 이유는 그 성에 만연한 죄악 때문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거두시게 할 최소한의 의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은 그 옛날 소돔 성과 같이 불의하고 타락하여서 하나님의 심판 앞에 놓여 있고, 소돔 성에서 의인을 찾으시던 하나님의 눈은 지금 이 시대에서도 의인을 찾고 계신다. 우리 각자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아브라함처럼 기도해야할 뿐 아니라 이 시대를 구할 한 사람의 의인으로 살아야 할 거룩한 책임이 있다. 1월 19일 소돔 성의 멸망 (창세기 19:20-29) 20 보소서 저 성읍은 도망하기에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를 그곳으로 도망하게 하소서 ... 21 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 네가 말하는 그 성읍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22 그리로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을 소알이라 불렀더라 23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 24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25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26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27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서 있던 곳에 이르러 28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지역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 가마의 연기같이 치솟음을 보았더라 29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롯의 아내 하나님이 타락한 소돔 성을 심판하실 때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가족들을 심판의 대상에서 제외시키셨다.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할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빨리 성을 떠나라 하였으나 재물에 욕심이 많았던 롯은 즉시 떠나지 못하고 지체하였다. 천사가 소돔에서 떠나기를 주저하는 롯과 그의 아내,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었고, 그들이 소돔 가까이 있던 소알 성에 다다르자 하늘로부터 유황과 불이 비같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뒤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지 말라는 천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롯의 아내는 소돔에 남겨놓은 세상적인 것들을 연연해하며 뒤를 돌아보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 온 지역을 심판하시는 장면을 목격하였기 때문에 소금기둥이 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이 직접 행하시는 일을 인간으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영역과 사람의 영역을 분명히 구분해놓으신 것이다. 천지만물을 모두 창조하신 후 사람을 만드셨고, 노아의 홍수 때에도 방주 안에 들어간 노아의 가족들은 홍수가 지상의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것을 볼 수 없었다. 롯이 소돔 성의 멸망 중에도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와 심판 가운데서도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우리도 서로를 위해 기도하기를 힘쓰고, 세상에 마음을 두어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롯의 아내와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1월 20일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 하나님 1 (창세기 22:1-8)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 2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주신 곳으로 가더니 4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꼐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아브라함의 순종 아브라함에게 큰 시험이 닥쳤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람(고귀한 아버지)의 이름을 아브라함(열국의 아버지)이라고 바꾸어주시며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리라고 하셨는데 백세에 낳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제물로 드리라고 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 항의할 수밖에 없는 명령이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명령에 아브라함은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그는 말씀하신대로 행하기 위해 지체하지 않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길을 떠났다. 아들을 번제를 드리라고 지시하신 곳은 집에서부터 사흘 길이나 되었다. 사흘 길을 가는 동안 인간 아브라함의 마음은 고통과 갈등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나 그 길에서 돌이키지 않고 나아갔다. 목적지에 다가갔을 때 그는 종들에게 말했다.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나님의 약속이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질지 알 수 없었으나 하나님이 반드시 자신의 약속을 지키실 것을 믿었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삭을 돌려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종들에게 아들과 함께 돌아오리라고 말할 수 있었다.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에게도 때로 이런 시험이 닥친다. 시험이 닥칠 때 하나님께 순종할지 자신의 뜻을 따를지는 우리의 선택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도록 가르치시기 위해 우리가 집착하거나 신뢰하는 것들을 떠나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기를 원하신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세상을 향해 서 있지 말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해 서 있기를 원하신다. 아브라함은 신뢰와 순종을 통해 이 큰 시험을 통과하였다. 1월 21일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 하나님 2 (창세기 22:8-14)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셨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호와 이레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일러주신 곳에 도착하였다. 아들을 결박해서 나무를 쌓아 만든 제단 위에 올려놓을 때까지도 하나님이 일하시는 아무런 징조가 보이지 않았다. 이삭은 이때 이미 20세가량 된 장성한 청년이었다.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려고 하는 상황이 파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살기 위해 아버지에게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따르는 이삭 또한 아버지 못지않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순종을 확인하신 하나님은 극적인 순간에 아브라함을 저지시키셨고, 아브라함은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 숫양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아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숫양을 예비해놓으신 그 땅을 여호와 이레(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라고 이름 지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는데,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지정해주신 땅과 거기에 관련된 약속을 멀리서 볼 뿐만 아니라, 그 약속을 성취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본 믿음이었다. 약속은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나 약속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은 바로 곁에서, 가까이에서 일하고 계심을 보고 느끼는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순종할 수 없는 일에 순종하였다. 즉각적이며 미루지 않고 기꺼이 행하는 순종은 우리들이 신앙생활에서 가져야 할 중요한 자세이다. 그러한 믿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도 매일의 삶 속에서 ‘여호와 이레’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1월 22일 하나님의 맹세 (창세기 22:15-19) 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19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 복음 - 복된 소식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삭은 백세에 얻은 무엇보다 귀한 아들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아들보다 하나님의 명령을 더 중요하게 여겨 그 명령에 순종하는 믿음을 보이자 하나님은 스스로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시며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네 씨’는 단순히 아브라함의 육신적 후손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나아가 아브라함의 계보에서 태어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가 대적 사탄을 이기고 그 성문을 차지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고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아지리라는 하나님의 구원계획, 곧 복음을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셨다. 히브리서는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거류하며…’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그가 이전에 살았던 갈대아 우르나 하란과는 대조적인 척박한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나그네와 같이 살았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선택에 신뢰로 응답하였다. 하나님께 대한 굳건한 신뢰가 있었기에 이 땅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았고, 복음의 소망 가운데 그는 미래 속에서 살았다. 1월 23일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여긴 에서 (창세기 25:27-34) 27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28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29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32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잘못된 거래 이삭과 결혼한 리브가는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을 낳았다. 하나님은 에서와 야곱이 태중에 있을 때부터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고 리브가에게 말씀하셨다. 장자의 권한을 중요시하는 당시 이스라엘의 관습으로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었지만 선택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능력이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알려준다. 쌍둥이 중 첫째는 털이 많아서 에서(털보)라고 이름지었고 후에는 팥죽과 연관되어 에돔(붉다)이라 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둘째는 첫째의 발꿈치를 붙잡고 마치 그를 붙들어 넘어지게 하는 듯이 태어나서 야곱(발꿈치를 잡는 사람, 속이는 자, 빼앗는 자)이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불행하게도 에서는 영적인 인식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분명 그의 부모는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을 가르쳤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귀하게 여기기보다 세상의 것들, 육신적 필요를 채우는 것을 더 중요시하였다. 그 결과 일시적 배고픔을 채워 줄 음식을 위해 장자의 명분을 팔라고 하는 야곱의 제안을 쉽게 받아들였다. 야곱 또한 자신을 실제적인 장자로 삼겠다고 하신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을 친히 이루어주실 것을 확신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꾀로 장자의 권리를 얻고자 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에서와 야곱의 거래는 영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방법과 사람의 방법을 구분하지 못한 잘못된 거래였다. 이로 인해 얼마나 오랜 세월 견디기 힘든 고난이 야곱에게 주어졌는지 기록한 성경말씀은 오늘 날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준다. 1월 24일 리브가의 계략 (창세기 27:1-10) 1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이르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2 이삭이 이르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니 3 그런즉 네 기구 곧 화살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서 먹게 하여 내가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5 이삭이 그의 아들 에서에게 말할 때에 리브가가 들었더니 에서가 사냥하여 오려고 들로 나가매 6 리브가가 그의 아들 야곱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아버지가 네 형 에서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으니 ... 8 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하라 내가 네게 명하는대로 9 염소 떼에 가서 거기서 좋은 염소 새끼 두 마리를 내게로 가져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아버지를 위하여 그가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리니 10 네가 그것을 네 아버지께 가져다 드려서 그가 죽기 전에 네게 축복하기 위하여 잡수시게 하라 영적으로 어두워진 가정 이삭은 쌍둥이 아들 중 형인 에서를 더 좋아하였고, 리브가는 동생인 야곱을 더 좋아하였다. 야곱에게 장자의 복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에서를 편애하던 이삭은 에서를 축복하고자 하였다. 이삭은 육신의 눈이 어두워졌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어두워져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했다. 야곱을 편애하던 리브가 역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상황에서 인간의 계략을 썼고, 평소 장자권의 상속을 사모하던 야곱은 어머니의 계략을 따라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에서를 축복하려던 아버지의 축복을 자신이 받았다. 하나님께서 오래 전 리브가에게 계시해주신 것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성취 과정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했다. 야곱에게 주어질 복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따라 순수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편애와 공모, 속임수 등 인간의 허물이 뒤섞인 상태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방법을 통해 이루어질 때 가장 선한 결과를 낳는다. 노년의 이삭은 믿음이 희미해졌고, 리브가는 위기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의심하고 성급하게 인간의 꾀를 썼다. 에서는 하나님의 복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고, 야곱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아버지와 형을 속였다. 영적으로 어두워진 야곱 가족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시작하였으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 자신의 지혜를 내세우며 하나님보다 앞서 가고 있지 않은지, 자신의 유익을 생각하는 마음이 앞서 영적으로 어두워지지 않았는지 점검해보자. 1월 25일 야곱의 꿈 (창세기 28:10-19) 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게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벧엘 – 하나님의 집 에서의 분노를 피해 외삼촌 집을 찾아 가던 야곱이 밤을 맞아 노숙을 하던 중 꿈을 꾸었다. 사닥다리가 땅에서 하늘에 닿아 있었고, 거기에 천사들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 위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을 야곱에게 해주셨을 뿐 아니라 야곱이 어디로 가든지 지켜주시며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야곱은 잠에서 깬 후 ‘이곳은 하나님의 집이고 하늘의 문’이라고 고백하였다. 야곱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아무런 이유도, 자격도 없었다. 그러나 죄인된 인생들을 먼저 찾아오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앞날을 알지 못한 채 들판에 누워 돌을 베게 삼아 잠을 자고 있는 야곱을 찾아오셔서 축복하셨다. 이 얼마나 놀라운,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인가!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황량한 들판에 외롭게 있다고 생각했었으나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계시고 지켜주시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꿈에 보여주신 사다리는 땅에서 하늘에 이르는 유일한 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자기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도망치고 있던, 하나님이 가까이 계셔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던 야곱은 잃어버린 영혼의 모형이다. 사람이 자기 생애 가운데 ‘벧엘’, 곧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계신다는 경험을 가지게 되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다. 그런 사람은 잠시 주님을 떠나게 될지라도 다시 ‘벧엘로 돌아와’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하며 은혜를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1월 26일 야곱의 귀향길 1 (창세기 32:1-9) 1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2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3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자기보다 앞서 사자들을 보내며 4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 주 에서에게 이같이 말하라 주의 종 야곱이 이같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과 함께 거류하며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사오며 5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알리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라 하였더니 6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러 오더이다 7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8 이르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라고 9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마하나임 아버지와 형을 속인 후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한 야곱은 긴 세월 동안 외삼촌의 집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야곱에게 꿈을 통해 찾아오셔서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고 하며 야곱이 고향을 떠나던 때 벧엘에서 한 하나님과의 약속을 상기시켰다.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전히 야곱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는 형 에서를 만나야했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떠난 귀향길에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났고, 그 땅을 하나님의 군대라는 뜻으로 ‘마하나임’이라고 불렀다. 형을 만나야하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군대를 앞서 보내시며 보호하시는 것을 알게 하신 것이다. 야곱의 귀향은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고, 또 그 길에 하나님의 군대를 앞서 보내주심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인간적인 두려움이 앞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다. 에서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자신의 지혜로 인간적인 방법을 계획하는 야곱의 모습, 이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약속하시고, 지켜주시는 것을 알면서도 현실의 문제 앞에서 근심하며 불안해하고, 세상적인 방법을 찾는 우리의 모습이다. 이제 우리는 좀 더 담대한 믿음으로 살아가자. 하나님의 군대가 우리 앞에서 먼저 가며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함을 믿고, 은혜의 땅 마하나임에서 감사하며 담대하게 살아가자. 1월 27일 야곱의 귀향길 2 (창세기 32:22-28)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 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새 이름 귀향길에 오른 야곱은 형 에서로부터 자신의 안전을 유지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치밀한 계획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두려움을 떨쳐낼 수 없었다. 밤이 되자 야곱은 그의 가족과 소유를 얍복 강 건너로 먼저 들여보내고 자신만 홀로 남았다. 이곳에서 생사를 걸고 처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하는 야곱을 하나님이 만나주셨다. 하나님은 야곱의 자기중심적 사고와 인간의 능력의 근원을 철저하게 무너뜨리셨고, 야곱으로 하여금 더 이상 자기의 생각과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새로운 인격과 성품을 상징하는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다. 그의 원래 이름인 야곱은 ‘속이는 자’, ‘빼앗는 자’, ‘발뒤꿈치를 잡은 자’라는 부정적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새 이름에는 ‘하나님의 방백’,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더 정확히 보자면 ‘하나님과 씨름하는 자’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인간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길 수 없다. 단지 하나님께서 야곱을 인정해주셨음을 확인시키는 차원일 뿐이다. 생명이 위협받는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매달려 씨름하면서 은혜를 간구한 야곱은 하나님으로 부터 복을 받고, 그 인생이 달라지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났다. 과거 죄인이었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의인으로 변화되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람, 그리스도인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다.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러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우리의 아이덴티티를 확고히 하자. 1월 28일 야곱의 귀향길 3 (창세기 35:1-7) 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2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 6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7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벧엘로 올라가자 하나님의 은혜로 에서와 극적인 만남과 화해를 이룬 야곱은 가족들과 함께 세겜 성읍에 정착하여 살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 여인들을 보러 나갔다가 하몰의 아들이자, 그 땅의 추장인 세겜에게 부끄러운 일을 당하였고, 이에 분노한 야곱의 아들들은 계략을 써서 그 성에 사는 모든 남자들을 죽이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고통과 곤경에 빠진 야곱을 하나님이 다시 찾아오셔서 벧엘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야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였고, 오래 전 야곱이 고향집을 떠나 도피할 때 하나님께 한 약속을 상기시키셨다. 에서를 피해 달아나던 야곱은 고향에 무사히 돌아오게 되면 벧엘에 하나님의 전을 짓겠다고 약속하였으나 이를 지키지 않았다. 벧엘로 떠나기 전 야곱은 먼저 가족들과 함께 한 모든 이들이 소유한 이방신상을 제거하게 했고, 둘째, 몸과 마음을 정결케 하며, 셋째, 의복을 바꾸어 입게 하였다. 야곱이 행한 일을 통해 그의 가족과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에서 멀어져 이방문화에 물들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이들은 세겜에서 안정되고 부유하게 살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믿음과 예배를 잃어버렸다. 하나님과 멀어진 삶은 드러나는 모습이 화려하고 성공적으로 보일지라도 영적으로는 메마르고 황폐할 수밖에 없다. 우리도 자신의 영혼을 살펴보며 벧엘로 올라가자.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예배를 회복하는 은혜의 자리 벧엘로 올라가자! 1월 29일 요셉의 고난 (창세기 39:1-6) 1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사니라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4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5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6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 딸 디나 사건으로 인해 세겜을 떠나 벧엘로 간 야곱은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그곳을 엘벧엘(벧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그곳에서 오랜 세월 야곱과 동행했던 어머니 리브가의 유모가 죽었다. 야곱은 벧엘 상수리나무 아래에 유모를 장사하고 얼마나 슬피 울었는지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 즉 통곡의 상수리라고 불렀다. 이후 야곱이 아들 요셉을 편애하면서 가정 안에 또 다른 불행이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편애를 시기한 형제들이 요셉을 미디안 상인에게 팔고, 짐승에 물려 죽었다고 말하며 아버지를 속였다. 어머니처럼 의지하고 사랑하던 유모의 죽음과 아내 라헬의 죽음에 이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게 된 야곱의 슬픔과 고통이 얼마나 크고 괴로웠을지 짐작해 볼 수 있다. 미디안 상인에게 팔려 간 요셉은 애굽의 바로왕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살았다. 아버지의 각별한 사랑 가운데 채색옷을 입고 살다가 노예가 된 요셉, 그리고 그가 짐승에 찢겨 죽은 줄 알고 있는 야곱은 인생의 이러한 쓰라린 고통들이 왜 일어났는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지 못했으나 하나님은 이러한 일들을 통해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가고 계셨다. 비록 노예로 살아가는 괴로운 환경 속에 있었지만 요셉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잃지 않았고,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셔서 그의 범사를 형통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 요셉으로 인하여 이방인 보디발의 집도 복을 받았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우리로 인하여 우리의 주변에까지 하나님의 복이 미치는 것을 요셉의 삶을 통해 알게 된다. 1월 30일 종에서 총리로 (창세기 41:46-52) 46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 47 일곱 해 풍년에 토지 소출이 심히 많은지라 48 요셉이 애굽 땅에 있는 그 칠 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되 각 성읍 주위의 밭의 곡물을 그 성읍 중에 쌓아 두매 49 쌓아 둔 곡식이 바다 모래같이 심히 많아 세기를 그쳤으니 그 수가 한이 없음이었더라 50 흉년이 들기 전에 요셉에게 두 아들이 나되 곧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서 낳은 지라 51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52 차자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요셉의 고백 17세의 어린 나이에 종으로 팔려간 요셉은 13년간의 긴 세월이 지내며 우여곡절을 겪은 후 마침내 삼십 세에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총리의 직분을 맡게 되었다. 13년의 세월 동안 요셉이 하나님의 손에 훈련받았다. 채색옷 대신 종의 옷을 입고 이유를 모르는 고난 가운데 일하며 봉사와 섬김의 훈련을 받았다. 불경건한 애굽의 문화 속에서 수려한 용모 때문에 오는 유혹을 뿌리치는 절제의 훈련을 받았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으나 자신을 변호하지 않고 2년 이상의 감옥생활을 견뎌내는 인내의 훈련도 받았다. 이런 훈련을 통해 신실하고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어진 요셉은 마침내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을 위해 높은 직위에 서게 되었다. 요셉이 총리가 된 후에도 이방종교에 동화되지 않고 여호와 신앙으로 구별된 삶을 살았음을 그의 두 아들의 히브리식 이름과 이름의 뜻을 통해 알 수 있다. 자신의 인생여정을 돌이켜보면서 과거의 모든 고통을 잊게 해주신 하나님의 풍성한 위로에 감사하며 찬양하는 마음으로 두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잊어버림)와 에브라임(창성함)으로 지었다. 두 아들의 이름은 요셉의 간증이며 고백인 것이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외형적 성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난의 긴 시간동안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을 지켰다는 것, 주어진 환경 속에서 성실하게 자신의 직분을 감당했다는 것, 하나님이 주시는 훈련의 시간을 잘 통과하고 마침내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 쓰임 받았다는 사실이 오늘 우리들에게 큰 교훈이 된다. 1월 31일 요셉의 죽음과 유언 (창세기 50:22-26) 22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 23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24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26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그리스도인의 본향 자신이 꾼 두 번의 꿈으로 인해 형제들의 미움을 사게 되어 노예로 팔려가고, 감옥에 갇혔다가 바로의 꿈을 해석함으로 인해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은 자신의 가족과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함으로써 마침내 하나님이 주신 꿈을 이루고 110세의 나이에 하나님 나라로 돌아갔다. 요셉은 임종 시 하나님께서 언젠가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것이니 그때 자신의 유해를 가나안 땅으로 이장시켜줄 것을 믿음으로 부탁하며 유언하였다. 그는 애굽에서 부귀와 권세를 누렸으나 그곳은 자신의 본향이 아님을 알고 있었고, 자신이 있어야할 곳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이 사는 곳, 곧 가나안 땅임을 기억하고 있었다. 요셉의 삶은 애굽으로 상징되는 세속 세상은 우리의 진정한 거처가 되지 못함을 기억시키고 가나안으로 상징되는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것을 소망해야 함을 가르쳐준다. 일생 동안 신앙에 근거한 성실한 자세로 살아감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구원의 사명을 감당한 요셉은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며,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딤후4:7)고 고백하는 바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창세기는 1장 빛과 생명의 탄생에서 시작하여 50장 요셉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하나님은 생명을 창조하셨으나 죄로 얼룩진 이 세상에서의 삶은 죽음으로 끝나고,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그러나 천국의 소망이 있음을 깨우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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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림교회
2019년 3월 25일
In 365일 말씀묵상
2월 1일 생육하고 번성하는 이스라엘 백성 (출애굽기 1:1-11) 1 야곱과 함께 각기 자기 가족을 데리고 애굽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2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3 잇사갈과 스불론과 베냐민과 4 단과 납달리와 갓과 아셀이요 5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이 모두 칠십이요 요셉은 애굽에 있었더라 6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의 사람은 다 죽었고 7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9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10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 11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출애굽기를 시작하며 야곱과 그의 직계가족 70명은 기근을 피해 요셉이 총리로 있는 애굽으로 이주하였다. 애굽에서 약 400년의 긴 세월을 지내는 동안 야곱의 가족은 장정만 60만 명이나 되는 큰 민족을 이루게 되었다. 400년간의 애굽 체류기간은 창세기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족장 중심의 구속사가 언약 민족 중심의 구속사로 확대되기 위한 준비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후손을 위한 신앙 간증을 목적으로 기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그 옛날 아브라함 때부터 자신들의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대로 비록 400년의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잊지 않고 자신들을 구원해주셨음을, 그리고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언약을 맺어주셨음을 간증한다. 나아가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언약의 상속자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교훈한다. 출애굽기는 하나님이 인간과 계약을 맺으시고 그것을 지키시는 분이시며, 역사의 주인이시며, 자신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택한 백성들도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한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며 영광받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출애굽기 말씀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해내심과 같이 우리를 택하시고 죄에서 건져내시며, 광야 같은 우리의 인생길에 동행하시면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거룩한 삶을 살도록 훈련시키시고 마침내 영원한 하늘나라에까지 들어가게 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되새겨보자. 2월 2일 모세의 출생과 성장 (출애굽기 2:1-10) 1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어 2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3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가 갈대 사이에 두고 4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5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6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7 그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러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8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9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 10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물에서 건짐을 받은 아기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이루시고 온 인류를 향한 구원계획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야곱의 직계가족을 애굽으로 이주시키셨고, 그곳에서 큰 민 족으로 번성하게 하셨다. 애굽 내에서 이스라엘의 인구가 늘어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바로왕은 이스라엘을 탄압하였고, 탄압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난이 극심해갈 때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이루어갈 한 아기를 태어나게 하셨다. 그 아기가 바로 모세이다. 바로왕은 이스라엘 여인들의 출산을 돕는 산파들에게 남자 아기가 태어나면 죽이라는 끔직한 명령을 내렸으나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왕의 명령을 어기고 아기들을 살려주었다. 모세의 부모 아므람과 요게벳은 태어난 아기를 3개월 동안 몰래 키우다가 더 이상 아기를 숨길 수 없게 되어 아기를 갈대상자에 넣어 나일 강에 띄워 보냈다. 마침 나일 강에 목욕하러 나왔던 바로왕의 딸이 갈대상자 안에 있는 아기를 발견하여 자신의 아기로 키우는 극적인 이야기가 출애굽기 2장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 바로왕은 아기를 죽이라고 명령하고, 그의 딸인 애굽의 공주는 아버지의 명령 때문에 강물에 떠내려가는 아기를 불쌍히 여겨 자기의 아들로 삼고 양육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어떠한 행동으로도 거역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물에서 건짐을 받은 이 아기를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애굽에서, 죄악 세상에서 건져내는 일을 시작하셨다. 2월 3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출애굽기 3:1-5) 1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때에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우리의 삶의 자리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해 물에서 건짐을 받고 애굽 공주의 아들로 성장한 모세는 어느 날 자기 동족들에게 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애굽 사람이 자기 동족 한 명을 때리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그 애굽 사람을 죽이고 모래 속에 파묻었는데 그 일이 바로 왕에게 알려져 미디안 땅으로 도망하는 처지가 되었다. 애굽의 왕자로 살다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 떼를 치는 목동으로 살아가는 모세에게 어느 날 하나님이 찾아오셨다. 40년간의 왕궁에서의 생활, 40년간의 광야에서의 생활을 통해 모세를 훈련시키신 하나님이 이제 모세를 하나님의 종으로 세우시고자 부르셨다.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께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하자 하나님은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명령하셨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 신발 또는 발은 인간 삶의 전체적 영역, 곧 내적 품성과 외적 행동의 총체를 상징했다. 더욱이 먼지가 많은 근동지방에서는 신발이 먼지나 오물로 인해 쉽게 더러워진다. 신을 벗으라는 것은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 자신의 온갖 불의한 행위와 죄로 오염된 성품을 버려야 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거룩한 곳이다. 나아가 무엇이든 하나님과 관계될 때 그것은 거룩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자리에 함께 계실 때 우리가 살아가는 자리는 거룩한 곳이 된다. 모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성으로 더러워진 우리의 자아를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으로 입혀지기를 간구하자. 2월 4일 보고 듣고 알고 내려가서 인도하여 (출애굽기 3:7-12) 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9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인간의 고통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의 고통과 간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삶의 현장 깊숙한 곳까지 관심과 사랑으로 세밀하게 지켜보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겪는 고통을 지켜보아 알고 계셨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으며 이제 직접 이스라엘에게로 내려가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옛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실 것을 모세에게 알려주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 가시는 목적은 분명하다. 첫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시는 것이고, 둘째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 애굽으로 상징되는 세속적이고 불신앙적인 세상에서 이끌어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상징되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살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시고, 우리의 간구를 듣고 계신다. 우리에게 다가 오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의 길을 인도하여 마침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하신다. 이 사실로 인하여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삶이 고단할지라도 위로와 소망을 가지게 된다. 모든 것을 아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임을 깨닫고 매일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로 살아가자. 2월 5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라 1 (출애굽기 12:1-11) 1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2 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3 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어린 양을 취할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4 그 어린 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사람 수를 따라서 하나를 취하면 각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분량에 따라서 너희 어린 양을 계산할 것이며 5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6 이 달 열 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7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8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 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유월절 어린양 애굽의 바로왕은 이스라엘 백성을 내어보내라는 모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완강하게 버티다가 이미 아홉 가지 재앙을 겪었다. 이제 하나님은 애굽에 보내실 마지막 재앙을 앞두고 모세와 아론에게 그들이 해야 할 일을 가르쳐주셨다. 먼저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구원해내시는 이 때를 한 해의 첫 달이 되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400년 간 애굽의 이방문화 가운데서 종으로 살던 이스라엘이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되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다. 그 달 10일에 각 가족의 숫자에 맞게 흠 없고 일 년 된 어린 양이나 염소를 택하여 14일까지 잘 살펴본 후 14일 해가 질 때에 그 짐승을 잡아서 그 피를 집의 출입문 좌우에 바르라고 명령하셨다. 고기는 구워서 가족이 함께 먹되 쓴 나물과 반죽을 발효시키지 않고 구운 딱딱한 빵과 함께 먹되 급히 떠날 채비를 하고 먹으라고 지시하시며 이것을 여호와의 유월절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는 예식을 가르쳐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실 구원에 앞서 그들이 오랜 세월 애굽에서 행하지 못했던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곧 예배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흠이 없는 어린 양을 택했음에도 혹시 발견하지 못한 흠이 있는지 4일 간 더 살펴본 후 잡는 것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이 흠이 없어야 함은 물론이고, 어린 양이 바로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피를 흘려 유월절 어린 양이 되셨다. 2월 6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라 2 (출애굽기 12:11-15) 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12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14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 15 너희는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라 새로운 출발 하나님은 애굽에 내릴 열 번째 재앙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을 지킬 것을 알려주셨다. ‘유월’은 ‘넘어가다’(pass over), 혹은 ‘지나가다’는 뜻으로, 하나님이 보내시는 죽음의 사자가 애굽의 장자들을 죽일 때 어린 양의 피를 문기둥에 바른 집은 죽음의 사자가 그냥 지나감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것을 의미한다.(출 12:11) 하나님의 지시가 떨어지면 곧 바로 애굽을 떠나야하기 때문에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순종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하여 항상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복음의 신을 신으며 성령의 검과 믿음의 방패로 무장하라고 교훈한 것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의 지시대로 유월절을 지키는 것에서 출애굽은 시작되었다. 추측건대 애굽에 있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에 바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시이지만 순종하여 행한 집은 죽음의 사자가 그냥 넘어갔고, 순종하지 않은 집의 장자는 죽음에 넘겨졌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경험은 종에서 자유자로, 죄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된 우리 모두의 경험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자신의 구원을 위한 것임을 믿고 받아들인 우리는 육신의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출애굽과 같은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2월 7일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출애굽기 14:9-14) 9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 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들이 장막 친 데에 미치니라 10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려 여호와께 부르짖고 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 하나님은 애굽을 빠져나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닷가에 장막을 치라고 하시면서, 바로왕이 마음이 완악해져서 이스라엘을 추격할 것이라고 알려주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앞에는 바다, 뒤에는 바로의 군대에 포위당하는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지만 하나님은 이런 위기의 상황을 통하여 애굽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보이시고자 하셨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아래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듣고, 보고,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위기가 눈앞에 다가오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 두려워서 여호와께 부르짖었고, 차라리 애굽 사람을 섬기며 종으로 사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고 하며 모세를 원망하였다. 모세에 대한 이들의 원망은 모세를 통해 그들을 이끌어 내신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죽는 것보다는 애굽의 종으로 사는 것이 더 낫다는 그들의 불신앙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모세는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어다’라고 외쳤다. 어려운 일, 위태한 일을 당할 때 사람들은 그것의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원망부터 하기 쉽다. 자신들을 둘러싸는 곤경에 처하면 두려움에 떨며 하나님을 원망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행동하기 쉽다. 그러나 이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말고 잠잠히 서서 우리를 위하여 직접 싸우시며, 구원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바라보자! 2월 8일 마라의 쓴 물 (출애굽기 15:22-26) 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 새 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광야를 통해 훈련하시는 하나님 홍해를 건너 광야 길을 가는 백성들, 더욱이 가축들까지 이끌고 대이동을 하는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물이었는데 광야에서 필요한 물을 충분히 얻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사흘 길을 걸은 후에야 겨우 물을 발견했으나 그 물이 써서 마실 수 없자 또 다시 불평이 터져 나왔다. 불평하는 백성들 앞에서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함으로서 모든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을 신뢰할 때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하나님은 모세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쓴 물을 단물로 변화시켜주셨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여정은 끊임없는 훈련의 과정이었고, 하나님은 광야를 훈련장으로 사용하셨다. 광야에서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기도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말씀들을 전해주시고, 이들이 불신앙을 깨닫고 순종할 것을 가르치셨다. 하나님은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를 훈련시키신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기도하는 체질로 우리를 변화시키고자 하신다. 모든 변화와 치료의 주체이신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곤고한 형편에 버려두시지 않고 결국에는 쉼을 누릴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하신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여 우리 인생의 쓴물을 단물로 변화시켜주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살아가자. 2월 9일 만나와 메추라기 (출애굽기 16:1-7) 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2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5 여섯 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는 것의 갑절이 되리라 6 모세와 아론이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요 7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이기에 너희가 우리에게 대하여 원망하느냐 하늘양식 광야 길을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물과 일용할 양식이었다. 이들이 신 광야에 이르렀을 때는 애굽에서 나온 지 한 달이나 지나 식량이 다 떨어진 상태였다. 이들은 배고픔으로 인해 비록 종의 신분이었지만 애굽에서 고기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하나님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나았겠다고 불평하였다. 하나님은 이들의 불평을 들으시고 하늘로부터 매일 만나와 메추라기를 양식으로 내려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하루에 필요한 양식을 매일 주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양식을 거둘 때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기억하게 하셨고, 매일의 양식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이 세상에서의 양식, 물질에 대해 욕심을 가지지 말 것을 가르치셨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살았던 것처럼 쉽지 않은 길이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인생길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으로 불러내신 우리의 필요를 하늘양식으로 채워주시는 것을 경험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쌓아가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다듬어져 간다. ‘만나’는 인류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생명의 떡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 중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었기에 살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는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며 그분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아 영적 생명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2월 10일 내 말을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출애굽기 19:1-6) 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을 떠난 지 삼 개월이 되던 날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2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이스라엘이 거기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3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시되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4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하나님의 목적 애굽에서 떠난 지 3개월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광야에 이르러 거기에 장막을 쳤다. 이곳은 광활한 평지였기 때문에 200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막을 치기에 충분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기억하고 지켜야 할 일들을 알려주시기 위해 모세를 시내 산으로 부르셨다. 모세는 일생 동안 총 여덟 번에 걸쳐 시내 산을 오르내리며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달하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새롭게 언약을 맺고자 하시는데, 언약을 맺기에 앞서 자신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내셨는지 상기시키신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잘 지키면 모든 민족 중에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게 하시고,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시며,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시고,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내신 목적이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지금까지 우리의 인생길에 하나님이 어떻게 보호하시며 이끌어주셨는지 상기해보라고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자녀로 삼아 주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제사장과 같은 자녀로 삼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다. 2월 11일 십계명 1 (출애굽기 20:1-10) 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7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일곱 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사랑의 계명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난 지 3개월이 되었을 때 시내 광야에 이르렀다. 하나님은 모세를 시내 산으로 오르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반드시 지켜야 할 열 가지 계명을 알려주셨다. 십계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그 중 첫 번째 네 계명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고, 나머지 여섯 계명은 가족과 이웃에 대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하나님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있게 하지 말고,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며,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지 말고,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셨다. 이것은 백성들을 강제적인 틀에 묶어 놓아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를 통하여 영적, 육적으로 풍요한 삶을 살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속에 물들지 않고 경건한 생활을 하며, 죄로 인해 생길 수밖에 없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불화를 극복하고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도록 정해주신 계명인 것이다. 예수님은 열 가지 계명 중 어느 것이 가장 크냐고 시험하여 묻는 율법학자에게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 이 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대답하셨다.(마22:37-40) 십계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두 가지 가장 큰 계명,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사랑의 법으로 발전, 승화되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는 십계명의 기본 정신은 사랑이다. 오늘도 우리가 이 사랑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하자. 2월 12일 십계명 2 (출애굽기 20:12-17) 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13 살인하지 말라 14 간음하지 말라 15 도둑질하지 말라 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가져야할 신앙적 자세를 네 가지로 규정한 하나님은 다섯 번째 계명으로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땅에서 부모는 자녀에게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며, 하나님의 복을 자녀에게 전달하는 복의 통로가 되다. 부모 공경을 강조하신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면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생명이 길어질 것이라고 복을 약속하셨다. 사도 바울도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십계명을 인용하여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을 교훈하였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과 훈계로 양육하고,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며 권위와 말씀에 순종하는 가정의 질서는 건강하고 안정된 사회의 근간이 되며, 가정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을 배운 자녀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게 된다. 십계명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원하시는 것은 사랑과 순종이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말씀을 통하여 계시해주신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원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육신의 부모를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을 또한 기뻐하신다. 십계명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깊이 새기며 실천하자! 2월 13일 내가 거할 성소를 지으라 (출애굽기 25:1-9)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가 내게 바치는 모든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3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4 청색 자색 실과 가는 베 실과 염소 털과 5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6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료와 분향할 향을 만들 향품과 7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8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9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집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두 가지를 계시하셨다. 하나는 율법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거처를 건축하라는 ‘성막’에 대한 말씀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알려주신 것이고, 성막은 하나님께 드릴 예배를 위한 것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할 때 그것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 그분을 예배하는 일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이끌어내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생활훈련을 시키셨고, 시내산에서 말씀을 주시며 말씀훈련을 시키셨으며, 성막을 지을 것을 지시하시며 예배훈련을 시키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그냥 나오지 않게 하시고 애굽 사람들로부터 은금 패물과 의복, 그 외에 많은 귀한 물품을 취하게 하셨다.(출12:34) 광야에서 성막을 지을 수 있도록 필요한 물품들을 미리 예비해주신 것이다.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거할 성소를 지으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은 이제 우리를 하나님이 거주하실 성전으로 불러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을 기대하신다.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집으로 삼기를 원하신다. ‘너는 내가 거할 집이요, 나의 거룩한 성전이다’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오늘도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자신의 가치를 자각하며 살아가자. 2월 14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출애굽기 25:16-22) 16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지며 17 순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 길이는 두 규빗 반, 너비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18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19 한 그룹은 이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결할지며 20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21 속죄소를 궤 위에 덮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전이 되자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동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운반하기 쉽게 천막과 같은 모양으로 성소를 만들게 하셨고, 성소의 세세한 부분과 그 안에 둘 성물들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자세히 알려주셨다. 성소 안의 가장 거룩한 곳인 지성소에는 속죄소라고 불리는 가장 거룩한 자리를 만들고, 그 아래는 상자모양으로 만들어 상자 안에 하나님이 주실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판을 넣어 보관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거할 성소를 지으라고 하신 목적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한 장소를 거룩하게 구별하셔서 자신의 백성을 만나고자 하셨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기 위해 만날 장소를 만들라고 하시고, 그곳으로 찾아오시겠다고 한 것은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 놀라운 은혜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만나기 위해 부르시고, 우리는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예배로 하나님께 나아간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실 뿐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집, 성전으로 삼으시고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자 하신다. 우리의 인생 속에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여러 가지 조건들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전의 구조를 가진 인생으로 자신의 삶을 경영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은혜를 허락해주셨으므로 자신의 삶을 어떻게 경영해나갈 것인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신앙적 결단에 달려있다. 2월 15일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출애굽기 29:43-46) 43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으로 말미암아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 44 내가 그 회막과 제단을 거룩하게 하며 아론과 그의 아들들도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며 45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46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나아가자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생활하던 40년 동안 매일 성막으로 부르심을 받으며 예배훈련을 받았다. 광야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가장 중심 위치에 성막이 있었고, 그들은 매일 성막을 바라보며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였다. 그들이 이동할 때는 성막의 중심인 언약궤가 제일 먼저 움직이며 그들이 가야할 길을 이끌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성막을 짓게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매일 하나님 앞에 나아가, 즉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나아가 하나님의 영을 공급받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나아가 그들의 광야길, 인생길을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예배는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 최고의 사랑을 드리는 일이다. 자신의 주권을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자신의 삶의 최우선의 목적을 하나님께 드리는 결단이다. 예배는 우리 인생의 광야훈련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매일 성막으로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인격, 하나님의 사상, 하나님의 철학으로 덧입고 나와 그 능력과 그 영광으로 살아가야 한다. 매일의 삶을 하나님의 영을 공급받는 것으로 시작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놀라운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인가? 그러므로 매일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자. 우리의 삶의 중심에 계시고, 우리의 인생길을 이끌어주시는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해 예배의 자리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나아가자! 2월 16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출애굽기 32:30-35) 30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를 위하여 속죄가 될까 하노라 하고 31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3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책에서 그를 지워버리리라 34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35 여호와께서 백성을 치시니 이는 그들이 아론이 만든 바 그 송아지를 만들었음이더라 모세의 중보기도 하나님은 시내산으로 모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열 가지 계명을 두 돌판에 직접 기록하셔서 모세에게 주셨다. 산 아래에 있던 백성들은 모세가 산에 올라간 지 40일이 되도록 내려오지 않자 기다리지 못하고 모세의 형인 아론을 재촉하여 자신들을 인도할 신으로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었다. 모세가 시내산 아래 백성에게 돌아와 그들이 행한 일을 보고 분노하여 아론을 책망하며, 우상을 섬긴 이들을 다 처벌하였다. 모세는 이렇게 쉽게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 금신상을 만들고 그것에 절하며 섬긴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해내고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모세의 중보기도를 받아들이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백성을 인도하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사자를 모세와 백성들 앞에 보내서 그들을 인도해주실 것을 확인시켜 주셨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재하며 기도하는 모세의 모습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갚아주시고 중보기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열심히 일하시는데 우리는 종종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쉽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어리석게 행동한다. 기도의 응답이 더딜 때에, 원하는 일이 쉽게 풀리지 않을 때에 우리는 인내하며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적인 방법을 찾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이러한 우리를 위해 오늘도 하나님의 사자를 우리 앞에 보내주신다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인생길을 완전하게 계획하고 이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자. 2월 17일 성막에 임재한 하나님의 영광 (출애굽기 40:34-38) 34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35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36 구름이 성막 위에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37 구름이 떠오르지 아니할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38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하나님의 구원 경영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고난 가운데 있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모세를 준비하시고 모세를 통하여 이 민족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도록 계획하셨다. 유월절 속죄양을 통해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시고, 애굽을 떠나 긴 신앙여행을 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애굽을 빠져나온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 앞에 세우셨는데, 홍해를 건넘으로 세례를 받게 하려는 의도였다. 바로왕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애굽의 우상숭배문화 중심에서 하나님의 법도 중심으로, 자신의 욕망 중심에서 하나님의 질서 중심으로 삶을 전환하겠다는 결단이 세례이며, 그 일을 반복하여 훈련하는 현장이 광야였다. 하나님은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을 시내 산으로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율법과 성막을 통해 자신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셨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은 애굽의 정신에 익숙해져 있는 이스라엘에게 자신의 깊은 생각과 철학을 가르치셨다. 광야에서 성막을 짓게 하신 하나님은 백성들을 매일 성막으로 초대하여 하나님과 교통하게 하셨다. 우리가 예배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마다 우리의 죄가 씻어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를 원하며, 땅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으로 채우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영과 교통하게 된다. 출애굽기는 하나님의 구원경영을 보여준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화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경영 안에 우리가 있음을 감사하자! 2월 18일 잠언의 목적 (잠언 1:1-6) 1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2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3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직하게 행 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4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5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 6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 지혜로운 인생 잠언의 사전적 의미는 ‘훈계’, 혹은 ‘경계가 되는 짧은 말’로 올바른 삶에 대한 지혜가 담긴 교훈을 말한다. 잠언의 대부분은 솔로몬이 기록하였으므로 히브리어성경과 헬라어성경에서는 ‘솔로몬의 잠언’으로 칭한다. 솔로몬은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갈 것을 권면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한 신앙적 굴곡과 훈련, 경험을 통해 얻은 지혜를 바탕으로 잠언을 기록하였다. 구약성경 중 욥기와 잠언, 전도서는 지혜문학서이다. 이 성경들은 ‘인생은 무엇이며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이 세상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인생의 실존적 물음들에 대해 가장 포괄적이고 직접적인 답을 제시해준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주셨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 매일 매일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경을 깨닫도록 도와주시며, 말씀대로 행할 수 있게 하시며,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대로 우리의 삶이 더욱 온전해지도록 도우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하루를 살아가며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듯이 성경이 알려주는 지혜의 말씀들 앞에서 자신의 삶을 비춰보며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는 진실로 지혜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는가? 지혜로운 삶을 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고 있는가?’ 2월 19일 지혜가 주는 유익 (잠언 2:1-8) 1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2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3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4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5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6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7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8 대저 그는 정의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 지혜를 구하는 하나님의 자녀 잠언기자는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얻기 위해 가져야 할 태도를 가르쳐준다. 받는다, 간직한다, 귀를 기울인다. 마음에 둔다는 등의 여러 표현을 통해 간절한 마음으로 지혜를 구하여야 함을 알려준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7절에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 깊게 귀 기울여야 하고, 말씀을 실생활에 적용하는 법을 배워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기 위해서 깊이 생각하며 묵상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훈련을 통하여 비로소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지혜와 명철을 하나님으로부터 얻게 된다. 우리는 물질적인 것들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부’는 인간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그러나 진정한 부요함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온다는 것을 우리는 때로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재물을 얻으려고 열정을 쏟는 것처럼 하나님을 찾기에 힘쓰기를 바라신다. 마치 은을 구하는 것같이,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같이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기를 바라신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지혜를 힘입어 살아가기를 소망하며, 꾸짖지 않으시고 후히 주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마음을 열어놓자. 2월 20일 하나님의 법과 명령 (잠언 3:1-10) 1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2 그리하면 그것이 네가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3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게 하지 말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4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7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8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 9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10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 성경에는 ‘하라, 하여야한다’라는 말씀 보다는 ‘하지 말라, 하지 말아야한다’는 말씀이 훨씬 더 많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제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나타내는 방법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제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 깊은 곳까지 알고 계시며,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를 나누어 주고자 하신다. 인간이 지혜의 근본이 되시는 하나님과 수직적인 관계를 바르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예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들은 것을 생활 속에서 순종함으로 실천하는 것이 지혜의 출발이며, 말씀대로 행하는 자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게 된다면 훨씬 더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잠언서 기자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얻게 되는 결과를 알려주고 있다. 이 세상에서 장수하며 평강을 누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게 되며, 삶의 길을 지도받게 되고, 몸과 마음의 건강과 함께 물질적인 복도 풍성하게 받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삶의 기준을 어디에 맞추고 살아갈 것인지 생각해보자. 나의 힘과 재능, 나의 지식을 의지하여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법과 명령을 따르는 가운데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을 누리며 살아갈 것인지 결정하자. 2월 21일 게으름에 대한 경계 (잠언 6:6-11) 6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7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8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9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누워 있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10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면 11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자 개미는 지극히 작고 연약하여 힘이 없지만 겨울을 내다보고 미리 양식을 준비하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 벌과 같이 군집생활을 하지만 벌의 무리처럼 계급과 서열로 나누어지지 않고 각기 자신이 맡은 일을 이행한다. 잠언기자는 개미를 예로 들면서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여 미래를 대비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경고하고, 성실하게 부지런히 일함으로써 미래를 준비해야 함을 권면한다. 또한 마지못해 수동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감당해야 함을 개미를 통해 배우라고 한다. 현대인들은 생활 자체가 너무 바빠서 게으를 여가도 없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게으름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자신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정립하지 못하면 삶이 무기력해지고, 나태해진다.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하며 신앙으로 무장하기를 미룬다. 겉으로는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 같으나 실상은 영적 고갈로 인해 메마르고 공허하다. 영적인 게으름에서 벗어나 부지런해져야 할 동기부여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우리를 사랑하는 자녀로 삼아주신 하나님은 우리가 잠에서 깨어 맑은 정신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영적으로 게을러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면 그것은 바로 사탄과 가까워지는 것임을 기억하고 깨어있기를 힘쓰자. 2월 22일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 (잠언 8:22-31) 22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23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24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25 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26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27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28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29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31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헬라어로 시간의 개념은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크로노스’의 시간으로 시간의 연속적인 흐름을 뜻한다. 연대기적인 시간을 말하는 크로노스의 시간은 시계가 똑딱똑딱하는 사이에 흘러가고,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역사가 된다. 또 다른 시간의 의미는 ‘카이로스’이다. 카이로스는 기회, 순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카이로스는 놓치면 다시 붙잡을 수 없는 기회의 시간을 말한다. 이것은 크로노스와 달리 어떤 사건, 기회 혹은 위기로 이해되는 의미의 시간이다. 어떤 의미이든 시간은 참 소중한 것이다. ‘시간은 금이다’라는 격언이 있지만 시간은 물질의 가치로 환산하거나 비교할 수 없다. 시간은 저축할 수 없고, 복구할 수도 없으며,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잠언기자는 말하는 지혜는 근원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일 뿐 아니라 나아가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의 지혜가 이 세상에 오셔서 스스로를 십자가에서 희생시킴으로써 참 생명을 온 인류에게 가져다주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사실로 귀결된다. 우리는 이 세상의 인생길에서 크로노스적 시간을 살아간다. 우리의 크로노스의 시간이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특별한 사건의 시간, 카이로스의 시간이 되도록, 크로노스의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오늘도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자. 2월 23일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 (잠언 10:8-14) 8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계명을 받거니와 입이 미련한 자는 멸망하리라 9 바른 길로 행하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려니와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드러나리라 10 눈짓하는 자는 근심을 끼치고 입이 미련한 자는 멸망하느니라 11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13 명철한 자의 입술에는 지혜가 있어도 지혜 없는 자의 등을 위하여는 채찍이 있느니라 14 지혜로운 자는 지식을 간직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입은 멸망에 가까우니라 행복을 만드는 말의 능력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병원에 ‘신의 손’이라는 별명을 가진 소아신경과 의사 벤 카슨 박사가 있었다. 그는 다른 의사들이 포기한 환자들까지도 수술해서 완치시키는 의술을 가졌고, 1987년에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머리와 몸이 붙은 샴쌍둥이를 분리하는 수술을 성공시켰다. 벤 카슨은 어두운 성장기를 보냈다. 그가 어렸을 때 그를 보고 세계적인 의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빈민가에서 태어났고, 어렸을 때 부모가 이혼하여 편모 슬하에서 자랐고,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으며, 불량한 학교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항상 아들을 격려하고 칭찬하였다. “벤, 너는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 너는 잘될거야.” 어머니의 격려와 용기를 주는 말들은 아들로 하여금 ‘신의 손’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능한 의사가 되게 하는 밑받침이 되었다. 사람의 말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다. 말 속에는 하나님이 주신 권세가 들어 있다. 잠언기자는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나니 곧 그의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잠18:20-21)고 말씀한다. 오늘 하루를 지내며 나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행여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닌지 주의하자. 주님의 사랑이 내 안에 가득하고, 그것이 말로 표현되어 나와서 내 입의 말들이 다른 이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며 행복하게 할 뿐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능력이 되기를 간구하자. 2월 24일 지혜 있는 자의 혀 (잠언 15:1-7) 1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2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 3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4 온순한 혀는 곧 생명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5 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요 경계를 받는 자는 슬기를 얻을 자니라 6 의인의 집에는 많은 보물이 있어도 악인의 소득은 고통이 되느니라 7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지식을 전파하여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정함이 없느니라 입술의 열매 우리는 날마다 많은 사람을 만나서 많은 말을 하며 살아간다. 잠언기자는 입술의 열매에 대하여 두 가지 교훈을 주고 있다. 첫째,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1:20)’는 말씀처럼 분노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분노를 다스리고 사랑과 화해로 문제를 해결해나가기를 원하신다. 둘째, ‘온순한 혀는 곧 생명나무’와 같다는 것이다. 온순한 혀는 ‘부드러운 말’, ‘따뜻한 말’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였고, 영어성경에는 ‘치료를 가져오는(brings healing)’으로 기록되어 있다. 상처받은 마음을 온순한 혀로 어루만져 주고, 치료해주는 입술의 말은 생명을 살리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 링컨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새어머니를 맞았다. 하루는 새어머니가 링컨에게 물었다. “네 이름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같은데 ,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니?” 링컨은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듣긴 했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새어머니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이제 아브라함이 얼마나 귀한 이름인지 알겠니?”라고 말했다. 어머니를 잃은 상처를 안고 살던 링컨은 그 말을 들은 뒤로 마음속에 자부심이 생겼고, 자신의 이름처럼 살겠다고 다짐하여 결국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이 되었다. 새어머니의 온순한 혀가 그의 상처를 치유하고 귀한 열매를 맺게 한 것이었다. 나의 입술은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지,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지, 아니면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면서 오늘 하루도 유순한 대답과 온순한 혀로 아름다운 입술의 열매를 맺고자 힘쓰며 살아가자. 2월 25일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잠언 16:1-5) 1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5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주권 잠언 16장부터 22장까지는 총 375개의 여러 주제들을 담고 있는 짧은 금언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금언들은 의인과 악인의 생활태도를 대칭적으로 비교하고 있어 지혜로운 자들로 하여금 악한 행위를 버리고 의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권면한다. 그중 가장 중요한 주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의뢰하는 것이 믿음의 사람이 가져야할 지혜로운 삶의 자세라는 것이다. 사람이 어떤 일을 계획하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추진해가지만 그러한 계획의 성패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릇되게 행한 일까지도 합리화시키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외적 행동과 일의 결과 뿐 아니라 내면의 동기와 목적, 방법까지도 완벽하게 보고 알고 계시며 정확하게 판단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해야 할 것은 모든 일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맡긴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굴려보낸다’는 의미이고, 라틴어성경에는 ‘보인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마치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자신의 생각을 내보이고 도움을 요청하듯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이다. 잠언기자는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고 말한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우리도 잠언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계획과 행함을 이끌어주셔서 선한 결과를 이룰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하자. 2월 26일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신다 (잠언 17:1-7) 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2 슬기로운 종은 부끄러운 짓을 하는 주인의 아들을 다스리겠고 또 형제들 중에서 유업을 나누어 얻으리라 3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4 악을 행하는 자는 사악한 입술이 하는 말을 잘 듣고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악한 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느니라 5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 6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 7 지나친 말을 하는 것도 미련한 자에게 합당하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거짓말을 하는 것이 존귀한 자에게 합당하겠느냐 화평을 만들어 가는 사람 제2차 세계대전 때 네델란드인 코리 가족은 유태인들을 숨겨주었다가 악명 높은 라벤스부르크 수용소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가족들은 고문을 당하며 죽어갔고, 코리 혼자 살아남았다. 그 후 날마다 독일을 저주하며 살던 그녀에게 주님이 명령하셨다. ‘독일인을 사랑하라. 가서 용서의 복음을 선포하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코리는 어느 날 집회를 마친 후 그녀에게 인사하려고 다가오는 한 사람을 보고 충격에 쓰러질 뻔하였다. 그 남자는 바로 아버지와 언니를 잔인하게 고문하여 죽게 한 수용소 간수였다. 하나님은 코리에게 ‘그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셨고, 코리는 ‘아니요, 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하나님은 다시 ‘나는 너에게 용서할 마음이 있는지 묻는 것이 아니다. 그를 용서하라고 명령하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결국 코리는 그를 포옹하고 속삭였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 실화의 주인공인 코리 덴 붐 여사는 후에 이렇게 고백하였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용서하는 능력과 함께 깊은 평화,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신다. 잠언 말씀은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화평 이 먼저 가정에서 시작됨을 알려준다. 가정의 화평은 세상에서 아름다운 인간관계로 발전한다. 예수님은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라고 말씀하신다. 오늘 하루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화평을 만들어 가는 자‘로 살아가자. 화평하게 하는 자가 진정 하나님의 자녀이고, 가장 지혜롭게 세상을 사는 사람이다. 2월 27일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오랠 때 (민수기 9:15-22) 15 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이 성막 곧 증거의 성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 위에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이르렀으되 16 항상 그러하여 낮에는 구름이 그것을 덮었고 밤이면 불 모양이 있었는데 17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행진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 18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쳤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들이 진영에 머물렀고 19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오랠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행진하지 아니하였으며 20 혹시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적을 때에도 그들이 다만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영에 머물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으며 ... 22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진영에 머물고 행진하지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행진하였으니 기다리게 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을 갈 때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며 낮이나 밤이나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않으셨다(출13:22). 애굽에서 나온 둘째 해 첫째 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성막을 완성하여 세웠을 때 성막 위에 구름이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였다. 하나님은 광야 길을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동하지 말고, 구름이 떠오를 때에는 이동하라고 명령하셨다.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는 날이 오랠 때 이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신앙의 연단을 받았다. 뜨거운 대낮의 태양열과 저녁의 추위, 광야의 척박함 등 끊임없이 괴롭히는 환경 속에서 언제 떠나야하는지 모른 채 머물러 있는 것은 광야를 이동해 가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지겨운 일이었을 것이다. 날마다 성막을 바라보며 성막 위에 머무른 구름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을 상상해보자. 답답하고 힘들어도 그들은 구름이 움직일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고, 이것을 통해 그들의 순종하는 신앙이 훈련되었다. 다윗은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시40:1)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기다리게 하신다. 견딜 수 없는 힘들고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나 응답이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을 앞서 가지 말자. 우리가 기다리고 기다리면 하나님은 계획하신 완전한 시간에 우리를 진행하게 하실 것이다. 2월 28일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시편 37:3-11) 3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 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라 5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6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9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10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11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가 받는 복 시편기자는 우리의 길을 여호와께 맡길 때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라고 가르친다. 주님께 우리의 길을 위탁하는 것은 우리의 재능을 완전하게 사용하는 첫 번째 길이다. 우리가 만일 우리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맡긴다면 우리 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생수의 강 같이 흘러 넘치게 될 것이다.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조지 뮐러목사님은 영국 브리스톨에 고아원을 세우고, 1898년 93세의 일기로 소천하기까지 약 15만 명의 고아들을 기도로 양육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심을 보여주었다.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며 고아원 사역을 할 수 있도록 간구하던 중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 81:10)는 말씀에 힘입어 이 일을 시작하였다. 뮐러목사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며 믿음으로 기도하여 일생에 5만 번 이상의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자신을 의뢰하는 자들을 기꺼이, 넉넉히 도우시는 분이심을 고아원 사역을 통해 증거하였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생명줄'을 놓치는 것이라고 하며 고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매일 기도하였다. 우리의 말의 재능이나 지적인 능력, 가진 물질이 타인에 비해 보잘 것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 나 하나님은 그것이라도 하나님께 맡기기를 원하실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의 의를 빛 같이, 우리의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며, 자신을 의뢰하는 자가 받는 은혜를 우리를 통해 드러내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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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림교회
2019년 3월 25일
In 365일 말씀묵상
3월 1일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 (마가복음 1:1-11)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피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7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0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구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는 BC415년 느헤미야서의 기록으로 끝나고 약 400년이 지난 후 세례 요한이 등장함으로 신약 시대가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임무를 맡기셨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먼저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야 할 것을 전하면서 자신은 백성들에게 물로 회개의 세례를 베풀지만 자신의 뒤에 오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시라고 소개하였다. 연극이나 오페라를 보러 가면 작품이 시작되기 전까지 무대에 막이 내려져 있다. 무대 앞에서 보면 아무 일도 없이 시작을 기다리는 것 같지만 보이지 않는 무대 뒤에서는 연극을 위한 준비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랜 세월 외적으로 침묵하신 하나님은 이 기간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한 준비를 하고 계셨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이루어가게 하셨다. 예수님은 '준비된 세상'에 오셨다. 모세는 40년간의 사역을 위해 80년 동안 준비되었다. 예수님은 3년간의 이 세상에서의 사역을 위해 30년 동안 준비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 위해 4천 년 이상의 시간을 투자하셨다. 하나님의 시간 개념은 인간의 시간 개념과는 다르다. 한정된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렇게 긴 역사의 시간만큼 준비하는데 사용할 수는 물론 없지만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사용하신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시고자 준비시키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시고자 준비시키실 때 하나님의 손길을, 하나님의 이끌어 가심을 민감하게 포착하고 즉각 응답하자. 3월 2일 제자들을 부르심 (마가복음 1:16-22)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21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진정한 제자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아 생활하던 어부들에게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1장에 보면 “곧”이라는 단어가 7번 (18, 20, 21, 28, 30, 42, 43절) 이나 나온다. 마가는 복음서를 매우 간결한 문체로 기록하면서 곧, 즉시라는 단어들을 사용하여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어부들은 자신들의 생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앞날이 어떻게 전개될지, 또한 사람을 낚는 어부가 과연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하였으나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 순종하여 생업의 도구인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바로 응답하여 주님을 따른 이 어부들이 처음부터 큰 믿음을 소유한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의 부르심과 복음을 이해하기 까지는 시간이 걸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예수님을 따랐다. 제자들처럼 우리도 때로 의심하기도 하고 난관에 부딪쳐 쓰러지기도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된다. 의심과 실패, 좌절과 회복의 과정을 거치며 예수님의 다듬어 가시는 손길에 의해 우리의 믿음은 점차 성숙해지고 온전해진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제자의 길로 부르신다.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은 순종으로 드러난다. 순종이 제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재산인 배와 그물을 버리게 하였던 것처럼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진정한 제자라면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말로만 하는 신앙고백이 아니라 순종하는 행동이어야 한다. 또한 주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것은 단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이웃을 지향하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우리를 부르신 분이 원하시는 진정한 제자의 삶의 모습이다. 3월 3일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마가복음 2:1-12) 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네 친구들의 믿음과 행함 가버나움에 중풍병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던 한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예수님이 그 동네에 오셔서 한 집에서 말씀을 전하고 계신 것을 알게 된 그의 친구들은 예수님께 가면 중풍병을 앓는 친구가 고침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병든 친구를 침상에 누인 채 예수님 계신 곳을 찾아갔다. 그곳에는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 도저히 집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다급해진 친구들은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뜯어내고 지붕 밑으로 환자를 달아 내렸다. (팔레스타인의 전통적 가옥은 벽을 돌로 짓고 지붕은 나무들을 평평하게 가로 세로로 얽어 놓고 진흙을 바르고 짚이나 풀을 역어서 그 위에 덮었으므로 비교적 쉽게 뜯어낼 수 있었다.) 그 장면을 상상해보라.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말씀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지붕이 뜯어지고 먼지와 흙덩어리가 떨어지는 가운데 침상에 누운 한 남자가 침상 채로 매달려 내려오는 장면을! 예수님께서는 친구들의 믿음을 특별하게 생각하셨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친구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 친구들로 하여금 행동하게 만들었고, 이들의 믿음의 행동에 예수님은 응답하셨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주실 때 먼저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육신의 질병보다 먼저 해결되어야 할 것이 인간의 죄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모든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께 가는 길이 많은 사람들로 가로막혀 있을 때 포기하고 돌아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중픙병 친구는 평생을 질병의 고통 가운데 살았을 것이며 영혼의 구원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친구들이 포기하지 않고 장애를 극복하고 협동하여 주님 앞에 나아갔기 때문에 병 고침의 은혜와 함께 영혼의 구원도 받게 되었다. 오늘 내 주변에 육신의 문제, 영적인 갈급함으로 나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는 없는지 살펴보자. 그들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구원의 주님 앞으로 데리고 나아가자! 3월 4일 금식논쟁 (마가복음 2:18-22)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부드러운 마음 예수님 당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죄를 슬퍼하는 표시로, 그리고 메시아가 오실 것을 준비하는 표시로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였다.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 왜 금식하지 않느냐고 질문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이미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계셨기 때문에 금식할 필요가 없었다. 질문하던 이들은 예수님이 구세주, 메시아이신 것을 알아보지 못했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습관적으로 금식하며 신앙적 의무를 행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에서는 포도주를 염소가죽으로 만든 부대에 넣어두었다. 새로 만든 포도주는 발효될 때 부풀기 때문에 부풀어 오르는 압력에 자루가 찢어지지 않도록 부드러운 새 부대에 넣어야 했다. 바리새인들의 마음은 마치 낡은 부대처럼 굳고 완고해져서 자신들의 전통이나 규율을 지키도록 가르치지 않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우리의 신앙이 때로 바리새인 같지는 않은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함께 하는 기쁨과 은혜를 누리지 못한 채 형식적인 믿음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의 마음이 딱딱해져서 주님이 인도하시는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변화되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낡고 완고하고 딱딱해진 마음을 버리고 부드러운 새 마음을 가지자. 신랑 되신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신부의 기쁨을 누리며 즐거워하자.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 새로운 영적 차원의 인생을 살게 된 주님의 신부들이다. 옛 것은 지나가고 새롭게 된 사람들이다. 3월 5일 예수님과 사탄 (마가복음 3:20-30) 20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21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23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25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26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 27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29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30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용서받지 못하는 죄 예수님께서 온갖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귀신을 쫓아내는 등 세상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한 능력으로 일하시자 어떤 이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예수님의 일가친척들은 미쳤다고 말하는가 하면 서기관들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게 사로잡힌 결과라고 매도하였다. 성령의 능력에 의한 이적을 사탄의 힘을 이용한 사술이라고 비난하는 서기관들에게 예수님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절대 용서받지 못한다고 엄하게 경고하셨다. 예수님은 인간을 유혹하고 죄에 빠뜨리는 사탄 마귀를 멸하러 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 예수님이 마귀의 힘으로 일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예수님을 가장 모욕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일가친척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하고 단지 자신들의 가족의 일원으로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행동을 불신하고 오해했듯이 인간의 제한된 이성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믿음을 저해하는 큰 요인이 된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 즉 예수님을 모독하는 죄가 물론 다른 죄보다 더 심각해서 용서받지 못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사람은 마음이 너무 완고하게 굳어져서 성령께서 경고하시며 영혼을 자극하시는 것을 무시하고 용서를 구하지 않기 때문에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놓치게 되어 결국 용서받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대해서는 닫혀있고 세상에 대해서만 열려있다면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느낄 수 없어 결국 세상의 풍조대로, 육신의 소욕대로 살게 된다. 오늘 하루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나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온전히 맡겨드리고 그분의 뜻대로 살자. 세상의 풍조와 육신의 소욕대로 살면 반드시 성령을 거스를 수밖에 없으며 결국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게 된다. 3월 6일 예수님의 가족 (마가복음 3:31-35) 31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2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진정한 가족 예수님의 가족들은 아직도 예수님의 사역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계실 때 어머니와 동생들은 말씀을 듣는 자리에 함께 있지 않고 밖에 있었고, 오히려 자신들의 용무를 위해 예수님을 밖으로 불러내고자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신을 둘러싸고 앉아 말씀을 듣는 이들을 향해 그들이 자신의 가족, 곧 어머니요 형제자매라고 하시며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주님의 가족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는 육신의 어머니와 형제자매들도 중요했으나 영적 가족관계는 육신의 가족, 친척들과 오랫동안 쌓아온 관계보다 궁극적으로 더 중요함을 알려주심으로써 장차 주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훈을 주신다. 육신의 출생을 통해 한 가족의 구성원이 되듯이 영적 거듭남을 통해 예수님의 가족이 된다. 이 길은 누구에게든지 항상 열려있고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영적으로 예수님과 한 가족이 된 이들은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하고, 안에 있을 뿐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항상 묵상하며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애쓴다. 육신의 가족이 서로 사랑하고 돌보며 필요를 채워주듯 영적 가족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이름으로 서로 사랑하고 돌보고 배려한다. 우리가 늘 만나며 함께 믿음생활을 하는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나의 진정한 가족이라고 생각하면 그들을 대하는 나의 마음과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세상은 점점 더 메마르고 비인간적으로 변하고 있지만 우리들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얻을 수 없는 기쁨과 사랑, 평안이 가득한 영적 가정,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자! 3월 7일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앗 비유 (마가복음 4:2-9) 2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3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나의 마음 밭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시기 위해 비유로 말씀하셨다. 비유를 사용하는 교육방법은 듣는 이들로 하여금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장점이 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나가서 씨를 뿌렸는데 씨가 여러 종류의 땅에 떨어졌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씨 뿌리는 자는 예수님,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의미하고, 네 종류의 땅은 하나님의 말씀에 상이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의미한다. 길가나 돌밭과 같이 딱딱하게 굳어진 마음에는 말씀이 심어질 수 없고 싹이 나기를 기대할 수도 없다. 세상의 염려와 근심의 가시들이 있는 마음에는 말씀이 들어가도 가시에 막혀서 결실하지 못한다.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기는 이중적 태도로 사는 이들의 마음이 이러하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며 실천하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에 뿌려진 씨는 성장하여 많은 결실을 맺게 된다. 한 사람의 인생 여정 속에서도 어떤 상태, 어떤 시기에 있느냐에 따라 말씀이 마음속에 못 들어오기도 하고, 들어와도 뿌리내리지 못한 채 말라버리기도 하며 혹은 많은 결실을 맺기도 한다. 씨를 뿌리는 이는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고 수고하지만 항상 많은 결실을 얻는 것은 아니다. 복음을 전할 때 눈에 보이는 결실을 거둘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므로 결과에 실망하여 씨뿌리기를 중단하지 말 것을 예수님은 또한 가르쳐주신다. 나의 마음 밭은 지금 어떤 상태인가? 거친 돌밭 같지는 않은지, 세상의 일들로 가시덤불이 가득 자라 있지는 않은지, 말씀의 기쁨을 빼앗아가는 무엇인가 내 안에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자. 내 마음 밭을 갈아엎어 씨를 뿌리고, 타인의 마음 밭에도 부지런히 복음의 씨를 뿌려 풍성한 결실을 추수하는 농부가 누리는 그러한 기쁨을 함께 누리자. 3월 8일 자라나는 씨와 겨자씨 비유 (마가복음 4:26-34) 26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그가 밤낮 자고 깨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30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3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32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33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확장하고 성장하는 하나님의 나라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상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자라나는 씨의 비유는 복음이 갖는 역동성에, 그리고 겨자씨 비유는 복음 확장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결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자라나는 씨의 비유는 우리의 영적 성장이 지속적이고 점진적인 과정임을 알려준다. 사람이 씨를 뿌리면 씨가 터져서 싹이 나고 자라서 이삭이 맺히고 충실한 곡식이 되는 과정은 하나님께서 담당하신다. 씨 뿌리는 이가 수고하여도 하나님께서 자연을 적합하게 관리해주시지 않으면 결실하지 못한다. 말씀의 씨앗을 잘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는 인간이 하지만 성령께서 그 말씀이 영혼 속에 뿌리내리고 자라게 하신다. 인간은 인간의 몫을 이행하고 하나님은 하나님 몫을 행하셔서 수확의 때에 거둘 것이 있게 된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수고할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성장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관적인 사역이며, 그 완성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3:6)라고 고백한다. 겨자씨는 아주 작은 것인데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미하게 시작되어도 자라서 놀랍게 풍성해질 것을 말씀하신다. 예수님도 당시 세상 권세자의 눈에는 마치 겨자씨 같이 하찮게 보였을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심으로써 그 생명이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모든 인생들의 영혼 속에서 풍성하게 살아나게 하셨다. 오늘 하루를 지내며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허물 많은 우리를 동역자로 사용해주시고 함께 결실의 기쁨을 누리게 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하나님 나라를 위한 우리의 수고가 때로 미약하게 보일지라도 결과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 3월 9일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4:35-41) 35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람더러 이르시되 잠잠하고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라 갈릴리 호수는 주변의 산들로부터 예측할 수 없는 광풍이 몰아쳐 호수에 높은 파도가 일 때가 있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가던 중 호수에 큰 광풍으로 인해 파도가 일고 물이 배에 가득차자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들은 예수님이 지금까지 행하신 많은 이적을 보았고, 예수님이 배 안에 함께 계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진정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 결과 문제에 부딪혔을 때 예수님의 권능에 의지하고 담대하게 대처하기 보다는 거센 풍랑으로 인해 죽게 될 위기에 처한 것만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자신들의 노련한 경험으로도 거친 풍랑에 대처하지 못하고 결국 고단하여 배에서 주무시고 계시던 예수님을 깨우며, 예수님이 자신들의 곤경을 돌아보지 않으신다고 원망하는 말투로 도움을 요청했다. 바람을 꾸짖으시며 잠잠하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바람이 그치고 잔잔해지자 광풍으로 두려워했던 제자들은 이번에는 광풍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 두려워하며 과연 이런 일을 행하시는 분이 누구신가하며 놀라워했다. 바람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의 능력은 때로 폭풍처럼 다가오는 문제들로 인해 두려워하는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도움을 요청하기만 하면 예수님은 언제든지 우리를 도우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그러므로 어떤 심각한 위기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오늘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로 인해 근심하고 있지는 않은가? 높은 산과 같이 앞을 가로막고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장벽이 있지는 않은가? 언제든지 우리를 도우시고자 준비하고 기다리고 계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그분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3월 10일 고향에서 배척당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6:1-6) 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은 어찌됨이냐 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선입견 예수님은 거라사인 지방에서 귀신 들린 사람과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아이를 살려주신 후 제자들과 함께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으로 가셨다. 나사렛의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권능을 행하시자 그곳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던 마리아의 아들인 예수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지 의아해하였다. 예수님의 어릴 때부터 자라는 모습을 계속 보아왔던 그들에게는 예수님은 단지 그들과 똑같은 한 인간에 불과하였고 자신들보다 나을 게 없었다. 그저 평범한 목수일 뿐인데 사람들이 예수님으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고 그분을 따르는 것을 시기하고 배척하였다. 이러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던 이들에게는 주님의 권위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나사렛에서는 더 이상 이적을 행하실 수 없었고, 그들은 구원받을 기회를 잃어버렸다. 예수님이 베푸신 이적을 본 후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주여 나는 죄인이오니 나를 떠나소서”(눅5:8)라고 고백한 베드로와 대조적인 모습이다. 우리도 교회 안에서나 혹은 밖에서나 종종 선입견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거나 자신의 기준에 의해 판단할 때가 있다. 타인을 대할 때 선입견을 가지고 대하면 그 사람의 참모습을 보기 어렵다. 사람에 대해서 뿐 아니라 하나님께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선입견은 우리의 눈을 가려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우리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 느끼고 인식하고 체험하는 것보다 예수님은 훨씬 크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르게 깨닫지 못해 은혜 받을 기회를 놓쳐버린 것 같은 그런 잘못을 우리는 범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의 영의 눈이 열려 오늘 하루의 생활 가운데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바라볼 수 있기를 소망하자. 오늘 우리의 삶을 인도해주시는 분은 전능하시고 사랑이 가득하신 주님이신 것을 영혼의 눈으로 바라보고 주님이 베풀어 주실 은혜를 사모하며 기대하자. 3월 11일 열두 제자들의 파송 (마가복음 6:7-13) 7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8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9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10 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11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12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13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순종의 결과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열두 명의 제자들은 제자로 선택받을 만한 특별한 능력이나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다. 특별히 더 큰 믿음을 가지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가지고 있던 한 가지 특성은 바로 예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였다. 예수님은 조화와 협력을 통해 보다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제자들을 두 명씩 짝을 지어 보내시며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을 주시고, 지팡이 외에는 돈이나 양식도 가지지 말고 두 벌 옷도 입지 말고 가라고 명하셨다. 팔레스타인 지방은 일교차가 심해 온 몸을 감싸는 겉옷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주님의 일을 행함에 필요한 것은 주님께서 채워주심을 믿고, 가장 최소한의 것만을 가지고, 가장 중요한 믿음을 가지고 나가게 하신 것이다. 주님의 명령을 생각해보면 오늘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을 위해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 뿐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가진 것을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돌아보자. 제자들은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순종하였다. 유대 마을을 다니면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병자를 고치는 등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그대로 행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일들을 통하여 스스로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였다. 순종의 결과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들을 통하여 일하심을 보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그분과 함께 갈 것인지 아니면 뒤에 남아 있을 것이지. 예수님은 비범한 일을 행하시기 위해 평범한, 그러나 순종하는 사람들을 사용하신다. 주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따름으로써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들 중 하나가 되자. 3월 12일 오천 명을 먹이시다 1 (마가복음 6:30-34) 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 도 없음이라 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 새 33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쉼과 회복 제자들이 그들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한적한 곳으로 보내어 휴식을 취하게끔 배려하셨다.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쉼과 회복이 필요하다는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 힘든 일을 한 후 취하는 조용한 휴식은 육체적인 쉼을 갖는 것 뿐 아니라 행한 일에 대한 정리와 평가를 하며,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우는데 필요한 정신력을 회복시켜 준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 출애굽한 이후 광야의 생활을 통해 육신의 쉼을 가지며,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 영적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되고 다듬어져 가는 회복의 시간을 경험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잠시 쉬기 위해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갔으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일행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예수님은 쉼을 방해받았으나 기다리고 있던 군중들을 탓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목자 없는 양같이 불쌍히 여기시며 그들의 곤고함을 채워주셨다.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그들이 알아야만 하는 것들을 가르쳐주셨고, 목자 없는 양이 위험한 길로 가듯이 하나님 없이는 어리석은 길로 갈 수 밖에 없음을 명심하도록 깨우쳐주셨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쉼이 방해받았던 것처럼 때로 우리의 일상의 시간계획을 방해하는 일이나 사람들이 있을 때 그것을 성가시게 느끼는지 아니면 그것도 우리의 삶 가운데 감당해야 할 봉사라고 기꺼이 받아들이는지 생각해보자. 체로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아주 먼 길을 여행할 때에 단숨에 그 길을 다 달려가지 않는다. 가다가 잠시 쉬면서 자신이 달려온 길을 돌아보고, 행여 너무 빨리 달려 자신의 영혼이 미처 따라오지 못한 것은 아닌지 잠시 기다린다고 한다. 인생을 살아갈 때 목표를 향해 부지런히 달려가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잠시 쉬며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앞으로 가야할 길을 점검해보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3월 13일 오천 명을 먹이시다 2 (마가복음 6:35-44) 35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들이요 나도 저물어가니 36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37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39 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40 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41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42 다 배불리 먹고 43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44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 가지고 있는 것을 주라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듣고 배우고 얻기를 사모하여 모인 수많은 무리들에게 천국 복음을 가르치시던 중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모인 무리들은 장시간 말씀을 듣느라 허기가 져서 음식을 먹어야 했으나 모여 있던 곳은 음식을 쉽게 구할 수 없는 빈들이었다. 제자들은 합리적인 방법을 생각해내었다.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뜻밖의 대답을 하셨다. 제자들은 모인 무리들을 먹이기 위해서는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떡을 사야만 할 것이라고 계산했다. 이백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가 받는 임금 8개월 치 정도의 액수였다. 제자들은 그만한 돈도 없었고, 살 곳도 마땅치 않은 곳에서 예수님께서 상황파악을 못하신다고 생각하며 퉁명스럽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가지고 있었던, 한 사람이 먹을 분량 밖에 되지 않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가지고 왔을 때 예수님은 그것을 축복하며 기도하시고 나누어줘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바구니에 차게 남는 이적을 체험케 하셨다. 당시 집 밖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따로 떨어져 식사하고 아이들은 여인들과 식사하는 것이 유대의 풍습이었다. 남자만 오천 명이었으니 모인 이들은 아마도 만 명은 넘었을 것이다. 누군가 가지고 있었던 것,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소용에 비해 턱없이 적은 것이었지만 예수님의 손에서 필요를 충분히 채우고도 남음이 되었다. 때로 우리는 주님께 너무 적은 것 밖에 드릴 수 없다고 느낀다. 그러나 주님께서 사용하시도록 기꺼이 내어드리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재능이든지 시간이든지 혹은 소유이든지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풍성하게 하실 수 있다. 우리의 자산을 주님께 드릴 때 그것은 풍성해진다. 가지고 있는 것을 - 자신을 포함하여 -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도록 드려보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하시는지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3월 14일 수로보니게 여자의 믿음 (마가복음 7:24-30) 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 발 앞에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위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믿음 예수님은 유대 지도자들의 대립에 부딪쳐 잠시 갈릴리 지역에서의 전도를 중단하시고 두로 지방으로 옮겨가셨다. 그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계시고자 했으나 이미 예수님께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있었고, 이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영적인 빛은 어디를 가시든지 드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로 인해 온 몸과 마음이 고통 가운데 있던 한 이방인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와 자신의 딸을 고쳐주시기를 간구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냉정한 말로 이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셨다. 예수님은 유대인을 자녀로, 이방인을 개로 비유하시며 여인의 요청을 거절하셨으나 이 여인은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매달렸다. 자신과 딸을 개에다 비유한 예수님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있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대답한 이 여인은 얼마나 간절하고 지혜로운가! 바리새인들은 형식적인 믿음으로 예수님과 계속 대립함으로써 영적으로 치유 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쳤으나, 여인은 간절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매달림으로써 딸의 육신적 치유와 함께 영적 구원의 은혜를 얻었고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마15:28)고 하시는 예수님의 칭찬을 들었다. 우리의 기도가 즉각적으로 응답되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질 때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겸손함과 간절함으로 은혜를 구한 자세는 바로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의 모습이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훈련하시고자 시험을 주시지만 우리의 처지와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시고 아픔을 치유해주시며 간구에 응답하신다. 오늘도 하루를 지내며 나의 믿음이 형식적이지는 않은지, 기도의 응답이 없다고 쉽게 포기하지는 않는지, 주님 앞에서 언제나 겸손함과 간절함으로 주실 은혜를 기대하고 있는지 돌아보며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하자. 3월 15일 베드로의 고백 (마가복음 8:27-35) 27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 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 죽음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9:1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잃는 것과 얻는 것 베드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이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앞으로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처음으로 말씀하셨고, 베드로는 어떻게 이런 일이 메시야이신 예수님께 일어날 수 있는지 항변하였다. 하나님의 시각이 아닌 자신의 개인적인 시각과 소망, 감정을 가지고 예수님을 세상의 왕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이사야서 53장의 고난 받는 종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세상적인 시각과 사고방식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진정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들은 열심히 세상이 주는 만족과 즐거움을 찾고, 무가치하고 허무하게 끝날 소유와 명성, 권력을 얻고자 영혼을 소홀히 하는 어리석음 가운데 살아간다. 그러한 세상에서 내면으로부터 끊임없이 올라오는 세상적 추구를 절제하고,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고자 하는 이기적인 결정과 노력을 포기하고, 주님께서 인생의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세상에서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잃는 것 같아 보이지만 주님 안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이 풍성한 영적인 생명을 얻게 된다. 자신이 귀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얻고도 영적 생명을 잃어버리면 과연 그 얻은 것이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지금 예수님께서 내게 물으신다면 나는 예수님을 나의 주인, 나의 구세주라고 고백할 수 있는지, 그분이 나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나의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까지도 그분께 드릴 수 있는지 생각하며 오늘도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가자. 3월 16일 변화산 사건 (마가복음 9:2-8)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3 그 옷에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7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8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베드로의 신앙고백 후,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에 대해 말씀하신 후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그들 앞에서 본래적인 신적 형상으로 변화하셨다. 그 때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세 명의 제자들이 보았다. 구약성경에서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는 가장 위대한 선지자의 도래를 예언하였고(신18:15-19) 엘리야는 메시야의 도래를 예언한 (말4:5-6) 선지자들을 대표한다. 예수님이 변형되신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은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야의 도래가 바로 예수님이 오심으로 성취되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 사실을 확증해주듯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중에서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눅9:27) 바로 세 명의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께서 천상의 모습으로 변형되신 것을 함께 경험하였다. 예수님께서 왜 특별히 이 3명을 택해서 자신의 영광과 순결함을 계시해주셨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이들은 다른 제자들에 비해서 좀 더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아가 예수님은 이들이 앞으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받아야 할 고난을 알고 계셨기에 그들이 고난 가운데 천국을 소망하며 견뎌낼 수 있게 하시고자 그들에게 천국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셨을 것이다. 세 명의 제자들은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말했으나 먼저 세상에 내려가 감당해야 할 사명과 고난이 있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할 다양한 사람들을 부르셨고, 우리들을 부르셨다. 우리가 그저 세상의 자리에서 있는 것을 좋아할 것이지, 아니면 언젠가 주님과 함께 그 좋은 곳에 있게 될 것을 소망하며 각자 부르신 자리에서, 그것이 비록 고난의 길일지라도 주신 사명 감당하며 살아갈 것이지 선택해야 한다. 3월 17일 누가 크냐 (마가복음 9:33-37) 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34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36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가장 큰 자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고 하시는 예수님의 질문은 제자들을 당황케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끊임없이 개인적 성공을 추구하면서 누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누가 더 주님께 신뢰를 받아서 높은 자리를 얻을 것인지 서로 다투던 것을 예수님께 들킨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적인 하나님 나라에 대해 눈을 뜨지 못했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스도인으로써 높은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위해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목표와 노력이 자신 만을 위한 이기적인 것이거나, 주님께 대한 순종이나 사역의 내적인 동기가 자신의 세상적인 목표의 성취에 있다면 이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 빠지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우리의 내면을 주의 깊게 살펴서 올바른 동기에 의해 움직이는지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정 높아지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연약한 어린 아이 하나, 선을 베풀어도 아무 대가도 받을 것이 없어 보이는 지극히 작은 사람에게 행한 것이 곧 주님께 행한 것이고,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께 행한 것이라 하시며 섬김의 도를 가르치셨다. 세상 나라에서는 서로 높아지려고 하고, 큰 자가 섬김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연약한 자를 섬기는 자가 가장 큰 자가 된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하루를 살아가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장 미약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사랑으로 섬김으로써 주님이 가르쳐주신 가장 큰 자의 삶을 실천하자. 3월 18일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시다 (마가복음 6:45-47) 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47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혼자의 시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 이상의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배를 타고 먼저 벳세다로 가게 하시고, 모인 무리들을 다 돌려보내신 후 기도의 시간을 갖기 위하여 혼자 산으로 올라가셨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매일의 꽉 찬 사역 중에도 홀로 아버지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을 우선적으로, 지속적으로 하셨음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도의 시간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의 근원이 되며 삶의 과제와 중압감을 이겨내는 힘의 원천이 된다. 일상의 바쁜 가운데 기도하기 위해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기도는 우리와 하나님의 사이를 이어주는 결정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하나님의 일을 행하실 때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셨다. 예수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다”는 겟세마네의 기도를 우리는 기억한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하여 종종 다른 이들로부터 홀로 떨어져있어야 한다. 홀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그 시간 우리는 가장 솔직하게 자신을 볼 수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지 알게 된다. 코람데오의 시간이다. 이를 위해 이른 아침 일어나는 수고를 해야만 할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조용한 시간을 갖는 원칙을 발전시켜 보라.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영적으로 성장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도와줄 것이다. 3월 19일 죄에 대한 경고 (마가복음 9:42-50) 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4 (없음)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6 (없음)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8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9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나의 짠 맛은 충분한가? 우리는 신앙 생활하면서 부지중에 다른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할 수 있다. 무심코 던진 말 한 마디, 사소한 행동이 공동체 안의 형제자매들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고, 믿음이 약한 이들을 넘어지게 하거나 믿음에서 떠나게 만드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가까운 사람, 혹은 가족들에게 가깝다고 부주의하게 말하고 행동하다보면 상처를 주기 쉽다. 예수님은 다른 이들을 시험에 빠지게 하는 것이 큰 잘못임을 심각하게 경고하셨다. 삶에서 죄를 제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손이나 발이나 눈이 죄를 범하면 범죄한 지체를 잘라내는 것이 낫다는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셨다. 사실 범죄는 손이나 눈이 것이 아니라 생각이 한다. 생각이 몸을 지배하여 행동으로 나오므로 생각 속의 죄를 뿌리 뽑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행하지 않기 위해 내면에서 일어나는 죄된 생각을 뿌리치는 것은 마치 손을 잃거나 눈을 잃는 것 같은 고통이 따른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특징을 소금에 비유하셨다. 소금의 기능은 맛을 내는 것과 부패를 방지하는 것으로써 인간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지만 그 맛을 잃어버리면 아무 쓸모가 없어 버릴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에서 소금과 같은 역할, 곧 생명력을 공급할 뿐 아니라 부패를 방지하는 책임을 다할 것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며 서로 자리다툼하고 높아지려고 하던 제자들에게 헛된 것에 대해 논쟁하지 말고 세상에 대한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고 교훈해주셨다. 이 세상에서 나의 삶은 소금으로써 충분히 짠 맛을 내고 있는지, 나는 어떤 맛을 내며 살고 있는지 살펴보자. 3월 20일 야고보와 요한이 구하는 것 (마가복음 10:35-45) 35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9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진정한 리더십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이 이루실 왕국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얻기를 원하였다. 인류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날이 다가오고 있었으나 제자들은 여전히 지상의 왕국을 꿈꾸며 한 사람은 주의 우편에, 한사람은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함을 알지 못했으므로 예수님께서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고 물으실 때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오히려 다른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예수님도 자신의 목숨을 내어줌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 갚아주시는 섬김의 종으로 이 세상에 오셨음을 알려 주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계획, 자신의 임무를 완성하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좌우편에 있었던 이들은 야고보와 요한이 아닌 두 강도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써의 사역을 어떻게 완성하셨는지 십자가를 통해 뒤늦게 깨달은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의 질문에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한 것 같이 복음을 위해 순교함으로써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기를 꿈꾸고 소망한다.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더 높은 목표,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소유를 위해 달려가라고 유혹한다. 그러나 주님은 진정 높은 자리는 섬김의 자리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섬김의 리더십이다. 오늘 하나님 나라에, 그리고 이 세상에 필요한 진정한 리더십은 섬김의 리더십이다. 서로를 위해 섬기고 필요를 보충해줄 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이루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들 가운데 이루어진다. 3월 21일 맹인 거지 바디매오 (마가복음 10:46-52)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가 가까워져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던 중 여리고를 지나게 되었다. 맹인으로 태어나 구걸하며 살아가던 바디매오는 길에 앉았다가 예수시란 말씀을 듣고 즉각 반응하였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치며 주변 사람들의 책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간절하게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시자 겉옷 –그의 가장 중요한 재산이었을 - 을 챙길 여유도 없이 즉각 예수님께 달려간 그는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씀드렸고, 예수님은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응답해주셨다. 바디매오는 육신의 몸으로 세상에 계시는 예수님의 생의 마지막 시간쯤에 예수님을 만나는 은혜를 누렸다. 그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 있던 기회를 믿음으로 붙잡았다. 그 결과 그는 암흑 속에 살고 있던 고통스러운 인생으로부터 벗어나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영혼의 눈도 뜨게 되어 구세주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되는 놀라운 은혜를 얻게 되었다. 우리는 눈을 뜨고 있으나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지 못해 마치 어두움 가운데 있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우리의 영혼이, 우리의 삶이 어두움 속에서 괴로울 때 바디매오와 같이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간절히 외쳐보자. 이 세상을 비추는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간절한 외침에 응답하셔서 영혼의 어두움을 밝혀주시고 세상의 것밖에 보지 못하는 눈을 밝혀주셔서 보아야 할 것을 보게 해주실 것이다. 오늘도 하루를 지내며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주님께 간구하여 우리를 앞서 가시며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되기를, 우리 안에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하자. 3월 22일 성전을 깨끗케 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11:15-18) 15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내 속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예물을 가지고 가야 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은 흠이 없어야 했기 때문에 예물에 흠이 있는지 없는지를 까다롭게 검사했다. 이스라엘 바깥지역에서 절기를 지키려고 예루살렘 성전을 찾는 이들은 먼 여행길에 예물로 드릴 짐승을 흠 없이 가져오기 어려웠으므로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상인들로부터 예물로 드릴 짐승을 사곤 하였다. 이런 이유로 예루살렘에서는 상업이 발달하였는데, 여기에 성전에서 일하는 이들과 상인들의 이권이 개입되면서 부정한 거래가 만연해졌다. 집에서 미리 준비해 가져간 예물은 부적격 판정이 내려지기 일쑤였고, 성전 안에서 검인을 받은 제물들이 비싼 값으로 매매되었다. 성전에 드리는 헌금은 따로 지정된 화폐만 사용할 수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환전상에게 가서 성전에 낼 수 있는 화폐로 바꾸어야만 했고, 환전상들은 환율을 마음대로 조정하며 부당한 이득을 취하였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들이 성전에까지 들어와 이런 장사를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거룩하게 드려야 할 성전 제사가 상업주의로 변질되어 타락한 것을 보시고 예수님이 너무나 화가 나서 장사들을 내쫓고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일이 두 차례나 있었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만민의 기도하는 집’인 우리의 교회가,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예배가 감사와 헌신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그저 형식적으로, 혹은 세상의 풍조에 휩쓸려 세속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시며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의로운 분노를 발하고 계실지 모른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깨우쳐주신다. 성전된 나의 영혼 속에 과연 무엇이 있는가?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는지, 아니면 이기심과 욕심, 위선과 교만으로 인해 그 옛날 장사꾼들로 어지럽던 성전과 같은 모습이지는 않은가 살펴보자. 예수님께 책망 받지 않도록 있어야 할 것을 있게 하고 버려야 할 것을 버려 거룩한 성전의 모습을 회복하자. 3월 23일 말라버린 무화과나무 (마가복음 11:20-25)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응답받는 기도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가시던 중 시장하신 예수님께서 길에 있는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따서 드시고자 하였으나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에는 정작 열매가 없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향하여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고, 이 말씀을 동행하던 제자들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 채 마른 것을 본 베드로가 놀라며 의아해하자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산이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슨 일이든 가능케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은 일부러 이러한 비유를 사용하셨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의심하지 않으면 응답받지 못할 일이 없음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전제로 한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올바른 관계는 이웃과 우리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전제로 한다. 이웃이나 형제자매와의 관계가 잘못되면 기도의 효과가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다른 이들과 불화와 다툼이 있다면 먼저 용서하고, 해결한 뒤 기도해야 하며, 이러할 때 비로소 하나님도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때로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해 낙심하고 실망하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나의 기도가 응답받을 수 있는 기도인지 살펴보자.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한 채,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하지 못한 채 의심하며 흔들리는 기도를 하고 있지는 않은가? 형제자매들과의 불화를 해결하지 못한 채 기도하고 있는가? 내 자신 안에 기도의 응답을 가로막는 원인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고 그것들을 먼저 제거하자. 3월 24일 가장 큰 계명 (마가복음 12:28-34) 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 예수께서 그가 지혜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서기관은 원래 성경을 필사하는 사람이었는데 후에는 성경을 능숙하게 해석하는 선생으로 대접받았다. 바리새인이라고 불리는 율법학자들과 서기관들은 유대인들에게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적극적으로 행해야할 248개의 율법과 하지 말아야할 율법 365개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구분하고자 했으며, 유대인들로 하여금 이 많은 율법들을 다 지키도록 가르쳤다.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많은 율법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여 첫째는 하나님 사랑, 둘째는 이웃 사랑이라고 대답하셨다. (신6:5, 레19:18) 서기관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질문하였으나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대답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참된 의미를 상실하고 형식과 전통에 빠져있던 서기관에게 율법의 본질은 사랑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셨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타인을 대할 때 마치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 같이 마음을 쓰고 돌본다면 우리는 십계명의 정신과 그 외의 다른 구약의 계명들을 이행하는 것이 된다. 예수님은 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일한 선상에서 말씀하셨을까?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창조물인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도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요일4:20) 우리의 생각과 결정, 그리고 행동들이 모두 이 두 가지 계명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도록 하자. 우리의 삶의 어떤 행동방식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최상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오늘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자. 3월 25일 부활논쟁 (마가복음 12:18-27) 18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19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로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0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21 둘째도 ... 22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23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25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26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27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다 하시니라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우리가 언젠가 가게 될 천국은 과연 어떤 곳일까? 이 땅에서 인연을 맺었던 이들을 천국에서 다시 만난다면 어떤 모습으로, 어떤 관계에서 만나게 될까? 우리는 간혹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데 예수님 당시에도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두개인이 이와 비슷한 질문을 예수님께 드렸다. 지금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되지 않지만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결혼한 여인이 남편과 사별하면 남편의 형제와 살면서 가문과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므로 언젠가 천국에 가면 과연 누가 누구와 부부관계로 만나겠냐는 질문은 그럴 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사두개인의 질문은 부부관계에 관한 것이 아니라 부활 자체를 부정하면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고자 하는 질문이었다. 부활 후의 삶이 어떠할지는 우리의 상상력을 훨씬 뛰어 넘는다. 사두개인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우리가 들어갈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은 단순히 지상에서의 삶의 연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새로운 질서로 새롭게 계획해놓으신 곳임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인간의 논리와 지식으로, 육신적 기준으로 부활 후의 삶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는 모든 죽은 자가 산자이다. 믿음의 사람은 부활하여 영생으로, 불신자는 부활하여 영벌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우리는 언젠가 가게 될 천국이 어떠한지를 묻기 보다는 현재의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과 신뢰의 관계에 집중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준비해놓으신 그곳에서 영원히 그분과 함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3월 26일 종말의 때 (마가복음 13:32-37) 32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3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34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35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36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깨어 있으라 기독교 역사 속에서 종종 종말의 때가 언제인지 알고자 하는 시도에서 비롯된 이단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비밀한 계획 가운데 있는 것을 인간의 유한한 지식으로 알아내고자 하여 종말의 때를 예측하며 사람들을 미혹하는 교만과 불신앙의 죄를 범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그날과 그때는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시며 주의하고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날과 그때가 언제인지 알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종과 문지기의 비유를 통해 알려주셨다. 어떤 사람이 타국으로 가면서 그 종들에게 각각 권한을 주어 사무를 보게 하였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였다.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알려주고 떠났더라면 종들은 아마 중간에 게으름을 부리며 잘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알지 못했으므로 종들은 항상 맡겨진 일들을 제대로 이행하고 있어야만 했다. 언젠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만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 그 날이 이르기까지 이 땅에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과제를 잘 감당하는 것 또한 우리 삶의 목적이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씀이라고 하시면서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셨다. 집을 지키는 문지기처럼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고, 자신의 믿음과 교회와 세상을 사단으로부터 지켜야하는 과제를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셨다. 내 영혼이 혹시 하나님께 대하여는 자고 있고, 세상에 대하여는 깨어있는 것이 아닌지 점검해보자. 주님의 명령대로 우리의 영혼이 깨어 있어서 이 땅에서의 삶을 하나님께 충성된 종으로써 살아갈 뿐 아니라, 주님의 재림과 하늘의 영광된 상급, 영원한 삶을 바라볼 수 있어야겠다. 3월 27일 마지막 만찬 (마가복음 14:22-26) 22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라 하시고 23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24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6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니라 성찬예식의 의미 이스라엘이 그 옛날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빠져나온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유월절기가 되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셨다. 유월절에는 원래 어린 양을 잡아 고기를 불에 구워서, 누룩을 넣지 않고 구운 딱딱한 떡과 쓴 나물과 함께 먹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눈 유월절 식사에는 양고기는 없었고 떡과 포도주만 있었다. 예수님께서 이제 곧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양으로, 유월절 어린 양으로 내어주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떡과 잔을 나누실 때, 떡을 자신의 몸이라 하시고, 잔을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언약의 피라고 하시며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심으로 구약에서 예언된 대로 인류의 구원을 이루신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성찬예식을 행하라고 제정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날 교회에서 행하는 성찬예식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것이고, 그 죽음이 무엇을 위한 죽음이었는지 기억하는 것이다. 나아가 성만찬에 참여하는 개개인이 이제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공동체가 한 몸이 되며, 교회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그리스도로 인해 한 형제자매가 되었음을 고백하며 시인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낮추어 이 땅에 육체의 몸으로 오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찬예식 안에 현존하시며 우리와 한 몸을 이루시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새로운 창조를 이루신다. 이 얼마나 신비하고 놀라운 은혜인가! 성찬에 참여하면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주신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 우리도 자신을 다른 이에게 나누어줄 수 있기를 소망하자. 3월 28일 베드로의 부인 (마가복음 14:26-31) 26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니라 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29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1 베드로가 힘 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환난 가운데 증명되는 믿음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릴 것을 알고 계셨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은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고,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는가? 변화산에서 예수님께서 하늘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신 것과,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대화하던 모습을 보았던 제자들은 그러한 놀라운 체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대제사장 앞으로 잡혀갔을 때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하였다.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장담한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여종이 예수와 같은 편이 아니냐고 묻는 말에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마지막에는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주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인간적 용기로 호언장담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을 도와주시기를 주님께 요청했어야 했다. 우리는 이렇게 연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이다. 아무리 큰 은혜를 체험하고 믿음이 깊은 것 같아도 위기상황이 닥치면 우리는 쉽게 믿음에서 흔들리며 의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하나님께 고백하면서 그분의 도우심을 요청해야 하겠다. 만일 내가 베드로와 같은 형편에 처했다면 어떻게 했을까? 만일 지금 주님 때문에 고난 받을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주님을 따르며 주님께 헌신한다고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우리의 헌신의 고백은 고난을 이겨낸 후에야 인정받을 수 있다. 우리의 믿음이 외적인 어려운 상황들 속에서 증명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고 담대한지 생각해보자. 3월 29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1 (마가복음 15:21-32) 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22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 (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23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24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 새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25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26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27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28 (없음) 29 지나가던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30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3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콘트라스트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의 장면에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보게 된다. 무거운 십자가를 강제로 대신 지고 간 구레네 사람 시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 십자가에서 극심한 고통 가운데 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이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밑에서 옷을 나눠가지려고 제비뽑기를 하고 있는 군인들,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동일한 십자가 형벌을 받고 죽어가는 두 명의 강도들, 피 흘리며 고통 가운데 죽어가고 있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하며 욕하는 사람들 ...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후 얼마나 악한 모습으로 타락했는지 이들의 모습 속에서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이런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셔야했다. 하나님의 신성을 조롱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하늘의 것을 보지 못하고 땅의 것만을 보며 살아가는 인생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시기 위해 그들이 멸시하고 조롱하는 저주의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함께 경험하고, 죽음을 목격한 구레네 사람 시몬의 가 정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새 생명을 얻고 복음 전하는 일에 헌신하게 되었다.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는 예수님을 저주하며 죽어갔으나, 다른 한 강도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간청하였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39-43)는 예수님의 응답을 받아 생의 마지막 순간에 새 생명을 얻는 구원의 은혜를 얻었다. 예수님께서 처절한 죽음으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고, 온 인류에게 새 생명 얻는 길을 열어놓으신 극적인 대조가 오늘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깨닫게 해준다. 3월 30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2 (마가복음 15:33-39) 33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5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36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위대한 승리 온 인류를 죄를 대신 갚아주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약 6시간 동안이나 고난을 당하셨다. 그 시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셨고, 마침내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라고 말씀하신 후 죽음을 맞이하셨다. 예수님의 죽음을 전후하여 두 가지 표적이 나타났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맞이하시기 약 3시간 전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성전의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로 나뉘어졌다. 예수님의 죽음을 전 우주가, 전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슬퍼하셨음을 보여주신 것이고,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가로막혀 있던 담이 허물어지고 하나님 앞으로 자유롭게 나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렸음을 의미한다. 십자가형을 집행하던 로마군대의 백부장은 십자가 아래에서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고 고백하였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 달려 죽는 십자가, 흉악한 죄인이 달려 죽는 십자가, 수치와 멸시의 상징이던 십자가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의 상징으로 변화되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인류를 끊임없이 죄의 길로 유혹하고, 죽음으로 몰아가는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고 마침내 승리하셨다. 죽음으로 열어놓은 생명의 문!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생명의 문을 여는 위대한 승리를 십자가 위에서 이루셨다. 자신의 생명을 버리시고 우리의 생명의 길을 열어놓으신 예수님의 승리를 기억하며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나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승리의 길임을 영혼에 깊이 새기는 오늘 성금요일이 되기를 소망하자. 3월 31일 무덤 속에 누이신 예수님 (마가복음 15:42-47) 42 이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44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지가 오래냐 묻고 45 백부장에게 알아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주는지라 46 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47 막달라 마리아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 특별한 것을 만남 무엇이 ‘특별한’ 것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곧 복종을 감내하면서 십자가로 가는 그분의 사랑이다. 그것은 십자가이다. 그리스도인이 갖는 독특한 특징은 바로 이 십자가이다.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세상을 넘어서게 하는 십자가, 그들로 하여금 세상을 이기게 하는 십자가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사랑 안에서 만나게 되는 고난,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존재에 있어서 ’특별한‘ 것이다. 그것은 숨겨진 채로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아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예배 공동체, 보다 나은 의의 공동체는 이 세상의 질서를 벗어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가시적인 공동체이다. 당신이 행하고 있는 특별한 것은 무엇인가? 특별한 것 – 이것은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인데 – 은 제자들이 행하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행해져야 하며 가시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윤리적인 엄격함이나 그리스도인의 생활양식의 차원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진실된 복종에서 행해지는 것이어야 한다. 그 행위가 그 사람을 수난으로 인도함으로써 ‘특별한’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그 행위 자체가 영속적인 고난이며 인내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특별한’ 것은 율법의 완성이며 계명들의 완수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그의 공동체 안에서 ‘특별한’ 것은 사건이 된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의 [제자직의 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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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림교회
2019년 3월 25일
In 365일 말씀묵상
4월 1일 복 있는 사람 1(시편 1:1-6)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으로 드리는 기도 시편 Psalm은 수금을 치며 부르는 노래라는 뜻의 헬라어 Psalmoi에서 유래하였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시편을 성경 속의 기도서라고 표현하였고, 마틴 루터 역시 주기도문과 시편은 모든 기독교인들의 기도의 본보기라고 하였고, 시편을 성경 전체를 요약한 작은 성경(Summe der Bibel-klein Biblia)이라고 표현하였다. 우리들의 기도는 대부분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 우리들의 위기와 곤고함, 우리들의 소망에 대해서만 맴돌고 있다. 그러나 시편 속에서 우리는 지나간 세대를 살았던 믿음의 사람들의 수많은 경험들과 마주치게 되며, 이러한 간접경험은 인생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야와 기도의 영역을 넓혀준다. 시편을 묵상함으로써 자신의 성공만을 위해 기도하던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이 땅에 실현될 것을 위해 기도하게 될 것이다. 항상 할렐루야 찬양만을 노래하던 사람은 시편 속에서 눌리고 고통당하는 이들의 내면 깊은 곳에서의 외침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자신의 고통과 운명에 대해서만 부르짖던 사람은 시편기도들의 가장 고귀한 모습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며, 그 속에서의 „나“는 이 세상의 중심에 하나님의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임을 볼 것이다. 시편을 묵상함으로써 우리는 다양한 시대와 문화 속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살았던 기도자들의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기도에, 주님의 기도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에 동참하게 된다. 시편을 통하여 올바른 기도를 배우고 드림으로써 복 있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며 함께 시편을 묵상하자. 4월 2일 복 있는 사람 2 (시편 1:1-6)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의 내용과 목적 시편 전체는 크게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시편들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유대인의 토라(모세오경)가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편집했다고 볼 수 있다. 구약학자 게르하르트 폰 라드 (Gerhard von Rad)의 표현과 같이 시편들은 토라(모세오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하심과 행하심에 대한 „이스라엘의 응답“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우리 삶 가운데서 행하시는 일하심에 대한 우리들의 응답으로서의 기도가 드려져야 함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편 1편과 2편은 전체 시편들로 들어가는 이중적 출입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지혜가 함께 하는 삶(1편)과 메시아 대망(2편)은 시편 전체를 묵상하고 기도하는 근본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할렐시편이라고 불리는146편-150편 (이 다섯 편의 시들은 모두 할렐루야로 시작)은 시편기도들의 목적을 말해주고 있는데, 모든 민족들과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확정함으로써 시편 전체는 탄원으로부터 찬양으로의 전환을 이루고 있다. 즉, 시작하는 1,2편은 시편의 주제를 다루고 있고, 마지막 다섯 편은 시편의 목적을 알려준다. 우리들도 시편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동안 하나님의 지혜가 함께 하는 삶을 배우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면서, 우리들의 개인적, 사회적 탄원, 간구가 하나님 찬양으로 변화되는 신앙적 체험을 통하여 진정 복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하자. 4월 3일 복 있는 사람 3 (시편 1:1-6)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하나님이 복 주시는 사람 시편 1편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복 있는 사람의 모습과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하나님께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두 부류 중의 하나로 보일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거룩한 사람(의인)과 그리스도 밖에 있는 거룩하지 못한 사람(죄인)이다. 하나님이 복 주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세상과 분리된 거룩한 삶을 사는 경건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신다. 이것은 세상과 분리되어서 혼자 살아간다는 뜻이 아니라 1)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고 2)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고 3)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을 의미한다. 악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고, 자기들의 생각이나 의지, 욕심 등을 따라 살 때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삶의 태도를 1편 1절에서는 악인의 꾀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삶의 목표로 하지 않고 자신의 영광에 목표를 두는 사람은 곁길로 빠져 악인으로, 죄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복은 „똑바른 길로 나아가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복을 얻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똑바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복임을 의미한다. 그 길은 바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이며, 하나님은 그 길로 행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모든 복을 허락하신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똑바른 길로 나아가고,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을 삶을 살고자 애써야 하겠다. 4월 4일 복 있는 사람 4 (시편 1:1-6)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라 복 있는 사람은 그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져 있으며,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그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사람이다. 시편에서 말하는 복은 세상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복과 다르다. 1,2절은 복 있는 삶의 자세를 알려주고 있고 3절 그 결과로 나타나는 모습을 알려준다.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것 같고, 그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다. 시편 1편 1절은 길에 대하여, 2절은 진리인 여호와의 율법에 대하여, 3절은 풍성하게 하며 열매를 맺게 하는 생명에 대하여 말씀함으로써 완전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비유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시편 1편은 복 있는 개인적인 믿음의 삶에 대하여 알려주고 있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복 받기를 원한다. 새해 첫날 사람들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한다. 우리도 복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악인의 꾀를 따르고 있지는 않은지, 죄인들의 길에 서 있지 않은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 있지는 않은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밤낮으로 묵상하고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한다. 우리의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며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며 그 말씀대로 행하는 삶이 진정 복 있는 삶이다. 4월 5일 여호와의 명령 (시편 2:1-12) 1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2 세상의 관원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대적하며 3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4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5 그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10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여호와께 피하는 사람은 다 복이 있다 시편 2편을 유심히 살펴보면 말하는 이가 여러 명이다. 1-3절은 세상의 소리이다. 그것은 헛된 일을 꾀하게 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한다. 세상은 부단히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교만하게 자기의 길을 가고자 한다. 4-6절은 시편 기자를 통한 아버지의 음성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어리석은 도모를 보고 웃으신다! 하나님은 사람보다 위대하시고, 세상의 왕들의 교만한 공격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5-6절은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신다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7-9절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하는 아들의 음성,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구하면 이방 나라들을 유업으로 주시며 소유를 땅 끝까지 이르게 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10-12절 시편 기자를 통해 전달되는 성령의 음성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고 따르려는 이들에게 세상 지혜를 따르거나 자랑하지 말 것을 호소하며,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께 헌신할 것을 전하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이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의지하며 즐거워하는 이들의 소유를 땅 끝까지 이르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것은 물질적 소유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스르는 세상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스리며 변화시키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이다. 1편은 축복으로 시작되며 2편은 축복으로 끝난다. 여호와께 피하는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4월 6일 저녁 찬송시 (시편 4편) 1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2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셀라) 3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4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 5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6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7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하나님 시편4편은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던 때에 지은 비탄시이다. 동일한 배경 아래 쓴 시편 3편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으로 아침을 맞이하는 다윗의 감격을 노래하는 ‘아침 찬송시’인데 비해, 4편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사람만이 두려운 밤조차도 평안하게 맞이할 수 있음을 노래한 ‘저녁 찬송시’라고 할 수 있다. 후대 사람들이 저녁예배 때 이 시편을 찬송한 것으로 전해진다. 다윗은 과거에 경험한 하나님의 도우심이 현재의 고난도 극복하게 해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다.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대적자들 앞에서도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확신하기 때문에 자신이 누리게 되는 평안과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우리는 때로 이 세상에서 어려운 일들을 만나기도 한다. 억울한 오해나 원치 않는 질병, 갈등과 실패, 경제적인 어려움 등이 우리의 삶을 고통스럽게 할 때에 진정 우리가 믿음의 사람인지 아닌지 드러난다. 이러한 상황에 처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자신을 비하하지 않고, 도리어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이 참된 믿음의 사람이며, 그에게 하나님은 평안을 주시고 안전한 길로 인도하신다.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누리는 기쁨은 세상 사람들이 그들이 가진 풍부한 물질로 인해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다는 다윗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고,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심을 믿고 기쁘게 살아가는 오늘 하루의 삶이 되기를 소망하자! 4월 7일 대자연이 드러내는 창조주 하나님 (시편 8편) 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2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5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9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창조주 하나님께 향한 감사의 찬양 하늘의 달과 별들,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들, 땅의 각종 들짐승과 같은 천지 만물로 우리의 눈을 돌리게 하는 아름다운 시편 8편은 그 내용상 천지창조를 다룬 창세기 1장에 대한 인간의 화답시라고 할 수 있다. 목동생활을 하며 자연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경험한 다윗은 훗날 이 경험을 바탕으로 한편의 서정시를 기록하였을 것이다. 다윗은 창조주 하나님을 자신의 ‘주’로 고백하면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만물 중 특별히 인간을 존귀하게 여기시고 만물에 대한 통치권을 맡겨주신 사실을 감사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시편 8편을 공중예배 시나 특별한 절기 때에, 그리고 초대교회에서는 예수승천기념일에 특별히 낭송하였다. 1절과 마지막 9절에서는 신비한 우주 속에 담겨 있는 주의 영광을 동일한 말로 반복하여 찬양하고 있고, 2-3절은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아름다운 창조솜씨에 대한 찬양으로, 후반부 4-8절은 비천한 인간을 만물 중에서 존귀하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되어있다. 우리의 눈을 잠시 자연으로 돌려보자. 다윗이 고백한 것 같이 아름답고 신비한 자연 만물을 보면서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생각해보자. 그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지으시고, 그 모든 것을 다스리며 누리며 살아가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 찬양을 올려드리자. 4월 8일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시편 15편) 1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2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3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4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5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의 삶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다윗의 시대에는 예배자가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성전에 들어갈 때 자신이 성전에 들어가 예배드릴 자격이 되는지 사제에게 확인을 받아야 했다. 다윗은 시편 15편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자의 외적인 조건보다 그 내면적인 마음가짐과 삶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다. 먼저 1절에서 누가 하나님과 동거하며 교제할 수 있는지를 질문한다. 2-5a절에서는 성전에 들어가 예배드리는 자들의 10가지 자격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5b에서는 그러한 10가지 자격을 갖춘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를 노래하고 있다.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 예배할 자가 누구인가’라는 1절의 질문은 ‘하나님은 과연 어떤 사람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실 것인가?’라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생각해보자.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는 우리의 삶은 어떠한지 되돌아보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실 수 있도록 우리의 평소의 삶의 자세가 다윗이 말한 대로 정직하고, 공의를 실천하며, 진실을 말하며, 남을 허물하지 않고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고 ... 살아가고 있는지 되돌아보자. 만일 우리의 삶이 그렇지 못하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이사야서1:11-12)고 책망하실 것이며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매일의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되도록 시편 15편의 말씀대로 살아가자. 4월 9일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들 (시편 16편) 1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3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4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 5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니다 6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7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9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10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안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죽음도 초월하는 신앙의 소망 시편 16편은 복과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믿고, 부활과 영생을 확신하며 죽음의 위협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다윗의 신앙 고백시이다. 나아가 오고 가는 모든 세대의 인생들의 죄를 대신 갚아주기 위해 하나님께서조차 버림받는 십자가 고통과 공포를 감당하시고, 가장 먼저 부활하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을 예언한 시라고 할 수 있다. 다윗이 이 시를 지을 때 그는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기쁨과 소망을 가지고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다윗의 믿음이 얼마나 확고하고 분명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다윗은 하나님만이 자신의 복의 근원이며 기업이 되심을 노래하며 자신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것을 고백한다. 그는 땅에 있는 성도들이 육신의 죽음 이후 부활하여 영원히 살아갈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존귀한 자들이라고 부르며, 그 사실이 자신의 즐거움이 됨을 고백할 수 있었다. 다윗이 가졌던 부활과 영생에 관한 소망은 그것에 대한 분명한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지지 않았던 시대의 것이기 때문에 희미하고 불완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죽음의 위기 앞에서 담대하게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자신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감당할 수 있었다. 다윗시대보다 훨씬 분명한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가진 오늘날의 우리 성도들은 과연 어떤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 혹여 삶의 여정에서 어려운 일을 만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존귀한 자임을 인식하고 영원한 나라에서 얻을 기쁨을 소망해야 하겠다. 4월 10일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 (시편 19:7-14) 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 롭게 하며 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10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도 더 달도다 11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12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3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14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묵상을 통해 얻게 되는 은혜 시편기자는 여호와의 율법이 완전하여 인간의 전인격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음을 노래한다. 지치고 낙심될 때 말씀을 의지하면 상처가 치유되고, 억울하게 고난을 당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그 말씀을 묵상하면 영혼의 평안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자신의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되기를 원하는 간절함을 표현한다. ‘묵상한다’는 말은 거울로 영상을 되받아서 좀 더 자세히 본다는 뜻으로, 말씀의 거울에 자신을 자세히 비춰본다는 것이다. 즉 묵상하는 삶이란 하루 중 사물과 사람들, 자신과 하나님을 좀 더 자세히 그리고 깊이 바라보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묵상은 곧 하나님과의 내면의 대화, 기도이다.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게 한다. 프랑스 떼제공동체의 창시자인 로제수사는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길잡이별이 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숨은 자력처럼 사람을 끌어준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도하게 하실 때 먼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잡념과 욕망, 분노, 갈등 등을 보게 하신다. 그것을 다 내어버리는 것이 일차적인 묵상기도이다. 다 털어내고 비워진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평화로 채움 받는 것이 묵상기도의 이차적 단계이다, 오늘 우리도 시편기자의 고백과 같이 우리의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 하나님께 드려지기를 바라며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는 하루를 살아가자. 4월 11일 환난 날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시편 20편) 1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2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3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주시기를 원하노라 (셀라) 4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5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6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의 오른 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 7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8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9 여호와여 왕을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한다 시편 20편은 이방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기원하는 시이며, 왕과 그의 군사들이 출정하기에 앞서 성전에서 예배드릴 때 모두 함께 낭송하였기 때문에 출정시라고 불려진다. 나아가 어떤 환난일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반드시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의 노래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 주의 백성들이 악을 정복하고, 영원한 의의 승리를 이루실 메시야의 왕권과 통치를 기원하는 시라고 볼 수 있다. 다윗은 ‘환난 날에’, 즉 인생에 있어서의 어떤 종류의 험악한 고난을 당하게 되는 때에라도 ‘야곱의 하나님’, 곧 연약한 인생들을 잊지 않고 끝까지 돌아보시는 긍휼과 사랑의 하나님을 의지하기만 하면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노래하고 있다. 우리는 종종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로 인해 근심하기도 하고, 곤고한 처지에 놓여 괴로워할 때도 있다. 그러한 때에 시편 20편을 기도로 드려보자. 시편 20편을 나의 기도문으로 바꾸어 하나님께 드려보자. 하나님이 내가 드린 모든 예배를 기억하시고, 나를 도우시고, 나의 소원을 허락하시고, 나의 계획을 이루어주시며, 나의 모든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하고 놀라운 일인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 이와 같이 행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가진 물질과 권력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오직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다. 4월 12일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시편 22편)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나이다 4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5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7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예언 시편 전체는 하나의 흐름을 가지고 구성되어 있는데, 목자의 시라고 불리는 시편 22, 23, 24편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언하는 뚜렷한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 중 22편은 선한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통한 승리를 예언한 시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라고 절규하셨다. 이 말씀과 동일한 절규로 시작되는 22편은 다윗이 기록한 유명한 메시야 예언시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다윗 개인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신앙적 고백이지만, 내적으로는 성령께서 다윗을 감동시키셔서 하나님 자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메시야로 오실 것을 예언하게 하신 것이다. 약 1천 년의 시대적 간격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예수님의 수난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고, 그 예언한 것이 이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대로 이루어짐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심오함과 그 은혜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다윗이 온갖 고통 가운데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였던 것을 보면서 우리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믿음의 자세를 배우게 된다. 또한 하나님께 나아오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으시고 반드시 응답하시고 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뿐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기꺼이 당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마음 깊이 느끼게 된다. 4월 13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23편)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내게 부족함이 없도다 시편 23편은 6절로 된 짦은 글이지만 다윗이 자기의 일생 동안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완벽하고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어 마치 잘 그려진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이 우리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준다. 시편 22편이 선한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과거의 사역을 통해 은혜 베풀어주신 것을 노래하고 있다면 23편에서는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히13:20)의 인생들을 위한 현재적 사역과 능력을 노래하고 있다. 시편 23편의 주제는 ‘내게 부족함이 없다’라는 1절 말씀이다. 부족함이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셔서 쉼을 주시기 때문이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셔서 회복과 의를 이루어주시기 때문이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셔서 보호해주시기 때문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게’하셔서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예비해주시기 때문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 수 있도록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날 때 가야 할 집이 있게 해주셨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심을 온전히 믿을 때 다윗과 같이 나의 목자이신 하나님으로 인해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다. 4월 14일 만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찬양 (시편 24편) 1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2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4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5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6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7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8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오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9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10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유대 전승에 의하면 이 시는 다윗이 법궤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것을 기념하여 지은 찬양시이다. 아마도 이 시편은 합창단과 독창자가 서로 화답하며 불렀던 것 같다. 합창단이 1-2절을 부른 뒤 독창자가 이에 응답하여 3절을 부르고, 또 다른 독창자가 4-5절을 부른다. 합창단이 7절을 부르면, 독창자가 8절의 ‘영광의 왕이 누구냐’ 질문하고 합창단이 ‘강하고 능하신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고 화답한다. 1,2절에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찬양한 후 3,4절에서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냐고 질문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예배할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행실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고,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않으며 거짓 맹세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는 자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고, 거룩한 하나님의 산에 올라가 그 분 앞에 설 수 있음을 알려준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우리의 자세는 과연 어떠한지 이 말씀에 비추어보아야 하겠다. 7-9절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가 이스라엘로 돌아올 때 성소의 문을 활짝 열고 맞아들일 것을 표현하고 있는데, 십자가 수난을 당하신 예수님이 부활 후 영광된 모습으로 하늘 보좌에 오르시는 모습을 예언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시편은 초대 교회 당시 ‘예수승천일’에 많이 낭송되었고 오늘날에도 부활절에 교회에서 낭송하곤 한다. 인생들을 위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높고 광대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며 오 늘 하루도 하나님의 복을 받는 참된 예배자의 자세로 살아가자! 4월 15일 하나님께 드리는 기쁨의 찬양 (시편 33편) 1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2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3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 4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 5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7 그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8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상의 모든 거민들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9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10 여호와께서 나라들의 계획을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하게 하시도다 11 여호와의 계획은 대대에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12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가장 복되고 즐거운 일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시편 33편3절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라는 말씀에 감동을 받아 매주 새로운 찬양곡을 작곡하여 그것을 주일예배에서 성가대로 하여금 부르게 하였다.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백성들이 수금과 비파로, 새 노래로 즐겁게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권면하는 시편 33편은 공중 예배 때 사용한 장엄한 감사 예배시이다. 수금은 오늘날의 기타와 비슷하고, 비파는 하프와 비슷한 악기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견고하게 서게 되었다. 인생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대대에 이를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가장 복되고 즐거운 일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 역사를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자신의 주(Lord)로 모시고 섬기는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자신의 주로 모시고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기업이 되어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하며 찬양할 때 우리를 위해 온 천하 만물을 아름답고 조화롭게 창조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쁨과 감격으로 드리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하겠다. 4월 16일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시편 37편1-11절) 1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라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2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3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 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5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6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9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 11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때로 세상에서 선한 사람들보다 악한 꾀를 쓰는 사람들이 더 잘되는 것 같아 보일 때 우리는 스스로 질문한다. 선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오히려 불이익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만난다면 도대체 정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으며, 공의의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하버드대학의 교수인 마이클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써서 베스트 셀러가 되었으나 정작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은 없고 책 제목과 같이 정의란 무엇인지 계속 질문만 던지고 있다. 다윗이 노년에 쓴 것으로 추측되는 시편 37편은 이러한 우리들의 의문에 대답하는 교훈을 준다. 다윗은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고, 악한 꾀를 써서 잘 사는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을 시기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눈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더딘 것 같아 보이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고 계시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 공의롭게 판단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눈에 모순되게 보이는 현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공의로운 섭리를 믿고 선한 일을 행하기에 힘쓰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의 마땅한 본분이다. 정의로우신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어주시고, 그들의 의를 빛 같이 나타내주신다고 약속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치 여름 햇빛에 말라 시들고 마침내 베임을 당하는 풀과 같이 사라져버릴 악인들 때문에 불평하고 근심하면서 시간과 힘을 낭비하지 말자. 오직 하나님을 기뻐하고, 우리의 모든 계획과 소망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을 믿고 기다리면서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자. 4월 17일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시편 40편 1-8절) 1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2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3 새 노래 곧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4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5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6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7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8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기가 막힐 웅덩이에서 건짐을 받은 자의 새 노래 시편 40편은 6-8절에서 그리스도의 탄생을 내다보고 있기 때문에 ‘성탄의 시’라고도 불려진다. 다윗이 ‘기가 막힐 웅덩이’에 빠져서, 곧 극심한 곤경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기다렸더니 하나님이 들으시고 마침내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다고 고백한다. ‘기가 막힐 웅덩이’를 공동번역 성경에는 죽음의 구렁으로, 새번역 성경에는 멸망의 구덩이로 표현하고 있다. 수렁은 한번 몸이 빠지면 점점 깊이 들어가는 늪지대로써 도저히 살아날 수 없는 위기 상황을 의미한다. 그러나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다’는 다윗의 고백대로 하나님은 그를 안전하고 견고하게 보호해주심으로써 그가 처했던 기가 막힐 웅덩이와 극적으로 대조되는 구원을 이루어주셨다. 1-3절의 말씀은 곤경으로부터 다윗이 구원받은 것을 묘사하고 있으나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부활하실 것에 대한 상징이기도 하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의 구덩이로 내려가셨고, 우리의 죄를 대신 갚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자신의 몸에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으니 그것이 얼마나 깊고 혹독한 구덩이였을지 상상할 수 있다. 혹시 오늘 나에게도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 빠진 것 같은 문제가 있는가? 다윗과 같이 하나님께 간구하자.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셔서 곤경에서 건져주시고, 마침내 그 옛날 다윗에게 행하신 것같이 하나님께 올려드릴 새 노래를 우리의 입에 주셔서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해주실 것이다. 할렐루야! 4월 18일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한 영혼 (시편 42편 1-5절)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3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시편의 편집자는 시편 전체를 모세오경의 구조를 도입하여 5권으로 나누어 정리하였다. 1권은 1-41편까지이며 창세기와 비교하여 창조주와 인간을 주제로 한 시편들로 구성된다. 2권은 42-72편으로 출애굽기와 비교하여 해방과 구속의 주제를 다루었고, 3권은 73편-89편으로 레위기와 비교하여 예배와 성소의 주제를 다루었고, 4권은 90-106편으로 민수기와 비교하여 순례길에 있는 인생을 주제로 하고 있다. 마지막 5권은 107-150편으로 신명기와 비교하여 말씀과 찬양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시편 42편을 고백하는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것이 마치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다고 토로하고 있다. 물이 귀한 중동지방에서 심한 갈증으로 물을 찾아 헤매는 사슴이 물을 찾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듯이 생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은혜가 없다면 우리도 영적으로 죽은 자가 될 수밖에 없음을 생각하게 해준다. 시인은 또한 자신이 처한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면서 스스로에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불안해하느냐’고 질문한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와주심으로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라’고 대답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신의 믿음을 일으켜 세운다. 우리도 심한 갈증으로 목말라 물을 찾는 것과 같이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고 있는지,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분의 은혜를 구하고 있는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자. 4월 19일 우리의 피난처이신 하나님 (시편 46편) 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2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3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 4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는도다 5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6 뭇 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렸더니 그가 소리를 내시매 땅이 녹았도다 7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 10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11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오늘도 여전히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 고라 자손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시편 46편은 열왕기하 19장에 기록된 사건, 즉 히스기야 왕의 통치 시절 앗수르 왕 산헤립의 침략으로 예루살렘이 멸망당할 위기에 놓였을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예루살렘을 구원해주신 사건을 배경으로 기록한 시이다. 시편 46편은 우리가 찬양으로 많이 부르는 친숙한 시이기도 하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여 홍해 앞에 이르렀을 때 뒤에서는 추격해오는 애굽 군사들의 위협과,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는 위급한 상황에서 모세가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14:13-14)’고 말한 것을 생각나게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끊임없는 자연재해와 테러, 전쟁 등으로 우리를 두려움과 불안으로 몰아간다. 그러나 시인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고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다. 사탄의 세력이 아무리 강한 것 같아도 결국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손길 아래에 있고, 하나님은 지상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의 날개 아래 보호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그분의 일하심을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자녀인 우리의 마땅한 본분이다. 하나님이 성 중에 계셔서 성이 흔들리지 아니하듯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가 어떠한 형편에서도 요동하지 않음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오늘도 하루를 살아가자! 4월 20일 새벽을 깨우리로다 (시편 57:1-11) 1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가기까지 피하리이다 ... 7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8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9 주여 내가 만민 중에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10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11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다윗의 믿음 시편 57편은 다윗이 사울 왕의 핍박으로 인해 망명생활을 하면서 쓴 10여 편의 비탄 시 중 하나이다. 사무엘상 22장과 23장에 보면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피해 아둘람 굴이나 엔게디 굴에 피신해 있었는데 이 때를 배경으로 기록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목숨이 위협받는 위태로운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간구하며 자신에게 닥친 재앙이 지나가기까지 하나님의 안전한 보호 안에 머물러있기를 갈망한다. 다윗은 비록 지금은 자신이 쫓겨 다니는 신세이지만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잃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환난으로부터 구해주실 것을 확신하였으므로 도피생활의 곤고함 가운데서도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확정되어 있다고 거듭 고백할 수 있었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다. 다윗의 믿음의 고백을 보면서 우리의 믿음은 얼마나 미약한지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생명의 위협은커녕 일상에서 조금만 어려운 일이 닥쳐도 낙심하고 좌절하며,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난 것을 괴로워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곤 한다. 다윗을 보며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다시 굳게 세우자.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하며 새벽을 깨우는 믿음으로 오늘도 하루의 일상을 살아가자! 4월 21일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 (시편 62:1-7) 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2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3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4 그들이 그를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셀라) 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6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7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요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잠잠히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자 시편 62편은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비탄과 슬픔 가운데 있을 때 기록하였다. 다윗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특별한 복을 받은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일생은 평탄치 못했다. 왕이 되기 전에는 그의 선왕 사울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 왕이 된 후에는 그의 정적들로부터, 심지어 노년에는 자신의 왕위를 노리는 아들 압살롬으로부터 수많은 핍박과 도전을 받는 일생을 살았다. 그러한 일생 가운데 다윗은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라고 고백하며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반석이시고 요새이시며 구원이시라고 노래하였다. 다윗은 환난에 처한 자가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인간적인 방법과 생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석, 구원, 산성,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그분께 소망을 두고 잠잠히 기다릴 때 주어진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다윗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일을 위해 선택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육신의 세상에서는 많은 고난을 겪었듯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도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모든 일이 형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처한 현실이 때로 우리를 격동시킬지라도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는 자세, 이것은 인간의 이성과 능력이 어느 때보다도 높게 평가되며 우상시되는 현대에 우리에게 가장 요구되는 신앙 자세라고 할 수 있다. 4월 22일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 (시편 65:4-9) 4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5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바다에 있는 자가 의지할 주께서 의를 따라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 6 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 7 바다의 설렘과 물결의 흔들림과 만민의 소요까지 진정하시나이다 ... 9 땅을 돌보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을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그들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 다윗이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권능과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적, 물질적 은총에 대해 감사하며 지은 이 시는 이스라엘의 초막절 같은 절기에 낭송되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은총은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으로 나눌 수 있다. 태양과 공기, 물, 사시사철의 변화와 그에 따른 수확 등은 전 인류가 공유하며 누리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이다. 죄를 용서하시고, 기도에 응답하시며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누리며 살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특별은총이다. 다윗은 자신이 누리는 특별한 은혜를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물론 일상생활 전체를 돌아볼 때 알게 모르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크고 풍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깨닫고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쁨으로 찬양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 자신은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를 얼마나 많이 깨닫고 있는가? 만일 그 충분한 이유를 깨닫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우리의 그릇된 신앙 태도 때문일 수 있다. 세상의 것들에 눈과 마음이 가려져있기 때문일 수 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주신다. 은혜를 은혜로 깨닫고 찬양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열려지기를 기도하자. 4월 23일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시편 84:5-12) 5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6 그들이 눈물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주나이다 7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 9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11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12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시편의 편집자는 시편 전체를 모세오경의 구조를 도입하여 5권으로 나누어 정리하였는데, 1권은 1-41편까지이며 창세기와 비교하여 창조주와 인간을 주제로 한 시편들로 구성된다. 2권은 42-72편으로 출애굽기와 비교하여 해방과 구속의 주제를 다루었고, 3권은 73편-89편으로 레위기와 비교하여 예배와 성소의 주제를 다루었고, 4권은 90-106편으로 민수기와 비교하여 순례길에 있는 인생을 주제로 하고 있다. 마지막 5권은 107-150편으로 신명기와 비교하여 말씀과 찬양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3권에 속하는 시편 84편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성전에 들어갈 때에 제사장이 부르던 노래이다. 이것을 기록한 시인은 주의 장막에 있기를 사모하며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낫다고 노래한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하루가 하나님 없이 천 날을 사는 것보다 귀중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성전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다고 고백하는데, 악인의 장막은 아무리 부요하고 안락해 보일지라도 결국은 사라져버리는 헛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삶의 여정에서 우리는 매일 무엇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그 선택의 기준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비록 외형적으로 볼품없이 낮고 초라해 보인다 할지라도 진정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곳,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을 선택하여 정직하게 행함으로써 우리에게 해와 방패가 되시며 은혜와 영광을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 안에서 살아가자. 4월 24일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시편 90:10-17)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13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14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15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16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17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모세의 기도 시편 90편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적 행동으로 인해 출애굽 1세대가 광야에서 진멸되리라는 하나님의 진노의 말씀이 있었을 때(민수기14:11-12) 민족의 지도자로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중보자 역할을 했던 모세가 지은 ‘민족애가’이다. 따라서 이 시는 성경에 수록된 시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모세는 파란만장한 인생 여정을 지나오면서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는 풀과 같이 짧은 시간을 살아가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달았다. 인간이 세상에서 생명을 누리며 오랜 세월을 사는 것 같으나 그 시간은 마치 날아가는 것 같고, 수고와 슬픔이 가득할 뿐임을 회상하며 인간이 진정으로 의지하고 섬겨야할 분은 하나님 한분이심을 교훈한다. 인생은 시작한 날이 있으면 반드시 끝낼 때가 있다. 시간적 유한한 삶을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야할지 깨닫는 지혜가 필요한데 모세는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 유한한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전능자이며 창조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참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얻게 해달라는 간구이다. 우리도 각자 인생의 어느 시점에 서 있는지, 앞으로 나아갈 길이 어디인지 볼 수 있는 지혜를 하나님께 구하자. ‘우리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라는 모세의 간구처럼 하나님이 우리의 수고와 헌신을 견고하게 세워주셔서 복된 인생이 되기를 기도하자. 4월 25일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시편 100:1-5) 1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2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3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4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전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5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감사와 찬양 시편 100편은 성전에서 감사제를 드릴 때 사용된 감사예배시인데 오늘 날에도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예배드릴 때 사용하고 있으며 회중과 성가대가 교창으로 부른다. 이 세상에서 살다 보면 과중한 일로 인한 육체적인 피로, 삶의 목적과 의미 상실, 해결하기 어려운 삶의 문제 등으로 인해 낙심과 절망에 빠질 때가 있다. 혹은 특별한 이유 없이 우울하고 자신 안에 갇혀 답답하고 무기력한 시간을 보낼 때도 있다. 원인이 무엇이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마음 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좋은 해결방법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감사와 찬양이다. 비록 감사와 찬양이 우러나지 않을지라도 잠시 나로부터 빠져나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돌보시 는 자연을 바라보며, 또 지금까지의 자신의 인생길을 돌아보며 감사한 일들을 찾아보자. 점차 감사한 일들이 떠오르며, 그동안 감사하지 못하고 스쳐 지나온 것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감사의 제목들을 주셨고, 앞으로 더욱 많은 감사할 일들을 주실 것이라는 소망이 생기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의 노래가 나오고, 낙심과 절망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생기며, 마음의 평안이 회복될 것이다. 하나님은 감사하며 찬송하는 이들의 영혼 가운데 임하신다. 오늘도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시며 인자와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는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송으로 나아가자! 4월 26일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시편103:1-15) 2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3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4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5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6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 ... 8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 12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15 인생은 그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하나님의 선하심 노년기에 이르러 자신의 지나온 생애를 돌아본 다윗은 자신에게 베푸신 모든 하나님의 은혜를 회상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다윗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하는 많은 시들을 썼고, 이것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도록 촉구하였다. 다윗을 포함한 시편 기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기억하며 찬양하였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이 기억하는 과거의 사건들이 모두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다. 조상들의 패역에 대해 솔직하게 지적하기도 했고, 그들의 패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겠다는 약속을 지킨 사실로 인해 기쁨과 감사를 표현하였다. 시편 103편은 과거의 질병과 압제, 죄악과 반역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놀랍게도 그 모든 부정적인 요소들을 선한 것으로 바꾸어주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알고 계시고 인정하시므로 우리의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베푸신다. 다윗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은 먼지뿐이며 그날이 풀과 같고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이 허무한 것이지만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워주시며, 좋은 것으로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어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해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오늘 하루도 아무런 은혜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은혜 베푸시는 선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자. 4월 27일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시편 139:1-10) 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다윗의 영적 비결 이스라엘 역사상 여호와 하나님은 다윗의 하나님이라고 불리기도 했을 만큼 다윗은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다윗이 하나님과 이렇게 밀접한 관계를 이룰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다윗이 지은 시편들은 그가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삶을 살려고 노력했음을 보여준다. 어디에나 계시며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인간을 지으셨고, 인간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는 삶을 살고자 하였다. 다윗은 또한 하나님이 자신을 귀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죽음의 위기를 모면한 후 ‘여호와께서 ... 나를 기뻐하심으로 구원하셨도다’라고 외치며,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행동과 습관, 행위와 혀의 말, 우리의 마음과 뜻을 다 알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이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게 했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했던 것처럼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피할 자도 숨을 자도 없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진실해야 하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나아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면서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지켜주심을 믿으며 다윗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삶을 살고자 노력하자. 4월 28일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시편 126:1-6) 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2 그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때에 뭇 나라 가운데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3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4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같이 돌려보내소서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큰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1999년 11월 영국 BBC 방송은 여론조사를 통해 ‘지난 1천년 동안의 최고의 탐험가 10명을 선정하였다. 그중에는 어니스트 섀클턴이라는 사람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는 얼핏 보면 실패한 탐험가였다. 그는 1914년 27명의 대원과 함께 세계 최초로 남극대륙을 횡단하기 위해 출발하였으나 목적지를 150Km 앞두고 부빙(물 위에 떠다니는 얼음덩어리)에 갇혀버렸고, 이후 배마저 부서진 상황에서 출항한지 18개월 만에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그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이유는 수많은 죽음의 고비들을 견디어 내며 27명의 대원을 한 명도 잃지 않고 함께 귀환했기 때문이다. 섀클턴은 그때를 회상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얼음산을 넘을 때 일행은 분명 세 명이었는데 난 마치 네 명인 것처럼 느꼈다. 이상하게 생각되어 동료들에게 물어보니 그들도 그랬다는 것이다.’ 섀클턴과 동료들은 위기의 순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분의 일하심을 느꼈던 것이다. 시편 126편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고국으로 귀환하는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그들은 이 일을 예상하거나 기대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심지어 불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고 고백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큰일을 행하셔서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대로 그들을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셨다. 하나님은 오늘 날 우리에게도 큰일을 행하신다. 어떤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을지라도 하나님을 소망하고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에게 반드시 기쁨으로 결실하는 날을 허락하신다. 4월 29일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자 (시편 112:1-6) 1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3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 4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 5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 6 그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억되리로다 삶의 베이스캠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 산 정상 8848m를 처음으로 등반한 사람은 1953년 에드먼드 힐러리 경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 오른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으나 이제는 세계의 많은 산악인들이 에베레스트 산을 등반하고 있다. 이것이 가능해진 이유는 장비나 기술면에서의 발전도 있지만 가장 큰 비밀은 베이스캠프에 있다. 에드먼드 힐러리가 등반할 당시는 해발 고도 3000-3500m에 베이스캠프를 세우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 위치가 훨씬 높아져 5000m 넘는 곳에 베이스캠프를 세운다. 이로 인해 베이스캠프를 출발하여 정상에 도달하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만일 실패하여 재도전을 해야 할 때도 빠른 시간 안에 재정비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이전보다 더 많은 이들이 에베레스트를 등정할 수 있게 되었다.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는 기반을 마련해주는 베이스캠프처럼 가정은 더 넓고 높은 삶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는 곳이다. 우리의 가정이 자리 잡아야할 곳은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계명을 즐거워하는 자에게는 후대에게 복을 내리시며, 부요와 재물로 그 집을 채우시며, 그 의가 영원하여 흑암 중에서도 빛이 일어나리라고 시편 기자는 말한다. 삶의 베이스캠프인 우리의 가정이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 안에 자리 잡게 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우리 가정의 자양분으로 삼아야 하겠다. 더 높은 곳을 향하는 우리의 여정이 가정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4월 30일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시편 150:1-6) 1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2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 3 나팔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4 소고 치고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5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6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 시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들로 가득 차 있다. 특히 시편 146편부터 150편까지의 다섯 편은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나는 ‘할렐루야시편’이고, 마지막 150편은 ‘대할렐루야시편(The Great Hallelujah)'이라고 부른다. 시편 150편은 여섯 절로 이루어진 짧은 시이지만 ‘찬양하라’는 표현이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의 할렐루야를 포함하여 열세 번이나 나온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여 함이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며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찬양은 노래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찬양한다는 말에는 칭찬한다, 그 훌륭함을 드러낸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과 그분의 전지전능하심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150편을 기록한 시편기자는 전심전력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할 것을 표현하기 위해 모든 악기를 동원한다. 나팔과 비파, 수금과 소고, 현악기와 퉁소, 오늘날의 심벌즈와 유사한 제금 등 연주할 수 있는 모든 악기에 더하여 호흡이 있는 모든 자마다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노래한다.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의 자세가 오늘날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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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림교회
2019년 3월 25일
In 365일 말씀묵상
사순절 제 1일 욥의 회개 (욥기 42:1-6)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2 주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재의 수요일 Aschermittwoch 오늘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Aschermittwoch/Ash Wednesday)이다. 사순절 동안 성도는 주님의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 먼저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신앙의 성장을 위해 영적으로 준비한다.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속죄일이라고도 함)에서 시작되어 성금요일에 끝난다. 성서에서 재는 슬픔과 죄에 대한 회개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지금도 재의 수요일에 일부 개신 교회와 가톨릭교회에서는 전년도 종려주일에 사용하였던 종려가지를 태워 만든 숯을 사용해 성도들의 이마에 십자가를 그려 넣으며 회개의 예식을 행한다.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욥1:1)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한 욥이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을 당하자 심한 고통 중에 괴로워하였다. 고난이 시작되었을 때 욥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굳게 지키었으나 고통이 점점 심해지자 하나님을 원망하며 자신의 출생을 저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질문 앞에서 인간의 연약함과 죄성을 깨닫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였다. 아랍어 ‘아바’(회개하다)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이는 욥이라는 이름은 ‘회개하는 자’라는 뜻이다. 우리가 때로 믿음에 굳건히 서있다고 스스로 생각할지라도, 세상 속에서 자신의 지식이나 노력, 성과를 자랑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 그 모든 것은 티끌만도 못하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순절을 시작하며 우리도 욥과 같이 스스로를 거두어들이는 겸손한 자세로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며 하나님께서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간구하자. 사순절 제 2일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더니 (마가복음 1:32-39) 32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34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3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서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사순절을 시작하며 예수님은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치유하랴, 귀신을 내어쫓으랴, 제자들을 가르치랴, 이곳저곳을 다니며 성전에서 설교하시랴 ... 쉴 새 없는 활동으로 가득 찬 일정을 보내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을 기록한 성경 말씀 가운데 ‘아주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일어나서 외딴 곳으로 나가셔서, 거기서 기도하고 계셨다’라는 말씀을 접한다.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사역의 비밀은 그 분이 아침 일찍, 새벽 동이 트기 전, 기도하러 가셨던 저 외딴 곳에 숨겨져 있다. 본질 상 하나님과 한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며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자신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행할 힘과 용기, 겸손함을 충전하셨다. 어딘가 외딴 곳이 없이 분주하게 달려가기만 하는 우리의 삶은 위험에 빠지기 쉽다. 침묵이나 경청함 없이 계속되는 말은 능력을 갖지 못하고 공허해진다. 침묵과 말 사이, 물러남과 참여함 사이, 거리를 유지하는 것과 가까이 다가가는 것 사이, 홀로 있는 것과 공동체 안에 있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밑바탕을 이룬다. 한 해를 시작한 후 우리는 마치 출발점을 출발한 육상선수들처럼 달려왔다. 사순절을 지내면서 빠르게 달리던 길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삶의 중심에서 한발 물러서서 우리의 달려가는 길의 방향과 목적이 바르게 설정되어 있는지 살펴보자.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이른 새벽 외딴 곳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자신이 있는지 점검해보자. 사순절 제 3일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요엘 2:12-17) 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14 주께서 혹시 마음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15 너희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라 사순절의 의미 회복 사순절을 의미하는 독일어 Fasten, Fastenzeit는 금식, 금식기간을 뜻한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신 것, 온 인류의 죄를 대신 갚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을 기억하고 성도들도 금식, 혹은 단식하면서 함께 그 고난에 참여하며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절기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 초기에는 사순절 기간 동안 금식을 매우 강조하였고 이를 엄격하게 시행하였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유럽에서는 사순절 금식절기가 시작되기 전에 실컷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며 즐기는 카니발이 생겨났는데, Carnival이란 단어는 '육식이여 안녕'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순절의 외형적인 준수가 아니라 내면적인 준수이다. 비록 40일 동안 금식을 하지는 않을지라도 이 기간 동안 세상적인 오락을 삼가고, 불우한 처지에 있는 이웃들을 돌아보며,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끊어내고자 애쓰는 시간으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 경건과 절제, 희생과 나눔, 성찰과 회복이 사순절의 진정한 의미이며, 나로부터 시작되는 사순절의 의미 회복은 나 자신 뿐 아니라 우리의 공동체를 변화시킨다. 요엘 선지자는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의 신앙 모습은 어떠한지 돌아보고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사순절을 지내며 진정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를 체험하자! 사순절 제 4일 예수님이 받으신 세 가지 시험 (마태복음 4:1-11)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말씀으로 돌아가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에서 사십 일을 금식하셨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다고 기록된 것을 볼 때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세 가지 차원의 시험을 겪으셨다. 첫 번째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시험이었다. 두 번째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는 정신적이고 명예적인 시험이었다. 세 번째는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는 영적인 시험이었다. 예수님은 모든 차원의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심으로써 이 세상에서 시험을 당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시험을 이길 수 있도록 본을 보여주셨다. 사탄은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것을 방해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고 유혹하며, 하나님의 길을 따르지 않고 각기 자기의 길로 가게 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한다. 예수님이 시험받으실 때에 말씀으로 시험을 이기신 것은 우리도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말씀을 붙들어야 하며,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형질이 강하고 단단하게 변화되어야 함을 가르쳐주신다. 사순절을 지내며 우리 각자는 신앙적으로 더 성숙해지기 위하여 각자 결심하고 목표한 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사탄의 시험으로 흔들릴 때 즉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말씀 안에 깊이 잠김으로써 시험을 이기고 오히려 신앙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은혜를 체험하자! 사순절 제 5일 변형되신 예수님 (마가복음 9:2-8)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3 그 옷에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7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8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예수님을 바라보자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그들 앞에서 본래적인 신적 형상으로 변화하셨고,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모세는 가장 위대한 선지자가 오실 것을 예언하였고(신18:15-19) 엘리야는 장차 메시야가 오실 것을 예언한 모든 선지자들을 대표한다. 예수님이 변형되신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은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야의 도래가 바로 예수님이 오심으로 성취되었음을 알려준다. 이 사실을 확증해주듯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에게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앞으로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의 고난을 마주하게 될 제자들은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봄으로써 이미 부활에 대해 알면서 십자가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사순절을 지내며 금식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고자 애쓰는 우리의 결심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들이 많이 있다. 매일 해야 할 일들이 파도처럼 밀려오는가하면 우리의 관심을 빼앗아갈 만큼 중요하게 생각되는 일들, 육신의 즐거움을 주는 일들이 우리의 우선순위를 바꾸어 놓는다. 이럴 때마다 변화산에서 자신의 본래적 모습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또한 그 영광의 자리를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멸시와 수치 가운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 기꺼이 헌신할 수 있는 것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을 바라보기 때문이며, 하나님 나라에서 참여하게 될 영광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사순절 제 6일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1 (마태복음 5:13-16)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리켜 세상의 소금이라고 부르심으로써 제자들에게 이 땅에서의 사명을 부여하셨다. 소금은 지상에서의 삶에 있어 필수적인 물질이다. 소금은 변하지 않으며, 부패를 방지하고 정화시키는 힘으로 여겨진다. 레위기 2:13에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물에서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고 기록하며 소금을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이라고 표현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너희는 소금이다’라고 선포하셨다. 주님이 제자로 부르신 그 부르심의 힘 속에서 이미 제자들은 소금의 존재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눈에 보이는 상징이었던 소금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감당해야 할 역할로 표현하셨다. 오늘날 소금으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인의 역할은 세상을 내적으로 변화시키며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고 정화시키는 영향력이라 할 수 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가치가 없듯이 그리스도인이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무가치한 그리스도인,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이 되고 말 것이다. 사순절을 지내며 우리 자신의 소금으로써의 정체성을 깊이 생각해보자. 소금의 존재가 귀하듯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하는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귀한 존재들임을 자각하고 이 세상에서 소금과 같이 맛을 내며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노력해야 하겠다. 사순절 제 7일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2 (마태복음 5:13-16)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부름 자체가 제자들을 빛으로 만들었으며, 빛이기 때문에 원하던 원하지 않던 더 이상 숨겨진 채로 있을 수 없게 되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가장 먼저 빛을 창조하셨다. 사도 요한은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라며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참 빛임을 선포하였다.(요1:9) 예수님은 이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제자들, 나아가 우리들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다. 빛은 선함과 순수함, 진실 그리고 거룩함의 상징이다. 어둠 속에서 선과 악은 똑같이 보이나 빛이 비치면 선과 악은 분명하게 구분된다. 소금이 내적인 성품의 변화라고 한다면 빛은 그리스도인들의 선한 행실을 통해 하나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외적인 간증이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사순절을 지내며 우리를 제자로 부르셔서 빛이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마음 깊이 새겨보자.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빛을 받아 생명력 있는 그 빛으로 세상을 밝게 비추는 제자의 삶, 어둠 가운데 있는 이들을 빛으로 인도하는 삶, 빛으로 어두움을 이기는 삶을 살아갈 것을 결단하고, 실천하고자 노력하자. 사순절 제 8일 겟세마네에서의 기도 (누가복음 22:39-46) 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40 그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41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예수님은 늘 하시던 대로 기도하러 감람산에 가셨고, 제자들도 따라 갔다. 십자가를 져야 하는 고통 스러운 과제 앞에서 예수님은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기까지 기도하시며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순종시키셨다. 겟세마네동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함께 기도할 제자가 필요했다.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으나 제자들은 주님의 요청에 함께하지 못했다. 피곤한 육신이 말을 듣지 않았고, 내적인 시험과 무기력함이 그들을 지배하였다.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일어나라 함께 가자’(마26:46)고 말씀하셨다. 사순절에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권고는 분명하다. 일어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가자는 것이다. 제자들은 십자가의 길에서 시험을 당하고 있었다. 주님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 기도함으로써 세상에서 다가오는 시험을 이기라고 하신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순종시키신 주님이 자신의 십자가를 지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과 함께 가야 한다. 함께 가는 길은 그냥 따라나서는 길이 아니다. 함께 가는 길에는 저마다 책임이 따른다. ‘함께 가자’는 말씀에는 또한 공동체의 위로와 용기도 들어있다. 함께 가면 슬픔과 두려움은 가벼워지고 기쁨과 사랑은 배가 된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같이 가자’고... 사순절 제 9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요한복음 12:20-26)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그들이 갈릴리 벳세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열매 맺는 죽음 명절에 예루살렘을 찾아온 헬라인 몇 명이 예수님을 뵙고자 청했다. 그들은 아마도 예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보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 지상에서의 명예와 권위를 얻고자 했던 것 같다.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고자 한다는 것을 전해들은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답을 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광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의미하는데,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영광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게 될 것이며, 이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 때문이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예수님도 한 알의 밀이 되어 죽을 것이며, 그로 인해 많은 이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므로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도 이와 같이 자신을 희생해서 많은 열매를 거두어야할 것을 가르쳐주셨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사람, 곧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됨을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을 만나고자 찾아온 헬라인들의 잘못된 의도에 응답하셨다. 사순절을 지내는 우리에게 주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이론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원하는 우리 모두가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하는 실제적인 말씀이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하며 실천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자. 사순절 제 10일 거룩한 산 제물 (로마서 12:1-3)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영적 예배로 변화되는 삶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자신의 죄를 대신 갚게 하기 위해 흠이 없는 짐승을 잡아서 죽은 예물을 드렸다. 죄 없는 수많은 짐승이 죄 있는 인간을 위해 흘린 피를 이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모든 인간들의 죄의 값을 치러주셨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려야 한다고 권면한다. 우리의 매일의 삶이 거룩하고 정결해져 하나님께 드려지는 영적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를 방해한다. 사도 바울의 시대나 지금이나 이 세상은 불의하고, 부패하고, 이기적이며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이들을 교묘하게 유혹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권면한다. 우리가 사는 세대에서 본받지 말아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사순절을 지내며 이 질문을 각자에게 하며 진지하게 답을 찾아보자.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마음의 무릎을 꿇고 자신의 내면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세상적인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것은 무엇인지 찾아서 내어버리고, 우리들 각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갈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로 변화되어 갈 것이다. 사순절 제 11일 나를 따라 오라 (마가복음 1:16-22)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21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제자직으로의 부르심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아 생활하던 어부들에게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마가복음 1장에는 ‘곧’이라는 단어가 7번이나 나온다. 마가는 복음서를 매우 간결한 문체로 기록하면서 곧, 즉시라는 단어들을 사용하여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어부들은 생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앞날이 어떻게 전개될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으나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하여 생업의 도구인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다. ‘나를 따라 오라’는 부르심에 대한 제자들의 응답은 말로만 하는 신앙고백이 아니라 순종하는 행동으로 나타났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제자직으로 부르신다. 주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것은 자신으로부터 나와 부르신 분의 삶의 목표와 방향을 향해 가는 것이다. 더 이상 자신의 과거의 경험이나 현재의 상황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부르신 분의 미래를 공유하며 나아가는 새로운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표현하였다. 사순절을 지내며 우리를 제자직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곧 순종하여 주님의 제자로서 새로운 존재로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하고, 성령께서 도와주시기를 간구하자. 사순절 제 12일 과부와 불의한 재판장 (누가복음 18:1-8) 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기도를 회복하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한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를 사용하셨다. 한 과부가 몹시 억울한 일을 당해 그 원한을 풀어달라고 자주 재판장을 찾아가 호소하였다. 재판장은 그러나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었고, 오히려 하나님조차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교만하고 무정한 사람이었다. 과부에 대한 동정심도 없었고, 약한 자의 억울함을 풀어주려는 정의감도 없었으나 단지 과부가 계속 자신을 번거롭게 하는 것이 싫어서 그의 원한을 풀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장도 자신이 번거롭게 되는 것이 싫어서 과부의 호소를 들어주는데 하물며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자녀들이 밤낮 부르짖는 것을 들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고 질문하며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믿음으로 기도해야 함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직접 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시고, 습관을 따라 이른 아침 기도하시는 기도의 본을 보여주셨고, 초대 교회 사도들과 성도들도 오로지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고 사도행전은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때로 형식적으로 기도하고, 때로는 간단히 기도하며 ‘이만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위안을 삼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께 전심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 사순절을 지내며 우리의 안일한 기도생활을 회개하고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는 기도를 회복하자! 사순절 제 13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마가복음 2:13-17) 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용서받은 죄인 갈릴리 해변을 지나가다가 어부인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은 그 후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레위는 그 말씀에 즉시 반응하여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 갔다. 레위는 - 아마도 예수님을 만나 그분을 따르게 된 것에 감격하여 - 자신의 집에 예수님을 모시고 제자들, 동료 세리들과 유대인들이 죄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초청하여 함께 식사를 하였다. 당시 세리(세관원)는 유대인들로부터 배척당하는 죄인이었다.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거둬서 점령국인 로마에 바칠 뿐 아니라 많은 부분을 떼어서 자신들이 착복했기 때문이었다. 유대교 지도자인 서기관들이 어떻게 예수님과 제자들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냐고 책망하자 예수님은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한 것이고, 자신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대답하셨다.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고 용기를 준다. 죄인인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직접 이 세상에 오셔서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우리를 불러주시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스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채로 살아갈지라도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용서받은 죄인이다. 사순절을 지내면서 나 같은 죄인까지도 불러서 제자로 삼으시고자 이 땅에 오셔서 고난당하신 주님의 은혜를 묵상하며 은혜에 보답하는 주님의 제자로 살아갈 것을 결단하자. 사순절 제 14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평강의 하나님 (빌립보서 4:6-8)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우리의 생각을 주 예수께 고정시키자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권면한다. 이 말을 쉽게 표현하면 ‘모든 생각을 덕 있는 것과 선한 것들과 옳은 것들에 집중시키고 고정시키라’는 뜻이다. 이것은 인생의 유한한 시간을 세상의 무익한 것들에 낭비하지 않고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바꾸어 가기 위해 오신 예수님께 삶의 무게중심을 두고, 그분을 따라 가는 것이다. 요한복음 14:1-14까지 믿으라는 말과 예수님을 안다는 말이 10회 이상 나온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 분을 제대로 알고 믿기를 원하시는 간절한 소망과 기대를 가지고 계신다. ‘믿으라’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시키고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와 사귐을 통해 친밀한 관계로 나아가라는 뜻이다.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이룬 사람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뢸 수 있게 되며,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고 평안하게 하시는 선순환의 작용이 일어난다. 사순절 세 번째 주간을 지내며 세상을 향한 우리의 초점을 주님께로 돌리자. 우리의 죄를 갚아주시 기 위해 주님이 대신 지신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자. 십자가에서 흘린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자. 사순절 제 15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누가복음 17:5-10)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7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순종과 겸손 누가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수평적 관계인 이웃과의 삶에 서, 그리고 수직적인 관계인 하나님과의 삶에서 가져야 할 덕목과 교훈들을 말씀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교훈들을 실천할 수 있도록 믿음의 분량을 더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큰 능력을 행할 수 있음을 말씀하시며 믿음의 질적인 면을 강조하셨다. 겨자씨는 매우 작지만 그 안에 생명력이 있어서 큰 나무로 성장하듯이 참된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작은 믿음으로도 큰 능력을 행할 수 있음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러한 믿음을 소유하고, 그러나 겸손하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해야 할 것을 종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주인을 충실하게 섬기는 종은 어떠한 보상이나 칭찬을 바라지 않고 자신이 맡은 일을 행한다. 주님의 제자들도 자신의 직분을 충실히 감당한 후 칭찬과 보상을 기대하기 보다는 다만 자신은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충실한 제자에게 요청하시는 것은 순종과 겸손이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빌2:6-8)하심으로 우리에게 섬김과 겸손의 본을 보여주셨다. 사순절을 지내며 하나님과 동등한 분임에도 불구하고 종의 모습으로 인생들을 섬기며 희생하신 주님의 삶, 주님의 헌신적 사랑을 우리도 닮아가기를 기도하며 실천하자. 사순절 제 16일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누가복음 14:7-11) 7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를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8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나님께서 높여주신다 성경을 읽다 보면 반복해서 나오는 주제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는 주제이다. 얻으려고 애쓰는 자는 잃게 하시고 버리는 자에게는 얻게 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원칙은 세속의 원칙을 뛰어넘는다. 예수님이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식사하러 들어가셨다. 식사에 초대된 손님들이 서로 상석에 앉으려고 하는 것을 보시고 비유를 통하여 겸손한 자세에 대해 가르치시며,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과 다르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고 높이고자 하며 섬기는 자리가 아닌 섬김을 받는 자리에 있고자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10:43-44)고 말씀하셨고, 예수님 자신도 섬김을 받기보다 도리어 섬기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스승을 본받고 따르는 사람을 제자라고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배우고, 그분이 행하신 일,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행하는 것이다. 사순절을 지내며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겸손하게 형제자매를 섬기는 삶을 실천해보자.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높여주실 것이다. 사순절 제 17일 깨끗함을 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 (누가복음 17:11-19)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 예수님 당시 나병환자들은 전염될 것을 염려하여 사람들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고, 떨어져 생활해야 했으며 매우 부정한 사람 내지는 죄인으로 인식되었다. 예수님을 만난 나병환자 열 명은 예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멀리 서서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고 외쳤다.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하는 예수님 말씀을 듣고 제사장에게 가던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놀랍게도 가는 도중 병이 나아 몸이 깨끗하게 되었고, 이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돌아가 감사드렸다. 예수님은 자신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하는 이 사람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셨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모두 예수님이 자신들의 병을 고쳐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제사장에게 가던 도중 병이 낫는 은혜를 입었다. 그러나 아홉 명은 병이 나았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지도 않은 채 각기 자기의 길을 갔고,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 만이 예수님께 돌아가 그 은혜에 감사드리며 영혼의 구원까지 받게 되었다. 사순절을 지내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얼마나 감사하며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행여 지나간 삶의 여정에서 감사하지 않고 지나친 것이 없는지 돌아보면서 잊었던 것까지 소급해서 감사드리자. 크고 작은 모든 은혜에 감사하며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하자. 사순절 제 18일 자기의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태복음 6:16-18)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위선적인 신앙인이 되지 말자 금식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죄를 회개하며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어주실 것을 믿는 믿음에서 나오는 신앙적 행위이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월요일과 목요일에 정기적으로 금식하였다. 그러나 이 들은 본래의 의미보다는 자신이 금식하고 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거나 슬픈 표정을 짓곤 하였다. 예수님은 이러한 위선적 행동을 책망하시며, 이들은 금식하는 수고에 대한 상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미 받았다고 말씀하신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행위가 아니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행할 때 하나님께서 갚아주신다는 것이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줄 때에도 예수님은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3-4)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작은 선행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유혹을 받는다. 오늘날 우리는 신앙의 선조들에 비해 너무나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바리새인의 위선적 행동을 책망할 자격도 없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위선적인 신앙인이 되지 않도록, 나아가 잘못된 경건주의에 흐르지 않도록 자신을 살펴야 하겠다. 하나님께 신실하고, 세상 사람들에 대해 진실한 생활태도를 지닐 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세상 사람들을 복음의 빛 가운데로 인도할 수 있다. 사순절 제 19일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믿음 (로마서 10:13-17)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16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의 성장을 원하는가 마틴 루터는 성경을 공부하는 방법을 사과 따는 것에 비유하여 말한 적이 있다. 사과를 딸 때 처음에는 사과나무를 흔들어서 잘 익은 사과들이 떨어지게 한다. 다음엔 큰 가지를 흔들고, 작은 가지들을 하나씩 흔들어 사과가 떨어지게 하고 마지막으로 잎사귀를 살피며 떨어지지 않은 사과를 따낸다. 이런 사과 따기 방법을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성경을 읽으라고 가르친다. ‘나무를 흔드는 것처럼 먼저 전체로서의 성경에 나타난 뜻을 찾으라. 이 때 성경을 읽되 다른 책을 읽는 것처럼 줄줄 읽어 나가면서 떨어지는 열매를 주우라. 그 다음 큰 가지를 흔드는 것처럼 성경 66권을 한 권씩 공부하라. 그리고 나서 작은 가지에 달린 사과를 따듯이 성경을 한 장 한 장 읽어 가면서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보화를 찾고, 잎사귀 하나하나를 걷으면서 사과를 찾듯이 단어 하나하나의 뜻을 음미하고 한 구절 한 구절 읽어 나가면서 하늘의 보화를 따내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며 그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성장하지 않는다. 말씀을 읽고 암송하며 묵상하고 실천하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이’ 삶 속에서 주님의 능력과 은혜를 누리며 살게 된다. 사순절을 지내며 분주한 일과를 잠시 뒤로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 안에서 세상 것과 바꿀 수 없는 보화를 발견하는 은혜, 믿음이 성장하는 은혜를 체험해보자. 사순절 제 20일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열왕기상 17:1-7) 1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2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3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4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5 그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6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냇물을 마셨으나 7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나의 그릿 시냇가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영적 암흑기였던 아합왕 시대에 활약한 선지자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징표로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한 후,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어 있으면서 까마귀가 물어다주는 음식을 먹고 시냇물을 마시며 지냈다. 하나님은 종종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그릿 시냇가에 숨으라고 말씀하실 때 그 음성을 듣고 그릿 시냇가로 가서 기도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다. 세상의 일들이 너무 바빠 홀로 기도할 시간을 갖지 못하고, 세상의 소리가 너무 커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병들어 있는 것이다. 빌 하이벨스목사님은 ‘너무 바빠서 기도합니다’라는 책을 통해 기도 없이 바쁘게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각성시킨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에서 주어지는 많은 일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감당하기 위해서 그릿 시냇가가 있어야 한다. 나무가 깊은 땅속에 오래 묻혀 있는 동안 새까만 석탄으로 변해 열을 내는 연료가 되듯이 우리가 깊은 곳에 숨어 하나님의 음성과 능력을 받아들일 때 영적인 능력을 얻을 수 있다. 사도 요한은 유배지인 밧모섬에서, 사도 바울은 아라비아 광야와 감옥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영적 능력으로 채움 받았고, 존 웨슬리목사님은 매일 아침 4시에 일어나 3시간 씩 기도하며 자신의 그릿 시냇가를 만들었다. 나의 그릿 시냇가는 어디인가? 사순절 제 21일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시편 37:3-11) 3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 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라 5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6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9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10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11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가 받는 복 시편기자는 우리의 길을 여호와께 맡길 때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라고 가르친다. 주님께 우리의 길을 위탁하는 것은 우리의 재능을 완전하게 사용하는 첫 번째 길이다. 우리가 만일 우리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맡긴다면 우리 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생수의 강 같이 흘러 넘치게 될 것이다.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조지 뮐러목사님은 영국 브리스톨에 고아원을 세우고, 1898년 93세의 일기로 소천하기까지 약 15만 명의 고아들을 기도로 양육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심을 보여주었다.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며 고아원 사역을 할 수 있도록 간구하던 중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 81:10)는 말씀에 힘입어 이 일을 시작하였다. 뮐러목사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며 믿음으로 기도하여 일생에 5만 번 이상의 기도 의 응답을 받았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자신을 의뢰하는 자들을 기꺼이, 넉넉히 도우시는 분이심을 고아원 사역을 통해 증거하였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생명줄'을 놓치는 것이라고 하며 고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매일 기도하였다. 우리의 말의 재능이나 지적인 능력, 가진 물질이 타인에 비해 보잘 것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이라도 하나님께 맡기기를 원하실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의 의를 빛 같이, 우리의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며, 자신을 의뢰하는 자가 받는 은혜를 우리를 통해 드러내실 것이다. 사순절 제 22일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오랠 때 (민수기 9:15-22) 15 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이 성막 곧 증거의 성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 위에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이르렀으되 16 항상 그러하여 낮에는 구름이 그것을 덮었고 밤이면 불 모양이 있었는데 17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행진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 18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쳤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들이 진영에 머물렀고 19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오랠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행진하지 아니하였으며 20 혹시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적을 때에도 그들이 다만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영에 머물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으며 ... 22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진영에 머물고 행진하지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행진하였으니 기다리게 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을 갈 때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며 낮이나 밤이나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않으셨다(출13:22). 애굽에서 나온 둘째 해 첫째 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성막을 완성하여 세웠을 때 성막 위에 구름이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였다. 하나님은 광야 길을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동하지 말고, 구름이 떠오를 때에는 이동하라고 명령하셨다.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는 날이 오랠 때 이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신앙의 연단을 받았다. 뜨거운 대낮의 태양열과 저녁의 추위, 광야의 척박함 등 끊임없이 괴롭히는 환경 속에서 언제 떠나야하는지 모른 채 머물러 있는 것은 광야를 이동해 가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지겨운 일이었을 것이다. 날마다 성막을 바라보며 성막 위에 머무른 구름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을 상상해보자. 답답하고 힘들어도 그들은 구름이 움직일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고, 이것을 통해 그들의 순종하는 신앙이 훈련되었다. 다윗은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시40:1)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기다리게 하신다. 견딜 수 없는 힘들고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나 응답이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을 앞서 가지 말자. 우리가 기다리고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완전한 시간에 우리를 진행하게 하실 것이다. 사순절 제 23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로마서 7:19-25)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않는 그것을 행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옛 사람과 새 사람의 갈등 우리는 마땅히 서 있어야 할 곳에 서 있지 못하는 갈등 속에 살고 있다. 되고 싶은 나와 되고 싶지 않은 나 사이의 갈등이 그것이다. 사도 바울은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행한다. 내 속에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 싸우고, 내 속에 있는 죄의 법이 나를 사로잡는다.’라고 고백한다. 서로 다른 자신이 자신 안에서 싸우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하며 애통해 한다. 이것은 비단 사도 바울의 고백일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실존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우리의 갈망이 죄의 길을 따르기 좋아하는 육신의 요구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질 때 우리의 신앙적 자아는 낙심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영적인 존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육신으로 사는 이 세상에서는 죄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간의 연약함과 죄성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과 육신의 죄의 법이 갈등하는 이 경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 계시다는 것이 우리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준다. 나와 나 사이에, 나와 하나님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실존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위하여, 내 편에 서 계신다. 나의 실존의 경계에 나를 위하여 서 계시며 나의 옛 사람과 새 사람이 갈등하며 싸울 때 새 사람이 이기도록 도우신다. 사순절 제 24일 말씀의 능력 (시편 19:7-14) 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10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11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12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3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14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유익 시편 19편은 하나님의 말씀의 유익을 1. 우리의 영혼을 치유하여 건강하게 하며 2. 우리를 지혜롭게 하며 3.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하며 4. 우리의 영혼을 밝게 하여 바르게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세상 사람들은 건강과 지혜, 재능과 즐거움을 구하며, 이것을 얻기 위해 부단히 애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성경말씀 속에서 얻을 수 있다. 나아가 영혼에 내재한 깊은 허물을 깨닫게 하고 그것을 내어버리게 함으로서 영혼을 건강하게 해주며, 세상을 육신의 눈으로만 보지 않고 영의 눈으로 보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깨닫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말씀을 읽는 사람들 속에서 성령이 일하셔서 하늘나라의 지혜와 능력을 채워주고, 하나님의 신비를 가르쳐준다. 사도 요한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책은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저 한 권의 책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가까이 하여 읽고 듣고 지키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복을 받게 한다. 누구든지 말씀이 주는 유익을 체험한 사람은 시편기자처럼 ‘내 입의 모든 말과 생각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것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된다. 말씀을 가까이하여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시려고 예비한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자. 사순절 제 25일 선한 목자 (요한복음 10:10-15)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두 가지 생명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생명이 있다. 육신적인 생명과 영적인 생명이 그것이다. 이 세상의 권세를 잡은 사탄은 도둑과 같이 부단히 영적 생명을 빼앗아 육신적인 생명으로 살게 하고, 멸망의 길로 가게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병약한 생명과 풍성한 활력을 가진 생명의 차이는 쉽게 알 수 있고, 자신의 육신이 건강한지 아닌지도 바로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영적인 생명이 건강한지 아닌지 쉽게 인식하지 못하거나 영적인 건강상태에 대해 무관심한 경우가 있다. 아이가 건강하게 잘 자라면 부모님의 마음이 기쁜 것처럼 우리의 영적 생명이 건강하게 자라가는 것은 하나님께 큰 기쁨이 될 것이다. 우리는 육신의 건강을 위해 매일 먹고 마시며 온갖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만 영적인 건강을 위해서는 그만큼 애쓰고 노력하지 않는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고백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너희는 영적이 아니고 육신적이다. 딱딱한 음식은 소화시키지 못하는 어린 아이처럼 복음의 깊은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책망한다. 바울의 책망이 바로 우리에게 하는 책망인 것을 깨닫고, 매일의 삶 속에서 기도하고 말씀을 가까이하면서 예수님과의 교제를 일과로 삼아보자. 양들의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풍성한 은혜와 생명을 넘치도록 부어주실 것이다. 풍성한 영적 생명을 누릴 때 우리의 육신적 생명도 더욱 건강하고 풍성해진다. 사순절 제 26일 달란트비유 (마태복음 25:14-30)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 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재능과 헌신 어떤 주인이 종들에게 각각의 재능대로 금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기고 타국에 갔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각각 그것을 가지고 장사를 하여 주인에게 받은 것만큼의 이익을 남겼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땅을 파고 그것을 감추어 두었다가 주인이 돌아왔을 때 그것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많이 받았다고 기뻐하기 보다는 받은 만큼 많은 것을 남겨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아마 적게 받은 것을 불평하며 그냥 묻어두었을지도 모른다. 오랜 후에 돌아온 주인은 다섯 달란트 남긴 종이나 두 달란트 남긴 종이나 똑같이 칭찬하였고, 한 달란트를 받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종을 악하고 게으르다고 책망하며 있는 것마저도 빼앗았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각각의 재능에 따라 맡길 만큼의 사명을 주셨다. 언젠가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우리들을 심판하실 때 예수님의 기준은 많이 남기고 적게 남기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 받은 만큼의 역할에 충실했는가가 될 것이다. 우리들에게 주신 재능, 사명이 큰 사람도 있고 적은 사람도 있다. 주어진 것을 최선을 다해 감당할 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칭찬받는 사람,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급이 있는 사람이 된다. 내게 주신 달란트(재능)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내게 주신 그 재능을 통해 내가 어떤 일을 할 것을 원하시는가?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주님께서 내게 주신 달란트, 내게 주신 과제를 소홀히 여기지 말고 잘 감당하여 칭찬받는 자녀가 되자. 사순절 제 27일 포도나무와 가지 (요한복음 15:1-5) 1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리스도인의 열매 세상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인생길에서 무엇인가를 성취하고, 무엇인가를 남기고자 한다. 성취와 소유를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은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인생들이 영적인 생명을 얻고, 그것을 더 풍성히 하기 위해서는 포도나무의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는 것같이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 우리가 머물러 있어야 함을 가르쳐주신다. 예수님의 생명력 있는 말씀이 가지인 우리의 영혼 속으로 흘러들어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포도나무 가지는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다. 열매를 많이 맺는 가지는 그리스도와의 생명력 있는 살아있는 관계를 통하여 많은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들을 뜻한다. 그리스도인이 맺는 열매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이 삶의 여정에서 이루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영혼을 구원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작게는 기도의 응답, 영혼의 평안, 일상에서 누리는 기쁨, 주님의 마음으로 주변에 베푸는 사랑 등일 것이다. 나아가 전 생애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그분의 정신을 실천하며, 그분을 드러내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맺어야 하는 열매이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예배하는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물러 있어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예수님께, 예수님의 말씀에 우리를 묶어 놓자. 사순절 제 28일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 13:3-8,13)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나아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정신적 사랑과 영적 사랑 사도 바울은 ‘내가 내 모든 재산을 나누어주고 (어떤 귀한 목적을 위하여)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내게 사랑(곧 그리스도의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나아가 믿음과 소망, 사랑은 항상 있어야 하는데 그 중에 제일인 것은 사랑이라고 강조한다. 믿음의 사람들은 정신적 사랑과 영적 사랑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정신적 사랑도 매우 귀하고 사람과의 관계 안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엄격히 말하자면 이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일 수 있다. 때로 그 사랑을 통하여 자신이 드러나기를 원하거나 자신에게 어떤 대가가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영적인 사랑은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단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분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나와 다른 사람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서 계시는 영적 사랑은 다른 사람을 나의 사랑으로 규정하거나, 강요하거나, 지배하려는 모든 시도로부터 다른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사랑을 의미한다. 각 사람은 자유인으로서,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받기를 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인간이 되셨고, 자신을 희생하셨고, 그를 위해 죄를 용서해주셨고, 그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음을 기억하자. 불완전하고 허물투성이인 우리를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있는 모습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해주셨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정신적 사랑에 더하여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본받아 영적인 사랑을 실천하자. 사순절 제 38일 고난 받는 종 (이사야 53:1-6)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을 갔거늘 여호와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도다 낮아지신 그리스도 선지자 이사야는 BC 700년 경 고난의 종으로 오실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예언하였다.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타락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형상을 드러내셨다. 영광의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죄와 죽음의 세상 한복판으로 자신을 던진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의 육신적 곤고함을 짊어진 모습으로,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고난과 죽음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가난하게 태어나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며 약자 편에 서는 낮아지신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하나님과 본질상 같은 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모습으로 낮아진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한다. 가장 높은 자리에서 가장 낮은 자리로 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직접 아들의 모습으로, 낮아진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다. 하나님의 형상을 그분의 기적과 능력, 영광에서만 찾는 사람은 이렇게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삶의 자리에 주님이 계시며 그 삶의 무게와 곤고함을 함께 해주시는 것을 기억하자. 임마누엘! 사순절 제 39일 양과 염소의 비유 (마 25:31-46)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 4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니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이웃 오늘 성경본문은 종말 비유의 결론에 해당한다. 양과 염소의 비유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 신실한 그리스도인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구분하여 각각 영생과 영벌에 들어가도록 심판하실 것인지 알려주신다. 누가 하나님 아버지께 복을 받아 창세부터 예비한 나라를 상속받을 것인가? 바로 서로 사랑하며 돌보는 성도들-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도움과 배려를 베푸는-이며 이들이 재림을 가장 잘 준비하는 것이다. 선행을 통해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을 믿음을 지닌 이들에게는 반드시 선한 행실이 뒤따른다. 마지막 심판 때에 예수님께서 자신을 굶주린 사람, 나그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과 동일시한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스도가 오늘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지 알게 된다. 우리들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마치 예수님을 대하는 것처럼 대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라고 소홀히 대하고 무시하는 것은 가난한 형제자매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사랑을 실천하라고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예수님을 거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오늘 나의 생활 가운데 예수님은 어떤 사람의 모습으로 내게 다가오셔서 관심과 사랑을 베풀기를 원하시는지 살펴보자. 나의 눈과 마음이 행여 세상적인 기준으로 형제자매를 판단하고 행동하지는 않는지 주의하자. 나의 행함이 위선자나 불신자들과는 어떻게 다른지 자신을 살펴보자. 사순절 제 40일 마지막 유월절 식사 (마 26:17-30) 17 무교절의 첫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8 이르시되 성 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19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 20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 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21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2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 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말함과 행함의 일치 유월절은 출애굽기 12장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것을 기념하며 지키는 절기이다. 유월절을 지키며 1주일간 유월절 음식과 함께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는 것이 무교절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대문 기둥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자의 죽음을 피했고, 양의 피를 바르지 않았던 애굽의 장자들은 모두 죽었다.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친히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으실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셨다. 그 옛날 애굽에서 잡았던 어린 양의 피는 죽음을 미루는 일시적인 효과를 가져왔으나 예수님의 피는 그분을 믿고 따르는 이들의 삶 속에 영원한 효과, 영생을 보장해주신다. 3년간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그분을 따르던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로 이미 마음에 작정하였으면서도 마음을 감추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았다. 사람들은 유다의 배신에 분노하고 비난한다. 그러나 주님께 헌신을 고백하는 우리들도 그것이 자신의 삶의 방식과 충돌할 때 쉽게 주님을 배신한다.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주님의 사랑을 배신하기도 하고, 불신으로 주님의 진리를 부인할 때도 있다. 때로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부인한다. 가룟 유다의 배신에 분노하는 나는 과연 하나님 앞에서 말함과 행함에 있어 일치하는가?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기 전에 나의 생각과 마음을 변화시켜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써 나의 말함과 행함이 일치하여 주님의 사랑을 부인하지 않고 주님의 은혜를 무가치하게 만들지 않는 삶이 되도록 오늘도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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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림교회
2019년 3월 25일
In 365일 말씀묵상
고난주간 제 1일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마가복음 11:12-14) 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 때가 아님이라 14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예수님의 책망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외치는 무리들의 환호 속에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육체로 이 세상에 계시는 마지막 주간의 활동을 하시며 십자가의 길을 준비하셨다. 다음 날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고 하시며 성전에서 일하는 이들의 부패와 타락, 불의한 이득 취함을 책망하셨다. 많은 일들로 지치고 시장해진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따서 드시기를 원했으나 나무에는 잎사귀만 있고 열매가 없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에게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그 나무에서 열매를 따먹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무화과 열매가 맺힐 때가 아니었으므로 열매가 없는 것은 당연하고, 나무의 잘못이 아니지만 주님이 필요로 하실 때에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성경에서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잎만 무성한 나무처럼 외형상 믿음이 있는 것 같으나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는 믿음 없는 유대인들을 책망하신 것이다. 고난주간을 지내며 성전이 된 우리의 영혼이 깨끗한지, 주님이 필요로 하실 때 주님 손에 들려 사용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열매 맺는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라는 예수님의 책망을 귀 기울여 듣자. 고난주간 제 2일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 (마태복음 26:6-1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8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10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 이 여자가 내 몸에 향우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거룩한 소비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음모를 꾸미고 있는 동안 한 이름 없는 여인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귀한 것,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린 것을 마태는 이어서 기록하고 있다. 죽이려는 음모와 그 죽음을 향유로 미리 경배하는 예언적인 모습이 대조를 이룬다.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은 진정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기에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을 망설임 없이 주님께 드릴 수 있었다.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향유는 매우 값비싼 것으로 어쩌면 이 여인이 가지고 있던 전 재산 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여인은 자신의 말할 수 없는 사랑을 주님께 표현하고자 기꺼이 전 재산을 소비하였다. 주님께 대한 성도의 헌신은 때로 주변의 반대와 조롱에 직면할 수 있다. 예수님께 대한 이 여인의 헌신은 즉각 제자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제자들은 마치 실용주의에 익숙한 우리들처럼 세상적인 계산방법으로 이 여인의 행동을 ‘허비’라고 표현하였다. 죽은 자에게 향유를 붓는 것은 유대의 관습이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 이 여인의 헌신을 통하여 미리 장례를 준비하였고, 이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고귀한 사역인 십자가의 죽음을 미리 준비한 여인이 되었다. 주님을 사랑하는 단 한 가지 이유로 행한 일이 성경에 기록되어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이 기억하고 기념하는 값진 일이 된 것이다. 제자들이 말한 허비가 아니라 주님의 죽으심을 준비하는 거룩한 소비가 되었다. 주님을 사랑하는 나의 마음은 얼마나 크고 간절한지, 나의 구주가 되신 주님을 위해 나는 어떤 거룩한 소비를 할 수 있을지 오늘 하루를 지내는 동안 생각해보자. 고난주간 제 3일 서로 발을 씻어 주라 (요한복음 13:12-17) 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섬김의 본 준비의 날이라고 불리는 고난주간 네 번째 날에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가까워오는 것을 아시고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셨다. 식사를 하시던 중 대야에 물을 가져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제자들도 이와 같이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시며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다. 유대인들은 더운 지방에 사는 까닭에 샌들같이 생긴 신발을 신고 다녔다. 외출에서 돌아온 후나 식사 전에 발을 씻는 것이 관습이었는데 당시 발을 씻겨 주는 것은 종들이 하던 일이었다. 예수님께서 종과 같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겸손의 본을 보여주셨고, 제자들도 서로 섬기는 겸손한 삶을 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은 직분을 임명 받을 때 온 몸을 씻었다. 하나님은 또한 물 대야를 준비하도록 명령하셔서 제사장들이 매일 손발을 씻는데 사용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물로 제자들의 먼지 묻은 발을 씻어주셨을 뿐 아니라 자신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씻어 주셨고, 매일 말씀의 물로 그의 교회, 성도들을 깨끗하게 씻어주신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말씀을 읽음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깨끗이 씻고,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주님이 행하신 일을 본받아 형제자매를 섬기는 삶을 살고자 애써야 하겠다. 고난주간 제 4일 겟세마네의 기도 (마태복음 26:36-46)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어야 하는 절대과제를 앞에 둔 예수님은 세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언덕에 기도하러 가셨다. 이 과제가 예수님께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는지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표현하셨고,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눅22:44)’될 만큼 간절히 기도하셨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모든 죄를 자신의 한 몸에 짊어져야 하는 예수님의 타는 심정에도 불구하고, 또한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겟세마네 언덕에 함께 올라간 3명의 수제자는 주님의 고통을 조금도 나누어지지 못한 채 육신의 연약함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깨어 기도하지 못하고 연약함을 핑계하며 잠들어 있는 우리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3명의 제자들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은 가능하다면 십자가의 고난을 짊어지지 않을 수 있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신다. 나의 기도가 바로 이렇게 변화되기를 소망하자. 나의 뜻이 아니고, 나의 원함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희망을 성취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모든 약속을 성취해가시기를 기도하자. 모든 유익한 것은 대가를 지불한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구원하시고자 가장 귀한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지불하셨다. 정말로 가치 있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값을 치룰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나는 가장 귀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하나님께 대한 헌신으로 어떤 대가를 치룰 준비가 되어 있는가? 고난주간 제 5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마태복음 27:32-44) 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33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라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35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36 거기 앉아 지키더라 37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38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구레네 사람 시몬 이 부분의 성경구절을 읽을 때마다 갖게 되는 의문이 있다. 예수님이 베푸신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수많은 사람들, 눈을 뜨게 된 소경, 귀신들렸다 고침 받은 이들, 죽었다가 살아난 이들, 고침 받은 중풍병자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모두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예수님은 십자가의 형벌을 받을만한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고 외치는 사람은 왜 단 한 사람도 없는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철저히 홀로 남겨져 십자가에서 옷을 다 벗긴 채 육신의 고통과 수치 뿐 아니라 온갖 저주와 모욕과 희롱을 당하고 계셨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이스라엘 밖에 살던 유대인으로 유월절 절기를 지키고자 예루살렘을 찾은 순례객이었다. 예수님이 더 이상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지 못할 상태가 되자 로마병정은 강제로 시몬을 끌어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하였다.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사람!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 털어 예수님을 도운 단 한 명의 사람이 되었다. 시몬이 대신 진 십자가는 수치가 아니라 주님의 고통을 가장 가까이서 체험하고 변화되는 축복이 되었다. 시몬의 행적은 더 이상 성경에 나타나지 않지만 그의 두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사도 바울이 로마서 16:13에서 특별히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고 하며 그의 어머니(시몬의 아내)를 자신의 어머니로 동일시한 것을 통해 이 가정이 이후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며 바울의 사역을 도왔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작은 행함이 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기꺼이 한 일이 아닐지라도 주님을 위해 한 작은 수고가 큰 축복으로 변화된다. 하물며 예수님을 사랑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선한 일을 행한다면 얼마나 큰 축복이 우리에게 임할 것인가! 고난주간 제6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 (마태복음 27:45-54) 45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 제 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우리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낮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온 땅에 어둠이 임했고,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 지진이 일어났으며,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무덤에서 나왔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찢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죄를 대신 갚아주시고,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무덤에서 나온 것처럼 언젠가 주님이 재림하실 때 성도들도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도 미리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오전 9시경 십자가에 달리셔서 오후 3시경 까지 참혹한 고통 가운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셨다. 모든 인생들을 구원하는 고귀한 사명을 이루시기 위해 아버지 하나님에게까지 버림받아야 했던 고통과 자신의 한 몸에 짊어져야 하는 온 인류의 죄의 무게가 예수님으로 하여금 이렇게 절규하게 만들었다. 공의의 하나님은 인류의 죄의 대가를 완전히 지불하기 위하여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실 수밖에 없었고,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하는 고통으로 인해 하나님 자신도 죽음을 경험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아들과 함께 직접 죽으셨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고 은혜인지! 그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도 이제 주님이 못 박히신 그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살자. 그리하여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고 고백하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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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림교회
2019년 3월 25일
In 365일 말씀묵상
부활절주간 제 1일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마태복음 28:1-10) 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달리려고 달음질할새 9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10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부활의 소망 낮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둠으로 덮였던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부활의 아침이 되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던 대로 처절한 죽음의 절망을 뚫고 온 인류를 비추는 새롭고 영원한 빛으로 부활하셨다. 얼마나 놀라운 반전이고 위대한 승리인가! 태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빛이 있으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빛이 있었다. 그 빛이 흑암을 몰아내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어두운 죄의 세력, 사망의 권세를 몰아내고 이 세상에 생명의 빛을 비추는 하나님의 또 하나의 창조사역이 되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신에 향유를 바르고자 이른 새벽 무덤을 찾은 두 여인은 천사로부터 주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부활의 첫 증인이 되는 영광과 함께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만나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주님을 찾고 헌신하는 이들은 지금도 부활의 주님을 가장 가까이서 만나고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리며, 부활의 증인으로 세움 받는 복을 받는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부활하셨기에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우리도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의 무게를 무거워하지 않고, 비록 현실의 삶이 고단할지라도 영혼의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매일 부활의 날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할렐루야! 예수님 부활하셨다!! 부활절주간 제 2일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마가복음 16:14-20) 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부활의 증인 십자가에 달려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를 이루어주신 예수님은 말씀하신 대로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부활의 소식이 너무 놀라워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으신 후 제자들이 앞으로 삶의 현장에서 감당해야 할 일들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게 할 것을 당부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순히 권유나 선택사항이 아니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시는 명령이다. 예수님의 선교명령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선포하고 확장시켜 세상의 모든 이들로 하여금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려는 것이고, 제자들로 하여금 주님의 대행자로써 주님의 일을 계속 이어가게 하시려는 것이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그 후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고 그분의 말씀을 전하다가 순교하는 고난도 기꺼이 감당하였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사랑 안에서 만나게 되는 고난, 그리스도인은 이제 그 고난 안에서 부활과 영생의 보화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보화를 볼 수 있게 되었기에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 나라를 위한 수고와 희생도 기꺼이 감당할 수 있게 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그러므로 이제 우리도 세상에 나아가 담대하게 전하자.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은혜에 대하여,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그리고 지금도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는 주님에 대하여 전하며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자! 부활절주간 제 3일 예수님의 선교명령 (마태복음 28:16-20) 16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가라 그리고 말하라! 부활하신 주님은 열한 제자들을 평소 활동의 주 무대였던 갈릴리에서 만나셨다. 제자들의 삶의 현장에서 그들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들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주님의 모든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게 할 것- 을 당부하셨다. 이것은 단순한 권유가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시는 명령이다. 주님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음을 선포하시면서 선교사명을 감당할 제자들에게도 모든 권세를 주실 것임을 알려주신다. 주님은 선교명령과 더불어 ‘세상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고, 이 약속은 실제로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인해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이 세상에 계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디에서, 어떻게 우리는 이에 대한 느낌을 갖는가? 이 세상의 어디에서, 그리고 나 자신의 삶 어디에서 하나님의 충만함을 느끼는가? 예수님은 그의 말씀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예수님의 말씀과 우리의 교제 속에서 우리는 그분의 가까이 계심을 느낀다. 말씀은 영적 존재들이 서로 접촉할 수 있는 가장 명백하고 분명한 수단이다. 그분의 말씀은 항상 동일하지만, 그럼에도 항상 다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우리의 삶을 충만한 영적 은혜로 이끌어주시고자 ‘기억하라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약속하신다. 우리는 모두가 선교사는 아니다. 그러나 각자 주님의 선교명령을 실천하는데 적용할 수 있는 은사를 받았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자신이 받은 은사를 통해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고자 할 때 우리는 주님께서 약속하신대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며 도우시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우리의 연약함을 탓하지 않으시고 선교의 도구로 쓰시는 은혜를 통해 또한 위로를 얻게 된다. 이제 세상에 나아가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하여,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그리고 지금도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는 주님에 대하여 말하자! 부활절주간 제 4일 세 개의 십자가 (누가복음 34:33-43)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 군인들도 희롱하며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세 가지 십자가 골고다 언덕에 세 개의 십자가가 세워졌다.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 좌우에 두 강도가 달린 십자가가 있었다.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는 예수님을 저주하며 죽어갔으나, 다른 한 강도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간청하였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39-43)는 예수님의 응답을 받아 생의 마지막 순간에 새 생명을 얻는 구원의 은혜를 입었다. 우리에게는 이제 세 가지 십자가가 있다. 첫째, 내 죄를 대신 갚아주기 위해 주님이 지신 십자가이다. 베드로처럼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2:24)라고 고백하는 신앙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 둘째, 나 자신을 못 박은 십자가이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갈2:20)고 고백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용서받고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자신의 옛사람, 육신에 속한 자아, 교만한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결단한다. 셋째, 자신이 지고 가야 할 십자가이다.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4)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믿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주님의 십자가에 함께 못 박지 않은 사람은 삶 가운데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감사함으로 지고 살아갈 수 없다. 자신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주님이 가신 길을 따르는 사람은 부활하신 주님이 계신 영광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된다. 부활절주간 제 5일 주님의 만찬 (마가복음 14:22-26) 22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라 하시고 23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24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6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니라 성찬예식의 의미 이스라엘이 그 옛날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빠져나온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유월절기가 되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셨다. 유월절에는 원래 어린 양을 잡아 고기를 불에 구워서, 누룩을 넣지 않고 구운 딱딱한 떡과 쓴 나물과 함께 먹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눈 유월절 식사에는 양고기는 없었고 떡과 포도주만 있었다. 예수님께서 이제 곧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양으로, 유월절 어린 양으로 내어주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떡과 잔을 나누실 때, 떡을 자신의 몸이라 하시고, 잔을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언약의 피라고 하시며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심으로 구약에서 예언된 대로 인류의 구원을 이루신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성찬예식을 행하라고 제정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날 교회에서 행하는 성찬예식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것이고, 그 죽음이 무엇을 위한 죽음이었는지 기억하는 것이다. 나아가 성만찬에 참여하는 개개인이 이제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공동체가 한 몸이 되며, 교회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그리스도로 인해 한 형제자매가 되었음을 고백하며 시인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낮추어 이 땅에 육체의 몸으로 오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찬예식 안에 현존하시며 우리와 한 몸을 이루시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새로운 창조를 이루신다. 이 얼마나 신비하고 놀라운 은혜인가! 성찬에 참여하면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주신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 우리도 자신을 다른 이에게 나누어줄 수 있기를 소망하자. 부활절기 제 6일 종말의 때 (마가복음 13:32-37) 32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3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34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35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36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깨어 있으라 기독교 역사 속에서 종종 종말의 때가 언제인지 알고자 하는 시도에서 비롯된 이단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비밀한 계획 가운데 있는 것을 인간의 유한한 지식으로 알아내고자 하여 종말의 때를 예측하며 사람들을 미혹하는 교만과 불신앙의 죄를 범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그날과 그때는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시며 주의하고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날과 그때가 언제인지 알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종과 문지기의 비유를 통해 알려주셨다. 어떤 사람이 타국으로 가면서 그 종들에게 각각 권한을 주어 사무를 보게 하였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였다.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알려주고 떠났더라면 종들은 아마 중간에 게으름을 부리며 잘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알지 못했으므로 종들은 항상 맡겨진 일들을 제대로 이행하고 있어야만 했다. 언젠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만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 그 날이 이르기까지 이 땅에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과제를 잘 감당하는 것 또한 우리 삶의 목적이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씀이라고 하시면서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셨다. 집을 지키는 문지기처럼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고, 자신의 믿음과 교회와 세상을 사단으로부터 지켜야하는 과제를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셨다. 내 영혼이 혹시 하나님께 대하여는 자고 있고, 세상에 대하여는 깨어있는 것이 아닌지 점검해보자. 주님의 명령대로 우리의 영혼이 깨어 있어서 이 땅에서의 삶을 하나님께 충성된 종으로써 살아갈 뿐 아니라, 주님의 재림과 하늘의 영광된 상급, 영원한 삶을 바라볼 수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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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림교회
2019년 3월 25일
In 365일 말씀묵상
5월 1일 인간이 되신 하나님 1 (요한복음1:1-5)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창조의 회복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세베대의 아들이며 야고보의 형제이다. 그는 요한복음과 요한 1,2,3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고, 그의 형제 야고보는 12제자 중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다. 요한은 복음서의 기록 목적을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고 밝히고 있다. 마태나 누가는 예수님의 계보를 기록하였으나 요한은 육신의 계보를 언급하지 않고 곧 바로 창조사역을 언급함으로써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하시고 동등하신 분이심을 알리고자 하였다. 창세기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선포로 시작하는 것처럼 요한복음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선포로 시작함으로써 예수님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시며 하나님과 함께 천지를 창조한 분이심을 알려준다. 참 빛 되신 예수님이 어두움 가운데 있는 이 세상에 오셨으나 정작 예수님이 창조한 인간들은 그 분이 누구이신지 알아보지 못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도록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 메시아의 오심이 예언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배척하였다. 태초에 하나님은 흙으로 인간을 만드시고 하나님의 영, 생기를 불어넣음으로써 생명이 있는 사람이 되게 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타락한 육신적 인생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영적 생명을 소생시키는 창조의 회복을 이루고자 직접 육신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요한이 창세기 1장을 연상시키는 문장으로 복음서를 시작한 것은 창조와 창조의 회복을 대비시키면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리고자 하는 의도였다. 5월 2일 인간이 되신 하나님 2 (요한복음 1:6-14)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새로운 인생 태초에 말씀으로 존재하신 예수님께서 인생들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 새로운 인생으로 거듭나게 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죄로 어두운 세상을 비추기 위해 오신 이 빛을 증언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고 믿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이었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된다.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새로운 탄생은 우리를 내면으로부터 변화되게 하여서 우리의 생각이나 주장, 소망, 동기 등을 새롭게 만든다. 자연적인 출생은 우리에게 육신의 생명을 주고, 가족 내에서의 한 구성원이 되게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새로운 탄생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 생명을 얻게 하고,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의 한 구성원이 되게 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게 한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세상을 보는 눈이 아닌 영적인 눈으로 우리 안에 함께 계시는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데 바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주님의 충만한데서 우리도 은혜와 진리를 풍성하게 받는 복을 누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도 요한이 우리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복음의 핵심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새 생명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어두움 가운데 있던 과거의 모습에서 변화되어 새로운 인생이 되었다. 오늘 하루도 새로운 인생으로 살게 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은혜 안에서, 참 빛이신 주님의 빛을 받아서 생명력 있는 삶을 살아가자. 5월 3일 세례 요한의 증언 (요한복음 1:19-28) 19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 대 21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24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라 25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28 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 세례 요한의 임무 오랫동안 메시아가 오실 것을 소망하며 기다리고 있던 유대인들은 요한이 나타나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외치자 혹시나 그가 기다리던 메시아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금 선지자를 보내주셨는가 의문을 가졌다. 예루살렘에서 존경받는 지도자였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세례 요한을 찾아와 ‘네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도 아니고 선지자 엘리야도 아니고 단지 주님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이며, 주님의 종이 되어 신발의 끈을 풀어주기에도 부족한 사람이라고 대답하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누가복음 7:26에서 세례 요한을 ‘선지자보다 나은 자니라’고 높여주셨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1)고 외치며 주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이 자신을 주님의 종이 되기에도 부족하다고 고백하는데, 하물며 우리가 주님의 일을 행할 때 모든 자존심과 자만심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지 않겠는가! 요한은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당시 에세네파 사람들(강경한 유대교 공동체의 한 분파)은 정결하게 할 목적으로 세례를 행했는데, 보통은 이방인들이 유대교인이 되고자 할 때에만 시행하였다. 바리새인이 요한에게 무슨 권한으로 세례를 주냐고 물은 것은 곧 하나님께 선택받은 유대인들을 마치 이방인처럼 다루어 세례를 주는 권한을 누가 주었느냐고 따지는 것이었다. 요한은 자신은 단지 죄를 회개하는 상징으로써 물로 세례를 주지만, 진정으로 죄를 사하여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뿐이신데, 그 분이 이미 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계신다고 증언하였다.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그 분의 길을 예비하다가 순교하였다. 초대 교회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증언하다가 순교하였다. 오늘 우리는 주님을 증거하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하여 나의 삶의 자리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자. 5월 4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요한복음 1:29-33)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32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나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하는가? 요한이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깨끗하게 씻음을 받아 가까이 온 천국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나아가 요한은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를 세상에 드러내어 확인시켜주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하늘로부터 예수님께 임했고,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심을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표시가 되었다. 물세례는 자신의 죄성에 대한 깨달음과 회개를 통해 죄로부터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할 것을 결단하는 것이고, 성령세례는 죄인인 인간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거듭나는 중생을 경험하게 한다. 성전에서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어린 양을 희생 제물로 드렸다.(출29:38-42) 이사야는 하나님의 종, 메시야가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다고 예언하였다.(사53:7) 구약의 제사에서는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어린 양의 생명이 희생되어야만 했는데, 하나님은 이제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실 것을 결심하시고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같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심으로써 우리의 죄의 값을 지불해주신 것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하게 증언한다. 우리도 오늘 하루의 삶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갚아주셔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음을 고백하고, 예수님의 은혜로 얻은 새 생명을 누리며 전하며 살아가기를 소망하자. 5월 5일 예수님을 따른 첫 번째 제자들 (요한복음 1:35-42)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예수님의 이름들 세레 요한이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언하자 이 말을 들은 요한의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랐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첫 번째 제자가 되었는데 한 명은 안드레,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아마도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 오는 이들을 보시고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셨다. 무엇을 구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은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무엇을 바라고 기대하고 요구하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디 계시는지 물었고, 예수님은 와서 보라고 대답하셨다. 함께 예수님이 거처하시는 곳에 가서 그 날 예수님과 함께 거하며 그분이 누구신지 알게 된 두 사람은 예수님을 랍비라고 호칭하던 것에서 변화하여 메시야라고 부르게 되었고, 다른 이들에게 메시야를 만났다고 증언하였다.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 등 여러 이름으로 호칭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을 점점 더 알아갈수록 얼마나 귀하신 분인가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지 불과 얼마 되지 않아 메시야라고 고백했던 제자들은 3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예수님과 그분의 사역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믿음은 입술을 통해서 쉽게 고백될 수 있으나 주님께 대한 깊은 신뢰와 존경, 사랑은 우리가 믿음으로 살 때에 비로소 성장할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와서 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로 가는 것이 믿음의 출발이다. 내 자리를 고집하고 예수님을 내가 있는 자리로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것, 내 자리에서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믿음의 출발이다. 하나님의 어린 양, 메시야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기 위해 우리의 발걸음을 그분께로 향하자. 5월 6일 가나의 혼례 (요한복음 2:1-11) 1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이적을 행하시는 목적 예수님이 행하신 거의 모든 이적은 – 눈 먼 자가 다시 보게 되고, 중풍병자가 걷게 되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등 – 퇴락한 창조의 회복이며 하나님의 능력의 실증이었다. 이적을 행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자연을 초월하는 자신의 힘을 드러내 보였고, 그가 자신의 사역 – 다른 이들을 돕고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시며 사람들과 개별적인 관계를 이루어가는 – 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지 알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며 첫 번째 행하신 이적이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게 하신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켜 맛을 내게 하고, 결혼 잔치를 계속 이어갈 수 있게 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죄 가운데 있는 인생들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것임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지자 마리아는 자기 아들 예수가 이 어려움이 해결될 수 있도록 도와서 어떻게든 포도주를 구할 수 있기를 바랐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대답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예수님께서 무엇을 할지 몰랐지만 그가 분명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인들에게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든지 순종하라고 일러두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자신의 상황이 낙심되는 것일지라도 예수님께서 가장 좋은 길로 행하실 것이라는 신뢰를 잃지 말아야 한다. 마리아와 하인들은 어떤 일을 행하시는 주님의 방법에 순종하였다. 우리의 문제를 주님께 가져가면 그분이 그 문제들을 어떻게 처리하실지 알게 될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실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님을 신뢰하고 순종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최선의 결과를 허락하신다. 5월 7일 예수께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시다 (요한복음 2:13-22)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예배의 본질 모든 유대인 남자들에게는 해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월절 예식에 참석해야 하는 종교적 의무가 있었다. 유월절 기간 동안 성전 주변은 각처에서 몰려온 수많은 방문객들로 붐볐다. 종교지도자들은 ‘유대인의 뜰’이라 불리는 곳에 상인들이 장사판을 차릴 수 있도록 허용해줌으로써 성전 주변의 혼잡을 가중시켰다. 장사판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찾는 방문객들의 예배의 편의를 돕고, 성전 수리를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방편으로 시작되었지만 점차 ‘유대인의 뜰’은 상인들로 가득 차 순례자들이 예배드릴 곳을 찾기 어려워지고,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게 되었다. 예배를 위해 원근 각처에서 온 방문객들을 이기적으로 이용한 상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분노하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스룹바벨이 BC 500년경에 지은 것인데 헤롯왕이 BC20년경부터 좀 더 크고 멋있게 만들고자 46년 동안이나 개축하는 중이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장엄한 건축물을 무너뜨릴 수 있으며, 또한 3일 만에 다시 세울 수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 매우 흥분하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돌로 만들어진 이 성전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성전되신 예수님의 육신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고, 예수님이 성전보다 크고 위대하신 분이심을 인식하지 못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후에야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한 것인지 깨달았다. 우리도 때로 예배의 주체이시고 예배를 온전히 받으셔야 할 분이 주님이시라는 본질을 잊고 화려한 교회 건물, 계속 이어지는 행사, 교회 프로그램 등 부차적인 것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지나 않은지, 그래서 주님께서 분노하시게 행동하고 있지 않은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예배를 살펴보아야 하겠다. 5월 8일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 온 니고데모1 (요한복음 3:1-8) 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한 밤중의 만남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고 산헤드린이라 불리는 공의회의 의원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종종 그들의 위선에 대해 비판하였던 종교지도자 그룹이었다.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강한 분노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예수님이 그들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그들의 주장(견해)을 문제 삼았기 때문이었다. 명망 있는 지도자였던 니고데모는 다른 바리새인들과 달리 예수님께는 다른 이에게 없는 무엇인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그것을 알고자 하여 예수님을 찾아왔다. 다른 사람들의 평판에 대해 스스로 확인해보고자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방문을 다른 바리새인들이 알게 되면 문제가 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여 비난을 피하고자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갔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칭하였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분이심을 시인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구원의 진리에 관해 가르쳐주셨다. 율법을 지키는 것을 신앙생활의 최우선으로 삼으며 선한 행실을 강조하고 가르쳐 온 니고데모는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나 놀랍고, 이해할 수 없어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진정 메시아이심을 확신하게 된 니고데모는 그 후 예수님을 방어하기 위한 발언을 용기있게 할 수 있었다.(요7:50-51) 니고데모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스스로 직접 경험해야 한다. 이것은 다른 이들이 나를 위해 대신 해줄 수 없다. 예수님이 진실로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스스로 경험하고 믿게 되면 우리도 그분을 위해 일하고, 그분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된다. 5월 9일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 온 니고데모 2 (요한복음 3:9-17)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6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복음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지나던 중 길이 험하고 힘이 들자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며 심하게 불평하였다. 하나님은 원망하며 불평하는 그들을 징계하기 위하여 불뱀을 보내셨고, 불뱀에 물려 많은 사람이 죽게 되었다.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놋으로 불뱀의 모양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놓고 그것을 쳐다보면 나을 것이라고 살 길을 알려주셨다. (민21:4-9)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을 가지고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면 불뱀에 물렸을지라도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다. 죽느냐 사느냐 기로에 선 이들에게는 너무나 간단한 방법이었다. 요한복음 3장16절에는 복음의 전체 내용이 압축되어 있다. 당신이 만일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자기희생을 기꺼이 감수할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시기에 자신이 지불할 수 있는 최대의 가치인 그의 아들의 생명을 지불하는 희생을 감수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지불하심으로서 우리의 죄를 대신 갚아주셨고, 값을 치루고 사신 새 생명을 우리에게 제공하셨다.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죄로 인해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기 위한 희생이었다. 누구든지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새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을 영원히 누리게 된다는 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다.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게 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장대에 매달은 놋뱀을 바라보기만 하면 죽지 않고 살아난 것처럼 죄로 인해 죽게 된 인생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영혼이 살아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의 하나님이 인생들을 위하여 열어놓으신, 하나님은 최고의 희생을 치루셨지만 우리 인간들은 너무나 쉽게 단번에 얻을 수 있는 구원의 길이다. 5월 10일 예수님을 증거하는 세례 요한 (요한복음 3:22-30) 22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에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26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자신을 누구냐고 묻는 이들에게 요1:23에서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소개한 세례 요한은 자신의 직무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요한의 사역의 목적은 예수님을 알리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음을 알리고, 그 분이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실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몰려와 회개하며 세례를 받던 많은 이들이 예수님께로 몰려갈 때 요한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분명히 알았다. 한 인간으로서의 요한은 잠시 허탈한 마음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분 앞에, 그 분의 길을 준비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사람이며, 이 사실을 그의 제자들이 증언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요한은 예수님을 신부를 취하는 신랑이라고 했고, 자신은 신랑으로 인해 기뻐하는 자라고 하였다. 요한이 예수님은 점점 번영해야 하고 자신은 점점 쇠퇴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보기 드문 겸손이다. 때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보다 자신의 사역의 성공을 더 마음에 두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다. 다른 이들이 영광을 받게 되면 그들을 부러워하게 되거나, 그들과 같은 재능이나 지위를 갖고 싶은 욕망이 생길 때가 있다. 어떠한 경우라도 하나님 나라보다 자신의 성취에 더 마음을 두지 않도록 주의하자. 우리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그 분의 사역을 이 땅에서 끝까지 이루어 가는 것임을 잊지 말자. 5월 11일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 1 (요한복음 4:5-15)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시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의도적인 만남 예수님은 유다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기 위해 사마리아를 통과하셨다. 당시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겨 우회하여 지나가던 사마리아 지역을 일부러 통과하시며 그곳에서 부끄러운 과거를 가진 한 여인을 만나주셨다.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간 사이에 잠시 우물곁에 앉아 쉬고 있던 예수님은 낮 시간에 물을 길러 온 한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며 대화를 시작하셨다. 뜨거운 한 낮에 물을 길러 나온 여인은 동네에 사는 다른 여인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사람이 없는 한낮에 물을 길러 왔다. 예수님은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자각하게 할 뿐 아니라 마셔도 다시 목마른 세상이 주는 물과 달리 영적 기갈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시는 생수의 공급자이신 주님을 알게 하셨다. 사마리아 땅 수가 성 우물곁에서 주님을 만난 여인은 앞 장의 니고데모와 대조된다. 니고데모는 정통 바리새인으로 산헤드린 공회원이었고, 주위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으나 이 여인은 비천하기 짝이 없는 사마리아 여인으로 남몰래 물을 길으러 다녀야 할 정도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던 여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엄청난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두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동일하게 구원의 진리를 알려주셨다. 예수님은 오늘도 구원의 진리를 알려주시고자 사람들을 만나주신다. 단지 이제는 물 길러 온 여인과 같이 육신적으로 만나주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 갈급함을 해소하고자 갈망하는 이들을 주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만나주신다. 오늘 우리도 우리의 영적 갈급함을 채워주시는 살아 있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성경을 손에 들자. 5월 12일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 2 (요한복음 4:19-26)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예수님과 대화하던 여인은 남편을 다섯 명이나 두었던 외적인 모습과는 다르게 예배를 올바르게 드리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었다. 당시 유대인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서로 분쟁하고 배척하였다. 이들은 예배의 장소가 중요한 본질이라고 믿었다. 예수님을 선지자로 생각한 이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이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를 예수님께 질문하였다. 예수님은 예배를 드리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즉 성령의 도우심으로 진리이신 예수님 안에서 예배드려야 하며, 이러한 예배자를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을 여인에게 알려주셨다. 예배는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예배의 본질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예배는 만남의 예배이다. 그러므로 모세에게 성막을 지을 것을 지시하실 때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출 25:22)라고 말씀하시며 예배를 통해 우리를 만나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만남이 없는 형식적인 예배는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예배, 성전 마당만 밟고 가는 헛된 예배가 된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진리이신 예수님 안에서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룰 수 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혹시라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외형적인 것이 아닌지 생각해보자. 영이신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는지,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진정 어떤 분이신지,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기억하며 예배드리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우리의 예배를 점검하여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자. 5월 13일 영적인 수확에 대해 말씀하시는 예수님 (요한복음 4:27-38) 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32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35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38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영적 자양분 제자들이 마을에 들어가 예수님과 함께 먹을 음식을 사가지고 와서 보니 예수님은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고 계셨다. 당시 유대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무시하여 유대인 남자는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는 물론 가까이 하지도 않는 것이 전통이었다. 제자들이 사온 음식을 예수님께 드리며 드시라고 하였으나 예수님은 자신에게는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을 보내신 이, 곧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주님의 양식, 영적 자양분이었다. 음식이 몸을 건강하게 하듯이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것이 영을 건강하게 하는 자양분이 됨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시고자 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신앙의 추수는 오늘 우리의 가장 소중하고 가장 긴급한 양식이 되어야 하겠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고 가꾸고,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수고의 시간들이 있다. 수고의 시간도 성도의 사명이고 영혼의 추수도 성도의 사명이다. 의도적으로 사마리아에 들러 한 여인에게 구원의 진리를 알려주시고, 그 영혼을 구원해주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는 육신의 양식과 함께 먹어야 할 영혼의 양식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즉 전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임을 분명하게 가르쳐주셨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받는 것에서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무엇인가 행할 때 우리의 영적 자양분을 공급받게 된다. 그러므로 아직 때가 아니라고 미루지 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혼의 추수에 참여하여 영적 자양분을 공급받고 추수의 기쁨을 누리자. 5월 14일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증언하다 (요한복음 4:28-30,39-42)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 39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변화된 한 사람 진정한 예배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으로부터 예배드리는 곳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듣고 한걸음 더 나아가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을 표현하였다.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여인이 기다리는 메시야이심을 알려주셨다. 삶에 지치고 영적으로 갈급하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되고 새 생명을 얻는 은혜를 입었다. 너무 감격한 나머지 물 길러 왔던 자신의 목적도 잊어버린 채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들어가 자신이 겪은 일을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던 여자의 말, 자신들이 무시하고 멸시하던 여인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과 마주치기를 꺼려 피해 다니던 그녀가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감격과 기쁨, 놀라움을 전하자 동네 사람들도 와서 보라(4:29)는 그녀의 말에 이끌려 예수님께로 나아왔다. 예수님께서 그 마을에 이틀을 머무시며 말씀을 전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졌고, 동네 사람들은 이제 그 여인의 전한 말 때문이 아니라 직접 듣고 보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고 고백하였다. 예수님을 만난 한 여인으로 말미암아 그 동네의 수많은 사람들이 변화되었다. 부정하다고 무시당하며 고립되어 있던 사마리아를 찾아오신 예수님의 은혜를 통하여, 주님을 만남으로 변화된 한 여인을 통하여 사마리아 땅에 복음이 전해졌다. 바로 이 여인처럼 변화된 한 사람이 중요하다. 나 한 사람의 변화를 통하여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고, 거듭남의 은혜가 퍼져나가기를 소망하자. 5월 15일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신 예수님 (요한복음 4:46-54) 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49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3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왕의 신하의 믿음 요한복음 1장에서 태초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신 성자 예수님이 죄로 어두워진 세상을 비추고 구원하는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심을 알려준 후 2장에서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이적을 베풀어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나타내셨고, 성전을 깨끗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전의 참된 의미를 깨우쳐주셨다. 3장에서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거듭나야 함을 말씀하시고 4장에서는 사마리아에서 만난 한 여인에게 진정한 예배에 대하여 가르쳐주셨다. 오늘의 말씀에 등장하는 신하는 헤롯 왕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왔을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는 예수님을 능가하는 세상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찾아가 아들을 고쳐달라고 간청하였다. 이 신하는 예수님이 아들을 낫게 해주실 수 있다고 믿었고, ‘가라 아들이 살아 있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집으로 돌아감으로써 그의 믿음을 나타내 보였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믿는다고 말하는 것과 동일하게 행동해야 한다. 왕의 신하의 믿음이 어떻게 자라갔는지에 한번 주의를 기울여보라. 그는 먼저 예수님께 자기의 아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할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보지 못했으나 아들이 살았다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 믿음에 따라 행동하였다. 예수님의 이적을 경험한 그와 그의 모든 가족은 예수님을 온전히 믿게 되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우리가 그것을 사용할 때 믿음이 성장한다. 오늘 우리도 믿음의 성장을 위해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을 제대로 사용하며 살아가자. 5월 16일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1 (요한복음 5:1-9)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 이 일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것 중 예수님께서 세 번째 행하신 이적이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일어난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이적은 구원이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말씀에 순종함으로 말미암는 것을 알려준다.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신 일은 구원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짐을, 믿고 의심하지 않을 때 이루어짐을 보여준다. 38년 병자를 고쳐주신 세 번째 이적은 구원이 은혜로 말미암음을 보여준다.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예루살렘 양문 곁 베데스다 못 가에 많은 병자들이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곳에서 38년이나 병을 앓고 있던 한 사람을 주목하시고 그 병자에게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고 정확하게 물으셨다. 병든 채로 38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낫고자 하는 의지도 상실한 그에게 그의 문제는 삶의 방식이 되어 버렸다. 그 곳에는 많은 병자들이 있었고, 그가 결코 다른 병자들보다 더 혜택을 받을만하지 않았으나 예수님은 그를 주목하시고 고쳐주셨다. 예수님의 은혜가 그에게 임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함으로 이루어지는 즉각적인 은혜, 이것이 바로 구원의 상징이다. 우리의 내면은 어떠한지 살펴보자. 내면의 쓴 뿌리를 제거하지 못하고 체념하며 적응한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가 스스로 열등감 속에 갇혀 있을지라도, 오랜 내적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을지라도, 은혜 받을만한 사람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깊은 곤경을 만나주신다. 그러므로 어떤 큰 문제나 위기가 있을 때에라도 낙심하지 말고 우리를 만나주시고 은혜로 구원해주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자. 그분이 우리의 필요에 응답하시고 고쳐주신다. 5월 17일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2 (요한복음 5:9-15) 9 ... 이 날은 안식일이니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12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치신 이는 예수라 하니라 은혜의 집 베데스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양문 곁 베데스다 못 가에서 38년이나 중풍병으로 인해 곤고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한 병자를 말씀으로 고쳐주셨다. 병 고침을 받은 것 자체도 놀라운 기적이었으나 예수님은 이제 그에게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주님의 은혜, 능력을 체험한 사람으로서 구원받은 건강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육신의 질병을 고쳐주시는 것은 영혼의 구원을 받도록 이끌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육신의 치유는 영혼의 치유를 위한 수단이자 방법이었다. 베데스다는 은혜의 집, 긍휼의 집이라는 뜻이다. 양문은 성전에서 희생제사의 제물로 드려질 양을 데리고 들어가는 문이었다.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 제물, 곧 어린 양이 되셔서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그 희생의 은혜로 인해 인생들을 구원해주실 것을 정확히 묘사해주는 사건이었다. 베데스다 못 가에 있는 병자들의 모습은 오늘날 영적인 죄인들의 모습과 흡사하다.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 은혜가 임하는 곳에 있기만 하면 나음을 받을 수 있는데, 그 자리에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우리도 이러한 처지에 있었는데,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영적으로 치유된 건강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이 땅에서의 실제의 삶에서는 아직도 영적으로, 육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모습이 있다. 주님의 도우시는 은혜로, 성령님께서 우리를 깨우쳐주시고, 이끌어주셔서 연약한 모습들, 온전치 못한 점들이 고쳐지고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간구하고 소망하자. 5월 18일 아들의 권한 (요한복음 5:24-29)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영원한 삶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은 유대인의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규정을 어겼을 뿐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표현하심으로써 유대인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드셨다. 유대인들의 분노 앞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자신의 말을 듣고 믿는 자는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될 것을 말씀해주셨다.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의 몸으로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인생들에게 영원한 생명, 영적인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자신의 원래적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세상에서 육신적으로만 살다가 죽음을 맞고, 심판의 자리에 서게 될 인생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알게 하시고, 죄를 용서받고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셨다. 우리를 살리려 오신 예수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 대신 죽어주심으로써 예수님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때는 바로 지금이다. 모든 인생들 앞에는 죽음의 길과 삶의 길이 있는데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생명을 자신 속에 받아들이는 사람은 두 갈래 길 중 생명의 길을 가게 되며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살게 된다. 우리는 이미 생명의 길을 선택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오늘 하루도 예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이 땅에서 미리 하늘나라의 영원한 삶을 누리며 살아가자. 5월 19일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떡 (요한복음 6:22-29) 22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서 있던 무리가 배 한 척 외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23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께서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곳에 가까이 왔더라) 24 무리가 거기서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치신 자니라 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하나님의 일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며 말씀을 듣고 배우던 수많은 무리를 한 어린 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이시는 이적을 베푸셨다. 이적을 통하여 배불리 먹은 무리는 예수님이 배불리 먹게 하신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단순히 육신의 양식을 공급해주시는 예수님을 다시 찾았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적인 갈급함을 채우기 보다는 육신적이고 일시적인 이익 때문에, 이기적인 목적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나무라시면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드려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예수님의 답변은 매우 간결하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행하는 어떤 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를 온전히 믿는 데에서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우리의 생명이 양식이 되시기 위해 오셨다. 육신의 양식은 먹어도 다시 배고프지만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을 배부르게 하시고 부요케 하신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고 받아들이고, 그로 인해 생명의 부요함을 얻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다. 그러므로 지극히 유한하고 미약한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행하고자 하는 교만함과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 하나님이 보내신 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는 하나님의 일을 하자! 5월 20일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떡 2 (요한복음 6:30-40) 30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쫒지 아니하리라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영적인 배고픔 육신의 배고픔은 음식을 먹으면 해소되고 육신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게 되듯이, 영적인 배고픔은 예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통해 해소되고 영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왜 자신을 떡으로 표현하셨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근거이다. 육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양식을 먹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 예수님을 우리의 삶 가운데로 초청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무리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시자 이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을 믿을 수 있도록 어떤 표적을 보이겠느냐고 질문하였다. 모세가 광야에서 기도하여 그들의 조상들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만나를 먹었던 것을 상기하며 예수님도 그들의 육신적인 필요를 채워 줄 어떤 이적을 베풀어줄 수 있는지 질문한 것이다. 광야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와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삶을 이어가게 하신 하나님은 이제 영혼의 만나로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우리의 영혼의 필요를 채워주시며 영적인 배고픔을 해소시켜주신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떡을 받아먹기 위해 주님께로 나아가자.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믿음으로 우리의 영혼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은혜를 누리자. 오늘도 생명의 떡, 생명의 양식인 주님의 말씀을 먹고, 묵상하여 삶에 필요한 힘과 지혜를 공급받음으로써 또 하루의 부요한 삶을 살아가자. 5월 21일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떡 3 (요한복음 6:47-58)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52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마시는 이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성령으로 우리 안에 사시는 예수님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 있는 떡,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임을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예수님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이 보여주실 이적을 기대하였는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가장 큰 이적임을 깨닫지 못했다. 예수님은 계속 영의 일을 말씀하셨고, 사람들은 계속 육신의 일을 말하며 육신의 생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판단하였다. 어떻게 예수님은 자기의 몸을 먹을 양식으로 주실 수 있을까? 어떻게 예수님의 피를 참된 음료라고 하며 마시게 할 수 있을까? 예수님의 살과 피에 대한 말씀은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의 율법에 비추어볼 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혐오스럽고 충격적인 것이었다. 이후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살과 피의 상징을 성찬식에 대한 설명에 사용하였다. (고전11:23-26) 생명의 떡을 먹는다는 의미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 안으로 받아들여서 그 분과 연결(연합)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연결될 때 우리는 그의 죽음과 부활을 믿게 되고, 성령의 능력을 신뢰하며 주님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게 된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몸을 위해 음식을 먹고 마실 때 우리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님을 생각하자. 예수님의 말씀을 먹음으로, 예수님의 영을 우리 안에 받아들임으로 영혼의 생명도 살 수 있게 하자. 우리가 진정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었다면 그분은 자신의 거룩한 영, 곧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사신다. 5월 22일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요한복음 6:66-71) 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니이다 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예수님의 질문 이 세상에서의 것을 기대하여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에게 예수님께서 영적인 일을 말씀하시자 많은 이들이 그 곁을 떠났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떠나간 무리들과 같은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제자들이 예수님께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기대하는 것을 얻지 못해 떠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닌지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하시는 질문이다. ‘너희는 내게 무엇을 원하고 바라는가? 무엇 때문에 내게 예배하는가?’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예수님으로부터 무엇을 얻기를 원하는지 물으신다면, 그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주님을 떠나겠냐고 물으신다면 우리는 뭐라고 대답할 것인지 생각해보자.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차린 베드로는 놀라운 신앙 고백으로 주님의 마음에 흡족한 대답을 했다.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주님께 있으므로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고백하였다. 예수님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주님만이 영생의 말씀을 가지고 계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받기를 원했던 것은 생명의 떡과 생명의 물로 비유하신 영생의 말씀이었고, 그 말씀은 곧 예수님 자신이셨다. 예수님은 모든 인생들에게 가장 귀한 것을 주고자 하신다. 육신을 위해 물과 양식이 가장 중요하듯이 영혼을 위해 가장 중요한 생명의 떡, 생명의 물을 우리에게 주고자 하신다. 베드로와 같이 영생의 말씀이 주님께 있으므로 주님과 함께 하겠다고 고백하며, 오늘도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으로 인해 풍성한 은혜와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자. 5월 23일 생수의 강 (요한복음 7:37-44)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아니하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40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41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41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42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43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44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와서 마시라 본문에 나오는 명절 끝날은 유대인의 절기 중 하나인 초막절기의 마지막 날을 말한다. 초막절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시 광야에서 초막에 거주하던 것을 기념하여 지키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다.(레23:43) 정착생활을 하게 되면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감격이 식어지기 쉬우므로 해마다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게 하는 절기라고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은 초막절기를 지킬 때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길어와 성전 제단의 서편에 붓는 예식을 거행했는데 이와 같은 전통을 비유하여 예수님은 자신이 영원한 생수의 근원이심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알려주시기 위해 생수라는 표현을 사용하신다. 생수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 세상에 임할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생수와 성령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말씀하셨다. 몸 속 깊은 곳에서 성령이 강과 같이 흘러나오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인생의 모든 갈증이 해결되고 성령 충만함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만족함을 누리는 상태는 생각 만해도 우리를 부요하게 한다. 사마리아 수가 성 우물가에서 삶에 지치고 영적으로 메말라있던 한 여인을 만나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물을 주신다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이 세상에서의 삶은 우리를 목마르게 하고 지치게 한다. 그러나 주님은 지치고 피곤한 우리에게 평안과 안식, 영생을 주시기 위해 주님이 공급해주시는 생수를 마시라고 부르신다. 그 부르심을 듣고 응답하여 주님께로 나아가 생수를 마시자! 5월 24일 용서받은 한 여인 (요한복음 8:1-11) 1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니라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와서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라고 물었다. 이들의 질문에는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을 찾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대답하심으로써 묻는 이들의 의도를 피하셨을 뿐 아니라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로 하여금 순간적으로 각자 자신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며 생각하게 만드셨다.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죄가 없다고 떳떳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누구 한사람 죄를 범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지 못하고 하나씩 하나씩 성전에서 나갔고, 그곳에는 여인과 예수님만 남게 되었다. 예수님은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종종 타인의 잘못을 따지며 판단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마7:3-4)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어리석음, 교만함을 깨우쳐주신다. 우리는 때로 자신의 큰 잘못은 덮어두고자 하고, 보지 않으려고 하면서 남의 죄는 들추어내고 비판하는데 이로 인해 사람과의 관계에 갈등과 불화가 생긴다. 예수님은 타인을 사랑으로 대하고 긍휼의 마음을 가질 것을 가르쳐주시며, 죄인을 용서하시고, 죄에서 벗어나 빛 가운데에서 살게 하신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정죄하지 않고 용서해주시는데 하물며 우리가 서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5월 25일 세상의 빛 생명의 빛 (요한복음 8:12-16) 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13 바리새인들이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 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15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변화 요한복음에는 빛이라는 단어가 신구약성경을 통틀어 가장 많이 나온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인해 죄로 인해 어둠 가운데 있던 세상에 참 빛이 비취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강조하며 빛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 참 빛이 세상에 비췸으로 인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음을 알려준다. 2장의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것은 죄 가운데 있는 인생들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것임을 상징한다. 3장에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 성령으로 거듭나야 함을 가르치시며 육신적 삶의 영적 삶으로의 변화를 말씀하셨고,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적 예배에 대해 가르치심으로써 장소와 형식에 매여 있는 형식적 예배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로의 변화를 알려주셨다. 5장에서 베데스다 못 가의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으로써 질병으로부터 고침 받고 건강한 삶을 살게 되는 변화. 죄에서 자유롭게 되는 변화를 알려주시고, 6장에서 오천 명을 먹이시면서 자신이 생명의 떡이 되심을 알려 주시며, 육신의 떡으로 배부름을 얻는 것에서 생명의 떡으로 배부르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되는 변화와 함께 비록 적은 것이지만 예수님께 드렸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는 변화를 보여주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어떠한 모습으로 변화되었는지 자신을 돌아보자. 과연 우리의 육신적 생각, 삶의 태도들이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 우선으로 바뀌었는지 혹은 바뀌어가고 있는지, 아니면 적어도 바뀌어 가기를 소망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내면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변화시키는 역동적 힘을 발휘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다시 점검해보아야 할 것이다. 5월 26일 맹인을 고쳐주신 예수님 1 (요한복음 9:1-7) 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를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 길을 가다가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보신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서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다. 그 사람은 실로암 못에 가서 씻고 밝은 눈이 되어 돌아왔다. 길에서 맹인을 본 제자들은 유대인의 사고방식에 근거하여 이 사람이나 혹은 그 부모에게 무슨 죄가 있어서 날 때부터 눈이 안보인 것이라 생각하여 예수님께 질문하였으나 예수님은 그 들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답변하셨다. 맹인이나 그 부모는 왜 이 사람이 눈이 안 보이는 상태로 태어났는지 한탄하고 원망한 때가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인생을 불행한 가운데 살았으나 마침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우리도 때로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행한 일, 어려운 일을 겪을 때가 있을 수 있다. 이런 때에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 무엇을 이루려고 하시는지 그 뜻을 알도록 잠잠히 기도하며 기다려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방식으로 일하신다. 눈을 뜨게 된 맹인은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빛을 보게 되었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드러내는 일에 사용되었다. 흑암 가운데 있던 맹인에게 은혜의 빛이 비추인 것처럼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빛이 밤과 같은 이 세상을 비추는 세상의 빛이 되셨다. 우리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기 전에는 모두 영적으로 맹인이었다. 이제는 영의 눈이 떠졌으니 육신의 눈으로 세상 일만 보고 살 것이 아니라 영의 눈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며 오늘 하루를 살아가자. 5월 27일 맹인을 고쳐주신 예수님 2 (요한복음 9:8-14) 8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10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11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12 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13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14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찾아오시는 주님 날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아 구걸하며 살아가던 맹인은 예수님이 침을 진흙에 섞어 눈에 바른 것을 실로암 못에 가서 씻은 후 눈이 떠져 볼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함으로써 그는 치유의 이적을 체험하였고 맹인으로 구걸하며 살던 불행한 인생에서 새로운 삶으로 변화되었다. 맹인이었던 이 사람은 눈이 밝아져 세상을 보게 되었을 뿐 아니라 자신을 고쳐주신 분이 누구이신지 점차 알아가게 되었다. 예수님께 대한 그의 고백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주목해보며 우리는 예수님께 대해 어떻게 고백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사람들이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고 묻자 예수라 하는 그 사람(9:11)이 고쳐주었다고 말한다. 바리새인들 사이에 서로 논쟁이 일어났을 때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고 하느냐’하고 묻자 선지자라고 대답하였다(9:17). 두 번째 다시 불러 물었을 때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다면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일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대답하며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9:33)이라고 표현하였다. 그가 다시 예수님을 만났을 때 ‘네가 인자를 믿느냐’는 물음에 ‘주여 내가 믿나이다’하며 주님으로 고백하였다. 예수님은 구원받아야할 사람, 죄인들을 먼저 찾아오셔서 그를 자극시키신다. 믿음으로 응답하느냐 거절하느냐는 그 사람의 결단이다. 믿음으로 응답하는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치료해주시고, 그 치료가 다른 사람의 주목을 받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변화된 사람은 변화된 모습을 통해 다른 이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치유가, 그 변화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5월 28일 맹인을 고쳐주신 예수님 3 (요한복음 9:35-41) 35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38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우리도 맹인인가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메마르고 보잘 것 없는 나무 한 그루 “주님, 여기 메마르고 보잘 것 없는 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부디 오셔서 이 나무가 열매 맺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리하시면 저는 즐거이 고백할 것입니다. 당신으로부터 나의 모든 열매가 나왔노라고. 주님, 저는 본성적으로 시들고 메마른 가지입니다. 저에게 오셔서 생기를 주시어 아론의 지팡이처럼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울 수 있게 하소서. 그리하여 사람들이 은혜로운 기적을 보고 오직 당신만을 찬양하게 하소서.” (스펄전목사님의 기도)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자의 눈을 뜨게 해주신 일은 죄인으로 태어나 죄와 사망의 어두움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인생들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적인 눈을 뜨게 해주신 것을 상징한다. 예수님의 먼저 찾아오시는 선행적 은혜,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내어주신 은혜가 없었다면 우리는 스펄전목사님의 기도와 같이 메마르고 보잘 것 없는 한 그루의 나무, 본성적으로 시들고 메마른 가지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맹인이 예수님과의 일대일의 만남을 통해 세상을 보게 되었고, 예수님을 구원의 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 나의 주님으로 고백함으로써 영혼이 살아나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울 수 있는 인생으로 변화되었고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되었다. 시들고 메말랐던 우리의 영혼에 생기가 솟아나고 싹이 나고 꽃이 피어 풍성해진 모습을 보고 우리 주변의 많은 영적 맹인들이 그들의 눈을 뜨기를 소망하며 우리에게 다가와 구원의 길을 묻게 하자. 구원의 길을 묻는 그들에게 즐거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알려주자. 5월 29일 양의 우리 (요한복음 10:1-10)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다른 이들과의 대화에서 상대방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을 때 우리는 진심을 전하고자 몇 번이고 강조하며 안타깝게 반복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자신이 누구이신지,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 알려주고자 하는 마음이 너무나 간절하여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힘주어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목축업을 주로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해하기 쉽게 양과 목자의 비유를 통해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설명하셨으나 그들은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듣지 못하였다. 9장에서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을 고쳐주시면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영적 소경으로 비유하셨던 예수님은 그들이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바르게 인도하지 않는 절도나 강도, 삯꾼에 불과하다고 지적하셨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가며 인도한다. 목자가 앞서 가면 양은 그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따라 온다. 어린이들이 즐겨 읽는 동화 중에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가 있다. 이 동화에 나오는 양치기 소년 페터는 알프스 산에서 양을 치며 살아가는데 그는 양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양의 이름을 부르며 돌본다. 양들은 그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라 풀을 뜯어 먹으러 나가기도 하고 저녁에 우리로 돌아오기도 한다. 우리의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며 인도하실 때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알아 듣고 그 뒤를 따라가야 한다. 양들이 목자를 따라가며 꼴을 얻듯이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생명의 양식을 먹음으로써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하게 얻어야 하겠다. 5월 30일 선한 목자 (요한복음 10:11-18)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누가 선한 목자인가?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이제 자신을 단순히 목자가 아니라 ‘선한 목자’라고 하셨다. 선한 목자는 자신이 위험한 처지에 놓여도 결코 양들을 버리지 않고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도 버린다고 하심으로써 모든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목숨을 내어주실 것을 미리 알려주셨다. 구약시대에는 양이 목자를 위해 죽었다. 신약시대에는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양을 위해서 친히 죽으셨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자신이 돌보는 양들을 아신다. 우리의 모든 처지와 형편을 아시며, 우리 내면의 깊은 생각까지도 알고 계신다. 목자가 각각 양들의 이름을 부르며 위험한 길, 위험한 짐승들, 먹으면 안 되는 독초 등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그 말씀을 듣고 믿고 따르는 이들을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게 하신다. 우리는 때로 우리의 지식과 경험이, 우리가 가진 물질이, 세상에서 획득한 우리의 지위가, 주변의 유력한 사람들이 우리를 이끌어주는 목자인 것으로 착각한다. 이러한 것들은 이 세상의 삶에서 종종 목자의 역할을 할 수도 있겠으나 우리를 영원한 삶으로 이끌어주지 못할뿐더러 우리의 영혼을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지 못한다. 선한 목자가 되셔서 자신의 목숨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 5월 31일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마리아 (요한복음 12:1-8)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진정한 경배 유월절 엿새 전 베다니에서 예수님을 위해 잔치가 열렸다. 마리아는 귀한 향유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발을 닦아드렸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은 향유는 노동자의 1년 치 품삯에 상당하는 가치를 가진 것이었다. 마리아의 행동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일을 경시하거나 예수님을 위해 지나친 방식으로 돈을 사용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유일하고 특별한 사건, 곧 인류의 죄를 대신 갚아주기 위해 죽으실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는 것임을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 마리아는 주님께 대한 사랑이 너무 커서 그 사랑을 어떻게든 표현해야만 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자신의 머리털로 향유를 부은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린 그녀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상상해보자. 예수님은 그녀의 헌신적 경배를 칭찬하시며,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그녀가 행한 일도 말하여 기억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막14:9). 그녀는 단지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행했으나 그것이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무언가를 행할 때 때로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있어 아주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다. 마리아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귀중한 것을 주님께 드림으로써 진정한 경배를 드렸다. 우리가 그 당시 주님과 함께 있었다면 우리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지금 우리에게 주님을 위해 우리에게 소중한 어떤 것이라도 드릴 수 있는 헌신의 믿음이 있는지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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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림교회
2019년 3월 25일
In 365일 말씀묵상
6월 1일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다 1 (요한복음 11:1-10) 1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더라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8 제자들이 말히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하나님의 시간 계획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7가지 기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이 마지막으로 소개되고 있다. 예수님은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의 가족을 무척 사랑하셔서 종종 그곳을 방문하셨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께 나사로의 병든 것을 알렸을 때 나사로의 질병으로 인한 누이들의 고통을 너무나 잘 아셨을 것임에도 불구에도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으시고 지체하셨다. 예수님이 지체하신 것은 특별한 의도가 있으셨다. 만일 예수님이 병든 나사로의 마지막 시간에 함께 계셨다면 그가 죽기 전에 치료해주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기다리는 동안 나사로는 죽었고,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죽음을 정복하는 주님의 권능을 나타내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었다. 하나님의 시간계획, 특히 예수님께서 위급한 상황에서 지체하신 것은 마치 주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완전한 계획과 의도를 따라 우리의 모든 요구를 채워주신다. 이것을 깨달은 사도 바울은 빌4:19에서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선언한다. 한 그리스도인이 마주치는 문제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하나님은 모든 부정적인 상황에서 선한 것을 이끌어내실 수 있기 때문이다(롬8:28). 그러므로 우리는 때로 기도에 즉각적인 응답이 오지 않더라도, 상황이 더 심각하게 변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내하게 하신 후 하나님의 계획과 때를 따라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6월 2일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다 2 (요한복음 11:17-27)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는 나사로가 죽은 지 이미 나흘이나 지났다. 너무 늦게 오신 예수님을 원망이라도 하듯이 마르다는 예수님이 그곳에 계셨더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동안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고 이적을 행하신 예수님을 보아왔던 두 자매는 예수님이 오시면 반드시 오라비를 고쳐주실 수 있으리라 믿고 간절한 마음으로 안타깝게 예수님을 기다렸을 것이다. 마르다는 나사로가 이미 죽었지만 지금이라도 예수님께서 무언가 해주시기를, 그리고 무언가 해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마르다는 놀라운 부활신앙을 고백한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아는 믿음은 가지고 있었으나 죽음까지도 다스리시고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예수님의 하나님과의 동등한 권능은 아직 알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시려고 이미 계획하고 계셨다. 그러나 육체적으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에 앞서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포하시며 그 사실을 믿는 이들이 얻게 될 영원한 생명과 이 세상에서도 누리며 살아갈 영적 생명에 대해 미리 말씀하심으로써 마르다의 믿음을 더욱 강화시키셨다. 오라비의 죽음의 고통 앞에 선 마르다의 신앙은 이제 부활을 아는 것에서 부활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성장하였다. 마르다와 같이 우리의 믿음도 아는 것에서 믿는 것으로 변화하여 온전해지기를 소망하자. 6월 3일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다 3 (요한복음 11:38-44)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나에게 일어난 기적 오라비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소망의 말씀을 주셨다. 마르다는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옮겨놓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 냄새가 난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대답을 하였다. 그녀의 시선은 아직 예수님께 고정되지 않고 현실에 고정되어 있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명령하시자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살아 무덤에서 나왔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단지 그를 사랑하시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곳에 모인 무리들에게 예수님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것을 보여주심으로써 하나님과 예수님이 기도 안에서 하나가 되심을 보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하려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 보이시기 위한 것이고, 나아가 부활 신앙을 갖게 하려는 것이었다. 나사로는 살아났으나 언젠가 다시 죽었다. 그의 살아남은 다시 죽음을 맞이하는 제한적인 부활이었다. 장차 있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예시하는 이 사건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일시적인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임을 시사해준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서는 이런 기적은 다시 볼 수 없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족이 베로 묵인 것 같이 죄와 죽음에 둘러싸여 있던 우리 영혼이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살아난 것이 오늘날 우리가 체험하는 기적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눈을 들어 우리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일상에서 반복되는 죄와 악함과 부패를 씻어주시고 고쳐주시는 주님의 말씀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킴으로 오늘도 우리에게 일어나는 기적을 체험하자! 6월 4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요한복음 12:20-25)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그들이 갈릴리 벳세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예수님의 영광 우리의 영광 명절에 예루살렘을 찾아온 헬라인 몇 명이 예수님을 뵙고자 청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고자 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셨다(23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광은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하는데, 십자가의 죽음은 당시 가장 수치스럽고 가장 큰 형벌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영광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고, 그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이제 그 결정적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아셨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 한 알의 밀이 되어 죽을 것이며, 그로 인해 많은 이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므로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도 이와 같이 자신을 희생해서 많은 열매를 거두어야할 것을 가르쳐주셨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자, 곧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사람은 오히려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을 얻게 됨을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헬라인들의 잘못된 의도에 응답하셨다. 성도로서의 우리의 영광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과 계획을 이루어 가시기 위해 사람을 사용하신다. 우리가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하나님의 뜻을 펼쳐가는 도구로 쓰임 받게 된다면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영광이 될 것이다. 6월 5일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요한복음 12:26-30)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27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29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천둥이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섬김에 따르는 복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구원을 이루고자 하시는 예수님도 이 땅에서 육신의 몸으로 사셨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하는 일이 너무나 고통스러우셨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라고 고백하는 예수님은 감당해야 할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분명히 밝히며, 사명에 순종함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셨다. 예수님을 뵙고자 했던 헬라인들은 예수님을 섬기는 제자가 되고자 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고 교훈하신다.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 예수님이 계신 곳에 있는 사람,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을 행하는 사람, 예수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그 마음이 있는 사람, 예수님이 바라보는 곳을 함께 바라보는 사람, 그 사람이 진정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예수님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귀히 여겨주시는 것이 예수님을 섬기며 따라가는 제자가 받는 복이다. 이 땅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기에는 희생과 헌신이 따른다. 우리는 때로 이러한 희생과 헌신이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이에 비교할 수 없는 상급을 하나님께서 주신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귀하게 여김을 받아도 기쁜 일인데 하나님으로부터 귀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가장 큰 은혜 중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섬기는 제자의 길을 주님과 함께 감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 귀히 여겨주시는 은혜를 받아 누리자. 6월 6일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 1 (요한복음 13:1-10)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9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예수님이 보여주신 본 예수님은 자신의 마지막 사명을 이루시고 이 세상을 떠나야 할 때가 다가옴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도 그들이 앞으로 감당해야할 일들, 일어날 일들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함께 모여 식사를 하던 자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심을 통해 세상에 홀로 남게 될 제자들을 교훈하셨다. 유대인들은 더운 지방에 사는 까닭에 샌들같이 생긴 신발을 신고 다녔다. 외출 후나 식사 전에 발을 씻는 것이 관습이었는데 당시 발을 씻겨 주는 것은 종들이 하던 일이었다. 예수님께서 종과 같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심으로써 겸손의 본을 보여주셨고, 제자들도 서로 섬기는 겸손한 삶을 살라고 하셨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마음에 더러운 죄가 있는 사람은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가질 수 없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심으로 인해 우리는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 가운데 친밀한 교제를 누리게 된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들이 임명 받을 때 온 몸을 씻었다. 하나님은 또한 물 대야를 준비하도록 명령하셔서 제사장들이 매일 손발을 씻는데 사용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깨끗하게 씻어 주셨고, 매일 말씀의 물로 그의 교회, 성도들을 깨끗케 하신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말씀을 읽음으로써 그의 발을 깨끗이 씻고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함을 주님은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6월 7일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 2 (요한복음 13:12-20) 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18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19 지금부터 이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위선과 교만을 제거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서로 섬기며 봉사할 것을 가르치려는 목적만은 아니었다.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승천 후 예수님의 사역을 이 땅 위에서 계속하게 하려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다. 이 목적을 이루고자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신을 보내신 것 같이 자신도 제자들을 보내심을 말씀하셨다. 가룟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다락방 식사자리에 있었다. 그는 위선적으로 행동하며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제자들은 그의 의도를 눈치 채지 못했다. 예수님은 제자들 중 한 명이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을 공개적으로 말씀하시며 이미 마음속으로 주님을 배반한 유다에 대해 경고하셨다. 다른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 눈치 채지 못했지만 유다는 예수님이 자기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유다로 하여금 회개하고 사단에게 지배당한 마음을 돌이킬 기회를 주셨지만 주님이 떡 한 조각을 적셔 그에게 주었을 때 그는 회개와 배신의 갈림길에서 사단에게 굴복하였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팔려는 자가 누구인지 말해달라고 채근하며 예수님께 은근히 자신을 내보였고, 자신은 예수님을 따라 가며 목숨까지 버릴 수 있다고 말했으나 그것은 잘못된 자기 확신, 교만이었던 것이 곧 드러났다. 예수님께서는 13장에서 일련의 말씀들을 통해 우리에게 위선과 교만을 경고하신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때로 잘못을 저지른다. 잘못한 양심을 주님께서 자극하시고 깨우쳐주실 때 회개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우리의 신앙적 위선과 교만을 회개하며 오늘도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하겠다. 6월 8일 새 계명 (요한복음 13:31-35)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36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37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 베드로는 예수님께 자신이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장담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가 위기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이날 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고 베드로에게도 경고하셨다. 예수님이 받으실 영광은 십자가였다. 인류 구원을 위해 곧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실 예수님은 그것이 자신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지만 하나님께나 자신에게나 모두 영광이 됨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이 곧 영광임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십자가 죽음을 앞둔 예수님은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 나아가 우리 모두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유언과 같은 말씀을 주셨다. 사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레위기19:18에 이미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새 계명을 주신다고 하시며 구약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단지 말이나 감정으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시며 사랑하셨다. 인간인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과연 어떻게 본받고 실천할 수 있을까? 우리의 생명을 내어주지는 못할지라도 우리의 시간, 재물, 능력을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위해 주저함 없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사용한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사랑을 베풀기는 참으로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러한 사랑을 실천할 때 이것을 보는 이들은 우리가 행하는 사랑이 진정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임을 느끼게 되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을 인정할 것이다. 6월 9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한복음 14:1-9)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유일한 길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 뒤에 남겨질 제자들이 현실적 상황들로 인해 근심하다가 믿음이 약해질 것을 염려하셨다. 그러므로 세상을 바라보며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믿음 위에 굳건히 서 있을 것을 명령하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시고, 거처를 예비하시면 다시 오셔서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가시겠다고 하신다. 어디론가 갈 곳이 있다는 사실은 사람의 마음을 안심시키고 평안하게 만든다. 그 곳이 육신의 집이라도 그러한데 하물며 우리가 이 땅에서의 삶을 끝내고 갈 곳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그러나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거처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하는 그곳을 경험적으로 알지 못하므로 도마처럼 의심한다.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예비해주시는, 장차 우리가 갈 곳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곳이다. 길이 되신 예수님만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진리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약속의 실제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오직 진리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생명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신적 생명을 우리 모두에게 영생으로 연결시키셔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열어놓으신 유일한 길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는 오늘도 이 땅에서 장차 가게 될 하늘나라를 기대하며, 이미 하늘나라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다. 6월 10일 보혜사 성령 1 (요한복음 14:14-21)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미래를 아시는 하나님 곧 제자들을 떠나게 되실 예수님은 그러나 제자들을 세상에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 자신은 비록 제자들을 떠나 하나님 나라로 가실 것이나 삼위 일체 중 또 다른 하나님이신 성령을 제자들에게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성령을 보혜사로 표현한 것은 성도들 곁에서 모든 것을 살펴보시며 마땅히 행해야할 일, 말해야 할 것들을 가르쳐주시고 도와주시는 위로자, 대언자, 상담자로서의 성령의 사역을 염두에 둔 것이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 안에,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현재이고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살아가도록 도우시며,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 땅 위에 세우도록 도우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가시는 것이 뒤에 남겨지는 제자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도리어 성령이 임하시는 큰 축복이 되는 이 약속은 제자들에 대한 무한한 위로의 말씀이다. 때로 사람들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기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미래를 알지 못하게 하셨다.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하나님만이 아시지만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알아야만 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말씀해주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규범에 따라 산다면 그분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일에 있어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와 함께 하시며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님으로 인해 오늘도 우리는 담대하게 하루를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6월 11일 보혜사 성령 2 (요한복음 14:25-31)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29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30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갈 것과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이 감당해야 할 일들을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불안해하며 근심하였다. 두려워하고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누리게 될 평안을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이 말씀은 당시 제자들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큰 위로와 힘이 된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내면에는 죄와 불안, 불확실성, 의심 등 많은 다른 부정적인 힘들이 서로 갈등하며 다투고 있다. 하나님의 평안은 우리의 내면에 들어와 이러한 적대적인 힘들을 통제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갈등과 다툼으로 지치고 힘들어하는 인생들을 위로해 준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고, 세상이 주는 방법으로 주시는 것도 아니며, 세상이 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평안이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일시적이고 얄팍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은 영혼 깊은 곳에서 항상 만족을 주며, 우리들이 주님과 동행하는 한 우리 안에 영원히 머무른다. 보혜사 성령께서 자신의 사역을 통해 우리의 삶 가운데 이루시는 최종결과는 우리 안에 상주하는 깊은 평안이다. 이 깊은 평안을 소유하면 우리는 세상에서 겪는 어떠한 힘든 일들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으며 요동치 않는 믿음의 자세를 견지할 수 있게 된다. 만일 자신의 삶이 메마르고 스트레스로 가득 차 있다고 느껴진다면 주님께서 약속하신 주님의 평안을 구하자.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주님의 평안을 얻게 하시고, 메마르고 곤고한 영혼에 주님의 평안을 가득 채워주실 것이다. 6월 12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1 (요한복음 15:1-8) 1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열매 포도나무는 열매를 많이 맺는 식물이다. 포도나무 한 그루에 많은 가지가 붙어 있어 가지마다 많은 포도송이가 맺힌다. 구약성경에서 포도나무는 하나님이 땅을 다스리셔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풍성한 수확을 얻게 하는 것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와 포도원 농부이신 하나님의 비유를 통해서 포도원 농부이신 하나님이 포도나무 가지를 잘 관리하여 가지들로 하여금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심을 알려주고자 하신다. 포도나무 가지는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다. 열매를 많이 맺는 가지는 그리스도와의 생명력 있는 살아있는 관계를 통하여 많은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들을 뜻한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 같이 우리도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맺는 열매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영혼을 구원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요한복음 15장에서는 기도의 응답, 기쁨, 사랑 등이 열매로 언급된다. 사람들은 올바른 것을 행하며 선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한다. 예수님은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함께 자라갈 수 있듯이 사람들이 예수님과 밀접한 관계 안에 있어야만 진실하고 선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는가? 진실하고 올바른 삶, 선한 결과를 풍성하게 얻는 삶, 자신과 주변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 원한다면 우리 자신이 예수님과의 친밀하고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는지 확인해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이 가지인 우리의 영혼 속으로 흘러들어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가지가 나무에 제대로 붙어있는지 확인해보아야 한다. 6월 13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2 (요한복음 15:9-16)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친구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비유하신 말씀이 7가지로 기록되어 있다. 생명의 떡 (6:5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세상의 빛 (8:12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양의 문 (10:7 나는 양의 문이라 ...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선한 목자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 부활과 생명(11: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길, 진리, 생명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포도나무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등이다.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예수님과 성도들의 연합 관계를 설명한 예수님은 이제 성도들 상호간의 마땅한 관계와 책임에 대하여 가르쳐주신다. 성도간의 관계는 바로 예수님의 새 계명,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사랑의 관계이다. 나아가 서로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들이 누리게 될 복도 말씀하셨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어 하나님의 신령한 비밀을 깨달을 수 있는 복을 주신다. 예수님의 친구가 될 자격이 전혀 없는 우리를 자신의 친구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오늘도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자. 6월 14일 성령의 일 (요한복음 15:26-16:4) 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16: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2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3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4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 성령을 보내시는 주님의 사랑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제자들과 함께 하는 마지막 순간에 하신 말씀을 되새겨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먼저 주님은 제자들에게 박해가 따를 것을 예고하셨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어디로, 언제, 왜 가시는지를 설명하시면서, 제자들을 홀로 버려두지 않고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임박한 십자가 고난과 죽음에도 불구하고 뒤에 남겨질 제자들을 걱정하는 예수님은 제자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돌봄이 끊임없이 계속될 것을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드러내셨다. 자신이 떠나간 후에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주실 성령을 보혜사와 진리의 영으로 표현하셨는데, 위로자로도 표현되는 보혜사 성령은 세상에서 박해를 받게 될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고 강하게 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낸다. 진리의 원천으로서의 성령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조명하셔서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모든 것을 기억하고 깨닫게 하신다. 보혜사 성령은 교회와 성도로 하여금 성령이 머무는 집이 되게 하고, 진리의 영으로써 세상 가운데서 예수님에 관해 증거하며, 예수님을 증거하는 제자들을 도우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신다.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이 홀로 있는 것 같은 외로움과 고난 가운데 있다고 생각될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으로 함께 하셔서 위로하시고 진리를 가르쳐주시며 우리를 도와주신다.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면 우리는 어떠한 처지와 형편 가운데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6월 15일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요한복음 15:7-11)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응답받는 기도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특별히 기도에 대해 여러 차례 강조하셨다. 우리 모두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는 어떻게 기도해야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영적으로 성숙해져 시험을 이기고, 모든 역경과 위험의 현실 속에서도 신앙과 삶을 유지해갈 수 있는 자신감과 평안함, 때때로 만나는 엄청난 실망과 손실 가운데에서도 만족할 수 있는 영혼의 안식, 그리고 끊임없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신앙은 어디서 나올 수 있을까? 바로 기도 생활에서 비롯된다. 기도는 흔히 말하듯 우리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영혼의 호흡이고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의 도구이다. 우리가 마지막 심판 때에 영광 가운데 계시는 그리스도 앞에 설 때 우리의 지상에서의 삶을 회고한다면 그 삶의 가장 부끄러운 모습은 기도하지 않고 살았던 모습일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셨다. 원하는 대로 구해서 이루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있다. 바로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러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를 할 수 있게 되며, 기도의 응답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 기도의 응답은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의 열매가 되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면 그 기도는 무엇을 위한 기도였는지, 나아가 내가 지금 예수님 안에 있는지,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한다. 6월 16일 성령이 하시는 일 (요한복음 16:7-16)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애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5 무릇 내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길 안내자 예수님이 세상에 오지 않으셨다면 복음은 없었을 것이다. 그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죄는 깨끗하게 씻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죽음을 이기지 못했다면 부활도 없었을 것이다.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성령이 오시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에는 단지 한 곳에만 계실 수 있었다. 예수님이 본래 있었던 자리, 곧 하나님께로 귀환한 것은 이제 그가 성령을 통하여 온 세상에 동시적으로 존재하실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 홀로 있지 않다는 것을 알기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보혜사 성령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불신앙이 죄인 것을 깨닫게 하여 믿음의 길로 들어서게 한다. 의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성령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인간들이 자신의 의로 예수님을 죽게 한 것을 심판하며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여 아버지께로 가심으로 완전한 의를 이루신 것을 깨닫게 한다. 성령은 세상이 예수님을 심판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한 것을 책망하며,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써 세상 권세를 가진 사단을 심판하신 것을 깨닫게 한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우리들에게 알려주시고자 하는 복음이다. 성령은 우리에게 방향감각을 제공하며 가야할 길을 알게 하는 안내자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과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신뢰할 수 있는 확실한 지도를 주셨다. 안내자이신 성령과 예수님이 주신 지도, 이 두 가지는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가야할 올바른 길을 인식시켜준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무엇을 따라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지 생각해보자. 6월 17일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요한복음 16:23-28) 23 그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25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26 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28 내가 아버지께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 요한복음 14장-16장에서 예수님은 기도에 대해 일곱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16:23 그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16:24 너희가 지금까지는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16:26-27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는 말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위의 말씀에 공통된 점은 ‘내 이름으로’, ‘구하라 그러면 주시리라’ 혹은 ‘받으리라’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만이, 그 이름 안에 있는 능력을 믿는 사람만이 그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고, 약속하신 기도의 응답을 체험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의 목적과 욕망이 성령에 의해 정제되어서 자신의 뜻과 그리스도의 뜻이 조화를 이루는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성 어거스틴은 이러한 상태에 이르고자 "오, 주여! 당신의 뜻을 마치 나의 뜻인 것 같이 행하게 허락하옵소서. 그리하면 당신께서 나의 뜻을 마치 당신의 뜻인 양 행하실 것입니다" 라고 기도하였다. 6월 18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 (요한복음 16:25-33) 25 이것을 너희에게 비유로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는 말이 아니니 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28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30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기는 자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나와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이제 다시 원래 계시던 곳, 하나님께로 가셔야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미를 이제야 겨우 깨달아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믿음은 성령이 오셔서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실 때 갖게 될 강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첫 단계에 불과하였다. 제자들의 믿음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다가올 위기의 때에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 곁을 떠나고 예수님을 홀로 남겨둘 것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환난 가운데 처하게 될 제자들을 위로하며 힘을 얻게 하시는 말씀을 주셨다. 세상은 믿는 이들을 대적하고 방해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우리가 세상에서 많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제자들이 슬픔에 울고 있을 때 세상은 기뻐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후 그분을 다시 보게 되었을 때 기뻐하였고 세상은 두려워하였다. 세상과 믿는 이들 사이의 극단적인 대조이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심으로써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용기를 주신다. 제자들이 다 떠나가고 홀로 남겨질 때에도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갈 때 담대할 수 있는 이유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시면서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에 의지하여 우리는 비록 세상에서 때로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담대하게 세상을 이기는 자로 살아갈 수 있다. 6월 19일 자신을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 (요한복음 17:1-5)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4 아버지께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영생의 근원 요한복음 13장31절부터 16장까지의 예수님의 고별설교가 끝나고 17장부터는 예수님의 중보기도가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의 중보기도는 먼저 주님 자신을 위한 기도에서 시작하여 제자들과 모든 믿는 자들에게까지 그 대상이 확대되고 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심으로써 일시적으로 포기했던 창세 이전의 영광을 십자가의 사역을 다 이루심으로 다시 받기를 기도하셨다. 그리고 자신이 다시 누리게 될 영광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바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이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목적을 성취함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자신도 하나님과 함께 영화롭게 되시기를 기도하셨다. 영생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시작하면서 받게 되는 선물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으로 말미암은 영생을 가질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게 되고, 하나님과 내적인 신뢰를 이룸으로써 육신의 삶 가운데서도 실재하는 영생을 소유하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나아가 영생은 우리로 하여금 영생을 소유한 다른 이들과 친밀한 내적관계를 맺게 해준다. 예수님은 영생의 근원이시다. 영생의 근원되시는 예수님을 알고 믿음으로써 하나님과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내적인 친밀한 관계를 이루는 복을 누리며 살아가자. 6월 20일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 (요한복음 17:6-12) 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7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9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다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2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세상에서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앞두고 먼저 자신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신 예수님은 이어서 자신의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이들인데 이들은 이제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되었고 주님의 말씀을 믿게 되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떠난 후에 이 세상에 남아 여전히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할 제자들을 걱정하시는 마음이 가득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을 때에 세상을 피하거나 사단에게 지지 않도록 믿음을 굳게 해주실 것과 믿음이 보존되게 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제자들 또한 진리와 사랑 안에서 연합되게 해주실 것을 기도하셨고, 제자들을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의 진리로 거룩하게 해주실 것을 기도하셨다(17-19절).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들처럼 우리도 여전히 이 세상에서 살고 있다. ‘세상’은 사단이 기뻐하는 권력, 물질적인 부, 자아실현 등의 가치체계를 제시하며 믿는 이들을 무기력하게 하고 넘어뜨리려 한다. 과거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을 위해서 뿐 아니라 현재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사단이 제시하는 세상의 가치체계를 대적하여 살아야하는 우리를 위해서도 예수님은 동일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고 계신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을 이기고, 복음의 진리와 사랑으로 서로 연합하며,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며 살아가도록 예수님은 기도해주신다. 예수님의 기도가 오늘도 우리에게 세상에서 살아갈 힘을 공급해준다. 6월 21일 부활 후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 (요한복음 20:19-23) 19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대리자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해 들었으나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의심하며 믿지 못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까지도 닫고 두려움 가운데 있는 제자들을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며 손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여주시자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을 확인하고 기뻐하였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한 번 평강이 있기를 말씀하시고 그들을 세상에 보내시며 자신의 사역을 이어가는 사명을 주셨다. 그리고 그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숨을 내쉬는 행동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의 실체를 제자들로 하여금 느낄 수 있게 하셨고, 예수님은 이제 원래 계시던 곳으로 가실 것이므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며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이 함께 계시겠음을 알려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대리자로 살아가라고 명령하신다. 예수님의 대리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며 도와주신다. 그러므로 구원사역의 대행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의 죄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하여줄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은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두려움을 준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신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것 자체가 우리의 평안이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영,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혼의 평안을 누리며 예수님의 대리자의 사명을 잘 감당하자! 6월 22일 바울의 감사와 간구 (골로새서 1:1-8)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7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8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 골로새교회 골로새서는 사도 바울이 1차로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골로새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내기 위해 기록한 것으로 추정한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때 에베소를 방문했던 에바브라가 복음을 접하고 기독교로 개종, 고향으로 돌아가 골로새교회를 세웠다. 골로새는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동서 문물의 교류장소가 되었고, 교역량이 많아 상인들과 여행객들이 출입이 빈번하였다.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각종 이단사상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이곳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이 주변지역에 확산되는 장점도 있었다. 골로새서는 에베소서와 함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에베소서와 쌍둥이 서신이라고 불려진다. 에베소서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강조하고 있다면 골로새서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고 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과 성도 상호간에 대한 사랑, 영생에 대한 소망을 통해 신앙생활의 진보를 이루며 결실을 맺고 있다는 소식을 바울에게 전하였고, 바울은 이로 인해 자신이 세우지도, 가보지도 않았던 골로새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다. 우리도 교회공동체와 또한 교회인 우리 개개인의 믿음이 성장하고, 성도 간에 서로 사랑하며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소망을 굳게 붙잡아 풍성한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소망하자! 6월 23일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 (골로새서 1:1-2)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자신을 긍정하라 골로새교회가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 전해들은 바울은 당시 골로새교회를 괴롭히던 혼란을 극복하도록 돕기 위하여 골로새서를 기록하면서 자신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편지를 쓸 때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아무 소망 없이 재판을 기다리는 죄수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택하고 임명하신 그리스도의 사도로 확신하였다. 이런 믿음의 확신은 바울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고백으로 나타날 뿐 아니라, 골로새교회 교인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한 형제들’이라고 부르게 하였다. 이러한 호칭은 잠시 이단사상에 물들어 넘어지고 낙심해있던 골로새 교인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으며,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되돌아보게 하였다. 나아가 바울은 이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축복하였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값없이 주시는 사랑이다. 평강은 함께 묶는 것, 즉 부서지거나 쪼개진 것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사랑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얻었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다시 결합되는 평안을 얻었다.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고 세상의 공격에 넘어질지라도 자신을 비하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하며 다시 일어서자.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신을 긍정하고 격려하며, 은혜와 평강 가운데 살아가자. 6월 24일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골로새서 1:9-10) 9 이로써 우리가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10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삶의 방식에 대한 책임 이단사상의 침범으로 인해 믿음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골로새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권면은 이제 그들의 삶의 방식에 관한 간구로 이어지고 있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고 하시고’라는 표현에서 ‘합당하게’라는 헬라어는 ‘다른 물건과 같은 무게가 나가는’이라는 뜻이다. 당시 헬라어를 쓰는 이들에게 이 단어는 저울을 연상시켰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위해 하신 일이 저울 한쪽에, 저울의 다른 한쪽에는 그리스도인들의 행위가 올려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의 행위가 저울 한쪽에 올려있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균형을 이루게 하는 것이 주께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임을 생각하게 한다. 물론 우리는 결코 저울의 균형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저울의 이미지는 적당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우리의 사랑보다 훨씬 무게가 나간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부단히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애쓰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한다. 바울이 간구하는 바와 같이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씨를 심고 뿌리내려 자라게 해야 한다. 뿌리와 열매는 분리할 수 없다. 주님은 우리에게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교훈하셨다. 자신의 신앙에 진보가 없고, 거두어들일 열매가 없다고 느껴지면, 세상의 유혹과 시험에 자주 넘어진다면 자신의 삶의 방식이 어떠한지 살펴보아야 한다.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자신의 삶이 붙어있는지 확인해보아야 한다. 6월 25일 그의 영광의 힘 (골로새서 1:11-12) 11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소유하자 그리스도인이 열매 맺으며 살 수 있는 능력은 포도나무이신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설명한 바울은 하나님께서 골로새교인들을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간구하였다.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된다는 것은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는 뜻인데,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의 힘으로부터 주어진다. 우리는 결코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도, 용서할 수도, 다른 사람을 돌볼 수도 없다. 이런 일들은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소유할 때 가능해진다.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자기의존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견딤과 오래 참음과 기쁨을 누림이다. 견딤은 참을성 내지는 버팀인데 신앙적인 표현으로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역경 가운데서도 견뎌내는 것이다. 오래 참음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사용되는데, 성령께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오래 참으며 신실하게 이루어갈 능력을 주신다. 기쁨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에게서 외적으로 드러나는 표현인데, 하나님께 사랑받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이 우리의 마음에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준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 되었다. 유한하고 부족한 자신을 보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견디고, 오래 참으며,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자. 6월 26일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골로새서 1:18-20)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십자가의 능력 바울은 골로새교인들이 십자가의 능력을 알고 체험하기를 바랐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었다. 하나님은 모든 충만으로 예수님 안에 거하게 하셨는데, ‘충만’은 어떤 것을 가득 채운 그 무엇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모든 총체적인 본성과 속성, 능력과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채우신 것이다. 하나님의 충만을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신 하나님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십자가에 달려서 인간의 죄를 대신 갚게 하심으로 죄로 얼룩진 불의한 세상을 의로우신 하나님 자신과 화목하게 하셨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곧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과 동일하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가슴 속에서 먼저 시작된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셨다. 화목하게 한다는 헬라어 단어는 ‘뒤로’와 ‘화해시키다’의 합성어이다. 현재의 상태에서 창조시의 완전한 조화와 본래적인 사랑으로 되돌려 놓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였던 창조의 상태로 회복되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을 기뻐하시고, 우리 안에 ‘거하기를’ 기뻐하신다. 일시적인 거함이 아니라 계속해서 우리 안에 함께 있기를 원하신다. 전능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주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여서 우리 안에서 함께 사시는 것이 바로 십자가로 인해 우리가 얻게 된 능력이다. 6월 27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골로새서 1:24-29) 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여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그리스도로 덧입은 사람 주님, 내 정신이 여기 있습니다. 내 속에서 당신의 생각을 하시옵소서. 나의 지혜, 나의 지식, 나의 깨달음이 되시옵소서. 주님, 여기 나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당신께서는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염려하지 말라 하셨고, 대신 내가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려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로 필요한 말이라면 침묵으로든지 아니면 말로든지 말하게 하옵소서. 당신처럼 시기적절하고 부드럽게 말할 수 있게 하옵소서. 이제 주님, 여기 나의 몸이 있습니다. 내 얼굴에서, 나의 분위기에서,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들을 안아줄 때 당신의 창조적인 사랑이 나를 통해 흘러 나가게 하옵소서. 그리고 주님, 아무리 비천하고 힘들지라도 당신의 내주하시는 현존으로써 무엇인가를 내가 해야 한다면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내 의지를 통제하옵소서. 주님, 이제 저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당신의 명백한 도구가 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내 생애 동안 내 안에 계시는 영광의 소망, 주님 당신의 현존 속에서 살고자 합니다. 저의 전 존재가 당신을 닮아가기 위해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고백하게 하옵소서. 6월 28일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골로새서 2:6-9) 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그들의 구원을 확신하고, 더 나아가 신앙의 성장을 열망하기를 바라며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권면을 하였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라는 강한 이미지를 사용하여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생들의 삶에 가장 중요하고 완벽한 원천이다. 믿음의 뿌리를 그리스도라는 부요하고 풍성한 토양에 깊이 내리면 내릴수록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더욱 강해질 것임을 바울은 알고 있었다. 두 번째, 세움을 입으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삶과 기독교적 경험이라는 건물의 기초라고 하며, 골로새교인들의 삶이 그리스도를 기초로 하여 그 위에 든든히 세워지기를 원하였다. 그리고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권면한다. 뿌리를 박고, 세움을 입고, 굳게 서는 것은 원어에 수동태로 되어 있는데,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가능한 수동적인 일임을 의미한다. 마지막 동사 ‘넘치게 하라’는 능동태로 표현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의 생활로 응답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능동적으로 해야 할 일임을 알려준다.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삶의 뿌리를 내리고, 그 위에 세워지고 굳게 서서 자라가는 모든 과정이 곧 그리스도와의 교제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되신다. 예수님과 교제함으로써 우리는 모든 것을 소유한 자가 되지만, 그분이 없이는 우리가 세상에서 모든 것을 소유했다고 해도 그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6월 29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골로새서 3:1-4)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위의 것을 찾는 삶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사람은 생각해야 할 것이 있고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인간은 자기가 속해 있는 것의 가치를 상고하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 따라서 위에 속한 자는 위의 것을 생각하고 위의 것을 추구하며, 땅에 속한 자는 땅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완전한 하늘나라에 가기까지는 땅의 것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은 땅의 것을 목적으로 삼지 말라는 것이지 땅의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금욕주의적인 생활을 하라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지상에서의 삶에 대한 책임감과 의무감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위의 것들을 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쉽지 않은 과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마음과 정신은 세속적인 것들에 열중한다.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소망, 새로운 목적,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세속적인 것에 집중하는 옛 사람의 본성을 이겨내며, 이 땅에서의 삶을 위의 것을 찾는 삶으로 변화시켜가야 하겠다. 6월 30일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골로새서 3:12-15)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 우리가 삶의 방식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시간을 사용하고, 자신의 인격이나 개성을 표현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을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중요시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님과 같은 삶의 방식을 갖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사셨던 것처럼 산다는 뜻인 동시에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현재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이끄시는 방식대로 산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이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사람이 된 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값없이 받은 은혜의 선물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옷에 은유하여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는 사도 바울은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 입고’ 사랑의 띠로 온전하게 매라고 말씀한다.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용서, 사랑은 바로 예수님의 성품이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실 때 우리의 삶의 방식을 통하여 드러나게 해주시는 성품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입었다. 서로가 서로를 하나님이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녀로 인식하여 서로의 허물을 용서하고, 나와 다름을 다투지 않고 용납하며, 서로 사랑하면서 평화를 이루어가는 삶의 방식,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내주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며, 예수님을 닮고 따르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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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림교회
2019년 3월 25일
In 365일 말씀묵상
7월 1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사도행전 1:1-9) 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느니라 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끔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자 사도행전은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이라고 시작함으로써 누가복음에 이어서 누가가 ‘데오빌로’라는 어떤 높은 관직에 있었던 사람에게 보내기 위해 기록한 것임을 보여준다. 의사였던 누가는 사도행전 16:8-10절에 의하면 드로아에서부터 바울의 선교여행팀에 합류했다. 누가복음을 포함한 사복음서가 복음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육체로 계시는 동안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무엇을 가르치셨는지를 기록하고 있다면,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약속하신대로 성령이 임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도들이 행한 사역과 그들의 사역을 통하여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에, 그리고 모든 이방인 지역으로 복음이 확산되는 과정을 보고하고 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십 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사도들에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오시기까지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다.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의 권능을 받아서 온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증인으로 살아가라는 과제를 주셨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전파하며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게 하려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을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구원받은 우리의 신분변화, 그리고 앞으로 갈 영원한 하늘나라가 준비되어 있음을 알리는 것이 성령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과제임을 깨닫게 해준다. 7월 2일 성령이 임하시다 (사도행전 2:1-8)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위로부터 입혀질 능력 눅24장49절에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이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고 기록된 대로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과 그 외에 많은 사람들 약 120명이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마가의 집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면서 위로부터 능력이 입혀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 드디어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이 모여 있던 무리들에게 임하여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기 다른 나라 언어들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때에 이스라엘 밖의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던 경건한 유대인들이 오순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 있었는데 이들은 각각 자기가 거주하는 지역의 언어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게 되자 매우 놀라워했다. 오순절은 밀의 첫 수확을 하나님께 바치는 때에 열리는 이스라엘 민족 최대의 농경축제이자 3대 절기 중의 하나이다. 이 날은 풍성한 수확을 감사하는 절기인 동시에 과거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하다. 이 절기에 하늘로부터 성령이 강림하심으로써 이제 신약시대의 오순절은 성령강림을 기념하는 절기가 되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주셔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신령한 능력으로 옷 입게 하셨다. 복음을 전파하며 이 땅 위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는 사명을 감당할 영적 능력을 주신 것이다. 우리도 오늘 하루를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을 덧입기를 간구하자. 7월 3일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시다 (사도행전 2:41-47)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모범적 신앙 하나님은 가장 적합한 시간에, 세밀하게 계획하신 그 때에 약속하신 일을 행하셨다. 약속하신 성령을 오순절에 보내주심으로 말미암아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수많은 사람들, 특히 경건한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사건에 대해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게 되었다. 이들이 그 후 각기 자기가 사는 지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곳곳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세워져 갔을 것을 쉽게 짐작해볼 수 있다. 모이고 흩어지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되어 가는 모습은 오늘날의 예배를 연상하게 해준다. 교회에 모여 예배드리고 다시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고, 다시 모이고 흩어짐을 반복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 확장되어 간다. 베드로는 위로부터 주시는 권능을 입고 성령 충만하여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 복음을 전했을 때 그 날에 믿음을 고백하며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삼천 명이나 되어 최초의 믿음의 공동체에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다. 이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교제하는 가운데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을 뿐 아니라, 각 개인이 소유한 재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며 매일 성전에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였고,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았고, 구원받는 사람들이 날마다 증가하였다. 오늘 날 우리의 신앙은 어떠한지 초대 교회의 모습과 비교해보자. 경건에 힘쓰는 공동체인지, 사랑으로 나누며 교제하는 공동체인지, 믿지 않는 이들에게서조차 칭찬을 받는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면서 초대 교회 성도들과 같은 신앙을 지켜가도록 힘써야 하겠다. 7월 4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사도행전 3:1-9)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뛰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체험하자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있은 후 어느 날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가고 있었다. 나면서부터 못 걷는 한 사람이 성전 문 앞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 구걸하였다. 베드로가 걸인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하며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그가 힘을 얻고 서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베드로가 성령 충만한 모습으로 변화된 것이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나약했던 그가 변화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하는 능력 있는 전도자가 되었다. 둘째,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여 구걸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던 이의 치유와 구원이다. 그는 날마다 성전 문 앞에서 구걸을 하며 살았지만 정작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고 물질만 구하던 영적 불구자이기도 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의 육신의 문제가 해결되었을 뿐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체험함으로써 영혼의 질병까지 치유 받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다. 셋째,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베드로가 능력이 있어 고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의 능력이 그의 육신과 영혼을 치유하였다. 이러한 능력을 우리에게도 주셨는데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은과 금이 없는 것만 안타까워하고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워하지 않으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서 오늘 하루도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을 체험하며 살아가기를 기도하자. 7월 5일 서로의 필요를 돌아보며 나누는 공동체 (사도행전 4:29-37) 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진정한 믿음의 공동체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며 회개할 것을 설교하자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부활을 전하는 것을 싫어하여 이들을 잡아 가두었다. 그러나 이들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이 말씀을 전할 때에 수천 명씩 믿게 되는 놀라운 복음전파의 역사가 일어났다. 사도들은 핍박 가운데서도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되기를, 또한 병자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기도의 응답으로 성령 충만함을 받은 사도들은 열심히 말씀을 전하였고, 믿는 이들은 소유한 재산을 사도들에게 가져와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였다. 바나바라는 사람도 자신의 밭을 팔아 사도들에게 가져왔는데, 그는 후에 안디옥교회에서 바울과 더불어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 받아 복음을 전하는 일에 일생을 헌신하였다. 자신이 가진 재산을 선교와 구제를 위해 쓰도록 내어놓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바로 성령이 임하셨기 때문이다. 성령이 임하셔서 값없이 받은 구원의 은혜를 알게 하셨고, 그 은혜가 너무 크고 귀해서 자신이 가진 물질을 아낌없이 내어드릴 수 있었다. 물질만 나눈 것이 아니라 당시 성도들은 비록 외적으로는 핍박을 받았을지라도 자신에게 임한 영적 은혜를 나누며, 사랑으로 서로를 돌보며 지상에서 이미 천국의 삶을 누렸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우리가 처한 외적인 환경이 어떠할지라도 초대 교회 성도들과 같은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은혜와 사랑과 물질을 나누는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어가기를 소망하며 오늘도 하루를 살아가자. 7월 6일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사도행전 5:1-11) 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 젊은 사람들이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7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가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9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10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위선적인 신앙을 경계하자 4장 후반부에 기록된 바나바의 헌신과 대조적인 사건이 5장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초대 교회 공동체의 긍정적인 이면에 부정적인 모습도 함께 있었음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할 것을 각성시켜준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신들도 영적인 사람이라고 인정받고 싶었다. 그들의 소유를 팔아 그 판값을 사도들에게 같다 내면서 판값의 일부는 감추고, 나머지만 드리면서 전부라고 속였다. 그들의 헌신의 동기는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성도들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들을 내세우고 싶은 허영심, 명예욕에 있었다. 그들의 죄는 실제보다 더 영적으로 보이려는 위선에서 비롯되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위선적 헌신을 영적 분별력을 통해 알고 그들을 책망하였다. 사람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한 것이라는 베드로의 책망을 들은 아나니아는 그 자리에서 죽었고, 이어서 그 아내도 남편처럼 거짓을 말하다가 죽었다. 초대 교회 공동체는 성령의 일하심으로 말미암아 놀랍게 부흥하며 은혜와 성령이 충만한 공동체였지만 위선적인 신앙 또한 존재하는 불완전한 공동체였다. 이런 모습은 오늘날 우리 가운데에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건을 기억하며 나의 신앙이 위선적이지는 않은지, 하나님 앞에 서 있음을 의식하기보다 사람에게 나타내 보이는 것을 더 의식하며 신앙생활 하고 있지 않은지 자신의 내면을 살펴보며 위선적 신앙을 경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하겠다. 7월 7일 일곱 집사를 선택하다 (사도행전 6:1-7) 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5 온 무리가 이 말을 듣고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초대교회의 갈등과 해결 사도들이 박해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성령 충만하여 열심히 복음을 전하자 초대 교회공동체가 급속히 성장하게 되었는데 이런 과정 속에서 교회 내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갈등을 해결하면서 오히려 교회의 조직이 갖춰지고 복음전파의 직무와 봉사의 직무가 분담되는 효과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초대 교회공동체는 이스라엘 본토를 떠나 각처에 흩어져 있다가 고국으로 돌아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헬라파 유대인들)과 본토를 떠나지 않고 살아온 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교회에서 생활이 어려운 성도들을 돌보아 주었는데 어떤 이유에선지 이방 지역에서 돌아온 헬라파 유대인들이 구제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불이익을 당하자 이로 인해 서로 간에 갈등이 생겼다. 열두 사도가 제자들에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 명을 택하여 성도들을 돌보는 일을 맡기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였다. 사도들은 구제와 봉사의 일들을 이들에게 맡기고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고자 함으로써 사역의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정하였다. 일곱 집사를 선택한 후 교회는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으며 질적으로 양적으로 계속 성장하였고, 심지어 복음 전파를 박해하던 제사장들까지 복음을 받아들이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오늘 날 우리의 교회공동체에도 문제가 생기고, 갈등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지혜롭게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교회는 오히려 성장하고 든든히 서 갈 수 있음을 초대교회에서 일어난 일을 통하여 배우게 된다. 7월 8일 스데반의 순교 (사도행전 7:54-60)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들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고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일하심 스데반은 초대 교회공동체 내에서 구제하는 일로 인해 생긴 갈등을 해결하고자 선택한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이었고, 헬라파 기독교인 그룹의 지도자였다. 그는 행6:8에 기록된 것과 같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던 유대인들은 스데반과 심한 논쟁을 하다가 스데반의 지혜를 당하지 못하게 되자 율법을 거스르고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라는 거짓 죄목으로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스데반은 대제사장과 거짓 증인들, 그리고 함께 모여 있는 사람들 앞에서 이스라엘의 지나온 역사를 회고하며 아브라함과 요셉,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행한 이스라엘의 악행에 대해 설교하였다. 이것을 들은 무리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아 스데반을 더욱 미워하게 되었고, 스데반에게 무고한 죄명을 씌워 성 밖으로 내몰아 돌에 맞아 죽게 하였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계신 것을 보았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그를 죽이는데 가담한 이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중보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은 첫 번째 순교자가 된 스데반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사용하실 바울을 예비 하셨고, 복음이 이스라엘 밖으로 확장되는 계기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은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을 공의롭게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서 보게 된다. 7월 9일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의 만남 (사도행전 8:26-39) 26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27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28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29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30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31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32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 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 38 ...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39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한 결과 스데반이 순교한 후 예루살렘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전 지역으로 흩어졌다. 빌립도 박해를 피해 다니며 말씀을 전하던 중 사마리아 성에 가서 복음을 전하며 표적을 행하였고, 그로 인해 그 성에 큰 기쁨이 있었다.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가사로 내려가는 광야 길을 가라고 지시하였다. 한참 복음을 전하며 다니는 중인데 광야로 가라는 성령의 지시에 빌립은 무척 의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길에서 빌립은 유대인의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에디오피아의 재무장관 격인 내시를 만나게 되었다. 이 내시는 아마도 수세기 전부터 에디오피아로 이주해 살던 유대인의 후손으로써 유대교에 충실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가 귀가 길에 수레에서 읽고 있었던 성경말씀은 이사야서 53장이었다. 빌립은 이 말씀에서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그 분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잘 풀어 설명해주었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믿고 받아들인 내시는 믿음의 고백으로 즉시 세례를 받았다. 빌립이 자칫 성령의 음성에 소홀하여 광야 길로 가지 않고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 전도하기를 더 기뻐하였다면 그는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할 절묘한 타임을 놓쳤을 것이고, 그를 통해 에디오피아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될 수 있는 기회도 놓쳤을 것이다. 오늘 우리도 성령께서 세미한 음성으로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귀 기울여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7월 10일 믿는 자를 핍박하는 사울 (사도행전 9:1-9)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예수님을 만난 사울 사도행전 8-12장은 1:8의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신 말씀이 성취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지리적으로는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유대, 사마리아, 시리아 안디옥까지 확장되어 가는 것과, 복음 전파의 대상이 유대인에서 이방인으로 전환되어 가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스데반의 순교를 기점으로 초대 교회에 불어 닥친 박해의 선봉에는 사울이 있었다. 스데반의 죽임 당함을 마땅하게 여긴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잡아서 처형하는 일에 앞장섰다. 다메섹은 예루살렘 동북쪽으로 약 200km 떨어진 도시인데 박해를 피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사울은 이렇게 먼 곳까지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갈 만큼 박해에 열심이었다. 이런 박해자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 하늘의 광채 속에서 들려오는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초대 교회의 극악한 핍박자 사울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충실한 일꾼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복음전도자 바울로 변화되는 순간이었다. 이 장면을 미켈란젤로, 카라바조, 렘브란트 등 유명한 화가들이 그림으로 표현하였는데, 카라바조의 그림이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예수님께서 찾아오시면,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면 변화가 일어난다. 주님은 핍박자까지도 변화시키셔서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사용하신다. 우리에게도 주님으로 만남으로 인한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기를 소망하자! 7월 11일 복음 전파를 위해 택한 그릇 (사도행전 9:15-25)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4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은 갑자기 그를 둘러 비추는 빛을 보았고, 빛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다. 빛과 음성은 태초의 하나님의 창조를 생각하게 하는 단어들이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새로운 사람으로 만드시려고 직접 찾아오신 것이다. 빛으로 인해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사울을 인도하기 위해 하나님은 다메섹에 있는 아나니아를 사울에게 보내셨다. 아나니아를 만난 사울은 성령으로 충만해졌고, 다시 보게 되었으며 믿음의 고백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 후 각 회당에 다니면서 자신이 핍박하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갑작스러운 변화로 인해 전에는 동료였던 유대인들로부터 오히려 죽음의 위협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하나님은 복음 확장을 위해 핍박자 사울을 선택하셨다.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친히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사울을 통해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필요한 때에 필요한 사람을 들어 그 분의 나라를 세워가신다. 사도 바울, 어거스틴, 요한 웨슬리, 마르틴 루터 등 하나님 나라를 위해 특별히 택함을 받았던 많은 이들이 비록 육신의 세상에서는 심한 고난을 받았으나 교회의 역사에서 빛나는 이름이 남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하늘의 영원한 면류관을 얻었다. 이 시대에도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위해 일꾼들을 부르시고 세우시며 변화시키신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이사야 6:8의 고백과 같이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하는 사명적 신앙을 가져야 하겠다. 7월 12일 백부장 고넬료와 베드로의 환상 (사도행전 10:1-9) 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3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5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6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 9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10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메어 땅에 드리웠더라 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거늘 14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 대 15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확장되어 가는 하나님의 나라 고넬료가 있던 가이사랴는 팔레스타인에 있는 로마식 도시, 즉 로마의 행정부처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로마 병사 백명을 거느리는 높은 지위에 있었던 고넬료는 복음의 진리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도에 힘쓰는 사람으로 경건하고 관대하며 성실했다. 하나님은 고넬료를 통해 많은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이루기 위하여 그에게 천사를 보내어 욥바에 머물고 있는 베드로를 불러 오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방인들과는 교제를 하지 않았는데, 이런 유대인의 선입견에 젖어 있는 베드로로 하여금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자 하나님은 그에게 환상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고 고넬료에게 간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모여 있던 그의 친척,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보았다. 베드로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선입견을 버리고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하나님은 복음의 확장을 위해 하나님의 사람을 부르시고 준비시키신다. 이방인의 구원을 위하여 고넬료와 베드로를 준비시키셨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사마리아인들에게, 나아가 이방인들에게 까지 복음을 전함으로써 변화의 시대에 주어진 특별한 사역을 완성하였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어떻게 다듬으셔서 사용하실지 기대해보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옳지 못한 선입견과 자존심, 교만함을 고쳐주시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우리를 마음껏 사용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고 맡겨드리자. 7월 13일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어지다 (사도행전 11:19-26) 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지다 스데반의 죽음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박해를 피해 흩어진 제자들이 사마리아, 베니게(페니키아)와 구브로(키프로스), 안디옥에 이르기까지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 중요한 유대인 공동체를 포함하여 많은 외국인들이 살고 있었던 안디옥은 당시 로마제국에서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큰 인구 50만 명의 대도시였다. 이곳에서 복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었고, 주의 손이 말씀 전하는 이들에게 함께 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파송하였다. 바나바는 안디옥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면서 고향 다소에 머무르고 있던 바울을 안디옥으로 데리고 와서 함께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며 교회를 세워나갔다. 바나바와 사울의 동역으로 안디옥 교회는 크게 성장하였고, 이곳에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공동체가 비기독교인들에 의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기 시작하였다. 이후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 교회의 중심지가 되었고 바울의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의 출발지이자 선교 기지가 되었다. 스데반의 순교와 박해, 그리고 흩어짐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복음이 이방지역으로 확산되며 곳곳에 교회가 세워진 것을 보면서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 이에게 어려움과 환난이 닥칠지라도 사람의 시각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믿고 낙심하지 말아야 하겠다. 7월 14일 안디옥교회의 바울과 바나바 파송(사도행전 13:1-9) 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5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6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 7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8 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 구브로에서의 전도 사역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새로운 시대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도록 하나님이 특별한 방법으로 세우신 바울이 선교무대의 중심에 등장한다. 안디옥 교회에서 교사와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맡겨진 사역을 감당하며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을 때 성령께서 특별한 계시를 주셨다. 바나바와 사울을 택하여 세워서 선교사로 파송하라는 것이었다. 교회는 이를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한 후 구브로(키프러스)의 동쪽 해안에 위치한 살라미(Salamis)로 보냈다. 바나바의 고향이기도 한 살라미에는 유대인이 많이 살고 있었고, 유대인 회당이 여러 군데 있었다. 두 전도자는 유대인 회당을 중심으로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면서 차츰 자연스럽게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여행에 마가 요한이 동행했는데, 그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안디옥으로 와서 바울과 바나바를 도와 안디옥 교회를 섬기다가 1차 전도여행에 동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부터 히브리식의 사울(‘간구하다’라는 뜻)의 이름이 로마식의 바울(‘작은 자’라는 뜻)로 바뀐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바울의 생애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음을 알리는 표식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이 구브로에서 행한 첫 번째 사역은 전도를 방해하던 거짓 선지자 마술사 엘루마를 제압한 일인데 이 사건을 통해 다시 한 번 선교의 주역은 성령이시며, 인간은 성령 하나님의 조력자, 도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7월 15일 바울과 바나바의 갈등 (사도행전 15:30-41) 30 그들이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31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32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33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34 (없음) 35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타고 구브로로 가고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바울의 2차 전도여행 1차 전도여행에서 돌아와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하던 바울은 1차 전도여행 중 세웠던 교회들을 다시 돌아볼 것을 바나바에게 제안하였다. 안디옥 교회는 이제 어느 정도 자립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성장하였다. 반면 다른 지역 교회들은 매우 미약하여 항상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를 걱정한 바울은 두 번째 전도여행을 가고자 한 것이다. 바울의 제안에 동의한 바나바는 이번에도 마가를 조력자로 데리고 가자고 하였다.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이며 1차 여행에 동행하며 도왔던 인물이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마가는 버가에서 일행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다. 아마도 선교여행길에서 겪는 고통을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워 혼자 돌아갔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이로 인해 바울은 마가를 불신하게 되었고, 2차 여행에 다시 마가를 데리고 가자는 바나바와 심히 다툰 후 두 사람은 갈라서게 되었다. 그후 바나바는 마가를 조력자로 데리고 구브로로 향했고, 바울은 실라를 조력자로 택하여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을 다녔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첫째,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사단이 방해한다는 것이다. 둘째, 같은 목적을 가지고 일하는 동역자 사이에도 갈등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 간에도 신앙의 근본적인 면에서는 일치하지만 실천적인 면에서는 의견차이가 있을 수 있다. 우리는 때로 이런 차이 때문에 갈등하고 마음이 상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분의 영광을 위하여 인간들의 실수와 실패, 갈등조차도 주관하신다. 마가의 실패, 바울과 바나바의 갈등은 오히려 선교 팀이 한 팀에서 두 팀으로 늘어나 선교의 지경을 넓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7월 16일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사도행전 16:6-15)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11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 12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13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15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성령의 지시에 민감한 사람 루스드라와 더베에서 디모데를 동역자로 삼고 2차 전도사역을 이어가던 바울은 계속해서 소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비두니아 쪽으로 가고자 하였다. 하지만 어떠한 일이었는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바울은 성령의 제지를 받아 소아시아로 갈 수 없었다. 이에 방향을 바꾸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을 거쳐 비두니아 지역으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성령께서는 그 길마저도 제지하셨다. 이렇게 되자 바울은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고 드로아에서 하나님의 뜻을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이때 하나님께서 환상을 통해 바울의 발길을 유럽으로 돌리게 하셨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바울은 즉시 그곳으로 떠나기를 힘썼는데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바울을 부르신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바울이 전도사역에서 철저하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랐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바울 일행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며 유럽으로 통하는 관문이기도 한 빌립보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만난 한 여인 옷감장사 루디아가 복음을 받아들여 빌립보 교회의 출발점이 되었을 뿐 아니라 이후 바울의 전도사역을 위해 물질적으로 크게 헌신하였다. 사람이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도 바울과 같이 성령의 지시에 민감하여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어드리는 삶이 되어야 하겠다. 7월 17일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사도행전 16:24-34) 24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27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여 하거늘 28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29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30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니라 33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34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간수를 구원한 죄수 기도처로 가는 도중 점치는 귀신들린 한 여종을 만난 바울은 예수의 이름으로 그녀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고 고쳐주었다. 여종의 주인들은 바울 때문에 여종이 점을 쳐서 벌어다주던 수입이 끊기자 바울을 모함하여 고소하였고,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관원들에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찬양하며 기도하였다. 그 때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며 모든 죄수들의 매인 것이 벗어졌다. 자다가 옥문이 열린 것을 본 간수는 죄수들이 다 도망갔을 것으로 생각하고 책임 추궁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죽으려하였다. 그때 바울은 자신이 도망가지 않았음을 알려주었고, 간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였다. 그 결과 간수와 그 집 모든 사람들은 믿고 세례를 받아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바울은 옥에 갇혀서도 기도하고 찬송함으로써 다른 죄수들에게 하나님 믿는 사람의 담대하고 평안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자기에게 온 기회를 자기만을 위해 즉각적으로 이용하지 않았다. 옥문이 열렸을 때 도망갔다면 간수는 자살했을 것이고, 그와 가족들은 구원받을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도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하나님을 의뢰하고 찬양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신앙을 지녀야 하겠다. 눈앞에 보이는 유익을 따라 행동하지 않고,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실 것이다. 7월 18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사도행전 18:23-28) 23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 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25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히 풀어 이르더라 27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함으로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영접하라 하였더니 그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28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 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 전도자 아볼로의 변화 2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간 바울은 곧 다시 3차 전도여행을 시작하였다. 3차 전도여행의 핵심은 3년 동안이나 머물렀던 에베소에서의 전도사역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의 전도여행의 특징은 중요 도시, 해안의 항구도시들을 주로 다녔다는 점이다. 이런 곳들은 많은 사람들, 여러 나라 사람들이 왕래하고 있어서 복음 전파의 효과가 큰 곳이기도 하다. 이런 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가르쳤으며. 자신이 복음 전한 곳을 다시 들러서 그들을 재교육하여 믿음에 든든히 서게 하였다. 에베소에 알렉산드리아 출신인 아볼로라는 유대인이 있었다. 그는 구약성경은 물론 헬라 철학과 웅변술, 수사학에 능통한 사람이었는데 에베소에 와서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볼로는 정작 복음의 핵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나게 되어 그들로부터 복음의 진수를 깨닫게 되었고, 이후 초대 교회의 핵심적인 전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 변모하였다. 바울은 훗날 아볼로의 복음사역을 가리켜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고전3:6)라고 고백하였다. 아볼로는 많은 학문과 지식을 겸비한 사람이었으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가르침을 겸손하게 받아들였고,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즉시 아가야지방으로 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믿는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다. 하나님과 복음 앞에서 겸손하고, 복음을 담대히 전하는 아볼로의 태도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모습이다. 7월 19일 요한의 세례와 성령의 세례 (사도행전 19:1-9) 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3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4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더라 8 바울이 회장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9 어떤 사람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에베소의 성령강림 사도 바울은 2차 전도여행에서 귀환하는 길에 에베소에 들러 복음을 증거했으나 지극히 짧은 시간 머물렀고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장에 소개된 대로 바울이 떠난 후 도착한 아볼로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다.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시작하며 에베소에 도착했을 때 바울은 이들의 신앙이 불완전하고 미숙한 것을 보게 되었다. 에베소에 있던 신자들은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 세례에 대해서는 무지하였고 단지 요한의 세례, 물세례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다.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심을 믿고 세례를 받을 때에 성령의 임재를 체험했냐는 질문이었다. 성령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고 대답한 이들에게 지금까지 잘못 알고 있던 복음의 진리를 자세히 가르친 후 바울이 세례를 베풀고 안수하자 이들에게도 성령이 임하였는데, 모두 열두 사람쯤 되었다. 이들은 거듭남의 체험과 성령께서 베푸시는 영적 은혜와 은사를 경험하였고, 이후 에베소 교회의 핵심 구성원이 되었다. 그래서 혹자는 이 일을 가리켜 ‘에베소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은 단지 물로 세례를 받는 행위로만은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 자신의 구주가 되심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이제는 과거의 자신은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간다는 믿음의 고백의 표시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임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로 연결시켜 주신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날마다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체험하며 살고 있는지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자. 7월 20일 드로아에서 밀레도까지의 여정 (사도행전 20:13-16) 13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14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태우고 미둘레네로 가서 15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르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16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혼자의 시간 드로아에서 바울이 말씀을 강론할 때 유두고라는 청년이 삼층에서 듣고 있다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죽는 사건이 생겼다. 이 청년을 바울이 다시 살려냄으로 인해 드로아에 있는 성도들은 오히려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큰 위로와 기쁨을 얻게 되었고, 교회의 큰 시험이 될 수 있었던 사건이 은혜롭게 해결되었다. 이튿날 바울은 드로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하였는데 위의 성경 말씀은 바울이 밀레도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이 간결하게 소개되어 있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그의 일행을 배에 태워 먼저 보내고 자신은 해안 도로를 따라 걸어서 여행한 후 미리 약속한대로 앗소에서 일행과 합류하여 배에 승선하였다. 드로아에서 앗소까지는 약 40km 되는 거리이다. 바울은 혼자 이 길을 걸어가는 동안 지나온 험난한 선교여정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사명을 재다짐하고, 앞으로 예루살렘에서 받게 될 환난에 대비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영적인 충전의 시간을 가졌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믿음의 사람들이 어떤 문제를 두고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깊은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귀한 일이다. 예수님도 인류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도록 홀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을 결단하는 시간을 가지셨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도 바울처럼 홀로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고 이러한 시간을 갖기에 힘써야 하겠다. 7월 21일 에베소 교회를 위한 바울의 고별설교 (사도행전 20:17-24) 17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18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 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1 유대인이나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의 신앙고백 앗소에서 바울과 합류한 일행은 미둘레네 → 기오 → 사모를 거쳐 밀레도에 이르렀다. 밀레도는 바울이 3년간 목회한 에베소와 매우 가까운 곳이었다. 바울은 오순절까지는 예루살렘에 도착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3차 전도여행에서의 귀환길에 에베소에는 들르지 않고, 대신 에베소의 장로들을 밀레도에 오게 하여 그들에게 고별설교를 하였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을 서두른 이유는 오순절을 지키고자 예루살렘에 모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마게도냐와 아가야지방의 교회에서 모금한 헌금을 속히 전달하여 예루살렘의 교회와 이방인 교회가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된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설교하면서 자신이 유대인의 박해 속에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누구에게든지 어디에서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음을 회고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하는데 그곳에서 어떤 고난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이미 성령께서 알려주셨지만 자신의 생명보다 하나님의 복음을 더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함을 알렸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는 바울의 신앙고백을 통해 바울의 인격과 용기, 믿음의 열정과 헌신을 느끼게 된다. 바울의 고백은 나태하고 무디어진 우리의 영혼을 흔들어 과연 우리가 오늘 신앙인으로서 어떤 믿음으로 살아야할지 생각하게 한다. 7월 22일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가는 바울 (사도행전 27:1-9) 1 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2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항해할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3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대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받기를 허락하더니 4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맞바람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항해하여 5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 시에 이르러 6 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7 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 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하지 않으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바람막이로 항해하여 8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 시에서 가깝더라 9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누가와 아리스다고의 동행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서둘러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바울은 그곳에서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투옥되었고, 드디어 그렇게 가기를 원했던 로마를 향해 죄수의 신분으로 떠나게 되었다. 외형적인 이유는 바울이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로마의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기 위한 것이었지만 실상은 로마에 복음을 전하기 원하는 바울의 소망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붙잡혀가는 바울의 모습은 마치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죄인과 같이 되시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 로마로 가는 뱃길에 누가와 아리스다고가 동행하였는데, 누가는 사도행전의 저자로 마게도냐부터 줄곧 바울과 동행하였다. 누가는 바울을 로마로 보내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로마에까지 이르는 여정을 세밀하게 기록함으로써 복음이 어떻게 세계에 확장되어 갔는지 증거하고 있다. 아리스다고는 데살로니가인으로 에베소에서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된 적이 있으며,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2년 동안 투옥되어 있을 때에도 바울의 필요를 돌보아주었다. 누가와 아리스다고의 동행은 로마까지 가는 머나먼 뱃길의 위험과 죄수의 신분으로 끌려가는 곤고한 바울에게 도움과 위로가 되었을 것이며, 로마에서의 전도활동에도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바울이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으므로 그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은 바울에게 필요한 사람들을 붙여주시고, 모든 환경과 여건을 복음전파에 초점을 맞추어 이끌어 가셨음을 깨닫게 된다. 7월 23일 폭풍 속에서의 구원 (사도행전 27:30-44) 30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체하고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 놓거늘 31 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32 이에 군인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 33 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 나흘인즉 34 음식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하고 35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36 그들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37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명이더라 ... 42 군인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그들을 죽이는 것이 옳다 하였으나 43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그들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44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조되니라 사단의 방해와 하나님의 승리 로마로 향하는 뱃길에서 백부장과 선장은 바울의 충고를 무시하고 항해를 고집하다가 유라굴로라는 태풍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다. 배에 탄 사람들의 생명이 위험하였으나 바울은 하나님의 사자가 자신에게 찾아와 아무도 생명에 손상을 입지 않으리라고 말해준 것을 전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을 위로하고 안심시켜주었다. 14일이 지나서 그 배는 멜리데라는 섬 근처에 이르렀다. 배가 육지에 가까이 온 것을 눈치 챈 선원 들은 비겁하게 자신들만 살고자 배에 싣고 다니던 구명정으로 도망하려고 했다. 바울은 이들의 비겁한 행동을 간파하고 백부장과 군사들의 힘을 빌려 이들의 도망을 저지하였다. 백부장은 풍랑을 만나기 전에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신뢰하였으나 이제는 바울의 말이 옳았던 것을 체험했기 때문에 바울의 지시에 전적으로 순종하였다. 바울은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권하여 음식을 먹게 하고 위로하면서 소망과 평안을 불어넣어주었다. 자신도 함께 고통을 겪고 있었지만 다른 이들을 위로하고 권면함으로써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없으며 진정한 평안과 안전이 있음을 증거하였다. 바울은 신앙적 리더십을 발휘하여 위기에 처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하였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죽음의 위험에서 구조된 이들 중 많은 사람이 바울로 말미암아 영적으로도 구원받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사단은 바울이 로마로 가는 것을 막으려 했으나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다. 나아가 하나님은 바울 한 사람으로 인하여 275명을 살려주셨다. 7월 24일 멜리데 섬에서 일어난 이적 (사도행전 28:1-10) 1 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2 비가 오고 날이 차매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3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으로 말미암아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4 원주민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하더니 5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러 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6 그들은 그가 붓든지 혹은 갑자기 쓰러져 죽을 줄로 기다렸다가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이켜 생각하여 말하되 그를 신이라 하더라 7 이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머물게 하더니 8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9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10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실었더라 멜리데 섬을 복음화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바울과 그 일행이 풍랑 가운데 도착한 섬은 멜리데섬이었다. 그곳 원주민들이 바울 일행을 맞이하여 불을 피워주었는데, 바울이 독사에 물리는 사건이 생겼다. 원주민들은 바울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바다에서 살아 나왔을지라도 결국 뱀에 물려 죽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바울이 죽지 않고 아무 이상이 없는 것을 보고 놀라 바울을 신으로 여겼다. 멜리데 섬에 원주민의 대표되는 보블리오라는 사람이 바울 일행에게 친절을 베풀어 그의 집에 묵게 하였는데, 그의 부친이 병에 걸려 누워있는 것을 바울이 기도하고 안수하여 고쳐주었다. 섬 가운데 살던 다른 병자들도 바울을 찾아와 병 고침을 받았다. 이 두 가지 사건으로 인해 바울은 보블리오와 원주민들에게 신적인 존경을 받게 되었고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바울은 당연히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것이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놀라운 속도로 멜리데 섬 전체에 전파되었을 것이다. 결국 이 두 사건은 멜리데 섬을 복음화하기 위한 성령의 역사이며 하나님의 섭리인 것을 알 수 있다. 전승에 의하면 보블리오는 멜리데의 최초의 감독이 되었다가 순교했는데, 지금도 멜리데 (현재의 말타섬)에는 보블리오 기념교회가 서 있다. 또한 초대 교회가 박해를 피해 예배를 드리던 지하 묘지 카타콤이 발견됨으로써 멜리데 섬이 일찍이 복음화되었던 역사성이 입증되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모든 환경을 주관하시고, 세밀하게 계획하시며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손길을 바울의 모든 선교여정에서 깨닫게 된다. 7월 25일 바울의 로마에서의 전도사역 (사도행전 28:23-31) 23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께 대하여 권하더라 24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르리라 하더하 29 (없음) 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한 사람 로마에 도착한 사도 바울은 일반 죄수들과는 달리 따로 셋집을 얻어서 그를 지키는 군인 한 명과 기거하였다. 셋집에 두 해를 머무르며 바울은 그를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담대하고 거침없이 가르쳤다. 자신의 지상에서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는 바울이 혼신의 힘을 기울여 복음을 전했을 것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애써 전하는 복음을 듣고 믿은 사람도 있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구원의 문 앞까지 갔으나 돌아서서 멸망의 길로 가는 사람들은 그 때나 지금이나 있다. 누가는 바울의 마지막 순간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고 셋집에서 2년 간 복음을 전했다는 말로 바울의 선교행적을 마무리하고 있다. 사도행전의 기록 목적이 바울의 전기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소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누가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 증거 사역이 당시 제국의 중심인 로마에까지 이루어지는 과정을 기록함으로서 기록목적을 완수하였다. 바울은 오늘날 우리들이 필수적으로 사용하는 현대적인 장치들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복음에,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는지 바울은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바울의 삶은 발전된 세상에서 많은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며 편안히 살고 있으면서도 전도하지 못하고, 자신의 믿음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운지를 보게 해주는 거울이다. 7월 26일 바울의 감사와 기도 (빌립보서 1:3-11)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6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의 사랑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중에 전도한 옷감 장사 루디아와 점치는 귀신들린 소녀(행16:13-18), 빌립보 감옥의 간수(행16:23-24)가 회개한 결과 세워진 마게도냐 지역 최초의 교회이다. 바울은 이 교회가 든든하게 세워져 가는 것으로 인해 큰 기쁨을 얻었다. 원래 바울은 아시아로 가기를 원했으나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부르는 환상을 보고 이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인줄 깨달아 마게도냐 지역 빌립보로 가게 되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들을 위해 기쁨으로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고백한다.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이 처음 그곳에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우게 된 때부터 바울이 옥중에 갇혀 있는 현 시점까지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기도와 물질로 그의 사역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빌립보 교인들의 사랑과 헌신에 감사하며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적 사랑에 참된 지식과 총명을 겸비하여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를 깊은 사랑의 마음을 담아 기도한다. 나아가 빌립보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자들이 되기를 간구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지도자로서 성도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이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는 바울과 기도와 물질로 바울의 전도사역에 헌신적으로 참여하는 빌립보 교인들 간의 아름다운 협력과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상호 간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목회자와 성도들 간에 이루어야할 좋은 본보기가 된다. 7월 27일 그리스도의 겸손 (빌립보서 2:1-11)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교회의 일치를 위한 권면 빌립보서에는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씀과 함께 기쁨, 기뻐하라는 단어가 자주 나와 기쁨의 서신이라고도 부른다. 빌립보교회가 몇 가지 문제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바울이 그 문제를 해결하도록 권면하고자 편지를 써서 보낸 것이 바로 빌립보서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 간의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서로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길 것을 권한다. 교회의 일치를 위해서는 겸손한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겸손한 마음이 없이는 다른 이를 돌아볼 수 없으며 서로가 한 마음 한 뜻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겸손의 본으로써 그리스도를 제시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어 인간의 몸으로 인간의 세상에 오신 것이야말로 겸손의 극치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이시다. 그는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주재자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신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셨으며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다. 예수님의 순종과 겸손으로 인해 우리는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한 주로 섬기는 성도들이 서로 다투거나 분열하는 것은 전혀 옳지 않은 일이며,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로 연합해야 한다는 사실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사도 바울의 권면을 따라 오늘 우리도 겸손한 마음으로 성도들 서로를 돌아보며 섬기는 일에 힘써야 하겠다. 7월 28일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살라 (빌립보서 2:12-18)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그리스도인의 성화를 위한 권면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성도들 간의 갈등을 극복하고 성숙한 신앙생활의 단계로 나아가도록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를 귀하게 여겨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지켜가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구원받고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진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점점 더 온전하고 거룩한 믿음의 단계로 성화되기를 힘써야 한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마음속에 소원을 일으키셔서 성도들로 하여금 소원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성도들 안에서 그 소원을 행하심으로 성도들이 자신이 소원하는 바를 행하고 이루게 하신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신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성령의 교제 안에서 연합하고 구원을 이루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위해 우리 가운데 주신 소원을 이루고자 애쓸 때 성도 간에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게 해야 하고, 흠이 없고 순전하여 세상에서 빛으로 나타나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행할 때 이것이 세상에 하나님의 빛을 비추는 일인가 깊이 생각해보자. 나아가 다른 이들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자. 원망하고 불평하는 마음은 그리스도인의 성화를 방해한다. 7월 29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 (빌립보서 3:7-14)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나는 무엇을 자랑하는가? 사도 바울은 부유한 히브리인 집안에서 태어나 유명한 율법학자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을 받았고 유대 사회의 기득권층인 바리새파에 속해있었다. 세상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엘리트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성장배경과 유대교 신앙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한 열성 유대교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이후 지금까지 자랑으로 여겼던 자신의 모든 육신적인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기게 되었다는 가치관의 변화를 고백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외적인 자랑거리를 내버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 되어 일생동안 복음을 전하며 숱한 고난 가운데서도 끝까지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믿음의 인내를 하였다. 무엇이 바울을 이렇게 변화시켰을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고 귀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유대사회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특권들을 자신에게 유익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왔으나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방해하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후 다시금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가장 귀한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우리도 우리가 가진 것을 자랑하고,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자 애쓰며 살았다. 만일 우리가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기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외적인 것을 자랑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가치관의 변화를 고백하지 못한다면 아직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 7월 30일 주 안에서 기뻐하라 (빌립보서 4:4-9)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기쁨의 근원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빌립보서를 기록하였다. 옥에 갇혀 있는 고난 중에서도 근심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신변을 염려해 걱정하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 자신이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하는 비결을 깨달았을 뿐 아니라 (4:13) 바울 자신에게 있어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1:21, 갈2:20). 바울이 말하는 기쁨은 세상 사람들이 경험하는 기쁨과는 다른 것이다. 어려운 형편 가운데도, 힘든 일을 만났을 때에도, 병이 들어도, 가난해져도 기뻐하며 아무 일에든지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 기쁨이다. 성도들은 이러한 기쁨을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안에서 누리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을 알고 계시고, 우리의 간구를 듣고 계시며,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이유와 근원은 하나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우리가 구하는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말씀드릴 수 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 그분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자녀들에게 육신의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을 채워주실 뿐 아니라 평강을 주셔서 마음과 생각이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향할 수 있도록 지켜주신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동안 무엇이 나를 기쁘게 하는가 생각해보자. 사도 바울처럼 주님이 나의 기쁨의 근원되심을 고백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하자. 7월 31일 빌립보 사람들의 선물 (빌립보서 4:10-17)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 17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사도 바울의 감사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있다. 빌립보 교인들의 지속적인 물질적 지원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자신이 단지 물질로 인하여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물질 속에 담긴 빌립보 교인들의 사랑과 믿음 때문에 감사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바울은 자신의 고백과 같이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하는 법을 배웠고(11-13절),어떠한 형편에서든지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필요한 모든 일들을 할 수 있음을 체험하였고,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자신을 사랑하여 물질로 도우며, 그의 복음 전파 사역에 동참한 그 마음과 믿음을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또한 자신의 감사하는 마음을 전달함으로서 빌립보 교인들이 사랑과 신앙으로 더욱 굳게 서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바울의 전도로 인해 세워진 빌립보교회의 교인들과 바울의 사랑과 신뢰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관계는 우리에게 귀감이 된다. 자신이 전도한 성도들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그들의 신앙 성장을 위해 기도하고 권면하는 사도 바울과 자신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준 바울에게 항상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물질과 기도로 협력하는 빌립보 교인들의 모습은 오늘 우리들도 본받고 따라야 할 사역자와 성도의 관계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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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림교회
2019년 3월 25일
In 365일 말씀묵상
8월 1일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수아 1:1-6) 1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3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4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5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6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여호수아서의 기록 목적 여호수아서의 대부분은 여호수아 생전에 기록되었으나 세부적인 내용이 첨가되고 최종 완성된 것은 사사시대 초기(BC 1370-1330)이다. 사사시대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완전히 정복하는데 실패한 것은 물론 신앙이 계속 해이해진 결과 사회는 부패하고 이민족의 압박으로 괴로움을 겪으며, 서로 분열하여 하나님의 언약백성,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영광이 실추된 때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아래 최종적으로 완성된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땅을 차지하게 된 것이 그들의 군사력이나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니라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며 그 분의 뜻에 따라 살 것을 권고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여호수아의 시대를 살고 있다. 종살이 하던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소망,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가야 하는 도상에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져야 할 가장 강력한 무기는 거룩함과 순종이다. 개인적인 거룩함과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무장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함과 순종의 무기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흘러가게 할 수 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 하는 과제를 맡게 된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자. 8월 2일 하나님의 명령 (여호수아 1:7-9) 7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죄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9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 여호수아는 모세가 죽은 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물려받았다. 돌아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정복해서 자신들의 삶의 터전으로 삼아야 할 땅이 그의 앞에 놓여있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서있었던 강력한 지도자 모세의 시종으로 40년간 모세를 따르면서 그로부터 배웠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하신 위대한 일들을 전부 목격하였다. 모세가 40년간 애굽의 궁전에서, 40년간 광야에서 훈련을 받았다면 여호수아는 출애굽 후 40년간의 광야생활 동안 모세 밑에서 훈련 받은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고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생활, 교회생활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고 모난 것, 더러운 것, 악한 것을 고치게 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행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 의해 준비된 사람일지라도 눈앞에 놓인 험한 현실을 바라볼 때, 새로운 사명을 감당해야 할 때,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할 때 두려움이 생긴다. 이러한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은 두려움을 없애주시기 위해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것처럼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시며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확인시켜주신다. 우리 앞에 어려운 과제나 감당하기 힘든 문제가 있어 두려움이 생긴다면 강하고 담대하라고 명령하시며 어디를 가든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두려움을 이기고 앞으로 나아가자. 8월 3일 정탐꾼과 기생 라합 (여호수아 2:15-21) 15 라합이 그들을 창문에서 줄로 달아내리니 그의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주하였음이라 16 라합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렵건대 뒤쫓는 사람들이 너희와 마주칠까 하노니 너희는 산으로 가서 거기서 사흘 동안 숨어 있다가 뒤쫓는 자들이 돌아간 후에 너희의 길을 갈지니라 17 그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이 맹세에 대하여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리니 18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손을 대면 그의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 21 라합이 이르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에 매니라 이방 여인 라합의 믿음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나안 땅을 점령해 자신들이 살아갈 땅으로 만들어야하는 지도자로 세움 받았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영적인 전쟁의 의미로 받아들여지는데, 하나님은 우리가 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 영혼들에게 말씀의 능력으로 들어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나가는 영적인 지도자로 일하기를 원하신다. 요단강을 건너기 전 여호수아는 먼저 정탐꾼 2명을 보냈다. 이들은 기생 라합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목숨을 보전하였고, 무사히 정탐을 마치고 돌아올 수 있었다. 생명을 구해 준 보답으로 이들이 여리고성을 공격할 때 라합의 가족이 창문에 붉은 줄을 매달고, 집안에 모여 있으면 살려주기로 약속하였다. 애굽에서 모든 장자들이 죽음을 당할 때 어린 양을 잡아 그 붉은 피를 문에 바른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죽음을 피했던 사건, 나아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기억하게 한다. 이전에 모세가 보냈던 12명의 정탐꾼 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은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사람의 눈으로 판단하다가 실패하여 광야에서 죽었고, 다른 이들을 고통의 길로 이끌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보낸 두 명의 정탐꾼은 같은 가나안땅을 정탐하였으나 그들이 만난 기생 라합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 (2:9)’라는 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방인이었으나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던 라합은 믿음으로 일가친척들을 살렸을 뿐 아니라 다윗의, 조상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8월 4일 요단을 건너는 하나님의 백성 1 (여호수아 3:1-6) 1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건너가기 전에 거기서 유숙하니라 3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4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 5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6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나아가니라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 가나안 정복에 앞서 정탐꾼들의 보고를 받은 여호수아는 백성들과 함께 싯딤을 떠나 약 12km 떨어진 요단강 앞에 이르렀다. 그는 이곳에서 3일을 머무르며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하였다. 어떤 일을 앞두고 묵상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우리는 때로 성급하게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따라 하나님보다 먼저 나섰다가 실패와 좌절을 경험한다. 중요하고 바쁠 때일수록 오히려 기도하며 잠잠히 기다리는 중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자 하는 여호수아의 자세는 우리가 새겨야 할 신앙의 모범이다. 3일을 머무른 후 여호수아는 제사장들로 하여금 언약궤를 메고 맨 앞에서 행진하고 백성들은 이천 규빗 정도 뒤에서 따라가라고 지시하였다. 이천 규빗은 약 900미터이다. 언약궤에는 십계명을 새긴 돌판이 들어 있어 하나님의 말씀,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앞서 가고, 백성들이 따르는 것은 곧 앞장서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와 순종으로 따르는 자세를 의미한다. 여호수아는 언약궤와 백성 사이에 간격을 두어 행진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주권과 영역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백성의 자세를 가르쳐준다. 매일 매일 새로운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도 우리의 새 날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영역을 인정하며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로 나아가야 하겠다. 8월 5일 요단을 건너는 하나님의 백성 2 (여호수아 3:14-17) 14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15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16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17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 순종을 통해 체험하는 기적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려고 하던 때는 밀과 보리를 거두는 시기였다. 한국으로 치면 3,4월에 해당되는데, 이 시기에는 강수량이 가장 많고 헬몬산의 눈이 녹아 내려 때로 강폭이 1km이상으로 불어나며 수심도 3-4m 정도로 깊어진다. 하나님은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에게 요단강에 이르면 강물로 들어가라고 지시하면서,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강 물을 밟고 서면 물이 멈출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앞으로 싸울 족속들을 쫓아내실 것이라는 증거라고 말씀하셨다. 언약궤를 멘 채 빠르게 흘러가는 요단강물에 발을 넣고 나가야 하는 제사장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의지를 죽이고 말씀에 순종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 사해를 향해 흘러가던 물이 끊어졌고, 요단강의 바닥은 말라 굳어졌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이 된 요단강을 건너갔다. 모세가 지팡이를 들었을 때 홍해가 갈라지고 제사장들이 흐르는 요단강에 발을 디뎠을 때 물이 멈추기 시작했던 것은 모세의 지팡이나 제사장의 발에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믿음으로 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믿음을 보시고 은혜를 베푸신 것이었다. 요단강이 마른 땅이 된 것처럼,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마른 땅이 된 요단강을 건너갈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요단강도 우리 자신의 의지를 꺾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건너갈 수 있는 것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 변화시켜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8월 6일 요단 가운데서 가져온 열두 돌 (여호수아 4:4-9) 4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준비한 그 열두 사람을 불러 5 그들에게 이르되 요단 가운데로 들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궤 앞으로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 수대로 각기 돌 한 개씩 가져다가 어깨에 메라 6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물어 이르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7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원히 기념이 되리라 하라 하니라 ... 이스라엘 자손들이 지파의 수를 따라 요단 가운데에서 돌 열둘을 택하여 자기들이 유숙할 곳으로 가져다가 거기에 두었더라 9 여호수아가 또 요단 가운데 곧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돌 열둘을 세웠더니 오늘까지 거기에 있더라 나의 요단 가운데서 가져온 돌 여호수아 3장12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12명을 뽑으라고 말씀하셨고, 백성들이 요단을 건넌 후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뽑으라고 거듭 말씀하셨다. 이들로 하여금 건너왔던 요단에 다시 들어가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서있는 곳에서 한 사람이 돌 하나씩 전부 12개를 들고 나와 그날 밤 그들이 묵을 곳에 두라고 명령하였다. 여호수아도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이 서있는 곳에 돌 12개를 세웠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고 첫 번째 관문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대대로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한 표현이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모든 일을 마치고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건너오기를 마치자 요단 물이 다시 전처럼 흘러 넘쳤다. 백성들은 길갈에 이르러서 진을 치고 요단에서 가져온 돌들에 길갈에 세웠다. 이것은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4장24절의 말씀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요단을 건넌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의 삶 속에도 추억해보면 각자에게 요단 가운데가 있었을 것이다. 불가능과 절망의 자리였지만 하나님의 놀라우신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있었던 곳,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곳, 그곳에서 들고 나온 돌들을 기억하자. 그 기억을 새롭게 함으로 오늘 우리 앞에 놓인 무거운 과제도 능히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이다. 8월 7일 여호와의 군대 대장 (여호수아 5:10-15) 10 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11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을 먹되 그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12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13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14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15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요단강은 이스라엘 백성이 오랜 광야생활을 청산하고 드디어 약속의 땅, 가나안의 경계 안으로 들어가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인도하심에 의해 백성들과 함께 요단강을 건넌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에 가까이 왔을 때,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을 만났다.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말하기를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라고 묻자 여호와의 군대 대장은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고 대답하였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불붙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신 것과 같은 말씀을 여호수아에게도 하셨다. 첫 전투를 벌여야 할 여리고성에 가까이 왔을 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군대 대장을 보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전쟁에서 직접 싸워주실 것임을 보여주심으로서 이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확신시켜 주셨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고 우리를 인도해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 없는 우리는 그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고 때로 겁내고 낙심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곳은 거룩한 땅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자리가 거룩한 땅이고,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그곳은 거룩한 곳이다. 오늘도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현장이 모두 거룩한 땅이 됨을 기억하며 담대한 믿음으로 하루를 살아가자. 8월 8일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이상한 방법 1 (여호수아 6;2-7)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3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4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5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6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가라 하고 7 또 백성에게 이르되 나아가서 그 성을 돌되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갈지니라 한지라 순종하는 자에게 앗시시의 성자 프랜시스(St.Francis of Assisi)에게 어느 날 제자가 되기를 자원하는 두 사람이 찾아왔다. ‘선생님의 제자가 되어 신앙훈련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프랜시스는 ‘저 밭에 나가면 배추가 많이 있는데 그 배추를 가져다가 뿌리를 하늘로 향하게 심으십시오.’라고 지시하였다. 한 사람은 말없이 들로 나간 반면 다른 한 사람은 ‘이 사람이 여기서 오랫동안 수도생활을 하더니 정신이 이상해졌군.’하면서 그냥 가버렸다. 프랜시스가 제자가 되고자 찾아온 이들에게서 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정복을 위한 첫 번째 전쟁을 앞두고 있을 때 여호수아에게 여리고 성벽을 무너뜨릴 방법에 대해 알려주셨다. 언약궤를 중심으로 나팔을 잡은 일곱 제사장들이 서고 그 앞뒤에 무장한 군인들이 대열을 갖추어 6일 동안 매일 한 바퀴씩 성을 돌고 일곱 째 날에는 성을 일곱 바퀴 돌고 큰 함성을 외치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지시에 순종하였고, 하나님은 여리고 성벽을 무너뜨리셨다. 하나님이 전쟁의 승패를 주관하신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은 눈앞에서 직접 체험하였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방법은 인간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방법이었으나 이스라엘 백성이 인간적인 생각과 방법, 힘을 다 내려놓고 전적으로 순종했을 때 여리고 성벽을 무너뜨리시는 하나님의 이적을 체험하였다. 하나님은 오늘도 자신을 비우고 성령으로 채우며,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의 주관자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8월 9일 무너져 내린 여리고 성벽 (여호수아 7:10-20) 10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11 여호와의 궤가 그 성을 한 번 돌게 하고 그들이 진영으로 들어와서 진영에서 자니라 ... 15 일곱째 날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 성을 일곱 번 도니 그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날뿐이었더라 16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17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 이는 우리가 보낸 사자들을 그가 숨겨 주었음이니라 ... 20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나의 여리고 성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따라 엿새 동안 여리고 성을 한 번씩 돌고 일곱 째 날 일찍이 일어나 성을 일곱 바퀴 돌며 나팔을 불고 함성을 지르자 여리고성이 무너져 내렸다. 여리고 성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신 것은 인내였다. 하나님의 일은 인내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성령의 열매에도 인내가 포함되어 있는데, 실제 우리의 삶에서 인내하기란 쉽지 않다. 인내하지 못하고 매사에 성급하게 행하다가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뜻을 놓치고 실패한다. 여리고 성벽은 매일 매일 조금씩 무너져갔던 것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무너질 흔적이 보였던 것도 아니다. 6일 동안, 그리고 마지막 7일에, 마지막 일곱 바퀴 째 성을 도는 이스라엘 백성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들에게 7일은 이상한 방법을 명령하신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고 침묵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내적인 훈련의 시간, 자기 자신과의 싸움의 시간이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우리 앞을 가로막는 수많은 여리고 성이 있다. 그때마다 그것을 무너뜨려 주실 하나님께 먼저 시선을 집중시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인내하며 기다리자. 우리 각자의 여리고성을 통해서 내적 훈련의 시간을 갖게 하시며, 마침내 믿음의 성장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끝까지 믿음으로 순종해서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자. 8월 10일 아이 성에서의 패배 (여호수아 7:1-7) 1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2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쪽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3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하므로 4 백성 중 삼천 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5 ...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된지라 6 여호수아가 옷을 찟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7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불의한 욕심과 방심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에서의 첫 번째 전투에서 하나님의 지시를 온전히 따름으로써 하나님이 이끄시는 승리를 얻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아이 성 전투에서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하였는데, 그 원인은 여리고 성 정복 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아간의 범죄 때문이었다. 아간은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 하나님께 드려진 물건에 욕심이 생겨 불의하게 취하였고, 그 결과 공동체 전체가 아간의 죄책을 함께 나누어져야만 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이 성 전투에서 패배한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여호수아를 비롯한 백성들의 방심과 경솔함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하면서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물었어야 했으나 첫 번째 승리에 도취하여 방심한 나머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과 판단, 방법에 의지하여 성급하게 나아갔다가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다. 불의한 욕심으로 공동체를 위태한 상황으로 몰아넣은 아간의 범죄가 밝혀지고, 그에 대한 처벌로 죄가 해결된 후, 그리고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기도한 후 하나님은 다시금 이들의 전투를 이끌어 승리를 얻게 하셨다.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인간의 생각과 능력에만 의지하여 어떤 일을 행한다면 아무리 선한 목적이라 할지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일에 인간의 불의한 욕심이 개입되면 자신뿐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공동체도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한번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방심하지 말자. 언제나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믿음의 자세를 잃지 말자. 8월 11일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여호수아 8:30-35) 30 그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았으니 31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한 것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제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그 위에 드렸으며 32 여호수아가 거기서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그 돌에 기록하매 33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관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전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령한 대로 함이라 34 그 후에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35 모세가 명령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자들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행하는 거류민들 앞에서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 하나님이 훈련시키시는 과정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은 여리고 성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지혜, 뜻, 방법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는 훈련을 받았다. 그 다음 아이 성을 정복하는 과정을 통하여 탐심으로 인한 불순종의 쓰라린 결과를 체험하였고, 언제나 방심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해야 함을 자각하였다. 여호수아는 에발 산에서 다듬지 않은 새 돌을 쌓아 제단을 만들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정비하였다. 인간의 기교로 다듬고 화려하게 꾸민 이방신상과 구별되는 다듬지 않은 돌 제단은 순수하고 겸손하게 예배드려야 하는 우리의 마음상태를 상징한다.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 자손들이 보는 앞에서 돌에 기록하고, 백성들을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서게 한 후 여호수아가 율법의 모든 말씀,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낭독하였다. 돌에 말씀을 새긴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 넣음으로써 약속의 땅, 그러나 이방민족이 살고 있는 이방문화권으로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며, 어떤 길이 복 받는 길인지 분명히 알게 하였다. 우리도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자신의 지혜를 앞세우지 말고 먼저 하나님 앞에 마음의 무릎을 꿇자. 하나님의 영과 지혜로 채워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루의 삶을 이끌어주실 것을 간구하자.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순종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며 하루를 살아가자. 8월 12일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여호수아 14:6-12) 6 그 때에 ...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 7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8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9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네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10 ... 오늘 내가 팔십 오세로되 11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갈렙의 믿음 갈렙은 45년 전 모세의 지시에 의해 여호수아 및 다른 10명의 정탐꾼들과 함께 가나안을 정탐하였다. 다른 열 명의 정탐꾼은 그들의 눈에 보이는 대로, 세상적인 판단으로 부정적인 보고를 하여 백성들을 낙심케 하였지만 갈렙은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민14:9)고 믿음으로 선포하였고, 모세로부터 그가 밟는 땅이 기업이 되리라는 축복의 약속을 받았다(민13:22). 갈렙은 모세의 계승자인 여호수아에게 모세의 약속을 이행하도록 요청하였다. 땅을 유업으로 받았다는 것은 그 땅을 거저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통해 그 땅을 정복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갈렙은 단순히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거나 45년 전의 자신의 공로를 인정받기 위해 기업을 요청한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갈렙이 요청한 헤브론 산지는 체격이 거대한 아낙자손들이 살고 있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맞서 싸우기를 두려워했던 곳이었다. 갈렙은 아직 정복되지 않은 땅을 한시라도 빨리 정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고자 하는 믿음이 있었기에 8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험한 산지를 자신에게 달라고 요청하며, 그 땅을 정복하기 위해 싸우러 나가고자 하였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다면 감당치 못할 것이 없다는 믿음으로 일생을 살았던 갈렙의 신앙과 용기, 겸손함은 오늘 우리에게도 귀중한 신앙의 모범이 된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8월 13일 여호수아의 고별 설교 (여호수아 23:1-6) 1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들로부터 이스라엘을 쉬게 하신 지 오랜 후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은지라 2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 ...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나이가 많아 늙었도다 3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다 보았거니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이시니라 4 보라 내가 요단에서부터 해 지는 쪽 대해까지의 남아 있는 나라들과 이미 멸한 모든 나라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제비 뽑아 너희의 지파에게 기업이 되게 하였느니라 5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 앞에서 그들을 쫓아내사 너희 목전에서 그들을 떠나게 하시리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 6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자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한 후 많은 세월이 흘렀다. 여호수아는 나이 많아 늙었고, 자신의 임종이 가까웠음을 알고 고별설교를 하기 위해 백성들을 불러 모았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지난날의 모든 일들을 기억할 것과 계속해서 그 하나님을 열심히 섬길 것을 당부하였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직접 싸워주셨다는 사실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주할 땅, 기업을 마련해 주셨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현재 누리는 안식이 그들의 지혜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기억하고 겸손히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인간의 마음은 너무나 얄팍하여 조그마한 성취나 성공에도 그것이 자신의 능력이나 열심, 의로움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교만해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어떤 일을 행할 때 최선을 다해야 함은 물론 일을 성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선한 결과에 대해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지난날을 돌이켜보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 여정에 어떻게 개입하시고 이끌어주셨는지, 어렵고 지칠 때마다 어떻게 일으켜주셨는지 기억해보자. 그리고 지금까지 인도해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오늘도 이 세상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믿음으로 살아가자. 8월 14일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여호수아 24:14-18) 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16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17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올라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과 우리가 지나온 모든 백성들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18 ...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하니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날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지도자들에게 두 번에 걸쳐 간절하고 단호하게 유언과 같은 설교를 하였다. 백성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은혜와 인도하심, 주신 복을 기억하라고 당부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선택하신 것은 우리가 잘해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지금까지 이루어진 모든 일들은 실상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것이다. 지도자들에게는 이스라엘의 과거를 상기시키면서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임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것을 당부하였다.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고 하였는데, 크게 힘쓰라는 것은 ‘착 달라붙어서 단단히 결심하라’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민족의 결단을 촉구하며 ‘나와 내 집은 평생 하나님만 섬길 것인데 너희들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질문하였다. 인간의 마음은 참으로 간사해서 조금만 어려우면 주님을 안타깝게 찾으며 도움을 구하지만, 조금만 편해지면 나태해지고 신앙이 느슨해지는 것을 여호수아는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통해 우리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하신다. 여호수아의 고백과 같이 ‘오직 나와 내 집은 평생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결단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자. 8월 15일 여호수아와 엘르아살의 죽음 (여호수아 24:29-33) 29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30 그들이 그를 그의 기업의 경내 딤낫 세라에 장사하였으니 딤낫 세라는 에브라임의 산지 가아스 산 북쪽이었더라 31 이스라엘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들이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 32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33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도 죽으매 그들이 그를 그의 아들 비느하스가 에브라임에서 받은 산에 장사하였더라 허락하신 새 땅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새 땅 가나안으로 인도한 여호수아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갔다. 여호수아와 함께 민족을 이끌어간 영적 지도자 엘르아살도 육신의 삶을 마치고 에브라임 산지에 장사되었다. 여호수아서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하여 행하신 모든 일들을 아는 자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섬겼다고 기록함으로써 그 이후에는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타락했음을 암시한다. 이스라엘이 다시금 죄 가운데서 타락한 것은 가나안 정착 이후 태어난 후손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여호수아 시대 이후의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듯이 자신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을 확실히 체험하지 못하고 이성적으로만 알거나 믿는 사람의 신앙은 잘못된 길로 가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며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을 깊이 체험할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를 따라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듯이 언젠가 우리들도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친 후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새 땅,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고 마침내 하나님께 돌아간 믿음의 용사 여호수아의 삶의 여정을 기억하며 우리도 이 땅에서 여호수아와 같은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하자. 8월 16일 엘리멜렉 가족의 이주 (룻기 1:1-5) 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아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 쯤에 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나오미의 고난 룻기의 배경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 사울이 왕으로 등장하기 까지 약 350년간의 시기인 사사시대이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사사기 마지막 절의 말씀을 통해 혼란한 시기였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유다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의 가족이 흉년을 피해 모압 땅으로 이주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다’는 이름의 뜻을 가진 유대인 엘리멜렉은 두 아들과 아내를 데리고 모압 땅으로 이주하였다. 원래 베들레헴은 비옥하고 물이 풍성한 옥토였다. 이곳에 흉년이 들 정도이면 당시 흉년이 극심했을 것인데, 이 흉년은 틈만 있으면 하나님을 떠나 범죄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징계이자 경고라고 할 수 있다. 룻기는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그들을 돌이키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를 엘리멜렉 가정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엘리멜렉 가족이 비록 흉년을 피하기 위함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이방 땅 모압으로 이주한 것은 불신앙적인 행동이었다. 나오미는 고향을 떠나 이방 땅에서 과거를 잃은 삶을 살고 있었고,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현재를 잃었으며, 아들 둘이 모두 죽음으로 인해 미래를 잃은 가장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삶에 어려움이 있을 때 믿음으로 극복하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하면 어디에 가든지 참 평안을 누리지 못할 뿐 아니라 더욱 불행한 일을 겪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려운 일을 만날 때 그것을 피할 것이 아니라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매달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은혜를 구해야 하겠다. 8월 17일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룻기 1:15-18) 15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18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믿음의 사람들이 있어야 할 곳 흉년을 피해 이방 땅으로 이주하였다가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잃어버린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했다.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셔서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다르지만 이 장면에서 우리는 야곱이 하나님께 약속했던 대로 벧엘로 가지 않고 숙곳에서 오랜 기간 머무르고 있다가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는 불행한 사건 이후에야 비로소 벧엘로 향했던 것을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곳에 있어야 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해주신 축복의 자리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이키시려고 주시는 신호일 수 있다. 귀향을 결심한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였다.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들의 신에게 돌아가 그 신의 도우심을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그러나 나오미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된 룻은 비록 자신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여인이지만 어머니의 백성이 자기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 되심을 고백하며 나오미를 따르겠다고 간청하였다. 하나님은 이방 땅에서 남편과 아들들을 잃은 나오미에게 그를 극진하게 섬기며 하나님을 섬기는 며느리 룻을 선물로 주셨다. 이방 여인 룻을 선택하셔서 그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하신 하나님은 그의 믿음의 고백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문을 이루어갈 큰 은혜를 더해주시며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이어가셨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우리도 룻과 같이 있어야 할 은혜의 자리에 있는지 자신을 살펴보자. 8월 18일 나오미의 귀향 (룻기 1:19-22) 19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를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냐 하니라 22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불신앙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섭리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첫째 딸은 아들을 낳아 모압이라고 이름하였고, 그의 후손을 가르켜 모압 족속이라고 한다. 이들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박대하고 대적하여 영원히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갈 수 없도록 모세의 율법에 기록되어 있다(신23:3). 베들레헴에서 유력한 집안이었던 유대인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흉년을 피해 이스라엘이 원수처럼 여기는 모압 지방으로 이주했다가 나오미만 살아서 모압 여인을 며느리로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놀라운 화제거리가 되었다. 모압땅으로 나갈 때에 풍족하게 나갔던 나오미가 모든 것을 잃고 빈털터리로 초라하게 돌아온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에는 비교적 양식이 풍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오미는 자신을 ‘기쁨’이라는 뜻의 이름 대신에 ‘괴로움’ 또는 ‘쓴 맛’이라는 뜻의 ‘마라’로 부르라고 하였다.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라’는 나오미의 고백은 욥의 고난을 연상시킨다. 욥이나 나오미는 고난을 통해 자신들의 불신앙을 깨달았고, 고난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며 깊은 신앙으로 성장하였다. 엘리멜렉 가족의 이방 땅으로의 이주, 나오미의 시련과 귀환은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한 가정의 몰락사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볼 때 그곳에는 하나님께 대한 엘리멜렉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징계, 나오미의 회개, 이방 여인 룻의 신앙, 그리고 그 가운데에 흐르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섭리가 있음을 알게 된다. 8월 19일 룻과 보아스의 만남 (룻기 2:10-16) 10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 11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12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13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 14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하므로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15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16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 보아스의 호의 룻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거주하는 복을 누리기 위해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에 왔으나 그곳에서 빈궁한 삶을 견뎌내야만 했다.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이삭줍기와 같은 천한 일도 마다하지 않은 룻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 가운데 엘리멜렉의 친족이었던 보아스의 밭에 이르렀고, 밭을 둘러보기 위해 나온 보아스와 마주치게 되었다. 보아스는 시어머니를 정성껏 봉양하는 룻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그에게 온갖 호의를 베풀었다. 그는 궁핍한 나그네와 같은 과부 룻에게 필요한 것을 풍족하게 공급해줌으로써 율법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였다. 룻은 자신의 처지와 신분에 비해 과도하게 베풀어지는 보아스의 친절과 호의에 놀라며 그것을 겸손하게 감사함으로 받았다. 룻의 겸손한 자세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은 성도들에게 귀한 본이 된다. 룻의 입장에서 볼 때 보아스와의 만남은 우연이었지만 하나님은 룻을 통해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고자 준비하셨다. 이와 같이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우연히 발생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나는 일들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룻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것처럼 크던 작던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해 감당하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 오늘 우리도 주어지는 만남과 일들을 최선을 다해 감당함으로서 우리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는 삶을 살아가자. 8월 20일 룻과 보아스의 만남 2 (룻기 2:17-20) 17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18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어머니에게 드리매 19 시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 룻이 누구에게서 일했는지를 시어머니에게 알게 하여 이르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에 하나이니라 하니라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추수하는 밭에 보리 이삭을 주우러 나간 룻은 나오미의 가까운 친척 보아스의 밭에 가서 땅에 떨어진 이삭을 주웠다. 보아스의 밭에서 보리 이삭을 주웠다는 며느리의 말을 듣고, 또 보아스가 며느리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다는 말을 듣고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시고 계심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에는 가족관계에 특별한 법이 있었다. 한 가문의 대를 이어갈 남자가 없을 때 가장 가까운 친척이 대를 이어줄 책임이 있었다. 빚을 지거나 대대로 내려온 토지를 팔았거나 곤궁에 처했을 때에도 제일 가까운 친척이 대신 갚아주고 해결해주어야 했다. 나오미의 가정에도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친척 남자가 나오미와 결혼하여 엘리멜렉 집안의 대를 이어주어야 했는데 나오미는 이미 나이 많아 결혼을 할 수 없었고, 며느리 룻이 가까운 친척 남자와 결혼하여 낳는 첫 번째 아들을 엘리멜렉 집안의 아들로 삼아야 했다. 보아스는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기생 라합이 살몬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다. 여리고 성이 무너진 후 라합의 가족들은 아마도 이스라엘 마을에 들어와 살았을 것인데 이방인 기생이 낳은 아들인 보아스의 성장과정은 순탄치 못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문의 유력한 사람으로 성공한 보아스는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나오미와 룻에게 겸손한 태도로 은혜를 베풀었다. 보아스의 고결한 성품과 룻의 신실하고 근면한 태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에 충분하였고, 여호와께 복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이러한 성품을 가진 자녀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8월 21일 룻과 보아스의 결혼 (룻기 4:13-22) 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15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16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18 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19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20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룻과 보아스는 마침내 결혼하여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고 다윗의 가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났다. 룻기 저자는 룻기를 끝내며 특별히 베레스로부터 시작하는 계보를 언급하고 있다. 베레스는 유다와 그 며느리 다말의 사이에서 비정상적인 관계로 태어난 아들이었다. 보아스는 이방인 기생여인의 아들이었다. 보아스의 아내가 된 룻은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의 회중에 영원히 참석할 수 없도록 규정된 모압민족 출신이었다. 다말과 라합, 룻의 인간적인 부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오른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이 여인들의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룻기에 나오는 인물들 속에서 각각 중요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선택받은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백성들을 의미하는데 이들은 언젠가 귀향한 나오미처럼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다. 룻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 신앙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구원받은 이방인 성도들을 의미한다. 오르바는 복음을 들었으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될 구원의 기회를 놓치고 자기들의 우상으로 돌아간 아랍민족 내지는 구원받지 못한 모든 이방인들을 대표하고, 보아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마치 한 편의 드라마 같은 룻기는 4장으로 구성된 짧은 성경이지만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계획이 내포되어 있다. 8월 22일 산 소망 (베드로전서 1:3-9)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6 그러므로 이제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우리의 소망 베드로가 이 서신을 기록할 당시는 A.D. 64년 로마에서 시작된 네로의 기독교 박해가 로마제국 전체로 확산되어 갈 상황에 처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도 산발적이고 개인적이긴 하나 상당한 박해를 받고 있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겪고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권면하고자 사도 베드로는 고난 중의 인내를 주제로 서신을 기록하였다. 사복음서의 기록만으로 보면 베드로를 인내의 귀감으로 여기기 쉽지 않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그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하였다.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 나그네와 같이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이 땅에서는 고난을 받을지라도 그들의 구원을 확신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고난 받고 있는 자신의 백성들을 주목하고 계심을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세상에서 고난을 겪는 중에도 인내로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사도 베드로의 가르침과 같이 하늘에 산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차 하늘에서 칭찬과 영광과 존귀와 함께 영원한 기업을 얻을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고난과 시련을 영적 성장의 기회로 삼을 수 있었고, 이 세상에서는 외인처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확실하게 자각할 수 있었다. 우리는 어떤 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만일 우리가 작은 어려움에도 쉽게 낙심하고 넘어진다면 과연 하나님의 자녀로 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지 자신의 영혼을 점검해보자. 8월 23일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베드로전서 1:13-19) 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거룩하고 성결한 나그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에 힘입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의 망령된 행실에서 구원받았으므로 어떠한 형편에서도 다시 과거로 돌아가지 말고 장차 가게 될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로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살아갈 것을 권면한다.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에 우리는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았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인줄 알고 세상적인 것을 위해 살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받은 이후의 삶은 모든 행실에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죄인된 인간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그 행위대로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때로 고난을 당한다. 그러나 고난에 굴복하여 세상과 타협하고 죄악된 엣 생활로 돌아가지 말고,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거룩한 삶으로 천국 소망을 향해 나가는 분명한 푯대를 가진 나그네로 살아야 함을 사도 베드로는 간곡하게 권면한다. 우리는 초대 교회와 같은 박해의 시기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또한 비교적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안전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영적인 긴장감이 느슨해져 있을 수 있다. 사탄은 이런 시대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안일함과 나태함 속에 빠지도록 유혹한다. 사도 베드로의 권면을 따라 마치 출애굽하던 이스라엘백성들이 애굽을 떠나기 위해 옷을 입고 허리를 동이고 비장한 자세를 가졌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8월 24일 보배로운 산 돌 (베드로전서 2:1-5)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버리고 사모하라 갓난아기는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지한다.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라듯이 구원받고 거듭난 그리스도인도 마치 갓난아기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성장하면서 점차 성화되어가는 과정 가운데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사도 베드로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고 성화되기 위해서 ‘버리고’ ‘사모하라’고 명령한다. 옛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성품인 악독, 기만, 외식, 시기,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순전하고 신령한 젖,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라고 명령한다. 사도 베드로는 건물 건축을 비유로 들어 예수님께서 산 돌로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것처럼 개개인의 성도들도 함께 연합하여 신령한 집, 곧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를 이루어갈 것을 권면한다. 예수님은 건축자들이 쓸모없다고 버린 돌처럼 사람들에게서 버림받았으나 온 우주 만물의 건축자이신 하나님에 의해 택하심을 받아 보배로운 산 돌이 되셨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때로 멸시를 당하고 고난을 받을지라도 성화의 과정을 통해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존귀하게 여김을 받게 될 것임을 사도 베드로는 알려주고 있다. 오늘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무엇을 버려야할 것인가, 차마 버리지 못하고 붙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버리고 비워진 자리에 무엇으로 채우기를 사모하는가? 나를 비우고, 비운 나의 속사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 성화된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자. 8월 25일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 (베드로전서 2:9-12)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거류민과 나그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새 생명 얻은 사람을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 긍휼을 얻은 자로 그 신분을 바꾸어주셨다. 사도 베드로는 이와 같이 신분이 바뀐 주의 백성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권면하면서 ‘거류민과 나그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베드로는 믿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은 하늘나라에 시민권을 가진 자들이니 이 땅에서는 나그네와 같이 사는 것임을 서신서에서 여러 번 강조하고 있다. 원어를 직역하면 나그네는 외국 땅에 정착하여 사는 사람을 의미하고, 거류민은 외국 땅에 잠시 거주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하나님에 의해서는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 긍휼을 얻은 자로 신분이 바뀌었지만 이 세상에서는 자신의 나라가 아닌 외국 땅에 잠시 거주하거나, 외국 땅에 정착하여 거주하는 사람의 신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 땅은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의 이중적 모습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는 이방인들의 삶과 달리 육체 가운데 살아가지만 육체를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따라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은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교훈과 일맥상통한다. 8월 26일 선을 위한 고난 (베드로전서 3:8-16) 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12 주의 눈을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13 또 너희가 열심히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가져야 할 삶의 자세 베드로 사도 는 ‘마지막으로’ 말한다는 간절한 표현을 사용하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이 고난 중에 가져야 할 삶의 자세에 대해 권면하고 있다. 첫째, 교회공동체 내적으로는 성도들이 서로 한 마음이 되어 긍휼히 여기며 사랑하라는 것이고, 둘째, 교회공동체 밖에서는 악을 행하며 성도를 괴롭히는 자들을 악한 방법으로 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베드로 사도만의 가르침이 아니고 예수님도 산상수훈을 통해 우리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서로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는 것은 쉽지 않다. 자신에게 악하게 대하고 욕을 하 는 이들을 위해 복을 빌어주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베드로 사도 시대에 성도들이 외부에게 가해지는 핍박과 고난을 받으면서도 핍박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담대하게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핍박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더욱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말씀한다. 핍박이 다가올 때 그것을 담대하게 견뎌냄으로써 오히려 핍박하는 자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로 삼으라고 말씀한다. 우리는 사도 베드로 시대보다 신앙적으로 훨씬 자유롭고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서로를 긍휼히 여기지 못하는가 하면 조금만 고난이 닥쳐도 낙심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한다.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때 초대교회 성도들이 어떤 믿음으로 살았는지 기억하자.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초대교회 성도들 같은 믿음으로 매일의 삶을 살아가자. 8월 27일 선한 양심을 가지라 (베드로전서 3:16-22)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18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22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그리스도인의 선한 행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세상에서 선하게 살아갈 때 믿지 않는 이들은 때로 우리의 선행을 비방하고 조롱하거나 이용한다. 그러나 악은 선을 이기지 못하고, 선행을 비방하고 욕하는 이들은 결국 그로 인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은 대적자들에 의해 십자가에서 육체로는 죽임을 당했으나 죽음을 이기시고 영으로 부활하셔서 모든 믿는 사람들의 구세주가 되셨다. 때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고 죽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의문을 갖는다. 이에 대해 어떤 이들은 베드로전서 3:19절 말씀을 들어 설명한다. 예수님께서 옥에 있는 영들, 즉 노아 시대의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구원으로의 초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역하여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구원을 선포하셨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지옥에 있는 영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거부했던 영들에게까지 예수님이 참 그리스도시오 구주이심을 선포하셨다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노아의 가족이 살던 옛 시대가 그 죄 값으로 물속에서 멸망하고 순종한 노아 가족만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간 것처럼 세례는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더불어 다시 사는 거듭남의 표시이다. 그러나 세례를 받았다고 하여 우리가 완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 안에 있는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 나아가며 하나님과의 교제에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우리는 오늘도 선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선한 행실에 힘쓰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8월 28일 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베드로전서 4:7-11)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려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자세 사도 베드로는 이전까지의 어떤 고난보다도 더 극심한 고난을 받게 될 세상의 종말이 임박하였음을 각성시키기 위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고 말한다. 마지막 때를 대비하기 위해 성도들은 근신하며 기도함으로써 믿음을 새롭게 하되 서로 사랑하며, 허물을 덮어주고, 어려운 형편 가운데도 자원하는 마음으로 서로 나누고 돌보면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직분을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가 되어 감당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 것은 성도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거룩한 삶을 산다는 증거가 되므로 오히려 믿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기뻐할 수 있다. 또한 성도는 비록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가 되었을지라도 여전히 죄성을 소유한 연약한 존재이므로 고난 중에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과 사랑과 봉사로 결속을 굳게 해야 한다. 사도들의 시대나 지금이나 성도들은 임박한 종말을 느끼며 살고 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 도 모르나니 ...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종말의 때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단지 성도들은 종말이 내일로 임박한 것 같은 삶의 자세로 살아야 하며, 내일 당장 주께서 재림하시고 세상의 종말이 올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한다. 사도 베드로의 권면은 비단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고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준비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당연한 의무이다. 8월 29일 주께 맡기라 (베드로전서 5:6-11)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11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겸손과 신뢰 사도 베드로는 서신을 마무리하면서 장로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들의 본이 됨으로서 양무리를 이끌어갈 것을, 그리고 젊은이들은 장로들에게 순종하며 겸손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외부에서 다가오는 박해를 이겨내기 위해서 교회 내적인 화합과 단결이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그 시대나 지금이나 우리가 삶 속에서 실천하기 쉽지 않은 것이 겸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계실 때 친히 겸손의 본을 보여주셨다. 겸손하게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직접 높여주신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권면한다. 하나님께서 돌보아주심을 믿는 사람은 염려를 주께 맡길 수 있다. 맡기라는 말은 한꺼번에 내어던져 버리라는 뜻이다. 우리의 염려는 두려움과 욕심, 자신의 힘으로 살려고 하는 교만함, 즉 하나님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다. 오늘도 대적 마귀는 우리에게 교만한 마음을 불어넣고, 세상 일로 근심하게 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고 유혹한다. 우리의 영혼이 깨어 있어 이러한 유혹을 이기고 오직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고 터를 견고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야 하겠다. 8월 30일 부르심과 택하심 (베드로후서 1:3-11) 3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 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성도가 가져야할 덕목 우리를 자녀로 부르시고 택하여 주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가 받게 되는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다. 이 약속은 하나님의 자녀가 장차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과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을 말한다. 이 약속은 비단 앞으로 언젠가 가게 될 하늘나라에서만 이루어질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우리가 받아 누릴 수 있는 약속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에 함께 참여할 수 있게 하셔서 이 땅에서도 이미 하늘나라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셨다. 사도 베드로는 성도가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에 참예하기 위해서 가져야 할 덕목들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믿음과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와 사랑이다. 인간을 부르시고 택하신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은 자신이 받은 구원을 확실하게 지키기 위해 성도가 가져야할 덕목들을 실천하며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을 하여야 한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얻게 되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모든 것의 출발이기 때문에 사도 베드로는 믿음으로부터 성도가 이루어야 할 성결의 단계를 시작한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해야 함을 가르쳐준다. 믿음에서 시작하여 사랑으로 맺어지는 성도의 덕목은 결국 우리에게 믿음과 사랑이 가장 중요함을 알려준다. 오늘 하루를 지내며 사도 베드로의 권면을 기억하고 생활 속에서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에 굳게 서도록 하자. 8월 31일 하나님의 날 (베드로후서 3:8-13)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새 하늘과 새 땅 초대 교회 당시 많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다. 아마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마24:34) 하신 주의 말씀도 있고, 그들의 세계관에서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지상 명령이 어느 정도 성취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로마제국의 대대적인 박해와 함께 주께서 재림의 징조들 중 하나로 말씀하신 이단의 극성스러운 활동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자꾸 지체되는 것처럼 생각되었고 심지어 그리스도의 재림이 없다는 이단의 주장에 귀가 솔깃하게 되었다. 사도 베드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시간 개념을 초월해계시는 분이시므로 인간의 시간 개념으로 주의 재림이 지체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둘째, 주의 재림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아직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이 다 회개하고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셋째, 주의 재림은 도적같이 임할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재림의 시기가 언제일까 관심을 갖기보다 주의 재림은 반드시 있을 것이므로 주님을 맞이할 신앙자세를 올바로 하는데 더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 주의 재림이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맡겨진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찾아서 잘 감당하며, 또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생활이 때로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주의 재림과 함께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며 살아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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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림교회
2019년 3월 25일
In 365일 말씀묵상
9월 1일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이사야 1:1-9) 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4 슬프다 범죄한 나라여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 9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회개의 길로 부르시는 하나님 구약성경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창세기부터 에스더서까지는 역사서이고,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는 체험서이다. 그리고 이사야서부터 구약성경의 맨 마지막인 말라기서까지는 예언서로 분류한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며 미래의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예언하였고, 동시에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에 저지르는 죄악에 대해 지적하며 회개를 촉구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죄악과 불신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면서, 그러나 회개하면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예언서들에는 이중적인 기대가 들어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와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대가 그것이다. 이사야는 유다의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에 이르기까지 약 60년 동안 선지자로 활동하면서 모두 66장으로 이루어진 이사야서를 기록하였다. 이는 신구약성경의 권수와 같은 숫자인데, 내용적으로도 1장부터 39장까지의 전반부는 마치 구약성경처럼 불순종하는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하고 있고, 후반부의 27장은 마치 신약성경처럼 주님의 구원과, 자비, 위로를 강조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 이사야서를 축소된 성경전서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옛날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여보자.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막은 채 세상길로 가기를 기뻐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돌아보면서 은혜를 주시기 위해 회개의 길로 부르시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자. 9월 2일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이사야 1:12-18)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 하나님의 탄식 프랑스의 사상가 파스칼은 명상록 ‘팡세’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철학자의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하나님은 냉철한 이성으로만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시라 인격을 지니신 분으로서 자신의 백성으로 인해 때로 한탄하며 한숨 쉬기도 하고 후회도 하는 자비로우신 분이심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사야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 이 이름이 밝혀주고 있듯이 이사야서의 핵심적 단어는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향해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의 탄식과 함께 죄인들을 용서해주고자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대언한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인생들과 변론할 필요가 없는 분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죄악을 일방적으로 벌하지 않고 변론하자고 제안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심판에 앞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충분히 깨닫고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담긴 안타까운 초청이라 할 수 있다. 우리도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하면서 마당만 밟고, 헛된 제물을 드리며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지는 않은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자녀답지 못한 죄된 삶을 살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고, 온전치 못한 예배와 믿음과 삶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자.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고쳐주시고자 우리의 진정한 회개를 탄식하며 기다리고 계신다. 9월 3일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이사야 2:1-4) 1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 2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3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4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이루실 평화의 왕국 이사야가 선지자로 활동하며 이사야서를 기록한 시기는 대략 BC 740-680년으로 추정한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되기 약 20년 전부터 남왕국 유다가 멸망하기 이전의 시기에 기록된 것이다. 이 시기의 한국의 역사는 고조선 시대에 해당한다. 이사야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해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며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이 택한 백성을 더럽히고 있는 모든 죄를 철저하게 제거하시고, 거룩하게 된 그 백성들을 통하여 이루실 메시야 왕국에 대해서 알려준다. 그 때에는 세계 만민이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을 중심으로 모여 평화의 왕국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 예언은 세상의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일을 알려주는 한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인생들의 죄를 대신 갚아주시고 영적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주실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불의와 욕망, 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우리 자신도 날마다 부딪치는 내적인 죄성, 세상의 유혹과 싸우며 살아간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우리 가운데 평화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실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은 이러한 상황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용기를 준다. 공의와 평화, 거룩함과 사랑으로 가득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견고히 붙잡고 오늘도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의와 평화를 이루어가자. 9월 4일 성전에서 환상을 본 이사야 (이사야 6:1-8)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고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6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 하더라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이사야의 소명 웃시야 왕이 죽던 해, 곧 이스라엘이 정치적, 종교적으로 혼란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 이사야는 깊은 시름에 잠겨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자 성전에 나아갔다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였다. 이사야가 환상 중에 바라본 하나님이 계신 보좌에는 완전한 평화가 있었고, 하나님께서 장엄한 영광 중에 앉아 계셨으며, 천사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었다. 하나님과 그 분의 거룩함을 보게 되면 인간은 자신의 죄악과 부패한 모습, 나약함을 깨닫게 된다. 욥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난 후 자신의 무지함을 회개하였으며,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능력과 영광을 보았을 때에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였다. 이사야도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자신은 입술이 부정한 자, 마음이 깨끗지 못한 자임을 고백하며 회개하였고, 이사야의 고백을 들으신 하나님은 그의 필요를 채워주셨다. 천사가 제단에서 숯불을 하나 들어서 이사야의 입술에 대고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다"고 선포하셨다. 위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아래로 자신의 내면을 바라본 이사야는 이제 어두운 세상을 바라보았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하며 자신의 소명을 감당하고자 결단하였다. 우리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자.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바라보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감당해야 할 일이 보일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며, 고치시고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9월 5일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 (이사야 6:8-13)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이 눈으로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이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11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12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라 하시더라 남은 자 성전에서 본 환상 가운데 한 천사가 가지고 온 제단 숯불로 입술의 정결해짐을 받은 이사야는 곧 이어 하나님의 뜻을 전할 전달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발적으로 순종하며 그 소명을 받아들였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자신 속에 있는 죄성으로 인해 애통하는 자, 백성의 죄를 자신의 죄처럼 여겨 슬퍼하며 회개하는 자,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아 자신도 거룩하게 살기를 힘쓰는 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생각하게 된다. 또한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과 은혜, 영광을 누리게 되는 자는 다른 무엇보다도 오직 성결함으로 주 앞에 나와 경배하는 자라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남유다가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나 그 그루터기, 곧 거룩한 씨는 남기실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은 이사야서 전체에서 거듭 강조되고 있는 ‘남은 자’ 사상의 핵심이다. 하나님께서 부패한 세상을 심판하시되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말씀 안에서 살아가고자 애쓰는 이들을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갈 그루터기로 남겨두시겠다는 약속인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통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자 하신다.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무엇을 말하라고 하시는지 생각해보자. 하나님은 이 세상이 아무리 부패하고 창조질서에서 벗어나 있어도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을 그루터기처럼 남기신다. 이 땅에서 우리가 바로 그 그루터기로, 남은 자로 살아가야 하겠다. 9월 6일 임마누엘의 징조 (이사야 7:10-16) 10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1 너는 네 하나님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12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13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15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 16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임마누엘의 은혜 이사야는 남북으로 분열되어 있던 이스라엘의 남쪽 국가인 유다에서 선지자로 활동하였다. 구약의 예언들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 시대를 넘어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남유다 아하스 왕 때에 아람 왕과 북이스라엘 왕이 함께 남유다를 공격했는데 이기지 못하자 아람왕이 에브라임과 동맹을 맺고 다시 남유다를 공격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아하스 왕에게 가서 적들의 침입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고,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해 아하스 왕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한 징조를 구해보라고 했으나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앗수르를 의지한 아하스 왕은 이를 거절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였다. 아하스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거절하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의 입을 통해 직접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예언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녀의 몸을 통해 이 땅에 태어나 온 인류의 구원자가 되실 것임을 알려준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 전쟁의 두려움 앞에 놓여 있음에도 하나님 의지하기를 거절한 아하스 왕은 하나님의 마음을 괴롭게 하였으나 하나님은 구원과 은혜의 계획을 아하스 앞에서 선포하셨다. 하나님보다 세상적인 것들을 더 쉽게 의지하는 우리들의 모습, 그런 믿음 없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항상 은혜를 예비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새삼 깨닫게 된다. 오늘도 하루를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감사하며 살아가자. 9월 7일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이사야 9:1-7) 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화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라 여호와의 열심 이사야는 남유다가 당면한 전쟁의 위기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올바른 길인지 알려주었다. 그러나 아하스 왕은 위기상황을 세상 제국인 앗수르를 의지하여 해결하고자 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못했고,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받게 되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적대적인 나라들을 철저히 심판하시는 한편 이 땅에 보내실 메시야를 통하여, 그리고 신실한 남은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갈 것이며, 메시야가 어두움의 땅에 빛으로 탄생하실 것, 그리고 그가 이 세상 나라를 새롭게 하고 공의와 평화가 넘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메시야는 당시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이던 예루살렘이 아니라 멸시와 천대를 받던 지역인 갈릴리 땅에서 사역을 시작할 것이라고 예언되었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그대로 이루어졌다. 메시야의 출생과 생애, 죽음, 부활과 약속 등을 나타내는 ‘기묘자’, 자신의 영적인 가족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영존하시는 아버지’, 이 땅에서 완전한 평화를 이루실 ‘평화의 왕’ 등의 이름 속에서 예수님의 성품과 사역이 이미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의 열심은 이사야를 통해 자신의 계획을 알린지 700년 후 이 땅에 공의와 정의를 세우며, 어두워진 세상을 밝히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위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신실한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돕기 위해 열심을 내어 일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9월 8일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이사야 10:15-23) 15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같음이로다 16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진 자를 파리하게 하시며 ... 17 이스라엘의 빛은 불이 되고 그의 거룩하신 이는 불꽃이 되실 것이니라 하루 사이에 그의 가시와 찔레가 소멸되며 18 그의 숲과 기름진 밭의 영광이 전부 소멸되리니 병자가 점점 쇠약하여 감 같을 것이라 19 그의 숲의 남은 나무가 희소하여 아이라도 능히 계수할 수 있으리라 20 그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22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23 이미 작정된 파멸을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남은 자의 귀환 도끼나 톱은 사람이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도구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을 움직이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을 뿐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한 자신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앗수르를 도끼와 톱으로 사용하셨는데, 앗수르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마치 하나님을 마음대로 움직일 것처럼 교만해졌다. 앗수르를 도구로 사용하신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큰지 마치 살진 자가 파리해지며, 병자가 쇠약해져감 같고, 삼림이 다 불타고 타나 남은 나무가 겨우 몇 그루 남아 있는 것 같은 참혹한 모습이 될 것이라고 이사야는 예언한다. 그러나 또한 대적이 위협해오는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세상 권력을 의지하지 않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진실하게 의지하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떠한가? 온 세상에 분쟁과 갈등, 전쟁이 그치지 않는 것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 속에 있는 욕심과 교만, 불신앙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고, 도구인 인간이 도구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자리에 있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세상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진실하게 의지하라고 말씀하신다. 나아가 죄를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실지 보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자.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음 받고, 하나님 편에 남은 자가 되어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9월 9일 하나님이 이루실 평화의 나라 (이사야 11:1-9)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요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4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삼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꼐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 먹은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우리의 소망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소망을 가져야 하는지 알려주기 위해 기록되었다. 지금 이 소망에 이르려면 인내와 성경의 안위를 통과해야 한다. 인내와 안위는 고난과 슬픔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우리 영혼의 생명인 소망과 친구가 된다. 인내는 소망을 낳으며 소망이 있으면 부끄럽지 않다. 고난 가운데서 더 많은 인내심을 발휘할수록 더 큰 소망을 가지고 고난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조급함만큼 소망을 무너뜨리는 것이 없다. 성경의 안위, 즉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안위 또한 소망의 지주이다. 그것은 우리가 소망하는 것의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 헨리 메튜의 글 중에서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해 세 번째 예언하면서 메시야가 오셔서 이룰 평화의 나라에 대해 노래한다. 그 날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자연의 질서가 회복되고, 공의와 정직이 판단의 기준이 되고,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지며 해함이나 상함도 없고,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을 알려준다. 하나님 안에서 이러한 나라에서 살아가는 것, 그리고 이러한 나라를 이루어가는 것이 바로 우리가 가져야할 소망이고, 이 소망에 이르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예언의 말씀,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다. 9월 10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이사야 12:1-6) 1 그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2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3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4 그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 5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이 알게 할지어다 6 시온의 주민아 소리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 할 것이니라 입술의 고백 이사야 12장은 7-11장까지 계속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심판과 구원 선포의 결론 부분으로, 남은 자들이 돌아오고 장자 임할 메시야 왕국을 소망하는 경건한 이들이 하나님께 감사 찬양을 드릴 것을 권면하고 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인생들의 죄악을 심판하시지만 궁극적으로 인생들을 구원하시고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용서받고 구원받은 인생이 하나님께 드려야할 것은 오직 감사의 찬양이다. 진정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거듭난 사람이라면 그의 영혼 속에는 항상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있어야 마땅하고, 구원의 하나님, 힘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승리의 노래가 고백되어져야 하겠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구원받았을 때에도 이 노래를 불렀고(출15:2),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성전을 다시 건축하였을 때에도 이 노래를 불렀다. (시118:14) 오늘도 하루를 살아갈 때 자신이 진정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녀라고 한다면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찬송이 그 입술에 있어야 하겠다. 나의 입에서 감사의 찬송이 나오는지, 불평과 비탄의 언어가 나오는지가 구원받은 자로 살아가는 삶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기준이 된다. 9월 11일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이사야 14:24-27) 24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 25 내가 앗수르를 나의 땅에서 파하며 나의 산에서 그것을 짓밟으리니 그 때에 그의 멍에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고 그의 짐이 그들의 어깨에서 벗어질 것이라 26 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이것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 하셨나니 27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의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하나님의 경영 이사야의 예언 당시 앗수르는 B.C.722년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뒤 그 여세를 몰아 남유다까지 멸망시키려고 하는 등 그 세력이 절정에 달한 때였다. 당시 유다 왕 아하스는 친앗수르 정책을 펴면서 할 수 있는 한 앗수르의 정복의 칼을 면해 보고자 애쓰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때에 앗수르의 멸망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하나님의 경영’이라고 예언하는 이사야는 아하스 왕의 친앗수르 정책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신변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에 조금도 굽히지 않았고, 그의 예언은 B.C.612년 바벨론에 의해 수도 니느웨가 함락되면서 그대로 이루어졌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이사야처럼 자신의 신변에 위험이 있을지라도 개의치 않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선포하는 선지자의 음성이 필요하다. 어떤 힘 있는 인간이나 나라, 조직이 세계 역사를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세계를 주관하고 계시고, 세계를 경영하는 하나님의 뜻은 그 누구도 피하거나 바꿀 수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야할 것을 가르치는 선지자의 음성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하나님은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모든 생각과 계획을 하나님의 생각에 일치되게 하며, 하나님의 경영하시는 바가 되게 하자.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이다. 9월 12일 은혜 베풀고자 기다리시는 하나님 (이사야 30:18-26) 18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19 시온에 거주하며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백성아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가 네 부르짖는 소리로 말미암아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그가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리라 ... 2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30장 앞부분에서 하나님을 저버리고 애굽을 의뢰한 유다에 대해 책망과 심판을 예고한 이사야는 이어서 하나님의 위로와 회복의 약속을 전달하고 있다. 이사야의 예언은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본심이 심판을 통한 유다의 멸망이 아니라 징계 후에 그들의 불신앙을 돌이켜 회개하게 함으로써 궁극적인 축복에 이르게 하기 위한 것임을 알려준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기 위해 속히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이 고통 중에 부르짖을 때 그 기도에 대해 응답하시고 인도해주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신다. 범죄한 백성을 징계하면서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절묘한 조화를 이사야의 예언 속에서 보게 된다. 은혜주시기 위해 기다리시는 하나님, 긍휼히 여겨주시기 위해 일어서시는 하나님, 상처를 싸매주시고 맞은 자리를 고쳐주시는 하나님,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때로 하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징계하신다. 징계가 아프고 괴로울지라도 징계를 통해 하나님 앞으로 다시 나아가면 하나님은 기다리셨다는 듯이 즉각 우리의 상처를 치료해주시고, 회복시키시며 일곱 배나 밝게 빛나는 빛을 영혼 속에 비춰주신다. 그러므로 어떠한 형편에 있던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은혜 베풀고자 기다리시는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 그 풍성한 은혜와 사랑 안에서 살아가자. 9월 13일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할 것이요 (이사야 32:1-8) 1 보라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것이며 2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3 보는 자의 눈이 감기지 아니할 것이요 듣는 자가 귀를 기울일 것이며 4 조급한 자의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여 말을 분명히 할 것이라 5 어리석은 자를 다시 존귀하다 부르지 아니하겠고 우둔한 자를 다시 존귀한 자라 말하지 아니하리니 ... 7 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8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 존귀한 자 구약성경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과 섭리에 따라 장차 이 땅에 보내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집약되고, 신약성경은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서의 구원사역을 기록하고 있는데, 특별히 이사야서에는 그리스도가 오실 것이 곳곳에 예언되어 있다.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할 것이며,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은 일차적으로 히스기야 왕의 종교개혁과 바른 정치로 인해 백성들이 누릴 행복을 예언한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의의 왕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과 그로 인해 성도들이 누릴 복된 삶을 알려준다. 공의와 정의는 무엇인가? 세상 학문에서 말하는 개념들이 있지만 성경적인 공의와 정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은 인간을 존중하며, 창조의 질서와 조화를 지키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의 관계 속에서 사랑과 긍휼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존귀한 자’는 앞 절의 악한 자와는 대조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너그럽고 후하며, 언제나 존귀한 일을 생각하고 행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이루어주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은 존귀한 자가 되어 정의와 화평과 구원을 사랑으로 이루어가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함께 행할 수 있게 된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우리도 존귀한 자가 되어 존귀한 일을 실천해나가자! 9월 14일 거룩한 길 (이사야 35:1-8) 1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2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3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4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5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 8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하나님이 이루실 회복 이사야서는 1-35장, 36-39장, 40-66장의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35장은 여러 차례에 걸쳐 한 의로운 왕 메시야가 이 세상에 오실 것을 예언하고, 나아가 메시야의 공의로운 통치로 말미암아 평화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을 예언하는 1부의 절정에 해당한다. 이사야는 인간의 교만과 불순종, 죄악으로 인해 황무지처럼 변해버린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마치 창조 시의 에덴동산처럼 새롭게 회복시켜주실 것임을 아름다운 시적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맹인의 눈이 밝아지고, 못 듣는 사람이 듣게 되고, 저는 자가 사슴같이 뛰게 되고, 말 못하던 자가 노래하게 되는 회복을 이루어주실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은 우리에게 큰 기쁨과 소망을 안겨준다. 장차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게 될 복은 하나님과의 화목, 풍요와 평화, 자유, 영원한 기쁨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은 비록 불의하고 메마르고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아 보이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악을 심판하시고, 믿음을 지킨 경건한 ‘남은 자’를 회복시키신다고 하신 그 약속을 붙잡아야 하겠다. 보이는 세상을 향한 우리의 눈을 들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자. 이사야가 예언하며 노래한 하나님의 아름다움, 회복의 기쁨을 생각하며, 깨끗한 자가 되어 하나님이 만드신 거룩한 길을 다닐 것을 생각하며 이 땅에서의 잠시 잠깐의 어려움을 믿음으로 잘 이겨내자. 9월 15일 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사야 40:1-5) 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 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타하게 하라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사람의 의와 하나님의 의 이사야40-66장은 흔히 이사야서 속의 신약 혹은 구약 속의 신약이라고 한다. 구약에 미리 나타난 구원의 복음(복된 소식)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마가는 마가복음을 기록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의 사역 첫머리에 이사야서 40장 3-5절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이사야서 1-39장까지는 자기 백성과 이방민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 경고하면서 사람의 의가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 창세기 15장6절의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사람의 의라는 것을 깨우쳐 준다. 이후 40장부터는 하나님의 위로와 구속, 구원의 메시지를 들려주면서, 앞부분에서 사람의 의가 무엇인지 알려주던 것과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알려준다. 하나님의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이 인간을 은혜로 구원하신다는 소식이 복음이라는 것이다. 40장을 읽다보면 마치 웅장한 교향곡을 듣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라고 시작하면서 인생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선포한다.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행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인간의 의로 반응하며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야 하겠다. 9월 16일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라 (40:27-31) 27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자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자녀로 살아가는 사람일지라도 때로 고난을 당하거나 어려운 형편에 처하면, 혹은 간절한 기도에 장기간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 같이 느껴질 때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능력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된다.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러했다. 이사야 선지자는 고난스러운 형편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의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모든 의심과 원망을 버리고 위로와 능력을 공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권면한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인 동시에 시간에 갇혀있는 존재이다. 때문에 어떤 원통한 일들이 속히 해결되지 않으면 조급해지고, 나아가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원망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베드로사도는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고 권고한다. (벧후3:8) 인간의 시간 감각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지체된다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좀 더 원대한 시각으로 세상 역사를 바라보는 신앙관을 가지라는 말씀이라 하겠다. 이러한 신앙관을 가진 사람은 세상 역사가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지 여호와를 의지하고 바라보는 믿음을 붙들게 되고, 피곤한 중에도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은 새 힘을 얻게 된다. 지금 우리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새로운 한 주간을 살아가며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자.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9월 17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이사야 41:8-14) 8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9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11 보라 네게 노하던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너와 다투던 자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라 12 네가 찾아도 너와 싸우던 자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요 너를 치는 자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라 ... 13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 14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 택한 백성을 도우시는 하나님 이사야 선지자는 40장 이후 ‘두려워하지 말라’고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이스라엘은 세계를 정복하며 전진하는 이방 강대국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이스라엘이 강대국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이방 우상들의 거짓됨’을 밝혀준다. 세상 역사에서는 강대국들이 일어서기도 하고, 또 다른 강대국에 의해 멸망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이 모든 나라들의 흥망성쇠에 있어 목적을 갖고 계신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눈앞의 현실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고, 하나님의 목적들을 이루어가고 계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나의 종’, ‘나의 벗’이라고 칭하신다. 벗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하브’는 허물없는 대화를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는 친구관계를 나타낼 때 사용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나아가 하나님의 택하시고 구원하신 백성들인 우리들을 친밀한 벗, ‘아하브’라고 부르신다. 우리도 현실에서 부딪치는 크고 작은 문제들, 다가올 미래에 대해 때로 두려움을 갖는다. 그러나 우리를 벗이라 부르시는 하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의지하여 오늘도 하루를 담대하게 살아가자. 9월 18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종 (이사야 42:1-7) 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이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4 그는 쇠하지 아니하고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5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 ‘여호와의 종의 노래’라고 불리는 위의 말씀은 온유와 긍휼이 풍성하며 동시에 공의로우신 메시야의 성품에 대해 노래한다. 나아가 메시야가 이 세상에 오셔서 행할 일들, 즉 소경을 보게 하고, 갇힌 자를 자유롭게 하며, 어둠 가운데 있는 이들을 빛 가운데로 나오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고, 구원받은 인생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찬송하게 할 것임을 알려준다. 이사야는 이 세상에 오시는 메시야는 외치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고 예언하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성품을 표현한다.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 가장 좋은 것을 전하는 그분의 태도는 세상 권세자들과 달리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고 조용하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다고 하며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인 인간들을 그 연약한 상태대로 심판하지 않으실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다. 예수님은 죄로 상한 인생을 심판하는 분이 아니시라 감싸주며 회복시키는 관용적 성품을 가진 분이시다.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한다’는 표현에서 등불을 의미하는 ‘피슈타’라는 단어는 베실로 만든 등심지인데, 인간의 생명을 문학적으로 표현할 때 사용하였다. 예수님이 죄로 인하여 양심의 빛을 잃고 연약해져 점점 사망의 골짜기로 빠져가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자신의 영원한 생명으로 충만케 하실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이 기뻐하시고 붙드시는 귀한 아들을 종으로 이 세상에 보내주셨다.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할렐루야! 9월 19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 (이사야 43:1-7) 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요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 4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5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 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보배롭고 존귀한 자 하나님은 마치 부모가 말 안 듣는 자녀를 무섭게 혼내기도 하지만 달래고 타이르기도 하듯이 부드럽고 간절한 어조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신다. 인생들을 창조하신 하나님, 그 인생들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백성을 어떻게 보호하는지, 선택한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려주고자 다음과 같이 표현하신다. 창조하고 구원하시며, 지명하여 불러주시고, 물과 불의 위험에서 지켜주시며,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시며, 함께 하시고, 포로가 되어 잡혀간 먼 곳으로부터 불러 모으신다는 표현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해준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모든 이들이 동일하게 받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물과 불의 위험에서 지켜주시고, 각자의 이름을 불러주시고, 무엇보다도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말씀은 이 세상에서 때로 낙심하고 지치고, 두려움과 무기력함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기쁨을 줄 뿐 아니라, 희망을 가지고 다시 시작할 힘을 더하여 준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다. 우리를 보배롭고 귀하게 여겨주시며, 오늘도 우리의 삶 가운데 계셔서 지켜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이끌어주신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존재임을 자각하고 오늘 하루도 보배롭고 존귀한 자로 살아가자! 9월 20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이사야 43:15-21) 15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16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 17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였느니라 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니라 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재창조 태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6일간의 천지창조는 창세기 1,2장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창조는 최초의 인간이며 모든 인류의 대표인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인간은 물론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며 고통하는 상태에 빠졌다. 이러한 상태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맞지 않았으므로 인간의 구원과 만물의 회복이 절실하게 요구되어졌다. 18절의 ‘이전 일’은 홍해에서의 구원사건을 가리킨다. 이를 기억하지 말라는 것은 장차 있을 구원 사건이 홍해의 구원사건보다 더 크고 놀라운 것이 될 것임을 시사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과거의 영광스러웠던 일에 집착하지 말고 앞으로의 더 영광스러운 일을 사모하라는 말이기도 하다. 19절의 ‘새 일’은 이전 일, 또는 옛적 일과 대조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회복될 희망이 전혀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회복시키실 것이며,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죄와 사망에서 신음하며 죽어가는 인생들을 구원하실 것을 예언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인간들로 인해 타락하고 오염된 세상을 새롭게 하시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광야 같고 사막 같은 이 세상에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고, 생명의 물이 강같이 흐르게 함으로써 영적인 재창조를 이루셨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깨끗하게 씻어주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맞게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9월 21일 택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 (이사야 44:1-5) 1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2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 3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4 그들이 풀 가운데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같이 할 것이라 5 한 사람은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할 것이며 또 한 사람은 야곱의 이름으로 자기를 부를 것이며 또 한 사람은 자기가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그의 손으로 기록하고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라 여호와께 속한 사람 사람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인생관을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어떤 이는 재물을, 어떤 이는 건강을, 어떤 이는 지식을, 어떤 이는 명성을 얻기 위해 부지런히 달려가고 있는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사모하고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인생들을 어떻게 도와줄 것인지 알려주신다.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고,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하나님의 영을 택한 백성들의 자손에게, 하나님의 복을 택한 백성의 후손에게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목마른 자는 물의 소중함을 알고, 농사짓는 사람은 마른 땅에 흐르게 될 시내가 땅을 윤택하게 만들고 많은 수확을 맺게 할 것임을 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가장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실 뿐 아니라 자손 대대로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라’(사40:30-31)는 말씀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매일을 살아갈 새 힘을 공급받게 된다. 오늘도 우리를 ‘나의 택한 여수룬아’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응답하여 자신이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임을 자각하고 고백하자. 택하신 백성에게 생명수를 공급해주시며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자. 9월 22일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이사야 53:1-6)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서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고난 받는 종 이사야가 예언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종,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장면은 마치 직접 보고 노래하듯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어 ‘여호와의 종의 노래’라고도 불린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백성이 자신을 거역하고 죄 가운데 빠져 있을 때 선지자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를 보내시겠다고 거듭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메시야는 그러나 통치자, 심판자의 권세 있는 모습이 아닌 보잘 것 없는 종의 모습으로 오실 것임을, 이 땅에서 많은 질고를 당할 것임을 이사야는 예언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외적으로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무런 매력이 없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멸시와 조롱을 당하고, 채찍에 맞고 창에 찔리며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셨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죄를 대신 갚아주시기 위한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러한 방법으로 공의를 이루고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를 대신 지고,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당하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대신 찔리고 상하셨다. 예수님이 징계를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되었다. 우리는 고집이 세고 배회하기 좋아하는 양 같이 하나님을 떠나 제멋대로 행동하였으나 하나님은 양 같은 우리를 위해 우리 모두의 죄악을 자신의 아들, 예수님 한 분에게 모두 지우셨다. 9월 23일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이사야 55:1-5) 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4 보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인으로 세웠고 만민의 지도자와 명령자로 삼았나니 5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로 달려올 것은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음이라 이는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초청 1 물은 모든 생명체의 생명 유지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귀하고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인간의 영혼에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종종 물에 비유하여 표현한다.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이 말씀은 육신의 욕망과 만족을 찾아 방황하는 현대인의 삶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각기 이유가 다른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참된 만족을 찾지 못한다. 하나님은 인생들이 진정 찾아야 할 것을 찾지 않고 일시적인 것, 허무한 것을 찾아 헤매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며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고 책망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오라고 부르신다. 하나님께 나아와 돈 없이, 값없이 물과 포도주와 젖을 얻고, 좋은 것을 먹고 즐거움을 얻으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 나아오기만 하면 인생의 모든 욕구를 근원적으로 해결해주시겠다고 초청하시며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신다. 우리는 지금 무엇에 목말라 하는가? 무엇을 찾으며 우리의 시간과 힘을 사용하고 있는가? 안타깝게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 나아가 영혼의 목마름을 채우고 부요함을 누리자. 9월 24일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 (이사야 55:6-11) 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10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하나님의 초청 2 신앙은 하나님을 찾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이사야는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 나아오려는 사람은 ‘만날 기회를 타서’(시32:6), 만날 만한 때에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데, 하나님을 만날 기회를 한 번 놓치면 언제 다시 기회가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열 처녀 비유(마25:1-13)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눅16:19-31)에도 잘 표현되어 있다. 하나님을 찾아서 만남으로 신앙을 시작한 사람은 하나님을 불러야 한다.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한 말씀에서 ‘부르다’는 단어는 어떤 응답을 얻기 위해 강력한 욕구를 가지고 간절히 부른다는 뜻이다. 특히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경우에 사용된 이 단어는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으시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늘 우리 가까이 계시지만 영적인 눈이 어두워진 자들은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느끼지 못한다.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알고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생활 하다가 종종 낙심하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기도하지 않아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은혜 베푸시기 위해 우리를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다. 우리의 생각보다 높고, 우리의 길보다 높은 하나님의 생각과 길을 따라갈 수 있도록 하나님을 찾고 부르며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하자. 9월 25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 (이사야 58:6-9)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롭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9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참된 금식에 따른 하나님의 복 하나님은 위선적이고 가증한 신앙생활, 나아가 위선적으로 금식하는 자들을 경고하시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의 참 정신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신다. 남유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자 외형적으로는 금식하면서 오히려 오락을 즐기고, 자신의 영향력 하에 있는 이웃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 이기적인 삶, 금식의 근본정신과 모순된 삶을 살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기준에 의해 행동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금식은 어떤 것인가? 억압당하는 자의 압박을 풀어 자유롭게 해주고, 모든 멍에를 꺾어버리고, 굶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고,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가난한 자를 자기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자를 입히며, 도움이 필요한 일가친척을 외면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의 참된 정신을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에 근거하여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아침 햇살처럼 비추고, 질병이 속히 치료되며,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계셔 보호해주실 것이라고 이사야는 전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며 기도할 때 ‘내가 여기 있다’라고 응답하시며,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영광으로 우리를 돌보실 것임을 약속해주신다. 9월 26일 의의 회복과 안식일 준수 (이사야 58:9-14) 9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10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12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13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4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종교행위를 버릴 것을 권면한 이사야는 이어서 사회적으로 연약한 자들에게 행하던 불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날인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도록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지켜야 할 법들을 알려주셨는데, 예수님은 이것을 두 가지 큰 계명,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해주셨다. 연약한 이들에게 불의를 행하지 않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대하며, 어려움을 나누어 질 때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고, 안식일에 세상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고, 즐겁고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이루며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사야가 말씀을 전할 당시의 남유다 백성들을 향한 뜻은 오늘날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과 다를 수 있으나, 이 두 가지 계명을 기억하고 즐거이 지키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은혜 베푸실 것을 약속하신다. 영혼의 어두움을 하나님의 빛으로 비춰주시고, 어떠한 형편에서도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지켜주시며,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새롭게 세워가는 귀중한 역할을 감당하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서와 조화, 평화가 무너져가는 이 시대에, ‘갑질’이라는 단어가 공공연하게 회자되는 오늘 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금 깊이 새기며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그 이름대로 행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자. 9월 27일 하나님의 종의 사명 (이사야 61:1-3) 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며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자 위의 성경말씀은 이사야가 예언하는 메시야가 1인칭의 형식으로 자신이 앞으로 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 전하고 있다. 이 세상에 오시는 메시야는 가난한 자에게 구원의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며,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고,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슬픔과 근심에 빠진 자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시기 위해 오신다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이사야가 기록한 이 예언의 말씀을 읽어주시며 이것이 바로 자신의 사역임을 선포하셨다.(눅 4:17-21)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사역은 죄를 용서해주는 것 뿐 아니라 죄로 인해 상처 입은 인생들의 영혼과 육신을 치료하고 온전하게 회복시키는데 있음을 알려주셨다. 예수님은 이러한 일들을 감당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로 삼으신 우리에게도 동일한 과제를 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은혜를 베푸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받은 은혜를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감당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고 주신 것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은혜를 사모함이 있는지, 아니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가득 찬 세상의 삶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하여는 아무런 갈망도 없는지 돌아보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은혜주신 목적을 바르게 깨닫고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로 살아가자. 9월 28일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65:17-25) 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18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19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24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25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새 하늘과 새 땅 태초에 하나님은 천지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후 자신이 창조한 모든 것을 보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과 죄로 인해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조화와 질서가 파괴되었고,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어 영혼의 죽음 가운데서 살아가는 고단한 존재가 되었다. 이사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것을 끊임없이 외쳤다.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하는 신실한 남은 자들은 구원받을 것이며, 장차 구원받은 남은 자가 들어가 복을 누리게 될 새로운 세상의 도래에 대하여 예언하였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다시금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첫 번째 창조는 인간이 육신의 몸으로 살아갈 세상이지만 다시 이루실 창조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장차 하나님과 영원히 살아갈 나라를 세우시는 것이다. 그곳에서 성도들은 이전의 죄악이 기억되지 않고, 눈물이 없고 기쁨으로 충만하며, 영원히 살고, 자신이 수고한 열매를 누리며, 하나님이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완전한 은혜와 완전한 평화 가운데 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이 없고, 잠시 고난과 질병, 슬픔을 당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자녀를 위해 창조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 그곳에서 누릴 영원한 생명과 은혜를 소망하자. 이 소망을 가지고 오늘도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일들을 잘 감당해나가자. 9월 29일 하나님의 약속 (말라기 4:1-6)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3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내가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4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침묵 속에서도 일하시는 하나님 말라기서로 구약성경은 끝이 나고 신약성경이 시작된다. 말라기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신이 감동되어 말씀이 임한 후 어느 누구에게도 하나님의 계시가 내리지 않았다. 구약시대에는 많은 선지자들이 활동했으나 말라기 이후 더 이상의 선지자의 활동은 나타나지 않았다. 마치 애굽에 내려간 야곱의 칠십 명의 식구들 이야기가 있은 후 모세가 등장하기까지 약 40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말라기 선지자 이후 예수님이 등장하시기까지의 약 400년 동안의 일들에 대해 성경은 역시 침묵한다. 그래서 이 400년의 기간을 암흑시대, 혹은 신구약 중간시대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계시가 끊어져 암흑시대라고 일컫기도 하지만 실제로 이 시대에 대해서는 글로 기록된 자료가 가장 빈약한 시대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의 말씀을 400년이 지난 뒤 세례 요한을 보내심으로 이루어주시며 신약시대를 여셨고, 나아가 예수님을 보내주심으로 자신의 약속을 완전하게 성취하셨다. 암흑시대,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신 것 같지만 자신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계획을 진행하고 계셨다. 하나님은 오늘 날에도 우리를 향한 모든 계획을 빈틈없이 이행하고 계신다. 혹여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시는 것 같이 느껴지는 시간에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잃지 말자. 9월 30일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시 37:3-11) 3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 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라 5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6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9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10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11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가 받는 복 시편기자는 우리의 길을 여호와께 맡길 때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라고 가르친다. 주님께 우리의 길을 위탁하는 것은 우리의 재능을 완전하게 사용하는 첫 번째 길이다. 우리가 만일 우리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맡긴다면 우리 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생수의 강 같이 흘러 넘치게 될 것이다.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조지 뮐러목사님은 영국 브리스톨에 고아원을 세우고, 1898년 93세의 일기로 소천하기까지 약 15만 명의 고아들을 기도로 양육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심을 보여주었다.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며 고아원 사역을 할 수 있도록 간구하던 중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 81:10)는 말씀에 힘입어 이 일을 시작하였다. 뮐러목사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며 믿음으로 기도하여 일생에 5만 번 이상의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자신을 의뢰하는 자들을 기꺼이, 넉넉히 도우시는 분이심을 고아원 사역을 통해 증거하였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생명줄'을 놓치는 것이라고 하며 고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매일 기도하였다. 우리의 말의 재능이나 지적인 능력, 가진 물질이 타인에 비해 보잘 것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이라도 하나님께 맡기기를 원하실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의 의를 빛 같이, 우리의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며, 자신을 의뢰하는 자가 받는 은혜를 우리를 통해 드러내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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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림교회
2019년 3월 25일
In 365일 말씀묵상
10월 1일 로마교회에 보내는 인사 (로마서 1:1-7)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바울의 아이덴티티 사도 바울이 활동할 당시 로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소수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가 있었는데 이 교회의 구성원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직접 받을 기회가 없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의 도리를 확실하게 가르치고자 하여 편지를 쓰면서 먼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함을 받은 자라고 소개하였다. 바울이 자신을 표현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둘로스)이라는 단어는 당시 가장 비천한 노예를 지칭하는데, 바울은 자신이 체험한 은혜 때문에 자발적으로, 기꺼이 예수님의 종이 되었다. 그리고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자신의 직분을 소개하며, 그 부르심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한 것이고,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음을 고백하였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이며 그것을 맡겨주신 분은 누구인지를 짧은 인사말에서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디트리히 본회퍼목사님은 독일의 나치 정권 시대에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가 39살의 나이에 교수형을 당하기 직전 형무소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시를 기록하였다. ‘나는 누구인가? 이 고독한 물음이 나를 비웃는다. 내가 어떤 사람이건, 오 하나님, 당신은 나를 아십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오늘 자신에게 이 질문을 해 보자. 나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나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그리고 그 삶의 과제와 목표는 누구로부터,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생각해보자. 10월 2일 바울의 로마 방문 계획 (로마서 1:8-15) 8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방법 로마교회는 사도 바울에 의해 세워진 것은 아니다. 사도행전 2장10절에 의하면 오순절에 절기를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왔다가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 중에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로마로 돌아가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수고한 결과로 로마에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도 바울의 전도활동으로 복음을 접한 이들 중 당시의 지역적 이동이 심했던 상황 속에서 로마로 이주해간 이들이 그곳에서 기독교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을 것으로도 짐작해볼 수 있다. 이들이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 소식이 바울에게까지 전해지자 기뻐한 바울은 신령한 은사를 그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해 여러 번 로마에 가고자 했으나 사정이 허락지 않아 방문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움을 편지를 통하여 전달하고 있다. 바울은 그의 생애의 마지막 시기에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가게 되었다(행27,28장). 만일 그가 혼자 로마로 향했더라면 그를 죽이려하는 열성 유대교인들의 위협과 약 4000km의 먼 거리의 여행의 어려움을 감당해야 했을 터인데 죄인의 신분이었으므로 오히려 로마 군인들의 호위 하에 로마까지 안전하게 가게 된 것이다.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비록 죄수의 몸이었지만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고,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은 인간의 생각과 다르다. 바울이 그렇게 가기를 원했던 로마에 죄수의 몸으로 오히려 안전하게 보호를 받으며 가게 하시는 것이 바울의 선교계획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우리의 열정과 기도가 때로 막히는 것 같아도 낙심하지 말자. 하나님은 우리가 예상치 못한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하나님의 선교를 이루어 가신다. 10월 3일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복음 1 (로마서 1:16-17)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1517년 비텐베르크에서 사역하던 마틴 루터가 당시 천주교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 토론해보고자 95개의 논제를 적어서 비텐베르크 성교회 벽에 걸어 놓았던 것으로부터 종교개혁운동이 시작되었다. 마틴 루터의 핵심적 신학사상이자 종교개혁의 출발점이 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는 말씀에서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은 바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 알려주고자 했던 주제이기도 하다. 로마서는 외형적으로 볼 때는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이지만 그 안에 있는 복음의 능력으로 인해 기독교 역사에 큰 영향력을 미쳤던 사람들이 로마서를 통해 회심하였다. 어거스틴은 로마서 13장 12,13절 말씀을 통해 방탕한 생활에서 돌이켜 성자가 되었고, 마틴 루터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롬 1:17절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후 종교개혁에 헌신하였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는 예배 중 누군가가 마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듣다가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세상에서는 죄를 지으면 고소를 당하고, 재판을 받고, 손해배상을 하던지, 감옥에 가던지 자신의 죄 만큼 자신이 값을 치러야 한다. 의로우신 재판장 되신 하나님도 인생들의 죄를 심판하시고 죄의 값을 지불하게 하시는데, 그 죄의 값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신 갚도록 하셨다. 누가 나의 금전적 빚을 대신 갚아준다거나, 나의 죄를 대신해서 감옥에 간다면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할까? 하물며 내가 죽을죄를 지었는데 나를 위해 대신 죽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은혜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고 가는 셀 수 없는 무수한 인생들의 죄를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과 바꾸며 대신 갚아주셨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그 믿는 믿음으로 인하여 이제는 죄가 없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해주시겠다고 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산방식, 죄를 처리하는 방식이 세상의 법과는 너무나 달라서 사람들은 이 쉬운 은혜의 길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10월 4일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복음 2 (로마서 1:14-17) 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열성 유대교인이었던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을 잡아내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던 중 빛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회심한 후 일생을 복음전파에 헌신하였다. 핍박자에서 전도자로 변화된 바울은 모든 사람들 –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나 – 에게 복음을 전하여야 하는 빚진 자의 심정이 되어 당시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함으로써 온 세계를 향하여 복음을 흘려보내기를 간절히 원했다. 예수님은 나무에 매달려 돌아가셨다. 그런 이를 메시아라고 믿고 고백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거리끼는 일이었다. 구약에서는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했으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바울은 십자가가 하나님의 의로우신 구원 방법임을 깨달았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한 구원의 복된 소식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전할 수 있다고 선포하였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무엇인가? 공의의 하나님, 의로우신 하나님은 인류의 죄를 묵과하고 덮어버리실 수 없었지만 사랑의 하나님이시라 인류의 죄를 그대로 다 처벌할 수도 없었다.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태어나시게 하셔서 그로 하여금 인류의 죄를 대신 갚게 하는 방법을 택하셨고,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공의도 세워지고, 하나님의 사랑도 이루어졌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믿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이라고 인정받은 사람은 그 믿은 믿음 때문에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리고 살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10월 5일 하나님의 심판 (로마서 2:1-11)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하나님이 주실 상급 예수님은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눅6:41-42)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남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되기 쉽다. 다른 이의 잘못은 잘 찾아내고 쉽게 비난하면서 자신의 잘못은 잘 깨닫지 못하고, 깨달아지는 잘못도 스스로 합리화하곤 한다. 사도 바울도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판단하고 정죄하는 우리도 같은 잘못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모든 판단과 정죄는 하나님께서 하신다. 단지 하나님은 죄인들이 회개하기까지 인내로 기다려주시는데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온 세상 모든 인생들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데, 악을 행한 자에게는 환난과 곤고로, 참고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할 영광과 존귀와 평강으로 갚아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선한 자들이 고난을 당하고, 불의한 자들이 오히려 잘 되고, 정의가 사라진 것 같아 보일 때에도 낙심하지 말자.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선과 악을 심판하실 날이 올 것이다. 그 심판의 날에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상급이 무엇일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매일의 삶을 경건함 가운데 인내하며 선을 행하며 살아가자. 10월 6일 하나님의 의 (로마서 3:20-26)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유대교에서 개종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오랜 동안 율법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율법과 복음 사이에서 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었다. 바울은 이들에게 구원은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는 것을 가르치고, 이를 통해 올바른 믿음 위에 설 수 있게 하고자 로마서를 기록하였다.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주제는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의이다. 로마서에서는 “의롭다”는 단어가 이런 저런 모양으로 40회 이상 나온다. 본래적 죄인으로서의 인간은 율법을 통해서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율법에 정통한 학자였고 그것을 지키는 일에 전심전력했던 사도 바울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하며 탄식하고 있다. 구약에서의 하나님은 율법을 주심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어진 자신의 죄의 성품을 깨닫게 하셨고, 신약에서의 하나님은 이제 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여 다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하시고자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게 하셨다.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누구든지 차별하지 않으시고 의인으로 인정해주시는 것이 바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이다. 하나님은 전혀 자격이 없는 우리를 순전히 십자가를 통한 은혜로, 우리 자신은 아무 대가를 치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고자 길을 열어놓으셨다. 비록 우리가 육신의 죄성과 연약함으로 인해 바울과 같이 자신을 사망 가운데 있는 곤고한 자라고 탄식할 수밖에 없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기만 하면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오늘도 용기를 내어 하나님께서 열어놓으신 길을 갈 수 있다. 10월 7일 아브라함의 믿음과 하나님의 약속 (로마서 4:18-25)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만일 하나님께서 오늘 내게 찾아오셔서 나의 소원을, 그러나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성취시켜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면 얼마나 놀랍고 기쁠까 상상해보자. 그런데 약속해주신 일이 몇 년을 기다려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대한 의심이 생기고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해보자. 아브라함은 75세 되던 해에 하나님으로부터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축복의 말씀을 받고 무려 25년을 기다려서 아들 이삭을 얻었다. 그는 백세가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음을 알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는 1)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2)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3)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다. 하나님께 대한 아브라함의 절대적인 신뢰의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로 인정받았는데 이것은 아브라함 이후 태어날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인해 의롭다고 인정받을 것을 알려주기 위한 본보기가 되었다.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무엇인가?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한 말씀을 믿었다. 아들을 주실 뿐 아니라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다는 말씀을 믿었다. 자신의 육체적 상태는 새 생명을 탄생시킬 수 없었으나 하나님은 자신이 약속하신 것은 인간의 눈에 불가능해 보이는 일일지라도 반드시 이루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심을 믿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영적 생명을 소유한 새 생명으로 태어나게 해주신 것을, 구원받고 거듭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큰 민족으로 이 땅 위에 이루어 가실 것을,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마지막 때에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을, 이 모든 일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랑과 공의로 이루어 가심을 믿는다. 10월 8일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의 삶 (로마서 5:1-6)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관계의 회복 때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에 문제가 생기거나 관계가 좋지 않아 불화하게 될 때 우리는 괴로움을 겪는다. 사람 사이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선 더욱이 그렇다. 하나님은 인생들을 창조하시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자 하셨으나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죄를 지음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인간은 영혼의 곤고함 가운데 수고로이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셨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관계를 회복시켜주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우리 마음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한 화평과 은혜를 누리게 하셨는데, 마치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는 그 사랑을 가득 받으며 행복하여 웃음꽃이 피어나는 가정의 모습으로 비유해볼 수 있겠다. 사도 바울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중 그 누구보다도 환난을 많이 겪은 사람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깨달은 후 기꺼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고난의 길을 가면서,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영광과 비교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울과 같은 극심한 고난을 받지는 않지만 이제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게 되었다. 환난을 통하여 인내를 배우고 자신을 연단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룰 소망을 갖기 때문이다. 사랑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이 자녀인 우리에게 환난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는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자신이 겪는 고난의 의미를 알지 못하면 견디기 힘들고 낙심하게 되지만 그 고난을 통해 무엇을 얻고 이룰지 아는 사람은 그것을 기꺼이 감당할 수 있게 된다. 10월 9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산다 (로마서 6:1-5)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새 생명으로 살아가는 성화의 삶 흔히 첫 인간인 아담을 첫 아담이라고 하고,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이라고 칭한다. 하나님의 눈에는 지구상에 살아가는 수많은 인간들이 단지 두 종류의 사람으로 보이실 것이다. 즉 모든 인간은 첫 아담 안에 있어 잃어버린 사람이거나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 구원받은 사람이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그러면 나는 어디에 있는가? 아직도 옛 아담 안에 있는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진정 거듭났다면 로마서 5장까지 온 것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받고 의롭다 인정받은 우리는 성화된 삶을 사는 단계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것이 6장부터 8장까지의 말씀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서 죽게끔 내어주던 죄인 중의 괴수인 자신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사용하시는 것을 통해 자신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 나아가 그러한 사랑을 세상 모든 사람에게 부어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롬5:20)고 고백하였고, ‘그런즉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롬6:1)고 묻고 있다. 하나님께서 핍박자 사울을 회심시켜서 사도 바울로 만드시고 많은 분량의 성경을 기록하게 하여 오늘날까지 우리들에게 전해주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불의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보여주시는 확실한 증거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는 죄인인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음을 고백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는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지 않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새 생명으로 살아감을 고백한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으므로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함을 시인하며 고백한다. 10월 10일 의의 종 (로마서 6:12-19)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알고 여기고 내어드리라 사도 바울은 회심한 후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고백하며 기꺼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종과 같이 헌신하였다. 사람이 죄를 따르면 죄의 종이 되고 물질을 따르면 물질의 종이 된다. 바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이들에게 더 이상 죄에 매이지 말고 자신을 의의 무기로, 의의 종으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 내면에 있는 죄성을 극복하여 죄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의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은 이를 위해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났음을 알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더 이상 죄에 매여 죄의 종으로 살지 않게 되었음을 알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더 이상 죽음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함을 알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이 자신에게 이루어져 자신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기라고 한다. 자신에게 이 사실을 날마다 선포하며 인정하여 죄가 틈타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나아가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내어드려 하나님이 의롭게 사용하시는 의의 병기가 되라고 한다. 알고 여기고(받아들이고) 내어드림으로써 죄에 대하여 죽고 죄와 싸워 나가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과정이 성화의 과정이고, 이 과정 자체를 성화라고 할 수 있다. 알고 여기고 내어드리는 세 단계는 우리의 매일의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로운 삶으로 인도한다. 10월 11일 생명의 성령의 법 1 (로마서 8:1-11)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니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는 성령의 도우심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듭난 자신이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는 인간의 모습을 직시하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하고 탄식한다. 이 세상에 살면서 마음으로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하나님의 법을 따르기를 원하나 육신으로는 죄의 길을 따르게 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고, 이러한 이중적 모습이 바로 인간의 실존이며 우리가 겪는 내적 갈등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씀한다.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은 육신 가운데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육신에 속한 일들,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일들을 계속적으로 극복해 나감으로써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들은 혼자의 힘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오직 믿는 사람 안에 계시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을 때에만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우리 안에는 이미 성령이 계신다. 그러므로 매일의 삶 가운데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인식하고 의지하며 의논하고 인도함을 받을 때 우리의 옛 사람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으로 변화되어갈 수 있다.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육신의 일을 생각하여 사망의 길을 달려가지만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의 일을 생각하여 생명과 평안을 누린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내 안에 계셔서 매 순간 나를 이끌어주시고자 하심을 기억하고 자신의 모든 일을 성령께 맡겨보자. 내 생각, 내 판단을 앞세우지 말고 먼저 내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묻고 걸음을 내디뎌보자. 그럴 때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체험하며 변화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10월 12일 생명의 성령의 법 2 (로마서 8:14-17)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명의 법에 속한 자의 삶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12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증언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고, 그에 따른 당연한 결과인 하나님의 상속자로 삼아주시며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주셨다. 육신의 부모를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면서도 그분이 아버지인지 어머니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부모가 주시는 무언가를 사용하지도 못하고 있는 어정쩡한 모습의 자녀라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이상한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때로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아버지의 권세를 자신의 것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끊임없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도록 도우시고 이끌어 주신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함을 가르쳐준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의식하고 아버지께서 주신 권세와 능력을 사용하며 살아가되 하늘에서 받을 영광을 기대하며 이 땅에서의 고난도 기꺼이 감수하기로 작정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생명의 법에 속한 사람이다. 육신의 아버지를 부르듯 하나님을 아빠라고 조용히 불러보자. 하나님께서 사랑 많으신 아빠로 내 곁에 계시며 나를 바라보시고 나의 음성을 듣고 계심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 분의 영이 내 속에서 나로 하여금 자녀의 삶을 살아가도록 가르쳐주시고 사랑으로 이끌어가고 계심을 느끼게 될 것이다. 10월 13일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로마서 8:35-39)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리스도인의 확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새 생명을 얻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때로 그 사랑과 능력을 확신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낙심하고 불안해한다. 사도 바울은 다섯 가지 질문을 하고 그에 대답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의 승리를 보장하셨음을 확신시켜준다. 1.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는가? - 아무도 우리를 대적하지 못한다. 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주신 이가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 - 모든 필요한 것을 다 주신다. 3.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누가 고발하겠는가? - 아무도 우리를 죄 있다고 고발하지 못한다. 4. 누가 정죄하겠는가? - 아무도 우리를 죄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 심판하지 못한다. 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겠는가? -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등의 모든 것들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지 못한다.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사도 바울의 선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어떠한 힘도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오히려 우리는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힘입어 죄에 대하여, 육신에 대하여, 현재의 고난에 대하여, 악한 세력들에 대하여, 세상 핍박들에 대하여 넉넉히 이길 수 있음을 고백하고 확신하며 오늘 하루의 삶을 살아가자. 10월 14일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성령 (로마서 8:24-30)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11:1)라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눈에 보이지 않으나 장차 이루어질 것을 믿음으로 소망한다는 뜻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이미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존재하는 것을 소망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을 소망하며 살고 있다. 육신의 세상에 살면서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기를 소망하여 인내하며 기다리기에는 우리가 너무나 연약한 것을 성령께서 아신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탄식하며 친히 간구하심으로써 그날까지 견디며 이길 수 있도록 도우신다. 때로 우리는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 놓여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고 막막해한다. 또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나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알지 못하므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다. 그러할 때에도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는 말씀은 우리를 위로하고 용기를 더해준다. 우리는 무언가 어려운 일, 힘든 일이 앞에 놓여 있을 때 다른 이들에게 기도를 부탁한다. 사람에게 기도를 부탁해도 위안이 되고 힘이 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해주신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할 때에라도 낙심하지 말자. 소망이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을지라도 실망하지 말자.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서 친히 모든 것을 주장하시어 마침내 선한 결과를 이루어주신다. 10월 15일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로마서 9:19-24) 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2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진노의 그릇 긍휼의 그릇 사람들은 때로 자신을 생각할 때 남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여 기가 죽기도 하고,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여 교만해지기도 한다. 세상은 불평등한 것 같고,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가정환경이나 외모 또는 능력에 있어 부족한 것 같고, 부족함을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장 자크 루소는 1754년 인간 불평등의 기원이라는 책을 출간하여 인간의 불평등이 과연 어디서 유래하는지 추론해보고자 하였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본성적으로 의로우신 분이며 창조주로써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절대 주권을 가진 분이심을 말한다. 이 때문에 피조물인 인간이 절대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께 불의하다고 항의할 수 없음을 토기장이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즉 토기장이가 자신의 의도에 따라 여러 모양의 토기를 만들고, 혹은 귀하게 혹은 천하게 쓸지라도 토기는 토기장이에게 항변할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 그의 기쁘신 뜻을 따라 만드시고 선택하시고 사용하시는 일에 대하여 인간이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판단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떠한 모양으로든 사용해주시는 것을 감사해야 하며, 자신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인식하고 항상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도 바울이 알려주고자 하는 또 하나의 의미는 귀하고 천한 용도의 구분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게 될 진노의 그릇인지 영광을 받기로 예비된 긍휼의 그릇인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귀한 그릇으로 쓰이는지 천한 그릇으로 쓰이는지에 관심을 집중할 것이 아니라 영광 받기로 예비해주신 긍휼의 그릇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에 집중하며 감사해야 하겠다. 10월 16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한다. (로마서 10:9-15)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아름다운 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우리의 구주가 되게 하신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여김을 받게 되고, 이 믿음을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에 이른다. 예수를 구주로 시인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시고, 나는 내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내가 나의 주인이었던 과거의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나도 이제 그 분과 함께 살아나 새로운 내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믿고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내가 나의 주인이었던 삶은 죽었고, 예수님이 나의 주인, 나의 주관자가 되시는 새로운 삶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 앞에서 그리고 모든 사람 앞에서 시인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제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김을 받고 구원받은 이들의 사명을 이사야 52:7 말씀을 인용하여 알려준다.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자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우리는 무언가 좋은 소식을 들으면 전하고 싶어진다. 그 소식이 나의 가족, 주변의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이라면 더욱 빨리 알려주고 싶어진다. 하물며 죄에서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된 소식이라면 우리는 이것을 다른 이들에게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빨리 알려주어야 하겠는가! 이 소식이 너무나 귀하고 복된 것이므로 이것을 전하러 다니는 자의 발이 아름답다고 이사야가 고백하고 있고 사도 바울이 권면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우리도 자신의 발이 좋은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 되기를 소망하자! 10월 17일 이스라엘의 남은 자 (로마서 11:1-7) 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 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3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5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7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빚진 자 이스라엘 분열왕국 시대에 남유다왕국의 왕 아합은 그의 아내 이세벨과 함께 우상 바알과 아세라를 열심히 섬기며 하나님의 백성들과 선지자들을 핍박하였다. 선지자 엘리야는 우상숭배에 열심인 아합에게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보이고자 그 땅에 수년 동안 가뭄이 들게 하였고, 바알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 선지자 사백 명과 갈멜산에서 대결하여 모든 우상을 무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드러내었다. 이에 분노한 아합왕과 이세벨의 살해의 위협을 피해 다니던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하나님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호소하는 엘리야에게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어떠한 위기와 핍박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남겨놓으시는 자신의 신실한 백성이 있음을 엘리야에게 말씀하셨고, 이러한 남은 자들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어져가도록 섭리하고 계심을 알려주셨다. 사도 바울은 죽음의 위협 속에서 택함을 받고 남겨진 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남겨졌음을 강조한다.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선택되어 구원받고 새 사람이 된 바울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 자, 그 은혜를 다른 이들에게 갚아야 할 빚진 자로 여기어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 1:14)’고 고백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대가 타락하고 불의하여 정의가 사라진 것 같아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 만물을 다스리시고, 자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가시기 위해 여전히 자신의 백성을 은혜로 구원하신다. 그 은혜에 감사하며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빚진 자의 심정으로 그 빚을 우리의 이웃에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갚아가야 하겠다. 10월 18일 거룩한 산 제물 (로마서 12:1-8)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니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흠이 없는 짐승을 잡아서 죽은 예물을 드렸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구원받은 우리들은 이제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려야 한다고 사도 바울은 권면하고 있다. 우리의 삶이 죄로부터 분리되어 거룩하고 정결해져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세상은 우리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를 방해한다. 사도 바울의 시대나 지금이나 이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불의하고,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권면한다. 우리가 사는 세대에서 본받지 말아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살아가기에 필요한 은사들을 주셨는데 사도 바울은 이것을 우리의 몸에 비교하여 설명하였다. 각각의 지체들이 자기의 기능을 정상적으로 수행할 때 건강한 몸을 유지하듯이 교회공동체의 각 지체된 우리가 자신의 기능을 잘 발휘하여야 교회 공동체,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가 건강한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다. 우리가 받은 각각의 은사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신 것이므로 자랑할 이유가 없다. 다만 자신에게 주신 은사를 사용하기 위해 다른 이들의 필요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하고 내게 있는 은사를 내 것으로 생각하여 아낄 것이 아니라 너그러운 마음으로 기꺼이 줄 수 있어야 한다. 오늘도 하루를 시작하며 나의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영적 예배가 되기를, 내게 주신 은사를 교회공동체, 이 사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기를 기도하자. 10월 19일 사랑은 율법의 완성 (로마서 13:8-14)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날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을 나누어주시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고, 불순종하고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이신 예수님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을 베풀어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들이다. 아무리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빚이 우리에게 있기에 살아가는 동안 만나는 많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마땅한 본분이고 이웃에 대한 의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권면한다.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중심이 되기에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예수님도 거듭 말씀하셨다. 이러한 사람은 이 땅에서 지상의 삶을 살아감과 동시에 천상의 삶을 미리 맛보며 살아간다. 사도 바울은 또한 이 세상에서 천국 시민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경건한 삶을 살고자 애써야 함을 권면한다. 우리의 마음을 온통 빼앗고 있는 이 세상에서의 삶은 결코 영원하지 않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주님이 다시 오실지 몇 세대 후에 다시 오실지는 아무도 모르나 종말의 때는 반드시 올 것이므로 그 때를 준비하며 살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각자의 삶에 집중하며 바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사랑이라는 말은 때로 빈집같이 허전하고 메마르게 들린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기에 생명력이 있고 빈집을 가득 채우며 퍼져가는 빛과 같다. 오늘도 세상이 우리에게 입혀주고자 유혹하는 어둠의 옷을 뿌리치고 빛의 갑옷,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빛으로 살아가자. 10월 20일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 (로마서 14:1-10)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5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자 사도 바울 시대의 초대교회에는 믿음이 강한 이들과 연약한 이들 사이에 여러 가지 갈등이 있었다. 로마서를 거의 마무리해가면서 바울은 교회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갈등을 해결하고 서로 화목한 관계를 이루어갈 수 있도록 성도들에게 몇 가지 권면을 하고 있다. 그 당시 가장 빈번하고 심각하게 발생했던 것은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한 시비였다. 신전의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이 매일 시장에서 판매되었는데 그리스도인들 중 어떤 이들은 이것을 먹었고, 어떤 이들은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이므로 먹으면 안 된다는 갈등이 생겼다. 또한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특정한 날들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절기나 금식일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고, 어떤 이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바울은 믿음이 강한 이들이 믿음이 약한 이들을 이해하며 포용할 것을 말하면서 각자가 자신의 확신대로 행하지만 서로가 다를지라도 참고 용납하는 것을 배워야 할 것을 교훈하였다. 자신과 믿음의 정도가 다르고, 견해가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받아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된 우리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하고 자신과 다르다고 해서 배척하거나 비난해서는 안된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목사님은 “본질에서는 일치를, 비본질에서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가르쳤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무엇을 행하든지 행하지 않든지 그 기준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에 있어야 한다. 또한 우리 자신의 행함이 행여 다른 이들을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이 아닌지 주의해야 한다. 10월 21일 문안인사 (로마서 16:1-16) 1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3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고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5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 6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7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8 또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 9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10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블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11 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나깃수의 가족 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 12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14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및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15 빌롬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의 자매와 올름바와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16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함께 일하는 동역자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마감하면서 로마의 성도들에게 문안 인사와 함께 그동안 자신과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동고동락한 사역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로마 교인들에게 보내는 이 편지(로마서)를 뵈뵈로 하여금 대신 전달하게 하니 뵈뵈를 환영하고 도와 즐 것을 부탁하였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바울을 위해 생명까지도 내어놓을 정도로 열심히 수고했음을 말하고 있다. 그 외에 약 24명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이들 중에는 여자도 여러 명 있고 로마 황실과 관련 있는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기독교가 일찍이 로마 황실에까지 전파되었음과 당시 로마 교회 내에 여성의 활동이 많았음을 암시한다. 언급된 이들 중 대부분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았던 사람들인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바울이 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론하면서 문안 인사를 하는 것은 이들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수고하면서 다른 이들에게 신앙적으로 귀감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언급한 많은 이름을 보면서 당시 순탄하지 않은 환경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수고했던 이들의 순수한 믿음과 열정을 생각해보게 된다. 하나님의 일은 여러 믿음의 사람들의 동역으로 이루어진다. 바울의 귀한 사역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처럼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돕는 이들이 없었다면 빛을 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도 주의 일을 할 때에 자신을 돕는 자를 귀하게 생각하고 배려할 뿐 아니라 스스로 다른 이들을 돕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 바울이 개개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일일이 이름을 언급하며 문안 인사를 전했듯이 우리도 성도 간에 세심한 사랑과 관심으로 문안하며 서로를 위해 기도하자. 10월 22일 전도의 미련한 것 (고린도전서 1:18-25)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십자가의 도 당시 고린도교회는 여러 파벌로 나뉘어 분쟁을 일삼았는데, 어떤 이는 바울에게, 어떤 이는 아볼로에게, 어떤 이는 게바(베드로)에게, 어떤 이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고 하며 서로 갈등하였다. 고린도교회와 같은 분쟁은 오늘날 우리 안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분열과 분쟁이 인간의 능력이나 지혜를 드러내고자 하는 교만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지적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것을 권고하였다.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분열하고 분쟁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은 다시금 십자가의 도를 강조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드러나는 표적과 지혜를 구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한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는 영적 분별력이 결여되어 십자가의 도가 어리석고 미련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믿는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세상 사람들이 미련하고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십자가,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못 박히심으로 인간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전하는 전도는 미련하게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십자가를 통하여 죄 가운데 있는 인생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하나님이 표현하신 가장 큰 사랑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십자가로 구원받은 우리는 십자가의 도를 전하기를 기뻐하자! 10월 23일 하나님의 방법 (고린도전서 1:26-31)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자랑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십자가의 도’가 구원의 근본인 것과,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임을 설명하면서 성도들의 분쟁은 ‘십자가의 도’를 따르지 않고 세상 지혜를 따르는 어리석은 일임을 책망하였다. 이어서 바울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기준은 외모나 학식, 재능, 물질과 같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약하고, 보잘 것 없고 미련한 자들을 택하여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이어가게 하신 것은 이를 통하여 세상에서 지혜 있다고 하는 자들, 재물이 많은 자들, 권력자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한다. 지혜나 재물이 그 자체로 나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소유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세상의 지혜자들, 권력자들, 재물이 풍성한 자들을 택하지 않으시고 부끄럽게 하시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지혜나 권력, 재물을 믿고 쉽게 교만해지며,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졌음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자랑하며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행여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오히려 교만하게 하며 영혼을 퇴락시키는 세상적인 것들을 자랑하며 살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자.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는 ‘십자가의 도’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기꺼이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자랑으로 삼자. 10월 24일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 (고린도전서 3:16-23)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18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19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는 이라 하였고 20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성전됨의 의미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향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강하게 묻고 있다. 그들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깨닫게 하기 위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에게 가장 귀한 것이 있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세상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고린도교인들을 책망하는 말이기도 하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시내산으로 모세를 부르시고, 모세에게 성막을 지을 것을 명령하셨다. 성막 안에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고, 지성소에는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판과 만나를 담은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넣은 법궤를 두게 하였다. 이 세 가지는 모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어떤 놀라운 일을 행하셨는지를 증거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보관해두라고 하신 그곳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영광을 드러내는 지극히 거룩한 장소였다. 이어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고 말씀하셨다. 광야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에게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께서 그들의 광야생활을 이끌어 가신다는 중요한 상징이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우리에게 약속하신대로 성령을 보내주셨다. 구약시대에는 눈에 보이는 성막, 성전이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이 거룩한 영, 곧 성령으로 직접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신다. 내 안에 계시는 성령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매일의 삶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살아가자. 10월 25일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 13:1-13)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사랑으로 드러나는 가장 큰 은사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이다. 또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시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 증인으로서의 삶은 서로 사랑하는 것임을 알려주셨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같이 제자들도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통하여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성령을 보내주시고, 능력을 주시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를 주신 본래의 의미를 망각하고, 이것을 자신의 자랑으로 삼고 남용함으로써 갈등을 빚었던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은 은사의 목적과 다양성, 통일성을 언급하면서 더 큰 은사, 바로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한다. 이것은 당시 가시적이고 현상적인 외적 은사들을 최고로 여기며 자랑하고 교만했던 고린도교인들에게 필수적인 권면이었다. 아무리 많은 은사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사랑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그런 은사들이 아무 유익이 없는 외적인 겉치레에 불과하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없이 행하는 은사들은 겉으로는 그럴 듯하게 보여도 아무 능력도 없는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주님이 말씀하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지 점검해보자. 10월 26일 그리스도의 향기 (고린도후서 2:12-17) 12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내게 문이 열렸으되 13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 우리는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게 하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17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생명에 이르는 냄새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세 번째 방문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으나 직접 가지 못하고 대신 편지를 써서 디도에게 가져가게 하였다. 고린도교회에 대한 걱정으로 인해 마음이 편치 못했던 바울이 디도에게 고린도교회의 형편을 전해들은 후 다시 쓴 편지가 고린도후서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게 하신다고 말하며, 성도들을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표현한다. 바울의 이러한 표현은 구약시대에 성전에서 날마다 향을 피워 하나님께 향기를 올려드렸던 것과 인간의 죄를 대신 갚기 위해 짐승을 속죄제물로 태워서 그 냄새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던 것을 연상케 한다. 이제는 구약시대에 행하던 것 같이 향이나 제물을 태우는 냄새를 하나님께 올려드릴 필요가 없어졌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다 갚아주시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되셨기 때문이다. 사람의 후각은 가장 예민한 감각이다. 선교사들이 제3세계에서 선교할 때 가장 적응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그 지역의 독특한 냄새라고 한다. 우리가 누구에게든지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한다면 그 향기는 맡은 사람에게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이 향기를 맡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생명의 길로 갈 것인데, 생명의 길을 거절하는 이들이 있을지라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 것을 우리의 사명으로 여기고, 생명에 이르는 냄새를 퍼트리는 기쁨을 경험하며 살아가자. 10월 27일 질그릇에 담긴 보배 (고린도후서 4:6-12) 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내 안에 있는 보배 태초에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심으로써 어두움을 몰아내고 사물을 분명하게 볼 수 있게 하신 것처럼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신의 영혼을 덮고 있던 영적 무지함에서 벗어나 진리의 빛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바울이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깨달은 후 그 은혜를 귀한 보배로 여기며, 그 은혜를 받아 간직한 자신을 질그릇에 비유하였다. 우리의 육신적 생명은 질그릇처럼 깨어지기 쉽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보배,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결코 깨어지거나 꺾이지 않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보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서 인간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극심한 고난과 죽음의 위기를 당했을 때에도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님의 은혜를 전파하기 위해 받는 고난을 기꺼이 감당함으로써 자신을 통해 일하시는 예수님의 생명을 드러내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채 이 세상을 살아간다면 삶의 여정에 곤경을 당할 때 좌절하게 되고, 자신의 육신적 삶이 점점 쇠퇴해갈 때 낙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로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고백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오늘 하루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 가운데 내 안에 있는 보배인 영적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자. 10월 28일 우리를 강권하는 그리스도의 사랑 (고린도후서5:14-17)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피조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섰던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오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중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체험을 통해 바울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았다. 자신에게 임한 예수님의 사랑이 너무 놀랍고 귀해서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된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비단 자신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지는 것임을 깨달았기에 이제 사람들을 육신을 따라 알지 않고, 육신적으로 대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어주신 사람, 자신처럼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변화된 새로운 피조물로 인식한다고 고백한다. 그렇다. 이제 우리는 날마다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새롭게 만들어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살게 되었다. 누구든지 지나간 날들을 생각하면 후회스럽고, 덮어버리고 싶고, 다시 시작하고 싶은 일들이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는 주님의 음성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며 새롭게 시작할 용기를 준다. 새로이 시작하는 한 주간도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자. 10월 29일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고린도후서6:1-10) 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3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처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모든 것을 가진 자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자신의 사도로서의 직분이 화해케 하는 역할임을 강조하였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는데, 그 사실을 전하는 것이 바로 사도의 임무임을 설명하였다. 이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하나님과 화해하고 화목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강조한다. 헛되이 받지 말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과 화목한 존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거나, 형제자매 간에 서로 불화하거나, 하나님의 은혜조차 깨닫지 못하는 상태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바울은 화목케 하는 직분을 수행하기 위해 자신이 수많은 고난을 받았음을 열거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모든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에 자신은 항상 기뻐하는 자,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자,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담대하게 고백한다. 바울의 고백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되었다. 하나님과 화목한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도우시고, 지금도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목하기를 힘쓰며, 형제자매와 화목하기를 힘쓰며 오늘도 하루를 살아가자! 10월 30일 육체의 가시 (고린도후서12:3-10)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노라 6 만일 내가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우리의 자랑 사도 바울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사람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한 환상과 계시를 체험하였으나 자신을 위해서는 그 일을 드러내거나 자랑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이 핍박자에서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사도로 변화되었고,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도록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신비한 은혜를 주셨음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사도권을 비난하는 이들에게 증거로 삼고자 하였다. 한편 바울은 자신이 받은 환상과 계시로 인하여 교만해지지 않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육체의 가시도 주셨다고 말한다. 바울에게 있었던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세 번씩이나 그것을 제거해주시기를 기도했던 것에서 그 가시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은 바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다. 오히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대답하셨고, 바울은 하나님의 응답을 기쁘게 받아들여 자신의 약한 것들을 자랑하며,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물기를 원하였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자신의 약함보다는 강함을 자랑하고자 한다. 약한 것은 감추고 강한 것은 드러내며 교만의 죄에 빠지기 쉬운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나 우리의 자랑은 우리 자신의 강함이 아니라 인간의 연약함 속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이어야 한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원하는 결과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궁극적인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에게 더 큰 유익과 복을 주시는 것으로 드러남을 믿고 바울과 같이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말할 수 있기를 소망하자. 10월 31일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고린도후서 13:5-13) 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6 우리가 버림받은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 8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9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 11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 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12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사도 바울의 마지막 권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서를 마무리하며 성도들에게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촉구한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볼품없는 외모, 부족한 언변술, 외적 권위 등에 불만을 품고 그의 사도권을 줄곧 시험해왔다. 이에 대해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시험해야할 대상을 잘못 선택했으며,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믿음이 올바른지를 판단하고 자신을 시험해보아야 한다고 일깨워주고 있다. 자신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지 자신의 믿음을 시험하고 확증하라는 고린도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충고는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고,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버려진 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 사실을 간절한 마음으로 전하면서, 그들이 이것을 깨닫고 받아들여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자신은 아무리 약하고 보잘 것 없는 형편에 처해진다하더라고 기뻐할 수 있다고 고백한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기뻐하고 평안하기를 간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성도들에게 함께 하기를 축복하고 기도하며 서신을 마무리한다. 고린도교회를 향한 깊은 사랑에서 나온 바울의 책망과 권면을 우리에게 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 기뻐하고 평안하며 서로 위로하고 온전케 하는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어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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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림교회
2019년 3월 25일
In 365일 말씀묵상
11월 1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위기 11:44-45) 44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거룩하신 하나님, 거룩한 사람들 레위기의 히브리어성경 제목은 ‘와이크라’이다. ‘그리고 (그가) (모세를) (회막에서) 부르셨다’라는 뜻으로, 내용상 출애굽기와 이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히브리어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면서 레위기라고 이름 지었는데, 여기에 기록된 모든 규례들이 제사장을 포함한 레위지파의 관할 하에서 교육되고 시행되었기 때문이었다. 레위기는 출애굽한 이스라엘민족이 시내광야에서 약 2년 동안 머물던 시기에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 시기는 광야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배우고 성막을 세우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향한 행군을 정비하는 기간이었다. 레위기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성막에서 말씀하시면서(레1:1), 죄 많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과 교통하며 그 안에서 살아갈 것인지 가르쳐주신다. ‘거룩(Holiness)'이라는 단어를 87번씩이나 사용하면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앞에서 살아가는 그의 백성들도 거룩해야 함을 강조한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며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만 가능해진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죄를 씻어내고 거룩함으로 옷 입자. 거룩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예배 가운데 거룩함을 회복하자.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매일의 삶이 예배로 드려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되기를 소망하자. 삶으로 드려지는 진정한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을 이루어갈 것을 신앙목표로 세워보자! 11월 2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레위기 1:1-3) 1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3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 거룩 - 하나님의 성품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는 그 주제 상 연속성이 있다. 창세기에서 타락한 인간들이 출애굽기에서 구원을 받고 레위기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성화를 배우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준다. 출애굽기에서는 인간을 찾아오신 하나님을, 그리고 레위기에서는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으로서의 예배를 가르쳐준다. 모세와 백성들이 하나님의 지시대로 성막을 완성하자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했고, 성막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이 인간의 삶의 현장으로, 삶의 중심으로 내려오신 것이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을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이 직접 만날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제물을 잡아 죄를 대신 갚게 한 후 깨끗해진 상태로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설 수 있는 길을 제시해주셨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제물을 대신 잡아드릴 필요가 없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직접 제물이 되셔서 온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갚아주셨기 때문에 그 은혜를 의지하여 거룩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매일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하나님의 성품인 거룩함을 닮아가는 과제만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되거나 분리됨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속적인 것과 구별되고 분리되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거룩함이다. 하나님은 은혜와 거룩함으로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순종으로 나아간다. 11월 3일 소제의 예물 (레위기 2:1-3) 1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2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 가루 한 웅큼과 기름과 그 모든 유향을 가져다가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3 그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릴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소제의 예배정신 레위기에서 제정하고 있는 제사들 중 소제는 히브리어로 ‘민하’라고 하는데 선물, 예물을 의미한다. 소제는 짐승을 제물로 잡아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곡식을 사용하였다. 곡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물 가운데 가장 좋은 것으로 생각되었으며, 사람이 수고하여 경작한 곡물 중 가장 좋은 것으로 드리는 예배가 소제였다. 동물로 드리는 다른 제사도 흠이 없는 동물을 고르며 준비하는 기간이 필요했지만 특별히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는 미리 미리 세심한 준비를 해야 했다. 오랜 시간 파종하고 돌보아 열매가 맺기까지 기다려야 함은 물론 추수한 곡식을 말리고, 다시 고운 가루로 만들기 위해 맷돌로 반복해서 갈아야 하는 수고가 요구되었다. 충분한 희생과 대가를 지불한 예배를 하나님은 귀하게 받으신다. ‘쉽고’, ‘편하게’, ‘간단하게’는 예배의 정신이 아니다. 번제로 드리는 예배가 우리의 생명, 전 존재의 헌신을 의미한다면 소제는 예배자의 정성, 애정, 지고지순한 마음의 헌신을 나타낸다. 소제로 드리기 위해 곡식을 가루로 만드는 과정은 그리스도인의 인내와 고난을 생각하게 한다. 물건에 짝퉁이 있는 것처럼 신앙생활에도 진품과 짝퉁이 있다. 예수님 당시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외적인 자격은 다 갖추었지만 정작 예수님께는 책망을 들었던 짝퉁 신앙인들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매일의 삶이,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예배가 진품이 될 수 있도록 소제의 예배정신을 가져야 하겠다. 11월 4일 넣어야 할 것과 넣지 말아야 할 것 (레위기 2:11-15) 11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 12 처음 익은 것으로는 그것을 여호와께 드릴지나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는 제단에 올리지 말며 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14 너는 첫 이삭의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거든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네 소제를 삼되 15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위에 유향을 더할지니 이는 소제니라 최고의 것으로 드리는 예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으로서의 제사에 대해 알려주시면서 소제로 예배드릴 때는 예물로 드리는 고운 가루에 기름을 붓고, 유향을 더하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에서 기름은 ‘성령’을 의미한다. 인간이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성령께서 예배 가운데 함께 하셔야함을 의미하는 한편 예배자에게도 성령의 임재로 인해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가 맺혀져야 함을 기억하게 한다. 유향은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제물에 향기를 더하기 위한 것으로, 사람이 자신에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같은 방법으로 만들지 못하게 하였다.(출30:37) 오늘 날 우리는 유향의 의미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기도의 향기 혹은 기도와 경건으로 이해한다. 또한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고 하였다. 순전하고 썩지 않게 하는 성질, 맛을 내고 변하지 않게 하는 성질을 가진 소금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상징하며, 민수기 18:19에서는 ‘영원한 소금 언약’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예배를 드릴 때 제물에 소금을 치게 함으로서 영원불변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게 하였다. 한편 제물에는 부패를 촉진시키는 누룩과 꿀은 넣지 않아야 했다. 부풀게 하는 누룩은 죄를 상징하고, 꿀은 인간의 본성적인 쾌락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 가운데 반드시 있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기름과 유향, 소금이 있게 하고, 누룩과 꿀을 버림으로써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향기롭고 순전하며 거룩한 최고의 것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되기를 소망하자. 11월 5일 제단 위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레위기 6:8-13) 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9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명령하여 이르라 번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번제물은 아침까지 제단 위에 있는 석쇠 위에 두고 제단의 불이 그 위에서 꺼지지 않게 할 것이요 10 제사장은 긴 세마포 옷을 입고 세마포 속바지로 하체를 가리고 제단 위에서 불태운 번제의 재를 가져다가 제단 곁에 두고 11 그 옷을 벗고 다른 옷을 입고 그 재를 진영 바깥 정결한 곳으로 가져갈 것이요 12 제단 위의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서 태우고 번제물을 그 위에 벌여 놓고 화목제의 기름을 그 위에서 불사를지며 13 불은 끊임없이 제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것 레위기는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한 다섯 가지 제사와 그것들의 효과에 대한 기록으로 시작하여 이스라엘백성들의 구속을 기억하게 하는 일곱 가지 절기에 대한 설명으로 끝이 난다. 다섯 가지 주요 제사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이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이 말씀하신 방법대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수 있게 드리라고 명령하신다. 다섯 가지 제사 중 번제는 제물을 불에 태워 제사하는 방식을 말한다. 제물로 드릴 짐승을 흠 없는 것으로 잘 구별하여 준비한 후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방법대로 잡아 모두 불살라 하나님께 향기를 올려드리는 제사이다. 번제는 오늘 날 우리가 자신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정하며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시대에는 짐승을 잡아 제사드림으로 짐승의 희생을 통해 인간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상징적 행위를 하였으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희생제물이 되어주셨기 때문에 더 이상 상징적 행위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다만 이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주님을 위해 제물처럼 드려지는 우리의 삶의 자세, 형제자매를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는 희생적 삶의 자세이다. 번제단의 불이 꺼지지 않고 항상 피워 있어야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불을 꺼뜨리지 말고 항상 피어 있게 하여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삶을 살아가자. 11월 6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제사 (레위기 7:11-15) 11 여호와께 드릴 화목제물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12 만일 그것을 감사함으로 드리려면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과 고운 가루에 기름 섞어 구운 과자를 그 감사제물과 함께 드리고 13 또 유교병을 화목제의 감사제물과 함께 그 예물로 드리되 14 그 전체의 예물 중에서 하나씩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그것을 화목제의 피를 뿌린 제사장들에게로 돌릴지니라 15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 드리는 그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관계의 회복 화목제는 히브리어로 ‘셀렘’이라고 하는데, 이는 ‘친하다’, ‘보답하다’는 뜻이다. 제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과 친밀, 화목하게 되기를 기대하며 드리는 제사.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평을 위한 제사이다. 화목제에 드린 제물은 예배자가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누리게 됨을 축하하며 성소에 모인 무리와 함께 나누어 먹어야 하며, 다음 날까지 남겨두지 말고 그날 다 먹어야 했는데,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함께 음식을 나누며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기쁨을 나누라는 의미이다. 즉 화목제는 1차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그리고 2차적으로는 이웃과의 관계 회복을 목표로 한다.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화평을 이루기 위해 직접 화목제물이 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는 로마서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희생의 결과로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친밀하고 화목하게 회복된 것이다. 예수님은 시간만 나면 홀로 기도하며 하나님과 깊은 교제의 시간을 가졌다. 오늘 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나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하나님과 화목해진 기쁨을 성도들과 함께 나누며 잔치하는 화목제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며 최선을 다한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해주신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에 참여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화목의 기쁨을 누리자. 11월 7일 제사장의 의복 (레위기 8:1-9)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함께 그 의복과 관유와 속죄제의 수송아지와 숫양 두 마리와 무교병 한 광주리를 가지고 3 온 회중을 회막 문에 모으라 4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하매 회중이 회막 문에 모인지라 ... 6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물로 그들을 씻기고 7 아론에게 속옷을 입히며 띠를 띠우고 겉옷을 입히며 에봇을 걸쳐 입히고 에봇의 장식 띠를 띠워서 에봇을 몸에 매고 8 흉패를 붙이고 흉패에 우림과 둠밈을 넣고 9 그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그 관 위 전면에 금 패를 붙이니 곧 거룩한 관이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과 같았더라 우리가 입어야 할 옷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키우고 이끌어 가시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하셨다. 먼저 성막을 건축하게 하셨는데,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이 만나 화해할 수 있는 성별된 장소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장소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전 먼저 인간의 죄를 씻게 하기 위해 다섯 가지의 제사에 대해 가르쳐주셨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재하며 제사를 집례할 수 있도록 중재자인 제사장을 세우셨고, 마지막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아가는 원칙들을 가르쳐주셨다. 제사장의 일을 감당하게 될 아론의 아들들은 먼저 물로 몸을 깨끗이 씻었다. 몸의 더러움을 씻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마음도 깨끗이 하는 절차가 필요했다. 에베소서의 말씀과 같이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기 위한 절차였다. 이후 제사장은 정해진 예복을 입는데, 예복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고, 규례에 따라 정해진 옷은 옷을 입는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낸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예배를 중재하는 제사장이 있었지만 이제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거룩한 나라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으로 살아간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 입고’,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 입고’, ‘사랑의 띠로 온전하게 매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모습에서 그리스도가 드러나고, 긍휼과 자비,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이 삶 속에서 드러나야 한다. 11월 8일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레위기 16:18-22) 18 그는 여호와 앞 제단으로 나와서 그것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곧 그 수송아지의 피와 염소의 피를 가져다가 제단 귀퉁이 뿔들에 바르고 19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그 위에 일곱 번 뿌려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제단을 성결하게 할 것이요 20 그 지성소와 회막과 제단을 위하여 속죄하기를 마친 후에 살아 있는 염소를 드리되 21 아론은 그의 두 손으로 살아 있는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아뢰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에 보낼지니 22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 신적인 교환 레위기에서 거룩함이라는 단어와 함께 또 많이 나오는 단어는 피이다. 생명, 희생, 고통, 속죄 등을 상징하는 피흘림이 없이는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고, 피를 제단에 뿌리는 등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낯설고 잔인하게까지 느껴지는 레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성경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어쩌면 피로 상징되는 희생과 헌신 없이 하나님께 은혜받기 원하고, 편안하게 믿음생활 하기 원하며, 세상의 즐거움과 분리되지 않은 채 세상이 주는 즐거움을 누리면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구약시대에 예배자는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제물로 드려질 짐승의 머리에 안수하였다. 안수는 죄를 전가하는 행위로 안수하는 자와 제물이 동일시되는 상징적 행동이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것을 ‘즐거운 교환’, ‘신적인 교환’이라고 표현하였고, 신학자 칼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와 허물을 가져가시고 대신 우리에게 주님의 풍요로움과 영광스러움을 주신 십자가를 ‘화목의 장소’라고 표현하였다. 십자가에서 지상 최대의 맞교환이 일어났다. 이사야 53장5절의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다’는 말씀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징벌을 받아 우리가 용서를 받고,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몸이 상하였으므로 우리는 치유되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허락하신 신적 교환을 기억하며 올 한해도 그 은혜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기쁘게 살아가자. 11월 9일 너희는 거룩하라 (레위기 19:1-3)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3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거룩함을 훈련하자 ‘거룩’은 하나님의 성품이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말씀하시지만 인간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결코 설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옷처럼 덮어 감싼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보시고 우리를 깨끗하다고, 거룩해졌다고 인정해주신다.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닮아간다는 뜻이다. 레위기의 핵심은 거룩,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도록 여러 가지 규례와 예배법을 주셨고, 예배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갈 수 있게 하셨다. 올 한 해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기 위해 삶 가운데 어떻게 거룩함을 이루어갈 수 있을지 생각해보자.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기 위한 하나님과의 관계, 사랑과 섬김의 대상으로서의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야 할 ‘관계의 거룩’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하루, 한 달, 일 년, 일생의 시간 속에서 주님을 위해 구별한 시간과 날이 있는지에 대한 ‘시간의 거룩’도 생각해보아야 하겠다. 나아가 매일 매일 무엇을 공급받아 기뻐하고 행복해하며 힘을 내고 있는지 스스로 질문하며 ‘공급의 거룩’에 대해 생각해보자. 늘 무엇을 생각하며 살고 있는지, 무엇을 갈망하며 기대하고 있는지 돌아보며 ‘생각의 거룩’에 대해서도 점검해보자. 우리 모두 관계, 시간, 공급, 생각에서의 거룩함을 훈련하여 하나님 닮은 진품 명품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하자! 11월 10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 19:13-18) 13 너는 네 이웃을 억압하지 말며 착취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14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15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니 16 너는 네 백성 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비방하지 말며 네 이웃의 피를 흘려 이익을 도모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17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리하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이웃사랑으로 완성되는 거룩 ‘나 여호와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레위기는 거룩의 교본이며, ‘임마누엘의 축복’, ‘죄사함의 은혜’, ‘거룩한 삶에 대한 요청’이 그 중심주제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고자 성막을 만들게 하셨고, 직접 성막으로 찾아오셨다. 성막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가능하게 되었다. 레위기는 예배 때 영광으로 임하시는 특별한 하나님의 임재 뿐 아니라, 일상적인 삶 속에서 그의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삶의 모든 면에서 항상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살아야 함을 상기시켜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에 임재하신 거룩하신 하나님께 제사제도를 통해 나아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사함의 은혜를 받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 친밀한 교제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레위기에서 말하는 거룩은 일차적으로 ‘구별됨’이다. 성도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두 번째 의미는 ‘하나님을 닮아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삼으셔서 부모와 자녀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셨고, 자녀된 우리에게는 아버지인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가야 하는 것이 요구된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은 사랑이다. 우리가 세상적인 이기심과 욕망에서 분리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때 하나님을 닮아간다. 즉 ‘분리’에서 시작된 거룩은 ‘이웃사랑을 실천’함으로 완성된다. 11월 11일 느부갓네살 왕궁으로 잡혀간 소년들 (다니엘 1:1-7) 1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 2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 3 왕이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왕족과 귀족 몇 사람 곧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설 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하였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고 5 또 왕이 지정하여 그들에게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에서 날마다 쓸 것을 주어 삼 년을 기르게 하였으니 그 후에 그들은 왕 앞에 서게 될 것이더라 6 그들 가운데는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더니 7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고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고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 하나님의 계획과 사탄의 계획 이스라엘 포로시대부터 대종말까지의 세계사 전개과정을 계시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하나님 여호와가 전역사의 절대주권자이시고 그분께 대한 신뢰와 순종만이 인류 구원의 길임을 제시하고 있는 다니엘서는 기원전 500년 경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시대와 바벨론에서 고향으로의 귀환이 막 허락된 귀환시대 초기의 격변하는 역사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느부갓네살 왕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왕족과 귀족 몇 사람, 곧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지혜로운 소년들을 데려다가 바벨론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고, 3년을 가르친 후에 왕의 앞에 세워 왕을 돕는 나라 일을 맡기려고 계획하였다. 어린 나이에 잡혀간 이들의 이름은 각각 신앙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다니엘은 하나님은 재판관이시라, 하나냐는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 미사엘은 주님 같은 이가 누구인가, 아사랴는 여호와께서 도우신다는 뜻이다. 이들은 바벨론에서 강제로 바벨론식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신 벨이 그의 생명을 보호한다는 뜻의 벨드사살로, 하나냐는 월신의 명령이라는 뜻의 사드락으로, 미사엘은 아쿠 신과 같은 이가 누구인가라는 뜻의 메삭으로, 아사랴는 느고 신의 종이라는 뜻의 아벳느고로 개명되었다. 하나님은 다니엘을 이방 땅에서 하나님을 증거하며 하나님의 장대한 구속계획을 선포할 선지자로 세우고자 바벨론으로 보냈으나 사탄은 이방신을 섬기는 바벨론의 제사장으로 만들고자 그의 이름을 바꾸고 이방학문을 익히게 하였다. 오늘 하루를 지내며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계획은 무엇인지 숙고하며 그것을 방해하는 사탄의 계획을 이겨낼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자. 11월 12일 다니엘에게 은혜를 베푼 환관장 (다니엘 1:8-17) 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9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10 환관장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내가 내 왕을 두려워하노라 그가 너희 먹을 것과 너희 마실 것을 지정하셨거늘 너희의 얼굴이 초췌하여 같은 또래의 소년들만 못한 것을 그가 보게 할 것이 무엇이냐 그렇게 되면 너희 때문에 내 머리가 왕 앞에서 위태롭게 되리라 하니라 11 환관장이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를 감독하게 한 자에게 다니엘이 말하되 12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13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음식을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당신이 보는대로 종들에게 행하소서 하매 14 그가 그들의 말을 따라 열흘 동안 시험하더니 15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아 보인지라 16 그리하여 감독하는 자가 그들에게 지정된 음식과 마실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주니라 17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 다니엘과 친구들의 신앙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비록 나이가 어렸지만 바벨론에서 해야 할 바를 분명히 알았다. 그들은 바벨론의 이방 풍습에 물들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순전하게 지키고자 왕이 제공하는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고자 했다. 이 음식들은 이방신들에게 바쳐졌던 제물이었고, 유대인의 규례를 거스르는 이런 음식을 먹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거역하는 행동이 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열흘 동안의 음식시험으로 자신의 믿음을 지키고자 한 어린 믿음의 용사들을 지켜주셔서 환관장에게 은혜를 입게 하였고, 음식에 상관없이 더 아름답고 지혜롭게 만들어주셨으며 다니엘에게는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 수 있는 지혜도 주셨다.(1:17) 3년 후 이들이 왕 앞에 나아갔을 때 그 지혜와 총명이 다른 사람들보다 열배나 나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1:20) 다니엘은 이때부터 무려 왕이 4번(느부갓네살, 벨사살, 다리오, 고레스)이나 바뀌도록 이방 나라에서 살면서 높은 직위에서 나라의 일들을 돌보는 특별한 인생을 살았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질서를 대적하는 세속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여기에 휩쓸려 믿음을 잃어버리고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다니엘처럼 뜻을 정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 것인지 결단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롬 12:2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권면한다. 우리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세상의 문화와 방식에 휩쓸리지 않을 것을 결단하자. 그리하여 신앙 안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기쁨을 잃지 않도록 하자. 11월 13일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다니엘 2:16-23) 16 다니엘이 들어가서 왕께 구하기를 시간을 주시면 왕에게 그 해석을 알려 드리리이다 하니라 17 이에 다니엘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그 친구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 그 일을 알리고 18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사 다니엘과 친구들이 바벨론의 다른 지혜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하여금 구하게 하니라 19 이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환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 다니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20 다니엘이 말하여 이르되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능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 21 그는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한 자에게 지식을 주시는도다 22 그는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 어두운 데에 있는 것을 아시며 또 빛이 그와 함께 있도다 23 나의 조상들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제 내게 지혜와 능력을 주시고 우리가 주께 구한 것을 내게 알게 하셨사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고 주를 찬양하나이다 곧 주께서 왕의 그 일을 내게 보이셨나이다 하니라 택한 자를 통해 계시하시는 하나님 다니엘과 친구들은 적국인 바벨론에서 우상을 섬기는 이방문화를 익히고 바벨론의 술객들과 같은 것을 배우는 일을 무려 3년이나 해야 했다. 하나님은 이들을 하나님의 증인으로 사용하시기 위해 3년 동안 이들을 훈련하시며 신앙으로 무장시키셨다. 느부갓네살 왕이 재임한지 2년째 되던 해 한 꿈을 꾼 후 그 꿈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자 하여 바벨론의 제사장(술객)들에게 꿈을 해석하라고 명령하면서 꿈의 내용은 말해주지 않았다. 꿈을 해석하지 못해 바벨론에 있는 모든 술객들이 죽임을 당할 위험한 처지에 놓이자 다니엘이 왕에게 해석을 알려주겠다고 자청하였다. 이제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실 때가 되었다. 다니엘은 친구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자신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였는데 하나님은 느부갓네살 왕의 꿈과 뜻하는 바를 환상을 통해 알려주셨다. 다니엘은 이것을 알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며 반복적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 모든 일들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다.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 안에서 동료들과 합심하여 기도하는 다니엘에게 하나님은 세계사를 이끌어가는 자신의 계획을 알게 하셨고, 다니엘은 기도 응답 후 즉각적으로 하나님께 감사 찬양을 올려드렸다. 하나님은 자신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를 기뻐하시고 사용하신다. 또한 겸손한 자를 들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신다. 다니엘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바로 이것이다. 11월 14일 느부갓네살의 꿈 (다니엘 2:27-35) 27 다니엘이 왕 앞에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 물으신 바 은밀한 것은 지혜자나 술객이나 박수나 점쟁이가 능히 왕께 보일 수 없으되 28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 ... 29 왕이여 왕이 침상에서 장래 일을 생각하실 때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가 장래 일을 왕에게 할게 하셨사오며 30 내게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심은 내 지혜가 모든 사람보다 낫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 해석을 왕에게 알려서 왕이 마음으로 생각하던 것을 왕에게 알려 주려 하심이니이다 31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매우 찬란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32 그 우상의 머리는 순금이요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33 그 종아리는 쇠요 그 발은 얼마는 쇠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34 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35 그 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 다니엘의 꿈 해석 다니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느부갓네살 왕이 무슨 꿈을 꾸었는지, 그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다. 바벨론 제국의 왕이 된 느부갓네살은 제국의 장래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는데 (2:29) 하나님은 단순히 바벨론의 장래 뿐 아니라 미래의 세계 역사에 대한 계획을 환상을 통해 보여주셨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강한 권세자도 결국 우주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 아래 있음을 보여주시고자 하신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큰 신상을 보았는데, 금으로 된 신상의 머리는 바벨론과 느부갓네살을 가리키는 것이고, 은으로 된 가슴과 팔은 그 후 이어질 메데 바사 왕국을 가리킨다. 청동으로 된 배와 허벅다리는 헬라 세계이며, 철로 된 두 다리는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누어지는 로마제국을 의미한다. 철과 흙으로 된 발은 부서지기 쉬운 혼합으로 말세에 임할 왕국들을 의미한다. 이 환상은 세계 역사의 청사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점점 더 약한 재질로 변해가는 비관적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다니엘을 보면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던 요셉을 생각하게 된다. 두 사람은 모두 이방 나라에 잡혀간 신분이었으나 이방 문화 가운데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지키고자 애썼고, 왕의 꿈을 해석하여 나라의 통치자의 자리에 올라갔다. 마침내 요셉은 민족을 기근에서 구원하고 큰 민족이 되게 하는 일에, 다니엘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드러내며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는 일에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았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문화 가운데 살고 있으나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 세상 문화에 물들지 않고 신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을 지키는 이들을 도구로 사용하신다. 11월 15일 왕이 다니엘을 높이다 (다니엘 2:44-47) 44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나라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 45 손대지 아니한 돌이 산에서 나와서 쇠와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서뜨린 것을 왕께서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에게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은 참되고 이 해석은 확실하니이다 하니 46 이에 느부갓네살 왕이 엎드려 다니엘에게 절하고 명하여 예물과 향품을 그에게 주게 하니라 47 왕이 대답하여 다니엘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오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시로다 48 왕이 이에 다니엘을 높여 귀한 선물을 많이 주며 그를 세워 바벨론 온 지방을 다스리게 하며 또 바벨론 모든 지혜자의 어른을 삼았으며 49 왕이 또 다니엘의 요구대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세워 바벨론 지방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고 다니엘은 왕궁에 있었더라 하나님이 세우실 한 나라 느부갓네살 왕은 인간의 힘과 지혜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자신의 꿈의 내용과 그 정확한 해석을 제시한 다니엘에 대해 경탄해 마지않았다. 그는 대제국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연소한 다니엘에게 엎드려 절하며 예물과 향품을 선물로 주었다. 뿐만 아니라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의 신이시오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고 고백하며 다니엘이 믿는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을 왕실의 종교자문기관에 속한 바벨론의 모든 술사 중 우두머리로 삼고 또 바벨론의 온 도를 다스리는 총리로 삼았으며, 그의 세 친구에게도 높은 관직을 주었다. 다니엘이 바벨론 모든 지역을 다스리는 총리가 된 사실은 세계사를 전개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이 궁극적으로 승리를 얻게 될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세상의 나라들은 흥망성쇠를 거듭한다. 이 세상의 나라는 아무리 강대한 권력을 가졌을지라도 영원히 지속될 수 없으나 하나님이 세우실 한 나라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하나님은 다니엘을 통하여 하나님이 세우실 한 나라를 계시하셨는데 이것은 말세에 세우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영원히 살아갈 그 나라를 의미할 뿐 아니라 눈에 보이는 현세적, 육신적 세상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적인 나라를 세우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하여금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살아가게 하실 것을 보여주고 계신다. 우리는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이미 하나님이 세우신 영원한 영적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이미 이루어진 영적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믿음의 확신이 우리 안에 있기를 소망하며 믿음을 세워가자. 11월 16일 세 친구들의 신앙고백 (다니엘 3:13-18)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고 분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오라 말하매 드디어 그 사람들을 왕의 앞으로 끌어온지라 14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이르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 하니 사실이냐 15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하니 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17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18 그렇게 하지 아니할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그렇게 하지 아니할지라도 느부갓네살 왕은 환상을 통하여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며 온 천하를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상을 섬기는 길에서 돌이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강한 절대자임을 과시하고자 금 신상을 세우고 누구든지 그것에 절하게끔 법을 제정하였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명령을 거역하고 신상에 절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느부갓네살은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라고 위협하며 이들을 회유하였다. 왕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풀무불에 던져져 죽게 될 형편이었으나 이들은 죽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신앙을 고백하였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건져내시겠고 ... 그렇게 하지 아니할지라도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어디서 이런 용기가 나왔을까?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1:21)는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자신들 안에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을 거역하기 보다는 그 분 안에서 죽는 것이 더 낫다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때로 위험한 경우에 처하거나 어려운 일을 겪을 때, 원하고 기도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쉽게 낙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한다. 어떠한 형편에 처하더라도 다니엘과 친구들의 고백처럼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한다고 고백할 수 있는 신앙으로 성장해야 하겠다. 11월 17일 풀무불 속에 던져진 다니엘의 친구들 (다니엘 3:24-28) 24 그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 이르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하니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옳소이다 하더라 25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26 느부갓네살이 맹렬히 타는 풀무불 아귀 가까이 가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베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에서 나온지라 ... 28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이르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 30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지방에서 더욱 높이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사람들 금 신상에 절하기를 거부한 죄로 극렬히 타는 풀무불 속에 던져진 세 사람은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고 살아나왔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결박된 채로 불에 던져졌으나 불 속에 보인 모습은 결박되지 않은 네 명의 모습이었다. 이 모습을 보고 놀란 왕이 말하기를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았다고 하였다. 느부갓네살은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고 하며 신상에 절하기를 거부한 세 친구를 협박하였다. 이 말 속에는 자신이 남왕국 유다를 점령할 때 자기 백성을 구원하지 못했던 유약한 신 여호와가 어떻게 풀무불 속에 던져진 자를 살릴 수 있겠느냐 하는 조롱과 풀무불 속에 던져진 자를 살리는 신이 있다면 그 신이야말로 진정한 신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풀무불 속에서 온전하게 살아나오자 너무나 놀란 느부갓네살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세계 역사의 절대 주권자이시며 전능자이심을 다시 한 번 깨닫고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자신의 신앙을 지키며 끝까지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자는 비록 잠시 고난을 받을지라도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높여주신다. 하나님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들에게 복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사람 앞에서 영광을 얻게 하신다. 그러므로 신앙을 지키고 선을 행하다가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생길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신뢰하는 믿음을 잃지 말자. 풀무불 같은 세상에서 살아갈지라도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반드시 지켜주신다. 11월 18일 느부갓네살의 두 번째 꿈 (다니엘 4:19-27) 19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다니엘이 한동안 놀라며 마음으로 번민하는지라 왕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벨드사살아 너는 이 꿈과 그 해석으로 말미암아 번민할 것이 아니니라 벨드사살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 꿈은 왕을 미워하는 자에게 응하며 그 해석은 왕의 대적에게 응하기를 원하나이다 20 왕께서 보신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으니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21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먹을 것이 될 만하고 들짐승은 그 아래에 살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었나이다 22 왕이여 이 나무는 왕이시라 이는 왕이 자라고 견고하여지고 창대하사 하늘에 닿으시며 권세는 땅 끝까지 미치심이니이다 23 왕이 보신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어 없애라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두고 쇠와 놋줄로 동이고 그것을 들 풀 가운데에 두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또 들짐승들과 더불어 제 몫을 얻으며 일곱 때를 지내리라 하였나이다 24 왕이여 그 해석은 이러하니이다 곧 지극히 높으신 이가 명령하신 것이 내 주 왕에게 미칠 것이라 ... 27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니라 고난을 지나서 하나님 찬양으로 느부갓네살 왕의 두 번째 꿈을 또 다시 다니엘이 해석하고, 왕이 행해야 할 바를 권면하였다. 2장에서의 꿈이 국가와 세계의 미래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면 4장의 꿈은 느부갓네살 왕 개인에 관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이 비록 적국의 왕이지만 불행한 꿈의 내용이 왕에게 임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이스라엘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온 것은 죄악을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손에 의한 것임을 깨닫고 있었고, 반드시 회복시켜주실 것에 대한 확신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하는 이런 자세를 가질 수 있었다. 1년이 지난 후 꿈을 통하여 계시된 일이 느부갓네살에게 임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유예기간 동안 겸손한 모습을 회복하지 못해 일곱 때 동안 왕좌에서 쫓겨나 짐승처럼, 미친 사람처럼 살다가 하나님이야말로 온 우주를 다스리며 역사를 주관하는 절대자이심을 깨달은 후에야 제 정신으로 돌아오고 왕좌도 되찾았다. 고난의 시간을 지나 진정으로 의로우시며 진실하시고 교만한 자를 낮추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 것이다. 역사(history)는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오늘날 세계 모든 나라의 각 지도자들이 자신이 가진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임을 깨닫고 겸손한 자세를 갖게 되기를 기도하자. 나아가 우리 자신도 하나님 앞에 교만이 가장 큰 죄임을 깨달아 늘 겸손함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자. 11월 19일 벨사살 왕이 베푼 잔치 (다니엘 5:1-6) 1 벨사살 왕이 그의 귀족 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고 그 천 명 앞에서 술을 마시니라 2 벨사살이 술을 마실 때에 명하여 그의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하여 온 금, 은 그릇을 가져오라고 명하였으니 이는 왕과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이 다 그것으로 마시려 함이었더라 3 이에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성소 중에서 탈취하여 온 금 은 그릇을 가져오매 왕이 그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과 더불어 그것으로 마시더라 4 그들이 술을 마시고는 그 금, 은, 구리, 쇠, 나무, 돌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니라 5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석회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6 이에 왕의 즐기던 얼굴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의 무릎이 서로 부딪친지라 7 왕이 크게 소리 질러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를 불러 오게 하고 바벨론의 지혜자들에게 말하되 누구를 막론하고 이 글자를 읽고 그 해석을 내게 보이면 자주색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그의 목에 걸어 주리니 그를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으리라 하니라 하나님의 진노 다니엘서 4장과 5장 사이에는 약 30년의 시간 간격이 있다. 느부갓네살과 그의 손자 벨사살의 행적을 비교하기 위한 의도로 긴 시간적 간격에도 불구하고 연이어 기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느부갓네살의 손자 벨사살 왕은 귀족 1000명을 모아 놓고 잔치를 열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금, 은 등으로 만든 성물들을 가져다가 그것으로 먹고 마셨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사용하는 그릇들로 먹고 마시면서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우상들을 찬양하는 최악의 불경스러운 잔치였다. 벨사살은 자신의 잔치를 위해 성전에서 가져온 그릇을 사용하면서 아마도 자신을 하나님보다 우위에 두고 세상의 가장 위대한 권력자라고 착각하는 교만함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교만하고 어리석은 왕을 그대로 두시지 않았다. 한창 잔치가 무르익어 갈 때 사람의 손가락 하나가 나타나 하얀 벽에 글자를 썼다. 이 모습을 본 벨사살 왕이 너무 놀라 얼굴빛이 변하고,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였다. 17세기 유럽을 대표하는 유명한 화가 렘브란트는 이 장면을 [벨사살 왕의 연회]라는 제목으로 그려놓았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태도는 매사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겸손이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혹시 하나님 앞에 교만하지는 않은지, 거룩한 것을 속되게 사용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고 있지는 않은지 주의해서 살펴보아야 하겠다. 11월 20일 벽에 쓰인 글자와 다니엘의 해석 (다니엘 5:18-28) 18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19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그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 20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 영광을 빼앗기고 21 인생 중에서 쫓겨나서 그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 22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23 도리어 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 ... 금, 은, 동,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24 그러므로 그의 앞에서 이 손가락이 나와서 이 글을 기록하였나이다 25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26 그 뜻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27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 28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하나님의 저울 다니엘은 벽에 쓰인 글자를 해석하기 위해 벨사살왕 앞에 나아왔다. 다니엘은 먼저 왕의 허물을 책망하면서 그의 조부 느부갓네살 왕에게 있었던 일들을 회상시켰다. 조부인 느부갓네살왕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결코 모독하지 말고 존경할 것을 명령했음에도 불구하고 잔치자리에서 성전의 기물로 술을 마시며 각종 바벨론의 우상들을 찬양한 것은 벨사살왕이 얼마나 교만했는지 보여준다. 다니엘은 벨사살왕이 여호와를 모독하며 교만하게 행한 것이 바벨론 멸망의 원인이 되었음을 지적하였다. 벽에 쓰인 글씨는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베레스)이라는 히브리어였는데 수를 세었다, 무게를 재었다, 나뉘어졌다는 뜻이다. 즉 ‘메네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는 것이고,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보였다는 것이고, 우바르신(베레스)은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사람에게 주어졌다는 뜻이었다. 그날 밤 벨사살은 죽임을 당하였고 메데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차지함으로써 벨사살은 불의한 행위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 다니엘은 자칫 자신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었으나 개의치 않고 담대하게 벨사살왕의 허물을 책망하며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신앙의 용기를 보여주었다. 세상에 대해서는 담대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히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보호해주신다. 벨사살왕은 무게를 재었는데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보였다. 나의 믿음은 과연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보았을 때 어떠할지 생각해보아야 하겠다. 11월 21일 사자굴 속의 다니엘 1 (다니엘 6:1-10) 1 다리오가 자기의 뜻대로 고관 백이십 명을 세워 전국을 통치하게 하고 2 또 그들 위에 총리 셋을 두었으니 다니엘이 그 중의 하나이라 이는 고관들로 총리에게 자기의 직무를 보고하게 하여 왕에게 손해가 없게 하려 함이었더라 3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고관들 위에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한지라 4 이에 총리들과 고관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발할 근거를 찾고자 하였으나 아무 근거, 아무 허물도 찾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 5 그들이 이르되 이 다니엘은 하나님의 율법에서 근거를 찾지 못하면 고발할 수 없으리라 하고 6 이에 총리들과 고관들이 모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말하되 다리오 왕이여 만수무강 하옵소서 7 나라의 모든 총리와 지사와 법관과 관원이 의논하고 왕에게 한 법률을 세우며 한 금령을 정하실 것을 구하나이다 왕이여 그것은 곧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에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니이다 ... 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시기와 모략 벨사살이 죽은 후 왕이 된 다리오는 다니엘에게 가장 높은 직위에 주고 나라를 다스리게 하였다. 다니엘은 지혜와 신실함이 그 어느 누구보다 월등하였으므로 이방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바벨론에서 왕이 바뀔 때마다 매번 높은 직위에서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그를 시기한 다른 총리들과 방백들은 고소할 구실을 찾으려 했으나 그가 충성되게 행하며 아무 흠잡을 것이 없자 계략을 꾸몄다. 다니엘의 깊은 신앙심을 알고 있던 대적자들은 그가 자신의 믿음에 반대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이용하였다. 앞으로 30일 동안 누구든지 왕 이외의 다른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나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하는 법을 제정하자고 건의하였고, 신하들의 아첨에 우쭐해진 다리오왕은 이 법을 승인하였다. 다니엘은 법이 제정된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법을 지키지 않을 경우 사자 굴에 던져져 사자의 밥이 될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늘 행하던 대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다니엘은 이방신과 이방문화로 가득 찬 적국에서 매일 세 번씩 기도하였던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는 날마다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하며 깊은 영성을 지켜왔기 때문에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으로 시기와 모략을 감당해낼 수 있었다. 우리가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고자할 때 믿지 않는 이들의 시기와 질투,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럴 때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자 한 다니엘을 기억하자. 그리고 다니엘의 기도의 생활을 기억하자. 믿음으로 살고자 애쓰며 기도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지켜주신다. 11월 22일 사자굴 속의 다니엘 2 (다니엘 6:16-23) 16 이에 왕이 명령하매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 굴에 던져 넣는지라 왕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네가 항상 섬기는 너의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하니라 17 이에 돌을 굴려다가 굴 어귀를 막으매 왕이 그의 도장과 귀족들의 도장으로 봉하였으니 이는 다니엘에 대한 조치를 고치지 못하게 하려 함이었더라 18 왕이 궁에 돌아가서는 밤이 새도록 금식하고 그 앞에 오락을 그치고 잠자기를 마다하니라 19 이튿날에 왕이 새벽에 일어나 급히 사자 굴로 가서 20 다니엘이 든 굴에 가까이 이르러서 슬피 소리 질러 다니엘에게 묻되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들에게서 능히 너를 구원하셨느냐 하니라 21 다니엘이 왕에게 아뢰되 왕이여 원하건대 왕은 만수무강 하옵소서 22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의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하지 못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에게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23 왕이 심히 기뻐서 명하여 다니엘을 굴에서 올리라 하매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 즉 그의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의 하나님을 믿음이었더라 하나님의 대반전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 때문에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은 극적인 하나님의 보호로 몸에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나올 수 있었다. 오히려 그를 참소했던 대적자들은 사자 굴에 던져져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다니엘을 아꼈던 다리오왕은 비록 잘못된 결정으로 다니엘을 사자 굴에 던져 넣게 하였으나 밤새도록 금식하고 오락을 그치고 잠을 자지 않았다. 새벽이 되자 부리나케 사자 굴로 가서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들에게서 능히 너를 구원하셨느냐”고 소리치며 슬피 울었다. 이는 다니엘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은 과연 완전한 절망과 죽음 가운데 있는 자까지도 살리실 수 있는, 다른 어떤 우상들에게서는 결코 기대할 수 없는 그런 권능을 소유하신 분이시냐는 뜻을 포함한 것이었다. 사자 굴에서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나는 다니엘의 모습은 다리오왕의 질문을 해결해주기에 충분하였다. 살아있는 다니엘의 음성을 들은 다리오왕은 천사들을 보내셔서 맹수의 위험에서 다니엘을 보호해주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사자 굴에서 살아나온 다니엘을 보면서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대반전을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을 지키는 이들을 보호하실 뿐 아니라 이들의 믿음을 통해 믿지 않는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드신다. 다니엘의 믿음을 보면서 우리의 믿음이 과연 우리 주변의 믿지 않는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게끔 하는 영향력이 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11월 23일 다니엘이 본 네 짐승 환상 (다니엘 7:1-7) 1 바벨론 벨사살 왕 원년에 다니엘이 그의 침상에서 꿈을 꾸며 머리 속으로 환상을 받고 그 꿈을 기록하며 그 일의 대략을 진술하니라 2 다니엘이 진술하여 이르되 내가 밤에 환상을 보았는데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3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더라 4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내가 보는 중에 그 날개가 뽑혔고 또 땅에 들려서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함을 받았으며 또 사람의 마음을 받았더라 또 보니 5 다른 짐승 곧 둘째는 곰과 같은데 그것이 몸 한쪽을 들었고 그 입의 잇사이에는 세 갈빗대가 물렸는데 그것에게 말하는 자들이 있어 이르기를 일어나서 많은 고기를 먹으라 하였더라 6 그 후에 내가 또 본즉 다른 짐승 곧 표범과 같은 것이 있는데 그 등에는 새의 날개 넷이 있고 그 짐승에게 또 머리 넷이 있으며 권세를 받았더라 7 내가 밤 환상 가운데에 그 다음에 본 넷째 짐승은 무섭고 놀라우며 또 매우 강하며 또 쇠로 된 큰 이가 있어서 먹고 부서뜨리고 그 나머지를 발로 밟았으며 이 짐승은 전의 모든 짐승과 다르고 또 열 뿔이 있더라 하나님의 주권과 계획 다니엘서의 전반부는 6장에서 끝나고 7장부터 후반부가 시작된다. 1장부터 6장까지는 다니엘이 이방나라에서 굳건하게 신앙을 지켜간 모습과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총명으로 왕들에게 관련된 일들을 해석함으로써 왕국의 장래에 대한 일들을 밝혔다면, 7장부터는 다니엘이 직접 받은 꿈과 계시를 통해 장차 이스라엘, 나아가 온 인류에게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벨사살이 왕이 된 첫 해에 다니엘은 꿈을 꾸고 환상을 받았다. 이것을 기록한 7장의 내용은 시기적으로 보면 앞에 기록된 5장, 6장보다 먼저 일어났던 일이다. 다니엘이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오는 환상을 본 것으로 인해 근심하며 번민할 때 천사가 나타나 환상의 의미를 해석해주는 것이 17절부터 기록되어 있다. 네 짐승의 환상은 바벨론으로부터 시작하여 장차 로마제국에까지 이어질 세상의 나라들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환상을 통해 알려주시고자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주권과 계획이다. 세상의 권세는 권세 잡은 자들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잠시 위임해주신 것이며, 하나님의 시간 계획에 의해 흥망성쇠를 거듭해간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이 계획하신 시간에 지상의 세상은 끝이 나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토록 평안과 안식과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새로운 나라가 시작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영원한 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심을 알아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살을 살아가야 하겠다. 11월 24일 요나의 소명과 도피 (요나 1:1-7) 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4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5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 충에 내려가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6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7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보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힌지라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생각 비둘기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요나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때 활동하던 선지자이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셨으나 그는 순종하지 않았다. 이방국가 앗수르의 수도였던 니느웨, 곧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적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내켜하지 않았고,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실천해야할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오히려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보다 자신의 인간적 생각에 의해 행동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는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져야 한다는 선민의식이 요나의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하나님이시고 전 인류가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요나가 자신의 선입견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였던 것처럼 오늘날 신앙을 고백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동일한 이유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판단의 근거를 하나님 말씀에 두지 않고 자신의 편협한 경험과 지식, 생각에 의지하는 한 우리는 오늘도 요나와 같은 잘못을 하게 된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노력하는지 아니면 나의 생각을 앞세우고 있지 않은지 주의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숙한 믿음이 되기를 소망하자. 11월 25일 요나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징계 (요나 1:11-17) 11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하니 12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13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14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 15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16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야라드’와 ‘코람데오‘ 사이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피해 도망하고자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다. 3절에 ‘배에 올랐더라’고 기록된 히브리어 ‘야라드’는 올라간 것이 아니라 ‘내려갔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소명을 거절한 요나는 욥바로 내려가고(3절), 배로 내려가고(3절), 배 밑층으로 내려가고(5절), 바다 밑으로 내려가고(15절) 마침내 물고기 뱃속까지 (17절) 내려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나님께서 큰 풍랑을 일으키셔서 안전한 도피처로 생각했던 배가 파선 지경에 이르렀고 급기야 선원들의 제비뽑기에 의해 재앙의 원인이 요나에게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요나의 도피계획은 완전히 무산되었고, 요나는 평소 자신이 무시하던 이방인들 앞에서 하나님께 범한 죄를 고백해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과 상황을 초월하여 존재하시는 무소부재하신 전능자이시다. 이방인인 선원들이 격랑하는 파도에 못 이겨 요나를 바다에 던졌을 때 즉시 바다가 잠잠해지는 것을 보고 크게 두려워하며 제사를 드리고 서원을 했던 것도 자연을 자신의 뜻대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위엄을 체험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만물의 창조자이시고 만물을 자신의 뜻과 계획대로 움직이시는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 살아가야 한다. 어떠한 형편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피해 내려가는 삶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경건함과 경외함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11월 26일 요나의 기도 (요나 2:1-10) 1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2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3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하였나이다 5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6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7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8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10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요나의 변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아 바다에 던져지고, 큰 물고기 뱃속에 3일이나 있게 된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기도 속에서 자신이 겪은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자세히 언급하며(2,3,5,6절). 그러한 고통 가운데서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2,6,9절) 주신 소명에 대한 새로운 결단을 하였다(8,9절). 자신의 고통을 토로하며, 그런 가운데도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일을 자신의 계획대로 이루어가시며 모든 백성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자신을 구해주실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요나는 죽음과 같은 특별한 체험을 하면서 자신의 연약함과 무능함을 깨달았을 뿐 아니라 보다 성숙한 신앙으로 변화되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다. 요나가 3일 밤낮을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구출된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되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신 사건을 미리 보여주는 예표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택하신 사역자들을 때로 고난을 통해서 훈련하시고,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며 사역을 준비시키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고난을 당할 때 좌절하고 낙심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고자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하겠다. 요나가 고난을 통해 변화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믿음의 성숙을 이루시고자 종종 고난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신다. 11월 27일 니느웨 백성의 회개 (요나 3:3-10) 3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4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5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옷을 입은지라 6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7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8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9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10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신지라 하나님의 선교 Missio Dei 어떤 사람들은 요나서에 기록된 사건을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 어떻게 사람이 큰 물고기 배 속에 들어가 3일이나 있다가 다시 살아서 나오는 일이 가능한지 의문을 갖는다. 기적 중의 기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기적은 수많은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영적 부흥을 일으키게 되었다는 점이다. 어떤 목사님이 기독교를 박해하는 나라에 가서 그 나라가 곧 멸망할 것이라고 잠시 선포했는데 그 나라의 정치지도자로부터 모든 백성에 이르기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용서를 구한 것과 마찬가지 상황인 것이다. 요나가 니느웨 성을 다니며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선포하였을 때 이방인인 니느웨 사람들은 굵은 베옷을 입고 회개하며 금식하였고, 왕은 니느웨 성에서 모든 악행을 중지할 것을 명령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놀라운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 요나의 외침에 능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요나를 통해 하나님이 일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며 기도한 요나를 살리셔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으나 선교는 하나님께서 직접 이루어 가는 것임을 니느웨 왕과 주민들의 회개를 통해서 보게 된다. 요나는 단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실 때 그것을 위한 도구로 택함 받아 사용되는 것은 택함 받은 자의 영광이요 기쁨이다. 오늘 하루를 지내며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하나님의 일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그리고 그것을 나에게 맡겨주심에 감사하며 겸손하게 순종할 것을 결단하자. 11월 28일 요나의 분노와 하나님의 자비 (요나 4:4-11)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5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보려고 그 그늘 아래 앉았더라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7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이기적인 신앙 요나가 그토록 가기 싫었던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전하자마자 니느웨의 왕으로부터 모든 백성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회개를 기뻐하시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심판을 거두시자 오히려 요나가 화가 나서 하나님께 크게 불평하였다. 하나님은 요나를 교훈하시기 위해 박넝쿨과 벌레, 뜨거운 동풍을 사용하셨고, 요나로 하여금 하찮은 박넝쿨 조차도 얼마나 귀한지 인식시키시면서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물인 인간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도록 이끄셨다. 요나가 하나님께 화를 내는 모습과 이에 대응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누가복음 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비유’가 연상된다.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작은 아들을 맞이하여 잔치를 베푼 아버지에게 불평하며 대드는 큰 아들의 모습이 마치 요나의 모습과 같다. 니느웨 백성들이 구원받은 것을 불평하는가 하면 그 백성이 어떻게 되는지 자신의 눈으로 지켜보겠다고 하는 완고한 마음을 가진 요나, 자신이 심지도, 가꾸지도 않은 박넝쿨을 아끼는 지극히 이기적인 모습의 요나는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요나는 오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이기적인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 하나님중심이 아닌 자기중심적인 신앙관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 이웃에게 사랑과 관용을 베풀기보다는 자신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해준다. 11월 29일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누가복음 14:7-11) 7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를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8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나님께서 높여주신다 성경을 읽다 보면 반복해서 나오는 주제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는 주제이다. 얻으려고 애쓰는 자는 잃게 하시고 버리는 자에게는 얻게 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원칙은 세속의 원칙을 뛰어넘는다. 예수님이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식사하러 들어가셨다. 식사에 초대된 손님들이 서로 상석에 앉으려고 하는 것을 보시고 비유를 통하여 겸손한 자세에 대해 가르치시며,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과 다르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고 높이고자 하며 섬기는 자리가 아닌 섬김을 받는 자리에 있고자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10:43-44)고 말씀하셨고, 예수님 자신도 섬김을 받기보다 도리어 섬기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스승을 본받고 따르는 사람을 제자라고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배우고, 그분이 행하신 일,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행하는 것이다. 주님을 본받아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겸손하게 형제자매를 섬기는 삶을 실천해보자.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높여주실 것이다. 11월 30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누가복음 17:5-10)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7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순종과 겸손 누가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수평적 관계인 이웃과의 삶에서, 그리고 수직적인 관계인 하나님과의 삶에서 가져야 할 덕목과 교훈들을 말씀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교훈들을 실천할 수 있도록 믿음의 분량을 더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큰 능력을 행할 수 있음을 말씀하시며 믿음의 질적인 면을 강조하셨다. 겨자씨는 매우 작지만 그 안에 생명력이 있어서 큰 나무로 성장하듯이 참된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작은 믿음으로도 큰 능력을 행할 수 있음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러한 믿음을 소유하고, 그러나 겸손하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해야 할 것을 종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주인을 충실하게 섬기는 종은 어떠한 보상이나 칭찬을 바라지 않고 자신이 맡은 일을 행한다. 주님의 제자들도 자신의 직분을 충실히 감당한 후 칭찬과 보상을 기대하기 보다는 다만 자신은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충실한 제자에게 요청하시는 것은 순종과 겸손이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빌2:6-8)하심으로 우리에게 섬김과 겸손의 본을 보여주셨다. 오늘도 하루를 지내며 하나님과 동등한 분임에도 불구하고 종의 모습으로 인생들을 섬기며 희생하신 주님의 삶, 주님의 헌신적 사랑을 우리도 닮게 되기를 기도하며 실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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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림교회
2019년 3월 25일
In 365일 말씀묵상
12월 1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한복음 1:1-5)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인간이 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이 창조한 인간들은 그를 알지 못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메시아의 오심을 세상에 준비시키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또한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 그 분의 오심이 예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배척하였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였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들과 행하신 일들은 그 분의 정체성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요한은 예수님을 완전한 인간이며 완전한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은 완전한 감각을 가진 인간이 되셨으며,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서 사셨음에도 불구하고 만물의 창조자이시고, 주관자이시며 영원한 삶의 원천이신 영원하신 하나님이셨다. 대강절이 시작되었다. 대강절(Advent)은 ‘옴’, ‘도착’을 의미하는 라틴어 ‘adventus'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 전의 4주간을 대강절로 지키며 주님의 첫 번째 탄생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고 기대하는 신앙을 가다듬는다. 사도 요한의 기록과 같이 예수님은 어두운 세상을 비추기 위한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분 안에 있는 생명을 누리게 되고, 더 이상 어두움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비추는 밝은 빛 가운데서 살게 된다. 대강절을 맞아 거리마다 화려한 성탄장식이 아름다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으로 즐거워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각자의 영혼을 밝혀주시고, 생명의 빛을 발할 수 있게 해주신 은혜로 인하여 기뻐해야 하겠다. 12월 2일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 (요한복음 1:6-18)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매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 요한이 ...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새로운 인간 12제자 중의 한 사람이며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의 증인인 요한은 모든 믿는 이들을 대상으로 복음서를 기록하였다. 요한은 예수님의 생애를 일대기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주제별로 기록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이 새로운 탄생은 우리를 내면으로부터 변화되게 하여서 우리의 생각이나 주장, 소망, 동기 등을 새롭게 만든다. 자연적인 출생이 우리에게 육신의 생명을 주고, 한 가족의 구성원이 되게 하듯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새로운 출생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생명을 얻게 하며, 하나님 나라의 한 구성원이 되는 선물을 얻게 한다. 우리를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 인간들 속에서 사셨던 예수님은 첫째, 인생들의 완전한 교사이셨다. 예수님의 생애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과 그에 따라 우리들이 생각해야만 하는 것들을 깨닫게 된다. 둘째, 확실한 본보기가 되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직접 보여주시며, 그것을 위해 필요한 힘을 공급해주신다. 셋째, 완전한 희생이 되셨다. 예수님은 인간들의 모든 죄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기 위해 세상에 오셨고, 그의 죽음을 통하여 죄는 반드시 갚아져야 하는 하나님의 원칙이 채워지게 되었다. 육신의 생명을 입고 태어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영적 생명을 가진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어 새롭게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새 출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다. 12월 3일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1 (누가복음 1:5-19) 5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7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8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 새 9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고 10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11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가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15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16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 18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19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시는 하나님 성전에서 일하는 유대의 제사장들은 매일 아침 한 명의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 향단에 분향을 했는데, 누가 그 날 성소에 들어갈지는 제비를 뽑아 정하였다. 사가랴가 제비를 뽑은 날, 향단에 분향하며 기도하는 동안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아들을 주실 것을, 그리고 백성들을 위해서는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는 메시아가 오시기를 기도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두 가지 기도를 한꺼번에 들어주셨다. 사가야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나이가 많아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상태였으나 주의 사자가 나타나 사가랴에게 아들이 태어날 것을 말해주었고, 그 아들이 태어나 행할 일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머지않아 사가랴는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며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중요한 일을 행할 아들을 갖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인류를 구원하려는 계획을 세우시고, 그 계획을 세상에 알릴 한 아기를 먼저 태어나게 하셨다. 그 아기가 바로 사가랴 부부에게 태어나 장차 요단 강에서 세례를 베풀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외칠 선지자 세례 요한인 것이다. 하나님은 사가랴 부부의 간절한 기도에 이중적으로 응답하셨다. 아기를 주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오시는 메시야의 길을 준비할 중요한 역할도 맡겨주신 것이다. 인간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인간의 생각이나 한계를 뛰어넘으며, 우리의 기도를 그 분의 방식으로, 그 분의 때에 들어주신다. 12월 4일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2 (누가복음 1:21-25) 21 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가 성전 안에서 지체함을 이상히 여기더라 22 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하니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하는 대로 있더니 23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24 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이르되 25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신뢰 사가랴가 성소에서 분향하는 동안 백성들은 밖에서 기다리며, 사가랴가 분향을 끝내고 나와서 민수기에 기록된 대로 축복기도를 해줄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6: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그런데 기다리던 백성들 앞에 나타난 사가랴는 말을 하지 못했고, 사람들은 사가랴가 성소에서 환상을 본 것으로 생각하였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신실한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녀가 없음으로 인한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육신의 부활을 믿지 않았고, 부활의 의미를 그들의 자녀들을 통해 이어지는 삶에 대한 소망에 국한시키고 있었다. 자녀들은 또한 부모의 노후를 봉양하는 경제적 보장이었으며, 가족의 사회적 지위를 높여주는 역할을 하였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겨졌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오랫동안 기다렸음에도 자녀가 없었고, 이제 그들의 삶에서 무언가 변화를 기대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아졌으므로 스스로 비천하고 희망이 없다고 느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고무시키고,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실 (당시의 사고방식으로는 그들의 부끄러움을 씻어주실) 가장 합당한 때를 기다리셨고, 그 때가 되자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우리가 어떤 위기에 처해있다면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자. 자식을 얻지 못했음에도 일평생 하나님을 신뢰한 사가랴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은 위기 가운데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녀들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시며, 그 분의 영광과 평안으로 채워주실 것이다. 12월 5일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누가복음 1:26-33) 26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28 그에게 들어가 그에게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30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하나님의 선택 요셉과 마리아의 고향인 나사렛은 유대사회의 중심이며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나사렛은 중요한 무역로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종종 이교도 상인들이나 로마의 군인들이 찾아오곤 하였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셨지만 나사렛에서 성장하셨다. 엘리사벳이 임신한지 6개월이 지났을 때에 천사 가브리엘이 요셉의 약혼녀 마리아를 찾아왔다. ‘주의 길을 예비할 세례 요한’의 탄생 예고에 이어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를 ‘은혜를 받은 자’라고 칭하며,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 아들을 낳을 것임을 알려주었다.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 할 것을 지시하였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천사가 그 이름의 뜻을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자’라고 알려주었다. 마리아는 어렸고, 가난했고, 여인이었다. 그 당시 사람들의 판단기준으로 볼 때 하나님으로부터 중요한 사명을 받아 감당할 만한 아무런 특별한 점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마리아를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순종의 길을 따르도록 하셨다. 마리아가 택함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에 지혜와 재능, 또는 경험이나 학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부족한 점이 많아 하나님의 사역에 부름 받지 못한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외머를 보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선택기준은 우리의 외적인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하는가에 있다. 하나님의 선택기준을 우리가 제한하지 말자. 하나님을 신뢰하는 한 하나님은 우리를 필요로 하시고 선택하여 사용하신다. 12월 6일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누가복음 1:34-38)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37 대저 하나님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자발적 순종 예수님은 아담의 후손으로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인간들과는 달리 죄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셨다. 아담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으나 예수님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인생들의 죄를 대신 갚아주심으로써 우리를 공의의 하나님이 받아주실 수 있는 상태로 변화시키셨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아기를 낳을 것이라고 알려주었을 때 마리아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놀라며 의아해하였다. 천사는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임하여 아들을 낳게 될 것임을 말하였다. 예수님이 동정녀를 통하여 태어나시는 것은 창세기 3:5의 ‘여자의 후손’과 이사야서 7:14의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라는 예언의 말씀을 이루는 것이다. 마리아가 결혼하기 전 잉태하고 출산한다면 약혼자 요셉이 파혼을 요구할 수 있고, 부끄러운 딸이라고 여겨져 부모로부터 쫓겨나 매우 빈곤하게 살게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마리아는 모든 위험과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말씀하신 대로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응답함으로써 하나님의 섭리에 즉각 순종하는 믿음을 보여주었다. 마리아는 자신이 당하게 될 곤경은 생각하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하나님의 일을 할 것을 요청하셨고, 그 요청에 기꺼이 순종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어떤 일을 행하도록 요청할 때 그로 인해 어떠한 결과가 생길지 계산해보고, 확실히 인식할 때까지 기다리는 잘못을 범하지 말자. 우리도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고 즉각 응답하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다. 12월 7일 엘리사벳을 방문한 마리아 (누가복음 1:39-45) 39 이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41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42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43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하나님의 무한하심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을 전해들은 마리아는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갔다. 성령께서는 엘리사벳에게 마리아가 임신한 아기가 메시아이심을 분명히 알게 하셨다. 그래서 마리아가 그녀를 방문했을 때 “내 주의 모친”이라고 반기며 ‘여자 중의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라고 하며 반길 수 있었다. 엘리사벳의 이러한 축복의 인사는 마리아의 믿음을 더욱 강하게 해주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처녀로써 홀로 임신한 것을 불가능한 일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혜로운 이 여인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굳건히 했고, 마리아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고 복을 받은 것을 기뻐하였다. 천사의 말을 듣고 즉각 순종한 마리아와 달리 사가랴는 아들을 갖게 되리라는 천사의 말을 들었을 때 그것을 의심하였다. 인간적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의심은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불가능이란 없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이미 나이 많아 아기를 가질 수 없는 형편이었으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기를 선물로 주셨고,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케 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행하시고자 하는 일들을 우리는 얼마나 쉽게 의심하고 잘못 이해하는지! 실제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보다는 자신의 이해와 경험을 의지하는 잘못을 범하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들의 시야에 의해 제한되지 않으며 우리의 인간적인 한계성에 의해 지배받지 않는다.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하자! 12월 8일 마리아의 찬양 (누가복음 1:46-55) 46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49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 마리아의 송가인 이 찬송시는 라틴어 원본의 각 문장의 첫 글자들을 따서 ‘Magnifikat’라고도 불리어지며, 성가대 찬양의 주제로 자주 사용되어 왔다. 선지자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그랬던 것처럼 마리아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이루어가고자 하시는 것에 대해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행하시는 일을 찬양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마리아의 찬가는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신에게 임한 복에 대한 감사,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은혜, 권세 있는 자와 비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공평하신 심판,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이 성취됨을 찬양한다. 마리아가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하리라’ 말했을 때 그녀가 스스로 자신을 높이며 자부심을 가진 것은 결코 아니다. 마리아는 보잘 것 없는 자신을 택하여 이 세상에 메시아를 태어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귀한지 깨달았고, 그것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였다. 이 은혜는 참으로 귀하고 복된 것이었지만 귀한 만큼 고통과 희생이 따르는 것이었다. 만일 마리아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일어날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였다면 하나님의 선물도 받을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나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어주셨는지 헤아려보자. 하나님이 주신 것을 과소평가하거나 무시하지는 않았는지, 순종이 따르는 하나님의 선물(과제)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거절한 적은 없는지 돌아보자.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분께 영광을 돌리자! 12월 9일 세례 요한의 탄생 (누가복음 1:57-66) 57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58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59 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60 그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61 그들이 이르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62 그의 아버지께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물으니 63 그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기더라 64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65 그 근처에 사는 이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66 듣는 이가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하나님의 가족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한 집안의 혈통이나 이름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사가랴의 아들이 그들의 전통에 따라 당연히 친족 중의 한 사람의 이름으로 불릴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천사가 일러준 대로 아기의 이름을 요한으로 정하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천사가 전해준 말을 믿지 못하여 아기가 출생할 때까지 벙어리로 지내야했던 사가랴가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요한으로 지을 것을 서판에 쓰자 그의 혀가 풀리며 닫혔던 말문이 열려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요한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는 뜻인데, 요한의 탄생이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기 위한 것임을 의미하는 이름을 주신 것이다. 유대 가정에 한 아기가 태어나면 중요한 예식인 할례식을 행한다. 하나님은 할례를 명하셨는데, 이것을 통해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삶이 시작된다. 할례예식은 그 아기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즐거워하며 친족들이 함께 모이는 잔치였다. 우리는 육신의 가정에서 태어나 육신의 가족의 구성원이 되었다.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믿고 받아들임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한 구성원이 되어 하나님 안에서의 가족을 이루게 되었다.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가족에 속하게 된 것을 기뻐하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의식과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다. 12월 10일 사가랴의 찬가 (누가복음 1:67-80) 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68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70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71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72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73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 76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80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나의 찬양 요한이 출생한 후 사가랴는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사가랴의 찬가’(Benedictus)라고 불리는 이 찬송은 네 소절로 되어 있는데, 백성을 죄에서 구속하실 구원자를 보내주심에 대한 감사(68-71절), 구원의 약속을 찬양(72-75절),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의 사명(76-77절), 메시야의 구원을 찬양(78-79절)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죄를 정복할 평화의 구세주가 아닌 로마의 강력한 지배로부터 군사적으로 해방시켜 줄 메l시야가 오시기를 기대하였다.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은 아기로 태어나 삶을 시작하는 연약한 인생들을 통하여 일하시기로 결정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한 아기로 이 세상에 보내셔서 사가랴의 찬송과 같이 ‘돋는 해가 위로부터 임하여 어둠과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으로 인도’하도록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신실한 사람들을 통하여 일하신다. 혹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느낄지도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많은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과 순종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며, 하나님이 그 분의 일을 행하실 수 있도록 기꺼이 자신을 낮추며 순종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사용하신다. 가브리엘 천사가 전해준 소식을 듣고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며 찬양한 마리아와 사가랴처럼 우리도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뻐하며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리자. 이 세상에 메시아를 보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우리의 찬양을 어떻게 고백해야 할지 묵상해보자. 12월 11일 세상을 비추는 참 빛 (요한복음 1:6-14)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진정한 회개 독일 경건주의를 태동시킨 요한 아른트(1555-1621) 목사님은 그의 설교 ‘어둠’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육신을 위해서는 많이 염려하고, 죽지 않을 영혼에 대해서는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 바로 큰 어둠이요 무지한 일’이라고 지적하면서 ‘영원한 삶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라.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그분이 인내로 기다리신다.’고 하였다. 16세기 아른트 목사님이 활동하던 시기나 지금이나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 여전히 이러한 ‘큰 어둠’ 가운데 살고 있는 이들이 많이 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영혼 안에 있는 큰 어둠을 비추는 참 빛으로 오셨다. 어둠 가운데 있을 때는 사물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영혼이 어두울 때는 죄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혼을 완전히 밝히시면 그 속에 있던 온갖 더러운 것들이 낱낱이 드러나므로 그 빛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죄와 허물, 죄성을 애통해하며 회개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회개는 외적인 죄를 끊는 것만이 아니라 내적인 중심을 변화시키고 거룩하고 경건한 삶으로 그 방향을 돌릴 때 일어난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회개를 통해 새 생명을 얻게 하시고자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다. 우리의 영혼을 활짝 열고 참 빛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자. 그리하여 구석구석 묵은 먼지처럼 쌓여 있는 모든 죄를 다 털어내고 인내로 기다리시는 하나님 은혜 가운데 새롭게 한해를 맞이할 준비를 하자. 12월 12일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태복음 1:18-25)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임마누엘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마리아가 임신한 것을 알게 된 요셉은 조용히 마리아와 헤어지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마리아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성령으로 잉태한 것임을 알려주었다. 예수님은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한 인간이셨지만, 하나님의 아들로서 한 점의 인간적인 죄도 없이 태어나신 완전한 인간이시며 하나님이시다.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하시기 위해 스스로 인간 실존의 유한성을 취하셨다. 하나님과 본질 상 하나이신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모든 인생들을 위해 사실 수 있었고, 죽으실 수 있었다. 천사는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할 것을 지시하였다. 사가랴에게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요한으로 하라고 지시한 것처럼 마리아가 낳을 아기의 이름도 미리 알려줌으로써 태어날 아기가 누구인지,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려주려는 것이다. 아기 예수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목적은 바로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인간들, 그 분의 모든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직접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들과 함께 계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한 인간으로 사셨기 때문에 우리의 경험과 곤경들을 온전히 이해하신다. 그 분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상황을 직접 경험하셨고, 우리들을 도울 능력, 우리들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실 수 있는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임마누엘!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12월 13일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이사야 11:1-5)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4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하실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이가봇에서 임마누엘로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가나안 이방문화와 혼합되어 신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매우 혼돈하고 부패하였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이 어린 나이에 성전에서 일하고 있을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생활을 이끌어가고 있었던 엘리제사장은 영적으로 어두웠을 뿐 아니라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였고 모든 악행을 일삼았다. 결국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과 엘리제사장 가정에 임하여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며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었고, 그 소식을 들은 엘리제사장, 출산하던 며느리가 죽는 불행이 한꺼번에 닥쳤다. 며느리가 죽어가면서 출산한 아기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뜻이다.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해 예언하면서 메시야가 오셔서 이룰 평화의 나라에 대해 노래한다. 그 날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자연의 질서가 회복되고, 공의와 정직이 판단의 기준이 되고,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지며,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을 알려준다. 비록 하나님의 백성이 불순종하고 타락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지만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은 다시금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이 땅에 하나님 신앙을 회복시키시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은혜로 채워주신다. 이가봇의 세상을 임마누엘의 세상으로 변화시켜주시기 위해 아기 예수를 이 땅에 보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자! 12월 14일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 (이사야 55:6-11) 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10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특별한 만남 신앙은 하나님을 찾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이사야는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 나아오려는 사람은 ‘만날 기회를 타서’(시32:6), 만날 만한 때에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을 찾아서 만남으로 신앙을 시작한 사람은 하나님을 불러야 한다.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한 말씀에서 ‘부르다’는 단어는 어떤 응답을 얻기 위해 강력한 욕구를 가지고 간절히 부른다는 뜻이다. 특히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경우에 사용된 이 단어는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거듭 태어남이 없이는 새사람이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거듭 태어나는 것은 무엇으로 말미암는 것인가? 거듭 태어나기 위한 수단은 만남이다. 성경은 만남을 통해 거듭 태어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세상에서 수많은 만남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경솔하고 무의미한 만남이 있는가 하면 사려 깊은 따뜻한 만남이 있다. 모든 만남이 다 유익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를 만나는가이다. 누구를 만나는가에 따라 거듭 태어남의 모습과 형편이 달라진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을 만나주시는 것, 이것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만남이다. 신비한 만남의 결과로 우리는 거듭난 새 생명을 얻는다. 12월 15일 인생의 때 (전도서 3:1-11) 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 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때를 깨닫는 신앙 때로 원형의 시계와 반복적으로 회전하는 시계바늘을 보면서 우리의 시간 또한 시계처럼 끊임없이 회전, 또는 반복되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시간은 물과 같이 계속 흘러가고 있고, 이것을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고 표현하였다. 올해도 우리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신의 과제를 이행하며 바쁘게 살아왔다. 한 해를 마무리해 가면서 우리의 모든 노력과 수고가 어떤 결실을 맺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누군가는 지난 한해의 삶이 만족스러울 수도 있고, 후회와 안타까움으로 되돌아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제 2주 후면 새로운 달력을 걸게 된다. 새로운 달력을 걸었다고 갑자기 우리의 삶이 새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반복되는 시간에 생기를 불어넣고, 죽은 시간을 부활시키며, 시간을 새롭게 하는 창조적 손길이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손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그분이 자신의 삶 안으로 들어와 ‘새로운 시간’을 살게 하는 경험, 그 경험으로 인해 삶이 놀라운 생동력을 가지고 변화되는 것을 체험하는 은혜를 누린다. 우리는 지금 어느 때를 살고 있는가? 바로 이 세상에 구세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는 때이다. 우리 안에 찾아오셔서 우리의 연약함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주시고,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고자 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지난 한 해를 결산하고, 그분과 함께 새롭게 한 해를 시작하기 위해 구세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할 때이다. 12월 16일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8:14-17) 14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15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손을 잡고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는 자신이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던 체험담을 전한다. 수술 후 마취가 깨기 시작하자 극심한 통증이 밀려와 간호사에게 다시 마취주사를 놓아달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나 의사는 마취주사 놓는 것을 허락지 않았는데 그때 한 간호사가 침대 곁에 앉아 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엔도 슈사쿠는 ‘그러자 참으로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그 지독하던 아픔이 조금씩 가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오랫동안 질병에 시달리고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아 슬픔과 고통, 소외감 속에 있던 이들의 손을 잡아 주었던 한 위대한 치유자의 손길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의 손도 타인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며 어느 정도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을진대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의 능력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예수님이 손을 대자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이 떠나갔고, 한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자 그의 나병이 깨끗해졌다. 죽은 소녀의 손을 잡으시니 그 소녀가 살아 일어났고, 예수님이 손을 댄 사람들마다 그들의 병이 나았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손, 사망을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손, 실의와 좌절을 희망과 용기로 바꿔주시는 손, 주님의 손을 잡자. 예수님의 손을 잡으면 마음까지 따뜻한 주님의 사랑이 전해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손은 우리의 연약함을 치유해주신다. 이 세상에 구세주로 오시는 예수님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 나의 사랑과 위로와 치유를 필요로 하는 이들의 손을 잡아 주자. 12월 17일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3:1-7)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의 언어 우리는 매일 많은 사람을 만나며 많은 말을 하면서 살아간다. 언어는 종종 속마음과 다른 엉뚱한 방향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말하는 순간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상대방에게 전달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된다. 한 해를 지내며 우리의 언어생활은 어떠했는지 돌아보자.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기에 급급하여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놓치지는 않았는지, 하나님의 은혜를 자연스럽게 흘려 내보내는 자녀다운 것이었는지 아니면 세상일들을 말하기에 바빴는지, 자신과 타인을 포용하는 긍정적인 언어였는지 아니면 비난에 더 많이 사용된 언어였는지 생각해보자. \ 사도 바울은 ‘내가 내 모든 재산을 나누어주고 (어떤 귀한 목적을 위하여)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내게 사랑(곧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나아가 믿음과 소망, 사랑은 항상 있어야 하는데 그 중에 제일인 것은 사랑이라고 강조한다. 어떠한 미사여구를 써서 말한다 해도 그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담겨 있지 않으면 그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서툴지라도 그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담겨 있으면 그것은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고 영혼을 소생시킨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이 절기에 우리의 언어가 사랑으로 가득 차서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언어로, 상처받은 이의 마음을 치유하는 언어로,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격려하는 언어로,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언어로 말해지기를 소망하자. 12월 18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마태복음 6:24-32)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소유와 삶 저명한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 (To have or to be?)라는 저서에서 인간의 행복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무언가를 자신의 것으로 소유함으로써 행복한가, 아니면 그것이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가를 생각해보게 한다. 행복한 사람과 행복하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기는 참 어렵다. 겉으로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뜻밖에 전혀 행복하지 않을 수 있고, 행복한 삶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사람이 오히려 불행을 느끼지 않고 살아가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는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소유(가진 것 혹은 성취한 것)로 사람을 판단하게 하고, 소유가 행복의 척도인 것처럼 생각하여 소유에 집착하게 만든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며,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경고하신다. 나아가 몸을 위하여 무엇을 먹고 마실지, 무엇을 입을지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하늘 아버지께서 인생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때를 따라 필요를 공급해주시기 때문이다. 올 한해를 지내며 혹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존재의 중요성보다 세상적 소유에 더 큰 가치를 두고 그것을 얻음으로 행복해지려고 애쓰지 않았는지 되돌아보자.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영적인 부요함을 누리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영적 존재로서의 삶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았는지 점검해보자. 12월 19일 우리의 모든 것을 살피시는 하나님 (시편 139:1-10) 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코람데오 Coram Deo (in the presence of God) 요즈음엔 어디를 가나 CCTV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 사람들이 집밖에서 하는 어지간한 행동은 다 녹화된다. 미국의 대형슈퍼마켓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천정 구석에 설치한 감시카메라를 ‘하늘의 눈 eye of the sky’으로 부른다고 한다. 어떤 사고의 원인을 규명하거나 범죄자를 찾아내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만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의 행동이 녹화된다는 사실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을뿐더러 행동거지를 조심하게 만든다. 다윗은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눈은 우리의 삶을, 우리의 행동 뿐 아니라 마음과 생각까지도 지켜보고 계시며, 하나님의 눈에서 한순간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윗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때로 우리는 우리의 눈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눈도 우리를 보지 못하시는 것처럼 착각한다. CCTV 카메라는 사람의 행동만 녹화하지만 하나님의 눈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행동뿐 아니라 마음까지도 보고 계신다. 올 한해를 살아오면서 우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안타까운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를 바라보신 하나님의 눈을 잊고 지내지는 않았는지 돌이켜보자. 새해에는 마음과 행실을 더욱 경건하고 거룩하게 다듬어 우리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사랑스러운 자녀로 살아가자. 12월 20일 우리 마음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 (로마서 5:3-10)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10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조건 없는 사랑 한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를 무척 사랑하는 한 소년이 있었고, 나무는 소년으로 인해 매우 행복했다. 그러나 소년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무는 혼자 있을 때가 많아졌다. 어느 날 소년이 찾아와 돈이 필요하다고 말하자 나무는 자신의 열매를 모두 내어주었다. 얼마 후 다시 찾아온 소년은 집을 지어야겠다고 말했고, 나무는 자신의 가지를 모두 내어주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소년은 멀리 가고 싶다면서 배가 필요하다고 말하였다. 나무는 자기의 줄기를 베어 배를 만들라고 말하였다. 소년은 그 배를 타고 멀리 떠났고, 나무는 이제 그루터기만 남았다. 먼 후일 노인이 된 소년이 다시 나무 곁으로 돌아왔다. 나무는 노인이 된 소년에게 말하였다. ‘이제 내가 너에게 더 줄 것이 없어. 하지만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서 푹 쉬도록 해.’ 쉘 실버스타인이 쓴 소설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소설 속의 소년의 모습은 끊임없이 받기만 하는 인간의 모습인데 반해 열매부터 시작하여 밑동만 남을 때까지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준 나무는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우리가 연약할 때에나 원수 될 때에나, 죄인될 때에나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전한다. 올 한해도 아무런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조건 없는 사랑으로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소년처럼 당연한 듯이 무작정 받기만 한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보며 이제라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자. 12월 21일 요시야 왕의 개혁 (열왕기하 23:21-27) 21 왕이 뭇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22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여러 왕의 시대에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23 요시야 왕 열여덟째 해에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24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점쟁이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거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25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말씀으로 삶을 새롭게 하자 ‘여호와께서 도와주심’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요시야 왕은 기원전 7세기 경 남유다왕국을 다스렸다. 그가 왕이 된 지 18년이 되던 해 성전을 수리하던 중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는데, 요시야는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을 읽으면서 이제까지 이스라엘이 저지른 죄가 무엇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성전에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기록한 책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채 오랜 세월을 지냈다는 사실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어둡고 부패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말씀을 읽은 요시야 왕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참회하였으며, 하나님을 향한 믿음 없이 살아온 이스라엘, 우상숭배로 더러워진 이스라엘을 말씀을 통해 새롭게 하고자 했다. 온 백성이 예루살렘에 모여 함께 유월절을 지키며 이 백성을 애굽의 고난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철저한 개혁을 단행하였다. 요시야는 마음을 다해 모세의 모든 율법을 지키고자 하였고,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을 정도로 말씀으로 나라를 새롭게 하고자 힘썼다. 올 한해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는지,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는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움직이고 나아가게 하는 힘의 근원이 되었는지 생각해보자. 만일 그 옛날 요시아 왕 시대의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방치해두었었다면 이제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삶을 개혁하고 변화시켜나가기 위한 각오를 새롭게 해야겠다. 12월 22일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마태복음 21:18-22) 18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0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나의 삶은 열매를 맺고 있는가? 중세의 수도사 아벨라르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당대의 위대한 신학자였던 안셀무스를 혹평하는 부분이 있다. 그는 안셀무스가 소문과는 달리 별 볼일 없는 것을 비판하며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가 말하는 나무는 잎이 무성하여 멀리서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사뭇 당당하게 보이나 가까이 다가가서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은 이 나무에 열매가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게 된다네 ... 기름진 벌에 우뚝 솟은 떡갈나무처럼 큰 이름의 그늘에 열매가 없네.’ 성전을 향하여 가던 예수님이 시장하여 길에 있는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따서 드시고자 하였으나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에는 정작 열매가 없었다. 예수님은 나무를 향하여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고 무화과나무가 곧 말라버렸다. 놀란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기도할 때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산이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비유를 사용하시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의심하지 않으면 응답받지 못할 일이 없음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올 한해 우리는 각자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무엇인가 많은 일을 하며 열심히 살아왔다. 그러나 많이 수고한 것 같고, 그럴 듯하게 보이는 잎사귀도 많은 것 같은데 정작 결실할 열매가 없다면 과연 그 많은 일들을 믿음으로 기도하며 행하였는지 돌아보아야 하겠다. 만일 열매가 없다면 아직도 내가 강하여 하나님의 강함을 외면하고 약한 자로 살지 않았는지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보자. 12월 23일 그리스도의 향기 (고린도후서 2:12-17) 12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13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 우리는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17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향기 나는 삶 때로 우리는 자신에게서 나는 냄새를 감추기 위해, 혹은 더 좋은 냄새가 나게 하기 위해 향수를 사용한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향수는 잠시 동안 목적을 이루어줄 수 있으나 곧 사라져버리는 시한부적인 냄새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게 하신다고 말하며, 성도들을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표현한다. 바울의 이러한 표현은 구약시대에 성전에서 날마다 향을 피워 하나님께 향기를 올려드렸던 것과 인간의 죄를 대신 갚기 위해 짐승을 속죄제물로 태워서 그 냄새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던 것을 기억하게 한다. 우리를 위해 직접 속죄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의 내면에서부터 그리스도의 향기가 퍼져 나오게 하신다. 이것은 잠시 뿌리는 향수와 달리 지속적으로 퍼져 나와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지며, 이 향기를 맡은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된다. 올 한해를 지내면서 각자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어떤 냄새를 내며 살았는지 생각해보자. 나에게서 나는 냄새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향기여서 그것을 맡은 사람을 생명길로 인도하였는지, 아니면 교만과 욕심, 갈등으로 인한 썩은 냄새를 풍기며, 그 냄새를 감추기 위해 향수를 뿌리며 살았는지 돌아보자. 살아있는 꽃이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듯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있는 생명은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향기를 퍼뜨린다. 12월 24일 예수께서 베들레헴에 태어나시다 (누가복음 2:1-7) 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에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첫아들을 낳아 강보에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하나님의 계획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로마 제국의 전역에 걸쳐 호적 조사를 명령했는데, 이는 로마의 속국에 대해 세금을 원활히 거둬들이고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한 조치였다. 당시 호적은 모두 자신의 출생지에서 해야 했으므로 나사렛에 살고 있던 요셉과 마리아도 호적을 하러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가야했다. 출산이 임박한 마리아는 요셉과 함께 고향인 베들레헴에 도착했으나 머무를 곳이 없었다. 숙소를 구하지 못해 결국 더럽고 초라한 마구간에 들어가 그곳에서 아기 예수를 낳았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명령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태어나야 할 완벽한 하나님의 시간에, 완벽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역사의 모든 측면을 다스리고 계신다. 황제의 명령에 의해 예수님은 선지자가 그의 탄생에 대해 예언한 바로 그 도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되었다. 또한 구약성경에는 메시야가 다윗의 계보에서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는데,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가 된 요셉과 마리아는 모두 다윗의 자손이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 모든 자신의 계획을 이루셨다. 이 세상에 오시는 가장 위대한 분이 초라한 마구간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태어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겸손의 왕으로 오신 메시야를 극적인 모습으로 나타내준다. 마구간에서 태어난 이 작고 무기력한 아기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었다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 승천하시고 왕 중의 왕으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분이시다. 12월 25일 하나님께 영광 사람들 중에 평화 (누가복음 2:8-14) 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위대한 소식 목자들이 밤에 들판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고 있을 때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가 그들을 찾아왔다. 그리고 ‘너희에게 모든 백성들이 크게 기뻐할 좋은 소식을 알린다. 오늘 밤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그분이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라고 말하였다. 그때에 갑자기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천사들과 함께 ‘가장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이 얼마나 놀라운 탄생 통보인가! 목자들은 아기가 태어난 곳, 베들레헴으로 가서 말구유에 누워있는 아기에게 경배하고 아기의 부모에게 천사들이 말해준 위대한 소식을 전하였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다섯 편의 노래 중 네 번째인 ‘천사들의 찬송’은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이 하나님과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결과를 노래한다. 즉, 예수님으로 인해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된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땅에서는 구원받은 인생들이 하나님과 화목하여 세상이 줄 수 없는 진정한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을 노래한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그분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모든 겸손한 사람들의 영혼 속에 거하신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자신의 구원자로 믿고 받아들일 수 있고, 예수님은 모든 이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신다. 이러한 주님을 나는 매일 기도 속에서, 말씀 속에서 만나며 즐거워하고 있는가? 나는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기쁨으로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 분을 진정 알고 있는가? 12월 26일 아기 예수를 방문한 목자들 (누가복음 2: 15-20) 15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6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18 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을 놀랍게 여기되 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20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목자들과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와 탄생은 인간의 논리나 이성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초자연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셔서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이 이 사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우셨다. 천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영적인 존재로 하나님 곁에서 그의 사역을 보좌하도록 만들어졌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세상에 드러내시기 위해 계속 일하시면서 우리가 당연하게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이 일에 관해 나타내 보이지 않으셨다. 당시 성전에서 일하던 제사장들이나 율법학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에 대해 알려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들판에서 양을 치는 몇몇 목동들에게 예수의 탄생소식이 전해졌음을 누가는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접한 목동들 중에는 속죄 제물로 드려지는 양을 성전으로 끌고 간 적도 있었을 것이다. 들판에서 양을 치며 그 중에서 속죄 제물로 드려질 흠 없는 어린 양을 구별하여 돌보던 목동들, 그들은 온 세상의 죄를 대속하여 주실 하나님의 어린양을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자리에 초대받았다. 우리의 죄를 대신 갚기 위해 어린 양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시고, 우리에게 영원히 존재하는 새로운 생명을 주셨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 세상의 인생들과 함께 하시며 구세주를 찾도록 모든 이들을 초대하신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그 길로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부르심에 귀 기울이고 마음을 열어보라! 12월 27일 시므온의 송가 (누가복음 2:25-35)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34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믿는 모든 사람들 마리아와 요셉은 아기가 난 지 8일 만인 할례식 날 천사가 일러 준 대로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다. 모세의 법대로 아기에게 정결 의식을 행하는 날이 되자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율법에 “첫아들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주께 드리라”고 기록된 대로 아기를 주님께 드리는 예식을 행하기 위해서였다.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를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성전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서 시므온이라고 하는 노인을 만나 아기의 장래를 예언한 말을 들었다. 시므온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28절-35절은 시므온의 송가, Nunc Dimittis(하나님이 이제 보내셨다라는 뜻)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이 구절의 라틴어 번역에서 각 문장의 첫 알파벳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시므온은 혼란한 시대 속에서 의롭고 경건한 생활을 하면서 메시야를 기다린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에서 배척을 받게 될 것이고, 어떤 이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넘어지고, 다른 이들은 세움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제 시므온은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야를 보았기 때문에 편히 잠들 수 있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통한 축복이 예언되어 있는 구약의 말씀들을 매우 신뢰하였다. 이사야는 메시아가 유대인 뿐 아니라 온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했으나 (사49: 6) 유대인들은 이 부분에는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오직 자기들만을 구원하러 오셨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가는 복음서를 기록하며 예수님께서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주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했다. 12월 28일 아기 예수를 찾아온 동방박사들 (마태복음 2:1-8) 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5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7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동방에서 온 박사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오실 메시야가 자신들을 로마제국의 탄압으로부터 구해 줄 정치적 해방자일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동방박사들에게 메시아 탄생소식을 들은 헤롯 왕은 탄생한 메시아가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지 못하게 하려고 베들레헴 지경에서 태어난 모든 어린 남자아기를 죽이라는 잔인한 명령을 내렸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이들이 정확히 어디서 왔는지, 어느 나라 사람이었는지도 알 수 없다. 전승에 의하면 그들은 매우 박식했고, 고대 바벨론 지역의 인근에 위치한 파르티아 사람(고대 이란지방에 살았던 유목민)이라고도 하며,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인의 후손들이라고도 한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이 점성술사들이 각각 다른 나라에서 왔고, 그러므로 온 세계를 대표하여 예수님께 무릎을 꿇어 경배하였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조차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그 당시에 이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것을 인정하고 찾아가 경배하였다. 동방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아기를 보기 위해 수천 킬로미터의 먼 길을 여행하였다. 마침내 아기 예수 보았을 때 그들은 기쁨으로 경배를 드리고 귀한 선물을 드렸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들과 얼마나 다르게 반응하고 있는가. 세상은 헤롯 왕처럼 메시야를 배척하지만 우리는 구세주로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 메시아를 전심으로 찾아가자. 그분을 만나 메시아를 만난 기쁨으로 경배하고, 동방에서 온 박사들처럼 우리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을 그분께 기꺼이 드리자! 12월 29일 동방박사들의 선물 (마태복음 2:9-12) 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10 그들이 별을 보고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12 그들이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진실한 경배 동방박사들을 인도한 별을 따라가 아기 예수를 만나게 되었을 때 그들은 ‘큰 기쁨으로 매우 기뻐하였다’. 인류를 구원하실 그리스도를 찾게 된 것에 대한 감격스러운 기쁨이었다. 이러한 기쁨은 오늘날 세상에서 방황하다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모든 이들이 누리는 기쁨이기도 하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께 가장 먼저 나아와 경배 드린 이방인들이었다. 이들은 자기보다 높은 사람이나 왕께 경배할 때 예물을 드리는 고대 풍습에 따라 장차 왕이 되실 분에게 귀중한 세 가지 선물을 드렸다. 이 선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그 분이 장차 이루게 될 사역을 상징한다. 황금은 매우 귀하고 불변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나타낸다. 유향은 향기로운 향품으로 그 당시 신들에게 바쳐지는 것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몰약은 의약품으로, 혹은 방부제로 시신을 처리할 때 사용되었고, 예수님의 수난과 대속의 죽음을 의미한다. 동방박사들은 이러한 의미를 가진 선물들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경배하였다. 이들은 예수님께 경배한 후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다른 길로 고국으로 돌아갔다. 모든 일을 세심하게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예수님을 만난 자의 삶의 길은 이전과는 달라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완전하시고, 정의로우시며 전능하신 우주의 창조주 하나님께 우리도 진실한 경배를 드리자. 하나님은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것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12월 30일 애굽으로 피신한 예수님 가족 (마태복음 2:13-23) 13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 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 19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20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 22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23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 돌아간 후 헤롯 왕은 자신의 왕좌를 지키기 위해 베들레헴과 그 인근 지역의 모든 어린 아기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하지만 ‘왕으로 나신’ 아기 예수를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은 요셉에게 사자를 보내어 애굽으로 피신할 것을 지시하였다. 요셉은 하나님으로부터 두 번의 계시를 받았다. 첫 번째는 마리아가 잉태한 아기가 메시아가 되리라는 것을 밝혀 주었다. 두 번째 계시는 아기의 삶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요셉으로 하여금 명확하게 알게 하였다. 비록 요셉은 예수님의 육신적 부친은 아니었지만 예수님의 안전과 성장을 책임져야 할 법적 의무를 가진 부친이었다. 요셉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마음이 열려 있었고, 하나님을 신뢰하였으므로 즉시 순종하여 아기와 아내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하였다. 애굽에서의 이들의 생활은 결코 순탄치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때로 희생을 지불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자 할 때 충분한 준비기간과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할 때 그로 인해 안락한 삶을 보장받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들도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믿는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기 위해 우리의 마음이 요셉과 같이 하나님을 향하여 열려있는지 점검해보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을 때 기꺼이 그것을 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자신의 믿음을 살펴보자. 12월 31일 예수님의 어린 시절 (누가복음 2:40-52) 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41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43 그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 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 듣는 자가 다 그의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48 그의 부모가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어린 예수의 자의식 율법에 의하면 유대 남자들은 매년 세 번씩 절기(유월절, 오순절, 초막절)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야 했다. 마리아와 요셉도 어린 예수를 데리고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중 어린 예수를 잃어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예수님의 부모는 아들을 잃어버린 지 사흘이 되던 날 예루살렘 성전에서 선생들과 토론하고 있는 아들을 발견하였다. 예수님은 어린 시절부터 이미 메시야로서의 자신의 신분을 자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예수님의 부모가 예수를 찾으러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왔을 때 선생들과 토론하는 모습에서 나타난다. 예수님의 지혜는 당대의 뛰어난 학자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뛰어났는데, 이것은 인간의 선천적인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신적인 능력이다. 둘째, 어머니 마리아가 왜 부모를 따라 오지 않고 찾도록 만들었느냐고 책망할 때에 자신이 ‘아버지의 집’ 즉 성전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예수님의 대답에서도 나타난다. 예수님은 메시야로서의 자의식이 있었을 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육체적, 지적, 도덕적, 영적으로 조화를 이루며 온전한 인격으로 성장하셨다. 그 모습을 누가는 ‘지혜와 키가 자라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살아가는 우리도 신앙적으로 주님 앞에서 믿음의 도리를 다할 뿐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인간의 도리를 바르게 감당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사랑스러운’ 존재, 신뢰할만한 책임적 존재로 살아갈 것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오늘 새롭게 결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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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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